발칸의 전설 대산세계문학총서 49
요르단 욥코프 지음, 신윤곤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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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생소한 작가의 작품이지만, 작품 해설에 따르면 불가리아의 성서라고 일컬어진다. 모두 10편으로 이루어진 단편집인데, 작가가 각 편의 배치 순서까지 지정할 정도로 전체로서의 유기적 구성 효과를 의도하고 있다. 수록된 단편들은 불가리아 민간전승에 기원을 둔 제재에서 출발하고 있으므로 작가도 표제를 당당히 발칸의 전설로 명명하였으리라. 각 편의 본문 시작 전에 민요, 이야기, 연대기 내용 등을 몇 줄 인용하여 작품과 해당 전승과의 연관성을 드러내어 독특하다.

 

불가리아는 500년에 걸쳐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비록 1920년대에 출간되었지만 수록된 작품들은 오스만 지배 아래 신음하던 때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자주권을 상실한 채 피지배 계급으로 전락한 불가리아인들, 위세 당당하게 권력을 휘두르는 술탄 등의 오스만 지배층, 가난과 억압에 반항하여 산으로 숨어든 산적 또는 비적들이 등장하여 애환과 갈등과 대립 관계를 형성하여 다채로운 층위를 보여준다.

 

인제를 향한 구디 영감의 말마따나 평범한 불가리아 농민들은 양 같은 그저 그런 사람들”(P.124, <인제>)이다. 그들은 별다른 욕심이 없다. 평안한 일상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주길 바랄 뿐이다. 현실은 녹록지 않다. 산적들은 무슬림뿐만 아니라 동포들도 무참하게 살육하며(<인제>), 가뜩이나 어려운데 흑사병이 마을을 휩쓴다(<흑사병이 돌 적에>). 독립을 향한 열망은 참혹한 대가로 다가온다(<젊은이들의 머리>).

 

평범한 사랑마저도 그네들에겐 힘겹다. 작중에서 유일하게 스테판이 도이나와 사랑의 결합을 이룰 뿐(<암사슴>) 모두가 사랑의 쓰라림을 겪는다. 사랑을 쟁취하기 위하여 싸우다 죽고(<가장 믿음직한 경호원>), 질투와 배신감에 이성을 잃어 죽이고(<포스톨의 두 방앗간>), 연인의 죽음에 절망하여 목숨을 끊는다(<보주라>). 그뿐이랴, 사랑의 상처를 입은 양치기는 하이두틴이 되어 숲속에서 슬픈 피리를 불며(<양치기의 비애>), 산을 버리고 사랑을 구한 산적은 사랑의 눈앞에서 죽음과 맞닥뜨린다(<시빌>). 늙은 영웅 크라이날리야는 옛적 연인을 잃었던 달맞이꽃 고원을 찾아가 행복한 죽음을 맞는다(<달맞이꽃 고원>).

 

당대 현실이 어려울 때 작가는 과거로 회귀한다. 욥코프도 마찬가지다. 열강의 도움으로 독립을 획득했으나 주변국과 잇따른 전쟁에서 패배하고, 1차 세계대전에서도 패전국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내홍에 휘말린 불가리아인들. 그들에게 자신들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회복하고 민족적 화합을 기대하며, 국가와 민족의 거창한 이름 아래 무시되었던 개인과 감정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발견하고자 했던 것이리라. 그것을 작가는 발칸의 전설에서 끌어왔다. 발칸이 불가리아인들에게 갖는 감성은 남달랐던 모양이다. 마치 우리네에 있어 백두산이 갖는 상징성과 유사하지 않았을까.

 

루시 영감은 발칸을 쳐다보았다.

여느 때보다 더 웅장하고, 더 높고, 더 뾰족하고, 더 장엄해 보이는 발칸은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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횃불을 든 사람들 시공 청소년 문학 24
로즈마리 서트클리프 지음, 공경희 옮김 / 시공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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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드리아누스 장벽을 세우는 등 사백여 년에 걸쳐 브리튼을 강력하게 지배하였던 로마 제국이 철수한다. 이제 브리튼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다툼이 원주민 켈트족과 스코트족, 잔존한 로마인들 간에 전개되는데, 북해 건너 앵글로색슨으로 대변되는 게르만족도 풍요한 지역을 찾아 브리튼에 거점을 구축한다.

 

주인공 아퀼라는 철수하는 로마 군대를 따라가지 않는다. 그는 로마인이지만 브리튼은 그가 나고 자란 고향이자 가족이 있는 자신의 땅이다. 잔류의 대가는 혹독하여 온 가족을 잃고 그는 색슨족의 노예가 된다.

 

이 작품은 5세기 브리튼의 역사를 배경으로 보티건 왕과 색슨족 헹기스트의 동맹과 배신, 로만 브리튼의 암브로시우스 간 전쟁을 다루고 있다. 헹기스트의 딸이 보티건 왕과 결혼하자 전처의 아들들은 자신의 일파를 거느리고 암브로시우스에게 합류한다. 아퀼라도 우여곡절 끝에 암브로시우스의 수하로 들어가 동반자들의 일원으로 색슨족을 물리치기 위한 기나긴 투쟁에 동참한다. 역사적으로도 작품 내에서도 로마인들의 고토 회복은 성공하지 못한다. 오히려 실제 역사는 색슨족의 브리튼 통일로 귀결된다. 암브로시우스는 켈트족을 견제하며 색슨족을 물리치고 로마를 다시 일으키려는 로마 세력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훗날 아서왕 전설의 근원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로만 브리튼 아퀼라에게 색슨족은 자신들을 침략한 용서할 수 없고 영토 밖으로 내쫓아야 할 외적에 불과하다. 원주민 켈트족의 시각에서 보자면 로마 제국은 아퀼라에게 있어 색슨족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색슨족의 입장에서 그들이 본거지를 떠나온 이유는 자명하다. 이 작품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그들의 이주는 절실한 부족 생존의 차원이다. 브리튼에 정착하지 못하면 그들의 앞에는 오직 멸족만이 남을 뿐이다. 적대시하던 켈트족과 스코트족이 손잡고 색슨족과 연합하여 암브로시우스와 운명을 가를 일대 회전을 벌인 것은 아퀼라 일행에게 당혹스러운 일이지만 그들로서는 자신의 최대 적은 로마인들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자신과 함께 색슨족을 탈출하길 거부한 누이 플라비아에게 느낀 생소함과 씁쓸함은 아들 송사리와 함께 잔류하는 네스를 보며 비로소 사그라진다. 그네들로서는 어쨌든 부족을 배반하더라도 자신의 남편과 아이가 있는 곳을 떠날 수 없었다. 무자비하고 냉혹하지만 역사 속 개인의 삶은 이렇게 굴러간다. 그러기에 적으로 마주친 누이의 아들을 위험을 무릅쓰고 돌려보낸 아퀼라의 선택 또한 불가피하였다.

 

커다란 희생을 무릅쓰고 암브로시우스가 승리를 거두고 켈트족과 색슨족의 수장이 목숨을 잃었지만 결코 전쟁의 끝을 뜻하지 않는다. 로마 제국은 야만족에 의해 스러지고 있고, 모국의 원조가 없는 로만 브리튼은 서서히 지는 해에 불과하다. 루투피아에의 불은 어둠에 저항하는 불인 동시에 세상 모든 것과의 작별 인사이다. 횃불이 꺼지기 전까지 아퀼라는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짙은 어둠을 헤치고 걸어갈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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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전 Z 밀리언셀러 클럽 84
맥스 브룩스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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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백 면을 넘는 두툼한 책이다. 비교적 근래의 좀비 소설로 영화 <월드워 Z>의 원작으로 우리에게 더 친숙하다. Z는 좀비를 의미하며, 표제는 좀비 세계대전을 지칭한다. 좀비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확산하여 모든 국가가 좀비와 명운을 건 사투를 벌이게 되는 상황을 제재로 삼고 있다. 말미에 러시아와 중국의 장래에 대해서는 다소간 이념적 편향도 개입하고 있으므로 이 점만 염두에 둔다면 비교적 흥미로운 독서가 가능하다.

 

무대가 세계 전역이니만큼 일반적 소설 서사구조로는 표현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작가는 인터뷰 형식을 택하였다. 세계대전이 거의 종료된 이후 각국의 주요 정부 관계자와 일선 군인 등을 찾아가서 그들이 맞닥뜨린 상황에 대한 인식과 헤쳐나가기 위한 노력 등을 가감 없이 생생하게 들려주고 있다. 이를 통해 좀비 전쟁은 단순한 허구의 차원을 넘어 실증적 의의를 지니는 존재로 격상되고 우연한 발발이 아닌 필연적 원인에 기인한 것임을 독자들이 납득하게끔 한다. 따라서 그 흡인력은 만만치 않다.

 

작중에서 최초의 환자는 중국에서 발생한다. 현실 세계의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의 발원지도 중국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혹은 필연의 반복일까. 수년 전 유행했던 사스 또한 중국에서 나왔다. 중세 유럽을 황폐화한 흑사병도 중국발이다. 이른바 땅덩어리가 넓고 기후도 다양하며 인구도 많은 곳이다 보니 병원균의 변종 가능성이 큰 듯하다.

 

대개 그러하듯 좀비 바이러스의 발병 원인은 불명확하다. 어쨌든 환자가 생겼고 점차 전파 속도가 빨라져 마침내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 치닫는다. 작가는 여기에 장기 매매를 결부시켜 동떨어진 이역만리로 퍼져나가는 자연스러운 전개 수순을 밟는다. 세상은 일대 혼란에 빠진다. 발병 사태를 은폐하려는 정부, 사람들의 심리적 공황을 이용하여 위약으로 한몫 챙기는 사람들.

 

이스라엘은 신속한 정보 획득으로 국경에 거대한 장벽을 건설한다. 이란과 파키스탄은 핵전쟁을 불사한다. 용커스 전투에서 멋들어진 좀비 섬멸전을 시연하려던 미국은 오히려 국토의 절반 이상을 상실하고 캘리포니아 지역으로 쪼그라들었다. 좀비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오직 생존자의 신선한 피를 갈구하며 끊임없이 몰려들 뿐이다.

 

남극기지에서 시베리아 동토까지 유럽과 미국에서 제3세계까지 넘나들면서 지위의 고하, 역할의 대소와 관계없이 다양한 인물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저 흥미진진한 전쟁 모험담이 아니다. 생존을 위해 인육을 먹을 수밖에 없는 처절함이 배어 있다. 감염된 동료를 쏘아야만 하는 눈물겨움이 있다. 가능성 큰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나머지 사람들을 죽음의 위협에 방치해야 하는 비인도적 선택이 불가피하다. 공포에 사로잡혀 스스로 유사 좀비의 길을 좇는 야만성도 낯설지 않다. 작가는 인간 군상들이 전대미문의 상황에서 보여주는 온갖 행태의 양상을 남김없이 노출한다. 그것도 매우 적나라하게.

 

그나마 원작의 좀비는 아직 원시적이다. 빠르지도 않고 사고력도 없다. 숫자가 많기에 대적하는데 힘겹지만 어쨌든 서서히 퇴치가 가능하다. 영화 속 좀비였다면 인류는 일찌감치 멸종하고도 남았으리라. 어쨌든 좀비를 물리쳤으니 다시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기대한다면 지나치게 순진한 발상이리라. 좀비 전쟁을 치르면서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다. 인명과 재화의 손실, 사회 문화적 가치관의 전도, 국가 이념의 붕괴와 변질 등 인간 사회뿐만 아니라 자연도 황폐화되었으니 복구는 요원하리라.

 

나는 홀로코스트에는 생존자가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엄밀히 말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조차 치료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과 영혼이 망가져서, 예전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겁니다. 그 말이 진실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게 만약 진실이라면, 이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지구 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P.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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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설이다 밀리언셀러 클럽 18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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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품>

장편 : 나는 전설이다

단편 : 던지기 놀이, 아내의 장례식, 죽음의 사냥꾼, 마녀의 전쟁, 루피 댄스, 엄마의 방, 매드 하우스, 장례식, 어둠의 주술, 전화벨 소리

 

좀비는 어느덧 우리에게 친숙한 존재가 되었다. 작가가 변종 바이러스로 인한 시체의 부활 및 흡혈귀라는 컨셉으로 1954년 이 작품을 썼을 때 본인은 이것이 향후 대중문화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을 거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로버트 네빌은 결말부에서 자신이 전설이 되었음을 외치지만 이 작품 또한 전설로 자리매김하였다.

 

로버트 네빌이 겪는 괴로움의 근저는 철저한 외로움이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가운데 세상에 정상적인 인간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그를 충동적인 절망감에 빠지게 한다. 작품 전반부에 반복되는 자학적 행동과 독백은 그만큼 그의 고독이 깊고 버티기에는 힘겨움을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우연한 개의 발견에 그토록 열광하고 친구가 되고자 눈물겨운 사투를 벌이는 장면이 우스꽝스럽지 않고 처절한 공감을 주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벤 코트만. 네빌의 직장 동료였던 그는 호시탐탐 네빌의 피를 노리는 흡혈귀들의 대표격이다. 작중에서 그는 네빌의 호적수다. 주인공의 계속된 수색을 교묘히 피해가면서 그는 끊임없이 네빌의 집 주변을 배회한다. 한번은 아슬아슬한 육탄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가 네빌의 손이 아니라 돌연변이 종족에 의해 무참히 살육당하는 장면에서 독자는 네빌의 동정 어린 심경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더욱 대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인데.

 

문득 자신이야말로 비정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이란 다수의 개념이자 다수를 위한 개념이다. 단 하나의 존재를 위한 개념이 될 수는 없다. (P.221)

 

루스와 그의 종족. 네빌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들은 분명 비정상이고 생사를 불문하고 흡혈귀일 따름이다. 신 인류라 자칭하는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자신들은 죽은 존재가 아니고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뿐이다. 그들에게 네빌은 누군가. 구 인류의 마지막 유물. 자신의 동족을 무참히 살해한 원수. 그는 죽어 마땅하다. 그들에게 네빌은 비정상적 존재에 불과하므로. 이제 네빌은 멸종한 구 인류의 전설로서 신 인류에게 회자될 것이다.

 

매드슨의 이 작품이 충격적인 것은 제재의 의외성과 선동성뿐만 아니라 결말의 비극성에 있다. 좀비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상투적인 승리담이 아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상황과 한계를 절감하고 기쁘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그 철저한 비극적 장엄함이란!

 

같이 수록된 10편의 단편들은 작가가 지속적으로 공포, 스릴러 장르에 관심을 기울였음을 입증한다. <죽음의 사냥꾼>은 저주받은 원시 부족의 인형과 여주인공의 쫓고 쫓기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아멜리아가 간신히 인형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 순간 주술에 사로잡혔음을 독자는 마지막 대목에 비로소 알게 된다. 주인공의 일상적 분노가 축적되어 집이 사악한 기운에 오염되고 만다는 설정, 그리하여 집안 물건들이 합심하여 주인공을 죽인다는 <매드 하우스>는 그다지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어둠의 주술>은 줄루족의 주술에 걸린 남자를 구하기 위해 주술을 푸는 또 다른 주술 의식을 거행하는 장면에서 서양인들의 시각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비의적 요소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을 엿볼 수 있다. 악마가 잠재의식을 통해 주인공의 의식에 침투하여 마침내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린다는 <전화벨 소리>도 흥미롭기는 마찬가지다.

 

그의 작품들은 모두 일상적 공포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무심히 넘기는 일상의 삶 속에서 통제할 수 없고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발생할 때 우리는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다. 공포가 묘한 관음증적 호기심을 동반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면서 슬며시 손가락 사이로 훔쳐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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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와 검의 노래 레인보우 북클럽 20
로즈마리 서트클리프 지음, 이병렬 옮김, 표정수 그림 / 을파소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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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트클리프의 작품을 내처 읽는다. 솔직히 이 작품이 아동도서로 분류될 성격의 것인지 의심스럽다, 비록 12세 이상 권장 연령이지만. 서사 구조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 다만 11세기 잉글랜드의 컴벌랜드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역사적, 지역적 친연성이 우리와는 전혀 동떨어져 있는 데서 생소함과 이질감을 안겨준다. 생경하기 그지없는 호수 지역의 인명과 지명은 성인인 내게도 적응하기 어려운 데 과연 어린 독자에게 쉽게 다가올지 모르겠다.

 

작품의 주된 축은 호수 지역을 둘러싼 스칸디나비아인들과 노르만족의 대립에 있다. 원주민 바이킹족과 신흥 노르만족의 영토 점령 전투가 작품 내내 처절하게 전개된다. 후대의 시각에는 양자가 동일한 바이킹족으로 분류되지만 여기서 그네들에게 동족 의식은 찾아볼 길 없다. 동족이라고 하기엔 이미 수백 년 전에 갈래가 흩어져 나갔기에 남과 다를 바 없으리라. 더구나 동족 간에도 무수한 살상이 벌어지는 마당에. 혈연적, 문화적 유대에 호소하기에는 목전의 이해관계가 너무나 중요함을 우리는 역사적 체험으로 뼈저리게 학습하였다.

 

주인공 비요른은 천부적으로 하프 연주에 소질을 보인다. 색슨족에 속하는 그는 시대가 허락했다면 음유 시인으로서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당시 호수 지역의 스칸디나비아인들은 전사를 필요로 하였다. 압도적 다수의 적과 맞서 물러남이 없는 강력한 사수대. 노르만족에 평화 협상단으로 간 아리 크누드손 일행은 참혹한 시신으로 돌아왔고, 어린 비요른은 두려움에 떤다. 스스로 그런 고문에 의연함을 유지하며 당당한 죽음을 감내할 전사로서의 자신을 확신하지 못한다. 이것이 에를란드가 그를 비겁하다고 비웃고 얕잡아 보는 계기가 되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난세의 영웅이 될 수 있을 것처럼 호언장담한다. 그들에게는 어떠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도 무용지물이며 말 한마디, 행동 하나로 세상을 압도할 수 있다고 떠벌린다. 그들의 진면목은 현실적 위기와 고통이 눈앞에 닥쳤을 때 비로소 드러난다.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하고 구석에서 머리를 감싸며 행여 털끝 하나 다칠까 전전긍긍한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나름대로의 이겼다는 표정이 어렴풋이 어렸다.

입을 열지 않을 거야.” (P.270)

 

비요른도 자신을 믿지 못하였을 것이다. 누구나 그렇다, 눈앞에 닥치기까지는. 고통의 순간, 그가 이를 악물고 버텨냈던 것은 자신의 한마디로 가족과 친구, 동족이 몰살당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지키고자 하는 바람이 두려움과 고통을 극복하였다.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상처를 남긴다. 인명과 재산 같은 물질적 피해뿐만 아니라 정신적 외상조차도 승자를 비껴가지 않는다. 비요른은 새로운 시작의 노래를 짓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전과 똑같지는 않을 거야.” (P.331)

우리가 알던 유일한 삶은 끝나게 될 거야.” (P.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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