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와일드와 마시는 한 잔의 커피 - 명사와 함께하는 커피 5
매를린 홀랜드 지음, 김혜은 옮김 / 라이프맵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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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를 정리하다가 찾아낸 책이다. 내가 구매하거나 받은 것은 분명 아니므로 아마도 아내의 책일 것이다. 정말 작다, 판형을 논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손바닥만 한 크기. 알라딘 서점을 검색해보니 ‘OOO와 마시는 한 잔의 커피라는 제목으로 20권까지 시리즈가 나온 듯 한데 현재는 모두 절판이다.

 

이 책은 오스카 와일드의 삶과 문학을 소개하고 있는데, 구성면에서 독특하다. 먼저 간략하게 그의 일생에 대하여 기술한 후 저자와 오스카 와일드가 파리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를 하는 형식을 사용한다. 와일드의 발언은 저자가 임의로 꾸며낸 게 아니라 서문에 따르면 그의 작품과 편지 등에서 인용하여 거의 그대로 가져왔다고 한다. 전혀 어색한 느낌이 들지 않도록 한 저자의 수고가 대단하다. 이 책의 저자인 메를린 홀랜드는 그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오스카 와일드의 아내가 연루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씨를 바꿨던 때문이라고 하니 이 사건의 여파가 그와 가족들에 미친 여파가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오스카 와일드의 인생은 불꽃놀이와 같았다. (P.15)

 

그의 인생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위와 같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명성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다가 서서히 유명세를 얻고 마침내 절정의 순간에 오르던 찰나에 한순간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는 명예를 회복하지 못한 채 쓸쓸히 생을 마감하였다.

 

우리가 아는 오스카 와일드는 심미주의 또는 예술지상주의의 대변자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 너무나도 멋지고 가슴 설레는 구호가 아닐 수 없다. 그가 심미주의를 주창하고 나선 연유가 전적으로 유명세를 얻기 위한 불순한 의도에 불과하지는 않다고 본다. 비록 상당 부분 그러한 목적도 있다고 하지만.

 

(심미주의는) 근본적으로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 자체를 위한 예술활동을 말합니다......우리는 다만 사회의 추악함과 물질주의에 저항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P.49)

 

저는 비현실적이고 아름다운 것들을 표현하는 예술로 돌아가기를 바랐습니다......이 작품(<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은 인간의 관능을 찬양합니다. (P.67)

 

산업주의와 자본주의가 절정기에 접어들면서 사회는 물론 예술에서도 현실을 묘사하는 사실주의적 작풍이 주류가 되었다. 오스카 와일드는 예술의 독자성 내지 자율성을 주창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세속의 통속적 편견과 사회의 기율에 속박당하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로서.

 

동성애와 그로 인한 감옥생활을 빼놓고 그의 삶을 논할 수 없다. 그의 심미주의는 세기말 풍조에 기반한 것이기에 도덕적으로 퇴폐풍조에 빠질 우려가 있었다. 게다가 저자가 지적한 대로 가면을 쓴 그의 이중적 면모는 선천적 성격과 동성애로 시작된 후천적 경험이 결합된 결과로서 삶뿐만 아니라 작품에서도 드러난다고 한다.

 

그의 이중성은 여전히 매력적이며 인생이나 작품이나 똑같이 모순투성이라 혼란스럽다. 한마디로 어디까지가 설정이고 어디까지가 작가의 진면목인지 알 수가 없다. (P.27)

 

그의 작품은 빛나는 에피그램의 포장 아래 자포자기와 불법행위, 위장과 이중생활이라는 불편한 주제들을 감추고 있다. (P.23)

 

오늘날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내세울만한 사실은 아니지만 과거처럼 인륜의 죄악으로 간주되지도 않는다. 지금의 관점으로 오스카 와일드를 변호한다면 시대를 잘못 만난 죄로 동정 받아 마땅하다. 반면 당대의 실정법을 중시한다면 어떻든 시대의 윤리와 도덕을 위반한 점은 사실이므로 그의 유죄 또한 변함없다. 어쨌든 그가 유죄판결을 하고 감옥생활을 한 이후 그의 화려한 경력은 스러지고 가족 또한 풍비박산 되었다.

 

저는 희생양이었습니다. 영국에서는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살로메>도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데카당스를 상징하는 저 또한 영국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가 상징하는 가식과 위선을 향해 계속해서 도전장을 던진 저는 영국사회의 반항아이자 위험인물이었으니까요. (P.103)

 

그의 주장처럼 그는 희생양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유명해지고 싶다는 자신의 소망을 이룬 셈이다. 개인적으로 오스카 와일드는 선호 작가가 아니다. 어렴풋이 <행복한 왕자> 정도만 읽은 기억이 남아있다. 내게는 명성만이 자자한 작가에 지나지 않는다. 화려한 언변과 유머로 이름을 얻었을 뿐 실제 작품성은 수준 높지 않을 거라는 선입관이 잠재되어 있고, 또한 <옥중기><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으로 대표되는 작품세계가 취향에 호소하지 못하며, 마지막으로 동성애자로서 수감생활을 하였다는 작가 개인사가 마뜩치 않아서이다.

 

이 책 덕분에 조금이나마 오스카 와일드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본격적으로 오스카 와일드에 다가서지 못한 나로서는 그의 명성이 개인사의 에피소드에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순전히 문학적 성취에 근거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차후 시간되는 대로 그의 작품을 찬찬히 읽어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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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가장자리 레이첼 카슨 전집 3
레이첼 카슨 지음, 김홍옥 옮김 / 에코리브르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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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 카슨 전집의 셋째 권이자 이른바 바다3부작의 마지막 편에 해당한다. 수 허벨(누구?)의 서문에 따르면 카슨은 당초 해안 동식물 안내서로 이 책을 구상하였다. 비록 중도에 집필 계획을 변경하였지만 그래서인지 다른 저작에 비해 이 책은 가이드북 성격이 짙다. 카슨이 바다시리즈로 이 책을 쓴 것은 필연적이라고 생각한다. 앞선 저작이 바다의 생물학과 지리학에 관한 것이라고 할 때, 바다의 일부이자 육지와의 접점인 해안을 빠뜨린다면 무언가 허전하였으리라. 우리들 대다수가 실제 바다를 접할 수 있는 곳이자 상대적으로 익숙한 바다의 장면은 바로 해안에 있다.

 

해안은 장구한 세계다. 육지와 바다가 존재해온 시기만큼 육지와 바다가 만나는 지점인 이곳 해안도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안은 끊임없는 창조와 끈질긴 삶의 본능에 관한 감각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세계이기도 하다. 해안에 들어설 때마다 나는 하나의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의 관련성 속에서 생명이라는 복잡한 옷감을 직조한다는 사실을 느끼고, 그 아름다움과 참다운 의미를 새삼스레 깨닫곤 한다. (P.26~27)

 

이 책에서 다루는 해안은 미국 동부의 해안지대다. 카슨의 말마따나 미국 동부의 대서양에 임한 해안은 암석 해안, 모래 해안, 그리고 산호 해안이 순차적으로 이어져 해안의 특성에 따른 해안 동식물의 다양한 생태를 비교 관찰할 수 있는 드문 곳이다. 해안의 유형에 따라 생물의 종이 다를 수 있음은 충분히 짐작할 만하지만, 이 책의 미덕은 조간대, 즉 저조선에서 고조선에 이르기까지 분포하는 해조류와 이들에 의지하면 살아가는 온갖 동물들을 하나하나 친절하게 소개해 준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훌륭한 삽화도 풍부하게 수록하고 있어 설명하고 있는 생물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 인터넷을 통해 대부분의 컬러사진을 확인할 수 있는 현재에 비하면 1955년 당시로서는 커다란 노력을 기울인 셈이다.

 

카슨은 이 책에서 시종일관 라는 일인칭 화자를 내세운다. 덕분에 건조한 안내서가 아닌 에세이적 느낌을 책에 불어넣고 있다. 앞선 첫 번째 책을 흥미진진하게 감상하고 두 번째 책을 유익하게 읽은 나로서는 상대적으로 이 세 번째 책은 독파하기가 녹록치 않았다. 저자가 비록 내용 전개에 스토리를 불어넣으려고 애쓰지만 안내서 느낌을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하였다는 생각이다. 또한 전 세계 바다를 종횡무진 하던 이전의 저작에 비해 미국 동부 해안이라는 제한된 지역을 다루고 있어 수만 리 떨어진 나로서는 실감과 동감이 상대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는 한계도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의 산호 해안 편을 읽으면서 플로리다키스라는 곳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시종 뇌리를 떠나지 않았으니 카슨의 노력이 소기의 성과를 거둔 셈이다.

 

작은 만을 굽어보는 동안 나는 해안이라는 이 가장자리 세계에서 육지와 바다가 서로 소통하고 있으며, 바다 생명체와 육지 생명체가 서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과거를, 그리고 그날 아침 바닷물이 새의 발자취를 말끔히 씻어낸 것처럼 전에 이뤄진 많은 것을 지우면서 시간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P.32)

 

저자는 해안 생태계를 소통과 리듬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바다의 가장자리는 동시에 육지의 가장자리이기도 하다. 해안을 통해서 바다와 육지의 광물은 물론 생물도 상호 교류하며 영향을 주고받는다. 해안을 구성하는 암석, 모래 및 산호는 모두 지질작용을 통해 바다와 육지가 오랜 세월 교차하며 생성한 산물이다. 조간대의 생물도 마찬가지다. 바다와 육지 중 한곳에 생의 비중을 더 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들은 바다와 육지의 존재 모두를 필요로 한다.

 

해안 생물은 부지런해야 한다. 해조류는 조수가 빠지면 바닥에 널브러져 죽은 듯이 보이지만 조수가 들어오면 불현 듯 생명력을 되찾고 거대한 줄기와 잎들을 한껏 뻗친다. 반면 고둥과 게를 비롯한 많은 동물은 밀물의 시기에는 주거지에 칩거하다가 썰물이 시작되면 서둘러 나와서 먹이활동에 주력해야 한다. 이 모든 행동은 밀물과 썰물의 주기에 전적으로 맞추어져 있다.

 

조수가 빠져나가면 조간대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동물은 먹이가 거의 혹은 전혀 없다. 실제로 생명을 지키는 중요한 과정은 대개 바닷물이 해안에 들어차 있을 때 이루어진다. 따라서 밀물과 썰물이 만들어내는 리듬은 활동과 휴식을 번갈아 반복하는 생명체의 생물학적 리듬에 반영된다. (P.58)

 

하지만 이 해저 숲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빛과 어둠의 교차에 의해서보다는 조수의 리듬에 의해서 더 잘 드러난다. 여기서 살아가는 생명체의 삶은 바닷물의 유무에 좌우된다. 말하자면 이들의 삶에 변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날이 어두워지거나 밝아오는 현상이 아니라 바로 조수의 순환인 것이다. (P.113)

 

카슨은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해안의 모습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형 상으로 접근하기 어려워 사람의 발자취가 닿지 못하는 곳, 사람들이 굳이 관심을 갖지 않고 무심히 지나쳐 버리는 곳 속에서 발견하는 감동과 경이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한다. 엎드려서 작은 틈을 통해 해안 동굴의 내부의 빛과 물의 조화, 나름의 안정된 생태계를 들여다보려고 애쓰는 카슨. 쪼그려 앉은 채로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조수 웅덩이의 신비한 세계에 마냥 경탄하는 카슨. 여기서 독자는 자연과 생물을 향한 저자의 근원적인 사랑을 간접적이나마 체험하게 된다.

 

저자가 소개하는 수많은 생물체를 한 번에 조감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먼저 해안의 유형에 따라 만날 수 있는 생물종이 동일하지 않다. 게다가 그들 대다수는 일반 사람들의 시야에 미치지 않는 곳에 서식한다. 다행히 사람들 근처에 존재하는 경우도 그들은 사람들이 활동하는 시간대에는 바위 틈바구니나 모래 깊숙이 은거하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바닷가에서 맞닥뜨리는 작은 게들의 날쌘 움직임, 그리고 개펄에 숭숭 뚫린 작은 구멍들의 존재로 우리는 어렴풋한 일면만을 이해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상당수의 생물은 매우 미약하여 육안의 인식 범위에 들어오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 말은 카슨의 이 책 또는 다른 도감류를 손에 들고 해안가를 돌아다녀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저자가 미국 대서양 해안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쭉 훑어가면서 해안의 지리와 생물을 소개하는데 매진하는 연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맺음말에서 저자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내 마음의 눈에는 해안의 여러 형태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패턴 속에서 통합되고 뒤섞이는 광경이 보이는 듯하다. 지구는 바다 자체처럼 쉼 없이 변화하고 있다......바다가 새로운 해안을 만들 때마다 생명체는 거기에 몰려들어 근거지를 마련하고 군체를 형성한다. 이렇듯 우리는 생명을 바다의 물리적 실재처럼 마치 손에 잡힐 듯한 힘으로 느낄 수 있다. 밀물이 그렇듯 결코 제 본분을 잊은 적이 없을 만큼 강력하고도 목적의식적인 힘으로서 말이다. (P.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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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트란토 성 환상문학전집 2
호레이스 월폴 지음, 하태환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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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4년에 출판된 괴기 소설의 효시다. 이 작품으로 호레이스 월폴은 공포 소설의 선구자라는 명예를 걸머쥐게 된다. 괴기 소설, 공포 소설, 그리고 고딕 소설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는 이 문학의 본질은 환상에 있다. 오늘날 환상 문학은 문학 장르를 넘어 애니메이션, 영화를 통해 이미 주류에 진입하였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비주류의 B급으로 치부되었는데 말이다.

 

<오트란토 성>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단지 시대적 선행이 아니라 작가가 서문에서 밝힌 명확한 문제의식과 목적의식에 있다.

 

기적, 유령, 마술, , 그리고 다른 초자연적 현상들은 현재 소설로부터 추방당했다. 그렇지만 이 작품의 작가가 글을 쓰던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서문>, P.18)

 

상상적 허구는 항상 있어왔지만, 공상에서 솟아나는 강력한 원동력은 소설이 일상적인 사건들에 엄격히 종속되면서 소설로부터 추방되었다. (<재판 서문>, P.10)

 

고딕풍의 장중한 성은 내부에 무수한 미로와 지하실 등 어둠침침한 영역이 도사려있다. 중세 기사도의 예법과 로맨스는 비록 퇴색했음에도 영광의 자취를 여전히 드리운다. 기독교가 절대 신앙으로서 위상을 공고히 하는 가운데, 미신과 이적(異蹟)은 종교와 이성의 틈을 파고들어 지워지지 않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여기에 어둠과 밤이 가세하면 괴기와 공포가 대체로 완성된다. 백주 대낮을 배경으로 하는 환상 문학은 공감대를 얻기 힘들다. 이성과 인지로 해결이 불가능할 때 사람은 두려움을 느끼고 의지할 무언가를 찾게 마련이다.

 

성의 하단부는 어두운 회랑들로 이뤄진 미로였기 때문에 그토록 고뇌에 찬 사람이 지하 동굴로 이르는 문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간간이 불어닥치는 돌풍 소리만이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어두운 미로 속에서 메아리로 울리면서 지하 통로의 무시무시한 침묵을 끊곤 했다. (P.41)

 

TV 막장드라마의 필수요소가 있다고 한다. 삼각관계와 출생의 비밀. 테오도르를 사이에 둔 마틸다와 이사벨라의 사랑이 순수하다면, 이사벨라를 향한 만프레드 대공과 마틸다를 향한 프레데릭 후작의 마음은 탐욕과 저열함이 배어 있다. 그 빗나간 정념과 광기가 합세하여 대공이 자신의 딸을 살해하는 비극적 사건이 발발하였다.

 

출생의 비밀은 어떤가. 거대한 투구, 거인의 손, 그리고 알퐁스의 동상은 초자연적 비밀이 개입할 것을 암시한다. 주변 인물들을 통해 반복하여 상기시키는 가문의 숨겨진 비밀. 테오도르와 알퐁스의 닮은 외모. 이처럼 내재한 복선은 결말에 이르러 다소 당혹스러운 이적으로 표출한다.

 

테오도르가 나타나자, 그 앞에서 만프레드가 서 있던 벽이 엄청나게 강력한 힘에 맞은 듯 무너져내렸다. 그리고 거대한 알퐁스의 영상이 폐허 가운데서 솟아올랐다. (P.185)

 

사필귀정과 권선징악이라는 진부한 전언은 외피에 불과하며, 독자가 흥미를 느끼는 부분은 만프레드 대공의 무서우리만치 집요한 결혼 의지다. 죽은 아들 약혼녀와의 결혼 추진은 누가 봐도 터무니없지만 그의 결심은 단호하다. 단순히 개인적 탐욕과 호색의 차원이 아님은 중반부에 이르러 명확해지는데, 자신의 가문과 공국의 소유권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방안이라고 할 때 그에게도 일말의 동정심이 생김은 어쩔 수 없다. 작중 당대 또는 우리 옛 조선 왕조에서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한 예외적 행위를 저지르는 인물의 사고에 대해 우리 시대의 사람은 완전한 이해와 공감을 가질 수 없다.

 

어둡고 침울한 작중 분위기에 따스함을 가져다주는 장면은 테오도르와 두 공녀 간 러브라인인데, 보다 노골적 익살미는 하인들에게서 드러난다. 특히 만프레드 대공과 비안카의 대화는 이사벨라의 비밀을 캐려는 대공의 절실함과 어리석게 느껴질 정도로 의도된 비앙카의 과도한 순진함이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이들 간에 주고받는 동문서답은 비록 어이없지만 긴장과 중압에 허덕이는 작중 분위기를 이완시키고 있다.

 

부록으로 월터 스콧과 폴 엘뤼아르의 작품비평을 수록하고 있는데, 특히 전자는 20쪽 가깝게 상세한 평을 하고 있어 작품 전모를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두 사람의 작품명 개요를 소개해본다.

 

<오트란토 성>에서는 옛 로망에서 나타나는 기사도 풍의 위압적인 어조와 사건의 화려한 극적 전환에다가 현대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또는 그려져야 하는 인간 성격의 날카로운 묘사 및 감정과 정열의 대비를 합치려 하였다. (월터 스콧, P.196)

 

<오트란토 성>은 회화적인 드라마이다. 그 형태는 몹시 신랄하고 거칠지만 사랑의 불행을 가장 잘 재단했다. 유일한 불멸자들인 욕망들은 냉정하게 그들의 길을 간다. (폴 엘뤼아르,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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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테크 바벨의 도서관 10
윌리엄 벡퍼드 지음, 문은실 옮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 / 바다출판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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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야화>가 있다. 유럽인들은 오리엔트의 이국풍, 관능성과 잔혹성을 향유할 수 있다. <파우스트>가 있다. 괴테의 것이든 선배격인 크리스토퍼 말로의 것이든 본질은 대동소이하다. 절대 지식을 구하는 인물이 악마와 계약을 맺고 끝내는 파멸한다. 전자의 배경과 후자의 인물을 한데 버무려놓는다면 바로 이 책 <바테크>가 해당한다. 말미의 작가 소개에서도 이 점을 지적한다.

 

동양은 벡퍼드의 상상력을 자극했던 요소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요소이다. 하지만 그것과 동시에 벡퍼드가 호흡했던 파우스트의 분위기를 간과해선 안 된다. (P.196)

 

파우스트를 칼리프 바테크로, 메피스토펠레스를 이단자 인도인으로 대체한다면 무리가 없다. 아 물론 바테크의 어머니인 왕비 카라티스는 특별한 인물이지만. 오히려 이단자 인도인과 왕비 카라티스를 합치면 보다 완전한 메피스토펠레스에 가깝다. 누로니하르는 그레트헨과 헬레나의 조합이다.

 

모르는 것으로 남겨 두어야 할 것을 알려고 하고, 제 힘을 넘어서는 것을 짊어지려고 애쓰는 경솔한 인간들, 필멸의 자들에게 비탄을 내려라. (P.34)

 

18세기 고딕소설의 효시 격인 이 소설은 굉장히 그로테스크하다. 작가는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정통 신앙인 이슬람을 배신하는 칼리프의 광기와 잔인성을 극단으로 몰고 가기 위해 여러 설정을 집어넣고 있다. 공이 된 인도인을 뒤쫓는 광기에 사로잡힌 바테크와 백성들의 장면 이성을 넘어선 맹목적 열정과 광기가 해학미마저 자아낼 정도다. 성지 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사제들이 갖고 온 성스러운 빗자루에 대한 바테크의 야비한 모욕은 정통 신앙에 대한 완벽한 모독인 동시에 이슬람교에 대한 조소가 은연중 담겨 있다.

 

이 작품은 바테크 외에 강렬한 개성을 발휘하는 조연도 여럿 등장한다. 그중 칼리프의 모친인 왕비 카라티스의 존재감이 두드러진다.

 

이 왕비는 자신이 여자로서 사악해질 수 있을 만큼 사악하다는 가책은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것은 모든 경쟁에서 우월함을 뽐내는 성()에게는 뜻하는 것이 적지 않았다. (P.60)

 

소개부터 강렬하게 등장하는 왕비는 백여 명의 백성들을 가벼운 마음으로 교살하는 것을 시작으로 살생과 악행을 서슴지 않고 자행한다. 이에 비한다면 오십 명의 아이들을 낭떠러지에서 집어 던진 바테크의 소행은 미약할 정도다. 참으로 잔인한 모자라고 하겠다. 더욱이 카라티스는 어둠의 마법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으니 마녀라고 불릴 만할 정도다. 카라티스는 아들에 절대 영광을 부여하려는 맹목적 애정을 가지고 작품 내에서 시종일관 아들을 사악한 길로 바르게 인도하기 위해 온갖 수고를 무릅쓰며 악과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데 매진한다.

 

카라티스가 누구인가. 다른 사람이라면 말도 못하게 끔찍하게 여겨 두려워할 일인데도, 그녀는 무엇이 됐든지 간에 온 힘을 다해 즐기는 사람이 아니던가. (P.148)

 

전체적으로 어둡고 악취가 진동하는 작중 분위기에서 한 가닥 밝음과 웃음의 줄기를 던져주는 인물은 누로니하르와 바바발루크다. 우스꽝스러운 우직함을 견지하는 바바발루크에게는 동정심이 생겨날 정도다. 반면 누로니하르는 양면성을 지닌다. 전반부의 그녀는 순진하고 자유로우며 독자성을 지닌 인물로 묘사되는데, 바테크와 행동을 같이한 이후 칼리프보다도 더 적극적이다. 바테크를 구원할 여인상으로 전개될 줄 알았던 누로니하르의 타락은 더없이 극적이기에 한층 인상적이다. 어찌하겠는가, 바테크와 누로니하르의 만남과 결합은 어떤 장애도 꺾지 못할 운명인 것을.

 

제아무리 악인에게도 마지막 구원의 기회는 남아있다. 하지만 선량한 지니가 하는 진심 어린 충고와 경고마저 바테크는 분연히 외면한다. 이후 에블리스와 그의 저주받을 디베들이 움켜쥔 지옥의 제국(P.169)에 입장하는 두 사람. 그들 앞에 펼쳐진 무수한 보화와 가슴을 움켜쥐고 사방을 배회하는 영혼들. 동경하던 위대한 술탄 솔리만의 겁벌을 목도하며 겁에 질린 바테크와 누로니하르. 심판의 순간에 흘러나와 선고하는 목소리와 함께 바테크의 편력은 최후에 이른다. 마지막 단락의 바테크와 굴첸루즈의 비교는 고딕소설의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자그만 사족이다. 부분적 진실도 담겨 있으니 인간 본연의 순수성과 무욕을 지킨 사람의 행복한 미래다.

 

기획자인 보르헤스에 따르면 벡퍼드는 비록 허술하지만 후대 작가들이 창조해 낸 지옥의 화려함을 예고했다고 평한다(P.14). 우리가 고딕소설을 읽는 사유와 재미가 여기에 있다. 일상의 현실과 통상의 윤리관을 훌쩍 건너뛰고 상상과 욕망을 자극하고 확장함으로써 오히려 현재의 우리 자신을 보다 다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 그렇기에 비주류 문학으로서 꾸준히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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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투스트라 2019-01-31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봤습니다^^
 
윌리엄 모리스 노동과 미학 시민 교양 신서 6
윌리엄 모리스 지음, 서의윤 옮김 / 좁쌀한알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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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

1. 예술과 노동

2. 사회주의의 이상: 예술

3. 이 세상의 예술과 아름다움

4. 윌리엄 모리스의 디자인

 

전자 세 편은 모리스가 예술과 노동 내지 사회주의를 주제로 한 강연록에 해당한다. 마지막 부분은 디자인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모리스의 다양한 디자인의 실례를 소개하고 있다. 앞서 <에코토피아 뉴스>로 윌리엄 모리스라는 인물을 알게 되었고, 풍부한 작품해설을 통해 예술가로서의 모리스와 사회사상가로서 모리스라는 양면성에 큰 호기심을 품었다. 이는 마치 존 러스킨과 흡사한 양상인데, 모리스가 러스킨에게서 감화를 받았다고 하니 새삼 우연은 아니다.

 

모리스는 러스킨보다 한층 적극적이고 활동적이다. 러스킨이 이론가에 가깝다면 모리스는 이론가인 동시에 행동가적 면모가 강하다. 그는 특히 노동자 대중을 상대로 사회주의를 설파하는 강연을 많이 행하였으며, 사회주의 시각에서 예술의 역사와 의미를 설파한다.

 

모리스에게 있어 예술은 노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의 예술관은 퍽이나 독자적인데, 인간의 노동을 기반으로 하여 삶의 기쁨을 창출하는 것을 예술로 간주한다. 전문 인력에 의한 극도로 세밀하게 다듬고 가공한 것도 예술이지만, 상업적 관심 없이 실제 사용을 위해 건전한 정신과 노동을 통해 만든 수공예를 더욱 예술의 본질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한다.

 

예술이란 훨씬 더 큰 범위로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의 노동에서 나온 아름다움,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주변 환경을 포함한 인간의 삶 속에서 그 사람이 취하는 관심의 표현, 즉 삶의 기쁨이 내가 말하는 예술인 것입니다. (<예술과 노동>, P.9)

 

모리스는 예술 행위에 있어 주체성을 중시한다. 자의에 의하지 않은 노동, 상업적 관심에 치중한 용도, 기계에 의한 생산의 대량성. 이 모든 것들은 삶의 아름다움을 빼앗는 요소로서 참다운 예술로 인정하지 않는다.

 

모리스의 관점에서 당대의 노동과 예술은 모두 왜곡되어 있다. 한마디로 병들어 있는 상태인 것이다. 자신의 부를 극대화하기 위해 타인의 삶을 지배하는 사회, 생계를 꾸리기 위해 삶의 의지를 저당 잡힌 개인이 넘쳐나는 곳이 당대의 영국, 그리고 런던이다. 사유재산과 상업적 자본주의의 폐해가 극심하게 창궐하던 현실을 목도한 모리스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사유의 귀결이라고 하겠다. 그의 글에서 현저하게 드러나는 당대에 대한 날선 표현은 위기감과 답답함의 발로이리라.

 

노동자는 자신의 일에서 기쁨을 가질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데 어떤 목소리도 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유-노동자가 되었고, 그래서 그에게서 이윤을 뽑아 내는 주인의 고갯짓과 부름에 따르는 기계가 되었습니다. (<예술과 노동>, P.37)

 

최소한 아름다움과 고상한 삶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사유 재산은 공공의 강탈이라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사회주의의 이상>, P.59)

 

병든 예술을 고치는 길은 왜곡된 노동의 본질을 회복하는 데 있다. 무위도식하면서 부를 독점하는 불평등 체제를 깨뜨리고 모두가 평등한 노동을 통해 분배의 공정을 보장받는 사회. 빈부격차가 사라지는 이상사회 속에서 진정한 예술이 재탄생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나날의 노동에서 삶의 온전한 기쁨을 발견하고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이상향의 가시적 모습을 모리스는 <에코토피아 뉴스>에 재현해 놓고 있다. 작품을 읽었을 때의 어정쩡한 당혹감의 실체는 바로 적나라한 사상성에 있었던 것이다.

 

모리스가 지향한 삶의 모습은 중세 유럽을 닮아 있다. <예술과 노동>에서 그는 예술과 노동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그리스 로마 시대에 비하면 암흑기로 인식되는 중세가 부의 분배와 삶의 기쁨의 분배에서 보다 공평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혹자는 모리스의 사상을 과거회귀로 오독하는데, 모리스 자신은 중세로 돌아가야 한다고 결코 주장하지 않는다. 그가 주목한 것은 중세의 상대적인 자유로움과 평등성이다. 그 속에서 수공예 정신이 싹텄다고 본다.

 

물건을 만드는 데는 그 물품이 수작업으로 만들어졌든, 수작업을 돕는 기계로 만들어졌든, 완전히 기계가 대체해 만들어졌든 수공업자의 정신이 어느 정도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수공업자의 정신에서 본질적인 부분은 바로 물건을 그 자체로 바라보고 그 물건의 본질적인 쓰임을 자신이 하는 일의 목표로 삼는 본능이다. (<사회주의의 이상>, P.66)

 

예술의 본질과 예술가의 정신을 되새겨볼 때 모리스가 지향한 예술은 부유한 소수를 위한 예술이 아니라 노동자 대중, 즉 민중 예술임은 자명하다. 그가 다양한 디자인에 관심을 쏟은 연유가 여기서 나타난다. 예술은 생활 속에서 민중과 함께 살아 숨 쉬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 공유되지 않는다면 예술은 자라나고 번영하고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로써는 그래야 한다고 바라지 않습니다......예술을 받아들인다면 예술은 일상의 일부가, 그 일상은 모두의 일상이 되어야만 합니다. 예술은 우리가 가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을 것이고 예술이 없는 곳은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예술과 아름다움>, P.97)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소위 장식 미술이라고 불리는 저 소예술을 대예술에서 분리해 낼 수 없었다. (<해제>, P.211)

 

이 책은 윌리엄 모리스의 예술 및 사회사상을 소개함과 동시에 디자이너로서의 모리스를 알 수 있게끔 진귀한 기회를 제공한다. 즉 책 후반부의 1/3 가량에 걸쳐 그의 디자인-타이포그래피, , 일러스트레이션 및 패턴 디자인-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데 무척 이채로운 동시에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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