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러스킨 라파엘 전파 시민 교양 신서 7
존 러스킨 지음, 임현승 옮김 / 좁쌀한알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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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러스킨은 사회 사상가이기 전에 당대의 저명한 미술평론가였다. 그의 대표적 저서인 <근대화가론>은 이러한 면모를 대변하는 거작이라고 하겠다. 그는 당대의 일군의 젊은 화가들이 일으킨 새로운 회화 작풍을 옹호하며 이를 하나의 사조로서 적극적으로 체계화하기도 하였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의 표제이기도 한 라파엘 전파이다.

 

서양회화에 무지한 나로서는 전파가 있으니 응당 라파엘 후파도 있겠구나 싶었다. 라파엘이 소위 르네상스의 세 거장 중 한 명인 라파엘로를 지칭한다는 것도 근자에나 알았을 정도다. 러스킨에 따르면 라파엘 개인은 최고의 거장으로서 이후 서양 회화의 표준으로 군림할 정도다. 문제는 그 후대가 라파엘의 미를 전범으로 삼고 라파엘의 길을 따르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으며 한 치도 그 길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데 있다. 어느 영역도 마찬가지지만, 교조화된 체제에서는 독창성과 개성이 숨 쉴 수 없다. 절대미는 존재하지 않는 법이므로.

 

청년들은 남달리 영민한 무언가를 지극히 독창적으로 이루어야 함과 동시에 이 남다른 무언가라는 것은 라파엘로 화풍의 규칙들을 철저히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P.39)

 

이 전복되어 마땅한 특정한 제도란 바로 강직함과 진실함의 희생 아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을 주된 특징으로 하는 제도를 말한다. (P.41)

 

러스킨이 라파엘 전파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그들이 진실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그에게 있어 진실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회화에서 윌리엄 터너를, 건축에서 고딕 양식을, 그리고 사상에서 사회주의를 높이 평가하고 주창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같이 진실을 향하고 있음에서다. 회화에서 그가 찾는 진실은 무엇일까?

 

위대한 화가들은 모두 자신이 보거나 이미 본 것만 그림에 담는다는 진실이 보다 많은 이의 이해를 얻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바로 이 점에서 라파엘 전파주의, 라파엘주의, 터너주의는 교육이 끼칠 수 있는 영향에 있어서만큼은 일말의 차이도 없다. (P.118)

 

러스킨은 이런 관점에서 라파엘 전파의 화가들을 죽 훑어 나가며 품평한다. 그리고 밀레이를 이들의 대선배격인 윌리엄 터너와 함께 나란히 설만한 최고의 예술가로 추켜올린다. 이 대목에서 씁쓸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부록의 상세한 연표에서 러스킨 부인과 밀레이의 불륜, 그리고 이어진 이혼 소송을 접하면서다. 나쁘게 보면 배은망덕이며, 다른 시각으로 보면 진정한 사랑을 발견한 셈인데 러스킨의 복잡다단한 심경을 헤아리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주된 목적은 라파엘 전파에 앞서 회화의 진실을 추구했던 윌리엄 터너를 찬미하고 그의 위대함을 대중 앞에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함이며, 가장 큰 미덕임을 알아야 한다. 책 분량의 절반 이상을 할애하여 간명한 표현으로 핵심을 짚어가며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어 윌리엄 터너에 대해서 잘 몰랐던 나같은 사람조차도 단번에 그에게 호기심을 갖고 작품들을 보고 싶도록 만들 정도다.

 

러스킨은 윌리엄 터너의 작품세계를 3기로 나누어서 각 시기별 주요 작품들에 대한 독자적 해석을 통해 그의 작풍의 장단점과 개별 작품들의 미적 우열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해석과 평가가 통설로서 인정받는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독자 입장에서는 매우 진실 되고 설득력 있음을 밝힌다. 특히 터너의 본격적 개성이 발현되고 절정에 달하는 제2기에 대한 러스킨의 글 - 특히 <몽세니 고개>를 평한 - 을 한번 살펴보면 누구라도 그 생동하는 적확한 표현에 매료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몸짓과 활력이 움트는 모든 장면에서 기쁨이 포착되었으며, 오랜 관찰을 거친 외재적 사실성에 대한 단순 묘사에 그치지 않고 터너 자신의 내재한 감정에 기원을 두는 모종의 위력과 분노를 통해 작품을 이루는 선 하나하나가 비로소 생동한다. (P.89)

 

바로 이런 점들이 터너 제2시기의 특색, 즉 첫 시기와 구별되는 주요한 특색이다. 화가로서 터너의 내면에 태동하는 어떤 원동력, 안정감은 줄이되 구상 속 넘치는 힘과 번뜩이는 정열은 드높여 주는 새로운 활력. (P.90)

 

러스킨이 터너에게 맹목적인 찬미만 한다고 폄하할 수는 없다. 매너리즘에 빠진 나머지 제2시기의 후반부는 몇 편을 제외하고는 졸작들만을 생산해 냈다고 혹평을 아끼지 않는 게 러스킨이다. 이 대목에서 러스킨의 독특한 예술 작업관이 등장한다. 그림을 한층 그럴 듯하게 보이고자 공들여 다듬고 덧칠하는 수고’(러스킨은 이렇게 표현한다.)가 두드러질수록 예술의 위대성은 타락한다고. 러스킨은 본질 외의 것을 덧붙이거나 꾸미는데 거부감을 지닌 듯하다.

 

진정으로 품격이 넘치는 작품들은 자신의 생각을 수고없이 표현해 낸 작업들, 무아의 경지에서 집착 없이 이루어진 작업들 가운데 있다. (P.120)

 

러스킨에 따르면 터너의 제3기는 이러한 폐단을 극복하고 단순명료한 가운데 풍부한 색감으로 평온한 정서를 그리는데 성공했다고 하며, “인간의 지성이 낳은 가장 고결한 풍경화”(P.134)로 평가한다. 이처럼 러스킨이 터너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인습과 인위를 타파하고 자신이 깨닫고 발견한 자연의 진실을 화폭에 담으려고 노력했고 그것이 성공을 거두었다고 본 연유다.

 

러스킨은 라파엘 전파에 대한 글을 쓰면서 그들과 윌리엄 터너를 연결시켜 양자 간의 동질성을 대중에게 뚜렷이 각인시키고자 하였다. 그것은 바로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보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비단 예술에만 국한할 수 없고 그리되어서도 안 된다. 인생과 사회의 모든 면에서도 본질은 마찬가지이리라. 러스킨이 예술에서 사회로 시선을 돌릴 연유는 동일한 맥락에서라고 하겠다. 진실 되지 못한 사회에서 진실한 예술이 탄생할 수 없으므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러스킨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같은 범부들도 품을 수 있는 위대함이 존재한다면, 적어도 윌리엄 터너의 행보를 따르는 것이야말로 이를 도모하는 최선의 길일 것이다.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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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토피아 뉴스 (보급판 문고본)
윌리엄 모리스 지음, 박홍규 옮김 / 필맥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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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자본주의의 본격적 전개에 따라 사회적, 문화적으로 부정적 인식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안내해 주리라는 장밋빛 전망 대신 잿빛 하늘이 드리우기 시작함을 예민한 사람들은 알아채기 시작하였다. 흡사 소위 제4차 산업혁명에 열광하는 작금의 현실과도 남다르지 않다.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우선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과연 이것이 문학으로서의 소설인지 아니면 미래세계를 예언한 사회학 내지 정치학 저술인지 경계가 모호하다. 형식은 문학이지만 내용은 비문학이다. 이전의 유토피아 소설도 대체로 작품 의도라는 측면에서는 유사하지만, 이 작품처럼 대놓고 정치적 목적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다.

 

여기서 묘사하는 당시로서는 머나먼 미래인 서기 2150년 미래사회의 모습은 분명 이상적 유토피아에 가깝지만 전혀 미래답지 않고 오히려 회고적이다. 작품해설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미래보다는 산업화 이전의 중세 시골사회의 정경에 가깝다고 함이 사실이다. 그것은 퇴행적 의미라기보다는 이 작품의 의도가 도래하지 않은 이상향을 추구하기보다 현실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하는 제국주의적 산업자본주의의 폐해를 노정하고 그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인 연유라고 하겠다.

 

산업자본주의의 폐해는 노동자가 자본에 종속당한다는 데 있다. 우리는 자아실현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고자 노동을 하지 않는다. 노동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필요악에 불과하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시장의 균형은 허상에 지나지 않으며, 자본을 소유한 자들은 상류층이 되어 정계와 재계를 휘어잡고, 나머지는 노동을 통해 연명한다. 법과 공권력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든든한 안전장치다. 학교 교육도 공장과 다를 바 없으며, 남녀 관계도 차별을 당연시하였다. 모두가 최상의 가치로 인정받는 신성한 사유재산에서 귀결된 것이다.

 

작가는 단지 산업적 영역을 벗어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각 방면에 전 방위적으로 비판의 날을 세운다. 템스 강을 여행하면서 마주친 사람과 정경, 해몬드 노인과의 장시간에 걸친 대화에서 화자[작자]는 추악하고 불행하였던 당대 사회가 어떻게 낯설면서도 행복이 가득한 사회로 변모하였는지 낱낱이 질문하고 답변을 듣는다. 이 장면이 작품 전체 중 가장 길면서도 내용상 핵심적인 대목이라고 하겠다.

 

이제 전제정치는 끝났고, 우리는 더 이상 그런 기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기 때문에 그런 기관은 결코 이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당신이 생각하시는 의미의 정부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P.139)

 

정치와 관련해 우리는 매우 잘하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P.150)

 

우리는 오직 필요에 의해서만 물건을 만듭니다. 사람들이 전혀 알지도 못하고 통제하지도 못하는 막연한 시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마치 자신을 위해 물건을 만드는 것처럼 이웃이 사용할 물건을 만듭니다. (P.169)

 

시장에서 최고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 그럼으로써 남보다 많은 사적 재산을 획득하고 보유하는 것이 권장되는 체제. 시장에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가사 노동과, 시장 자체가 형성될 수 없는 자급경제는 무가치한 것으로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모두가 시장과 사적 소유를 향해 맹목으로 질주하는 세상, 그 속에서 우리는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산다. 우리는 행복한가? 작가의 물음도 마찬가지다.

 

혁명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분명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혁명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 외에 그 어떤 것으로 반혁명의 시작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나날의 행복한 일이 없이는 진정한 행복이란 불가능하지요. (P.162)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 속에 차차 즐거움을 심어 넣게 된 것이지요. 나아가 우리는 그런 즐거움을 자각하게 됐고, 그것을 육성했으며, 그것을 한껏 누리는 태도를 갖게 됐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이 얻어졌고, 우리는 행복한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그러하기를 바랍니다. (P.225)

 

극심한 빈부격차가 존재하고 계급 간 대립이 치열하게 펼쳐지는 사회가 아니며, 개인이 생계를 위한 마지못해 노동을 하지 않으며, 일하는 행위 자체가 즐거움을 안겨주며 정신과 신체 활동이 공히 동등한 평가를 받는 사회. 소수 층의 절대적 부의 축적을 배제하고 모두가 적정한 생활수준을 유지할 정도의 경제를 유지하는 사회. 이곳의 삶은 자연히 행복할 수밖에 없다.

 

현재로 비약하자면 미국과 스위스의 삶 중 어디가 바람직한가와 일맥상통한다. 혹자는 이렇게 반박할지 모른다. 스위스가 행복지수가 높고 행복할지 모르지만 인류 역사에 기여한 공적이 없다며. 우스운 일이다. 역사라고 하는 것은 사건과 사고의 집합체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 삶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다. 질병과 재해가 난무하고, 거대한 전쟁으로 수많은 인명이 몰살당할 때 역사는 관심을 갖는다. 역사와 행복을 교환할 인물이 있을지 자못 의심스럽다.

 

나는 그가 가리키는 것들을 바라보면서 그 정교함과 풍부한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그것들은 생활 그 자체를 즐거움으로 받아들이고, 인류의 공통된 욕구를 만족시키는 일과 그렇게 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일이 최선의 인간에게 알맞은 일임을 마침내 알게 된 사람들이 만든 작품이었다. (P.301)

 

나는 강에서 평야로, 다시 평야에서 언덕으로 펼쳐지는 이 아름다운 시골의 풍경을 떠올렸다. 부를 포기하고 풍요를 얻은 이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렸다. 이내 내 마음에 기쁨이 넘쳤다. (P.334)

 

작가는 당대 젠체하는 지식인들에 대한 따끔한 비판도 아끼지 않는다. 육체노동을 경시하고 정신노동을 우월시하며, 계급적 사고에 물들어 있으며 학문과 예술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숭배하는 지적인 사람들. 시장상업주의 못지않게 유럽제국주의의 세계 침탈도 그의 펜을 피해가지 못한다. 작품해설에 따르면 모리스와 사회주의자들은 제국주의의 선봉장인 당대의 영웅 탐험가 스탠리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진정한 사회주의 운동가로서 모리스의 진면모라고 하겠다.

 

윌리엄 모리스는 사회주의 사상가인 동시에 예술가로서도 후대에 지대한 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존 러스킨의 감화를 받은 그는 소위 공예예술의 주창자이며 디자인 영역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기계 대신 수공, 시장 대신 생활을 강조하는 그의 예술관은 이 작품 속에도 그대로 녹아 있다.

 

만인이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것이라면 예술이 무슨 소용인가? 만인이 나눌 수 있는 예술을 모리스는 생활예술이라고 불렀다. 제작자에게나 사용자에게나 행복을 느끼게 하고 민중을 위해 민중에 의해 이루어지는 생활예술이야말로 모든 예술의 근본이라고 모리스는 믿었다. (P.391, ‘작품해설에서)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이 작품을 통해 윌리엄 모리스가 소설가뿐만 아니라 저명한 시인이자 예술가이며, 평생 굳건한 사회주의자로서 사상사적으로도 중요한 인물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그의 지향점이 발전적이 아니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솔직히 그의 주장 중 상당수는 현대사회와 현대인이 받아들이기 어렵다. 우리는 기계와 대량생산, 시장의 개념에 너무 익숙하고 물질적 풍요로움에 길들여져 버렸다.

 

시장은 완전하지도 공정하지도 못하다. 부실한 시장을 떠받치기 위해 무수한 사람들이 고통 받는 현실을 우리는 각종 매체를 통해 접한다. 내가 그네들이 아닌 점에 안도하며, 나와는 다른 세상 이야기라고 치부하며 위안 삼는다. 기계가 육체노동을 대체하듯이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인공지능이 단순반복적인 정신노동을 대체하면 우리의 미래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궁금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모두가 고부가가치의 창의적인 지적 활동에 매진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 작품이 오늘날도 여전한 가치가 있다면, 당대와 현대의 사회가 본질적으로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점을 드러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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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천등운 : 현대어본 조선 왕실의 소설 4
임치균.이민희.이지영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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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여 면에 달하는 고전소설로서 보기 드문 장편이다. 주제의식적인 면에서는 뛰어난 재능의 몰락한 명가 자손이 온갖 고초를 겪다가 큰 인물이 된다는 점과 정혼한 남녀가 갖은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상호 간의 정절을 유지하다는 점에서 평범하다. 나는 이 소설을 여태껏 읽은 작품 중에서 가장 극적이며,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무수한 굴곡에 독자가 질릴 정도라고 평하고 싶다.

 

여타 작품과는 차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주배경이 청루, 즉 오늘날로 치면 유흥가 내지 집창촌이라는 점이다. 불가항력의 까닭으로 청루에 몸을 의탁하게 된 왕석작. 그를 둘러싼 환경과 그에게 닥치는 유혹을 기술하려면 자연히 청루 자체에 관한 이야기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청루의 여러 퇴폐적인 장면, 양민에서 강제로 몸을 버리고 창가로 타락한 여인들, 그리고 청루를 통해 부를 축적하는 포주 일당 등. 낙선재본이라는 조선 왕실의 소설에서 주로 여인들이 읽을 책인데 이토록 청루의 소상한 현실이 담겨 있다는 점이 의외로 놀랍다.

 

청루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후마라고 하겠다. 왕석작이 몸을 의탁한 포주의 누이이자 역시 포주인데, 청루 세계에서 온갖 인간 군상을 상대한 탓에서 사람을 대하는 기술이 능수능란하다. 선인과 악인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능력으로 왕석작 또한 후마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자칫 큰 낭패를 볼 뻔하였다.

 

후마의 말은 하나같이 자신의 속마음을 꿰뚫고 저들의 실정을 이른 것이라 아주 그럴듯해 보였다. (P.41)

 

남녀 주인공의 만남이 청루에서 비롯되었으니 웃고픈 대목이다. 숙부에게 팔리다시피 하여 청루에 오게 된 동예아와 왕석작. 비록 후마가 동예아를 창기로 만들기 위한 속임수로 혼인이 추진되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재주와 성품에 감탄하고 진정한 부부를 약속한다. 이는 몇 차례의 목숨을 건 위기에 맞닥뜨리고 황제의 명도 거슬려 가며 지키고자 하는 절대적 가치가 되어 소설 전체를 이끌어 가는 동력이 된다.

 

정조가 무가치하고 거추장스럽기 이를 데 없는 환경인 청루에서 굳센 절개가 피어난다는 점, 그리고 훗날 이들이 청루에 머물렀다는 이유로 동예아의 절개를 의심하는 뭇 사람들의 의심어린 눈초리와 세치 혀. 작가는 그들을 이렇게 평한다.

 

세상의 부녀자들이 집안에 편안히 있으면서 말마다 절개를 일컫지만은, 마침내 절개를 지켜 후세에까지 이름을 전하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소? 매사에 뒤집어지는 것이 두려운 줄을 알겠소. (P.521)

 

왕석작과 특히 동예아가 숱한 위기를 겪으면서도 몸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도운 여러 여인들의 말 그대로 헌신이다. 왕석작의 유모는 그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기꺼이 청루에 내놓았다. 하선과 혜랑은 진흙탕 속의 연꽃 같은 존재로서 두 사람을 돕기 위해 여러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무엇보다 동예아의 시녀인 화연을 놓칠 수 없다. 그녀야말로 주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정조마저 아끼지 않았으며 일생 충심을 다하여 헌신하였다. 작품 중에서 동예아라는 인물 구현이 다소 평면적이고 비현실적이라면 이를 극적으로 보완하는 생동적 인물이 바로 화연이라고 하겠다. 여인의 정조가 목숨과 맞바꿀 정도로 중시되던 조선 사회에서 작품해설에서도 평했듯이 정조까지도 거침없이 버리는 여성들을 서술자가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적”(P.532)인 게 이 작품이다.

 

왕석작의 일편단심 부인 사랑도 작품의 중요한 요소다. 왕석작은 자의든 타의든 동예아와 헤어질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특히 황귀비의 조카와 혼인하도록 압박받았을 때 황제의 명령을 핑계 삼아 동예아를 버렸다면 모두를 평안케 하였을 것이다. 그는 그러하지 않았다. 이것이 이 소설의 또 하나 주제의식이라고 하겠으니, 부부간 인연의 소중함과 책임감이다.

 

그대를 잃는다면 나 혼자 무슨 마음으로 세상에 있으리오. 그대가 만일 죽을 마음을 끝내 바꾸지 않으면 나 또한 살 이유가 없소. 이 일은 그대가 멀리 생각하지 못한 것이오. 만일 그대가 이곳에서 죽으면 내가 더욱 버리고 가지 못하고 서럽고 아득하여 죽을 것이오. (P.203)

 

우리 부부가 그동안 유리하고 고난을 겪은 것을 생각하면, 부인은 예사 조강지처가 아닙니다. 결코 세상 권세를 탐내어 부인을 두고 그냥 돌아가지는 못하겠습니다. (P.346)

 

우리는 애초에 언약을 하였으니 차마 중간에 저버리지 못한다. 죽기를 각오하고 찾아보고 그래도 끝내 만나지 못한다면, 그 사람과의 약속을 지켜 지하에 가서 선친을 뵙고 죽은 아내를 찾는 것이 좋겠다. (P.406)

 

다만 두 부부가 갖은 난관을 헤치고 절개를 지키는 의의를 현저히 강조하려다 보니, 이별과 재회가 반복되는 과정에서 우연성이 남발되고 말았다. 고전소설의 특징 중 하나가 우연성이라고 하겠지만, 여기서는 지나친 측면이 있다. 한두 번이 아닌 우연한 상봉은 작품 전개의 필연성을 약화시키는 역효과가 있는데, 특히 과거보러 온 왕석작이 죽을 위험에 처해 정말로 우연히도 혜랑과 화연의 배에 구조되는 대목은 어이없을 정도다. 작가도 일말의 부담감을 느꼈는지 왕석작으로 하여금 훗날 면피성 발언을 하게끔 한다.

 

저희 부부는 유달리 천신만고를 고루 겪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항상 기이하게 재회할 것이라 기대하겠습니까? (P.464)

 

이외 성적으로 자유로운 언행과 상황 설정도 유달리 두드러진다. 청루를 배경으로 하였으니 일정 부분 불가피하겠지만, 이후에도 남장한 동예아가 왕씨와 결혼하여 남자인 척 행동하는 장면이나 마지막 대목에서 왕석작과 혜랑이 부부 간 잠자리 사랑을 소재로 주고받는 희언이 그러하다.

 

이 작품이 우리나라 작품인지 아니면 중국 작품인지 논란은 작품해설에 따르듯이 동예아의 앵혈로 분명하다. 왕석작이 동예아와 대화 중 도미 부인과 개루왕 고사를 언급하는 장면은 매우 자연스럽기에 이 또한 우리 고전소설이라는 증거로 삼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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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문록 : 현대어본 조선 왕실의 소설 5
임치균.송성욱 옮김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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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표지의 대여섯 줄 작품 소개 문구를 읽더니 큰아이가 대뜸 말한다. <사씨남정기>랑 비슷한 것 같다며. 맞다. 작품 해설에서도 밝혔듯이 이 작품은 처첩간의 쟁투를 그린 이른바 가정소설의 하나”(P.305)에 해당한다. 하지만 단지 평범한 가정소설에 불과했다면 현대에 이르기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며, 소위 낙선재본에 포함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어떤 점이 독자에게 호소하였을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남녀의 혼인 관계에 있어 가장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유형이 일부일처제다. 사랑하는 한 명의 배우자와 평생을 보낸다는 상상은 매우 윤리적이며 이상적이기까지 하다. 다만 사랑으로 충만한 현대의 결혼 관계도 끝까지 유지되기 어려운데, 사랑은커녕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부모의 결정에 따라 평생이 좌우되던 과거에 부부 관계가 정말로 이상적이었을지는 의문스럽다. 세월이 흘러 정이 든다고 하지만, 정과 사랑은 다른 차원이다. 그래서 남성중심 사회의 여유 있는 남편들이 정실로서의 부인 외에 측실을 두고 집안 대 집안의 결합이라는 혼인의 의무와 부담을 벗어던진 채 홀가분한 감정 유희에 빠지는 사례가 비일비재다.

 

[화경] 제가 비록 호방하지만 절대 미인을 얻어 금슬이 화평하면 어찌 다른 여자를 넘보겠습니까? 저는 이미 호씨 집안의 규수를 다른 남자의 노리개로 만들지는 않으리라 뜻을 정하였습니다. (P.14)

 

[이혜란] 이혜란의 완전하고 맑고 깨끗한 모습은 세상의 어떤 미인보다도 아름다웠고, 높고 고상한 태도는 비할 곳이 없었으니 그 자태를 어찌 호홍매의 한갓 낮은 태도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P.21)

 

[호홍매] 제가 사대부 규수로서 이미 화 공자와 서로 만나는 비례를 저질렀습니다. 비록 정식 절차를 거쳐 혼인한 것은 아니지만 마음을 허락하여 부부의 의를 가졌으니 어찌 차마 다른 성씨의 남자를 섬기겠습니까? (P.24)

 

화경과 이혜란, 화경과 호홍매의 관계가 그러하다. 화경과 혜란은 부모가 정해준 인연이다. 양가가 당당한 명문집안이요, 양자는 진부하지만 군자와 요조숙녀다. 양자가 행복하게 결합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불행하게도 화경은 혜란에 앞서 홍매를 만나게 되고 마음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후에 그녀를 둘째 부인으로 맞아들인다. 여기까지는 세상의 법도를 크게 벗어난 상태가 아니다. 각자 자신의 직분에 만족하고 원만한 가정을 유지한다면 말이다.

 

사람의 마음은 제아무리 잘난 인물일지라도 어찌할 수 없나보다. 분명 인물로나 품성으로나 첫째 부인이 우월하지만 애정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더욱이 혜란의 성품은 고고하여 위엄이 있기에 허물없이 대하기가 어렵다. 작중 영웅호걸인 화경은 홍매에게 홀딱 빠져버렸다. 홍매는 남자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첫째 부인의 지위를 누리고 싶어 한다. 여기에 더해 작가는 부인에게 매정한 남편의 태도와 이후 끊임없이 고초를 겪는 부인의 운명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늘의 뜻을 끌어오기까지 한다.

 

[화경] 제가 평생 원수를 만나 신세가 잘못되었으니 원통할 뿐입니다. 이씨의 아름다움을 듣기는 하지만 참으로 비위가 뒤집히니 아예 듣고 싶지 않습니다. (P.26)

 

화 공자가 마음속으로 사랑스러워 하면서도 호홍매를 본 후로부터 오로지 한 생각에만 얽매여 잊지 못하고 있었고, 이혜란의 액운 또한 심상치 않은 탓에 결국 화 공자의 마음은 돌이켜지지 않았다. 하늘의 뜻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P.23)

 

혜란의 액운이 다하지 않은 탓이니 어찌 한갓 홍매의 간사함과 시녀의 악랄함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홍매가 그 틈을 잘 타서 큰 계교를 행한 것일 뿐이다. 결국 혜란을 폐출하고 첫째 부인 자리를 빼앗으려 한 것이지만 이 일은 하늘이 혜란의 어진 성덕과 정숙한 행실이 천고에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한 사단인 것이다. (P.77)

 

최초에 홍매는 비록 혜란보다는 떨어지지만 제법 요조숙녀로서 묘사되었는데, 어느 순간 사특한 인물로 기술되더니 나중에는 철저한 악인으로 변모한다. 본성이 그러한지 아니면 사랑과 질투의 소산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남편과 시부모에게 미약을 먹이고 혜란의 살인을 수차 사주하는 등의 악행을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것으로 봐서는 단순한 투기는 아닐 것이다.

 

[호홍매] 하늘이 이미 나를 내시고 어찌 또 이씨를 내셨는가? 만일 이씨가 세상에 있으면 내가 어떻게 기운을 펼 수 있으리오? 이씨를 어떻게든 처단하여 이 세상에 같이 있지 않게 하리라. (P.47)

 

[호홍매] 이처럼 용모는 비록 절묘하나 마음이 요사하고 소행이 간악하여 사특한 기운이 외모에 현저히 드러나니, 그저 아쉬울 뿐이다. 화운 부부가 이를 한눈에 알아보고 그 불행함을 탄식하면서도 겉으로는 애중하는 표정을 지어 주위의 의심을 막고, 부드러운 기색을 보여 신부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P.38)

 

결국 혜란은 내쫓기고 죽을 위기에 처하는데...이렇게 소설이 끝나면 비극에 해당될 테지만 고전소설은 대개 해피엔딩 아닌가. 화경은 서서히 심경의 변화가 생기고 홍매의 언행에서 의심스러운 점을 발견하고 마침내 홍매의 투기에서 사단이 생겼음을 알고 홍매를 또한 내쫓는다.

 

작품의 후반부는 살아난 혜란을 찾아서 화경이 재결합하기 위한 필사적인 분투의 노력 이야기다. 가뜩이나 냉대로 미덥지 않은 남편인데 정나미가 떨어진 이 마당에 혜란은 재결합을 극구 거부한다. 양자 간에 계속되는 밀당에 더해 혜란의 오라버니가 가담하는 화경 놀리기 에피소드가 추가된다.

 

혜란이 죽기로 결단하여 보지 않기로 작정하였기에 어찌할 수가 없었다. 꾸짖어 보기도 하고, 달래어 보기도 하였지만 끝내 듣지 않고 돌아가 먹지도 않고 누워만 있으니 집안에서 다시 권유하지 못하였다. (P.174)

 

본래 혜란은 세상을 살 마음이 없어 화경을 대하는 마음이 식은 재처럼 차가워 다시 부부 동락할 뜻이 없었다. (P.194)

 

거부하는 혜란과 잘못을 뉘우치고 간절히 애원하는 화경, 이후 재결합한 부부를 보며 혜란을 다시금 제거하기 위해 온갖 모해를 꾸미는 홍매. 자중지란으로 인한 시녀 난화의 죽음과 호빈 집안의 풍비박산, 그리고 이어지는 홍매의 낭패. 그럼에도 홍매의 사악함은 그치지 않는다. 어찌 되었든 작품은 혜란의 올곧은 마음씨와 고매한 품성으로 홍매가 개과천선하며, 결국 화경도 홍매를 다시 받아들여 모두가 영화를 누린다는 결말로 맺는다.

 

여기서 짚어볼 점은 홍매의 악인성이다. 작품해설에서도 언급되었듯이 “<화문록>이 여타의 가정소설 작품과는 다른 독특한 부분이 바로 악녀의 형상이다”(P.306). 분명 악녀이기는 하지만 그녀의 지향점은 오로지 화경에게 향해 있다. 에로스적 사랑은 대상에 대한 강력한 독점욕을 수반한다. 후에 곤경에 처한 홍매가 절개를 지키려고 애쓴 대목은 그녀가 일반적인 악녀의 전형과는 다름을 보여준다.

 

옛날 첩이 허물을 지은 것은 명공이 집안을 잘 다스리지 못하고 편벽하게 하여서입니다. 명공이 만일 가정을 공정하게 다스리고, 첩은 엄정하게 경계하였다면, 첩이 어찌 방자하게 첫째 부인을 해칠 수 있었겠습니까? (P.296)

 

홍매의 항변처럼 화경이 처신을 올바르게 했더라면 이 모든 분란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아무리 영웅호걸이며 탁월한 지성의 소유자로 묘사되지만 화경의 잘못도 매우 크다. 가정의 화목에 남자의 역할이 중요함을 알게 해준다. 또한 혜란도 완벽히 무구하지는 못하다. 하늘의 뜻이라고 변호해봤자 혼인 초 화경에 대한 혜란의 데면데면함은 여인의 따뜻한 애정을 기대한 남자를 실망시켰을 뿐이다. 혜란 오라버니의 말은 비록 구시대적이지만 혜란을 꿰뚫어 본 것이기도 하다.

 

혜란의 시는 너무 고결하여 옥구슬보다 맑고 얼음보다 깨끗하다. 이런 탓에 젊은 날에 박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재앙이 다 지나고 길운을 만났으니, 고집스러운 마음을 돌려 부부가 다시 만나 과거의 원한을 떠올리지 않는 것이 좋겠다. 여자의 도리는 유순함이 제일이다. (P.147)

 

오늘날 많은 여성들이 막장이라고 비난을 받는 드라마에 몰입하여 울고 웃는다. 예전 여인들도 재자가인을 주인공으로 파란만장한 운명이 전개되는 막장성의 이야기책을 돌려 보았으니 시대가 달라도 시정이나 궁중이나 마찬가지로 세태의 비슷함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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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성비룡 문장풍류삼대록 징세비태록 : 현대어본 조선 왕실의 소설 1
배영환 외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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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창덕궁 낙선재의 소위 낙선재본 소설을 조선 왕실의 소설이라는 명칭으로 출간한 첫 번째 결과물이다. 낙선재본에 대해서는 여러 경로를 통해 흥미로운 이야기 작품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실체를 대할 수 있게 되니 반갑기 그지없다. 이 책은 모두 세 편의 장편 및 중편 소설을 수록하였다.

 

1. 낙성비룡(洛城飛龍)

 

영웅호걸은 출생과 용모, 습벽까지 범인과는 오롯이 구별된다고 선조들은 생각하였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이경작이 그러하다. 범상치 않은 태몽과 기이한 풍모가 그러하며, 시도 때도 없는 잠과 엄청난 식사량도 일반과는 현저히 다르다. 초 장왕도 처음에 향락에 빠진 일개 범용한 군주에 불과한 듯 보이는 것처럼. 그런 면에서 이경작의 가리어진 참모습을 발견한 양자윤의 안목이 대단하다.

 

이 사람은 용과 호랑이의 기상과 금빛 봉황새의 재질을 가졌습니다. 제비와 참새가 어찌 기러기의 큰 뜻을 알겠습니까? (P.37)

 

영웅은 나면서부터 영웅의 자질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지만, 특정 자극과 계기로 절치부심하여 비로소 영웅성을 발휘하는 사례도 있다. 이경작도 처가의 박대로 가출한 후 오래도록 공부에 힘써 장원급제하고 병란을 진압하여 일대에 명성을 날린다.

 

주인공이 이후 아내와 재회하고 해로와 영화를 누리게 됨은 여타 고전소설과 유사한 전개이므로 특이사항이 아니다. 다만 이경작의 이채로움은 공부 시절에 만난 두 벗과 변함없는 우정을 나누며, 통상적 세속사에 함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은 매일 조회 후 여가 때면 서로 모여 바둑과 해학을 주고받으며 소일하는 것으로 인간 세상의 즐거움을 삼았다. (P.162)

 

이 작품에서 주인공의 아내인 양경주는 시종여일 남편을 향한 믿음과 공경을 저버리지 않는다. 미모와 심성을 겸비한 뛰어난 인물로서 그녀는 친정의 개가 권유를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의지마저 갖추었다. 또한 훗날 벼슬길에 나선 남편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주저 없이 직언하고 훈계하는 강직한 풍모도 지녔으니 당대가 원하는 가장 이상적인 여성상을 구현한 것이리라.

 

2. 문장풍류삼대록(文章風流三代錄)

 

<적벽부>의 소동파라고 하면 어지간한 식자는 이름이나마 들었음 직한 중국의 유명한 고전 시인이다. 본명이 소식인데, 아버지 소순, 동생 소철과 함께 부자가 모두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로 유명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다소 불우하였지만, 이것이 그가 시인으로서 명작을 남길 수 있었던 계기였다.

 

이 작품의 작가는 소동파를 추앙하였음이 틀림없다. 곳곳에 소동파에 대한 극진한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소씨 집안을 배경으로 어찌 보면 시시콜콜한 가족사를 이야기로 엮어 나가며 소동파의 노년마저 행복한 장면으로 바꿔치기한다.

 

이 반드시 소동파 선생이 지은 바다. 진실로 신선의 풍모를 지녔으며 정의로운 군자도다. 내가 규방의 아녀자이지만 어찌 깊이 감복하지 않을까? (P.191)

 

참으로 이 시대의 문장가요, 만대에 빛날 학자입니다. 어찌 시속의 보잘것없는 문인들에 비기겠습니까? 품격이 고상하여 속세에 찌든 사람 같지 않으니 틀림없이 동파 선생이 지으신 것입니다. (P.256)

 

이 작품의 진짜 재미는 후반부라고 하겠다. 소동파의 조카인 소원은 인물과 재주가 유달리 뛰어났는데 이의 혼인을 둘러싼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두씨와 여씨 집안에서 함께 소원과 혼인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소원의 호탕함에 대한 여자 측 집안의 우려와 미인을 아내로 얻고자 하는 소원의 바램이 절묘하게 교차하면서 두 명의 요조숙녀가 한 명의 군자와 결합하는 요즘 기준으로서는 낯설지만 당대로서는 익숙하면서 만족스러운 결과로 이어진다.

 

세상에 속 좁은 무리들은 부부간의 정을 중히 여겨서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것을 꺼리지만, 나는 그렇지 않지. 내 마음에 맞는 숙녀가 있으면 서로 친구가 되어서 남편을 함께 섬기고 옳은 방법으로 내조하는 것을 더 좋아하지. (P.263)

 

네가 날 적부터 비범하더니 팔자가 이렇게 대단하구나. 스무 살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고 절세미인을 둘이나 얻었으니 참으로 기특하다. (P.300)

 

여기서 당시 사대부들의 모순적 도덕관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즉 겉으로는 내면의 심성을 중시하지만 결국 보다 중시되는 것은 외모인 것이다. 이를 합리화하기 위한 변명은 옹색할 따름이다. 비단 이 작품뿐만 아니라 소설 속 선호되는 여인상은 빼어난 미모를 기본 전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얼굴은 월나라 서시 같고, 덕은 주나라 태임과 태사 같은 여자를 얻어야 일생이 행복할 것입니다. 만일 이 가운데 하나라도 제 뜻과 다르면 어찌 절대가인이라 하고 요조숙녀라 할 수 있겠습니까? (P.220)

 

조카는 풍류호남자다. 미인을 많이 모을 것이니 만일 조강지처를 이런 희한한 박색으로 얻으면 반드시 금슬의 즐거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저 두공의 외동딸은 평생을 외롭고 힘들게 살 것이다. (P.245)

 

3. 징세비태록(懲世否泰錄)

 

단편에 가까운 분량이지만, 이야기 속 사건과 우여곡절은 빼곡하기 그지없다. 충신과 간신의 대립과 이로 인해 핍박받는 충신(과 그 자식)의 사연이 작품 전체에 깔린 배경으로서 사건이다. 구체적 사연으로서 장자의 혼인담과 차자의 피살이 뒤따르고 더불어 차자 아내의 절개와 그 동생의 혼인담 등 간계와 모략, 기만과 사랑이 뒤얽힌 복잡한 스토리가 정치적 격변과 함께 전개된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유달리 주목되는 장면은 정작 따로 있다. 작품 배경이 청나라인 점이다. 충신이 충성을 바치는 대상은 결국 오랑캐인 청나라이며, 이들이 토벌에 나서는 반역도당의 대의명분은 명나라로 대변되는 중화문명의 복원인 것이다. 운남성의 이극과 절강부의 임상문이 그러하다. 하지만 작가의 뜻은 확고부동하다. 이것이 이 작품의 시대적 인식을 보여줌과 동시에 여타 소설과 차별되는 점이다.

 

우리 청나라가 비록 오랑캐라 하나 선대로부터 공자와 맹자를 숭상하고 윤리와 기강을 밝히신 바, 하늘이 친근히 하시어 세종 임금에 이르러서는 요순의 다스리심을 본받아 천하가 모두 마음을 돌려 따랐으니 어찌 오랑캐라 하겠는가? (P.345)

 

더러운 오랑캐가 중국을 어지럽게 하고 분수에 맞지 않은 지위에 있은 지 오래되었다. 내 천명을 받고 너희 나라를 쓸어 없애버리고자 하거늘, 늙은이가 어찌 하늘의 뜻도 모르고 목숨을 재촉하느냐? (P.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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