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둘러싼 바다 레이첼 카슨 전집 2
레이첼 카슨 지음, 김홍옥 옮김 / 에코리브르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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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 카슨 전집의 둘째 권이자 카슨의 이른바 출세작이다. 이 책이 평단의 찬사와 함께 상업적 성공을 거둠으로써 그의 초기작마저 재출간되어 주목받는 성과도 함께 했다. 그러면 이 책이 그토록 각계의 호의적 반응을 이끌어낸 연유는 무엇일까? 이 책의 독자라면 대번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1950년대에 접어들어 인류는 제2차 세계대전의 피해를 대부분 복구하였다. 그리고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과 경제적 번영에 힘입어 유례없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하에 자신의 역량을 외부로 뻗쳐 지구와 우주를 정복하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지구 최고봉의 최초 등정,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와 우주비행사가 등장한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관심은 미지의 영역이었던 바다에까지 이르러 심해 탐사가 추진되었다.

 

증폭되는 대중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정작 바다와 바다 밑 세상에 대한 지적 욕구를 채워줄 만한 마땅한 저작물이 없는 상황에서 정확한 과학적 지식과 충만한 문학적 감수성을 지닌 카슨의 글쓰기가 세상에 선보였으니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개인적으로는 초기작의 다큐에세이로서의 짙은 문학성이 다소 퇴조하고 설명조의 스타일이 다소 불만이지만, 보다 과학적 지식의 전달에 주안점을 둔 계몽 목적의 글이라면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 책은 바다에 관한 거의 모든 영역을 터치하고 있다. 1부는 바다의 탄생에서 비롯하여 바다의 표면과 심해, 바닷속 땅과 바닷물에 충만한 미세생물에 대해서 요모조모 살펴본다. 2부에서는 자전, 바람 그리고 조석에 의해서 움직이는 바다의 역동성에 주목한다. 마지막 3부는 바닷물의 거대한 흐름과 이것이 갖는 지구적 의미, 그리고 바닷속 자원을 다루며 바다가 우리에게 갖는 상징과 실체를 환기시킨다.

 

깊은 바다의 바닥을 생각하노라면 내 상상 속에 떠오르는 가장 압도적인 장면은 바로 켜켜이 쌓인 퇴적물이다. 내 눈에는 언제나 각종 물질이 끊임없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와 조각 위에 조각이 쌓이고, 층 위에 층이 쌓이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는 듯하다. 이런 현상은 지금껏 수억 년 동안 이어져왔으며, 앞으로도 바다와 대륙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P.133)

 

바다에 관한 어지간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면 저자가 드러내고 보여주고 들려주는 바다 이야기에 무한한 지적 흥미와 상상력에 흠뻑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만큼 카슨의 글쓰기는 과학적 글쓰기와 문학적 글쓰기의 경계를 절묘하게 넘나든다. 거기에 글쓴이가 품은 바다에 대한 애정은 자칫 딱딱해지기 쉬운 문장에 온기와 생기를 불어넣는다. 뗏목을 타고 태평양 횡단 여행에 나선 동료 학자를 향한 부러움과 심해탐사선을 타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진하게 표출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카슨의 글에서 바다는 단지 글쓰기의 대상을 넘어선다. 글의 소재가 되는 모든 존재와 현상은 그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며, 그는 인간적 감정을 그들에게 품는다. 애정과 연민, 그리고 안타까움마저. 엄연한 자연의 질서와 흐름을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스러져가는 존재에 대한 차마 어찌할 수 없는 상념. 더구나 그것이 온전히 자연의 작용이 아니라 인간의 인위적 개입에 의한 파괴와 훼손일 경우 슬픔과 분노는 배가된다. 이것이 훗날 대표작을 쓰게 된 계기가 아니었을까.

 

세계 어느 지역보다 빠르게 고유 동식물 종이 사라져간 하와이제도는 자연의 균형에 간섭하면 어떤 결과가 빚어지는지 똑똑히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동물과 식물, 식물과 토양의 관계는 수 세기에 걸쳐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난데없이 끼어들어 제멋대로 그 균형을 깨뜨림으로써 붕괴로 치닫는 연쇄 작용을 촉발했다. (P.160)

 

우리는 글을 통해 바닷물이 단지 짭짜름한 소금물이 아님을 알게 된다. 대낮에 해변에서 또는 선상에서 접하는 바닷물과는 전혀 다른 풍성한 생명체의 향연이 매번 심야에 벌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날치도 아닌 오징어 떼의 해면 위 점프 광경을 목도하는 감흥이 어떨지 상상해본다. 그리고 바닷속 생명을 가능케 하는 규조류와 플랑크톤의 존재도.

 

규조류는 마치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들판 아래 웅크리고 있다 봄이 오면 싹을 틔우는 밀알처럼 겨울 바다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잠자고 있는 규조류의 씨앗’, 거름이 되는 화학 물질, 봄 햇살의 따사로움, 이것이 바다에서 봄의 개화를 재촉하는 요소다. (P.73)

 

자연의 현상은 언제나 감동적이다. 그것이 인간의 예측과 상상을 뛰어넘을 때 우리는 경이로움과 동시에 압도감에 지배된다. 이는 인간이 축조한 일체의 사물과는 견줄 수 없는 차원이다. 2부에서 다루는 바다의 위력은 일찍이 각종 매체와 뉴스를 통해 접한 바로 그것이다. 지진 해일, 폭풍 해일, 너울과 3부에 나오는 해소(海嘯) 즉 조수 해일 등. 앞의 두 가지야 그렇다 하지만 너울과 조수 해일의 위력은 일대 장관이 아닐 수 없다. 부두와 방파제를 쪼개 버리고 수십 미터 높이의 등대조차도 뒤흔들어버리는 파도의 괴력.

 

파도는 한평생 숱한 사건을 겪는다. 파도의 수명이 얼마인지, 어느 정도 먼 곳을 여행할지, 어떤 최후를 맞이할지는 모두 바다를 여행하면서 만나는 상황에 좌우된다. 파도의 중요한 속성을 하나 꼽으라면 움직인다는 것이다. 파도는 움직임을 지연시키거나 가로막는 것들 때문에 해체 또는 죽음을 맞이한다. (P.187)

 

파도의 속성이 움직임에 있다면, 너울과 해일은 분노로 일그러진 바닷물의 얼굴이라고 하겠다. 반면 일상적인 평온한 얼굴 모습은 조석과 해류에서 관찰할 수 있다. 저자는 특히 해류야말로 지구의 온도와 기후를 유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미국과 유럽에서 중시하는 멕시코 만류와 훔볼트 해류 등 여러 해류가 지구 순환계에 미치는 영향은 막연하게 알고 있는 사실을 되새기게 한다. 엘니뇨현상 역시 바닷물의 흐름에 기인한 게 아니겠는가. 그러하기에 카슨은 해류를 조정하려는 인위적 개입이 가져올 위험성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영속적으로 흐르는 해류는 어쩌면 바다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장엄한 현상일 것이다. 우리는 해류를 떠올리면 즉각 지구의 자전, 지표면을 거칠게 할퀴는가 하면 부드럽게 감싸는 바람, 태양과 달의 영향력에 관심을 갖는다. (P.210)

 

바다는 결코 고요하지 않다. 바다의 쉼 없는 움직임은 가까이는 바람에 의하여, 아주 멀리는 태양의 작용에 따라, 그리고 중간에서는 달의 인력과, 지구의 자전에 의해 비롯된다. 바닷물의 흐름은 해수면을 따라 횡적으로 움직이지만, 온도에 따라 종적으로 섞이거나 역행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이 단기적으로는 날씨를 좌우하며, 장기적으로는 기후변화를 촉발하기도 한다. 그만큼 지구와 인간에게 있어 바다가 갖는 영향력은 압도적이다.

 

바다를 알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바다는 친근감과 동시에 본능적 두려움을 안겨준다. 카슨의 이 책 이후 수많은 바다 관련 저작이 넘치지만 여전히 바다는 신비로움이다. 지표면의 대부분을 점유하는 바다. 바다의 시각에서 보면 우리가 대륙이라 부르는 땅덩어리는 이른바 커다란 섬들에 불과하다. 저자 말마따나 바다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옛사람들이 생각한 바다의 개념은 좀더 넓은 의미로 보면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 정말이지 바다는 우리를 온통 둘러싸고 있다......신비로운 과거에 바다는 모든 흐릿한 생명의 기원을 감싸고 있었으며, 마침내 수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스러져간 뭇 생명의 잔해를 받아들인다. (P.313)

 

앤 즈위거의 비교적 긴 서문과 제프리 레빈턴의 상당히 긴 후기가 덧붙여져 있다. 서문은 저자가 이 책을 발간하게 된 배경과 경과를 알려주는 차원인 것 같고, 후기는 이 책이 발간된 이후 성취한 과학적 결과물을 토대로 책의 내용을 보완하는 성격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도대체 그들은 누구인가? 자그마한 배려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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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바람을 맞으며 레이첼 카슨 전집 1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 에코리브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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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침묵의 봄>을 우연히 읽고 알게 된 인물. 많은 시간이 흘러서야 저자와 저작의 무게감과 깊이, 파장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제 레이첼 카슨 전집이 출간되었다. 첫째 권이자 카슨의 1941년 첫 책이다. 의외로 그의 학문적 배경이자 주요 작품은 모두 해양생물학에 기반을 둔 것이다. 학술적 업적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해양생물학을 대중에게 소개하고 전달하는 과학저술가로 그의 면모는 초기작에서부터 여실히 찾을 수 있다.

 

나는 공식적인 과학적 글쓰기에서는 받아들이지 않는 표현법을 사용했다......물고기의 행동을 이해하려면 인간의 심리 상태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 (P.29~30)

 

오늘날 동물과 자연을 소재로 하는 많은 다큐멘터리는 동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내레이터가 동물과 한 몸이 되어서 마치 자신이 동물인 듯 또는 그들과 동족인 듯 의인화하여 감정과 행태를 공유하는 기법을 사용한다. 너무나 일반적이어서 새삼 생경하거나 이질감조차 들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 이 책이 나온 당시에는 익숙하지 않은 서술방식인 듯 저자는 이 방식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쥐는 새끼 거북을 잡아채더니 이빨로 물고 늪을 건너 조금 높은 지대로 올라갔다. 새끼 거북의 얇은 껍질을 깨물어 갉아내는 데 정신이 팔려 물이 차오르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때 섬 해안 주위를 날아다니던 왜가리가 쥐를 발견하고는 곧바로 낚아챘다. (P.42)

 

위는 <장자>의 한 대목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저자는 여기에서 그리고 책 전체를 통해 철저하게 관찰자의 시각에 머문다. 비록 간혹 전지적 시점을 채택하기는 하지만. 주인공 동물에 감정이입을 아끼는 그의 글쓰기에서 고요한 호흡과 함께 관찰의 세부적 적확성을 통해 동물 다큐의 파노라마와 같은 인상을 받게 된다.

 

<바닷바람을 맞으며>는 해안과 넓은 바다, 해저에서 살아가는 바다 생물체 이야기가 연이어 펼쳐진다. 이 책에서 독자들은 거의 아무런 부연설명 없이 등장하는 사건의 관찰자가 된다. 아마 약간의 프로그램 해설문정도가 순서대로 등장할 것이다. (P.28)

 

이 책의 주인공은 모두 15개의 장에 등장하는 무수한 생물들이다. 이들은 바다 속에서 또는 바다와 밀접한 관련을 맺은 채 자신의 삶을 꾸려나간다. 그중에는 제비갈매기, 세가락도요, 멀릿 등 다소간 비중 있는 배역을 맡은 녀석들도 있고, 스콤버나 앤귈라처럼 별도의 이름을 부여받아 몇 개의 장에 걸쳐 자신의 일생을 온통 보여주는 특별한 개체도 있다.

 

특이한 점은 이 모든 개체를 단지 피동적 관찰대상에 놓지 않고 자체로서 생명을 지니고 주동적으로 움직이는 살아있는 개체로 만드는 저자의 글쓰기 솜씨와 필치다. 솔직히 자연 다큐는 외부인의 시각에 머물기 쉬우므로 맥 빠지기 쉽다. 그나마 영상 다큐라면 화면 보는 맛이라도 있으련만 활자 다큐의 경우 학술과 문학(소설 내지 동화)의 경계에 어중간하게 걸칠 위험성이 있다. 저자는 이 책을 문학에 가깝게 위치를 설정하였지만, 과학적 진실 전달이라는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1부는 해안가를 배경으로 지상과 수중에서 벌어지는 다채로운 생물군과 생활상을 소개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다기로움에 언뜻 어수선한 인상을 받지만 바다를 기반으로 살아가는 생물들의 수효와 그들의 드러나지 않은 생태를 대중에게 소개하여 관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함을 알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제비갈매기, 세가락도요, 멀릿이 여기에 등장한다.

 

반면 제2부는 주인공 하나를 전적으로 내세우고 있는데, 바로 고등어 스콤버다. 알에서 깨어난 어린 고등어가 온갖 모험을 겪고 위험을 무릅쓰며 성장해 가는 과정을 상세하게 서술한다. 갓 태어난 새끼 스콤버가 앤초비와 해파리에 잡아먹힐 뻔하다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장면, 어린 고등어들이 오징어, 대구 그리고 참치의 먹잇감으로 사냥당하는 대목은 극적 긴장감과 서스펜스를 자아낸다.

 

이렇게 천적과 인간의 위협을 간신히 벗어난 스콤버 또한 생존을 위해 플랑크톤과 나아가 청어를 사냥한다. 카슨은 스콤버를 동정하지 않으며, 천적에 분노하지도 않는다. 생존을 위한 엄정한 자연의 먹이사슬이므로.

 

3부는 육지와 대양을 넘나드는 뱀장어 앤귈라가 주인공이다. 이 글을 읽기 전에 담수와 염수를 오가는 어류는 연어 외에 알지 못하였다. 연어와 뱀장어는 행태가 대비된다. 민물에 살던 뱀장어는 산란을 위해 수천 킬로미터를 내려가 대양 한가운데로 향한다. 태어난 새끼들은 다시금 미지의 고향으로 거슬러 헤엄치며 자연의 부름이 있을 때까지 일생을 민물에서 보낸다. 그네들이 상상할 수 없는 여정을 무릅쓰는 것이 오랜 본능의 감각인지 또는 단순히 호르몬의 작용인지 알 수 없다. 어쨌든 자체로서 신비스럽고 기이하다. 대양 한복판에서 뱀장어는 생과 사의 교차를 경험한다.

 

어린 뱀장어들이 해안으로 향할 때 또 다른 무리가 바닷속을 지나갔다. 이제 거의 자라서 검은색과 은색으로 빛나는 뱀장어들이 자신의 첫 번째 고향을 향해 이동하는 것이었다. 이 두 세대의 뱀장어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한쪽은 새로운 삶의 문턱을 넘고 또 다른 한쪽은 깊은 바다의 심연 속에서 생을 마감할 터였다. (P.221)

 

이 책은 해양생태계를 소재로 한 자연에세이다. 자연을 사랑하는 이가 순수한 애정으로 자연의 경이로움을 세상과 공유하고자 하는 시도. 학술적, 과학적 사실조차도 그의 담백하면서도 유려한 문체에 녹아들어가 일체 위화감 없이 독자에게 스며든다. 지저분한 수사와 공허한 과장, 씁쓸한 감정과잉 없는 그의 글은 읽은 후 개운함마저 안겨준다. 본문 자체는 그다지 길지 않다. 서문과 용어 설명을 제외하면 이백 면 남짓. 그런데 서문을 쓴 린다 리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레이첼 카슨의 다음 작품이 무엇일지는 이 책 말미에 암시된다. 해양생물이 삶의 터전으로 삼는 곳, 지구 표면의 대부분을 점유하는 곳. 지구상의 생물과 기후와 지질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곳, 그 자체에 대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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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9 09: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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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학 개론
이재국 외 지음 / 서우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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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상 건축학의 기초를 이해할 필요가 생겼다. 온라인 서점을 훑어보니 그나마 이 책이 비교적 신간이고, 분량도 적당하여 부담스럽지 않게 생각되었다. 막상 책을 펼쳐보니 나 같은 지하철 통근 족에게는 판형이 다소 커서 불편하다, 아무래도 대학생 교재 성격이다 보니 휴대성과 편의성은 부족한 듯.


총 8개의 장으로 구성되었는데, 각각의 장은 다음과 같다. 제1장 건축이란 무엇인가?, 제2장 건축의 형성, 제3장 미래의 건축, 제4장 건축과 他쟝르와의 관계, 제5장 건축과 공간디자인, 제6장 건축과 색채, 제7장 건축재료, 제8장 건축과 법.


개론서답게 건축학의 기본개념을 소개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어 깊이감은 기대하기 어렵다. 내용면에서 아무래도 건축사를 소개하는 제2장이 핵심이며, 제5장에서 제7장까지가 다음 단계의 학습을 위한 실제적 내용을 담고 있어 유용하다.


건축을 이루는 요소는, 매우 다양한 결합으로 나타나게 되나, 대체로 다음의 3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 안전하고 튼튼한 구조기술(구조)

- 편리함과 다기능을 가진 공간(기능)

- 예술적 감동을 주는 공간형태(미)  (P.13~14)


제1장에서 제시하는 건축의 3요소는 일견 상투적이지만 곰곰이 음미해보면 건축이 지향해야 하는 모든 속성을 담고 있음을 알게 된다. 건축물은 순전한 예술품이 아니다. 사회적 기능을 지니지 않으면 제아무리 외관상 화려하게 보이지만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제2장은 동·서양 건축의 차이를 설명하며, 한국건축사와 서양건축사를 기술하는데 제한된 분량치고는 제법 짜임새 있게 다루고 있어 개략적이나마 건축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특히 서양건축사가 비교적 충실하다.


건축은 자체로서 종합예술이다. 건축은 공간의 예술이자, 건축물이 품은 공간을 장식하기 위한 회화, 조각 등을 포용하는 거대 예술이기도 하다. 따라서 건축은 디자인 및 색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한편 건축이 실체로 형상화되기 위해서는 공학기술이 동반되어야 한다. 제7장에서 건축 재료를 소개한 것은 일면 온당한 동시에, 건축학과 건축공학의 교과과정이 많은 경우 연관성을 지니는 연유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용적으로 기대보다는 다소간 흡족하지 못하다. 건축학은 개론서 따위로는 실체를 담지 못할 만큼 광대무변한 영역일 수도 있다. 계획, 구조, 시공, 환경의 분야별로 세분화된 이론과 실습을 통해야 건축학의 참다운 면모에 다가설 수 있다는 게 진실에 가까우리라. 이제 겨우 수박의 겉을 핥은데 불과한 수준.


이 책에 아쉬운 점을 꼽자면, 편집상의 충실도가 떨어진다는 점이다. 강의 자료를 별도 작업 없이 그대로 활자화한 것 외에도 크고 작은 편집상의 미스가 두드러진다. 압권은 부록으로 수록한 건축에 관한 명언들인데, 중간 이후로는 앞에 나왔던 어구들이 무작위로 반복된다. 그럼에도 건축의 문외한에게는 기초적 이해를 돕는 역할은 충분할 것이다. 내용과 관련된 건축물 등 다수의 사진을 수록한 점은 특히 글의 한계를 훌륭히 보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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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체스코 - 맨발에 누더기를 걸친 아시시의 성자 즐거운 지식여행 19
마크 갈리 지음, 이은재 옮김 / 예경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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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성 프란체스코와 관련하여 두 권의 책을 읽었다. 그의 삶과 행적, 그리고 신앙에 대해 대강이나마 이해를 갖게 되었다. 그럼에도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드는 것은 프란체스코라고 불리는 인물(또는 성자)에 대한 객관적이며 종합적인 면모를 파악하는데 이르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빠트린 점을 메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

 

프란체스코의 아버지는 프란체스코의 초기 전기 작가들이 묘사한 것처럼 탐욕스럽지는 않았다. 물론 피에트로 베르나도네는 돈을 좋아하고 대부분의 아시시 상인들처럼 대중의 존경을 원했으며,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갈망했다. (P.29)

 

프란체스코의 가족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특히 그의 아버지는 돈만 밝히고 자식의 영적인 각성과 소명에 대해서는 무지한 욕심쟁이로 기술될 정도다. 저자는 프란체스코의 아버지는 당대의 가치관과 윤리관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변호한다. 그는 열심히 노력하여 존경받는 시민이 된 사람이었다. 프란체스코의 행위가 당대에 일탈로 비춰질 정도이므로 어떤 부모라도 기꺼이 동의와 지지를 보내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후대는 프란체스코의 성인으로서 면모를 부각시키기 위해 그와 아버지를 더욱 대비시키고 말았다.

 

프란체스코는 소위 갑툭튀가 아니다. 부패와 타성에 물든 교회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고자 한 일련의 흐름이 그에 선행하였다. 리옹의 빈자, 겸손회, 카타리 등은 교회 개혁을 기치로 내걸었지만 반교회의 죄명으로 탄압받고 도륙되었다. 프란체스코가 교회의 틀을 그토록 강조했던 배경이 여기에 기인하였을 수도 있다.

 

프란체스코처럼 개혁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 물려준 교훈은 분명했다. 많은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이끌고 싶다면, 교회의 가르침과 성직자의 권위의 한계에 머물러야 한다는 교훈이었다. (P.57)

 

가난과 무소유, 묵상과 전도를 근본으로 삼는 그의 신념은 많은 이들을 매료시켜 그에게 몰려들게 하였지만 그로 인해 그는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벤처기업의 출발은 한두 명의 탁월한 인재에서 시작되지만, 회사가 성장할수록 조직과 관리부문의 중요성이 증가한다. 이 단계를 슬기롭게 넘기지 못하면 벤처신화는 단명에 그치고 만다.

 

[프란체스코]는 수사들이 연구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면 더 높은 수준의 기도와 예배를 게을리 할 것을 염려했다. 더 훌륭한 설교를 하는 데도 문제가 될 수 있었다. (P.143)

 

우골리노와 엘리아스는 자꾸만 더 많은 학식을 요구했다. 그들은 영혼의 성장도 중요하지만, 수도회의 장기적 성공을 위해서는 학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P.143)

 

이처럼 프란체스코와 그의 계승자들 간의 견해가 갈라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프란체스코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수도회 역시 많은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공간과 비용, 관리체계를 필요로 한다. 더욱이 입회한 이들의 성격과 태도, 관심 역시 다양하므로 획일적 규율이 쉽지 않다. 모든 이가 프란체스코처럼 신과 직접 소통할 수 있지 못하므로 성서 연구도 필요하다. 이 모든 것들은 프란체스코의 신념과 배치되므로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분열은 그의 생전에 이미 배태되었다.

 

우리 아무것도 바라지 말자.

아무것도 원하지 말자.

어떤 것도 즐거워하거나 기뻐하지 말자. (P.103)

 

프란체스코의 수도 방식은 극단적이다. 그의 철저한 가난, 순결, 복종, 기도, 충성 등의 규율은 절대자에 대한 무조건적 헌신과 세속적 가치의 포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현세에 대한 내세의 우위, 육체에 대한 정신의 우월. 이는 악덕과 죄악으로 가득 찬 우리 육체를 미워합시다.”(P.102)라는 구호로 이어졌다. 매질과 단식으로 육체를 학대할수록 정신은 고양할 수 있으리라는 미망에서 프란체스코 역시 자유롭지 못하였다. 예수와 부처가 득도할 때도 이러했는지 궁금하다.

 

사실 그의 일생 내내 이러한 모순적이고 너무나 인간적인 방황을 계속되었다.....프란체스코는 진실로 성인이었지만, 성격적 결함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성인이었다. (P.52)

 

이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프란체스코는 서양 문화와 종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개혁이 기독교의 주류가 되었다면 루터의 종교개혁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묵상과 겸손과 복종을 핵심가치로 삼는 수도회의 존재는 종교가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고 민중의 지지와 존경을 유도하는 균형추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크지 않은 판형에 고급 모조지, 다수의 칼라 도판, 시의적절한 참고사항 소개 등 이 책의 미덕은 다양하다. 안개 속에서 모호한 윤곽만 드러나던 프란체스코가 비로소 뚜렷이 눈앞에 다가왔다. 저자 역시 종교인이니만치 프란체스코의 말과 행적이 갖는 종교적 의미와 그것이 당대는 물론 현대의 종교계와 사회에 미치는 영적 자극과 각성의 영향도 선명히 밝힌 점이 특히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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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다 이야기 을유세계문학전집 66
스노리 스툴루손 지음, 이민용 옮김 / 을유문화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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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로마신화에 비하면 북유럽 신화는 근년 들어서야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편이다. 순수 문화적 관심보다는 PC게임과 영화를 통해 대중에게 존재가 각인되었다. 북유럽 신화가 켈트 신화와 마찬가지로 서양 문명의 적통을 잇지 못하였고 전승도 상대적으로 미약한 탓이리라. 스톨루손의 이 산문 에다는 13세기에 기록되었으며, 운문 에다가 시기가 다소 앞선다고 하지만 주류 신화에 비하여 전승역사가 비교적 짧다. 어쨌든 국내에 산문 에다의 번역본은 처음 출간이다.

 

이 책은 북유럽 신화의 원전으로서 정통성과 가치를 지니고 있는 반면 체계가 잘 잡혀 있지는 않다. 따라서 이 책 한 권으로 북유럽 신화 전체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기는 힘들고 다른 해설서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도입부는 세상의 탄생과 아스 신족의 연원을 다루고 있는데, 당대의 종교와 지리 지식이 반영되어 고색창연한 신화의 전개를 예상한다면 다소 당혹스럽다. 반면 서리 거인 위미르와 태초의 암소 아우둠라, 세계수 물푸레나무 위그드라실과 신들의 궁전 아스가르드는 흥미롭다. 오딘, 토르, 로키. 이들은 영화 <토르>의 주된 인물로서 친숙한데, 북유럽 신화의 주신들로서 아스 신족에 속한다. 이야기 중에서도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오딘은 모든 신과 인간 그리고 그와 그의 힘이 창조한 모든 것의 아버지이므로 모든 이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P.35)

 

그리스 신화의 열두 신과 대응하여 오딘을 정점으로 여러 신들이 존재하는데, 유명한 토르를 제외하면 로키의 존재감이 두드러진다. 로키는 아스 신족이 아니면서 일족으로 간주되는 독특한 지위를 지니는데, 신화에서 발생하는 모든 악역을 전담하고 있다.

 

아스 신들 중 하나로 간주되는 자가 있으니, 사람들은 그를 아스 신들의 중상모략가’, ‘음모의 원흉’, ‘모든 신과 인간의 치욕이라고 부른다. 그의 이름은 로키 혹은 로프트이며, 거인 파르바우티의 아들이다......로키는 매력적이고 호감을 주는 외모지만, 성격이 사악하고 행동이 변덕스럽다. 그는 교활함에 있어 모든 이를 능가하며, 속이지 않는 것이 없다. (P.66~67)

 

로키는 세 괴물 자식들인 늑대 펜리르, 외르문간드(미드가르드 뱀), 헬을 두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신들의 적이다. 훗날 라그나뢰크가 도래했을 때 이들은 오딘과 토르와 목숨을 맞바꾼다. 로키 자신도 발드르의 죽임을 사주하여 신들의 세상에 균열이 생기게끔 하는데 일조한다. 신화에서는 발드르의 죽음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모든 신들이 발드르를 부활시키려고 노력하나 로키의 방해로 실패하는 과정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신들과 인간들은 엄청난 슬픔과 고통에 잠겼다......그중에서도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이는 오딘이었으니, 그는 발드르의 죽음이 아스 신들에게 얼마나 큰 재앙이고 상실인지를 가장 잘 알았기 때문이다. (P.111)

 

모든 독자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신족들은 그토록 나쁜 짓을 많이 저지르고 동료 신마저 죽게 만든 로키를 왜 죽이지 않아 결국 라그나뢰크를 겪게 된 것인지. 신성한 장소에 피를 흘리기를 꺼려한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세상에 악의 존재는 불가피하고 결코 떨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상징적 해석이 오히려 가능하다.

 

거인 족과의 최후의 전쟁에서 아스가르드는 무너지고 신들의 세계는 종말을 맞이한다. 그것이 라그나뢰크다. 세계의 탄생에서 종말까지 선형적 전개를 이루는 점이 서양 문명의 특성답다. 그럼에도 신화는 그것이 끝이 아니고 새로운 세상이 시작됨을 선언한다.

 

이상이 제1<귈피의 흘림>에 담긴 내용이다. 북유럽 신화의 개요를 충실하게 수록하고 있다. 2<스칼드의 시 창작법>은 음유시인들이 신화 내용을 시로 창작하거나 노래할 때 갖추어야 할 기본적 신화 지식을 소개한다. 앞편이 줄거리 중심이라면 여기서는 신의 이름, 사물, 사건 등이 유래한 내역을 알 수 있어 두 편을 함께 연결시켜야 씨줄과 날줄처럼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

 

오딘이 외눈박이가 된 사연, 토르의 망치가 생겨난 배경과 손잡이가 짧은 이유 등이 흥미로운데, 무엇보다도 시 창작의 언어 중 케닝을 강조하고 있다.

 

이 방식은 우리가 오딘, 토르, 튀르 혹은 어떤 아스 신이나 엘프를 우리가 규정하는 방식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이 경우 저는 아스 신들의 특성이나 그들의 업적 중 하나를 이름으로 덧붙입니다. 이에 따라 원래의 이름이 아닌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P.147)

 

오딘의 케닝은 승리-튀르, 교수형을 당했던 튀르, 운송물의 튀르, 전차-튀르 등이며, 수달의 배상금, 아스 신들의 배상금, 분쟁의 광물 등은 금의 케닝에 해당한다. 금의 케닝 편에서 시구르드 이야기가 소개되는데 훗날 <니벨룽겐의 노래> 원형에 해당한다. 예수의 케닝은 이질적이지만 이해할 만하다.

 

스톨루손은 기독교의 득세로 점차 소멸되는 전통 문화 보존과 함께 아이슬란드의 고유성 보전을 의도하였다. 산문 에다가 기록된 시기는 이미 아이슬란드가 기독교화 된 지 수백 년이 지난 시점. 부지불식간에 기독교의 영향이 사회와 문화 전체에 스며들었을 것이다. 이 책의 곳곳에서 드러나는 흔적이 그러하다. 그럼에도 저자 덕택에 우리는 남유럽 못지않은 풍요로운 이야기와 상징체계가 북유럽에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으니 문화의 다양성 인식에 크나큰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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