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헤르만 헤세 컬렉션 (열림원)
헤르만 헤세 지음, 정성원 옮김 / 열림원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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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성 프란치스코[프란체스코]를 궁금해 왔다. 도대체 어떤 인물이고 무슨 활동을 하였는가. 분명히 기독교의 성인 중 한 명임은 틀림없을 텐데 별도의 관련 책도 있고, 리스트나 오네게르 같은 음악가 들이 그를 다루는 작품을 썼는지. 마침 도서관 서가를 지나치다 친숙한 헤르만 헤세가 그에 관한 글을 남긴 사실을 알게 되어 입문서 삼아 읽는다.

 

이 책은 작가의 머리말과 간략한 전기, 그리고 작가가 선별한 다섯 편의 성인담과 마지막으로 맺음말로 구성된 얄팍한 글이다. 부록으로 그림과 서평, 단편을 추가로 곁들였다. 이 글의 본문은 1904년에 발표되었다. 이때는 헤세가 그의 저명한 작품들을 발표하여 이름을 처음으로 알리기 시작한 시기와 맞물린다.

 

십대와 이십대 초의 열정의 시기에 무려 10여 년이라는 시간을 헤세는 프란치스코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고 하는데 무슨 연유였는지 머리말을 통해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세상의 주인인 로마 교회는 인류의 평화에 매진하기보다는 군비 확충, 동맹과 외교, 금지와 처벌에 더 기를 썼다. 두려움에 휩싸인 민중에게는 심각한 위기가 닥쳤다. (P.10)

 

세계가 자신의 욕심을 충족하기 위하여 가녀린 평화를 사정없이 깨뜨릴 때 고초를 겪는 것은 무수한 힘없는 평민들이다. 헤세는 제국주의가 절정으로 치닫던 시절 임박한 어둠과 고난의 시절을 예감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더더욱 평화를 지향하고 애호하던 한 인물에 주목했는지도.

 

순수하고 고귀한 사람의 삶은 늘 거룩하고 신비롭다. 그 삶은 엄청난 힘을 발산하고 저 먼 곳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이 점은 그 옛날의 다른 영웅과 위대한 인물 들 대부분보다 아시시의 가난한 사람의 삶에서 훨씬 더 또렷이 드러난다. (P.65)

 

프란치스코는 극적인 삶의 방식을 살아간 사람이다. 한없는 방탕함에서 세상 누구보다 낮고 가난함으로. 세속의 명예를 추구하기 위한 출전에서 문득 계시를 받고 이후로는 세속의 영광은 뒤돌아보지 않는다. 심지어는 혈연관계마저도. 그의 온 몸과 마음은 오로지 하나님을 섬기는데 헌신한다.

 

프란치스코를 예수 바로 아래 위치시킨 오상(五傷)에 대해 헤세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 성자 프란치스코를 찬미할 뿐, 이성의 관점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의 힘에 기대지 않는다. 따라서 기독교 성인으로서의 프란치스코를 알고자 한다면 헤세의 글쓰기에 다소 불만족을 느낄 수도 있겠다.

 

헤세가 바라본 프란치스코의 진면모는 그가 우월한 지위에서 민중을 경시하거나 훈도하지 않고 항상 낮은 곳을 지향하며, 동굴에 틀어박혀 세속과 단절되어 깨달음과 구원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프란치스코는 수행과 순례를 등가로 보았다.

 

프란치스코는 결코 우울한 빛을 띠며 참회하거나 세상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웃음 가득한 말과 기분을 북돋우는 유쾌한 말을 즐겼고, 아무리 고단하고 힘겨운 날이 닥쳐도 그 누구에게도 우울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P.45)

 

헤세는 이렇게 말한다.

 

영혼이 똑같이 순수하고 고귀했던 다른 성인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남들보다 조금 더 기억될 뿐이다. 프란치스코는 천진난만한 시인, 사랑의 위대한 스승, 모든 피조물의 겸손한 친구이자 형제였다. 사람들이 그를 잊는다면 돌과 샘, 꽃과 새 들이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할 것이다. (P.33)

 

프란치스코가 마세오 형제의 질문에 답하는 성인담에서 그의 한없는 겸허함을 알 수 있으며, 새들에게 설교하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한 장면이다. 헤세는 프란치스코를 훗날 르네상스를 이끌어낸 선구자로 찬양한다. 그의 소박한 인간미와 온화한 품성을 예술로 재현하려는 정신이 교회의 경직된 틀을 탈피할 수 있는 영감과 활력을 주었다는 것이다. 진위 여부를 떠나서 매우 참신한 논거라고 하겠다.

 

프란치스코의 성인담은 풍부하게 남아있는데 비해 헤세는 <태양의 노래>를 포함한 여섯 편만을 선별하여 싣고 있다. 그의 창작의도가 프란치스코의 이적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점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서평은 <성 프란치스코의 작은 꽃다발> 독일어판에 대한 것이며, 단편은 프란치스코의 유년 시절의 에피소드를 상상하여 그려낸 것이다. 한편 중간에 포함된 조토의 프란치스코 연작화는 프란치스코의 일생의 주요 대목을 프레스코화로 재현해 낸 것으로 13세기 당대에 성인 프란치스코의 위상을 짐작케 한다.

 

마지막으로 프란치스코에 대한 헤세의 종합적 평가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하늘의 천사가 씨앗을 뿌리듯 민중에게 근원적인 힘과 가슴속에서 불타오르는 말과 영원에 대한 생각과 태곳적 인류의 그리움을 뿌리는 사람은 드물다. 그리고 아름답게 꾸민 글과 예술이 아니라 오로지 순수하고 고귀한 존재로 수 세기에 걸쳐 사랑과 찬미를 받고, 지고지순한 곳에서 우리를 비추는 복된 별로 서 있으며,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헤매는 인류를 위해 미소 짓는 찬란하고 온유한 길잡이와 통솔자인 사람 또한 드물다. (P.7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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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 팜팔론 - 동방의 성자들에 관한 전설
니콜라이 레스코프 지음, 이상훈 옮김, 비탈리 콘스탄티노프 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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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품>

1. 광대 팜팔론

2. 하느님의 마음에 든 나무꾼 이야기

3. 아름다운 아자

4. 양심적인 다니엘에 관한 전설

5. 그리스도인 표도르와 그의 친구 유대인 아브람에 관한 전설

 

레스코프의 작품이라 관심이 쏠렸고, 기독교 성자전이라는 점에 망설였다. 그래도 레스코프가 쓴 글인데 터무니없지는 않을 거라는 일말의 기대감은 이내 안도감으로 다가왔다. 여기에 수록된 다섯 편은 고대 그리스의 성자들 이야기다. 작품해설에서는 창작 성자전이라고 하는데 완전한 창작인지는 판단이 애매하다.

 

공산화되기 이전의 러시아의 국교는 러시아 정교임을 알고 있다. 멀리 동로마 제국 시절에 가톨릭과 분화되었지만 그리스도를 숭배한다는 점에서 같은 뿌리의 종교다. 여기 실린 성자들은 굳이 가톨릭인지 정교인지 구분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절, 종교간 분화가 본격화되고 고착화되기 이전이므로, 게다가 아직은 종교적 순수성과 열정의 자취가 남아있을 때이므로.

 

1. 광대 팜팔론

표제작인 동시에 분량이 130쪽에 가까운, 이 책의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제법 긴 이야기다. 동로마의 한 고위 관리가 타락한 세상에서 깨끗함을 유지하고 싶어 세상과 인연을 끊고 수행의 길에 들어선다. 고행의 도중에 그는 구원의 가능성에 회의적이 되지만 중동의 광대 팜팔론을 찾아가라는 계시를 받는다. 고생 끝에 찾아간 팜팔론은 아무리 살펴봐도 모범적이거나 존경스러운 인물이 아니다. 종교적 생활과는 전혀 거리가 멀고, 오히려 불경한 환경에서 희희낙락하는 재주를 부리며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다.

 

아니요, 절망한 게 아니라, 단지 걱정하지 않고 즐겁게 사는 사람이 되겠다는 거지요. 그러니 나하고 믿음에 관해 말하는 건......, 어울리지 않아요. (P.49)

 

내가 너무 앞뒤를 가리지 않기 때문이지요. 누군가 도와주어야 할 사람이 있으면, 난 내 자신의 영혼 따위는 생각하지 않거든요. (P.58)

 

한마디로 말해서, 난 나무통, 그것도 타르 통이며, 아무 쓸모없는데다가 구제 불능인 무용지물에 불과하지요. (P.133)

 

팜팔론과의 대화를 통해 그의 삶의 이력을 알게 되자 비로소 예르미는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에 대한 소박한 믿음, 일상의 생활을 즐겁고 보내고자 하는 충실한 자세. 그리고 이타적인 삶의 태도

 

또한, 자기와도 관련된 얘기를 들으면서 자신의 죄악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자기애(自己愛).

 

자기 자신의 영혼만을 위해 세상을 등졌답니다. 무서운 노인네지요! 하늘이 그의 고행자적 자기애를 용서해주시기를. (P.111)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처럼 자기구원에 중점을 두는지 세상의 구원에 대한 헌신에 노력하는지는 여러 종교의 숙명적 과제인 듯 싶다. 예르미는 통상적인 관점에서 전혀 비판받을 인물이 아니다. 그럼에도 작가는 예르미보다 일개 광대를 우위에 놓으면서 종교인의 진정한 본분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제기하고 있다.

 

2. 하느님의 마음에 든 나무꾼 이야기

이 이야기도 전자와 유사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극심한 가뭄을 끝내는 기도는 신분 높은 주교가 아니라 보잘 것 없는 나무꾼에 의해서다. 나무를 팔아서 생계를 꾸리는 노인네, 날씨가 나쁘면 굶지만 날씨가 좋으면 나무를 하러 가며 자신의 삶에 하등 불만과 욕심을 부리지 않는 평범한 사람. 소박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해준데 대하여 주님께 감사를 드리는 그의 모습이야말로 하느님의 마음에 쏙 들 수밖에.

 

3. 아름다운 아자

한 이집트 처녀의 영락하고 고통스러운 삶의 이야기는 또 무엇일까. ‘아름다운 아자로 일컬어질 만큼 빼어난 외모와 풍족한 재산을 가진 그녀는 어려운 처지에 빠진 타인을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내어놓는다. 순식간에 영락한 그녀는 밑바닥 삶을 전전하다 일개 창녀의 신분이 되고 만다.

 

상식을 지닌 우리들은 아자를 비난할 뿐이다. 타인에 대한 동정도 정도가 유분수지 말이다. 하지만 아자는 삶이 고통스러울지라도 당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육신의 안온과 정신의 평안 사이에서 그녀는 후자의 길을 걸어갔으므로. 그녀는 이렇게 묻는다.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고통 속에 빠져들어야 할 것인가? 3의 길은 진창과 석탄불 사이에서 허덕이며 걷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우리 가슴에 동정의 마음이 주어진 것일까? (P.164)

 

한 가닥 남은 기력으로 교회를 찾아가 일원으로 받아주기를 간구하였으나 소외당한 아자는 지쳐 생을 마감한다. 외견상 타민족이자 창녀인 그녀가 죽어 구원을 받았음을 알았을 때 교회의 사람들은 무척이나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4. 양심적인 다니엘에 관한 전설

한 기독교인이 자신이 사는 땅을 침략한 야만인을 죽인다. 그 일로 다니엘은 양심의 괴롭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이 죽인 야만인의 잔영이 가슴 한가운데 자리 잡고 눈알을 부라린다. 세속을 다스리는 영주는 물론 신앙을 관장하는 주교를, 대주교를, 그리고 교황을 찾아가도 이는 죄가 아니라고 한다. 그럼에도 자신은 괴롭기 그지없다.

 

현대에 와서도 마찬가지의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전쟁이 났을 때 나라와 가족과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적군을 죽이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 현실에서는 훈장도 받고 영웅 칭호를 듣게 될 것임은 당연하다. 하지만 인간의 본질적 측면에서는 어떠한가.

 

다니엘은 자기를 괴롭힌 양심이야말로 가혹한 신의 형벌이 아니라 다니엘 자신이 죄에 무감각해지지 않도록 경고하는 선()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너무나 기쁜 마음에 행복의 눈물을 흘리며 탄성을 질렀다. (P.206)

 

다니엘은 문득 깨닫는다. 양심은 죄의식을 상기시키는 등대임을. 저지른 죄를 돌이킬 수 없다면 죄 씻음을 구하기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했음을. 사람을 죽였다면 반대로 사람을 살리기 위한 행위가 필요했음을. 그래서 자신의 제자가 되겠다는 젊은이에게 다니엘을 말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마음으로 가서 사람들을 섬기게. (P.210)

 

5. 그리스도인 표도르와 그의 친구 유대인 아브람에 관한 전설

기독교인과 유대인. 종교적으로는 결코 화합될 수 없는 관계다. 히틀러의 악행은 정도가 심하였을 뿐 중세와 근대 유럽에서 유대인에 대한 탄압과 핍박은 줄을 이었다. 레스코프 시대에도 갈등과 차별은 다르지 않았음을 이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그것은 오늘날 중동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기독교와 이슬람 국가 간의 반목과 갈등에서 여전하다. 자신과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생명을 빼앗고 재산을 침탈하며 거주지에서 쫓아내는 게 정당한 행위인지 말이다.

 

사이비종교가 아닌 진실한 종교라면 궁극의 지향점은 동일하다. 인간의 구원과 영원한 행복이라는 정상에 오르는 길은 단 한 가지가 아닐 수 있다. 자신의 길이 아니면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얼마나 오만방자한 인식인가. 표도르와 아브람의 신앙을 초월한 우정은 그래서 더욱 아름답고 뜻깊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결코 어떤 신앙이 더 낫다거나, 어떤 신앙이 더 신의 뜻에 맞는가 하는 문제로 싸워본 적이 없기 때문에 현재도 서로의 신앙에 관한 논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신앙을 올바로 이해하고 악한 생각이나 평화를 해치는 악습이 없다면, 그 어느 종교든지 인생을 바른 길로 이끌 수 있을 것이라고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P.243)

 

역으로 작가는 종교 간의 갈등을 봉합할 수 있는 해법도 제시한다. 그것은 아직 머리가 굳지 아니한 아이 때부터 종교와 다른 아이들을 한 곳에서 교육시키는 것이다. 차이를 존중하는 방법을 어릴 때부터 익힌다면 커서 어른이 되더라도 차이로 인한 분쟁은 줄어들 것이다. 팜필로스가 종교분리 교육을 하라는 당국의 명을 거부하면서 하는 말처럼.

 

어린 시절부터 영혼의 평화와 상대방을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이 몸에 밸 때까지 아이들을 분리하는 일을 미뤄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개별적인 생각의 차이를 깨달을지라도 아이들의 마음이 분열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P.226)

 

 

레스코프가 단지 종교적 열정이 들끓어서 성자전을 썼을 것 같지는 않다. 성자를 소재로 한 단지 흥미를 주기 위한 목적도 아닐 것임은 확실하다. 그가 보기에 당대의 종교와 종교인들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에서 더없이 멀어졌고 타락했다. 그래서 그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순수성을 당대에 되살려 경고와 교훈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성자전이라고 특정 종교적 관점에서 백안시할 필요도 없다. 이야기 자체로서도 흥미진진하다. 특히 마지막 이야기는 종교간 갈등에 사로잡힌 세간의 행태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함께 종교를 아우르는 형제애를 통한 평화의 간구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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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과 천둥
온다 리쿠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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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현대문학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탓으로 작가는 알지 못한다. 단지 알라딘 인터넷서점의 클래식 음반 메뉴에 동명의 음반이 나와 있는 것을 보고 그나마 흥미를 갖게 되었다. 클래식 음악에서 일본의 세계 최대의 시장이라고 한다. 그만큼 애호가도 많고 매니아층도 넓다는 뜻이리라. 언제나 감동을 주는 <노다메 칸타빌레>와 같은 기억을 남겨주길 바라며 책장을 펼친다.

 

노력만으로 이루기 어려운 분야 중 특히 예술이 그러하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의 한탄은 그래서 우리 같은 범부(凡夫)의 심정을 대변한다. 단지 1%, 아니 0.1%의 차이로 좋은 연주가와 거장의 넘을 수 없는 벽이 생긴다. 노력한다고 모차르트가 될 수 없음을 알지만, 재능이 있다고 가만히 있어도 모차르트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 치열한 경연의 현장이 음악 콩쿠르다. 무명의 음악이 단순에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무대에 등장하는 계기.

 

소리의 느낌을 글로써 풀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 단순히 글 솜씨가 뛰어나다고 충분하지 않다. 작가 자신이 클래식 음악에 대한 지극한 애호와 관심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일반 독자가 아닌 소위 음악을 좀 아는 독자의 비웃음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 온다 리쿠는 다행히도 그러하다. 물론 일본인 특유의 뭐랄까, 호들갑스럽고 과장되게 찬미하는 버릇은 여전하지만.

 

작가는 이 두툼한 소설에서 여러 얘기를 하고 싶은 모양이다, 음악과 삶에 관한,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고 감상한다는 의의에 대해서 말이다. 그것은 연주가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예술을 통한 삶의 의미에 관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리쿠는 먼저 작품의 굵직한 플롯인 요시가에 국제 피아노콩쿨의 예선과 본선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르포르타주처럼 세밀하게 기술하여 독자에게 콩쿨의 세계를 속속들이 알게끔 한다. 참가자들의 처지, 선곡의 목적, 음악에 임하는 태도 등 비록 나와는 다른 영역에 속하지만 그네들 역시 한 사람으로 갖는 불안과 초조, 기대 등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

 

생활 속에서 음악을 즐길 줄 아는, 뛰어난 귀를 가진 사람은 할머니처럼 평범한 곳에 있다. 연주자 또한 평범한 곳에 있어도 되지 않을까?

......‘평범한 곳에 머물고 싶었다. 할머니 같은 사람이 사는 세계에 속하고 싶었던 것이다. (P.80)

 

그런 면에서 다카시마 아카시에게 응원의 염이 쏠림을 어쩔 수 없다. 가정을 갖고 생계에 애쓰는 그나마 일반인에 가까운 그가 예술과 생활을 병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보다 인간미가 있으므로. 예술은 외따로 고립되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 공감하고 수용될 때 본연의 가치가 빛을 발한다. 시대를 앞서간 천재는 후대에 영예를 누리지만 생전은 불우하기 십상이다. 감식력 있는 귀가 없더라도 음악이 들려주는 음 자체와, 선율과 리듬에서 즐거움을 찾고 누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요즘 연주가는 작곡가의 의도를 얼마나 정확하게 읽어내고 작곡 당시의 시대나 개인적 배경을 상상하는 데 중점을 둔다. 연주가의 자유로운 해석, 자유로운 연주는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풍조가 있다. (P.226)

 

가자마 진 같은 괴짜 천재의 사례는 무어라고 해야 할까. 심사위원들 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당혹스럽다. 콩쿨에서 전혀 비콩쿨 스타일의 연주를 하는 그는 오늘날 거의 사라져버린 연주가 유형이다. 작곡가의 의도 구현에 목매단 나머지 도전과 개성을 상실하여 박제화 된, 또는 균질적인 연주가들이 득실거리는 시대에. 그는 의식하지 못한 채 음악의, 그리고 연주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새삼 청중과 독자에게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작중의 저명한 유지 폰 호프만은 세상에 그를 내보내며 선물이 될 지 재앙이 될 지는 음악계에 달렸다고 유지를 남긴 것이다.

 

이 아이는 반대다. 곡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고 할까, 프로나 잔소리꾼들이 싫어하는 방법을 쓴다. 아니, 그렇지 않다. 곡을 자기 세계의 일부로 만들어버린다. 곡을 통해 자기 세계를 재현하고 있다. 어떤 곡을 연주해도 뭔가 커다란 그림의 일부로 만들어버리는 듯한. (P.535)

 

솔직히 마사루와 아야의 기묘한 우연과 뜻밖의 재회는 작위적이다. 천재적 재능이 지닌 두 젊은이를 굳이 엮어놓을 필요는 없을 텐데. 완벽한 연주로 청중과 심사위원을 모두 사로잡는 마사루는 기교와 예술을 절묘하게 조화시키고 개성마저 뚜렷하다. 아마 현시대가 요구하는 가장 탁월한 연주가의 전형일 것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그에게 한 가지 여운을 남긴다. 재현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만들고자 하는, 즉 음악 창작의 욕구 말이다. 연주 자체도 창작의 일환이지만 순전한 창작에는 미치지 못한다. 고고한 예술혼에 치중한 나머지 세상과 고립된, 자신만의 음악에만 매몰된 음악이 아니라 모차르트나 베토벤 당대처럼 청중과 교감하는 음악.

 

그것은 새로운클래식을 만드는 것. 현대에 클래식으로 불리는 작곡가들처럼 새로운피아니스트 작곡가가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P.458)

 

소위 말하는 대부분의 현대음악은 한없이 좁은 시장에서 활동하는 작곡가 본인과 평론가를 위한 음악이지, 반드시 연주하고 싶고 듣고 싶은 곡은 아니다. (P.459)

 

표제는 상징적이다. 꿀벌은 가자마 진, 천둥은 에이덴 아야와 결부된다. 일찍이 자연에서 음악을 발견한 뛰어난 재능. 전자는 뒤늦게 유지 폰 호프만의 섬세한 가르침으로 살아있는 음악을 만들 줄 알게 되었다. 후자는 천재 소녀로서 회자되다가 어머니의 죽음 이후 소진 증후군으로 음악계를 떠나버렸다. 여러 참가자와 심사위원이 등장하지만 에이덴 아야가 핵심적 인물이다. 등 떠밀려 콩쿨에 참가한 아야는 경연 과정을 통해, 참가자들이 들려주는 음악의 일깨움을 통해 음악인의 본질에 다가선다. 음악을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것의 의미.

 

치열한 콩쿨은 어느덧 끝나고 각자는 순위가 매겨져 흩어진다. 그럼에도 독자는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이 그네들에게 있어 대단원이 아니라 눈부신 시작에 불과하다고. 그들 앞에는 음악을 향한 새로운 세계로 이어지는 길이 펼쳐져 있음을. 가자마 진은 이렇게 되새긴다.

 

행복. 행복하다. 세상은 이토록 음악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실내에서 음악을 데리고 나가, 함께 세상을 채워갈 것이다.

동지도 있다. 동지를 찾아냈다. (P.692)

 

온다 리쿠의 글쓰기는 영화를 연상시킨다. 카메라는 인물들 전체를 조감하다 쓱 하나의 인물 깊이 파고들어 그들의 과거와 내밀한 심경을 파헤친다. 주변 인물들에도 소홀하지 않고 적절한 배분을 아끼지 않는다. 인물 몰입이 지나칠 때쯤 문득 콩쿨에서 연주되는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으로 분위기를 전환한 후 영탄어린 감상으로 고조시킨다. 양념으로 인물의 개인사와 인물들 간의 은근한 러브라인도 반영하여 다른 의미에서 독자를 지루하지 않게 한다. 무척이나 능숙하고 효과적인 작법이다.

 

내가 나름 클래식 음악 애호가라서 더 집중과 몰입이 용이한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예술과 사람에 대한 작가의 시각과 기술이라면 음악 애호 여부와는 상관없이 소설 자체로서 충분히 설득력이 높다는 생각이다. 새삼 다른 작품도 읽고 싶은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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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티에 환상 단편집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테오필 고티에 지음, 노영란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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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은 자유롭다. 환상, 공상, 몽상, 망상 혹은 백일몽과 같이 각기 다른 이름을 지니지만 자유로움의 본질은 동일하다. 상상은 현실에서 실현하기 어려운 상념의 무한한 추구가 가능하다. 그러하기에 개인의 은밀한 욕망을 표현하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고티에의 환상 단편들처럼.

 

학창 시절, 소위 책받침 미인들의 추억을 다분히들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녀들이 현실에 되살아나서 자신의 연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소망하지 않은 이가 누가 있겠는가. 역사 속의 인물, 명화 속의 여인, 사진 속의 모델 등에 대한 찰나의 욕망 마찬가지다. ‘사랑에 빠진 죽은 여인은 이전에 <세계의 환상 소설><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프랑스>에서 이미 읽은 기억이 있다.

 

1. 커피포트 아가씨

2. 옹팔

3. 사랑에 빠진 죽은 여인

4. 아리아 마르첼라

 

아무래도 씌어진 시기상 뒤로 갈수록 보다 세련미와 원숙미가 두드러짐을 알 수 있는데, 새삼 사랑에 빠진 죽은 여인이 뛰어난 작품임을 비교해보니 알 수 있다.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우선 남성 주인공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여성을 만나고 사랑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작가가 남성이기에 이러한 설정이라고 치부할 수 있지만, 시대를 초월한 영원한 사랑을 갈구하고 이성의 유혹에 약한 것은 상대적으로 남성에 더 많다.

 

환상 속의 여성을 이끌어내는 소재는 다양하다. 커피포트, 태피스트리, 죽은 여인, 폼페이의 유물 등. 터무니없지만 전혀 황당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은 매우 사실적인 까닭이다. 우리는 사실과 환상을 명확히 구별한다. 정통 소설 자체도 그럴듯한 허구를 그리는 것이지 누구나 알아차릴만한 비현실은 완전히 다른 장르다.

 

고티에는 현실과 상상을 한데 뒤섞어 놓는다. 작중 인물은 환상을 일상처럼 당연시 받아들인다. 그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리고 대화도 주고받는다. 그것이 이상하다고 깨닫는 순간 두 세계 사이에 넘나들 수 없는 벽이 생긴다. ‘옹팔에서 주인공의 삼촌은 태피스트리 속의 여인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다. 그는 후작부인이 얌전히 있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어기고 조카를 유혹한 것에 분개한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아스라한 가운데 현실이 환상과 교차된다. ‘커피포트 아가씨에서 화자는 심야에 침실이 되살아나는 광경을 목도한다. ‘옹팔에서 태피스트리 속의 후작부인은 방안으로 훌쩍 뛰어내린다. 현실과 환상이 서서히 맞물리는 장면을 더없이 극적으로 묘사한 작품은 아마도 아리아 마르첼라일 것이다.

 

오랜 환상을 품을 수 있는 때는 대개 밤 시간이나 꿈속에서다. 밤은 은밀하다. 햇빛은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지만 달빛과 별빛은 깊은 음영을 강조할 뿐 실체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 속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황홀한 순간을 보내지만 시간의 흐름과 신체의 주기는 속절없다. 현실과 환상은 낮과 밤의 관념마저 뒤흔든다. 호접몽은 장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내 안에 두 명의 인간이 살고 있었는데, 서로 상대방을 알지 못했네. 때로는 밤마다 자신이 멋진 귀족이 되는 꿈을 꾸는 사제였고, 때로는 자신이 사제인 꿈을 꾸는 귀족이 되었네. 나는 더 이상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게 되었네. 어디서부터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환상인지 알지 못했다네. (‘사랑에 빠진 죽은 여인’, P.85)

 

환상은 찰나에 불과하며, 우리는 현실을 벗어나 살 수 없다. 단편들의 결말이 항상 현실로 되돌아오는 것은 당연하다. 순간의 일탈과 상상 속 욕망충족은 결코 현실화될 수 없으므로 탐닉은 오히려 심신에 피폐케 할 뿐이므로.

 

내 안에 있는 두 명의 존재 중에서 나머지 하나를 위해 또 다른 하나를 죽여 버리거나, 아니면 둘 다 죽여 버릴 결심을 했네. 왜냐하면 그런 삶을 더 이상 지속할 수가 없으니까. (‘사랑에 빠진 죽은 여인’, P.94)

 

커피포트는 깨지고, 태피스트리는 떼어져 다락방으로 치워진다. 클라리몽드는 사제의 성수로 무덤 속에서 한줌 잿더미로 사라진다. 아리아는 어차피 잿더미 속의 유골이었으니.

 

당신은 나와 함께 행복하지 않았나요? 내 무덤을 파헤치고 나의 주검을 발가벗길 만큼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잘못했나요? 이제 우리의 영혼과 육체 사이에서 이루어지던 교감은 모두 끝났어요. (‘사랑에 빠진 죽은 여인’, P.97)

 

그럼에도 한가닥 아쉬움이 없을 수 없다. 특히 클라리몽드와 아리아의 경우가 그러하다. 로뮈알드는 클라리몽드와 있던 시절이 분명 더 행복하였다. 그의 괴로움은 신분이 사제였기에 그러할 뿐 범상한 청년이었다면 그리고 뱀파이어임에도 그의 생명에 해를 끼치지 않으려 애쓰는 클라리몽드의 마음을 염두에 두었다면 그녀와의 삶에서 사랑의 행복을 찾았을 것이다. 아리아는 추악하고 방탕한 여인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반박처럼 판단 기준을 기독교적 엄격주의가 아닌 폼페이 당대의 개방적 현세적 사고관에 둔다면 자유로운 행복을 추구하는 그녀를 비난하기 어렵다.

 

제가 한 번도 믿은 적이 없는 그 우중충한 종교를 들먹이면서 저를 괴롭히지 마세요. 저는 인생과 젊음, 아름다움, 쾌락을 사랑했던 우리의 신들을 믿어요. 차가운 죽음 속으로 나를 다시 밀어 넣지 마세요. 사랑이 나에게 돌려준 이 삶을 즐길 수 있게 내버려 두세요. (‘아리아 마르첼라’, P.151~152)

 

비현실적이라 치부하면서도 상상과 환상에 열광하는 연유는 무엇일까.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은 비이성적 속성이 큰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우리는 절대자가 아니기에 한계상황에 이르면 이성은 지배력을 상실한다. 과학기술의 발달도 자연과 우주의 신비를 속속들이 파헤치지 못하고 있다는 현상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감성의 존재이므로 사물과 영혼, 영혼과 영혼은 시공을 초월하여 상호 연계되어 있다고 믿는다. 수많은 사찰과 교회에서 사람들이 간구하는 것이 욕망을 떠나 오로지 영혼의 구원만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은연 중 우리는 비과학적, 비이성적 측면을 인정한다.

 

당신의 마음이 강렬한 힘을 가지고 나를 향했을 때, 무지한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떠돌고 있던 나의 영혼이 그것을 느꼈어요. 믿음이 신을 만들고, 사랑이 여자를 만든답니다.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할 때, 진짜로 죽은 것이지요. 당신의 사랑이 나에게 생명을 돌려주었어요. 당신의 강한 염원이 우리를 갈라놓고 있던 시간과 공간의 거리를 없애 버렸어요. (‘아리아 마르첼라’, P.148)

 

작품해설은 고티에의 글쓰기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고티에의 사실적인 묘사가 아니라, 사실적인 느낌을 주는 묘사들은 실제로는 독자들이 환상의 세계로 자신도 모르게 빠져 들어가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P.170)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대상을 향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꿈꾸고, 이국적인 것, 역사 속 다른 시대와 다른 장소를 동경하는 것은 낭만주의 환상 문학의 대표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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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영시선 - 베오울프 외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62
이성일 역주 / 한국문화사 / 2017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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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 그대로 고대 영시를 담고 있는데, 대표작인 <베오울프> 포함 8편을 수록하고 있다. <베오울프>을 제외한 다른 영시 작품에 호기심이 생겨 펼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라고 본다.

 

1. 베오울프

수년 전 문학과지성사 번역본을 읽었으므로 쓸데없는 되풀이는 하지 않으련다.

 

베오울프는 기트인 전사다. 다른 번역본에서는 예이츠인이라고 한다. 기트인은 오늘날의 스웨덴 남부지방을 세력권으로 하고 있고, 현재의 스웨덴인[쉴빙]은 중북부지방을 근거지로 하여 양 종족의 대립과 갈등이 꽤 심했다고 한다. 종국적으로는 스웨덴인이 기트인을 병합한 셈이다. 작중에서 기트인과 덴마크인은 비교적 유대관계를 맺고 있고, 스웨덴인과 대립관계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또 덴마크인은 오늘날 독일북부와 폴란드북부에 해당하는 프랑크인들과 프리지아인들과 적대관계다.

 

영문학 작품인데, 영국이 아닌 머나먼 스웨덴과 덴마크 지역을 다루는 연유는 <햄릿>의 배경이 덴마크라는 점과 같은 까닭이다. 켈트족의 브리튼 섬을 훗날 점령하고 지배세력이 되었던 것은 앵글족과 색슨족이다. 앵글족과 색슨족은 게르만족으로써 바로 독일북부를 근거지로 삼다가 북해를 건너가 영국인의 시조가 되었다. 그들의 언어와 문화는 조상들의 유산을 듬뿍 품고 있을 테니 고대영시가 게르만족의 영웅을 주인공으로 다루는 것은 전혀 엉뚱한 게 아니다.

 

베오울프의 영웅적 업적은 점층적 구도를 형성한다. 인간의 형상을 한 괴물 그렌델에 이어 한층 막강한 그렌델의 어미를 무찌름으로써 인간으로서는 최고의 명예를 누리게 된다. 그리고 50년 후. 대충해도 70세가 넘는 고령이다. 불을 뿜는 용이 국토를 유린함에 따라 베오울프는 노구의 몸을 이끌고 사악한 용에 맞선다. 젊은 용사들이 모두 두려움에 떨며 도망치기에 급급한 가운데, 그는 홀로 초자연적 존재와 대결하는 것이다.

 

영웅의 죽음을 무릅쓴 휴머니즘적 행위는 화려하기보다 차라리 고독하면서 비장하다. 시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사상은 인간의 유한성과 운명의 필연성이다.

 

......아무리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모두를 기다리는 것이라오.

무릇 대지 위에서 생명을 유지하는 자,

영혼을 보유하는 자, 인간의 자손이라면,

그가 가야만 하도록 예정된 장소가 있는 법-

삶의 향연이 끝나면, 육신은 죽음의 침상에

꼼짝없이 눕게 되는 것이오. (P.63)

 

깊은 상처, 치유할 수 없는 상흔에도 불구하고,

베오울프는 말하였소.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소.

자신이 이 지상에서의 삶을 이미 다 살았음을.

세속의 기쁨이 다했고, 예정된 삶의 나날들을

소진하고 나면, 죽음이 곧 닥치게 되어 있음을. (P.149)

 

베오울프는 영웅다운 최후를 맞이한다. 그리고 시인은 예견한다. 이로써 기트인의 성세는 막을 내리고 어두운 미래가 다가오고 있음을.

 

2. 방랑하는 사람

3. 바닷길 가는 사람

<베오울프>를 제외하면 나머지 영시는 비교적 분량이 적은 편이다. 1쪽에서 길어야 15쪽 이내이므로. 이 두 편을 역자는 극적 독백으로 분류한다. 화자가 자신의 신상과 심경을 토로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서다. 화자의 어조는 회한에 가득 차 있다. 한때 행복한 시절이 있었을지 모르나 방랑과 역경과 고난의 나날을 겪는 고통이 그를 참담케 한다. 한편 <바닷길 가는 사람>은 전반부와 후반부에 내용상 심각한 단절이 존재하는데, 역자는 통념과 달리 무리한 종교적 의미 부여보다는 편집의 오류로 보고 있다.

 

나 자신에 대해 거짓 없는 노래 하나 부르노니,

내 삶의 여정을 읊은 것이오. 고난의 날들을 통해

얼마나 잦은 역경을 헤치며 지내왔으며, 가슴에 맺힌

쓰라린 고통으로 견디기 힘든 나날을 보내왔는지- (<바닷길 가는 사람>,P.178)

 

4. 캐드몬의 찬가

5. 십자가의 환영

이 두 편은 기독교적 내용을 담고 있는데, <캐드몬의 찬가>는 천지창조를 이룩한 조물주에 대한 짧은 찬가다. <십자가의 환영>은 꿈속에서 한 나무가 자신이 베어져 예수가 매달렸던 십자가로 만들어지게 된 사실, 덕분에 일개 나무이자 형틀에서 거룩하고 성스러운 존재가 되었음을 자술한다. 종교적 배경이 없더라도 흥미롭게 다가갈 수 있는 내용이다.

 

그리하여 나는 기쁜 마음으로, 열과 성을 다하여

십자가를 향해 기도하였으니, 내 주변엔 아무도 없고,

나 홀로 있었다오. 내 영혼은 현세를 떠나라는 권유를

지속적으로 받았고, 영원의 세계를 갈구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가져왔소. (<십자가의 환영>, P.191)

 

6. 폐허

이 시는 폐허가 된 어떤 성채의 퇴락한 흔적을 과거의 영광과 빗대어 기술하는데, 보전이 완전치 않은 상태라 세부적 이해는 어렵다.

 

7. 버림받은 자의 탄식

역자는 이 시를 애가라 칭한다. 님에게서 버림받아 헤어진 화자가 자신의 신세와 님과의 재회를 간절히 소망한다.

 

......내 벗은 큰 슬픔 속에

기쁨에 넘치던 옛날의 거처를 회상한다오.

사랑하는 님을 애타게 기다리는 자에겐

그리움과 슬픔만이 가슴에 가득할 것이오. (<버림받은 자의 탄식>, P.200)

 

8. 말돈 전투

9. 브루난부르흐 전투

이 전쟁시들은 <베오울프>와 함께 가장 극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들이다. 모두 10세기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는데, 전자는 잉글랜드와 바이킹과의 전투를, 후자는 스코틀랜드인과 바이킹의 연합과 잉글랜드의 전투를 다루고 있다.

 

<말돈 전투>는 비장미가 물씬 넘친다. 수적 열세에도 굴하지 않고 모두가 스러질 때까지 고장을 사수하는 전사들. 정정당당함을 잃지 않는 지휘관의 당당한 태도. 이에 대비되는 비겁한 자들의 졸렬한 행동을 과장되지 않고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브루난부르흐 전투>는 반면 승전의 기록이다. 그들이 어떻게 외부의 침입자들을 물리쳤는지에 대한 전황을 설명식으로 늘어놓는다. 전자가 전투에 임하는 전사들 개개인을 하나씩 실체적 존재로 다루고 있는 반면 후자는 전투 전반을 조감하여 전체로서 다루고 있다. 따라서 전자가 문학작품으로서는 월등히 흥미롭다.

 

......일찍이 동쪽으로부터

앵글 족과 쌕슨 족 사람들이 브리튼 섬을 찾아

넓은 바다를 건너와, 용맹스러운 전사답게

웨일스 사람들을 정복하여, 영광을 자랑하는

용사들로서의 명성을 이룩한 이래, 이보다

더욱 잔혹하고 치열한 전투는 없었다 하오. (<브루난부르흐 전투>, P.220)

 

이 책은 단순히 시만 수록한 게 아니라 이해를 돕기 위한 상세한 각주를 덧붙이고 있다. 아울러 후미에 <베오울프>의 세 왕실 가계도, 그리고 작품에 등장하는 각종 고유명사에 대한 풀이를 수록하고 있어 피상적으로 넘기기 쉬운 대목도 충분한 이해를 가질 수 있도록 해준다.

 

이미 천년도 더 옛날의, 그것도 언어와 문화가 다른 유럽 저편의 고전 작품을 읽는 의미는 무엇일까? 단순히 회고적 취향이라고 치부하기엔 그네들의 목소리와 행동이 생경하지 않다. 그렌델과 용이라는 불가항력의 존재에 맞닥뜨린 사람들의 좌절감은 오늘날도 여전할 것이다. 신앙예찬은 물론이고 사랑하는 님과 헤어지고 행복했던 시절은 아득한 옛날인 듯 느껴질 때 범인들이 갖는 감정은 예나 지금이나 대동소이하다.

 

무엇보다 어진 임금으로서 늙은 수호자로서 노구를 이끌고 생사를 건 대결을 벌이는 베오울프의 처절한 고독감과 괴로움은 마음 한구석을 여전히 서늘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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