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과 천둥
온다 리쿠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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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현대문학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탓으로 작가는 알지 못한다. 단지 알라딘 인터넷서점의 클래식 음반 메뉴에 동명의 음반이 나와 있는 것을 보고 그나마 흥미를 갖게 되었다. 클래식 음악에서 일본의 세계 최대의 시장이라고 한다. 그만큼 애호가도 많고 매니아층도 넓다는 뜻이리라. 언제나 감동을 주는 <노다메 칸타빌레>와 같은 기억을 남겨주길 바라며 책장을 펼친다.

 

노력만으로 이루기 어려운 분야 중 특히 예술이 그러하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의 한탄은 그래서 우리 같은 범부(凡夫)의 심정을 대변한다. 단지 1%, 아니 0.1%의 차이로 좋은 연주가와 거장의 넘을 수 없는 벽이 생긴다. 노력한다고 모차르트가 될 수 없음을 알지만, 재능이 있다고 가만히 있어도 모차르트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 치열한 경연의 현장이 음악 콩쿠르다. 무명의 음악이 단순에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무대에 등장하는 계기.

 

소리의 느낌을 글로써 풀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 단순히 글 솜씨가 뛰어나다고 충분하지 않다. 작가 자신이 클래식 음악에 대한 지극한 애호와 관심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일반 독자가 아닌 소위 음악을 좀 아는 독자의 비웃음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 온다 리쿠는 다행히도 그러하다. 물론 일본인 특유의 뭐랄까, 호들갑스럽고 과장되게 찬미하는 버릇은 여전하지만.

 

작가는 이 두툼한 소설에서 여러 얘기를 하고 싶은 모양이다, 음악과 삶에 관한,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고 감상한다는 의의에 대해서 말이다. 그것은 연주가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예술을 통한 삶의 의미에 관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리쿠는 먼저 작품의 굵직한 플롯인 요시가에 국제 피아노콩쿨의 예선과 본선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르포르타주처럼 세밀하게 기술하여 독자에게 콩쿨의 세계를 속속들이 알게끔 한다. 참가자들의 처지, 선곡의 목적, 음악에 임하는 태도 등 비록 나와는 다른 영역에 속하지만 그네들 역시 한 사람으로 갖는 불안과 초조, 기대 등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

 

생활 속에서 음악을 즐길 줄 아는, 뛰어난 귀를 가진 사람은 할머니처럼 평범한 곳에 있다. 연주자 또한 평범한 곳에 있어도 되지 않을까?

......‘평범한 곳에 머물고 싶었다. 할머니 같은 사람이 사는 세계에 속하고 싶었던 것이다. (P.80)

 

그런 면에서 다카시마 아카시에게 응원의 염이 쏠림을 어쩔 수 없다. 가정을 갖고 생계에 애쓰는 그나마 일반인에 가까운 그가 예술과 생활을 병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보다 인간미가 있으므로. 예술은 외따로 고립되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 공감하고 수용될 때 본연의 가치가 빛을 발한다. 시대를 앞서간 천재는 후대에 영예를 누리지만 생전은 불우하기 십상이다. 감식력 있는 귀가 없더라도 음악이 들려주는 음 자체와, 선율과 리듬에서 즐거움을 찾고 누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요즘 연주가는 작곡가의 의도를 얼마나 정확하게 읽어내고 작곡 당시의 시대나 개인적 배경을 상상하는 데 중점을 둔다. 연주가의 자유로운 해석, 자유로운 연주는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풍조가 있다. (P.226)

 

가자마 진 같은 괴짜 천재의 사례는 무어라고 해야 할까. 심사위원들 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당혹스럽다. 콩쿨에서 전혀 비콩쿨 스타일의 연주를 하는 그는 오늘날 거의 사라져버린 연주가 유형이다. 작곡가의 의도 구현에 목매단 나머지 도전과 개성을 상실하여 박제화 된, 또는 균질적인 연주가들이 득실거리는 시대에. 그는 의식하지 못한 채 음악의, 그리고 연주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새삼 청중과 독자에게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작중의 저명한 유지 폰 호프만은 세상에 그를 내보내며 선물이 될 지 재앙이 될 지는 음악계에 달렸다고 유지를 남긴 것이다.

 

이 아이는 반대다. 곡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고 할까, 프로나 잔소리꾼들이 싫어하는 방법을 쓴다. 아니, 그렇지 않다. 곡을 자기 세계의 일부로 만들어버린다. 곡을 통해 자기 세계를 재현하고 있다. 어떤 곡을 연주해도 뭔가 커다란 그림의 일부로 만들어버리는 듯한. (P.535)

 

솔직히 마사루와 아야의 기묘한 우연과 뜻밖의 재회는 작위적이다. 천재적 재능이 지닌 두 젊은이를 굳이 엮어놓을 필요는 없을 텐데. 완벽한 연주로 청중과 심사위원을 모두 사로잡는 마사루는 기교와 예술을 절묘하게 조화시키고 개성마저 뚜렷하다. 아마 현시대가 요구하는 가장 탁월한 연주가의 전형일 것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그에게 한 가지 여운을 남긴다. 재현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만들고자 하는, 즉 음악 창작의 욕구 말이다. 연주 자체도 창작의 일환이지만 순전한 창작에는 미치지 못한다. 고고한 예술혼에 치중한 나머지 세상과 고립된, 자신만의 음악에만 매몰된 음악이 아니라 모차르트나 베토벤 당대처럼 청중과 교감하는 음악.

 

그것은 새로운클래식을 만드는 것. 현대에 클래식으로 불리는 작곡가들처럼 새로운피아니스트 작곡가가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P.458)

 

소위 말하는 대부분의 현대음악은 한없이 좁은 시장에서 활동하는 작곡가 본인과 평론가를 위한 음악이지, 반드시 연주하고 싶고 듣고 싶은 곡은 아니다. (P.459)

 

표제는 상징적이다. 꿀벌은 가자마 진, 천둥은 에이덴 아야와 결부된다. 일찍이 자연에서 음악을 발견한 뛰어난 재능. 전자는 뒤늦게 유지 폰 호프만의 섬세한 가르침으로 살아있는 음악을 만들 줄 알게 되었다. 후자는 천재 소녀로서 회자되다가 어머니의 죽음 이후 소진 증후군으로 음악계를 떠나버렸다. 여러 참가자와 심사위원이 등장하지만 에이덴 아야가 핵심적 인물이다. 등 떠밀려 콩쿨에 참가한 아야는 경연 과정을 통해, 참가자들이 들려주는 음악의 일깨움을 통해 음악인의 본질에 다가선다. 음악을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것의 의미.

 

치열한 콩쿨은 어느덧 끝나고 각자는 순위가 매겨져 흩어진다. 그럼에도 독자는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이 그네들에게 있어 대단원이 아니라 눈부신 시작에 불과하다고. 그들 앞에는 음악을 향한 새로운 세계로 이어지는 길이 펼쳐져 있음을. 가자마 진은 이렇게 되새긴다.

 

행복. 행복하다. 세상은 이토록 음악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실내에서 음악을 데리고 나가, 함께 세상을 채워갈 것이다.

동지도 있다. 동지를 찾아냈다. (P.692)

 

온다 리쿠의 글쓰기는 영화를 연상시킨다. 카메라는 인물들 전체를 조감하다 쓱 하나의 인물 깊이 파고들어 그들의 과거와 내밀한 심경을 파헤친다. 주변 인물들에도 소홀하지 않고 적절한 배분을 아끼지 않는다. 인물 몰입이 지나칠 때쯤 문득 콩쿨에서 연주되는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으로 분위기를 전환한 후 영탄어린 감상으로 고조시킨다. 양념으로 인물의 개인사와 인물들 간의 은근한 러브라인도 반영하여 다른 의미에서 독자를 지루하지 않게 한다. 무척이나 능숙하고 효과적인 작법이다.

 

내가 나름 클래식 음악 애호가라서 더 집중과 몰입이 용이한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예술과 사람에 대한 작가의 시각과 기술이라면 음악 애호 여부와는 상관없이 소설 자체로서 충분히 설득력이 높다는 생각이다. 새삼 다른 작품도 읽고 싶은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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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티에 환상 단편집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테오필 고티에 지음, 노영란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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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은 자유롭다. 환상, 공상, 몽상, 망상 혹은 백일몽과 같이 각기 다른 이름을 지니지만 자유로움의 본질은 동일하다. 상상은 현실에서 실현하기 어려운 상념의 무한한 추구가 가능하다. 그러하기에 개인의 은밀한 욕망을 표현하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고티에의 환상 단편들처럼.

 

학창 시절, 소위 책받침 미인들의 추억을 다분히들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녀들이 현실에 되살아나서 자신의 연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소망하지 않은 이가 누가 있겠는가. 역사 속의 인물, 명화 속의 여인, 사진 속의 모델 등에 대한 찰나의 욕망 마찬가지다. ‘사랑에 빠진 죽은 여인은 이전에 <세계의 환상 소설><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프랑스>에서 이미 읽은 기억이 있다.

 

1. 커피포트 아가씨

2. 옹팔

3. 사랑에 빠진 죽은 여인

4. 아리아 마르첼라

 

아무래도 씌어진 시기상 뒤로 갈수록 보다 세련미와 원숙미가 두드러짐을 알 수 있는데, 새삼 사랑에 빠진 죽은 여인이 뛰어난 작품임을 비교해보니 알 수 있다.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우선 남성 주인공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여성을 만나고 사랑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작가가 남성이기에 이러한 설정이라고 치부할 수 있지만, 시대를 초월한 영원한 사랑을 갈구하고 이성의 유혹에 약한 것은 상대적으로 남성에 더 많다.

 

환상 속의 여성을 이끌어내는 소재는 다양하다. 커피포트, 태피스트리, 죽은 여인, 폼페이의 유물 등. 터무니없지만 전혀 황당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은 매우 사실적인 까닭이다. 우리는 사실과 환상을 명확히 구별한다. 정통 소설 자체도 그럴듯한 허구를 그리는 것이지 누구나 알아차릴만한 비현실은 완전히 다른 장르다.

 

고티에는 현실과 상상을 한데 뒤섞어 놓는다. 작중 인물은 환상을 일상처럼 당연시 받아들인다. 그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리고 대화도 주고받는다. 그것이 이상하다고 깨닫는 순간 두 세계 사이에 넘나들 수 없는 벽이 생긴다. ‘옹팔에서 주인공의 삼촌은 태피스트리 속의 여인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다. 그는 후작부인이 얌전히 있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어기고 조카를 유혹한 것에 분개한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아스라한 가운데 현실이 환상과 교차된다. ‘커피포트 아가씨에서 화자는 심야에 침실이 되살아나는 광경을 목도한다. ‘옹팔에서 태피스트리 속의 후작부인은 방안으로 훌쩍 뛰어내린다. 현실과 환상이 서서히 맞물리는 장면을 더없이 극적으로 묘사한 작품은 아마도 아리아 마르첼라일 것이다.

 

오랜 환상을 품을 수 있는 때는 대개 밤 시간이나 꿈속에서다. 밤은 은밀하다. 햇빛은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지만 달빛과 별빛은 깊은 음영을 강조할 뿐 실체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 속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황홀한 순간을 보내지만 시간의 흐름과 신체의 주기는 속절없다. 현실과 환상은 낮과 밤의 관념마저 뒤흔든다. 호접몽은 장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내 안에 두 명의 인간이 살고 있었는데, 서로 상대방을 알지 못했네. 때로는 밤마다 자신이 멋진 귀족이 되는 꿈을 꾸는 사제였고, 때로는 자신이 사제인 꿈을 꾸는 귀족이 되었네. 나는 더 이상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게 되었네. 어디서부터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환상인지 알지 못했다네. (‘사랑에 빠진 죽은 여인’, P.85)

 

환상은 찰나에 불과하며, 우리는 현실을 벗어나 살 수 없다. 단편들의 결말이 항상 현실로 되돌아오는 것은 당연하다. 순간의 일탈과 상상 속 욕망충족은 결코 현실화될 수 없으므로 탐닉은 오히려 심신에 피폐케 할 뿐이므로.

 

내 안에 있는 두 명의 존재 중에서 나머지 하나를 위해 또 다른 하나를 죽여 버리거나, 아니면 둘 다 죽여 버릴 결심을 했네. 왜냐하면 그런 삶을 더 이상 지속할 수가 없으니까. (‘사랑에 빠진 죽은 여인’, P.94)

 

커피포트는 깨지고, 태피스트리는 떼어져 다락방으로 치워진다. 클라리몽드는 사제의 성수로 무덤 속에서 한줌 잿더미로 사라진다. 아리아는 어차피 잿더미 속의 유골이었으니.

 

당신은 나와 함께 행복하지 않았나요? 내 무덤을 파헤치고 나의 주검을 발가벗길 만큼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잘못했나요? 이제 우리의 영혼과 육체 사이에서 이루어지던 교감은 모두 끝났어요. (‘사랑에 빠진 죽은 여인’, P.97)

 

그럼에도 한가닥 아쉬움이 없을 수 없다. 특히 클라리몽드와 아리아의 경우가 그러하다. 로뮈알드는 클라리몽드와 있던 시절이 분명 더 행복하였다. 그의 괴로움은 신분이 사제였기에 그러할 뿐 범상한 청년이었다면 그리고 뱀파이어임에도 그의 생명에 해를 끼치지 않으려 애쓰는 클라리몽드의 마음을 염두에 두었다면 그녀와의 삶에서 사랑의 행복을 찾았을 것이다. 아리아는 추악하고 방탕한 여인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반박처럼 판단 기준을 기독교적 엄격주의가 아닌 폼페이 당대의 개방적 현세적 사고관에 둔다면 자유로운 행복을 추구하는 그녀를 비난하기 어렵다.

 

제가 한 번도 믿은 적이 없는 그 우중충한 종교를 들먹이면서 저를 괴롭히지 마세요. 저는 인생과 젊음, 아름다움, 쾌락을 사랑했던 우리의 신들을 믿어요. 차가운 죽음 속으로 나를 다시 밀어 넣지 마세요. 사랑이 나에게 돌려준 이 삶을 즐길 수 있게 내버려 두세요. (‘아리아 마르첼라’, P.151~152)

 

비현실적이라 치부하면서도 상상과 환상에 열광하는 연유는 무엇일까.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은 비이성적 속성이 큰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우리는 절대자가 아니기에 한계상황에 이르면 이성은 지배력을 상실한다. 과학기술의 발달도 자연과 우주의 신비를 속속들이 파헤치지 못하고 있다는 현상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감성의 존재이므로 사물과 영혼, 영혼과 영혼은 시공을 초월하여 상호 연계되어 있다고 믿는다. 수많은 사찰과 교회에서 사람들이 간구하는 것이 욕망을 떠나 오로지 영혼의 구원만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은연 중 우리는 비과학적, 비이성적 측면을 인정한다.

 

당신의 마음이 강렬한 힘을 가지고 나를 향했을 때, 무지한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떠돌고 있던 나의 영혼이 그것을 느꼈어요. 믿음이 신을 만들고, 사랑이 여자를 만든답니다.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할 때, 진짜로 죽은 것이지요. 당신의 사랑이 나에게 생명을 돌려주었어요. 당신의 강한 염원이 우리를 갈라놓고 있던 시간과 공간의 거리를 없애 버렸어요. (‘아리아 마르첼라’, P.148)

 

작품해설은 고티에의 글쓰기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고티에의 사실적인 묘사가 아니라, 사실적인 느낌을 주는 묘사들은 실제로는 독자들이 환상의 세계로 자신도 모르게 빠져 들어가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P.170)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대상을 향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꿈꾸고, 이국적인 것, 역사 속 다른 시대와 다른 장소를 동경하는 것은 낭만주의 환상 문학의 대표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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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영시선 - 베오울프 외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62
이성일 역주 / 한국문화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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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 그대로 고대 영시를 담고 있는데, 대표작인 <베오울프> 포함 8편을 수록하고 있다. <베오울프>을 제외한 다른 영시 작품에 호기심이 생겨 펼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라고 본다.

 

1. 베오울프

수년 전 문학과지성사 번역본을 읽었으므로 쓸데없는 되풀이는 하지 않으련다.

 

베오울프는 기트인 전사다. 다른 번역본에서는 예이츠인이라고 한다. 기트인은 오늘날의 스웨덴 남부지방을 세력권으로 하고 있고, 현재의 스웨덴인[쉴빙]은 중북부지방을 근거지로 하여 양 종족의 대립과 갈등이 꽤 심했다고 한다. 종국적으로는 스웨덴인이 기트인을 병합한 셈이다. 작중에서 기트인과 덴마크인은 비교적 유대관계를 맺고 있고, 스웨덴인과 대립관계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또 덴마크인은 오늘날 독일북부와 폴란드북부에 해당하는 프랑크인들과 프리지아인들과 적대관계다.

 

영문학 작품인데, 영국이 아닌 머나먼 스웨덴과 덴마크 지역을 다루는 연유는 <햄릿>의 배경이 덴마크라는 점과 같은 까닭이다. 켈트족의 브리튼 섬을 훗날 점령하고 지배세력이 되었던 것은 앵글족과 색슨족이다. 앵글족과 색슨족은 게르만족으로써 바로 독일북부를 근거지로 삼다가 북해를 건너가 영국인의 시조가 되었다. 그들의 언어와 문화는 조상들의 유산을 듬뿍 품고 있을 테니 고대영시가 게르만족의 영웅을 주인공으로 다루는 것은 전혀 엉뚱한 게 아니다.

 

베오울프의 영웅적 업적은 점층적 구도를 형성한다. 인간의 형상을 한 괴물 그렌델에 이어 한층 막강한 그렌델의 어미를 무찌름으로써 인간으로서는 최고의 명예를 누리게 된다. 그리고 50년 후. 대충해도 70세가 넘는 고령이다. 불을 뿜는 용이 국토를 유린함에 따라 베오울프는 노구의 몸을 이끌고 사악한 용에 맞선다. 젊은 용사들이 모두 두려움에 떨며 도망치기에 급급한 가운데, 그는 홀로 초자연적 존재와 대결하는 것이다.

 

영웅의 죽음을 무릅쓴 휴머니즘적 행위는 화려하기보다 차라리 고독하면서 비장하다. 시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사상은 인간의 유한성과 운명의 필연성이다.

 

......아무리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모두를 기다리는 것이라오.

무릇 대지 위에서 생명을 유지하는 자,

영혼을 보유하는 자, 인간의 자손이라면,

그가 가야만 하도록 예정된 장소가 있는 법-

삶의 향연이 끝나면, 육신은 죽음의 침상에

꼼짝없이 눕게 되는 것이오. (P.63)

 

깊은 상처, 치유할 수 없는 상흔에도 불구하고,

베오울프는 말하였소.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소.

자신이 이 지상에서의 삶을 이미 다 살았음을.

세속의 기쁨이 다했고, 예정된 삶의 나날들을

소진하고 나면, 죽음이 곧 닥치게 되어 있음을. (P.149)

 

베오울프는 영웅다운 최후를 맞이한다. 그리고 시인은 예견한다. 이로써 기트인의 성세는 막을 내리고 어두운 미래가 다가오고 있음을.

 

2. 방랑하는 사람

3. 바닷길 가는 사람

<베오울프>를 제외하면 나머지 영시는 비교적 분량이 적은 편이다. 1쪽에서 길어야 15쪽 이내이므로. 이 두 편을 역자는 극적 독백으로 분류한다. 화자가 자신의 신상과 심경을 토로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서다. 화자의 어조는 회한에 가득 차 있다. 한때 행복한 시절이 있었을지 모르나 방랑과 역경과 고난의 나날을 겪는 고통이 그를 참담케 한다. 한편 <바닷길 가는 사람>은 전반부와 후반부에 내용상 심각한 단절이 존재하는데, 역자는 통념과 달리 무리한 종교적 의미 부여보다는 편집의 오류로 보고 있다.

 

나 자신에 대해 거짓 없는 노래 하나 부르노니,

내 삶의 여정을 읊은 것이오. 고난의 날들을 통해

얼마나 잦은 역경을 헤치며 지내왔으며, 가슴에 맺힌

쓰라린 고통으로 견디기 힘든 나날을 보내왔는지- (<바닷길 가는 사람>,P.178)

 

4. 캐드몬의 찬가

5. 십자가의 환영

이 두 편은 기독교적 내용을 담고 있는데, <캐드몬의 찬가>는 천지창조를 이룩한 조물주에 대한 짧은 찬가다. <십자가의 환영>은 꿈속에서 한 나무가 자신이 베어져 예수가 매달렸던 십자가로 만들어지게 된 사실, 덕분에 일개 나무이자 형틀에서 거룩하고 성스러운 존재가 되었음을 자술한다. 종교적 배경이 없더라도 흥미롭게 다가갈 수 있는 내용이다.

 

그리하여 나는 기쁜 마음으로, 열과 성을 다하여

십자가를 향해 기도하였으니, 내 주변엔 아무도 없고,

나 홀로 있었다오. 내 영혼은 현세를 떠나라는 권유를

지속적으로 받았고, 영원의 세계를 갈구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가져왔소. (<십자가의 환영>, P.191)

 

6. 폐허

이 시는 폐허가 된 어떤 성채의 퇴락한 흔적을 과거의 영광과 빗대어 기술하는데, 보전이 완전치 않은 상태라 세부적 이해는 어렵다.

 

7. 버림받은 자의 탄식

역자는 이 시를 애가라 칭한다. 님에게서 버림받아 헤어진 화자가 자신의 신세와 님과의 재회를 간절히 소망한다.

 

......내 벗은 큰 슬픔 속에

기쁨에 넘치던 옛날의 거처를 회상한다오.

사랑하는 님을 애타게 기다리는 자에겐

그리움과 슬픔만이 가슴에 가득할 것이오. (<버림받은 자의 탄식>, P.200)

 

8. 말돈 전투

9. 브루난부르흐 전투

이 전쟁시들은 <베오울프>와 함께 가장 극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들이다. 모두 10세기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는데, 전자는 잉글랜드와 바이킹과의 전투를, 후자는 스코틀랜드인과 바이킹의 연합과 잉글랜드의 전투를 다루고 있다.

 

<말돈 전투>는 비장미가 물씬 넘친다. 수적 열세에도 굴하지 않고 모두가 스러질 때까지 고장을 사수하는 전사들. 정정당당함을 잃지 않는 지휘관의 당당한 태도. 이에 대비되는 비겁한 자들의 졸렬한 행동을 과장되지 않고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브루난부르흐 전투>는 반면 승전의 기록이다. 그들이 어떻게 외부의 침입자들을 물리쳤는지에 대한 전황을 설명식으로 늘어놓는다. 전자가 전투에 임하는 전사들 개개인을 하나씩 실체적 존재로 다루고 있는 반면 후자는 전투 전반을 조감하여 전체로서 다루고 있다. 따라서 전자가 문학작품으로서는 월등히 흥미롭다.

 

......일찍이 동쪽으로부터

앵글 족과 쌕슨 족 사람들이 브리튼 섬을 찾아

넓은 바다를 건너와, 용맹스러운 전사답게

웨일스 사람들을 정복하여, 영광을 자랑하는

용사들로서의 명성을 이룩한 이래, 이보다

더욱 잔혹하고 치열한 전투는 없었다 하오. (<브루난부르흐 전투>, P.220)

 

이 책은 단순히 시만 수록한 게 아니라 이해를 돕기 위한 상세한 각주를 덧붙이고 있다. 아울러 후미에 <베오울프>의 세 왕실 가계도, 그리고 작품에 등장하는 각종 고유명사에 대한 풀이를 수록하고 있어 피상적으로 넘기기 쉬운 대목도 충분한 이해를 가질 수 있도록 해준다.

 

이미 천년도 더 옛날의, 그것도 언어와 문화가 다른 유럽 저편의 고전 작품을 읽는 의미는 무엇일까? 단순히 회고적 취향이라고 치부하기엔 그네들의 목소리와 행동이 생경하지 않다. 그렌델과 용이라는 불가항력의 존재에 맞닥뜨린 사람들의 좌절감은 오늘날도 여전할 것이다. 신앙예찬은 물론이고 사랑하는 님과 헤어지고 행복했던 시절은 아득한 옛날인 듯 느껴질 때 범인들이 갖는 감정은 예나 지금이나 대동소이하다.

 

무엇보다 어진 임금으로서 늙은 수호자로서 노구를 이끌고 생사를 건 대결을 벌이는 베오울프의 처절한 고독감과 괴로움은 마음 한구석을 여전히 서늘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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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무도회 지만지 희곡선집
미하일 레르몬토프 지음, 박선진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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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르몬토프의 대표적인 운문 희곡이다. 그는 소설과 시로 유명하였기에 솔직히 희곡은 전혀 의외였다. 지식을만드는지식은 이렇게 가끔 참신한 놀람을 안겨준다.

 

근세 귀족사회에서 사람들의 만남은 주로 사교계를 통해 이루어졌다. 무도회에서 춤과 대화, 카드게임 등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가십거리를 주고받으며 짝을 찾는다. 뛰어난 외모와 재치 있는 언행, 그리고 고상한 출신을 뽐내는 이는 언제나 사교계의 총아가 될 수 있다. 반면 사교계는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자 우민화시키는 바보상자라고도 할 수 있다. 사교계는 가벼움과 쾌활함의 표면에 시기와 음모와 비방이 드리워져 있다.

 

(남작부인) 감정이 이끄는 대로 행동해 버리면, 그때는 행복과 평안을 잃게 되지! 이곳의 사교계란…….비밀 같은 건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아! 사교계에선 외모로, 옷차림으로 가려내지, 성실한지 방탕한지를 말이야. (P.62)

 

(아르베닌) 사람들과 지겹지 않으려면, 멍청함과 교활함을 바라볼 수 있도록 스스로를 훈련시켜야 하는 것을! 이 두 가지가 사교계를 움직이는 전부이지 않소! (P.130)

 

가면무도회는 익명성을 전제로 한다. 나의 정체를 숨길 수 있다니 엄청나게 짜릿하다. 지위와 신분의 외투를 벗어던지고 본능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여도 나를 질책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솔직과 자유의 가면을 쓴 일탈과 불륜의 용인에 다름 아니다.

 

(아르베닌) 가면 아래서는 모두가 동등한 신분이 됩니다. 가면에는 영혼도, 직위도 없으니까요. 몸뚱이만 있을 뿐이지요. 가면무도회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외모는 가면으로 숨기면서, 자신의 감정을 덮고 있던 가면은 과감하게 벗어던져 버린답니다. (P.22)

 

(남작부인) 행실이 바른 여인이 어찌 발걸음을 향할 결심을 할 수 있겠어요, 온갖 잡다한 인간들과 바람둥이들이 모욕하고 조롱하는 곳으로 말이에요. 누가 알아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P.64)

 

이 희곡은 가면무도회로 대표되는 사교계의 위선적 본질을 폭로하고 있다. 그나마 사교계는 귀족사회에서 필요악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가면무도회는? 가면무도회에 대한 평판은 당대에도 부정적이었음을 쉽사리 알 수 있다. 니나의 유일하며 절대적인 과오는 바로 가면무도회에 참석했다는 점이다. 아르베닌은 니나가 가면무도회 갔었다는 말을 통해 그녀의 배신을 확신한다. 극중에서 니나는 남편이 자신을 죽이는 이유도 모르면서 억울하게 죽어간다. 오셀로가 데스데모나의 간청도 외면하고 죽이듯이 아르베닌 역시 니나의 애원에도 막무가내다. 사랑을 배반당했다는 증오와 배신감의 위력은 이렇게 극도로 편향적이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점은 주인공 아르베닌의 본성이다. 그는 어두운 과거를 지닌 인물이다. 도박과 방탕에 젖은 생활을 하다 문득 과거를 청산하고 모범적인 삶을 살아간다. 그는 세상의 밝은 면에 현혹되지 않고 숨어있는 어두운 힘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경험과 지성을 지니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럼에도 작중에서 그에 대한 주변의 평가는 냉혹하다.

 

(카자린) 새끼 양 같은 눈빛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짐승이야. 누군가는 고칠 수 있는 거라고 말하겠지, 타고난 천성을 말일세.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자는 바보라네. 제아무리 천사인 척해 봤자 그 속에는 악마가 들어앉아 있는걸. (P.18)

 

아르베닌은 니나를 사랑했을까? 분명 그의 결혼은 순수한 동기에 의한 게 아니었다. 그들의 결혼생활도 행복하지는 못하였다. 니나가 사교계에 몰입하게 된 것도 결국 가정생활의 무미함과 답답함을 벗어나고픈 욕망에서였으리라. 다만 아르베닌은 자신이 그녀를 사랑했다고 믿는다. 그녀의 순수한 사랑만이 자신을 정화시킬 줄로 기대하였다. 나는 비록 더럽고 어두운 시절을 겪었지만 아내만은 한 점 흠결 없이 완벽히 순수한 애정을 나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바람.

 

(아르베닌) 나는 삶과 선을 위해 다시 태어났다오. 하지만 가끔씩 어떤 적대적인 혼이 나를 폭풍 같았던 예전 생활로 데려가곤 하오. (P.46)

 

(아르베닌) ,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지, 사랑하고 있어. 그리고 그녀는 날 처참하게 기만했어...아니, 난 그녀를 사람들에게 양보하지 않겠어...그들은 우리를 심판할 수 없어...내가 직접 무서운 심판을 내리겠어...그녀에게 사형을 내리겠어. (P.125)

 

아르베닌은 위선자다. 그의 인물됨은 <우리 시대의 영웅><리곱스카야 공작부인>의 페초린과 동격이다. 선과 악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악에 친연성을 갖는 인물. 우리가 레르몬토프의 작품을 읽으면서 느끼는 당혹감의 근원은 바로 주인공의 통상적 속성에서 어긋나는 독특한 성격에 기인한다.

 

(아르베닌) 썩 꺼져 버려라, 선인이여. 난 너를 알지 못하니. 난 너에게 기만당했던 것이고, 그렇기에 오늘로써 우리의 짧았던 동맹을 파기하노라. 영원히 안녕! (P.91)

 

아르베닌과 니나를 제외한 여타 등장인물 역시 위선적 요소를 띠고 있다. 모든 비극이 시작되는 단초인 니나의 친구인 남작부인, 사채업자인 슈플리흐, 아르베닌을 다시 어두운 세계로 유혹하는 카자린 등. 공작 정도만이 그나마 낫다고 할 정도. 마지막 대목에서 등장하는 미지의 인물은 모호하다. 그는 사람일까 아니면 사람 이외의 존재일까 분명치 않다. 다만 그는 아르베닌의 영혼을 적나라하게 간파하고 있다.

 

(아르베닌) 인생은 무도회와 같소. 춤추며 돌다 보면 즐겁고 주변은 온통 빛이 나고 밝지...하지만 집으로 돌아와 구겨진 옷을 벗는 순간 그 모든 건 기억에서 날아가고 피로가 덮쳐 온단 말이오. (P.137)

 

인생이 무도회와 같다면, 가면무도회가 암시하는 인생은 어떤 모습일까? 이 모든 악의 꽃이 번화하는 사교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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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 마차를 탄 기사 대산세계문학총서 138
크레티앵 드 트루아 지음, 유희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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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와 관련된 설화 및 이야기는 서양문화에 있어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비단 현대의 독자들 뿐만 아니라 중세 시대에도 꽤나 인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이 트루아의 작품을 통해서도 익히 알 수 있다. 역설적인 점은 아서 왕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서 왕이 아니라는 데 있다. 친숙한 아서 왕은 사실상 명검 엑스칼리버로 무대에서 퇴장하며 들러리에 불과하다. 랜슬롯, 가웨인, 퍼시벌 등이 사실상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랜슬롯과 귀네비어 왕비의 사랑.

 

기사도 이야기의 필수 요소는 물론 기사의 모험담이다. 기사는 각지를 방랑하며 모험을 겪어야 한다. 그 모험은 불의를 벌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단지 자신의 무용을 자랑하는 도정이기도 하다. 돈키호테가 그러했듯이. 또한 기사에게 사랑이 빠질 수 없다. 기사라면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숭배하는 여인이 있게 마련이다. 소위 궁정식 사랑. 돈키호테에게 둘시네아가 있다면, 랜슬롯에게는 귀네비어 왕비가 있다.

 

납치당한 왕비를 되찾기 위한 기사가 랜슬롯과 가웨인이라는 점은 시사적이다. 전자가 응당 주인공이며 왕비와 특별한 관계에 있는 처지라면, 가웨인은 아서 왕 이야기에서 무용과 아울러 고귀한 품성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기사이다. 비록 이 작품에서는 조연에 불과하지만 왕비를 되찾기 위한 그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노력 또한 두드러진다.

 

모든 것이 그의 기억에서 다 지워졌습니다. 그것을 위해 나머지 모든 것을 다 잊어도 되는 한 가지만 빼고는 말입니다. 그는 그 유일한 대상만을 골똘히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보지도 듣지도 못합니다. (P.26)

 

왕비를 향한 랜슬롯의 사랑은 되풀이하여 표현되는데 그것은 너무나도 깊고 커서 어떠한 고난과 유혹도 그를 흔들 수 없을 정도다. 랜슬롯은 시종일관 왕비를 납치한 일행의 추적에 몰두한다. 그는 말이 죽자 다급한 마음에 죄수 마차를 올라탄다. 단순한 죄수 호송용 마차가 아니지만, 그는 사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무릅쓴다.

 

사랑이 명령한 거라면 설령 죄수 마차를 타는 일일지라도 뭐든 복종하는 것이 내게 영광이었으니까. 그녀는 거기서 사랑의 완벽한 증표를 봤어야 해. 사랑은 그 충실한 수행자를 이런 식으로 시험하면서 알아보거든. (P.110)

 

랜슬롯이 왕비를 납치한 자가 고르 왕국의 멜리아건트 왕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칼다리를 건너 멜리아건트와 대결을 벌이게 되는 대목은 분명 읽는이를 매료시키는 흥미진진한 모험담이다. 하지만 트루아는 이를 부차적이자 양념으로 생각할 뿐, 랜슬롯과 귀네비어 왕비의 연인 관계이자 주종 관계를 부각시키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사랑의 지배력을 시험하고자 하는 왕비는 멜리아건트와의 결투와 이후 마상창시합에서 랜슬롯에 상반된 지령을 내려 그의 순종을 확인한다.

 

왕비는 전혀 염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순종에 기쁠 뿐입니다. 그 기사가 랜슬롯이라는 걸 말하지 않아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하루 종일 그는 비겁한 기사 행세를 합니다. (P.139)

 

왕비는 쉴 짬도 주지 않고 그의 답변을 듣습니다. 하늘을 날 듯이 기쁩니다. 이제 그가 완전히 자기 남자라는 걸, 자신이 그의 여자라는 걸 확실히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P.142)

 

작품 내내 랜슬롯과 대비되는 인물로서 멜리아건트가 등장한다. 그는 용맹하지만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간계도 쓸 줄 아는 음흉한 인물로서 기사도적 전범은 아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을 타이르고 만류하는 부친 국왕에게도 화를 내며 분별없이 대들 정도의 심성을 지니고 있다. 반면 국왕 배드마구는 훌륭한 군왕의 태도를 보인다. 납치한 왕비를 예의있게 대우하며 랜슬롯의 기사도를 존중한다. 멜리아건트를 꾸짖는 그가 모든 외국인을 억지로 왕국 내에 잡아두는 정책을 펼친 왕이라는 점이 기묘할 따름이다.

 

죄수 마차를 타는데 순간 망설였다는 이유로 자신을 구하러 온 기사를 냉대하는 왕비. 이것은 사랑의 밀당에 다름아니다. 누군들 감복하여 환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기서 궁정식 사랑은 절정에 달한다.

 

왕비는 손을 뻗어 그를 맞습니다. 그를 얼싸안고 가슴 가까이로 꽉 껴안습니다. 침대 안으로 끌어당깁니다. 극진한 환대를 베풉니다. 그것 심장과 사랑에서 분출한 겁니다. 그녀가 그를 이토록 환대하게 한 것은 사랑입니다......사랑의 기쁨 속에서 나눈 입맞춤과 포옹의 유희가 너무나도 달콤했기에 그는 정말로 환희의 극치를 체험합니다. 이런 환희의 경험은 다른 사람들한테서 들어보기 힘듭니다. 그러나 저는 그에 대해 더 이상은 언급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 건 말로 형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완벽하고 달콤한 그런 환희는 연애 이야기에서 말로 표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P.116~117)

 

왕비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도 숭배하고 환희를 느끼는 주인공이니만치 왕비의 입맞춤과 포옹에서 환희의 극치를 체험할 수 있겠지만, 해당 대목의 암시는 그 이상을 가리킨다. 궁정식 사랑은 제아무리 합리화하여도 그것의 궁극적 지향은 불륜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적이며 당연한 수순이다. 아서 왕국의 몰락과 아서 왕의 죽음의 계기는 두 사람의 사랑이 너무나도 공공연하게 용납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게 된 데 있다.

 

트루아는 <그라알 이야기>에서 기사도와 성배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면, <죄수 마차를 탄 기사>에서는 기사도와 궁정식 사랑을 다룬다. 궁정식 사랑의 본질과 함의에 대해서는 이 책의 해설에서 자세히 기술하고 있어 좀 더 깊이있게 생각해 볼 여지를 준다. 간통적 사랑이자 욕망 억제의 에로티시즘 미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결국 불륜적 성격을 지칭한다. 정치적으로 여성판 주종제라는 점은 새로운 관점이지만.

 

내용 자체로서는 궁정식 사랑과 모험담이 흥미롭지만, 배경적 측면을 살펴보면 6세기 전설적 켈트의 영웅들이 12세기 중세 프랑스와 영국에서 되살아난 시대적 요구와 필요성에 관심이 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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