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튼 동물기 2 시튼 동물기 2
어니스트 톰슨 시튼 글, 그림, 햇살과 나무꾼 옮김 / 논장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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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튼 동물기를 읽다 보면 인간과 동물 간에 존재하는 차이란 게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하는 인간의 우월감이 어떻게 어리석은지를 깨닫게 된다. 이 책에 나오는 회색곰 왑과 여우 빅스는 한층 그러하다.

 

<고독한 회색곰 왑의 일생>

왜 남들은 불행한 나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을까? 왜 모두들 나를 못살게 굴까?......왑은 모든 적들을 잊지 않았고 그들을 미워했다. (P.36)

 

자신을 괴롭히는 대상을 향한 미움은 인간이나 동물이나 마찬가지다. 당장은 외롭고 약하기에 도망치거나 감내하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되갚아 주리라고 누구나 마음속에 되새긴다.

 

동물기 중에서 상당히 긴 이야기에 속하는 이 편은 고아가 되어 야생의 삶을 살아가는 동물의 고군분투 생존기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눈에 그런 회색곰은 단지 사나운 맹수로서 제거의 대상일 뿐이다.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는 외면하면서.

 

왑의 행동은 지극히 정당했다. 잭은 왑의 영토에 침입했고 왑을 죽이려다가 자기 목숨을 잃은 것이니까 말이다. (P.57)

 

왑이 무너진 것은 젊은 곰의 잔꾀에 속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튼은 동물기의 주인공들이 비극으로 생을 마치는 연유를 언급하곤 하였는데 그것은 맞서 싸우지 않으면 결국 생존을 위협 받는 엄혹한 자연의 규칙에 따른 것이다.

 

<용감한 개 스냅>

반려견의 관리에 대한 사회적 이슈가 있었다. 내게는 귀엽고 사랑스런 가족이지만 생면부지의 타인에게는 언제 위협적 본능을 드러낼지 모르는 일개 동물일 뿐이다. 인명을 해친 반려견과 스냅이 아마 유사한 종일 것이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스냅은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망설임과 두려움을 품지 않고 상대를 향해 맹렬하게 뛰어드는 본성을 발휘한다. 길들이고자 하는 화자의 자기합리화와 노력이 가상할 정도다.

 

동물기에 따르면 과거엔 많은 개들이 늑대 사냥에 동원되고 희생된 것을 알 수 있다. 개와 늑대는 일대일로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임은 자명하니 결국 숫자와 인간의 힘을 빌어야 할 것이다. 화자는 스냅의 용맹함을 두드러지기 위해 사냥개들의 비겁함과 망설임을 은근히 조소하지만 그것은 당연하다. 제일 먼저 덤벼드는 개가 십중팔구 희생될 테니까. 그걸 알면서 나선다는 것은 인간에게도 흔치않은 경우다.

 

그렇다. 그들은 곧 덤벼들 것이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 한숨 돌리는 대로. 늑대 따윈 두렵지 않다. , 그렇고말고. 개들의 목소리에는 용기가 깃들여 있었다. 개들은 제일 먼저 덤벼드는 놈이 상처를 입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결코 개의치 않을 것이다. 열기를 북돋기 위해 조금만 더 짖는 것뿐이다. (P.138)

 

스냅의 용맹은 맹목적이고 무모하다, 본성에 따른 것이겠지만. 그것이 여타 동물기와 스냅의 사례가 차별되는 까닭이다.

 

<어미 여우 빅스의 마지막 선택>

여우는 옛날 동물우화 등에서부터 똑똑한 동물로 나온다. 약삭빠르고 잔꾀를 부리다가 오히려 제 꾀에 빠지는 경우도 있지만. 확실히 이 이야기를 통해 여우가 과연 영리한 동물임을 알게 된다. 자신을 추적하는 사냥개를 따돌리고 심지어는 사람마저 가뿐하게 속여 넘길 수 있는 동물이 많지 않을 것이다.

 

이야기 전반부가 여우 부부가 타고난 능력을 신출귀몰하게 발휘하는 무용담인 반면 후반부는 여우 입장에서는 매우 비극적이다. 제아무리 잘난 동물도 인간이 마음먹고 목숨을 앗을 수 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만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책임도 느끼게 된다.

 

빅스의 용기와 변함 없는 성실함은, 비록 너그럽게 이해할 수는 없다 해도 충분히 존경할 만했다. (P.177)

 

어미여우 빅스가 마지막 남은 새끼를 위해 쏟는 지극한 모성애는 여우에 대해 살짝 부정적인 뉘앙스로 기술하던 작가의 감정마저 누그러뜨린 듯하다.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였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새끼를 구해낼 방법이 없는 빅스.

 

빅스는 새끼를 비참한 죄수로 살게 할 것이야 죽일 것이냐를 두고 선택해야 했을 때, 가슴속의 모성애를 누르고 마지막 남은 출구를 열어 새끼를 자유롭게 해 준 것이다. (P.178)

 

그의 선택은 야생동물의 수준을 능가하며 오히려 어지간한 인간들보다 깊은 고뇌의 결과일 것이다. 그래서 더욱 가슴 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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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편의 동화 부클래식 Boo Classics 58
테오도르 슈토름 지음, 이미선 옮김 / 부북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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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 작품>

1. 레겐트루데

2. 불레만의 집

3. 키프리아누스의 거울

 

동화는 메르헨의 번역어다. 이 세 편의 이야기를 읽고 나서 전형적인 동화로 간주하는 독자가 과연 있을까 의심스럽다. 동화와의 연관성을 따지자면 초자연적 요소와 권선징악적 결말 정도다. 따라서 굳이 동화라고 여길 필요는 없다. 전통적 옛날이야기의 요소를 차용한 비사실적 성격이 강한 이야기 정도로. 작가가 여기서 교훈성을 강조하는 성 싶지도 않다.

 

<레겐트루데>

세 편 중 그나마 온건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비의 요정이 오래 잠든 사이 불의 요정이 활개를 쳐 지독한 가뭄으로 고통 받는 설정은 생소하지 않다. 비의 요정을 깨워야만 가뭄을 물리칠 수 있다. 마렌은 연인 안드레스와 긴 여정을 시작한다. 도중에 마주친 정경은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비의 요정 레겐트루데가 잠이 든 연유다.

 

오래전부터 인간들은 내게서 멀어져 갔어. 그리고 더는 아무도 오지 않았어. 그래서 난 더위와 지루함 때문에 잠이 들었던 거야. (P.43)

 

문명이 발달하면서 이성적 사고가 대세가 되면서 레겐트루데는 도깨비, 망상, 아무것도 아닌 뭣”(P.12)으로 취급받는다. 레겐트루데의 존재를 믿지 않는 부류를 작중에서는 새로운 종교를 가진 사람”(P.12)으로 부른다.

 

마렌과 안드레스의 활약으로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레겐트루데의 전언은 절실하다.

 

집에 가거든 사람들에게 나에 대해 전하고, 앞으로는 나를 잊지 말라고 전해. (P.47)

 

<불레만의 집>

어둡고 그로테스크한 작품이다. 동화라면 잔혹동화에 해당된다고 할 정도. 이야기 중에 한 부분이라도 밝은 대목이 떠오르지 않는다. 오로지 돈만 탐닉하고 인간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매몰찬 인간상. 세상과의 연을 거부하고 칩거하며 혈육의 정마저 부인하는 불레만. 영원히 죽지 못하며 뒤늦게야 신의 자비를 간구하는 그의 처지는 딱하기보다 우스꽝스럽다. 그럼에도 악인에 대한 응징과 처벌이라고 쉽게 말하기 어려운 것은 작품의 비전형적 괴기성에 독자마저도 낯설기 때문이리라.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반전은 불레만 씨가 키우던 애완 고양이 두 마리의 변신에 있다. 삽시간에 커다랗게 자라나 맹수처럼 돌변해 버린 그들의 정체가 무엇일지 궁금하다. 그들은 불레만 씨가 집밖으로 탈출하지 못하도록 영원한 감시자의 역할을 한다.

 

<키프리아누스의 거울>

선한 생모와 악한 계모의 대비는 신데렐라와 장화홍련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옛이야기의 소재가 되어 왔다. 그 점에서 이 동화는 전통을 계승한다고 볼 수 있다.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건이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점 등도 그러하다.

 

등장인물의 전형성이 두드러진다. 천사 같은 백작부인, 유혹에 흔들렸지만 근본 심성은 선한 백작. 대비되는 악인 유형은 새 백작부인과 하거 대령이다. 이들의 성격은 외모에서부터 드러난다. 특히 새 백작부인의 외모 묘사는 대표적인 팜므 파탈에 가깝다.

 

키프리아누스가 보내준 거울은 강력한 힘을 지녔지만, 그것은 현실의 선과 악을 투영할 뿐이다. 선한 사람이 선한 의도로 사용하면 선한 결과를 가져오지만,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선대의 백작과 백작부인의 이야기는 후대의 백작과 백작부인으로 반복된다. 선대의 계모는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망치고 말았지만, 후대의 계모는 비극을 끝내고 거울을 되돌려 놓는다. 선대의 아이들 이름과 후대의 아이들 이름이 똑같게 되는 점도 상징적이다.

 

 

이 세 편의 동화는 작가의 섬세한 손길을 거쳐 옛이야기와 동화의 상투성을 벗어던진다. 인물은 유형화된 정형성을 탈피하고 내면에 복잡한 감정과 사고의 흐름을 보여준다. 불레만 씨와 새 백작부인을 일방적으로 매도할 수 없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작가는 스토리 전개에만 치중하지 않는다. 레겐트루데를 찾기 위한 여정에서 보여주는 아름답고 환상적인 정경 묘사는 대표적이다. 불레만 씨의 파멸을 보여주기 위해 급히 내달리지 않고 가정부 앙켄 부인의 죽음, 고물상의 아들과 어린 크리스토프의 우정도 빠뜨리지 않는다. 이런 점들이 결합하여 세 편의 동화를 매우 독창적인 이야기로 만들고 있다, 독자의 취향과 호오를 떠나서 말이다.

 

현실과 환상의 세계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볼 수 있는 세계이지만, 두 세계는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 환상의 세계에서는 현실을 인지하고 있는데, 현실의 세계에서는 환상의 세계를 보면서도 믿지 못한다. (P.139)

 

작품해설에서 <불레만의 집>과 관련하여 기술한 대목이다. 인간의 이성이 설명하지 못하는 영역, 의식을 초월한 불가해한 세계. 이것이 환상이 존재할 수 있는 근거이며 동화로 대변되는 옛날이야기부터 현대의 환상문학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면면히 이어져오는 원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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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첫사랑
빌헬름 마이어푀르스터 지음, 염정용 옮김 / 로그아웃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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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이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카를 하인리히>이고, 희곡으로는 <알트 하이델베르크>인 이 작품은 여러모로 영화 <로마의 휴일>을 떠올린다. 남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하이델베르크의 휴일이라면 너무 앞서 나간 셈인가.

 

늙은 대공의 말처럼 권좌는 외로운 자리다. 군주는 자신의 권력을 나눌 수도 괴로움을 공유할 수 없다.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하고 인내해야 하며 모두를 지배해야 한다. 궁정에서 진정한 우의와 교분을 맺을 수 있을 것을 기대하면 안 된다. 군주의 삶은 공적인 영역이다.

 

모든 시민들의 삶은 비뚤비뚤 갈 수도 있고 아래위로 요동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군주의 삶은 앞으로 언제까지나 계산되어 있고, 정확히 측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확실하면서도 단조로웠다. (P.172)

 

태자와 박사의 궁정 삶이 답답하고 재미없을 것은 충분히 짐작된다. 태자는 다른 경험이 없어 그나마 나을지라도 태자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고용된 박사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이렇게 한탄한다. 두 사람이 카를부르크를 떠나 하이델베르크로 떠날 때 박사는 영원한 작별을 고한 셈이다. 결코 다시는 돌아올 생각이 없었으므로.

 

궁정으로 들어온 것이하고 그는 종종 말했다. “나의 불행이었어. 그토록 쾌활하고 자유롭던 내가 지금은 어떻게 변했단 말인가! 이상은 물거품이 되었고, 자유도 사라졌고, 건강마저 잃었어. 저 성에서 그들이 내 숨통을 조여 이렇게 만든 거야.” (P.8)

 

작중에서 박사와 루츠 씨는 대비적 인물이다. 루츠 씨는 궁정 생활에 최적화되어 그곳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을 수 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루츠 씨의 우스꽝스러움은 자기자리를 찾지 못한 데 연유한다. 반면 박사는 태자에게 탈 궁정 생활의 즐거움을 불어넣고 유혹한다. 교육자로서 박사의 역할에 대해서는 독자마다 다른 의견을 품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가 반복하여 태자에게 천명한 청춘과 자유로 가득한 삶의 중요성은 간과할 수 없다.

 

사랑하는 카를 하인츠, 넌 허비하고 있어. 더구나 인간이 가진 가장 소중한 걸 말이다. 바로 시간, 청춘이란다!......우리가 놓친 시간 하나하나는 지나간 것이고 다시 돌아오지 않아.” (P.122)

 

젊음을 소중히 간직하거라, 카를 하인리히. 그게 내가 너에게 바라는 전부다. 지금 이 상태로 남아 있고, 만약 그들이 널 다르게 변화시키려 한다면-다들 그렇게 하려 들 거야-거기에 맞서 싸워라. 젊은 기상을 지닌 그런 사람으로 남아야 한다, 카를 하인츠. (P.140)

 

태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지낼 나날의 실체를 미처 알지 못했다. 박사가 주입시킨 단편적 이미지, 그리고 막연한 동경뿐. 청춘의 끓어오르는 열정과 활기, 신분 차를 거리낌 없이 넘나드는 우정, 이성과의 자유롭고 솔직한 감정 교환 등에 맞닥뜨린 그가 어찌 보면 광란으로 점철된 시절을 보낸 것은 당연하다. 케티와의 첫사랑, 태자도 케티도 그것이 아름다운 결실로 맺어질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장래를 바라보기 보다는 당장 눈앞의 현재의 행복과 기쁨에 가슴 벅찼으리라. 시종 루츠 씨를 제외한 모두가.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토록 행복한 적이 있었나? 결코 없었어! 어제와 오늘 나에게는 수많은 인상들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들었지만, 거기에 불협화음은 전혀 섞여 있지 않았어. 그것들 모두가 조화롭게 합쳐져 단 하나의 행복의 화음으로 울려오고 있지. (P.72)

 

하지만 그것은 시한부의 행복일 따름이다, 길어야 1년인. 게다가 늙은 대공의 와병으로 그는 몇 개월 만에 귀국하게 된다. 빛나는 백일몽에서 깨어나 암울한 현실로. 하이델베르크의 기억은 가슴 한켠에 남아있을 뿐이다.

 

하이델베르크! 그 시절을 떠올리면 그의 가슴 주위가 마치 청동 죔쇠처럼 조여 와 그를 금방이라도 질식시킬 것만 같았다.

지난 일이야! 사라졌어! 영원히! (P.154)

 

여기서 끝이라면 이 작품은 청춘 찬가의 자격이 없다. 우연한 계기로 억눌렸던 추억이 되살아나고 그는 일탈을 감행한다. 마음을 위한 백신 처방이리라. 허겁지겁 귀국하는 바람에 그는 그 시절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하였다. 마음의 매듭을 영원히 품고 지낼 수는 없는 법.

 

달려라! 기차가 얼마나 빠른지! 더욱 멀리! 누구도 이 기차를 따라잡지 못해! 짖어 대는 사냥개들은 점점 더 뒤로 처지고 그는 자유로워졌다. (P.179)

 

잔뜩 기대를 품었던 재방문은 현실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깨어난 백일몽은 다시 꿈꿀 수 없다. 잡힐 듯 말 듯한 아련한 추억으로 남기는 편이 더 행복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미련을 포기 못한다. 한 가닥 허상에 불과함을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씁쓸한 미소를 짓게 되는 것이다. 태자 역시 그러하다. 그럼에도 그는 운이 좋은 편이다. 꺼진 줄 알았던 사랑의 불씨가 차디찬 잿더미 속에서 숨죽이고 있다가 돌발적 재회에 소생하였다. 각자의 갈 길이 서로 다르며 눈앞에서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서로를 향한 뜨거운 마음을 더욱 불어넣은 듯 싶다.

 

훗날 카를 하인리히가 문득 청춘 시절의 하이델베르크를 떠올릴 때 가슴 한켠이 시려올 것이다. 흐뭇함과 회한의 양가적 감정으로.

 

그는 이날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이날은 그에게 지나간 청춘 시절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정점에 이른 찬란한 햇빛 아래서가 아니라 흐릿한 저녁놀 속에서 비치는 청춘이었다.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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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튼 동물기 1 시튼 동물기 1
어니스트 톰슨 시튼 글, 그림 / 논장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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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이가 <시튼 동물기>를 읽고 싶다고 하여 부랴부랴 구입하였다. 두 아이가 경쟁적으로 책장을 넘기며 보고 또 보고 하는 모습을 지켜보니 흐뭇하며 기특하다. 근래 사다 준 책 중에서 가장 열심히 흥미진진하게 읽는 책인 듯싶다. 불현 듯 생각나서 나도 간만에-아니 처음인 듯도 하다- <시튼 동물기>를 읽는다.

 

나의 주제는 무심하고 적대적인 인간의 눈에 비친 한 종의 일반적인 생태가 아니라, 각 동물의 진정한 개성과 삶의 관점이다. (P.7)

 

시튼의 동물기가 특히 두드러진 점은 위와 같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 인간과 동물은 대등한 존재이며, 각 동물이 주인공으로서 인간 중심의 독선적 사고관을 벗어나 있다. 그렇기에 독자는 미처 알지 못하던 동물의 삶을 피상적 관찰과 이해에서 벗어나 살아 숨 쉬는 존재로서 인식하며 깊은 공감을 품게 된다.

 

한 야생 동물의 삶이 인간의 삶보다 훨씬 더 흥미로울 수 있음을 보여 준다. (P.103)

 

<커럼포의 늑대왕 로보>

우리는 로보의 맹렬함과 영리함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무수한 목장주와 사냥꾼의 유인과 추격에도 로보는 굴함이 없이 먹이사슬의 최상위 포식자로서 당당한 역할을 한 치의 주저함이 없이 수행하였던 것이다. 블랑카가 아니었다면 과연 가엾은 영웅 로보가 덫에 걸려들었을까? 사랑하는 이와의 갈등 또는 상실로 이성을 잃는 사례는 사람들도 비일비재하다. 로보의 체포와 죽음에 유달리 동정이 가는 연유다. 그는 의연하고 당당하였다.

 

<산토끼의 영웅 리틀워호스>

이 편에서는 본능에 충실하며 영리하고 순수한 동물과 잔인과 탐욕에 물든 인간이 진한 대비를 이룬다. 리틀워호스를 포함한 산토끼들에게 불행이 닥친 것은 인간의 무지와 간섭으로 자연의 균형을 깨뜨린 탓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이 망가뜨린 자연과 멸종시킨 생물은 참으로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사냥개와 산토끼 간의 목숨을 건 경주는 흡사 로마제국의 콜로세움에서 벌어진 사투를 연상시킨다. 쫓기는 산토끼나 쫓는 그레이하운드나 오로지 본능과 생존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동물의 죽음을 수반하는 유희를 즐기는 인간, 여기에 오직 이익과 흥미가 있을 뿐 정당한 규칙과 올바른 원리는 없다. 결코 정직하다고 할 수 없는 미키의 일갈이 선명하다.

 

공정한 경기라고! 너희들이 말하는 공정한 경기가 이런 거냐? 이 거짓말쟁이, 더러운 사기꾼, 이 치사한 겁쟁이들아!” (P.86)

 

<지혜로운 까마귀 실버스팟>

까마귀들은 조직의 소중함을 알고 있으며 병사들처럼 훈련이 잘 되어 있다. 사실 까마귀들은 웬만한 군대보다 훨씬 낫다. (P.103)

 

까마귀들의 사회성과 조직 규율이 이처럼 세밀하고 철저한 지 미처 알지 못하였다. 게다가 영리하기까지 이를 데 없으니 말이다. 무엇보다도 화자가 까마귀들 간에 의사전달을 위한 각종 구호 체계를 악보에 음표로 정리한 부분은 기상천외하며 압도적이다.

 

올빼미에게 습격당한 실버스팟의 죽음은 그의 지혜로움에 대한 평판을 훼손시키지 않는다. 누구도 회피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재난은 동물은 물론 인간도 모두 해당되므로.

 

<야성의 개 빙고>

인간과 개의 끈끈한 유대는 인간이 개를 길들이면서 시작하였다. 개는 자신의 야성을 포기하면서 동물 사촌들과 거리가 멀어지고 인간에게 생을 의존하게 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야성을 간직한 개는 다소간 우려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자칫하면 어느 순간 강렬한 야성으로 개의 본성을 잃을 수 있다.

 

빙고는 늑대처럼 자유롭게 사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의 야성은 사냥개 탠을 죽이고 암코요테와 짝짓기를 한 것에서 절정에 이른다. 개는 가축과 야생의 중간에 계속 머물 수 없다, 아니 인간이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빙고는 늑대처럼 살다가 늑대처럼 죽어 간 것이다. 독자는 알고 있다. 빙고가 인간에게 충실한 개였음을, 그가 두 번이나 화자의 목숨을 구해 주었음을.

 

인간은 늑대를 공공의 적으로 간주하고 무차별 살육하였다. 언젠가 늑대 시체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옛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오늘날 늑대는 일부 지역에서만 명맥을 유지할 뿐이다. 화자 역시 늑대와 코요테 사냥으로 생계를 꾸려나간다. 그에게 있어 그들은 단지 생계 수단으로 간주될 뿐 하등의 감정적 연민을 품지 않는다.

 

덫에 걸린 늑대로 지금의 나와 같은 심정이었겠지. ! 내가 여태껏 얼마나 몹쓸 짓을 해 온 걸까! 이제 그 죗값을 치르는가 싶었다. (P.159)

 

역지사지. 화자가 늑대와 같은 곤경에 처하고 보니 동물의 심정에 공감과 연민을 알게 된다. 시튼이 독자에게 주는 메시지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동물을 단순한 사물과 객체로서 바라보지 말고 심장에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의 친척으로 봐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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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사랑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20
막스 뮐러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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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간 사랑의 본질과 관련한 주제는 인류 역사와 궤를 나란히 한다. 진부한 듯 하지만 싫증을 유발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생명의 본질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생명체로서 생존과 번식에 사랑은 필연적이다. 그럼에도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제각각이다. 누구나 자신의 체험을 반추하며 사랑의 의미를 곱씹는다. 체험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가슴 속에 품은 이상화된 사랑의 모습을 열렬히 간구한다. 이 작품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사랑의 모습 역시 작가 개인의 시각과 관념에서 형상화된 양태이다.

 

무수한 모방을 이끌어냈던 젊은 베르테르의 사랑은 비극적이다. 뜨겁고 격렬하여 목숨마저 무가치하게 만들 정도의 폭풍 같은 사랑. 많은 소설가와 시인들이 제재로 다루었고 찬미해마지 않았던. 작가는 이를 거부한다. 순수하고 완전한 사랑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그것은 이미 순수하고 완전한, 기쁨에 충만한 어린이의 사랑은 아니다. 그것은 두려움과 궁핍이 섞인 사랑-작열하는 불꽃이요, 타오르는 정열일 뿐이다. 달아오른 모래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스스로를 소모하는 사랑-갈망하는 사랑이지 헌신하는 사랑이 아니다. 나의 것이 되어달라고 요구하는 사랑이지 너의 것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본위의, 의혹이 뒤섞인 사랑이다! 이것이 바로 시인들이 노래하며 젊은 남녀들이 믿고 있는 사랑이라는 것의 실체다. (P.27)

 

그러면 작가가 생각하는 참된 사랑의 모습은 무엇인가라는 반문에 이 소설로 응수한다. 이 책은 소설화한 사랑학 개론이자 시화(詩化)된 산문이다. 단순한 줄거리와 구성은 글의 힘과 문체로 정면 승부를 보겠다는 작가의 의지를 피력한 셈이다. 기기묘묘하고 이채로운 풍경에 대한 열광은 찰나적이며 비반복적이다. 한적한 시골길의 돌담 위에 자리 잡은 이름 모를 들꽃의 질박한 아름다움이 차라리 나그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플라토닉한 사랑은 예찬보다는 조소에 가깝다. 젊은 남녀의 사랑은 정신과 육체의 결합을 통해 완성된다. 그들의 결합이 법률적으로 인정되면 곧 결혼이다. 시행착오는 있을망정 사랑은 결국 결혼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자연적이면서도 세속화된 사랑의 외양이다. 작가 역시 이를 긍정한다.

 

, 육체 없이도 정신이 존재할 수 있다는 듯이 정신을 들먹이지 마라! 완전한 현존, 완전한 의식, 완전한 기쁨이란 오로지 정신과 육체가 하나인 곳에만 있을 수 있다......실재하는 삶이란 어디에서든 육체적, 정신적 삶이요, 실재하는 향유란 어디에서든 육체적, 정신적 향유다. 또한 실재하는 만남이란 어디에서든 육체적, 정신적 만남이다. (P.142~143)

 

주인공과 마리아의 사랑은 순수하지만 세속적 잣대에 익숙한 우리의 시선으로는 불순하다. 간계와 음모가 숨어 있고 순진을 기만하는 속임의 가면을 쓴. 두 사람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세상은 고귀한 사랑의 가치를 믿지 않는다.

 

두 사람의 사랑은 운명적이다. 그들은 단번에 상대방의 의미를 깨닫는다. 여주인공의 이름 마리아는 상징적이다. 이름 자체에서 순수함과 고결함을 배어나와 여느 사랑과 같을 수 없음을 암시한다. 그들은 평범한 연인이 될 수 없고 부부도 될 수 없다. 사회적 신분의 차이와 마리아의 불치병. 통념적 사랑의 수순을 밟아갈 수 없는 처지. 사랑의 기쁨을 누리기에도 힘겨운 육체적 쇠약과 멀지 않은 나날.

 

여기서 두 사람의 사랑을 좀 더 공감해 보련다.

 

그녀를 본 첫 순간에 나는 그녀의 전부를, 그녀의 내부에 감춰진 모든 것을 알아보았다. 우리는 인사를 하면서 동시에 서로를 인식했던 것이다. (P.62)

 

나의 소유는 아니지만 당연히 나의 것이어야 하며, 나의 것이고자 원하는 존재임을. 내가 나 자신처럼 믿을 수 있는 존재, 나와 동떨어져 있지만 나 자신보다 더 가까운 존재, 그것이 없으면 나의 생명은 이미 생명이 아니며 나의 죽음조차 이미 죽음이 아닌 존재, 그것이 없으면 내 가엾은 현존이 한숨처럼 허공으로 사라지고 말 그 존재 (P.143)

 

그녀를 다시 못 만난다니? 나는 진정 그녀 곁에 있을 때만 살아 있음을 느낀다. 조용히 있을 테다. 그녀에게 아무 말도 걸지 않고, 그녀가 잠들어 꿈을 꿀 때 가만히 창가에 서 있을 테다. 그런데 그녀를 만나지 못한다고? 작별 인사조차 할 수 없단 말인가? 그녀는 알 리가 없다. 내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다. , 하긴 나도 그녀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 거다. 나는 그녀를 탐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희망하지 않는다. 실로 그녀 곁에 있을 때처럼 내 심장이 평온히 뛰는 적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그녀가 곁에 있음을 느끼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그녀의 영혼을 호흡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P.91)

 

이처럼 내 마음이 깨끗해진 순간에 있는 그대로 내 온 마음의 사랑을 고백하게 해주십시오. 우리가 초지상적인 것을 이처럼 가까이 절감하고 있는 지금, 우리를 다시는 갈라놓지 않도록 영혼의 약속을 맺읍시다. 사랑이 어떤 것이든 간에, 마리아,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느끼고 있습니다. 마리아 당신은 나의 것이라는 것을. 왜냐하면 나는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P.129)

 

양자의 사랑이 흠 없이 순수하다고 주장하지는 않으련다.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들 역시 세속적 사랑의 순서를 따라갔을 것이다. 사랑고백의 대사와 뒤이은 키스는 남들과 다를 바 없다. 다만 사랑의 발현과 인정, 고백에 이르는 일련의 감정의 흐름은 자체로 더없이 순수하였다.

 

마리아는 기쁨과 행복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자신의 짧은 생에 이보다 더 큰 의미를 부여해 준 경험은 일찍이 없었으므로.

 

마리아는 묻는다. 왜 당신은 나를 사랑하나요?”

주인공이 대답한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겁니다.”(P.151)

 

이 이상 완전한 대답이 있을 수 있겠는가?

 

작가는 작품의 사상과 감성을 심화하고 구성의 단조로움을 깨기 위하여 적절한 인용을 비중 있게 삽입하고 있다. 작자미상의 <독일 신학>에 대한 논의가 그러하며, 매튜 아널드의 <파묻힌 생명>(P.80~85)과 워즈워스의 <산지의 소녀>(P.115~119)이라는 장시도 흥미롭다.

 

사랑이란 만인의 심장을 타고 흐르는 대양이 아닌가. 그래서 누구든 저마다 그것을 자신의 사랑이라고 부르지만, 실은 온 인류에게 생명을 주는 맥박인 것이다. (P.114)

 

의사는 주인공에게 당부한다. 마리아와의 사랑을 일개인적 체험으로 축소하지 말고, 이루지 못한 사랑을 기반으로 전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하고 승화시킬 것을, 그리하여 보다 큰 차원에서 사랑을 이루어낼 것을. 표제의 독일인을 지역적으로 국한해서는 안 되는 연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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