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세상의 아름다움 태학산문선 105
정약용 지음, 박무영 옮김 / 태학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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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구성을 먼저 언급한다. 판형치고는 300쪽에 가까운 제법 볼륨감이 느껴진다. 다만 227쪽부터는 한문 원본이다. 한문을 애호하는 독자라면 환영하겠지만 일반 독자에게는 관심 영역 밖이다. 결국 200쪽을 살짝 넘는 아담한 분량인 셈이다. 앞부분에 30쪽에 달하는 작가 해설이 상세하다. 각 글마다 친절한 작품 해설도 덧붙여 있으니 다산 정약용의 산문을 알리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다산은 조선 후기의 거인이다. 그의 장대한 학문세계에 기죽기 마련이지만 여기에 실린 글들을 읽다 보면 그도 새삼 평범한 인간이었음을 알게 되며 그의 희로애락에 공감하게 된다. 청년기에서 노년기에 이르는 전 생애를 포괄하는 글들은 명승 유람의 기행문에서 동병상련의 형에게 보내는 서신, 죽은 아이들을 기리는 글, 아들들을 훈계하고 당부하는 글 등 다양한 성격을 보여준다. 이는 옮긴이가 논설문을 배제하고 다산의 인간적 면모를 드러내는 서정적 글 위주로 선별한 취지에 따른 결과다.

 

1. <적벽, 물염정><서석산 유람기>, <곡산 북쪽의 산수>는 기행문에 해당한다. 전자를 통해 화순 적벽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고 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다. 서석산은 오늘날의 무등산을 지칭한다. 여기서 다산의 감상은 단순히 풍경 자체에 대한 감흥을 뛰어넘는다.

 

조공은 이 산이 다른 모든 산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홀로 알아보았으니, 그 산과 사람이 모두 위대하다고 하겠다. (P.45)

 

<금강산에 가는 까닭>에서는 우리가 자연을 애호함을 마음을 기르는 것으로 인식하여 그 가치와 중요성을 십분 강조한다.

 

마음을 기르는 것은 설령 탐닉하며 돌아 나올 줄 모르더라도 군자는 탐욕스럽다고 하지 않는다. (P.55)

 

2. 탄탄대로를 걷던 그의 관로는 정조의 죽음과 함께 끝나고, 서학 세력으로 몰려 가문이 몰락하고 그는 유배를 떠나게 됨은 대체로 알려진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그가 많은 사색과 깊은 고뇌를 거듭했음은 당연하다. 자신의 비참한 현재 처지와 알 수 없는 앞날의 불안감 등은 새삼 자신을 돌아보게 하였다.

 

대체로 천하만물이 모두 지킬 필요가 없는데, 오직 만은 지켜야 한다......유독 이른바 라는 것은 그 성질이 달아나길 잘하며 들고남이 무상하다......나는 허술하게 간직하였다가 를 잃어버린 자다. (P.94~95, <나를 지키는 집>)

 

망설이기를 겨울에 시내를 건너듯, 겁내기를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듯 한다. (P.87, <겨울에 시내를 건너듯>)

 

윗 대목에서는 그의 또 다른 유명한 호인 여유당의 출처와 의미를 알게 해주는데, 사방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그의 처참한 심경을 그대로 드러낸다.

 

지금 천하가 온통 다 떠다닙니다......생각해보면, 떠다닌다는 것도 아름답지 않습니까? (P.109~111)

 

이 책의 표제이기도 한 <뜬세상의 아름다움>은 나산처사의 추상적인 떠다니는 삶을 구상으로서의 뜬세상으로 변용한다. 일종의 언어유희로 나산처사를 희롱하는 듯 하지만 실은 그에 동의를 하면서 뜬세상의 답답함을 표출하고 있다. 굴원의 고사를 상기시키는 듯 한 뉘앙스가 가슴에 스며든다.

 

3. 다산이 천주교도인지 아닌지는 명확하게 드러난 게 없다고 한다. 나는 여기에 수록된 글로써 그가 천주교도가 아님을 믿고 싶다. 그는 현세주의자 내지 현실주의자다. 그는 피안을 중시하지 않는다.

 

이미 가버린 것은 뒤쫓을 수 없고 앞으로 올 일은 기약할 수 없으니, 하늘 아래 지금 누리고 있는 처지처럼 즐거운 것이 없다. (P.67, <지금 여기서>)

 

그가 천주교도였다면 자식들에게 보낸 글에서 아래와 같은 훈계는 결단코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서학을 믿지 않았음을 처절하게 부정하였다.

 

사대부의 마음이란 비 갠 뒤의 바람이나 달과 같이 털끝만큼도 가리워진 곳이 없어야 한다. 하늘과 인간에게 부끄러울 일은 칼로 끊은 듯 범하지 말아라. (P.204, <입을 속이는 방법 가훈>)

 

4. 사상가 다산이 아닌 인간 다산의 면모는 그가 죽은 아이들을 위해 쓴 여러 편의 묘지명에서 우선 확인할 수 있다.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당대에 천연두와 홍역 등의 질병으로 목숨을 잃은 아이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그들을 잊지 못하고 삶의 흔적을 기록으로 남기는 수고와 배려를 아끼지 않은 이가 또 누가 있겠는가? 다산의 애틋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아아, 내가 하늘에 죄를 지어 이처럼 잔혹한 일을 당하는 것이니, 어찌 하겠는가. (P.126, <소라껍질 두 개>)

 

형 정약전의 죽은 아들의 양자를 들이는 과정에서 벌어진 집안 내 갈등도 원칙과 예법보다 인정을 우선시하는 다산의 변모된 모습을 보여준다.

 

옛 경전을 고지식하게 지키느라고 화기를 상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P.153, <예법과 인정 형님께 4>)

 

다산의 학문적 동지이자 정신적 의지자인 형 정약전의 죽음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형의 뛰어난 인품과 학식을 세상은 물론 가족들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지음(知音)을 잃은 자신의 슬픔이 <나무나 돌도 눈물을 흘리는데>에서 절절히 드러난다. 앞서 정약전의 건강을 염려하여 개고기 요리법도 적어 보낸 다산이었지만, 오히려 다산의 참혹한 건강 상태가 두드러진다. 이런 처지를 무릅쓰고 그는 거작들을 완성해 냈던 것이다.

 

중풍은 병근이 이미 깊어져서 입가에는 항상 맑은 침이 흐르고, 왼쪽 다리에는 늘 마비증세가 느껴집니다. 머리 위에는 두미협에서 얼음 낚시 하는 늙은이들의 솜 모자가 늘 얹혀 있습니다. 게다가 근래에는 혀도 굳고 말도 엇갈립니다. 살 날이 길지 않음을 스스로도 알겠습니다. (P.145, <꽃 피자 바람이 부니 형님께 2>)

 

5. 유배 생활이 장기에 접어들고 사면에 포함되지 못함에 따라 다산은 귀향의 마음을 서서히 놓는다. <뜬세상의 아름다움><은자의 거처>를 보면 다산이 자신의 유배지를 이모저모 아담하게 가꾸었음을 알게 하며, 그가 꿈꾸는 은자가 머물만한 거처의 모습과 요건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였는데도 끝내 돌아갈 수 없다면 이것도 운명인 것이다. (P.211, <세상의 두 가지 저울 연에게>)

 

하지만 제아무리 체념하고 이곳의 생활을 미화하고 포장하지만 인간인 이상 어찌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겠는가? <마음 속 계산 형님께 6>에서 대사면에 포함되지 못한 서운함을 여기가 낫다며 역설적으로 표현하지만, 돌아가고 싶은 못나고 약한 마음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다.

 

6. 다산이 유배지에서 쓴 무수한 글은 자신의 두 아들을 위한 것이다. 졸지에 몰락한 집안, 아버지마저 죄명을 쓰고 머나먼 타지에서 귀양살이하는 형편에 놓인 두 아들. 그는 아들들이 올바로 자라지 못할까 노심초사한다. 엄격하게 훈계하고 때로는 당부와 애원도 마다하지 않는 다산의 부성애가 너무나 사실적이다.

 

내가 저술에 전념하는 것은 눈앞의 근심을 잊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남의 아비가 되어서 이처럼 누를 끼치고 있는 것이 부끄러워 이로써 속죄하려는 것이다. (P.166, <남의 아비가 되어>)

 

내 책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후세의 사람들은 오로지 사헌부에서 올린 장계와 심문 기록으로만 나를 판단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어떤 사람이 되겠느냐? 너희들은 반드시 여기까지 생각해서 분발하여 학문에 힘써라. (P.172, <자포자기하지 말아라 아이들에게>)

 

그는 자식들을 통해 자신의 글이 세상과 후대에 전해져 자신이 진실로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올바로 평가받고 싶어 하였다.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과 자식들이 세상에 당당하게 설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다산의 글을 읽으며 새삼 그의 인간적 면모에 주목하게 된다. 자신의 약점과 단점을 솔직히 시인하며 더 나은 세상, 올바로 선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처지와 애환에 등 돌리지 않는 다산. 사상가를 넘어서 인간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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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의 트럼펫 - 지혜가 자라는 책꽂이 1 지혜가 자라는 책꽂이 1
엘윈 브룩스 화이트 지음, 프레드 마르셀리노 그림, 윤여숙 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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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어트 리틀>, <샬롯의 거미줄>, 그리고 이 작품. 공통점은 동일한 작가가 쓴 동화라는 것과 모두 동물이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동화라는 장르에는 인간보다 동물을 전면에 내세우는 게 적합하다고 생각한 때문일까. 이 책의 주인공은 루이라는 이름의 백조다. 트럼펫 백조라는 종류인데, 우리말로는 울음고니라고 한다. 우는 소리가 트럼펫 소리 같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란다.

 

우는 소리로 유명한데 언어장애로 소리를 내지 못하는 백조가 있다면 참으로 난감할 것이다. 루이가 바로 그러하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며, 의사소통도 어렵게 되어 사회생활이 여러모로 힘들게 되기 마련이다. 우여곡절 끝에 학교에 가서 글자를 깨우치지만 인간에게는 유효해도 백조에게는 무용지물이다.

 

책은 샘이 어느 봄날 아빠와 캐나다의 숲지대에서 캠핑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고즈넉하고 인적조차 드문 깊은 들판. 이곳에 남쪽에서 날아온 트럼펫 백조 부부가 둥지를 튼다. 평화로움과 여유로움이 공존하는 문장이 독자의 인내심을 시험하려는 찰나 우연한 계기로 샘과 트럼펫 백조 부부는 친구 사이가 된다. 훗날 태어난 새끼 백조 루이도. 이 작품은 루이와 샘의 깊은 우정이 끝까지 이어지고, 샘의 도움으로 루이는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게 된다.

 

아빠 백조가 훔쳐온 트럼펫으로 소리를 내지만 한편으로 빚을 갚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게 된 루이. 그는 샘의 도움으로 온타리오의 청소년 캠프, 보스턴의 공원 호수, 필라델피아의 나이트클럽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며 돈을 저축한다. 이 대목에서 인간과 백조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모습을 작가는 천연덕스럽게 기술한다. 처음엔 어리둥절하고 의구심을 표하지만 금방 인간 사이의 관계처럼 대등한 존재로 인정한다. 나아가 인간의 (돈을 향한) 탐욕도 말미에 슬쩍 보여주면서 백조의 정직함과 대비시켜 부끄러움을 유발케 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암컷 백조 세레나와 재회하여 사랑과 행복을 성취하고, 열심히 모은 돈으로 아빠 백조는 떳떳하게 빚을 갚으며 모두가 만족스러운 결말로 이어지는 것은 동화의 전형적 구성이다. 또 다른 동화의 특징인 우연성을 작가는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 주요 대목마다 의존하고 있어 단순히 운이 좋다고 하기에는 자연스런 전개와도 다소 어긋난다. 루이가 너무도 쉽게 샘을 발견하는 것, 필라델피아 호수공원에서 폭풍에 휘말려 떨어진 세레나와의 조우 등. 아마도 이 작품의 약점을 꼽으라면 이게 대표적이 아닐까 싶다.

 

작품의 축은 아빠 백조의 부성애, 루이와 샘의 우정, 그리고 루이와 세레나의 사랑이다. 장애를 지닌 아들을 위해 위험과 명예를 무릅쓰고 트럼펫을 훔친 아빠 백조. 유난히 드높은 자부심을 지닌 그로서는 불가피하지만 양심에 생긴 흠집은 회피할 수 없다.

 

밤하늘을 날면서 아빠 백조는 자신의 물음에 스스로 분명하게 대답했다.

그건 내 아들 루이를 사랑하기 때문이지.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어.” (P.103)

 

루이와 샘의 우정은 각별하다. 샘의 도움으로 루이는 글자를 익혔고 돈을 벌 수 있게 되었으며 세레나와의 사랑과 자유를 무사히 이루어 낼 수 있었다. 샘은 루이를 통해 자연과 동물에 보다 깊은 이해와 사랑을 품게 되었으며 자신의 진로 방향을 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루이와 세레나의 사랑.

 

루이의 마음은 오로지 아름다운 사랑, 세레나한테만 쏠려 있었다. 오직 세레나만을 위해 그 곡을 연주했던 것이다. (P.196)

 

이제 루이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백조였다. 마침내 진짜 트럼펫 백조가 된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말하지 못하는 불행과 어려움을 마침내 이겨 낸 것이었다. (P.200)

 

이 작품은 동화를 떠나서 트럼펫 백조의 생태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미국과 캐나다 사이를 오가며 둥지를 틀고 새끼를 키우는 방식, 군집으로 어울리며 생활하는 습성, 그리고 사랑과 짝짓기 등이 작품 전반에 세심하게 반영되어 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트럼펫 백조에 대한 준 전문가적 식견을 자부할 수 있을 정도다.

 

자유는 정말 멋졌다! 사랑하는 것은 정말 행복했다!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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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뒷모습 태학산문선 401
주자청 지음, 박하정 옮김 / 태학사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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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주자청의 이름을 처음 듣게 된 것은 윤오영의 글을 통해서라고 기억한다. 지난세기 초의 중국에서 전개된 소품문학 운동과 함께 인용된 주자청의 글의 평가는 꽤나 인상적이었다. 과거의 문장은 도덕적이며 군자연하며 추상적인 거대담론 지향적이라면 주자청의 글은 솔직하고 감정에 충실하다.

 

표제작 <아버지의 뒷모습>은 장성한 자식도 안심 못하며, 하나라도 챙겨주고 싶어 하는 부모의 마음과 모습이 코끝을 찡하게 한다. 대개 자식의 반응은 지나친 신경 씀에 부담스러워하고 촌스런 부모의 행동에 성질을 버럭 내게 마련이다. 하지만 훗날 상기하면 그때의 장면이야말로 돌아갈 수 없는 부모의 사랑을 절실히 깨닫게 해준다. 풍수지탄이다.

 

,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 당시 난 지나치게 똑똑하게 굴었던 같다. (P.84)

 

<죽은 아내에게>는 세상을 뜬 지 3년이 지난 시기에 죽은 아내에 대한 추억을 풀어놓는다. 비슷하게 <내 친구 백채>, <매화후기>, <위악청을 그리며>는 죽은 친구에 대한 회상이다. 풍경과 시절을 다룬 글도 제법 있다. 그 중 <>이 인상적이다. 피천득의 표현을 떠올리게 한다.

 

봄은 갓 태어난 아기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선한 채 새롭게 성장해 가는 것.

봄은 아리따운 처녀처럼 꽃단장을 하고서 미소지으며 걸어가는 것.

봄은 건강한 청년처럼 무쇠같은 팔뚝과 허리와 다리로 우리를 인도해가는 것. (P.201)

 

주자청이 살다간 시절은 격동과 전화의 시기다. 청 제국이 수명을 다하고 쑨원과 군벌과 열강의 침탈, 그리고 중일전쟁으로 대륙 전체가 몸살을 앓던 때, 일세의 지성인으로서 그의 심경도 결코 편할 리 없다. 봉건의 잔재에 치를 떨며 외세에 무력한 현실에 분개하고 할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시대에 개탄한다.

 

! 7전에 너의 모든 생명을 사들였다. 너희 피와 살이 결국 하찮은 7개의 동전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냐. 생명이 정말 참으로 하잘 것 없구나! 생명이 정말 너무나 싸구려란 말이다! (P.57, <7전짜리 목숨>)

 

내가 당황하고 공포감마저 느낀 것은 오만하게 나오고 유린했던 자가 다른 사람이 아닌 십여 세에 불과한 백인꼬마였기 때문이다. 정말 불과 열 살 안팎의 백인 꼬마였기 때문이다. (P.79, <백인종-하느님의 귀염둥이>

 

진정 자신의 말을 하는 사람은 몇몇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진정한 생활을 하면서 그 생활을 음미하는 사람은 몇몇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일반사람들은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다들 그렇고 그렇게 살아간다. (P.179, <‘할 말이 없음에 대하여>

 

그럼에도 주자청의 본령은 <여인>, <아하> 그리고 <야경에 노젓는 소리 들리는 진회하>에 있다고 생각한다. <여인>은 친우의 입을 빌려서 작가의 미인론을 전개한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화자는 이상적 여인을 예술적인 여인으로 칭하며, 예술적인 여인의 신체 조건을 허리, 종아리, 어깨 및 얼굴 등 세밀하고 관능적으로 묘사한다. 현대라면 여성론자들의 반감을 살 정도로 솔직하고 대담하다.

 

예술적인 여인의 현실적 구현이 <아하>의 여주인공이다. 화자는 몸종 신분의 아하에게 이성으로서의 감정을 품지만 내색하지 못한다. 아하의 개가 소식을 접한 화자의 반응은 아하의 이중성에 대한 충격과 더 이상 아하를 그리워할 수 없음에 대한 아쉬움이 상반된 탓이리라.

 

나는 곧 깨달았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그저 멍하니 아제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의 얼굴에서 어렴풋이 아하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 내 무슨 말을 하리오! 운명의 신이 그녀를 영원히 감싸주기를 바랄 뿐이다. (P.123~124)

 

<야경에 노젓는 소리 들리는 진회하>는 수록작 중 가장 긴 글인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글로 손꼽고 싶다. 남경의 옛 영화를 추억하며 한밤에 뱃놀이를 하는데, 다가오는 화려한 조명의 배에 탄 기생과 노랫소리. 유혹과 본능이 체면과 이성과 줄다리기하는 가운데 은밀하고 관능적이며 몽환적인 정서가 전편을 휘감아 아우른다. 황홀하지만 덧없는 한 여름밤의 꿈.

 

주자청은 친구, 아내, 주변 인물 및 사물, 풍경 등 일상을 소재로 하여 담백하게 글쓰기를 한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당연한 게 아니냐는 반문도 있겠지만 백여 년 전 중국 문단에서는 파격적이고 선구적인 글쓰기로 평가받는다.

 

역사적 평가를 차치하더라도 그의 글은 가식의 탈을 벗어던진 지극히 인간적인 현자의 향취가 풍긴다. 온전히 벗은 모습이 누구나 항상 아름다운 법은 아니지만 주자청이라면 안심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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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백 개의 산을 넘어 글누림 비서구문학전집 5
레이나 그란데 지음, 박은영 옮김 / 글누림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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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품격> 중 한 챕터로 이 작가의 사연이 소개되어 급관심이 생겼다. 국내에 이 작품이라도 나와 있어 부분적 실체나마 접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멕시코 출생과 미국 불법이민의 개인사를 겪은 가진 작가가 자신의 체험과 느낌을 고스란히 이 데뷔작에 쏟아놓고 있음을 체감할 수 있다.

 

가난한 멕시코인들에게 이웃 나라 미국은 저 건너편(El Otro Lado)’이다. 국경만 넘어가면 지긋지긋한 가난을 탈출할 수 있기에 그들은 생사의 위험을 무릅쓰고 월경을 시도한다. 후아나의 아버지도 이 대열에 합류한다, 훗날을 기약하면서. 익숙한 장면이다. 우리도 어려운 시절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었으며, 동남아인들 역시 이곳에서 마찬가지의 기대를 품는다.

 

아버지로부터의 소식이 전해지지 않으며 남겨진 후아나와 엄마는 이중고에 시달린다. 경제적 곤란과 버림을 받았다는 심적 두려움과 배신감. 전자를 견디지 못한 엄마는 돈 엘리아스에게 몸을 허락한다. 심적 불안과 도덕적 비난은 그녀가 임신을 하면서 극도로 격해지며, 돈 엘리아스에게 아기를 빼앗기면서 절정에 달한다.

 

밖에서 엄마는 바위에 대고 접시를 던지기 시작했다. 접시는 하나씩 날아가 산산이 부서졌다.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어떻게?” 엄마는 이렇게 소리치고는 컵을 던졌다. (P.107)

 

후아나는 자신의 행위가 원인이 되었다는 죄책감마저 더해진다. 두 사람의 삶은 서서히 수렁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독실한 신앙심도 희미해지고, 엄마는 알코올중독에 빠졌으며 어린 후아나는 생계를 위해 동분서주한다. 사방엔 그들의 처지를 비웃고 비난하는 이들로 가득하다.

 

후아나는 성인들과 과달루페 성모가 자신들을 위해 곁에 있어주었던 오래전을 기억했다. 그러나 지금, 모든 성상들은 먼지에 덮였고, 꽃잎들은 시든지 오래다. (P.173)

 

이후 후아나의 일생은 미국으로 건너가 아버지를 찾기 위한 노력으로 점철된다. 아버지를 찾으려는 후아나의 갈망은 정보와 경비 마련을 위해 창녀 생활마저 감수하도록 만든다. 그 선택의 정당성과 불가피성은 논란이 있겠지만, 아버지 찾기를 절대가치화하는 후아나의 입장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버지만 돌아오면 모든 비정상이 정상으로 회복될 것이다. 아버지가 가족들을 정말로 버렸는지, 그랬다면 이유는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뿐. 이 단계를 거쳐야 비로소 제대로 숨 쉬고 온전한 밤잠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사랑조차도.

 

아델리나, 사랑을 위해서조차도 아버지 찾기를 그만둘 수 없는 거냐?”

사랑을 위해서도요.”

사랑은 찾기 힘들어. 그걸 놓쳐서는 안 된다. 네 젊음을 유령을 찾느라 허비하지 말아라.”

저희 아버진 유령이 아니어요. 저는 그를 찾을 거예요.” (P.209)

 

미국에서 아버지 같은 존재였던 돈 에르네스토의 권유에도 그녀는 포기할 수 없다.

 

이 작품은 계급 대립적 구도를 지닌다. 부유한 미국과 가난한 멕시코, 부조리하지만 잘 사는 돈 엘리아스와 정직하지만 못 사는 후아나의 아버지. 그리고 후아나의 엄마를 위협하고 정복하는 돈 엘리아스와 아델리나에 기생하며 착취하는 헤라르도. 헤라르도는 여러 면에서 돈 엘리아스의 판박이다. 차이점이라면 누구는 죽임을 당했고 다른 이는 살인을 했다는 것인데, 대응되는 여인들의 의지와 주체성의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다.

 

중간에 삽입된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 토막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일조한다. 버스에서 쫓겨날까 봐 아이의 죽음도 내색하지 못하는 아이엄마. 아이들을 만나려고 월경 일행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하는 불법체류로 추방된 여인.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일으킨 교통사고로 아이가 죽었다고 자책하며 무너지는 여인. 대부분의 피해자가 여자라는 점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남성 중심의 엄격한 가부장 체제에서 여성은 종속적, 수동적 지위에 머물 수밖에 없게 되므로. 이에 반발하고 나선 게 페미니즘이다. 이 작품은 엄밀히 여성주의 유형에 속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후아나의 삶은 제아무리 정당화하더라도 아버지의 존재에 매달려 있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상실감이 이렇듯 만사를 비정상화시킬 만큼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온당한 것인가. 그녀에게 아버지는 실제를 초월하여 극도로 이상적인 존재로 미화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야 자신의 죄책감이 조금이나마 경감될 수 있고, 자신의 아버지 찾기 노력이 유의미성을 갖게 되니 말이다.

 

후아나의 미국행은 순탄치 않았다. 비용 마련을 위해 티후아나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일행과 함께 월경을 감행하며 성공을 목전에 두고 실패하는 대목은 영화의 한 장면과도 극적인 스릴이 넘친다. 후아나는 진정으로 아델리나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녀가 없었더라면 후아나는 여느 멕시코 여인들처럼 삶을 살게 되었을 것이다.

 

19년 만에 그녀는 아버지를 찾는데 성공한다. 비록 유골이지만, 그 의미는 남다르다. 이제야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떳떳함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이것은 아델리나가 엄마에게 주는 선물이 될 것이다.

평화.

그리고 진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들을 버리지 않았다. (P.249)

 

후아나(아델리나)가 자신의 친동생과 상면하게 되는 장면은 감동적인 동시에 감상적이다. 후아나(아델리나)의 입장에서는 비밀이 속 시원하게 밝혀지는 게 나을 수도 있지만, 작중 인물의 말마따나 때로는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좋을 수도 있다. 차라리 후아나(아델리나)와 세바스티안과의 관계처럼 알 듯 모를 듯 여운을 남기는 게 결과적으로 좋았지 않았을까. 친동생의 앞날을 위해서라면.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 어떤 남자도 원하지 않았다. 그녀에겐 충분히 많이 있었다. 그녀가 마음속에 머물도록 허용한 유일한 남자는 그녀의 아버지였다. 비록 그가 오직 기억에 불과할 지라도 말이다. (P.122)

 

아델리나가 세바스티안을 만날 때 품은 심정이다. 이때는 단지 아버지의 존재감을 강조한 문장으로 이해되었는데, 후에 아델리나가 되기 전 후아나의 삶을 볼 때 새삼 새롭게 의미가 다가왔다. 그녀는 세바스티안과 정말로 정상적인 삶의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이 작품은 구성이 특이하다. 아델리나와 후아나가 각자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종래에는 한 곳에서 만나게 된다. 양자는 이름만큼이나 시기와 지역에서 차이를 보여준다. 그들의 삶 자체도. 그리고 우리는 알게 된다. 작중 진짜 아델리나를 통해 서로가 연계되어 있음을. 이것은 흘러간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당대에 여전히 진행 중인 상황이며 작가가 상당 부분 체험하였기에 생생함은 논픽션 못지않다. 부분적 아쉬움은 있지만 미국-멕시코의 현대 모습을 담고 있어 무척 흥미롭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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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문화 답사기 : 완도편 - 孤島의 일상과 역사에 관한 서사 섬문화 답사기 시리즈 3
김준 지음 / 보누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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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은 독특한 공간이다. 바다로 인해 육지와 갈라져 바로 눈앞에 빤히 보이건만 이동이 자유롭지 못한 곳. 섬만의 고유한 풍경과 식생, 문화는 분명 육지와는 다르다. 우리나라의 섬은 3천개가 넘는다고 하는데, 무인도를 제외하더라도 최소 수백 개의 섬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네들은 이리도 불편한 섬에서 어찌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섬이라고 하면 대부분 제주도를 떠올린다. 머나먼 울릉도와 독도도 있다. 아니면 연륙교가 가로놓인 강화도, 안면도, 진도, 완도, 남해도 및 거제도도 있다. 강화도 깊숙이 들어가면 널찍이 펼쳐진 논으로 섬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진도와 남해도의 골은 무척 깊다. 이런 섬은 오히려 예외적이다. 바다 가운데 놓인 섬으로서의 의미가 퇴색되고 인적이 드물기는커녕 사람들로 넘쳐나 그나마의 고유문화마저 퇴색되는 곳이 아닌 날것 그대로의 섬사람과 섬문화를 알아보고 싶을 때 이 책을 만났다. 넘쳐나는 관광안내서가 아닌.

 

이 책을 쓴 이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지니고 이 방대한 저서를 내놓았는지 궁금하다. 600면에 달하는 두툼하며 상업성이라고는 전무에 가까운 책을. 정말로 출판지원사업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또 저자의 지극한 섬 사랑이 아니라면 불가능했으리라.

 

섬 많은 곳 하면 전남 신안군을 떠올리지만 완도군도 제법 섬이 많다. 섬으로만 이루어진 행정단위. 650여 개의 큰 섬과 작은 섬, 육지와 가까운 섬과 멀리 외떨어진 섬, 평지가 있는 섬과 산지로만 이루어진 섬. 섬의 조건에 따라 섬사람의 생활 모습과 문화가 제각각 차이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음지와 양지가 뒤바뀌는 곳도 빈번하다. 섬을 바라보는 저자의 심경은 한마디로 애틋함과 안타까움의 상존이다.

 

섬의 숨겨진 역사

 

가리포해전(1605)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지? 그러면 계미민란(1883)? 전자는 임진왜란 이후 소규모로 침입해오던 왜구들 함선 30여척을 가리포첨사 최강이 섬멸시킨 일대 승전이다. 후자는 동학농민전쟁보다 10년이나 앞서 발생한 민중봉기라고 한다. 둘 다 완도의 숨은 역사적 사실이다.

 

완도 옆 장도는 장보고의 청해진 근거지로 추정된다. 오늘날에야 해신으로 추앙받지만 이렇게 신분이 복원된 지 오래지 않았다고 한다. 지배층은 민중의 정치권력 도전을 용납하지 않았다.

 

동아시아 해상권을 장악했던 해신 장보고는 이후 고려와 조선은 물론 해방 이후에도 정치권력에 의해 역신으로 낙인찍혀 기록은 물론 기억에서도 사라졌다. 반역의 땅으로 동토가 된 후 재평가를 받는 데 천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P.85)

 

항일운동의 치열한 흔적을 간직한 저항의 섬신지도와 소안도. 신지도의 항일운동기념탑은 가본 적이 있다. 소안도의 항일운동사는 별도 항목으로 상세하게 수록하고 있다. (P.418~424)

쌀과 소금, 둘을 얻을 수 있는 곳이 고금도였다. 충무공이 고금도를 선택한 결정적 이유였을 것이다. (P.130)

 

명량대첩 이후 충무공이 고금도를 근거지로 선택한 이유도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추사 가 존경하던 명필 원교 이광사가 신지도에서 장기 유배생활을 했다는 사실도 비로소 알게 된다. 신지도가 유배의 섬이었음을.

 

섬과 섬사람의 사연들

 

저자의 기록에 따르면 완도는 상황봉을 기준으로 동쪽은 대부분 갯벌이었다고 한다. 즉 지금의 평야지대와 시가지는 모두 갯벌을 매립한 땅이라는 것인데, 의외의 사실이 놀라움을 안겨준다. 완도가 본디 척박한 섬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해남과 완도를 잇는 섬인 달도의 다리가 세 개인 사유는 어처구니없으며 서글프기조차 하다. 다리를 놓는데 급급하여 제방 형태로 바닷길을 막아버렸다고 하니 김 양식을 망친 어민은 물론 흐름이 가로막힌 바다는 어떻겠는가.

 

금당도를 비롯해 완도 사람들에게 당시 김 양식은 단순히 경제행위가 아니었다. 생활이고 삶 자체였다. (P.183)

 

완도 일대는 과거부터 김의 주산지로 명성을 떨쳤다. 인간의 과욕으로 김 양식이 쇠퇴한 이후 다시마, 전복으로 주력이 변화하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어리석기 그지없다. 한편 매생이와 김의 처지가 역전된 내용은 익히 알고 있지만 최대 산지인 약산도 편에서 소개하니 새삼스레 다가온다.

 

과거 소목포라고 불리며 번성하던 노화도가 보길도의 유명세에 밀리게 된 상황, 편안한 바다인 소안도가 제주도와의 중간 지점인 까닭에 오히려 소안도 주민들의 삶은 편안하지 못했다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섬 고유의 문화

 

섬은 생과 사가 한순간에 교차하는 곳이다. 바다는 풍요롭지만 매몰차기 그지없어 인정사정 두지 않는다. 인간이 한계상황에 다다를 때 보다 높은 존재에게 기대면서 종교가 시작된다고 한다. 그것이 오늘날 관점에서는 미신이라고 치부될 수 있는 당할아버지와 당할머니의 섬김이다. 생일도와 덕우도에서는 마을 모두가 당제를 지낸다고 한다.

 

자연조건의 영향을 크게 받는 섬마을은 농촌에 비해 마을의 평안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의가 발달했다. 할머니당이나 할아버지당이 대표적이다. 소나무나 느티나무 등을 신목으로 모시거나 당집에 돌, 철마, 신위 등을 신체로 모시기도 한다. (P.105, <백일도>)

 

청산도는 관광지로 유명한 곳이지만 저자의 시선은 그곳 사람들의 고유 장례풍습인 초분에 주목한다. 예전에는 여러 섬과 육지에서 성행하던 풍속이 거의 소멸되고 이곳을 포함한 일부에서만 명맥을 유지한다. 초분의 세부 절차와 의미에 대해서는 책 내용을 참조하면 되겠지만, 논밭 옆 일상 속에 무덤이 함께 한다는 점이 생경하면서 터무니없지는 않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중간에 초분이 있다. 초분을 하는 이유가 어디 한둘이겠는가. 따지고 보면 모두 산 자를 위한 죽음의 굿이다. 죽어서라도 자식들을 돌보고자 하는 애틋한 부모의 심정을 읽을 수 있다. (P.357)

 

섬마을 중 으뜸이라고 저자가 일컬은 돌담을 보기 위해 소모도에 가보고 싶다. 개발시대, 가난과 궁핍에서 벗어나기 위해 과거의 유산을 퇴행적으로 간주하고 뒤엎는 게 미덕이었던 시절. 상전벽해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시멘트담보다 돌담이 은은한 정서를 자아낸다. 쌀 한 톨이라도 생산하기 위해 바다를 막고 간척하던 게 미덕이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 데 요즘은 갯벌의 환경적, 경제적 가치가 연신 상한가를 경신하고 있다.

 

연륙교가 잇달아 개통되고 있다. 불편한 뱃길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므로 생활면에서는 편리함이 월등하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섬 고유의 전통과 문화가 쇠퇴한다. 접근이 용이해지니 관광객이 증가하고 경제적 가치를 추구하는 개발 붐이 일어난다. 돈만 된다면 무엇이든지 팔 수 있고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 이제 당신은 불필요해진다.

 

완도 정도리에 구계등이라는 몽돌해변이 참 좋다. 아직 때가 덜 묻어서 힘들게 찾아갔지만 좀 더 오래 머물지 못하는 게 아쉬울 정도다. 이 해변과 배후의 숲이 하마터면 사라질 뻔 했는데 마을주민들이 단합하여 살렸다고 한다.

 

돈에 눈이 멀어 몽돌을 팔아 돈을 챙기려는 것을 막은 것도 마을공동체였다. 국가가 나서기 전에 마을의 전통과 문화가 숲과 몽돌을 지켜냈다. 숱한 태풍에도 마을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던 것은 몽돌과 마을 숲 때문이었다. 거친 파도를 온몸으로 막아내며 모난 돌은 몽돌이 되고 나무는 영글어갔다. (P.35)

 

농어촌의 자연적 변이는 인위적으로 막을 수 없다. 농어촌에 노인들만 남게 되는 현상은 안타깝지만 젊은이는 여러 사유로 도회지로 나가고 싶어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사람이 살지 않으면 마을은 유지될 수 없고 고유의 문화와 전통은 필연적으로 소멸한다.

 

단지 보전을 위한 전통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문화 자체가 삶의 연장이고 그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지속가능한 전통문화는 행사를 위한 자금 지원이 아니라 삶의 지속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일러준다. (P.502, <넙도>)

 

공유수면으로서의 어장과 갯벌의 가치

 

토지는 개인 소유가 인정되지만, 바다는 그러하지 않다. 어장은 특정 개인이 아닌 마을 주민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공유수면이다. 어촌계 위주의 어장 정책은 타당성이 있지만 작은 섬 주민들이 부당하게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점을 저자는 되풀이하여 지적한다.

 

작은 섬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하려면 단지 정주 환경만 개선해서 될 일이 아니다.

섬에 머무는 사람들이 갯바위와 인근 어장을 우선 이용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육지와 달리 바다에서 해 먹을 것이 없다면 섬에 머무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P.251, <우도>)

 

가치로 본다면 섬 면적의 경제적 가치보다는 섬 주변 어장의 가치가 훨씬 크다......땅보다 높아진 바다의 가치는 환영하지만 공유수면이라는 바다의 특성이 사라질까 우려스럽다. (P.119, <양도>)

 

갯벌의 성격 역시 마찬가지다. 갯벌은 어촌 주민들의 텃밭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래서 갱번이라고 불리는 분배의 원칙이 자치규율로 내려왔던 것이다. 특히 작은 섬 마을이 되살아나고 섬사람들이 정착하게 할 수 있기 위해 마을공동체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작은 섬살이를 더 힘들게 만든 것은 큰 섬의 횡포였다......

갯바위의 해초들은 마을어업에 속한다. 마을어장인 것이다.

예로부터 해당 섬 주민들이 논밭처럼 가꾸며 살았다. 그래서 법에 앞서 관행어업으로 인정을 해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작은 섬에 주민들이 자꾸 줄어들면서 인근의 큰 섬에서 마을어업 면허권을 앞세워 권리를 주장하는 사례가 있다. (P.528, <죽굴도>)

 

작은 섬들에 대한 관심과 지원 부족

 

저자가 안타까워하는 점은 작은 섬에 대한 당국의 관심과 지원이 매우 부족하다는 데 있다. 섬에서는 뱃길이 없으면 코앞에 있어도 다가갈 수 없는데 연락선 등 운송수단은 한정적으로만 운영되고 있다. 행정구역과 생활구역이 상이하여 불편을 겪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육지와 가까워 좋겠다는 사람도 있지만 속 모르는 소리다. 해남과 완도의 경계에 있으면서 어느 쪽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는 섬이다. (P.64, <토도>)

 

작은 섬은 아무리 가까워도 쉽게 갈 수 없다. 뱃길이 없기 때문이다. (P.444, <구도>)

 

남획과 과용으로 황폐화되는 어장, 상업주의와 이기주의

 

마지막으로 저자는 사람들의 탐욕을 경계한다. 경제적 가치가 부각되다 보니 바다를 소모품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뿌리 끝까지 뽑아 쓰다 버리면 그뿐이라는 시각. 인간은 역사를 중시하지만 꼭 필요한 때에는 오히려 외면하기 일쑤다. 김 양식의 실패를 전복 양식에서는 되풀이하지 않기를 저자는 기원한다.

 

김 양식으로 호황을 누릴 때 너도나도 김발을 막았다. 결과적으로 바다는 오염되고 윤기가 잘잘 흐르던 김은 상품가치가 떨어졌다. 결국 그것이 가격 하락으로 이어졌다. 노화도 김 양식 쇠퇴 이후 새로운 기회를 얻고 있다. 과욕불급이다. 김 양식 시절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벌써 노화도에 전복 양식을 하던 주민들이 새로운 양식장을 찾아 떠나고 있다. 바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P.488, <노화도>)

 

 

땅끝 전망대에 올라 삼면 바다를 휘돌아보면 올망졸망한 섬들이 점점이 박혀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전에는 단순히 자연적 존재인 섬 자체로 받아들였다. 우리가 멋진 풍경을 보듯이 말이다.

 

이 책의 미덕은 섬과 섬사람을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 인식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저자의 발길을 따라 동행하는 동안 그네들의 생활과 역사, 아픔과 바램이 무엇인지를 공유하게 된다. 여기에 소개된 섬들 중 작은 섬의 경우는 제 아무리 지도책을 봐도 위치와 실체를 가늠할 수 없다. 네이버지도를 최대한 확대해야 겨우 위치와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섬들이다. 새삼 저자에게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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