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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선물 ㅣ 범우문고 49
앤 머로 린드버그 지음 / 범우사 / 1991년 1월
평점 :
이 책은 ‘여성을 위한 책’으로 쓰였다고 하지만, 남성들에게도 유익한 글들이다. 여성의 삶과 내면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뿐더러 남성 자신에게도 충분히 응용하여 성찰할 수 있는 내용이어서다. 이 책의 가치는 서두의 작품해설에서 잘 요약되어 있다.
하나의 조그마한 조개를 통해 인간과 자연을 꿰뚫어 보려는 여성 특유의 감수성과 예리한 눈. 그러나 그것은 결코 여성의 작은 세계나 소극적 대응에 머물지 않고 생명의 이치와 자연의 섭리, 곧 우주의 존재에 대한 경건한 납득에까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P.14~15)
책표제가 <바다의 선물>인 연유는 작가가 섬에서 지내며 바닷가의 조개를 통해 여성으로서 삶의 의미를 재발견한 데 있다. 바다가 보내준 선물로서. 이 책에 등장하는 조개는 소라고둥, 달고둥, 해돋이조개, 굴조개, 배낙지조개다. 다만 내게는 소라고둥과 굴조개를 빼고는 모두 생소하다.
20세기 중반기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의 과도기에 해당한다. 사회적으로는 자본주의와 과학문명의 발달에 따라 물질문명에 대한 경도가 심화되고 정신성의 결여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는 시절. 가정적으로는 종래의 전통적인 부속적 여성상이 약해지고 여성의 자아실현과 사회참여 등 개체로서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던 시절. 작가도 이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어 여성의 발전을 환영하면서도 그것이 자칫 외향적 겉치레에 흐르지 않을까 저어한다. 그것이 이 책을 쓴 계기가 아닐까.
소라고둥의 소박한 아름다움이 들려준 하나의 대답은 생활의 간소화와 정신을 어지럽히는 요소 중 일부를 제거하라는 것이며 (P.37)
소라고둥의 가르침은 쉽지 않다. 현대사회는 화려함과 번쩍거림에 열광한다. 외면적 아름다움과 눈부신 빠름을 찬미한다. 여기에 둔감하면 사회의 낙오자로 백안시당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개인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 달고둥의 전언인 고독과 함께 결코 건너뛸 수는 없다. 시끌벅적한 사원의 개념이 당혹스러운 것은 절대자에의 갈구 내지 궁극적 진리의 깨우침이라는 종교의 본질과 배치되어서다. 작가는 특히 여성을 강조하는데, 여성은 가족을 위해 자신을 베풀어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성은......‘구르는 바퀴의 축이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정신과 육체가 활동하는 한가운데서 영혼이 갖는 평정’을, 그런 내면의 조용함을 찾아내야 한다. (P.57)
해돋이조개는 딱 맞는 두 쪽의 껍질로 이루어진 모양이다. 작가는 해돋이조개에서 인간의 ‘순수한 관계’를 연상한다. 남녀 간, 부모자식 간의 더없이 순수한 사랑. 순수함이 귀한 것은 흠이 생기거나 깨어지기 쉬운 탓이다. 찰나적 아름다움, 이것을 수긍해야 한다. 시간의 흐름 앞에서 만물은 속절없다. 그런 한계를 인정하며 그 가운데서 가치를 찾는 것, 그것이 긍정적 삶의 태도가 아니겠는가.
아름답고, 깨어지기 쉽고, 덧없는 해돋이조개. 그러면서도 결코 허망한 것이 아니다......해돋이조개는 모든 아름답고 덧없는 것들에 대한 영원한 긍정을 지니고 있다. (P.81)
굴조개는 매끈하기 그지없는 내용물에 비해 껍데기가 우툴두툴하고 못생긴 편이다. 린드버그는 여기서 중년의 여인상을 유추한다. 치열한 생존경쟁과 생활의 분투 결과라면 굳이 가리고 부끄러워하거나 움츠릴 까닭은 없다. 신체적으로는 쇠퇴해지지만 정신적으로 원숙해질 수 있다면 중년을 부정적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배낙지조개에서 글쓴이는 개체로서의 개인이 맺는 관계를 살펴본다. 배낙지조개는 기실 새끼배낙지를 위한 요람으로서 배낙지가 자라 떠나면 버려지는 껍데기라고 한다. 사랑하는 남녀, 가족 관계도 영속적이지 못하다. 때가 되면 놓아주고 보내주어야 한다, 그것이 자연과 생의 원리이므로. 감정적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그것이 자신과 타인의 진정한 삶의 구현을 위한 것이기에.
우리의 감정과 인간관계에서의 ‘진실된 삶’도 역시 단속적인 것이다. (P.111)
단속성 – 그것은 인간이 배우기에 아주 힘드는 교훈이다. (P.113)
과거 여성들은 문화적, 제도적으로 남성 의존적이었다. 점차 동등한 수준으로 올라서고 있지만 여전히 옛 사고와 관념이 남아 책임은 전가하고 권리만 주장하는 일부 모습도 보인다. 글쓴이는 인식의 과도기에서 여성의 책임성과 독립성을 피해자 구제 차원에서 손해배상의 목소리로 주장하지 않는다. 그것이 여성 자신들의 진정한 발전과 성숙을 위한 것이며 나아가 동반자인 남성, 그리고 가정과 사회에 필요하기에 차분하게 호소한다.
여자는 혼자 힘으로 어른이 되어야 한다. 자립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어른이 되는’ 요체이다......여자는 자신의 진정한 중심을 스스로 찾아야만 하며 (P.101)
이것이 여성의 여성성과 본질을 외면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실한 여성성은 가정과 가족 없이 발현되지 못한다. 여기서 린드버그와 전투적 페미니스트와 구별된다. 글쓴이는 남편인 비행사의 이름으로 더 유명하지만, 못지않게 동등한 행동인이자 교양인이었다고 한다.
가정이라는 조그마한 테두리 안에서 여성은 가족 하나하나가 가진 독특성, 지금이라는 자연성, 이곳이라는 생생함을 결코 잊은 일이 없다. 이것이 삶의 본질적 실재다. (P.130)
마지막으로 린드버그의 소망을 글 속에서 확인해본다.
나는 여성으로서, 예술가로서, 그리고 시민으로서, 남편과 자식들과의 사이에서 주고받으며, 친구들과 사회와 더불어 고루 나누어 가지며, 인류와 세계에 대해 책임을 다하고 싶다. (P.31)
이 책이 현대 여성들에게 독서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까 하면 대체로 부정적이다. 소재의 선택과 이끌어낸 교훈이 매우 자의적 내지 인위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바닷가의 수많은 조개 중 하필 위에 언급된 몇 개의 조개만 대상이 되었는지 필연성을 납득하기 어렵다. 더욱이 만물은 각각이 하나의 소우주를 품고 있으니 어떤 사물이든지 거기서 도덕적, 철학적 추론을 이끌어내기는 어렵지 않다. 즉 글쓴이가 침소봉대 내지 확대해석한 게 아니냐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무엇보다도 글쓴 당대와 반세기가 넘게 경과한 현시점에서 여성 자신의 인식과 여성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각 모두 확연히 변화하였다. 성의 역할과 기대 양태는 과거와 같지 아니하다. 여성에게 기대되는 전통적 역할상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어떤 여성도 과거의 여성상을 – 비록 바람직하고 올바르다고 할지라도 – 따르지는 않을 것이다.
* 내가 읽은 책은 현재 시중에 판매되는 것의 구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