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선물 범우문고 49
앤 머로 린드버그 지음 / 범우사 / 199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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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여성을 위한 책으로 쓰였다고 하지만, 남성들에게도 유익한 글들이다. 여성의 삶과 내면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뿐더러 남성 자신에게도 충분히 응용하여 성찰할 수 있는 내용이어서다. 이 책의 가치는 서두의 작품해설에서 잘 요약되어 있다.

 

하나의 조그마한 조개를 통해 인간과 자연을 꿰뚫어 보려는 여성 특유의 감수성과 예리한 눈. 그러나 그것은 결코 여성의 작은 세계나 소극적 대응에 머물지 않고 생명의 이치와 자연의 섭리, 곧 우주의 존재에 대한 경건한 납득에까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P.14~15)

 

책표제가 <바다의 선물>인 연유는 작가가 섬에서 지내며 바닷가의 조개를 통해 여성으로서 삶의 의미를 재발견한 데 있다. 바다가 보내준 선물로서. 이 책에 등장하는 조개는 소라고둥, 달고둥, 해돋이조개, 굴조개, 배낙지조개다. 다만 내게는 소라고둥과 굴조개를 빼고는 모두 생소하다.

 

20세기 중반기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의 과도기에 해당한다. 사회적으로는 자본주의와 과학문명의 발달에 따라 물질문명에 대한 경도가 심화되고 정신성의 결여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는 시절. 가정적으로는 종래의 전통적인 부속적 여성상이 약해지고 여성의 자아실현과 사회참여 등 개체로서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던 시절. 작가도 이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어 여성의 발전을 환영하면서도 그것이 자칫 외향적 겉치레에 흐르지 않을까 저어한다. 그것이 이 책을 쓴 계기가 아닐까.

 

소라고둥의 소박한 아름다움이 들려준 하나의 대답은 생활의 간소화와 정신을 어지럽히는 요소 중 일부를 제거하라는 것이며 (P.37)

 

소라고둥의 가르침은 쉽지 않다. 현대사회는 화려함과 번쩍거림에 열광한다. 외면적 아름다움과 눈부신 빠름을 찬미한다. 여기에 둔감하면 사회의 낙오자로 백안시당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개인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 달고둥의 전언인 고독과 함께 결코 건너뛸 수는 없다. 시끌벅적한 사원의 개념이 당혹스러운 것은 절대자에의 갈구 내지 궁극적 진리의 깨우침이라는 종교의 본질과 배치되어서다. 작가는 특히 여성을 강조하는데, 여성은 가족을 위해 자신을 베풀어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성은......‘구르는 바퀴의 축이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정신과 육체가 활동하는 한가운데서 영혼이 갖는 평정, 그런 내면의 조용함을 찾아내야 한다. (P.57)

 

해돋이조개는 딱 맞는 두 쪽의 껍질로 이루어진 모양이다. 작가는 해돋이조개에서 인간의 순수한 관계를 연상한다. 남녀 간, 부모자식 간의 더없이 순수한 사랑. 순수함이 귀한 것은 흠이 생기거나 깨어지기 쉬운 탓이다. 찰나적 아름다움, 이것을 수긍해야 한다. 시간의 흐름 앞에서 만물은 속절없다. 그런 한계를 인정하며 그 가운데서 가치를 찾는 것, 그것이 긍정적 삶의 태도가 아니겠는가.

 

아름답고, 깨어지기 쉽고, 덧없는 해돋이조개. 그러면서도 결코 허망한 것이 아니다......해돋이조개는 모든 아름답고 덧없는 것들에 대한 영원한 긍정을 지니고 있다. (P.81)

 

굴조개는 매끈하기 그지없는 내용물에 비해 껍데기가 우툴두툴하고 못생긴 편이다. 린드버그는 여기서 중년의 여인상을 유추한다. 치열한 생존경쟁과 생활의 분투 결과라면 굳이 가리고 부끄러워하거나 움츠릴 까닭은 없다. 신체적으로는 쇠퇴해지지만 정신적으로 원숙해질 수 있다면 중년을 부정적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배낙지조개에서 글쓴이는 개체로서의 개인이 맺는 관계를 살펴본다. 배낙지조개는 기실 새끼배낙지를 위한 요람으로서 배낙지가 자라 떠나면 버려지는 껍데기라고 한다. 사랑하는 남녀, 가족 관계도 영속적이지 못하다. 때가 되면 놓아주고 보내주어야 한다, 그것이 자연과 생의 원리이므로. 감정적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그것이 자신과 타인의 진정한 삶의 구현을 위한 것이기에.

 

우리의 감정과 인간관계에서의 진실된 삶도 역시 단속적인 것이다. (P.111)

단속성 그것은 인간이 배우기에 아주 힘드는 교훈이다. (P.113)

 

과거 여성들은 문화적, 제도적으로 남성 의존적이었다. 점차 동등한 수준으로 올라서고 있지만 여전히 옛 사고와 관념이 남아 책임은 전가하고 권리만 주장하는 일부 모습도 보인다. 글쓴이는 인식의 과도기에서 여성의 책임성과 독립성을 피해자 구제 차원에서 손해배상의 목소리로 주장하지 않는다. 그것이 여성 자신들의 진정한 발전과 성숙을 위한 것이며 나아가 동반자인 남성, 그리고 가정과 사회에 필요하기에 차분하게 호소한다.

 

여자는 혼자 힘으로 어른이 되어야 한다. 자립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어른이 되는요체이다......여자는 자신의 진정한 중심을 스스로 찾아야만 하며 (P.101)

 

이것이 여성의 여성성과 본질을 외면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실한 여성성은 가정과 가족 없이 발현되지 못한다. 여기서 린드버그와 전투적 페미니스트와 구별된다. 글쓴이는 남편인 비행사의 이름으로 더 유명하지만, 못지않게 동등한 행동인이자 교양인이었다고 한다.

 

가정이라는 조그마한 테두리 안에서 여성은 가족 하나하나가 가진 독특성, 지금이라는 자연성, 이곳이라는 생생함을 결코 잊은 일이 없다. 이것이 삶의 본질적 실재다. (P.130)

 

마지막으로 린드버그의 소망을 글 속에서 확인해본다.

 

나는 여성으로서, 예술가로서, 그리고 시민으로서, 남편과 자식들과의 사이에서 주고받으며, 친구들과 사회와 더불어 고루 나누어 가지며, 인류와 세계에 대해 책임을 다하고 싶다. (P.31)

 

이 책이 현대 여성들에게 독서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까 하면 대체로 부정적이다. 소재의 선택과 이끌어낸 교훈이 매우 자의적 내지 인위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바닷가의 수많은 조개 중 하필 위에 언급된 몇 개의 조개만 대상이 되었는지 필연성을 납득하기 어렵다. 더욱이 만물은 각각이 하나의 소우주를 품고 있으니 어떤 사물이든지 거기서 도덕적, 철학적 추론을 이끌어내기는 어렵지 않다. 즉 글쓴이가 침소봉대 내지 확대해석한 게 아니냐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무엇보다도 글쓴 당대와 반세기가 넘게 경과한 현시점에서 여성 자신의 인식과 여성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각 모두 확연히 변화하였다. 성의 역할과 기대 양태는 과거와 같지 아니하다. 여성에게 기대되는 전통적 역할상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어떤 여성도 과거의 여성상을 비록 바람직하고 올바르다고 할지라도 따르지는 않을 것이다.

 

* 내가 읽은 책은 현재 시중에 판매되는 것의 구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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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언덕 풍경 민음사 모던 클래식 61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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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도 노벨문학상 작가의 데뷔작이다. 일본계 영국작가로서 출간 당시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배경은 전후 일본 나가사키, 원자폭탄이 투하된 두 곳 중 하나다. 이 작품은 원폭 투하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작품 전체의 암묵적 배경과 분위기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에게 태평양전쟁과 일본의 패전은 곧 식민지 해방과 광복으로 이어지므로 경축일로서 연결되지만, 일본인의 입장에서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한때 초강대국으로 전 세계 지배를 꿈꾸던 그네들에게 이는 가슴 아픈 상실로, 언젠가는 이루어야 할 꿈으로 다가온다. 오늘날 군국주의적 우경화가 일본 사회에서 득세하는 근저다.

 

이 소설은 전후 일본의 신구 세대와 이념의 대립을 잘 보여준다. 오가타상으로 대변되는 구세대는 일본의 패전은 힘의 대결에서 밀렸을 뿐으로 전전의 체제와 가치관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지로와 마쓰다 시게오는 전전 일본의 억압적, 전제적 체제와 이념 수용을 거부한다. 마쓰다 시게오가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데 반해 오가타상의 아들 지로는 아버지와의 갈등을 우려하여 표출에는 소극적일 뿐이다.

 

우리 사회도 한국전쟁 이후 어려운 시절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이들이 있었다. 동남아 여성들이 한국 남자와 결혼을 통해 구하고자 한 것과 동일한. 전후 재건 시절의 일본도 마찬가지다. 소설 속에는 마리코의 엄마 사치코가 대표적이며, 전쟁과 전후 상황을 현실로서 인정하고 감내하는 후지와라 부인과 대조된다. 모국에서 행복하다면 굳이 벗어나 타국에서 살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사치코] 에츠코, 당신은 이해해야 해요. 난 부끄러울 게 전혀 없어요. 사람들에게 숨겨야 할 게 전혀 없다고요. 알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봐요. 수치스러울 게 없다니까요. (P.47)

 

[에츠코] 다만 난 개인적으로 현재 삶에 무척 만족해요. (P.59)

 

소설의 한 축이 오가타상이라면, 다른 한 축은 에츠코다. 사치코와 에츠코는 아바타 관계다. 딸 마리코와 게이코도 동일하다. 사치코의 미국행에 마리코의 행복을 들어 부정적이었던 에츠코. 정작 서양인과 재혼하여 영국 이주를 감행한 것은 에츠코였다. 그리고 마리코에게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던 근접한 죽음을 맞이한 것은 실제로 게이코였다. 사치코에게, 그리고 후지와라 부인에게 자신의 행복을 되풀이하여 표명한 에츠코의 변신. 그것은 후지와라 부인이 일찍이 간파한 에츠코의 진실과 잇닿아 있다.

 

[후지와라 부인] 넌 이제 바라던 모든 것 갖게 될 거다, 에츠코.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불행한 거니?

[에츠코] 불행요? 전 전혀 불행하지 않은걸요. (P.102)

 

우리는 이 작품에서 등장인물 간 감정 및 의사교류가 원활하지 않음을 알아차린다. 대화 중 단번에 의사가 전달되는 경우 보다 수차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서로는 한동안 자신들의 말만 일방적으로 되풀이할 뿐이다. 사치코, 그리고 훗날 에츠코도 마찬가지지만, 특징적인 행동 중 하나가 웃는 모습이다. 작가는 그들이 웃을 때마다 웃음을 터뜨린다고 꼭 집어서 반복적으로 적시한다. 여성 인물의 웃음이 미소도 아니고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폭소를 남발한다? 그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며, 어색하고 인위적이다.

 

작가가 작품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전후 풍속도와 신구 세대의 단절만은 아니다. 후지와라 부인의 선택과 사치코의 시도는 방향이 다르지만 지향점은 똑같다. 에츠코가 외국인과 재혼하여 유럽에 정착한 것도 동일하다. 그것은 삶을 바꾸려는 노력”(P.231)이다. 현실에 낙담하고 주저하기 보다는 어쨌든 돌파구를 찾고 타개책을 고민하며 삶다운 삶을 꾸려나가려는 의지다.

 

[사치코] 우리가 결코 미국에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건 나도 알아요.....삼촌 댁에 가는 건 전혀 나를 위한 게 아니에요. 거긴 그저 빈방이 있을 뿐이에요. 그게 다예요. 난 그 방에 앉아서 늙어갈 거예요. 거긴 더 이상 아무것도 없어요. 그저 빈방들뿐이라고요. (P.223)

 

[에츠코] 나는 모든 걸 알았단다. 그 애가 여기서 행복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어. 그런데도 그 애를 여기 데려오기로 한 거야. (P.230)

 

[에츠코] 니키. 넌 네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해. (P.237)

 

소설은 에츠코와 딸 니키의 대화, 그리고 에츠코의 회상으로 구성된다. 별다른 사건이 없는 전개가 구성의 단순성에 더해진다. 사치코의 미국행 시도, 오가타상과 마쓰다 시게오 정도. 작가의 어조도 차분하여 문장과 정서표현도 은근하다. 서양인의 눈에 비친 전형적인 일본적 내지 동양적 정감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절제미가 유럽에서 극찬의 평을 받은 주요한 사유라고 볼 수 있겠다. 작가가 애초에 작품을 일본에서 발표하였다면 문학적 평가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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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 심은 뜻은 범우문고 21
이청담 지음 / 범우사 / 198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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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 청담 스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몰라서 약력부터 찾아본다. 불교 정화 운동을 주도하고 조계종 총무원장을 초대부터 수차례, 2대 종정 역임 및 세계불교대회 한국 대표로 참석 등 한마디로 우리 불교계를 현대화하고 개혁시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대단한 분이다. 불교계의 일에 헌신하기에도 바쁠 텐데 대중적인 글을 남긴 것은 결국 불교가 바로서고 불교도가 올바른 마음자세로 부처님의 도리를 섬기도록 깨우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리라.

 

서두의 작가론은 황야를 헤맬 때 유용한 나침반과 같다. 해설에서는 청담 스님의 사상을 극락 사상, 인욕 사상, 호국 사상으로 집약하고 핵심을 마음 공부에 두고 있다. 글을 읽을 때 참고하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지만, 거창한 철학이나 사상을 전개하기 위해 쓴 글들이 아닌 만큼 여기에 천착할 필요도 없으리라.

 

는 곧 마음이다. 나의 평생 과제는 오로지 이 마음의 수련에 두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P.32, ‘육신은 사멸하지만’)

 

나라는 는 영원 불멸의 것이요, 또한 절대 자유의 것이다. 그래서 는 완전무결한 실체, 즉 우주 이전의 실체요, 차원 이전의 것이므로 나를 앞서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못한다. (P.33, ‘육신은 사멸하지만’)

 

는 만법과 더불어 있지 않고 독립독존(獨尊)독귀(獨貴)독권(獨權)하며, 유일무이한 실상진아(實相眞我)의 실존을 지칭함이 곧 . (P.42, ‘양식과 사명감’)

 

이 마음은 영원 불멸의 실제고 절대 자유의 생명이며 우주의 핵심이고 온 누리의 진리며 천지 조화의 본체고 신의 섭리며 문화 창조의 원동력이다. (P.122, ‘성불의 길’)

 

데카르트의 존재론을 떠올리게 하는 위와 같은 =마음론이 스님의 핵심 사상이며 곳곳에 이를 주창하고 있다. 수록된 글 중에서 가장 긴 분량을 차지하는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는 스님의 마음론을 작심하고 주창한 글이다. 이처럼 스님이 새삼 참된 나를 강조한 연유는 당대 불교의 종교성에 위기의식을 느꼈던 탓이 아니겠는가.

 

우리 불교의 특징 중 하나가 기복(祈福) 불교라고들 한다. 이는 기독교도 다를 바 없다. 자신과 가족들의 무탈과 행복을 기원하는데 주력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이나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것이 이를 뜻하는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글쓴이는 여기에 일침을 날리지만 당대에도 지금에도 세태는 변함없다.

 

염불과 기도는 부처님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부처님은 우리가 믿을 것이지 의존할 것이 아니다. (P.27, ‘죄와 복’)

 

스님이 불교 정화 운동을 벌인 것은 이처럼 그릇되고 구태의연한 종교의 길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며, 불교가 종교로서 사멸하지 않고 온전히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를 바래서다. 신성한 도량이 밥장사나 요리집으로 타락하지 않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자각과 중생 제도가 결여된 즉 상구보리(上求菩提)를 하지 못하고 하화중생(下化衆生)도 불가능한 종교는 인간과는 무관한 종교가 되고 말 것이요 또한 이러한 종교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은 종교는 이미 그 생명을 상실한 것이다. (P.37, ‘믿음은 죽음보다 강하다’)

 

스님은 성불(成佛)의 길이 다른데 있지 않다고 말한다.

 

마음도 아닌 마음인 이 나[]. 허공도 물질도 아닌 이 실제의 나를 찾을 때 불안과 공포에서 헤어나는 인류 구제의 길은 있는 것이다. (P.122, ‘성불의 길’)

 

스님조차도 쉽사리 성불하지 못하는 마당에 일개 독자가 이 얄팍한 책 한 권 읽었다고 어찌 성불을 꿈꾸겠는가. 다만 “‘’()이 아니다라며 폭탄선언과 함께 시작하는 과 나는 자주 쓰지만 정확히는 알지 못하는 선()의 개념을 쉽게 잘 풀이해 주고 있다.

 

이 책이 내게 남긴 가장 큰 소득은 慈悲無敵에 있다. 우리는 세상살이를 항상 조건부로 견준다. 남이 내게 하는 만큼 나도 남에게 해주며, 내가 주는 만큼 받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기대가 어긋나는 순간 실망하고 화를 내고 만다. 이것은 부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문득 나 자신 또한 아내에게 섭섭함과 실망을 느끼고 괜스레 퉁명스럽게 대하던 게 결국은 자비를 가지지 못한 탓임을 깨닫는다.

 

사랑은 나쁜 심리로 남을 점령하려는 것이고 남을 구속하려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비는 남을 해방하려는 마음이고 남을 이해하려는 마음입니다. (P.49, ‘자비무적’)

 

* 내가 읽은 책은 현재 시중에 판매되는 것의 구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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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반생기 범우문고 80
양주동 지음 / 범우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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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옹(痴翁)이라면 여기에 실린 글들을 문학수필로 간주하지 않을 것이다. 저자의 반생 회고담에 불과하므로. 하지만 저자가 누구던가? 당대의 대학자로 명성을 날리고 자칭 타칭으로 국보(國寶)’라고 불리던 인물이다. 그의 삶을 소싯적부터 되짚어 본다는 것은 일개인의 단순한 삶이 아니라 당대의 주요 사건과 인물을 오늘에 되살리는 역사적 의의마저 지니고 있음이다.

 

누구나 잘난 체하는 사람을 내켜하지 않는다. 이 글들에서 무애는 숱하게 자부심과 무용담을 대놓고 드러내는데 그게 그다지 밉지 않다. 그는 그럴만한 인물이다. 우선 그는 신라 향가 해석의 획기적 전환점을 제시한 뛰어난 국문학자였다. 최남선이 인정한 몇 안 되는 학문적 성취의 하나일 정도니. 그는 대단한 천재여서 소싯적에 한문에 정통하고 시문학에 두각을 나타내어 근대 초기 시단을 이끌 정도였다. 이렇게 우리글만 잘하기도 힘든 판국에 당대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영문학자였다.

 

이런 생을 그는 문()과 주(), 두 가지의 기준으로 회상하고 있으니 일개 독자로서 읽는 재미가 쏠쏠함은 불문가지다. 특히 주()의 측면에서는 수주(樹州)<명정 사십년>과 자웅을 다툴 정도다. 수주의 글은 시종여일하게 명정 광태의 소화를 쉴 틈 없이 쏟아 부음에 반해 무애는 몇 가닥 굵직하게 추려내어 당시의 언행을 상세하고 실감나게 회상한다.

 

<소년 塾長>에서는 그의 남다른 조숙한 천재기를 직접 확인할 수 있으며, 독학으로 영어 공부하는데 따른 해학적 재미를 느낄 수 있다. ‘新文學에의 轉身金星시대는 무애가 문학청년이었던 시절의 보헤미안적 모습과 함께 당대 문단의 이면사까지 한꺼번에 흥미롭게 엿볼 수 있다. 특히 소설가 강경애와 시인 이장희와의 남다른 인연이 기억에 남는다.

 

무애에게 문()과 주()는 뗄 수 없는 관계인 듯하다. 열 살에 삼일주(三日酒)로 시작한 주력은 문단 동지들과 교류하면서 염상섭, 이은상, 문일평, 최남선 등과의 술과 글과 학문으로 맺어진 교분을 소개한다. 오늘날 그들의 성명은 한 획을 그은 대가들임에도 무애의 글 속에서는 소박한 인간미가 두드러진다. 대미는 이장희와 함께 벌인 용두리(龍頭里) 춘사(椿事)로 장식하는데 동경 유학시절의 국제적 대음주와 쌍벽을 겨룰만한 주정이라고 할 만하다.

 

위트와 해학, 문학과 제 학문의 경지를 거리낌 없이 넘나드는 무애의 글을 호탕하기 그지없어 일단 몇 글자 눈을 가까이 하면 헤어날 길이 없다. 그의 비평의 칼끝은 춘원 같은 대가에서 신진 후배들에 이르기까지 차등 없이 날카롭게 춤춘다. 천재의 눈은 오연하기에 그만큼 외롭다. 모두의 작가론 표제가 국보의 고독임은 적절하다.

 

양 박사의 수필 세계아니다, 그의 인생이라고 해도 좋다 를 한마디로 표현해 보자, 그것은 고독한 세계였다고 할 수 있으리라.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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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범우문고 1
피천득 지음 / 범우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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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심여자대학교가 가톨릭대학교로 통합되기 전 성심여자대학교라는 이름을 들을 때면 피천득의 수필 한 편이 상기된다. 비록 춘천이 아닌 부천이지만. 영화 셀부르의 우산,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도 언제나 아사코와 연상된다. 이 모든 게 피천득의 수필 인연덕택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정받는 수필가는 단연 피천득이다.

 

그의 수필선을 간만에 다시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은 그는 글을 참 정갈하게 잘 쓴다. 단아하지만 유약하지 않으며, 거칠지 않고 세부까지 세심하게 갈무리하고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소재로 이끌어내면서 독자의 관심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글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상념과 정서가 보편적이어서다. 영문학자답게 서양적 배경을 보이면서도 함몰됨 없이 고유의 전통미도 지키고 있다. 그의 수필관은 너무나도 유명한 짤막한 한 편의 수필에 녹아들어 있어 구구한 설명이 불필요하다.

 

수필은 청자(靑瓷) 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는 것이다. (P.51, ‘수필’)

 

엄마와 딸의 존재는 아마도 그의 문학적 창작 의욕을 고취시키는 절대적 동기인 듯싶다. 어릴 때 아빠가 세상을 뜬 후 그는 전적으로 엄마에게 의존하였다. 엄마마저 수년 후 사별하게 되니 엄마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훗날 딸에 대한 절대적 애정으로 표출되었던 것. 그의 글 중 양자를 소재로 한 이야기가 비중이 큰 연유가 아니겠는가. ‘그 날’, ‘엄마는 엄마를, ‘서영이와 난영이’, ‘시집가는 친구의 딸에게는 딸을, 그리고 인연’, ‘유순이’, ‘구원의 여상을 일반 여성을 각기 소재로 삼고 있다.

 

엄마가 나를 버리고 달아나면 어쩌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때 엄마가 세 번이나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영영 가버릴 것을 왜 세 번이나 고개를 흔들었는지 지금도 나는 알 수가 없다. (P.69, ‘엄마’)

 

딸에 대한 애정은 너무도 절절하여 때로는 이기적으로 보일 정도다.

 

너는 시집살이 잠깐 하다 따로 나와 네 살림을 하게 된다니 너의 아버지 집 가까운 데서 살도록 하여라. (P.109, ‘시집가는 친구의 딸에게’)

 

작가는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구원의 여인상을 구원의 여상에서 조목조목 나열한다. 세상에 그런 여성이 존재나 할까? 그러기에 유순이에 대한 그리움은 구원의 여인상의 현현(顯現)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난리 통에 유순이를 찾아 나서는 주인공의 행위는 동정과 연민 그 이상이나 유순이의 맑은 눈에 발길을 돌리고 만다.

 

나는 술과 인생을 한껏 마셔보지도 못하고 그 빛이나 바라다보고 기껏 남이 취한 것을 구경하면서 살아왔다. (P.97, ‘’)

 

작가는 자신이 뜨거운 삶을 살지 못하였음을 자탄한다. 반면에 독자는 덕분에 그의 섬세하고 따스하며 소박하기조차 한 명문장을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 차라리 다행이라고나 할까. 가끔 세속의 차갑고 얄팍하며 혼탁함에 착잡해질 때면 그의 글 한 편을 읽고 정화하고 싶다.

 

얄팍한 문고판임에도 서두에 작가론을 수록하였고, 말미에는 작품론의 세 편이나 싣고 있는데 이 모두가 수필문학가로서 작가의 위상을 시사한다.

 

* 내가 읽은 책은 현재 시중에 판매되는 것의 구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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