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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연애시대 ㅣ 창비청소년문학 3
벌리 도허티 지음, 선우미정 옮김 / 창비 / 2007년 8월
평점 :
<이름 없는 너에게>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 본다. 청소년문학이지만 도허티의 주인공은 여전히 고교과정을 마치고 대학 진입을 앞둔 제스라는 여학생이다. 작가가 유달리 이 나이 때의 주인공을 선호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청소년과 성인의 과도기이자 접점이기에 생각할 여지가 많다고 판단해서일까.
나는 허물을 벗고 있는 한 마리 뱀이었다. 반짝거리는, 생명을 가진 그 무엇, 짙은 풀숲에 웅크린 보석 같은 것. 나는 진저리를 쳤다. 소름이 돋았고, 무서웠다. (P.18)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다>라는 영화가 있다. 본 적은 없지만 제목만은 친숙하다. 비밀, 가장 친한 친구, 연인, 부부 또는 가족 사이에도 비밀이란 존재는 빠지지 않는다. 꽁꽁 숨겨놓은 비밀, 그저 하찮다면 무시하고 외면해버릴 텐데, 그로 인해 마음을 온전히 열어놓지 못하고 오해와 갈등을 유발한다면 어찌할지. 창피함과 두려움과 아픔을 무릅쓰고 서로의 비밀을 공유한다는 것이 용이할까.
가족이란 매우 소중하고 친밀한 관계이지만 역설적으로 가까우면서도 먼 관계이기도 하다. 상처 입으면 회복되기 어렵기에 오히려 더한층 조심하고 피하게 된다. 가족 간에 비밀을 털어놓고 울고 웃으며 마음의 벽을 허무는 게 가능할까. 밝고 행복하고 평온한 얼굴의 이면에 가슴 아픈, 시릴 듯이 눈물겹고 파문을 일으킬 과거사. 더구나 그것이 가족사에 얽힌 것이라면.
대학 입학을 위해 떠나는 걸 축하하는 파티에서 제스의 가족들은 서로의 비밀과 사랑 이야기를 공유한다.
제스 외조부모 브라이디와 잭의 사랑 이야기. 가톨릭과 개신교의 종교적 차이 극복은 물론 사랑 하나에 전부를 걸고 홀로서기를 시도하는 대담한 로맨스. 사랑은 용기다.
백마 탄 왕자님을 꿈꾸는 여늬 소녀들과 다를 바 없는 제스의 할머니 도로시. 무도회에서 만난 왕자님과의 극적인 로맨스를 꿈꾸지만 공상에 허우적대는 대신 현실을 인정한다. 삶은 현실이므로.
제스의 아버지 마이클의 결혼 이야기는 제스 자신에게도 중요한 관심거리이므로 제법 길게 이어진다. 사고뭉치이자 스스로 실패작이라 여기는 그가 맘에 드는 여자친구를 사귀기 위해 동분서주 애쓰는 장면, 반면 마음씨는 모질지 못해 자신을 쫓아다니는 여자애를 끊지 못하고 쩔쩔매는 마이클의 모습이 절묘하게 오버랩 되면서 제스 엄마와 만나게 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사랑은 동정이 아니다. 루씨가 마이클에게 말했듯이.
이게 바로 사랑에 대한 내 생각이야. 평등하지 않다면, 그 사랑은 진짜가 아니야. 그리고 진짜가 아닌 사랑은 소유할 가치도 없는 거지. (P.118)
제스에겐 큰오빠가 있었다. 몸이 성치 못하고 어른이 될 때까지 살 수 없었던. 대니에 대한 추억은 가족 간 아련함의 근원이다. 그리고 죄책감도. 첫째 아이와는 사뭇 달랐던 제스의 작은오빠 존. 가족 간은 혈연의 끈으로 묶여 있지만 그것이 친밀과 공감, 유대를 담보하지는 못한다. 서로 간에 마음을 열고 상대를 받아들이기 위한 의식적 노력은 타인과의 관계에서만 해당하지 않는다. 비둘기 돌보기를 통한 제스 아빠와 작은오빠 간에 메워지는 간극. 사랑은 노력이다.
운하 길의 데이비 할아버지 편에서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 역시 사랑의 의미에 대해서다. 지탄받고 처벌받을 당사자는 열일곱 살의 기억에 갇혀 있는 노인네이지만, 제스는 달리 생각한다. 외롭고 상처받은 이를 따스하게 보듬을 수 있는 마음. 사랑은 따뜻함이다.
그제야 나는, 할아버지가 어떤 의미로 사랑이란 키스하고 껴안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말한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P.178)
루이 이모할머니와 길버트 할아버지 간의 관계 역시 사랑의 한 형태임에 틀림없다. 그것이 행복한 사랑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랑을 위해 일체의 것을 포기해야 하며, 그 사랑이 어둡고 슬픈 결말로 이어질 것을 알고 있다면. 카슨 매컬러스의 주인공들만큼이나 기이하며 슬픈 사랑이다. 사랑은 사랑 자체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제스 자신의 이야기. 도로시 할머니처럼 디스코장에서 만난 멋진 남자. 탄로 난 정체와 상처 입은 첫사랑. 그리고 스티브와 만남과 작별. 사랑은 깨우침이다.
제스가 타고 떠나는 기차는 어린 시절을 벗어나 성년으로 향하는 여정을 상징한다. 축하파티는 일종의 통과의례다. 가족에서 사회로, 독자적인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한 기쁨과 고통이 교차하는.
하지만 나는 어린애가 아니었다. 그리고 절대로, 결코, 두 번 다시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지 못할 터였다. 뱀이 드디어 허물을 벗은 것이다. (P.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