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곱스카야 공작부인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미하일 레르몬토프 지음, 홍대화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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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에 이 작품의 발췌본이 번역 출간되었다. 이후 동일한 번역자에 의한 완역본이 나왔음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어쨌든 미완성작이지만. 과거 발췌본에 대한 단상에서 언급했듯이 이 작품은 <우리 시대의 영웅>과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 주인공의 이름, 그의 첫사랑 여인의 이름. 그리고 주인공의 성격 등. 그럼에도 선입관에 매몰되지 않고 순전한 시각으로 이 소설을 바라본다면 나름대로 재미와 독자성을 지니고 있음을 곧 발견할 수 있다.

 

페초린은 전형적인 귀족 가문이다. 외모는 내세울 게 없지만 예리한 지성으로 신랄한 언변을 구사할 줄 안다. 작가가 곳곳에 설정한 인물평에 따르면 확실히 그는 보통 이상으로 탁월한 지적 능력을 보유한 인물이다. 그런 면에서 우연한 계기로 페초린과 결부되어 필생의 적이 되는 하급관리 크라신스키는 여러모로 페초린과 대조적 인물이다. 그는 한미한 가문과 궁핍한 생활에 힘겨워하며 어떻게든 신분 상승을 꿈꾼다. 그의 두드러지는 외모와 적절한 언변은 귀족 못지않지만 출신의 한계에 좌절한다. 둘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페초린은 자신을 배신한 첫사랑 베라, 즉 리곱스카야 공작부인을 잊지 못한다. 반면 사교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 네구로바를 교묘히 이용한다. 페초린과 크라신스키, 페초린과 네구로바의 관계를 통해 우리는 페초린이 결코 선량한 인물이 아님을 알게 된다. 선과 악의 심성을 모두 지닌, 어쩌면 가장 전형적인 보통의 성격이 아니겠는가.

 

소설은 크라신스키에게서 페초린, 네구로바, 그리고 베라 등으로 화자의 시선에 따라 이야기의 초점이 이동하는 구조를 따르고 있다. 화자는 각 인물들의 행동과 생각, 과거사를 샅샅이 훑으면서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는데, 때로는 자신이 인물을 잘 모른다는 식으로 시치미를 뚝 떼기도 한다. 한마디로 불성실한 관찰자에서 전지적 시점까지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작가는 페초린과 인물들의 관계에만 치중하지 않고 러시아 귀족사회의 생활상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극장의 오페라 관람과 무도회, 만찬 장면을 통해 독자는 당대 귀족들의 일상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더구나 네구로바와 리곱스카야 공작부인을 통해 귀족사회에서 사교계의 역할과 비중의 중요성, 반려자를 만나기 위한 창구로서의 무도회에 임하는 젊은 여성들의 필사적 노력 등.

 

나는 크라신스키에 깊은 동정과 공감을 품는다. 하마터면 마차에 치여 죽을 뻔하고 낯선 귀족들 무리에서 익명의 모욕을 당하면 누구라도 분노와 적개심을 품지 않겠는가. 그런 그를 페초린이 이해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의 사고와 행동의 준거는 귀족 사회의 전형성과는 유를 달리하므로. 페초린이 알지 못한 채 크라신스키의 집을 찾아가서 그와 맞닥뜨리는 대목은 이 작품의 매우 극적인 장면에 해당한다.

 

마찬가지로 네구로바도 잊을 수 없다. 그녀는 외모나 지성 등에서 빼어나지는 않지만 중간 이상이며 처신에 있어서도 지탄받을 점이 없는 어느 모로 보나 표준적인 귀족 여성이다. 작가는 러시아 귀족처녀가 어린 나이에서 사교계에 등장하여 노처녀가 되어가는 과정을 날카롭게 제시한다. 제때 제값을 받고 결혼을 하지 못하면 페초린 같은 이의 악의적 놀림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불쌍한 네구로바, 그녀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지.

 

타이틀인 리곱스카야 공작부인, 즉 베라 자신의 이야기는 제한적으로만 드러날 뿐이다. 그녀가 페초린을 기다리지 않고 떠난 이유와 공작부인이 된 현재, 페초린에 대한 감정 등은 일체 언급이 없다. 다만 그것이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음을 짐작케 할뿐이다.

 

저는 당신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해요, 더구나 세상에 모든 것이 잊히지만,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그런 것이 있어요. 특히 슬픔은요.” 공작부인이 말했다. (P.122)

 

작중의 인물은 모두 행복하지 않다. 페초린도, 네구로바도, 공작부인도, 그리고 크라신스키도. 자신의 내면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현실에 타협하는 대가는 내적 불만감이다. 물론 크라신스키는 현실을 부정하고 타개하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내면은 한층 갈등과 모순에 젖어든다.

 

우리는 레르몬토프의 창작 동기와 전개 의도를 알지 못한다. 작품은 본격적인 전개 단계에서 문득 중단되는데, 무수한 할 말들이 자리 잡을 곳을 몰라 방황하는 씁쓸한 여운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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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곱스카야 공작부인 / 우리 시대의 영웅 (천줄읽기) 지만지 천줄읽기
미하일 레르몬토프 지음, 홍대화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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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곱스카야 공작부인>은 레르몬토프의 미완성 소설이다. 국내 초역인데 완역은 아니며, 전체 9개 장을 50%~80% 발췌 번역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하기는 발간해 주는 것도 고마운 일인데 더 이상 무슨 투정을 부리겠는가.

 

내용을 보면 무척 흥미로운데, <우리 시대의 영웅>의 전편 격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주인공의 이름도 페초린으로 동일하며, 페초린의 첫사랑 베라가 등장하며, 리곱스카야 공작부인도 등장한다. 물론 전작과 후작의 인물이 동일한 캐릭터는 아니며, 다만 유사성이 높아서 두 작품 사이에 친연성(親緣性)이 깊다고 염두에 두면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작가는 먼저 페초린을 주인공으로 하여 <리곱스카야 공작부인>을 집필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도중에 작품 전개 또는 인물 설정이 본인의 의도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중단한 것이 아닐까. 이는 <우리 시대의 영웅>에 등장하는 페초린과 미완성작의 페초린을 비교하여 보면 유사성보다 대비점이 두드러지는 특성을 보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작가의 본론보다는 서론적인 연애담이 장황하게 전개되어 작품의 초점이 흐려지는 문제점도 노정되어 있다.

 

그래도 레르몬토프의 대표작에서 과도한 생략으로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던 페초린과 베라의 관계를 이 작품에서 파악할 수 있었던 점은 크나큰 소득이다.

 

또한 하급 관리 크라신스키를 등장시켜 페초린과 갈등 관계에 놓고 페초린 주위에 베라와 네구로바의 삼각관계를 설정하는 등 나름대로 후작과는 차별되는 작품 구도를 가진 점도 흥미롭다. 후작이 페초린을 중심으로 하지만 다소 연결성이 느슨한 단편소설 모음의 형식을 취한 것과는 작품 전체의 통일성에서 보다 강화되어 있다.

 

소설은 본격적인 사건과 갈등이 전개되기 직전에 펜이 멈추어졌다. 따라서 작품의 진면모를 우리는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미완성작을 완성작과 동일한 잣대로 비교할 수는 없다. 이 점을 유념하고 먼저 일독 후 <우리 시대의 영웅>을 펼친다면 훨씬 매끄럽고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시대의 영웅>은 원전의 약 80%를 발췌 번역하였는데, 이미 국내에도 완역본이 있으므로 민음사본과 문학동네본 중에서 취사선택하기를 권하고 싶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이미 단상을 밝힌 바 있으므로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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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8-02-12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0년에 쓴 단상이다. 새판이 나오면서 구판이 절판되어 리뷰가 사라졌기에 여기에 복구한다.
 
시튼 동물기 5 시튼 동물기 5
어니스트 톰슨 시튼 글, 그림, 햇살과 나무꾼 옮김 / 논장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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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충직한 양치기 개 울리>

울리의 묘한 성격을 작가는 모두에서 일종의 종 특성으로서 일차적으로 환기시키고 있으며 중간에도 괴팍함을 잊지 않고 언급한다. 헌신적인 사랑과 충성을 바쳤던 주인에게 배신당한 점은 더할 나위 없는 충격이었음을 인정하자. 그럼에도 버림받은 동물들이 새 주인을 만나 고통스런 나날을 벗어나 상대적으로 행복한 시절을 누리는 사례도 상당하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배반감과 분노에 일시적으로 본성을 잃을 수 있지만 그것이 영구적인 뒤바뀜으로 나타나 의도적이고 교묘한 살육과 속임수로 점철되었다면 개체의 예외성으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그의 주야로 표변하는 충직한 개와 미친 여우간의 이중성은 자기가 설정한 경계선 내의 가축에 대한 헌신과 경계선 밖에 대한 냉혹함과 함께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특히나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나자 새 주인 가족을 향한 맹렬한 공격 행위는 새삼 모공을 서늘케 한다.

 

시튼의 글 중에서 가장 기막힌 반전을 가진 이야기로 생각되는데, 더구나 동물 본성의 순수성이 두드러진 동물기 중에서는 드물게 보는 예외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총명하고 사납고 믿음직하면서도 세상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으로 배반을 꿈꾸었던 사례는 비단 울리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는 인간 울리가 득시글거린다.

 

<빈민가의 도둑고양이>

야생의 세계에서만 동물을 찾아볼 수 있는 건 더 이상 아니다. 인간 거주 영역이 팽창하면서 도시 생태계에도 여러 동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반려동물을 제외한 대부분은 인간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지만. 우리 아파트 단지 내도 주인 없는 고양이 서너 마리가 돌아다닌 지 꽤 됐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키티의 어린 삶도 기구하기 이를 데 없다. 형제를 모두 잃고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지만 어미마저 졸지에 사라져 고아가 된 처지. 겨우겨우 연명하여 자라나 낳은 새끼들로 인한 행복도 찰나에 불과한 도둑고양이.

 

새옹지마는 인생뿐만 아니라 묘생에도 적용되는 원리인 듯. 뜻밖에 왕족 고양이가 되어 상류층의 고급 생활을 누리며 호화 별장에도 머물게 된 키티. 그에겐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의 찬란한 삶을 향유하기만 하면 된다. 너무나 행복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의외로 키티는 전혀 행복하지 않다. 굶주리고 지저분하지만 빈민가의 시절을 사무치게 그리워한다. 철이 덜 들었던지 아니면 고생에 찌들어서 행복의 판단 능력이 모호해진 탓일지도 모른다. 배부른 낭만주의자의 헛된 망상은 아닐까. 어쨌든 엄마 찾아 삼만 리처럼 빈민가의 집으로 돌아오기 위한 장도에 오른 키티.

 

그의 선택에 대한 정당화는 아마도 배부른 돼지에 대한 거부감 또는 통 속의 디오게네스와의 유사성에 가깝다고 하겠다.

 

키티는 예전에도 그랬듯이 언제까지나 지저분한 빈민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도둑고양이로 살아갈 것이다. (P.105)

 

<목도리들꿩 레드러프의 비극>

야생 동물들한테는 도덕도, 권리도 없단 말인가? 말을 못한다고 해서 인간이 자기와 같은 동물들에게 그토록 오랫동안 끔찍한 고통을 주어도 괜찮단 말인가? (P.159)

 

작가의 어조에는 안타까움을 넘어 선열한 분개마저 담겨 있다. 목도리들꿩 모자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작가의 심정에 무조건 동조할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던가, 아니면 인간이 그들을 멸족시킬 절박한 생존의 위협에 처해 있던가. 그들이 질병과 천적에 의해 목숨을 잃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라고 하겠다. 단지 재미 삼아서 아니면 탐욕만으로 그들을 최후의 일각까지 추격하는 인간의 행태를 정당화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편은 목도리들꿩의 낯설면서도 이국적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생태를 잘 묘사한 글이다. 수컷 들꿩이 요란하게 북소리를 내는 대목과 광기의 달에 방랑 본능에 사로잡히는 장면 등은 신기하기조차 하다. 무엇보다도 월령에 따른 목도리들꿩의 삶을 흥미로운 카툰(P.132)과 함께 소개한 점은 시튼의 깊은 통찰력과 예리한 눈썰미를 짐작케 한다.

 

어미 목도리들꿩은 12마리의 새끼를 낳았는데, 천적과 기생충, 방랑(광기의 달)과 사냥꾼 커디 영감에 의해 레드러프만 남기고 모두 잃었다. 레드러프는 더 혹심하다. 아내와 새끼 10마리 중 5마리가 커디 영감에게 목숨을 빼앗겼다. 심지어 자신마저 커디 영감의 올가미 덫에 걸려들고 말았다. 목도리들꿩만을 추격하는 커디 영감에게는 광기마저 느껴진다. 레드러프의 고통을 끝내 준 부엉이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됨은 작가뿐만이 아닐 것이다.

 

 

동물들은 대개 본능에 충실하므로 행동이 예측 가능하다. 따뜻하게 대해주면 선의로 보답하고 학대하면 적대적이 된다. 시튼의 동물기에 수록된 이야기들 면면을 보더라도 야생 여부의 차이만 있을 뿐 대동소이하다.

 

가끔은 예외도 생기는 법인데, 양치기 개 울리와 도둑고양이 키티의 최종 선택은 인간의 판단기준으로서는 전혀 의외라고 할 만하다. 전자를 과도한 종 특성과 개체적 예외가 특이하게 결합된 드문 사례라고 치부할 수 있지만 과연 그럴지는 모르겠다. 반면 후자는 키티의 선택이 전혀 의외가 아님에 끄덕거리게 되는데 인간도 마찬가지 선택을 할 수 있음에 동의해서다.

 

목도리들꿩 레드러프의 경우는 인간 본성의 끝자락을 경험한다는 의미에서 역설적이다. 보기 드물게 작가의 분노를 느낄 수 있는 편이기도 하다. 독자는 쉽사리 커디 영감을 비난하겠지만 기실 그는 대다수의 평범한 인간들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우리 자신도 개인적 욕심을 좇는 와중에 대상과 주변에 피해를 주지는 않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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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튼 동물기 4 시튼 동물기 4
어니스트 톰슨 시튼 글, 그림, 햇살과 나무꾼 옮김 / 논장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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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인간은 육체적 능력의 한계를 지력과 도구의 힘으로 뛰어넘어 먹이사슬의 최상층에 자리 잡게 되었다. 초식동물은 물론 사나운 맹수조차 인간의 위세에 굴복하여 쇠락과 멸종의 길을 걷게 될 정도다. 그렇다고 인간이 자부심을 가져서는 안 되고 가질 수도 없다. 야생동물은 자신의 야생성, 즉 자유를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할 것이며, 종내에는 자유를 목숨과도 맞바꿀 각오를 품고 있다.

 

여기 세 편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모두 인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종 분투하였다. 성공의 끝자락에서 실패로 귀결된 사례도 있지만 어찌 그들의 실패를 탓하겠는가. 오히려 그들을 기어코 정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야만성이 두드러질 뿐이다.

 

<야생마 페이서의 최후>

갈기를 휘날리며 드넓은 평원을 질주하는 야생마의 모습은 낯설기 그지없다. 몽골 초원에 가면 볼 수 있으려나.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야생마의 생활상과 개척민들 간의 갈등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잡기도 힘들뿐더러 잡아봤자 길들이기도 어려운 야생마. 가만히 내버려두면 방목하던 말들의 잠자던 야생성을 일깨우기에 눈에 띄는 즉시 사살의 위험에 빠지는 야생마. 여기서 자연은 단지 경제적 효용성으로만 재단된다.

 

압권은 인간들의 잇따른 야생마 페이서 추격전의 과정과 실패에 대한 생생한 기술이다. 갖은 꾀와 술수를 총동원하지만 페이서는 언제나 예측을 뛰어넘어 생존을 연장한다. 명성이 드높은 야생마를 잡고자 하는 인간들의 욕망과 자연이 부여한 생명을 유지하고자 하는 페이서의 본성이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삼손을 생포한 것은 델릴라 덕택이었고 늑대왕 로보도 짝 블랑카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되었다. 페이서를 잡기 위한 인간의 선택 또한 암말을 이용한 치졸하며 반자연적 수법이다. 페이서는 자연의 순수한 본능을 좆았기에 자유를 박탈당하였다. 여기서 야생마가 사로잡혀 길들여졌다면 시튼은 페이서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리라. 그가 찬미한 것은 정복당하지 않는 야생의 정신이었으니까.

 

생명은 끊어지고 육체는 처참히 부서졌지만 결국 야생마는 자유의 품에 안긴 것이다. (P.53)

 

<위대한 늑대 빌리의 승리>

아메리카 대륙에서 늑대의 존재는 상상 이상으로 강력하고 위협적이었던 듯싶다. 동물 이야기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동물은 늑대와 개로 추정되는데 야생동물로 한정짓는다면 단연 늑대이리라.

 

전반부는 고아가 된 빌리가 새 어미를 만나서 당당한 늑대로 성장하는 과정을 차근차근 밝히고 있다. 어미 늑대는 세상살이와 위험에 필수적인 모든 것을 가르쳐준다. 새끼 늑대만이 아니라 사람들도 늑대의 생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된다. 특히 늑대가 냄새로 상황을 분석하고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세세하게 보여주어 인간만이 고등 동물로 자부할 수 없음을 일깨운다.

 

두려움이나 경계심 또는 의심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영리함보다 더 가치가 있었다. 검은 목털이 무사히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육체의 힘 못지 않은 신중함 덕분이었다. (P.86)

 

자연은 무자비하다. 단 한 번 실수의 대가는 목숨의 상실로 이어진다. 홀로서기에 내몰린 늑대 빌리는 일대 목장주들에게 악마와도 같은 존재로 낙인찍힌다. 피해를 감당 못한 그들은 대대적인 늑대 추격전을 벌이는데 이야기 후반부는 전적으로 이에 관한 내용으로 흥미진진하기 이를 데 없어 한편의 스릴 넘치는 어드벤처다.

 

지독한 추격전 끝에 좁은 벼랑 끝에 빌리를 몰아넣는데 성공한 십여 마리의 사냥개들. 비록 사냥꾼들은 멀리 떨어져 도울 수 없는 처지에 있지만 이제 늑대의 운명은 경각에 달렸다. 시튼은 미리 당부하는데, 그것은 전혀 허튼소리가 아니었다.

 

개를 사랑하는 사람은 지금부터 책을 덮는 게 좋다......늑대는 바위 옆에 굳게 버티고 서 있었다. 싸움은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났고 남은 것은 늑대뿐이었다. (P.106)

 

영화의 한 장면을 상기시키는 결과에 대해 우리는 누구도 탓할 수 없다. 늑대, 사냥개 그리고 인간. 그들은 자기네 관점에서 모두 최선을 다하였다. 단지 빌리가 이겼고 그는 위대한 늑대가 되었을 뿐. 동물 영웅이라 불릴만하다.

 

<솜꼬리토끼 래길럭의 모험>

언제까지 이렇게 도망쳐 다녀야 하는 걸까? 근근이 목숨만 부지할 뿐인 이 삶은 그 얼마나 비참한가! 힘이 없다는 이유로 증오스러운 놈한테 최고의 먹이터와 아늑한 은신처, 고생고생해서 닦아 놓은 길들을 빼앗기고 말았다. (P.147)

 

힘 약한 초식동물의 비애라고 할까. 한탄이 절로 나올만하다. 실제로 솜꼬리토끼의 적을 쭉 나열하면 이러고도 살아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 여우, 고양이, 스컹크, 너구리, 족제비, 밍크, , , 올빼미, 사람, 심지어 곤충(P.138)마저도.

 

이 편은 솜꼬리토끼의 모험이라기보다 생존 기법의 집대성이라고 할만하다. 가만히 웅크리고 있기, 꼼짝 않기, 들장미덤불의 비밀, 철조망 수법, 개울 등등. 사방에 온통 적들뿐이니 위기탈출 방법도 다양하다. 이 모든 걸 알려주는 이는 래길럭의 어미 몰리다. 이야기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차라리 몰리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솜꼬리토끼 모자는 낯선 수토끼의 역경은 헤쳐 나갔지만, 늙은 여우의 습격에는 온전하지 못하였다.

 

가엾은 솜꼬리토끼 몰리! 몰리는 진정한 영웅이었다. 하지만 스스로를 영웅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작은 세계에서 최선을 다해 살다가 죽은 몰리 같은 토끼들은 수없이 많다. (P.158)

 

늙어 죽는 야생 동물은 없다고 시튼은 단언한다. 비극적인 최후는 시기의 빠르고 늦음의 차이만 있을 뿐 그네들의 운명이다. 그런 면에서 빌리와 래길럭도 이야기에서는 비교적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이후는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동물의 삶이 고통과 비극의 연속만은 아닐 것이다. 천적들의 희생자는 한마디로 병약한 개체라고 한다. 개체는 슬픈 운명을 맞이할 수 있지만 종 자체의 건강성 유지에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인간의 무자비하고 무모한 개입만 없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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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튼 동물기 3 시튼 동물기 3
어니스트 톰슨 시튼 글, 그림, 햇살과 나무꾼 옮김 / 논장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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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튼 동물기 전반을 관통하는 대체적 흐름을 복기해보자. 동물 대 동물의 자연 질서에 인간이 개입하여 인간 대 동물 간 대립이 발생한다. 잠시 저항을 해보지만 힘의 우열은 도저히 극복될 수 없기에 동물은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고 만다. 인간과 동물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은 정녕 불가능할 것인지 안타깝기만 한데 이번 권의 이야기에서는 가능성과 한계가 동시에 제시된다.

 

<비둘기 아노스의 마지막 귀향>

아노스를 야생동물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전서구로 훈육되고 인간의 보살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을 테니. 매와 송골매보다 인간에게서 한층 유대감을 지녔을 것이다.

 

비둘기로서는 실패한 가정생활에도 그가 맹렬히 집을 그리워하고 독보적인 귀소 감각을 발휘한 것은 단지 본능이었을까? 아니면 적으로 가득한 사방을 둘러보았을 때 그나마 안전을 유지할 만한 곳은 집밖에 없다는 슬픈 진실을 깨달았을 수도 있다.

 

전서구를 애호하는 인간의 포획이 아니었다면 아노스의 곤경은 발생하지 않았다. 조금 양보해서 총알을 날린 사냥꾼만 없었어도 그는 매와 송골매를 우습게 여기며 가뿐하게 귀향에 성공했으리라. 인간과 천적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오로지 집을 향해 질주하는 비둘기를 무모하다 비판할 수 없다. 아노스의 귀향은 목숨을 각오한 행위다. 그러기에 작가는 고양된 정서로 아노스의 비행을 기술하고 찬미를 아끼지 않는다.

 

이 고귀한 새의 가슴 속에서 끊임없이 타오르는 집에 대한 사랑, 위대한 하느님이 씨를 뿌리고 인간이 가꾼 그 사랑은 아무리 강렬하게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아무리 찬미하고 찬송해도 모자란다. (P.39)

 

<소년을 사랑한 늑대>

생물의 본성은 모두 동일하다. 자신에게 잘 대해주면 친근감과 애정을 느끼고 학대하고 괴롭히면 미워하며 증오심을 품게 된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는 이 원리를 잘 이해하면서도 사람과 동물 간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일이 빈번한데 이는 인간들의 우월의식에 연유한다.

 

어린 늑대가 지미를 사랑하는 반면 술 냄새 풍기는 남자들과 개들을 증오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늑대를 죽이기 위해 다수의 사냥개와 총을 동원한 사람들의 유희는 그들에게 일개 심심풀이에 지나지 않지만 늑대와 사냥개들은 생사를 건 혈투를 벌여야 하는 지경이다. 이들을 향해 퍼부은 어린 지미의 욕은 기실 아이의 입을 빌려 비인간적인 인간에 대한 작가의 비난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위니펙의 늑대를 떠나지 못하게 묶어 두었던 끈은 오직 하나다. 그것은 위니펙의 늑대를 온통 사로잡았던 간절한 요구이자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었다. (P.81)

 

 

자유를 탈취한 늑대는 굳이 마을 근처의 숲에 머물 필요가 없었다. 사랑하던 지미도 이미 병들어 죽은 마당에 그가 인간들에게 미련을 둘 까닭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늑대는 떠나지 않았다. 사랑하는 지미 곁을 결코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릴 적에 고아가 된 늑대의 생에서 유일하게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해주었던 소년.

 

늑대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했다. 숨 가쁜 사건들로 채워진 짧은 삶을. 오래도록 평화롭게 살 수도 있었지만 끊임없는 시련 속에서 3년 만에 생을 마감한 것이다. 위니펙의 늑대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고귀하지만 짧은 길을 택했다. (P.80)

 

<하얀 순록의 전설>

하얀 순록 역시 위니펙의 늑대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에게 마음을 주었다. 스베굼 영감은 하얀 순록을 강압과 두려움이 아니라 온화함과 따뜻한 배려심으로 길들였다. 시간과 노력은 많이 이러한 사육 방식의 절대적 효과성은 다른 동물들을 길들일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 편이 이색적인 것은 시튼의 주 무대인 북아메리카가 아닌 노르웨이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다. 게다가 하얀 순록을 노르웨이의 역사와 긴밀하게 연결시켜서 글자 그대로 전설화하고 있다. 노르웨이의 독립운동과 보르그레빙크에 관한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인지 알지 못한다. 어쨌든 이 편에서는 배신자 보르그레빙크의 간악한 책략을 저지하기 위한 스베굼 영감과 하얀 순록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순록을 몰 때는 조심하라! 순록도 분노할 줄 안다. (P.108)

 

순록은 소와 말처럼 완전히 길들여진 동물이 아니라 본성은 야생이다. 앞서 롤도 그렇고 보르그레빙크도 자기중심적이어서 자신의 생각과 목적에만 관심을 둘 뿐 썰매를 끄는 순록이 살아 있는 생명체라는 점을 외면한다.

 

소처럼 순하던 순록의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하얀 순록은 화가 나서 씩씩대며 거대한 뿔을 흔들어 댔지만, 멈춰 서서 자기를 때린 사람에게 복수를 하지는 않았다. 더 중요한 복수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P.122)

 

시튼은 요툰헤임, 트롤 같은 환상의 지명과 존재를 등장시켜 이야기 전체에 짙은 환상성을 불어넣고 있다. 실재적 역사와 가공의 옛날이야기가 혼재하여 진실인 듯 아닌 듯 전설을 이야기하고 있다.

 

<소년과 살쾡이>

인간은 지능과 도구 덕분에 야생동물을 압도할 수 있었다. 불과 총, 덫은 사나운 동물조차 인간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맹수들은 서서히 또는 대대적 사냥을 통해 대부분 멸종의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누구를 탓하고 비난할 수 없다.

 

자신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인간을 향한 야생동물들의 증오는 정당하며, 가축을 습격하는 맹수를 보며 터뜨리는 인간의 분노 또한 응분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이 편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정면대결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시튼의 여타 이야기들과는 관점을 전혀 달리하고 있어 흥미진진하다. 연약하고 자신을 지킬 수단도 없는 인간은 맹수들에게는 그저 또 하나의 먹이에 불과하다.

 

살쾡이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것이다......토번은 살아 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워야 했다. (P.160~161)

 

인간을 사냥하려드는 야수, 얼핏 잔인하지만 생존을 위해 필사적인 그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그렇다고 인간이 무력하게 잡아먹힐 수는 없다. 사자와 호랑이도 아닌 고작 살쾡이한테 말이다.

 

토번과 자매들이 열병으로 앓아눕고 굶주리지 않았다면 대결 자체가 성사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살쾡이 퇴치를 위해 혼신의 기력을 쏟아 결투를 벌이는 일도 없었으리라. 어쨌든 토번은 살아남았고 살쾡이 가족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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