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145
윌라 캐더 지음, 윤명옥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윌라 캐더의 글쓰기 특징은 비교적 확연하다. 인물 내면과 주변에만 집착하지 않고 그들이 자리한 문화적, 자연적 배경을 폭넓게 드러내면서 역사화 내지 풍경화를 보는 듯한 착시마저 들게 한다. 읽는 이는 대개 주된 인물의 내면에 동참하여 함께 호흡하고 감정을 공유하기 마련인데 캐더의 작품에서는 그러하지 않다. 과도한 몰입과 숨 가쁜 질주는 여기서 찾아보기 어렵다. 마치 한 지방의 민담 혹은 전설을 듣는 듯한 차분하고 느긋한 진행과 개개의 미세한 묘사를 뛰어넘은 대범하고 관조적인 기술이 두드러진다.

 

캐더의 작품에서 배경을 삭제한다면 얼마나 삭막해질 것인가를 우리는 알고 있다. 전작의 네브라스카는 물론 이 작품의 뉴멕시코 지역은 단순한 배경을 떠나 인물의 성격과 작품의 전개, 그리고 주제의식과도 치밀하게 연계되어 있어 작품의 특징적 매력에 깊게 관여하고 있다.

 

하늘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구름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 밑에 있는 사막은 단조롭고도 여전히 똑같아 보였다. 광대한 하늘은 바다보다 더 넓고 세상 그 어느 곳보다도 더 컸다. 평원이 그곳에, 사람의 발치 아래 있었지만 주변을 살펴보면 보이는 것은 찌르는 듯한 눈부신 파란 하늘과 움직이는 구름뿐이었다. 산들마저도 하늘 아래에서는 단지 개미 언덕으로 보였다. 다른 곳에서는 하늘이 세상의 지붕이었지만 이곳에서는 땅이 하늘의 바닥이었다. 누군가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을 때 그리워하는 풍경은 모든 것들 중에 단 하나, 사실 그 안에서 살고 있는 하나의 세상인 하늘, 하늘이었다! (P.259)

 

이번 소설에서 작가는 두 가톨릭 사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다지만 아마도 단순 모티브 역할 정도일 뿐 작품 내 라투르 주교와 바일랑 신부는 전적으로 작가의 펜끝에서 생명을 얻었을 것이다.

 

광활한 뉴멕시코 지역의 관구 관리와 포교를 위해 파견된 신부들 이야기. 소설이든 영화이든 선교사들을 다룬 작품은 제법 많다. 대개는 현지인의 냉대와 부정한 지방정권의 탄압에 굴하지 않는 인간적, 종교적 감동을 선사하기 위함이다. 개인적으로 현지 문화를 배척하고 획일적인 서구 중심적 가치관을 강요하는 선교 사업에 썩 동의하는 편이 아니기에 이 책을 읽을까말까 망설이기도 했다는 점을 언급한다.

 

두 사제는 이미 여러 곳에서 선교활동을 같이 하였으며 학창시절부터의 친구이므로 상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라투르 주교는 차분하고 지적이며 온화한 반면 바일랑 신부는 감정과 행동의 진폭이 크다. 두 사람이 정반대 성향이라는 점은 선교활동에서 득으로 작용하는데, 바일랑 신부는 남다른 친화력으로 현지인들 사이에 쉽사리 융화되어 개척 사업에 커다란 성과를 보인다. 라투르 주교는 가톨릭 본부와의 관계 및 현지 가톨릭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정착될 수 있도록 관리하는데 주력한다.

 

두 인물의 사고와 행동방식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는 올리바레스 부인, 즉 도나 이사벨라 재판 건이다. 죽은 남편의 유산은 합법적으로 물려받기 위해 본인의 나이를 밝혀야 하는 입장에 처한 부인. 하지만 그녀는 유산을 포기할지언정 나이를 밝히기를 거듭 거부한다. 딱한 그녀를 돕고자 하는 심정을 동일하지만 바일랑 신부는 유산을 놓쳤을 때의 암담한 현실을 강조하며 그녀를 윽박지른다. 라투르 주교는 다르다.

 

라투르 신부가 엄격하게 주교 대리를 흘낏 보았다. 그만 두세요.그가 재빨리 말했다. 그는 요셉 신부가 놓아준 부인의 작은 손을 잡고 몸을 숙여 정중하게 손에 입을 맞추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더 이상 강요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이 문제는 올리바레스 부인과 그분 자신의 양심에 맡겨 두도록 합시다.(P.215)

 

이렇게 말하다보면 꽤나 지루할 것 같지만 읽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 것은 우선 이 둘을 그려내는 작가의 필치가 상당하다. 이국적인 뉴멕시코 지역의 자연환경과 인디언들, 멕시코인들의 문화와 관습이 주는 흥미로움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며, 작가가 이따금씩 삽입하는 현지인들의 전래담도 양념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전혀 이질적이지 않고 작품 본래의 전개에 이바지한다면 과장일까.

 

바일랑 신부의 은근슬쩍 술수에 넘어가 졸지에 노새 두 마리를 사제들에게 바치게 된 루혼 씨는 현지인들의 순진한 신앙과 인성의 한 본보기다. 노새를 잃게 된 걱정과 슬픔은 품지만 그것이 사제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이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의 공여로 사제들이 선교활동을 더 잘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자긍심을 품는 대목은 눈물겹기조차 하다.

 

발타차 신부에 대한 전설은 초기 가톨릭 사제들의 선교와 그네들이 현지인들에 대해 품은 종교적 인종적 우월감과 지배욕을 잘 보여준다. 가톨릭이 서구 유일의 지위에서 몰락하여 종교개혁의 된서리를 맞은 것은 결국 종교인들의 타락과 부패가 원인이었던 것처럼. 역사를 돌이켜보아도 신앙 자체가 문제시 된 경우는 별로 없다. 라투르 주교가 폐허가 된 수도원 자취에서 품었던 감상도 여기서 멀지는 않았으리라.

 

그는 초목 하나 없는 사막의 바위산 위에서 석기 시대에 있던 그 자신과 같은 종족, 그 자신의 시대에 대한 향수, 유럽인에 대한 그의 영광스러운 욕망과 꿈의 역사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 있었다. 세계 속에 존재하는 그 자신의 일부가 동틀 무렵의 하늘처럼 변화하는 모든 세기 동안 내내 그러고 있는 것 같았다...... (P.119-120)

 

성선설에 따르면 인간은 선하게 태어났지만 환경에 물들어 점차 악하게 된다. 성경의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도 비슷한 입장이다. 세상사가 대개 그러하다. 의도와 취지의 순수성에 힘입어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어느 순간 이해가 개입하고 갈등이 발생하여 본래 진로에서 벗어나 엉뚱한 곳을 향해 달려가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마티네즈 신부의 경우도 그러하다. 그는 가톨릭 사제이지만 로마 가톨릭을 거부하고 독자적 세력화를 추구한다.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도 있다. 새로운 종교 내지 분파는 이렇게 생기는 법이니까. 다만 마티네즈 신부는 종교적 변질과 함께 개인적 탐욕과 타락으로 이어졌기에 라투르 주교가 고민하였던 것이다.

 

조국과 수만 리 떨어진 낯선 이방의 외딴 곳. 주위에 유럽인이라고 눈을 씻고 찾아봐도 달랑 요셉 신부 하나뿐인데, 그나마도 근자엔 이웃 교구에서 선교활동을 벌이느라 얼굴을 못 본 지가 수개월도 넘었다. 겸허하면서 의연한 소신을 갖고 교구 관리에 헌신하지만 주교도 인간인 이상 고뇌와 번민에 무관하지 못하다. 그 점이 오히려 더욱 인간적이다.

 

그의 영혼은 불모지가 되어 있었다. 그는 그의 교구 사제들과 교구민들에게 마음으로부터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하는 일은 피상적인 것처럼 보여서 모래 위에 짓는 집 같았다. 그의 거대한 대주교는 아직도 이교도의 지방이었다. 인디언들은 공포와 어둠의 옛길을 여행하며 악의 징조와 옛날 미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었다. 멕시코인들은 종교를 갖고 장난을 치는 아이들이었다. (P.236-237)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 그는 오랜 친구가 조금도 주저 없이 자기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약간 마음이 아팠다. 그에게는 이것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그들의 삶이 여기서 헤어지고 말지도 모른다는, 그들이 결코 다시는 함께 일을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마치 계시처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 집에서 그런 준비를 하느라 야단법석을 떠는 것이 그에게는 고통스러웠다. 그는 밖으로 나가 교구들을 돌아다니는 게 차라리 더 나았다. (P.281)

 

젊은 주교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늙은 대주교가 되어 은퇴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여생도 오래 남지 않았음을 스스로 의식한다. 선교사가 된 이후 고국보다는 타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추억을 지닌 그가 뉴멕시코로 귀향을 선택함은 자못 당연하다. 그곳은 친구도 추억도 있는 진정한 고향이므로.

 

그곳에는 부드러우면서도 야생적이고 자유로운 어떤 것이 있었다. 베개 위에서 귀에 대고 살며시 속삭이며 마음을 가벼이 해주고 슬그머니 열쇠를 돌려 빗장을 빼내고 감금된 정신을 바람 속으로, 파란색의 금빛 대기 속으로, 아침 속으로, 아침 속으로 풀어 놓아 주는 그 어떤 것이! (P.307)

 

반평생을 뉴멕시코 사제로 바친 라투르 대주교의 삶은 시종일관 올곧다. 삶은 감동적일지언정 소설적 형상화로서는 단조롭고 지루할 수도 있는 우려가 있지만, 작가의 다양한 노력에 힘입어 대단히 다채롭고 풍성한 문학적 향유를 누릴 수 있다. 가톨릭 사제의 사고와 삶, 원주민들의 기이하고 이채로운 토속적 신앙과 문화상이 대비를 이루는 가운데 이미 언급했다시피 뉴멕시코 지방의 독특한 자연환경과 결부되어 폭과 깊이가 한층 심화되었다.

 

무엇보다 두 사제의 문화적 다원성에 대한 관용이 인상적이다. 유럽 선교사들이 세계 각지에서 문화적 갈등과 충돌을 일으키는 주된 원인은 문화적 오만성과 배타주의라는 것을 감안하면 특히 주교의 문화상대주의적 사고는 한층 두드러진다. 참다운 신앙과 순수한 자연의 원리는 같은 곳을 지향하는 게 아닐까.

 

표제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만을 놓고 볼 때 언뜻 죽음과는 무관하게 영생과 부귀를 누릴 줄 알았던 대주교도 죽게 된다는 식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오기 마련인데 굳이 대주교로 한정지을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다. 한 사람의 일생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올바로 평가받는다. 면할 수 없는 죽음이지만 기꺼이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삶과 세속에 미련이 남아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삶. 대주교는 분명 전자의 삶을 살았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17-02-14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읽고 싶다고 생각해오던 책이었는데
리뷰로나마 만나게 되어 반갑네요.

멋진 리뷰 잘 읽고 갑니다.
 
구스코 부도리의 전기 (양장) 사계절 1318 문고 37
이경옥 옮김, 이광익 그림 / 사계절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수록된 두 편의 작품은 여러모로 대비된다. 전자는 창작시기 최만년의 작품인 반면 후자는 가장 초기 작품이다. 전자와 후자는 유사한 구성과 플롯을 지닌 쌍둥이 같은 작품인 점에서도 흥미롭다. 주인공의 이름도 매우 특이하다. 후자는 요괴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처음엔 후자는 단순한 습작이며 후일 전자를 창작하기 위한 기초에 지나지 않을까 생각하였다. 물론 이러한 성격도 다분히 지니고 있지만 그보다는 좀 더 심화 발전시켜 작가의 주제의식을 치밀하게 반영하기 위한 의도적 변용에 가깝다.

 

미야자와 겐지는 단순한 글쟁이가 아니었다. 그의 삶을 돌이켜보면 가난한 농민들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비록 제한적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관심을 갖고 전념하였다. 작가가 굳이 ‘OOO의 전기라는 표제의 작품을 썼던 것은 자신이 지향하는 삶과 지양해야 할 삶을 문학의 형식을 빌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구스코 부도리와 펜넨넨넨넨 네네무는 둘 다 어린 시절에 부모를 잃고 동생과도 헤어진 후 힘겨운 삶을 보낸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둘 모두는 공부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품는다. 다만 양자의 목적은 다르다. 부도리는 농부들이 재해를 입지 않고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화산국에서 일하며 마지막에는 자신의 희생도 감내한다. 네네무는 자신의 입신출세와 안온한 삶에 만족한다. 그가 명재판관으로 명성을 날리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결과일 뿐이다. 네네무의 몰락은 그래서 오히려 허무하다. 부도리가 화산국 기사라는 점에서 직업적 대비도 드러난다.

 

부도리와 네네무의 구성상 큰 차이는 부도리의 경우 숲을 빠져나온 후 붉은 수염 주인과 수렁논에서 수년 간 같이 농사를 지었다는 삽화가 제법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다. 수렁논 주인은 풍작을 거두려고 온갖 궁리를 다하는 성실한 농부이지만 결국은 반복되는 냉해와 가뭄에 파산하게 된다. 하지만 주인의 노력 분투는 부도리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그의 삶의 목표를 설정하는 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칼보나드 섬의 화산을 분화시켜 부도리가 잃은 것은 자신의 삶이었지만 얻은 것은 작품의 마지막 단락에 잘 드러나 있다. 그것이 부도리의 생의 의의다.

 

많은 부도리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많은 부도리와 네리와 함께 그 겨울을 따뜻한 음식과 밝은 장작불로 즐겁게 살 수 있었습니다. (P.79)

 

부도리가 화산국 기사가 되는 반면 네네무는 단번에 요괴세계 재판장으로 벼락출세를 한다. 수하에 서른 명의 부하도 거느리게 되어 위세도 당당하다. 네네무는 명판결로 명성을 떨치고 특히 성냥팔이를 다단계로 착취하는 서른 명의 요괴를 훈도하여 갱생의 길로 인도한다. 작품 중에서 네네무가 나쁜 짓을 하거나 인격적으로 흠잡힐 만한 일은 저지르지 않는다. 단 하나 인간세계에 실수로 출현하게 된 것밖에는.

 

작가는 각 장의 제목을 이렇게 짓는다. 네네무의 독립, 출세, 시찰, 안심, 출현. 네네무는 출세를 하고 무수한 명예도 쌓으며 점차 스스로의 삶에 안심을 하고 젖어들다가 종국에 득의와 방심을 하여 파멸로 이어지게 된다. 네네무의 출현이 이루어지는 배경이 산무토리 화산이라는 점은 역시 부도리와의 유사성을 떠올리게 한다.

 

지금 나는 훈장이 천이백 개

짚 오믈렛도 이젠 질렸어

내 결정에는 땅도 복종해

산무토리조차 수박처럼 갈라진다네 (P.149)

 

작가가 네네무에 유달리 가혹한 연유는 부도리와의 비교를 통해 명확해진다. 양자는 유사한 배경을 지니고 어려운 시절을 겪는다. 둘 다 분명 출세를 하지만 그 성격은 대조적이다. 부도리는 자신의 부귀와 안위보다는 세상의 평안과 행복을 더 중시한다. 반면 네네무는 순전히 개인주의적이다. 그의 소명의식은 자신의 출세와 연관된 한계 이내에서만 유효하다. 그는 자만에 빠져 절제를 잃었고 그 순간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작가는 부도리와 네네무의 비슷하나 상반된 인물을 통해 자신이 생각한 바람직한 인간상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이색적이지만 터무니없지 않은 독특한 유형의 작품으로 일독할 가치가 있다.

 

이 책은 단순히 작품 수록에 그치지 않고 삼십 쪽에 가까운 세밀한 작품해설을 통해 심화된 작품이해에 도움을 주고 있다. 주마간산에 지나지 않던 많은 의미들을 발견하고 반추할 수 있어 미야자와 겐지라는 작가 이해에도 유용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의 마타사부로 / 은하철도의 밤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미야자와 겐지 지음, 심종숙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의 원작으로서 성가가 높은 <은하철도의 밤>이다. 일전에 <주문이 많은 요리점>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동일한 작가임을 이제 알게 되었다. 애니메이션을 감명 깊게 시청하여 원작에서 많은 것을 기대한다면 실망을 안고 돌아가게 될 것이다. 어디까지나 원작에서 모티브를 따갔을 뿐 양자는 독자적인 예술장르다.

 

금세 현저하게 드러나는 특징은 주인공 이름이 이탈리아인이라는 점이다. 무슨 연유인지는 알 수 없다. 해설에서처럼 <태양의 나라>를 쓴 캄파넬라와의 연관성을 따져볼 수도 있겠고, 어쨌든 작가는 이 작품의 배경이 일본이라는 점을 굳이 피하고 싶은 모양이다.

 

우주와 천문에 대한 관심도 두드러진다. 은하수에 관한 과학수업으로 시작하며, 조반니는 은하철도에 승차하여 은하계를 종단한다. 각 정거장은 은하수의 주요 별자리를 상징한다. 이 점이 훗날 공상과학 장르와 결부시키기에 유리한 점이다.

 

조반니는 고독하다. 아빠는 부재 상태, 엄마는 아프다. 형편이 넉넉지 못해 방과 후에 일을 해야 하는 지경이다. 친구들과 놀지 못하고 거리감이 생긴다. 우울하고 슬프다.

 

조반니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쓸쓸해져서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P.89)

 

조반니의 눈에는 또 눈물이 가득 고여 은하도 마치 먼 곳으로 가버린 듯이 아득히 뿌옇게 보일 뿐이었습니다. (P.133)

 

이런 고요하고 좋은 곳에서 난 왜 더 유쾌해질 수는 없을까? 왜 이렇게 홀로 쓸쓸할까? (P.135)

 

은하철도는 저승행 열차다. 빙산에 부딪쳐 조난당한 배의 탑승자를 비롯한 여러 승객들은 남십자성에서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 기도한다. ‘끝까지 같이 가자는 조반니의 애원에도 캄파넬라는 홀연 듯 사라진다. 오직 조반니만이 내리지 않아도 되는 존재다.

 

조반니의 은하철도는 한바탕 남가일몽이다. 무익한 시간 때우기가 아니라 일생을 걸친 체험을 단시간 내에 압축하여 삶의 진실을 깨닫게 하는 정교한 장치다. 꿈속 여행을 통해 조반니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고 매진하기 위한 용기를 찾는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성장소설이다.

 

저 꼭 잘 살아갈게요. 반드시 진정한 행복을 찾겠습니다.” 조반니는 힘차게 말했습니다. (P.154)

 

기독교적 요소와 천문학적 지식이 결부되고, 글자그대로 환상이 결부된 이 작품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기이하며 신비롭다. 무엇보다 독특함의 여운이 길게 남는다.


애니메이션은 원작에서 모티브만 가져왔을 뿐 전혀 다른 주제의식과 접근방식을 지닌다. 환상을 모티브로 또다른 환상을 촉발했으니 단순한 모방과 재현이 아닌 발전이라고 볼 수 있겠다.

 

<바람의 마타사부로>는 비슷한 분위기를 지니면서도 일본의 민속적 요소와 자연 배경을 한껏 드러낸다. 불과 열흘 남짓 함께 보낸 후 홀연히 다시 전학 가버린 사부로. 그는 아이들이 지칭하는 대로 바람의 마타사부로일지도 모른다.

 

그때 바람이 휭 하고 불어와서 교실의 유리창은 모두 덜컹덜컹 울리고, 학교 뒤쪽 산에 있는 억새나 밤나무는 모두 이상하게 창백하게 되어 흔들리고, 교실 안의 아이는 무언가 때문에 웃고는 조금 움직인 듯했습니다. 그러자 가스케가 즉시 소리쳤습니다.

 

아 웃었다, 저 녀석은 바람의 마타사부로야.” (P.6~7)

 

이 작품을 지배하는 것은 인물 자체보다도 오히려 자연풍광이라고 하겠다. 산골마을에 쉴 새 없이 휘몰아치는 바람. 첫머리부터 작중을 압도하는 바람의 존재는 작품 말미에 이르기까지 변함없다.

 

바람은 아직 그치지 않고, 창유리는 빗방울 때문에 흐려지면서 아직도 덜컹덜컹 울렸습니다. (P.71)

 

아이들은 사부로와 금방 친구가 되어 포도를 따러 가고, 강에서 헤엄치며 논다. 아이들은 사부로를 바람신과 연관 짓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이것은 외부로부터의 미지의 힘이 무의식중에 아이들에게 작용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가스케는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 마타사부로가 유리 망토를 입고 하늘로 번쩍 날아올라가는 환상을 경험한다. 바람이 유달리 세차게 부는 날 이치로는 마타사부로가 날아갔을지 모른다며 서둘러 학교로 달려간다. 예감대로 마타사부로는 떠나갔다. 가스케와 이치로는 날아서 갔을 것으로 확신한다.

 

이 작품에서 마타사부로의 정체는 어른의 시각에서 명백하다. 아이들의 눈에는 전혀 다르다. 작가는 여기서 일본 동북지방을 배경으로 현실과 환상, 아이와 아이, 어른과 아이 간에 빚어지는 차이와 대립의 잠재요소를 너그럽게 포용한다. 사부로는 마타사부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둘 다라고 해도 좋다. 그는 차량으로 떠났을 수도 날아서 갔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모든 것을 풀어놓지 않는다. 뭔가 긴하고 중한 것을 잠시 엿보이게 한 후 슬쩍 덮어버린다. <주문이 많은 요리점>이 기억에 오래 남았던 연유도 마찬가지며, <은하철도의 밤>도 동일하다. 작가는 빈 여백을 독자가 주도적으로 채우길 바랐던 게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춘악이 반달문고 14
김나무 지음, 강전희 그림 / 문학동네 / 200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00년대 나온 동화임에도 시대적 배경은 해방 무렵이다. 지역적 배경은 머나먼 남녘바다 외딴 섬마을. 향토적 색채를 물씬 드러내기 위해 작중 인물의 대사는 죄다 걸쭉한 남도 사투리다. 문화적 배경은 현대문명과 전통 민속의 갈등이고. 이런 동화를 과연 아이들이 읽어낼 수 있을까?

 

어쩌면 어른들의 우려와는 무관하게 춘악이라는 또래의 인물은 좌충우돌하는 아이들의 코드와 제법 맞아떨어질 수도 있겠다 싶다. 거기에는 타산적 이해관계와 사리사욕에 대한 고려 없이 사람에 대한 순전한 이해와 공감이 우선하므로. 생소한 사투리 구사는 오히려 흥미와 재미를 고취시키는 구실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이일지라도 현실의 파고는 비켜주지 않는다. 그저 아름답기만 해서는 안 된다. 엄정한 실제는 거짓된 아름다움보다도 더 아름답다. 춘악이의 형편은 넉넉하지 못하다. 아버지의 이른 병사로 급격히 기운 가세는 춘악이로 하여금 학교조차도 못 다니게 한 정도다. 그럼에도 춘악이는 씩씩하고 올곧다. 어찌할 수 없음을 아쉬워하지만 좌절하지는 않는다.

 

작가는 이 한 편의 동화 속에 참으로 많은 것을 집약하고 있다. 우선 일제 치하의 친일세력이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음을 폭로한다. 현대화라는 명목 하에 우리네의 소중한 전통이 막무가내로 무시당하고 스러져가는 현실을 고발한다. 첩을 얻어 본처를 방치하는 남편과 괴로워하는 아이를 통해 비뚤어진 가정문화를, 문둥이에 대한 멸시와 차별을 통한 비인간적 처사도.

 

세상사의 오묘한 조화를 아직 어린 춘악이는 알 수 없다. 선한 이가 괴로움을 당하고 선하지 못한 이가 오히려 부귀영화를 누리는 현실을.

 

저 아지매는 와 저리 무섭은 문둥병에 걸려서 아프고 가난해졌을꼬? 창해 즈그는 착하지도 않은데 억수로 부자가 되고......참 이상타. 착한 사람에게는 하늘에서 복을 준다꼬 선생님이 그랬는데...... (P.59~60)

 

이 작품이 활기와 밝음을 유지할 수 있었던 큰 공로는 물론 춘악이에게 있다. 그는 할매 나무를 베어버린 창해 아버지를 당당히 비판하고 창해를 구하기 위해 얼음물로 뛰어들 용기를 지녔다. 반면 창해의 사고가 자신이 챙겨주지 않은 탓이라는 순수한 양심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전형적인 동화는 항상 해피엔딩이다. 이 책도 여기를 벗어나지 않는다. 춘악이는 물론 마을사람들과 갈등관계에 있던 창해 아버지는 창해의 사고를 통해 개과천선을 하고 춘악이가 계속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물질적 도움을 제공한다. 천편일률적이지만 아이에게 비극적 결과를 내보이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춘악이의 인물 설정과 함께 이 작품을 특징짓는 점은 무엇보다도 전통 민간신앙의 요소가 풍성하다는데 있다. 작품 전체를 통해 학골 마을의 상징인 당산 할배나무와 할매나무의 존재감은 두드러진다. 증폭되던 작중 갈등은 창해 아버지가 할매나무를 베어버리고 팔아버린 데서 폭발하며, 창해의 사고는 할매 나무의 원한으로 간주된다. 섣달그믐에 당산 사당에 초롱을 걸고 소원을 비는 대목이라든지 작중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굿판을 벌이는 모습 등이 모두 이제는 찾기 힘든 전통 민속의 장면이다.

 

흥미로운 독자적 인물 설정과 민간 전통의 결합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점이 이 동화가 여타 작품들과 구분되는 뛰어난 특징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외눈박이 덕구 파랑새 사과문고 9
이동렬 지음, 김 담 그림 / 주니어파랑새(파랑새어린이) / 2003년 8월
평점 :
절판


반려동물의 비중이 일상사에서 크게 증가하고 있다. 현대사회가 고착화될수록 사람사이가 멀어지고 사람에게 정주기가 어려워짐을 반증한다. 변덕스럽고 골치 아픈 사람보다는 차라리 말없이 충직하게 고독한 주인들 곁을 지키는 반려동물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여러 반려동물 중 개의 존재는 특출난데, 우리나라도 개에 대해서는 제법 할 말이 있다. 북한의 풍산개는 그렇다 치고 남쪽의 진돗개와 삽살개라면 어디 내놓아도 뒤지지 않겠지만 전래 이야기나 교과서 등을 통해서 우리에게 유독 친숙한 개는 바로 진돗개다.

 

이 책의 주인공 덕구도 진돗개다. 다만 순종은 아니다. 하긴 순종, 잡종이 뭐 그리 대수이겠는가. 사람은 종자를 가리지 않으며 짐승에 대해서만 엄격히 종자와 혈통을 구분하는 습성이 우스울 뿐. 잡종견보다 못한 순종인간이 세상에 널려 있는 게 현실이다. 세간의 소위 개만도 못한 인간이란 표현은 그런 면에서 적절치 않다.

 

덕구가 맞닥뜨린 사회는 비정하다. 호시탐탐 잡아채서 보신탕집에 끌고가려는 개장수, 그나마 안심하고 평온한 생활을 할 수 있지만 대신 불임수술을 받아 본능을 제한하는 동물보호소. 개들이 자유롭게 뛰어다닐 수 있는 곳은 도시에는 없다. 덕구가 강원도 산골로 분양된 것은 오히려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산장에서 덕구는 자유롭고 활달한 나날을 보낸다. 닭을 노리는 들고양이와 살쾡이를 물리쳐서 용맹을 입증하고 등산객들을 선도하여 탁월한 지력도 인정받는다. 덕구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자자해진다.

 

호사다마라고 할까. 배은망덕한 등산객 때문에 길을 잃고 허기에 못 견뎌 헤매다가 보신탕집에 잡혀 생사의 기로에 선 덕구. 조난당한 등산객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끝내 눈 하나를 잃게 된 덕구.

 

외눈으로 보는 이 세상도 아름답기는 두 눈으로 볼 때나 마찬가지였습니다. (P.178~179)

 

덕구의 뛰어난 점은 기실 올곧은 심성에 있다. 누군들 가슴 한켠에 아픔과 쓰라림을 품지 않은 이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덕구는 믿음과 순수로 세상을 살아갔다. 의리와 희생은 단지 그것의 한 결과일 뿐이다.

 

이 책은 강원도 철원군 복계산의 한 산장에 있었던 개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 개는 등산객을 안내하였으며, 주인이 준 음식이 아니면 먹지 않았다고 한다. 도무지 실제 같지 않기에 실화라는 점이 더욱 생경하면서도 생생하게 다가온다.

 

인간에게 가까운 개를 음식으로 삼는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외국과 일각에서 두드러진다. 하지만 우리의 오래된 음식문화를 무작정 배척하는 것도 옳지 못하다. 현실적으로 금지가 어렵다면 사육과 도축에 있어 다른 식육짐승과 같이 온당한 관리를 하고, 비윤리적이고 잔인한 행위는 없어야 할 것이다.

 

반려견으로서도 마찬가지다. 단지 한때 귀여워하다가 훌쩍 버리고 마는 애완견 취급도 잘못이다. 반려견도 자체의 의의를 지닌 온전한 생명으로서 인정과 대우를 받길 바란다.

 

덕구 이야기를 읽으며 개와 관련된 이런저런 상념이 떠오른다. 아이들은 과연 어떤 생각과 느낌을 품게 될지 자못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