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나무 아래에서 산하세계어린이 26
마리타 콘론 맥케너 지음, 이명연 옮김 / 산하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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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동문학 또는 청소년문학의 주인공은 대체로 집안형편이 가난하다. 원래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부유하였지만 사정이 생겨 몰락하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역경을 무릅쓰고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성장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들처럼.

 

작품의 배경인 영국 지배하의 아일랜드는 1840년대에 대기근을 겪는다. 감자가 주식인 나라에서 감자가 죄다 썩어나가는 형편이 되니 사람들이 굶주림에 허덕일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당시 인구 8백만 명 중 1백만 명이 사망하고, 1백만 명이 해외 이주의 길을 선택했다고 한다. 대기근이 가라앉은 이후로도 인구는 계속 유출하여 현재 아일랜드 인구가 4백만 명 대라고 하니 대기근의 여파를 짐작할 수 있다.

 

골짜기 건너에서는 남자들이 욕을 해 대고 있었고, 여자들은 하느님께 살려 달라며 기도를 했다. 밭마다 감자가 썩어서 땅에 뒹굴었다. 감자는 모든 사람들의 양식이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아이들은 두려움에 떨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어린 아이들이지만 이제 곧 기근이 닥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P.9)

 

끔찍한 사건을 소재로 하다 보니 내용은 물론, 작품의 어조와 분위기가 밝을 수 없다. 점점 줄어드는 식량, 식량을 구하러 떠난 아버지, 영양부족으로 몸이 허약해져 숨을 거두는 막내 아기, 소식 없는 아버지를 찾으러 나선 어머니, 집단 수용소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말로만 듣던 멀리 떨어진 친척을 찾아 길을 떠나는 어린 세 남매.

 

기아와 잇따른 열병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가정도, 이웃도, 사회도. 작가의 시선은 감정에 들뜨지 않는다. 아동문학임을 감안하여 적나라한 묘사는 자제하지만 아이들의 눈에 비치는 사회의 참상은 지극히 사실적이다.

 

모두가 똑같은 얼굴이었다. 뺨은 움푹 꺼지고 눈은 퀭한데다, 눈 밑에는 검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비쩍마른 입술에 몇몇 사람들은 황달기까지 있었다. 굶주림과 질병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다. 사람이라기보다는 마치 유령 같았다.......에일리는 이곳이 바로 지옥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아주 무시무시한 지옥이라고. (P.94)

 

위는 급식소에서 맞닥뜨린 사람들을 본 에일리의 느낌이다. 작가의 시선은 때로 비판적이다. 모두가 굶주린다면 모르겠지만 소작농을 버려둔 채 본국으로 떠나버리는 영국인 지주들, 그리고 와중에도 영국 본토로 농작물을 싣고 가는 장면 등은 유독 날카롭다.

 

우린 아일랜드 사람들이오. 그런데 우리의 식량이 외국으로 나가고 있소. 아일랜드 땅에서 기른 곡식으로 영국인들의 배를 채우다니. 그 동안 우리 동포들은 배를 곯며 굶어 죽어가고 있단 말이오. (P.122)

 

허기를 근근이 버텨가며 낯선 길을 여러 날에 걸쳐, 더군다나 열 살 전후의 아이들이 행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흉흉한 인심, 아사의 공포, 치안 부재의 불안을 무릅쓰는 아이들의 발걸음은 자체가 하나의 성장소설의 전형이다. 사람은 고난과 실패를 통해 깨닫고 배우며 자란다. 아이들 자신은 인식하지 못하겠지만 길을 떠날 당시 철부지에 불과하였던 두 동생은 어느덧 자기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사리분별을 갖추고 세상에 눈을 떴다. 때 이른 철듦에 씁쓸하지만 어차피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가슴 한 구석이 아파 왔다. 심장이 둘로 쪼개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마이클은 자신의 어린 시절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마이클은 느릿느릿 걸음을 늦추며 생각했다. 그의 앞에 길고도 참담한 여정이 남아 있었다. 신은 없다. 만약에 있다면 그는 너무 잔인했다. (P.146~147)

 

무심하고 잔인한 신, 그럼에도 삶을 위해 맹목적이지만 최선을 다해 전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별 볼일 없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당시엔 너무 하찮고 구질구질해 보이기조차 십상이다. 일상의 안온과 평화를 상실한 순간에야 비로소 우리들은 아쉽고 안타까워한다. 수구초심 하는 여우처럼 낯선 곳에서 고향을 떠올리고 마냥 그리워한다. 더 이상 되돌아갈 수 없기에 더욱 애타는 심정으로. 이렇듯 각성은 상실을 전제로 한다. 마이클의 자각처럼.

 

에일리는 이제야 스르르 긴장이 풀렸다. 나노와 레나 할머니가 계신 집이라면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에일리는 자기들의 마음이 언제나 고향에 있는 작은 오두막집에 가 있으리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문 밖에는 편안히 앉을 수 있는 돌들이 놓여 있고, 아름다운 풀꽃들이 가득한 작은 뜰이 있는 집. 고향의 들판에는 지금도 산사나무 사이로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불고 있을 것이다. (P.175~176)

 

우여곡절 끝에 난관을 헤치고 세 아이들은 이모할머니 댁에 무사히 도착했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더 이상 기아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아이들은 마침내 성공한 것이다. 어둠에서 빛으로, 고난에서 행복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마지막 대목에서 에일리는 두고 온 고향을 회상한다. 이제는 안심이라는 듯이.

 

하지만 독자들은 잊지 못한다. 아이들의 성공은 일시적이고 단편적임에 불과함을. 그들처럼 탈출에 성공하지 못한 많은 어른과 아이들의 존재가 있다. 게다가 아이들의 부모도 행적이 묘연하지 않은가. 작가는 부러 회피한다. 밝은 결말을 방해하지 않고 싶기도 하며, 이 밝음이 진짜인지 아니면 구름 사이에 살짝 드러난 찰나에 불과한지 알지 못해서이기도 하다. 대단히 이질적인 아동문학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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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걸들에게 주눅 든 내 아들을 지켜라 - 자신감 없고 의욕도 없는 우리 아들 '기 살리기' 프로젝트
레너드 삭스 지음, 김보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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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남자아이 여자아이>의 후속편이다. 전작을 무척이나 흥미롭게 읽은 나로서는 기대가 크다. 그런데 책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겉표지가 영 마뜩찮다. 원제가 <Boys Adrift>. ‘표류하는 소년들또는 방황하는 소년들이 직역이지만, 조금 양보해서 <내 아들을 지켜라>도 아주 틀리지는 않다고 본다. 문제는 쓸데없이 앞에 붙은 알파걸들에게 주눅 든이라는 수식구다. 출판사가 이 책을 어떤 관점에서 보는지 이 한 줄로 확연히 드러난다. 소위 알파걸과 대립각을 세워서 아들 양육에 고민하는 부모들을 낚아보자는 상술.

 

레너드 삭스의 문제의식은 남녀 아이의 성별을 가리지 않음은 전작에서 알 수 있다. 남녀의 생물학적 성 차이를 외면한 현대 교육제도가 남녀 아이 모두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알파걸에 관심 없다. 관심의 초점을 남자아이에게 두고 있다. 현대 교육제도 하에서 입는 피해는 남자아이가 상대적으로 크다고 그는 보고 있기에 먼저 남자아이에 관한 책을 쓴 것이다. 그의 이후 저작이 <Girls on the Edge>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따라서 출판사의 상술은 일단 무시하자.

 

아들 키우기는 힘든 과제다. 저자가 주장하는 생물학적 특성상 여자아이는 학교생활에 적응이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주의가 산만하다고 지적받는 일도 덜 하며 말썽도 덜 부린다. 초등학교 교사의 대다수는 여자이므로 남자아이의 특성에 대한 이해도도 덜하다. 가정에서는 양육에 더 많은 시간과 관심을 쏟는 엄마 또한 아들에 대해서는 이해의 한계가 있다. 게다가 가정이나 학교에서 듣는 말은 대부분 “~ 하지 말라는 금지 명령어의 연속일 뿐이다.

 

저자는 남자아이들이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제시하고 있다. 지나친 조기교육, 경험적 지식에서 배움의 지식으로 전환된 교육 그리고 남자 아이의 특성을 하나도 고려하지 않는 교육 방식이 특히 남자아이들의 학습의욕을 저하시킨다. 단순화시킨다면 현재의 학교교육은 남자아이들에게 해롭다는 것이다. 남자아이는 여자아이에 비해서 학습능력과 신체적 발달이 다소 늦기에 경쟁적인 조기교육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으며, 책상에 얌전히 앉아서 하는 수업은 남자아이들에게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이라는 등.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은 전화기가 아니라 게임기에 불과하다. 스마트폰을 사달라고 조르는 것은 게임에 빠지고 싶다는 비유적 표현이다. 예전에는 오락실 게임, 컴퓨터 게임이나 비디오 게임이 주류였다면 확실히 지금은 모바일 게임이 대세다. 현실보다 화려하고 맘먹은 대로 행동할 수 있으며 쉽사리 획득할 수 있는 게임 속 세상이 현실 세상보다 구미에 당기는 것은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다만 아이들에게는 지나친 몰입이 장기적으로 더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

 

ADHD(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라는 진단을 내 아이가 받는다면 무척이나 낙담과 상심이 클 것이다. 책에서 제시한 ADHD의 공식 기준을 보면 큰아이는 틀림없이 여기에 해당한다. 아니 내가 어릴 때라면 상당수의 남자아이들이 여기에 저촉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들 모두가 아이 때 정신적 장애를 지녔다는 말인가? 아무래도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 역시 여기에 동의한다. 그에 따르면 <톰 소여의 모험>의 주인공도 요즘 기준으로는 신경자극제를 장기적으로 처방받아야 할 형편이다. 문제는 신경자극제가 아이의 뇌에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는 저자의 견해다.

 

아무리 단기간 소량을 투약해도 그것(신경자극제)이 측위 신경핵에 영구적인 손상을 주는 것은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측위 신경핵은 동기를 행동으로 전환해주는 역할을 하는 영역이다. 남자 아이의 측위 신경핵이 손상을 입는다 해도, 아이는 여전히 허기나 성적인 흥분은 느낄 수 있다. 그저 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뭔가를 하고 싶은 의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P.133)

 

이것이 미국에서만 만연하는 현실인지 아니면 우리네 초등학교에서도 ADHD 처방이 광범위한지 알 수 없으나 남자아이가 받는 피해가 여자아이보다 심각하다고 한다.

 

게다가 환경호르몬은 남자아이들에게 더 치명적이라고 하니 설상가상이다. 환경 호르몬이 남자 아이들의 성 발달을 지연 혹은 교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성 발달의 지연, 과체중, ADHD의 세 가지 현상이 남자 아이의 경우에 훨씬 더 자주 동시에 발생한다고 보고한다. (P.163)

 

이상의 문제점들이 교육제도, 환경적 요소에 기인한다면, 문화적 변화에 따른 요인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소위 남자아이들의 롤모델이 부재한다는 참담한 현실이다.

 

모범이 되는 남성상을 만들어줘라 (P.178)

 

핵가족 제도 하에서 세대 간의 단절은 이미 오래되었지만 궁핍한 현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생존하기 위해 가정 내의 남성 어른은 불철주야 돈벌이에 급급하며 이제는 여성 어른도 사회생활에 동참하며 가족 간의 유대는 나날이 옅어져만 간다. 더욱이 남성 어른조차도 이미 부재와 단절을 겪은 세대이므로 스스로가 후대를 위한 모범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자질조차도 부족하다. 소파에서 빈둥거리며 TV 채널이나 돌리고 아니면 비디오와 게임에 빠져있는 아빠에게서 아들들은 무엇을 보고 배울 수 있겠는가?

 

우리는 진정한 남자가 되고 싶지만 그 의미에 대해서 어른들의 가르침을 받지 못해 집단 폭력이나 거리 폭주, 약물 남용 등을 선택하는 무서운 젊은이들을 많이 보아왔다. 진정한 남성다움의 역할 모델과 본보기를 무시한 것, 그것이 바로 아들의 위기라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 다섯 번째 요인이다. (P.192)

 

상기와 같은 혼란을 겪고 자란 아들들이 성인이 된 후에 진정한 남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저자는 7장에서 독자들의 다양한 이메일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일자리도 귀찮고, 여자와 만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싫어하고 부모에게 생계를 의존하는 퇴행적 젊은이들의 모습을 마주치게 된다.

 

문득 며칠 전에 읽은 기사가 생각난다. 일본에서는 남녀의 데이트 경험비율이 계속 감소함에 따라 이것이 결혼율과 출산율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되어 소위 데이트기술을 가르치는 학원이 성행중이라는 뭐 그런 내용이다. 이것이 단지 이웃나라만의 희귀한 현상에 그친다면 바랄뿐이다.

 

여기서 제시된 각종 문제점들에 대한 해법은 이렇다. 조기교육을 지양하고 남자아이의 특성을 고려한 교육을 시행하며, 게임을 조절하고 ADHD 진단을 남용하지 말며 환경호르몬 감소를 위해 노력하고 무엇보다 가정과 사회에서 바람직한 남성상을 심어줄 수 있어야 한다. 매우 간단하지 않은가?

 

저자는 여의치 않으면 남녀공학이 아닌 단성으로 구성된 학교, 즉 남학교와 여학교로 구분하여 교육시키라고 한다. 그것이 성별의 차이를 반영한 교육을 가능케 하고 상대방 성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자유로운 학습과 생활이 가능하다고 한다. 오히려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가르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네 현실과는 완전한 상반을 이룬다. 단순 유치원에 만족 못하며, 비싼 돈을 들여서 영어유치원에 보내지 못해 안절부절못한다. 학교수업으로도 성에 차지 못하며, 보습학원과 예체능학원, 그리고 학습지에 올인 한다. 영재로 뽑히기 위해 영재프로그램에도 기웃거려 본다. 열에 아홉이 넘는 여교사 비중을 차지하는 초등학교에서는 남자아이들의 튀는 행동과 장난은 눈에 거슬릴 뿐이다. 단성학교는 점점 과거화 된 유물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네는 대안학교가 그나마 조금씩 득세하고 있다.

 

이 책은 미국 교육현실에 기반을 두었지만 우리네와도 상통한다. 우리의 교육방식은 미국 제도를 상당히 준거하고 일상의 문화 역시 베끼다시피 하는 형편이다. 저자의 주장이 현시점에서는 과하지 않나 생각하다가도 10년 후의 시점을 감안하며 그렇지도 않다. 바위에 계란치기며 바다에 모래알 던지기에 불과할 수 있다. 그만큼 저자의 주장이 실현될 가능성은 국내에서는 희박하다. 다만 적도 남자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교육관과 아이를 양육하는 방식을 한번쯤 되돌아보고 응용해 볼 수 있는 계기는 될 것이라고 본다.

 

당장 나부터도 아이들의 게임 시간을 조절하여 과도하게 몰입되는 것을 어찌하면 방지할까 적용 중이며, 경험적 지식과 롤모델을 강화하기 위하여 아이들과 같이 운동을 해볼까 아니면 아이들을 어디 캠프 또는 체험교실에 보낼까 목하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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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 모노가타리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지은이 미상 지음, 민병훈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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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에 가는 길이라고는 들어 알고 있지만

어제오늘 일이라 생각도 못했는데 (165, P.283)

 

그날 공연히 다음에 또 보자고 약속했네요

오늘이 끝이라고 말해야 좋은 것을 (101, P.148)

 

죽음을 목전에 둔 인물의 체념과 회한에 짤막한 시구를 통해 애절하게 다가온다. 와카가 담고 있는 제재의 폭은 비단 사랑과 연애에만 그치지 않고 이렇듯이 삶의 전 영역을 포괄한다.

 

바쁜 중에도 저를 생각하시며 지냈다지만

이 지루한 하루를 무엇에 비할까요? (136, P.210)

 

오랜 세월을 연애도 않던 내가 저녁이 되면

까닭 없이 슬픈 건 무슨 연유일까요 (19, P.33)

 

사랑은 기쁨 못지않게 괴로움과 슬픔을 수반한다. 전에는 무심했던 연인의 일거수에도 예민하고 행여 나를 잊거나 소홀히 하지 않을까 전전반측한다.

 

헤이안 시대에는 다양한 인물이 온갖 소재로 와카를 짓는데, 먼저 주제 면에서는 월등히 많은 영역이 사랑이다. 아마도 인간 사회가 존속하는 한 모든 예술 작품의 불변하는 제일 주제는 사랑이 아니겠는가. 위로는 천황에서부터 귀족과 기녀에 이르기까지 남녀를 불문하고 이성에 대한 사랑에 가슴 벅차고 기대에 설렘을 품고 회한에 눈물 흘리며 원망을 그치지 않는다. 터무니없는 오해는 비극적 결과마저 야기하는 경우도 있어 시대와 장소를 달리하더라도 인간 본연의 면모는 전혀 낯설지 않음을 알게 한다. 당대의 연애 및 혼인 풍습 등에 대한 이해를 지니고 있으면 좀 더 공감을 하게 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연면히 흐르는 감정에 둔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은 모노가타리 장르 중 <이세 이야기>와 함께 대표적인 우타모노가타리의 하나로 꼽힌다. <이세 이야기>와 구별되는 점은 전자가 특정 인물의 연대기 형식을 취하여 삶의 여정을 따라 와카가 불려지고 있어 노래와 이야기가 비교적 일관성이 있는 반면, 이 작품은 일종의 시화(詩話)집이라고 볼 수 있다.

 

173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헤이안시대 중기를 배경으로 당대의 천황과 지체 높은 귀족들이 읊은 유명한 와카와 그 노래의 창작 배경을 설명하는 형식이다. 따라서 일관된 주제의식과 체계성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한편 여러 당대인들의 감정, 풍습 및 사회상을 미()의식과 함께 폭넓게 조망하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작가는 여러 와카와 관련된 일화를 단지 수집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편집자의 단호함을 드러내는 대목이 곳곳에 있는데, 비판과 첨언의 대상은 천황도 비껴가지 않는다.

 

마음이 내키지 않아 노래도 어설프게 읊으셨다. (19, P.33)

 

“......그것을 보면 애써 노래로 읊어 부른 보람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32, P.50)

 

와카의 세계를 통해 본 헤이안 시대는 또는 풍류가 지배하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멋들어진 와카 한두 수를 즉석에서 읊을 줄 알아야 하며, 남녀가 만나서 여자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면 다음날 아침 반드시 서신을 보내는 게 에티켓이었다. 여자들은 다채로운 색상의 옷소매로 미적 감각을 드러내었다. 물론 독특한 연애 방식에 따른 여자들의 불평등한 지위와 수동적 관계의 고착화, 백성들과는 무관한 귀족들만의 유희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인정하지만 어쨌든 독자적인 아름다움의 존재는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 미감은 때로 가냘픈 무상감마저 자아낸다. 그리고 이러한 정서가 사라짐을 우리네와 마찬가지로 작가는 안타까워한다.

 

이야기처럼 세상은 허무하니 마음에 품은

애절함을 어떻게 그대에게 전할까

 

이런 노래여서 아무도 반가를 읊지 못하고 둘러앉아서 소리를 높여 울었다. 이 속세에서는 신기할 정도로 사물의 정취를 이해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이제 와서야 실감하게 된다. (41, P.60~61)

 

전반부는 비교적 단편에 가까운 시화로서 노래가 중심이 되고 관련 일화가 부수된다. 반면 후반부로 갈수록 형세가 역전되어 일화가 장황하게 소개되어 자체로서 독자적인 읽을거리가 되고 있어 문예의 역사적 흐름이 느껴진다.

 

예컨대 147이쿠타 강은 두 남자를 똑같이 사랑한 여자 한쪽을 선택할 수 없어 고민 끝에 강에 몸을 던지는 내용이다. 두 남자도 같이 몸을 던지고 결국 강가에는 세 개의 무덤이 나란히 자리 잡는다. 이 일화를 제재로 여러 사람들이 번갈아 노래를 읊어 사랑의 비극적 결과를 애탄하지만, 유혈 낭자한 후일담으로 이야기는 끝맺는다.

 

168이끼 옷은 당대 저명한 와카시인이었던 인물이 천황의 붕어 후 세상을 등지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고 나중에는 자식마저 중으로 만드는 절절한 사연을 소개한다. 각 단이 대개 한두 쪽에 그치는 데 비해 무려 여섯 장이 넘는 분량을 차지한다.

 

서사적 흥미와 감동이 상대적으로 미약한 시화 모음집이 오래전부터 나올 수 있게 된 연유는 무엇인지 궁금하였는데, 옮긴이가 말미의 해설에서 잘 밝혀주고 있다. 당대에 와카 읊기는 교양인의 필수 덕목이었다는 점, 모범적이고 유명한 와카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이 컸다는 점, 단순히 와카뿐만 아니라 노래가 지어진 배경도 문맥적 차원에서 같이 언급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 등이 이 책같은 유의 시화집이 나오게 된 까닭이다. 사실 황실 차원에서 와카집을 수집, 정리하는 노력도 빈번하였으니 와카 짓기는 상하를 막론한 중대 관심사였을 것이다.

 

문화적 이해의 장벽 외에도 시가 장르는 기법 면에서 역시 번역의 한계를 실감하게 되는데, 10세기 중엽, 고대 문학이면서도 적극적인 연관어와 가케코토바 등 언어유희를 통한 미묘한 뉘앙스는 가나 원어를 음미해야 절절해질 텐데 각주를 통해 이차적으로 이해하는데 그칠 수밖에 없어 아쉬움을 느낄 뿐이다. 그럼에도 헤이안 인들의 문화와 정서를 조금이나마 더 이해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은 여전한 소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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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에게 희망을 하서명작선 28
트리나 폴러스 지음, 김미정 옮김 / (주)하서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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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출판사의 어린이 또는 청소년을 위한 문학시리즈를 쭉 훑어나가다 보니 몇몇 생소한 작품명과 작가명이 눈에 띈다. 그렇게 문득 호기심이 발동하여 급히 구해본 게 이 책이다. 알고보니 동화쪽에서는 거의 고전급으로 인정받는 것 같다. 작가 트리나 폴러스는 전업 작가는 아니고 여성 운동과 환경 운동에 매진하면서 거기에서 얻은 체험을 바탕으로 이 글을 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달랑 이 책 하나만 출판되어 있어 다소 아쉽다.

 

표제와는 달리 애벌레 두 마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그들이 벌이는 일종의 모험담과 경험담을 소개한다. 물론 애벌레가 나중에 나비로 탈바꿈하게 되므로 꽃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 다만 표제를 보고 꽃들과 관련된 작품으로 오해하지는 말아야겠다.

 

이 책은 비판적 독자에게 이중적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어린이의 계몽을 대상으로 삼은 측면에서 이 책이 주는 메시지는 단순하고 직접적이며 충분히 감동적이다. 반면 성인 독자의 눈으로 보면 주제의식이 너무 앞서있고 교훈의 제시가 직설적이어서 세련되지 못한 인상을 받게 된다. 조금만 더 문학적으로 포장하여 다듬었으면 더욱 멋진 작품이었을 텐데.

 

현대 사회는 정글과도 같은 경쟁사회라는 점, 그래서 남을 앞서기 위해서는 밟고, 넘어서기 위해서는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경쟁자들을 제쳐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우리는 모두 직간접적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다. 때로는 무엇을 위한 경쟁인가 근원적 의구심을 품기도 하지만, 그런 나약한 감정일랑 일치감치 던져버리는 게 보다 유익하다는 사실도 충분히 인식한다.

 

성공하지 못하는 건 다 자기 탓인 거야!”

인생은 험난한 가시밭길이라구. 마음을 단단히 먹는 수밖에 없단 말이야.” (P.108)

 

줄무늬 애벌레는 노랑 애벌레와 행복하게 지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경쟁의 미래를 포기하지 못한다. 치열한 분투 끝에 애벌레 탑의 꼭대기에 도달하지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남들보다 위에 서있을 뿐. 독자는 줄무늬 애벌레가 피도 눈물도 없는, 성공 신화에 사로잡힌 무자비한 개체가 아님을 안다. 그와 경쟁하는 수많은 애벌레들도 마찬가지로 하나하나가 독자적인 개성을 지닌 독립된 생명체다. 하지만 경쟁의 도상에서 고유성과 존엄성을 즉시 매몰되면 맹목적 일부로 전락할 뿐이다.

 

노랑 애벌레는 맹목적 경쟁이 아닌 다른 길을 모색한다. 그저 바닥을 기어 다니는 미천한 존재가 아니라 창공을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눈부시고 고귀한 존재, 나비가 될 수 있는 길을. 개체의 내적 완성을 통한 도약과 비상으로의 변모. 그것은 불확실하고 고치 속에서 오랜 시간을 갇혀 지내며 애벌레의 존재성을 포기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길이다. 미지의 길을, 다수와 떨어져서 홀로 걸어가야 하는 두려움과 외로움, 그것은 진정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이런 건 예전에 생각지도 못한 건데. 내가 바른 길을 갈 수 있는 건 바로 용기 때문이다. 만약 내 몸 안에서 실을 뽑아낼 수 있다면 나도 나비가 될 수 있을 거야.” (P.100)

 

이 동화의 끝 장면은 시사적이다. 나비가 된 줄무늬 애벌레. 두 마리의 애벌레는 나비가 되어 정겹게 다듬이를 쓰다듬는다. 이윽고 초원을 팔랑이며 날아간다. 여기에는 오직 이미지만 있을 뿐 일체의 글자는 배제하고 있는데, 말로는 표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일 것이다.

 

아니, 이제부터 다른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P.175)

 

그것은 작가의 간절한 염원 자체이기도 하다. 모든 애벌레들이 땅바닥을 기는데 만족하지 않고, 이웃들을 적으로 삼고 오로지 높은 곳을 오르고자 하지 않는 것. 애벌레들이 나비가 되지 않는다면 초원은 더 이상 아름다운 꽃들로 넘쳐나지 않는 삭막하기 이를 데 없는 곳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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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ㄴㅇㄹ 2018-07-23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경쟁의 도상에서 고유성과 존엄성을 즉시 매몰되면 맹목적 일부로 전락할 뿐이다-> 문법에도 맞지 않고 일부로 어렵게 쓴 느낌
 
아낌없이 주는 나무 외 청목 스테디북스 62
셸 실버스타인 지음, 이상영 옮김 / 청목(청목사) / 2001년 4월
평점 :
절판


셸 실버스타인의 대표작 세 편을 한 권에 모두 담았다. 연전에 앞의 두 편을 읽었는데 도서관에서 잠시 짬을 내어 읽는 바람에 차근차근 음미하지 못한 게 아쉬워서 이 책을 구하였다. 편집과 판형 등에서 이편이 보다 일반적이어서 무난하다는 장점도 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나무의 아낌없는 희생이 다시금 가슴 찡하다. 나무는 그것을 희생으로 생각하지 않을 테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위하여 가진 것을 내어줄 수만 있다면 그것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겠는가. 자연스레 아이를 향한 부모의 모습이 투영된다. 부모와 나무를 비유한 데서 문득 풍수지탄이 떠오른 걸 보면 동·서양의 인식이 비슷하다.

 

미안해, 아무 것이라도 너에게 주었으면 좋겠는데......

내게 남은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구나.

나는 늙어 버린 나무 그루터기일 뿐이야.

미안해...... (P.51)

 

요즘은 집집마다 애완동물을 제법 많이 키운다. 애완견과 함께 산책하는 주민들도 자주 마주치게 된다. 어디 개뿐이겠는가. 고양이, 거북이, 이구아나, 앵무새, 하늘소, 열대어 등 키우는 방식은 다르지만 사랑을 쏟는 심정은 동일할 것이다. 개중에는 사람보다도 더 각별히 애정을 주는 경우도 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매한가지다. 상대방 또는 나를 돌보아주는 사람이 내게 사랑의 념을 품고 살뜰하게 마음을 써준다면 마음은 저절로 그쪽으로 향하게 마련이다. 별 볼일 없는 평범한 사람, 사물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귀중하고 특별한 존재로 승화된다. 그것이 사랑의 힘이다. <값싼 코뿔소를 사세요>에서 우리가 코뿔소를 사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일은 아주 쉽습니다. (P.112)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 쪽>은 역설적인 내용의 작품이다. 잃어버린 한 조각을 찾기 위한 동그라미의 고행이 눈물겹다. 이곳저곳을 방랑하며 그가 갈구하는 것은 완전한 동그라미로 거듭나서 완벽한 행복을 누리는 데 있다.

 

비바람을 무릅쓰고 뒤뚱뒤뚱 굴러가는 동그라미, 바다도 건너고 산길도 낑낑대며 올라간다. 여러 조각들을 만나지만 너무 크거나 작아서 아귀가 맞지 않고 모양이 안 맞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꼭 맞는 조각을 만나서 그들은 완벽한 동그라미로 거듭난다. 이제 그들에게는 오로지 행복만이 눈앞에 놓여 있을 뿐이다.

 

하지만 완벽한 동그라미는 너무 잘 굴러서 주변과 이웃을 돌아볼 시간이 없다. 입이 막혀 즐거운 노래도 부르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찾았던 조각을 살며시 내려놓는다. 비록 다시 이가 빠진 동그라미로 돌아갔지만 이제 그는 이전보다 행복하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한다. 그래서 자신을 채워줄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아서 정처 없이 배회한다. 그것은 배우자가 될 수도 있고, 지식, 재능 아니면 영혼의 갈증을 달래는 신앙일 수도 있다. 완전함을 지향하는 정신이 인류 발전의 흐름이긴 하지만 완전함이란 어차피 불가능하지 않은가. 오히려 현재의 자신에게서 간과했던 미덕이 없는지 되돌아본 적이 있는가. 부족함에서 행복을 발견한다면 안분지족은 안자만의 즐거움은 아닐 것이다.

 

원래 이가 빠진 동그라미였을지 누가 알겠는가. 잃어버린 한 조각은 애시당초 없을 수도 있다. 그는 헛된 망상에 사로잡힌 것이다.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가는 탐색의 과정은 이가 빠진 동그라미가 자신과 세계를 되돌아보는 구도의 여정이었던 셈이다. 그가 첫 번째로 마주친 조각이 이를 웅변한다.

 

난 너의 읽어버린 조각이 아니란다.

난 누구의 부분도 아니고

난 그냥 하나의 조각일 뿐이라구. (P.153)

 

실버스타인의 글과 그림은 언제나처럼 간명하면서 핵심을 잘 짚어간다. 진실에는 많은 말이 필요치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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