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카페의 노래 열림원 이삭줍기 12
카슨 매컬러스 지음, 장영희 옮김 / 열림원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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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정상적인 사랑과 비정상적인 사랑이라는 구분이 가능할까? 꽃다운 선남선녀들의 풋풋하고 산뜻한 사랑은 사람들의 마음을 흐뭇하게 하고 동정어린 격려를 받는다. 우리들은 이를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칭한다. 그럼 아름답지 못한 사랑도 있다는 말인데.

 

비정상적이니 아름답지 못하다니 하는 말들은 사랑의 당사자가 아닌 국외자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표현이다. 두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사랑은 오직 사랑 그 자체일 뿐이다. 거기에는 선악, 미추, 윤리와 도덕 등의 개념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것은 사랑을 둘러싼 부차적 요소이며, 사랑이 아닌 사회가 덧붙인 것이다.

 

세 명의 주요 인물은 모두 비주류요 반사회적이다. 우선 아밀리아는 세상에서 기대하는 전형적인 상과 배치되는 여성이다. 장대한 기골에 괴팍한 성질, 남들과 어울리는 삶을 거부하는 태도 등등. 라이먼은 불치병에 걸린 꼽추로 출신과 배경 모두 미지의 인물로 아밀리아와 친척 간이라는 그의 주장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편 마빈 메이시는 신체적 조건으로는 지극히 우월하지만 흉악한 범죄자다.

 

이런 세 명 간에 펼쳐지는 사랑과 애증의 삼각관계는 오히려 처연하다. 사랑의 이유는 당사자 외에는 알 수 없다. 아니 당사자조차도 진정한 이유는 알지 못한다. 사랑은 의도가 아니라 자연이다.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감정, 차라리 미워하는 편이 나은데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의 행로, 그것이 사랑이다. 독자는 라이먼에 대한 아밀리아, 마빈 메이시에 대한 라이먼의 감정을 폄하하지 못한다. 다만 안타까울 뿐이다.

 

작가의 어조는 일견 담담한 듯하면서 우울하다. 그는 아밀리아에게조차 일말의 동정적 면모를 보이지 않는다. 감정과 사건이 고조되면서 흥분이 터져 나올 시점에서도 그는 나직하면서 약간은 시니컬하게 상황을 묘사한다. 슬프고 애틋한데 오히려 실소가 나올 때의 처참한 심경을 겪어보았는가. 그런 면에서 작가는 전혀 친절하지 않다. 아밀리아가 마빈 메이시를 왜 쫓아냈는지 궁금하지만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다. 라이먼의 정체도 불투명하게 놓아둔다.

 

사랑의 힘으로 마빈 메이시는 선하고자 노력하였고 사랑의 배신으로 더욱 철저하게 악인이 되었다. 사랑의 작용으로 아밀리아도 온기와 활기가 넘치는 카페를 만들었으나 사랑이 떠나가자 카페는 폐허가 되었다. 더불어 마을도 다시금 황량하고 쓸쓸하게 퇴색되었다. 라이먼은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기를 선택한다. 그 길이 제아무리 고통스럽고 굴욕적이라도 당사자는 행복할 것이다, 그것이 사랑의 힘이므로.

 

그로테스크.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이 소설의 내용과 느낌을 한 단어로 압축하면 위와 같다. 배경, 인물, 성격, 사건 어느 것 하나 낯설고 기이하지 않은 게 없다. 하물며 결말조차도 섣부른 기대를 저버린다. 무엇보다 작가가 민낯으로 드러내는 고독과 단절의 사랑 방정식이 더욱 황량하며 으스스하다. 그럼에도 차마 외면하지 못함은 그것이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음에서일 것이다.

 

진실이라? 작가가 그리고자 한, 그리고 아밀리아가 드러내지 않고자 한 진실은 무엇일까? 독자는 이것을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다만 작가의 독특한 사랑관을 피력한 유명한 다음 대목이 이해에 단초를 제공한다.

 

우선 사랑이란 두 사람의 공동 경험이다. 그러나 여기서 공동 경험이라 함은 두 사람이 같은 경험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랑을 주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 사람이 있지만, 두 사람은 완전히 별개의 세계에 속한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사랑을 주는 사랑의 마음속에 오랜 시간에 걸쳐 조용히 쌓여 온 사랑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사랑을 주는 사람들은 모두 본능적으로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사랑이 고독한 것임을 영혼 깊숙이 느낀다. 이 새롭고 이상한 외로움을 알게 된 그는 그래서 괴로워한다. 이런 이유로 사랑을 주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딱 한 가지가 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사랑을 자기 내면에만 머무르게 해야 한다. 자기 속에 완전히 새로운 세상, 강렬하면서 이상야릇하고, 그러면서도 완벽한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이제 사랑을 받는 사람에 대해서도 얘기해 보자. 아주 이상하고 기이한 사람도 누군가의 마음에 사랑을 불 지를 수 있다......그래서 어떤 사랑이든지 그 가치나 질은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 자신만이 결정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대부분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기를 원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간단명료하게 말한다면, 사람들은 대부분 사랑 받는다는 사실을 마음속으로 힘들고 불편하게 느낀다. 사랑 받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증오하게 되는데,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연인을 속속들이 파헤쳐 알려고 들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는 아무리 고통을 수반할지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가능한 한 모든 관계를 맺기를 갈망한다. (P.49-51)

 

우리는 이 대목을 통해서 아밀리아가 마빈 메이시와의 결혼생활을 거부하게 된 연유를 추론할 수 있다. 보다 뒤에서 작가는 아밀리아의 결혼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그러나 이렇게 표면에 드러나 사랑 이야기는 서글프고 우스꽝스러울지언정, 진정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는 사랑하는 사람, 그 당사자의 영혼만이 알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신 외에 그 누구도 이 같은 사랑, 아니, 다른 그 어떤 사랑에 대해서도 최종적인 판결을 내릴 수는 없다. (P.64)

 

더불어 아밀리아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꼽추 라이먼과의 사랑을 유지하는 까닭도 해석 가능하다. 그녀는 꼽추를 통해서 사랑을 알게 되었고 사랑을 잃고 싶지 않았다. 후에 꼽추가 마빈 메이시와 함께 집을 떠났을 때도 그녀가 받은 충격은 금전적인 것보다 사랑의 상실이 더욱 컸기에 세상을 거부하였던 것이 아니겠는가.

 

아밀리아는 사랑을 알고 기쁘게 하기 위해 카페를 열었다. 카페에서 사람들은 서로 간에 교류를 함으로써 단조롭고 반복적인 일상을 탈피하여 인간다움의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었다. 카페의 폐쇄는 사랑의 단절과 소통의 부재를 원형처럼 소환하였다. 슬픈 카페의 노래는 열두 명의 쇠사슬에 묶인 죄수들의 노랫소리와 본질적으로 동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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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토리 이야기
민병훈 옮김 / 어문학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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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야 공주 이야기의 원작이라는 표기가 앞표지에 뚜렷하다. 보지는 못했지만 꽤 인기 있는 애니메이션인 듯하다. 하지만 일본 최초의 모노가타리라는 역사성을 지닌 작품이라는 사실이 내게는 더 중요하다.

 

책은 230면의 분량이지만, 후반부에는 일본어 원문을 수록하였고, 부록으로 다케토리 이야기와 관련된 해설과 자료가 실려 있어 실제 한글 번역문은 104면 밖에 되지 않은 짧은 이야기집이라고 하겠다. 부록은 이 작품의 생성과 설화와의 관계, 주목할 만한 의의 등을 소개하고 있어 작품의 심화적 이해에 유용하다. 여러 점에서 이 책은 일반 감상자보다는 학습자를 대상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후대의 모노가타리와 달리 이 작품은 사실성보다는 설화적 요소가 강하다. 노인이 가구야 히메를 발견한 게 대나무 속에서였고, 수개월 만에 쑥쑥 자라서 구혼자가 생길만큼 성장한 점은 친숙한 민담 및 전설 등과 다를 점이 없다. 게다가 끈질긴 구혼자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가구야가 내건 허혼 요건은 더없이 터무니없으며, 이를 달성하려는 다섯 구혼자들의 노력도 판타지와 코믹 요소가 혼재되어 황당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재미를 가져온다. 더욱이 가구야가 원래 있던 달세계로 승천하는 광경은 가히 압권이다. 한마디로 전기소설(傳奇小說)로 분류될 수 있겠다.

 

대다수 모노가타리의 주인공은 남성이다. <오치쿠보 이야기> 정도만 여성 주인공으로 기억될 뿐. 그런데 최초의 모노가타리의 주인공이 여성이며, 그것도 비교적 독립적인 사고방식을 지녔다는 점이 이채롭다. 가쿠야 히메는 노인이 혼인을 언급하자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할 필요성을 오히려 반문한다. 게다가 여성 입장에서 피동적으로 이루어지는 당대 결혼 관습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뿐이 아니라 겨우 구혼자들을 물리쳤더니 임금이 권력의 힘으로 후궁을 삼겠다는 곤란한 형편에 놓여도 이에 굴하지 않는다.

 

그런 후궁 생활은 절대 하지 않을 생각인데, 억지로 후궁 생활을 하게 하신다면 사라져 버리겠습니다. (P.76)

 

이 이야기는 여러 어원(語源) 설화를 담고 있기도 하다. 가구야 히메를 차지하기 위한 다섯 구혼자의 노력은 제각기 헛수고를 하거나 가짜를 만들기도 하는 등의 실패로 끝나게 되는데, 해당 일화 마지막에 이에서 유래한 어원을 소개하고 있다. 동음이의어를 활용하여 마치 와카의 가케고토바를 연상시킨다. 예컨대 (부처의 가짜) 바리때를 버리는 것과 부끄러움을 버리는 뻔뻔함(하지오 스테루)을 연계시키거나 불쥐의 가죽옷을 가짜로 만든 게 탄로나 보람이 없게 된 아베 우대신의 이름을 빗대어 보람 없다(아헤 나시)고 하는 등 해학적 풀이와 연결시키고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례는 일본 최고봉인 후지 산의 어원 풀이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제법 그럴싸한 해석이다.

 

쓰키노 이와가사가 많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산에 오른 일에 연유하여 그 산을 병사로 넘치는 산, 즉 후지산(富士山)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그 불사약과 편지를 태운 연기는 지금도 구름 속으로 피어오르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P.104)

 

가구야 히메는 원래 달나라의 사람이었는데, 잠시 이 세상에 머물다가 달세계로 승천한다. 동화에 나오는 천녀(天女)니 선녀와 같은 설정이다. 그런데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간다는 표현은 단순한 승천의 개념 이상으로 다가온다. 아무리 이 세상에 정들었다 한들 원래 고향과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설레고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가구야는 한숨짓는다.

 

달을 보면 왠지 세상이 허무하게 느껴지고 나도 모르게 슬퍼집니다. 어찌 다른 근심이 있겠습니까. (P.85)

 

부모가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도 그리 기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슬플 따름입니다. 하지만 제 뜻대로 되지 않아 이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P.88)

 

여기서 승천은 귀천(歸天)으로 해석할 여지가 생긴다. 가구야는 꽃다운 젊은 나이에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며, 이것이 승천으로 미화된 것은 아닐까.

 

그런 면에서 <다케토리 이야기>는 슬픈 이야기다. 작중 인물은 모두 실패와 상실을 겪고 슬픔을 맞이한다. 다섯 구혼자와 임금은 가구야 히메를 얻지 못하며, 노인 부부도 애지중지 키운 딸을 달나라로 떠나보낼 수밖에 없다. 주인공인 가구야도 원래의 세계로 가는 게 슬플 따름이다.

 

이야기 곳곳에 산재된 해학적 요소와 배치되는 애잔한 정서감이 묘한 여운을 드리운다. 이것이 단순히 최초의 모노가타리로서의 역사성을 뛰어넘어 현대에도 의미를 지니는 연유가 아닐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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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대령
다니엘 디포 지음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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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 크루소>의 작가 디포의 소설이다. 디포만큼 명성의 빛과 그늘이 두드러지는 작가도 드물 것이다. 어지간한 문학전집과 어린이용 동화전집에도 모두 수록될 만큼 유명한 대표작이 있는 반면 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작품은 전적으로 외면 받고 있으니. 대표작의 위용이 드높은 만큼 읽는 와중에 자연스레 상호 비교 및 대조를 하게 된다.

 

떠돌이 부랑아로 태어나 소매치기로 살았고, 병사가 되었고, 탈영까지 저지른 인간이 바로 나였다. 이 넓은 세상에 안락한 집도 없고, 먹고 살 변변한 직업도 없고, 그저 날 때부터 한 짓이라고는 나쁜 짓거리뿐이었던 인간이 바로 나였다. (P.146)

 

피카레스크 소설 또는 악한소설로 분류되는 장르가 있다. 디포의 경우에는 <몰 플랜더스>가 여기에 속한다. 잭 대령의 전반부는 분명 피카레스크적 성격이 강하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나 일찍부터 생계를 위해 도둑질의 길로 뛰어들어 출중한 실력을 발휘하고 유유상종이라고 비슷한 무리들과 어울려 전형적으로 타락의 나락으로 빠지기 직전의 잭. 여기서 한 가지 피카레스크 소설은 주인공의 나쁜 행위에만 초점을 두고 있지 않다는 점, 주인공이 그러할 수 밖에 없게 되었던 당대 사회 현실에 대한 엄정한 고발도 내포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작가의 대표작 <로빈슨 크루소>는 단순한 모험소설이 아니다. 근대인의 상업과 무역의 요소와 개척자적 정신이 주인공의 삶에 어우러져 있다. 이 요소를 더 극대화한 게 <잭 대령>의 후반에 해당한다. 주인공은 구세계(영국)에서 신세계(아메리카)로 추방되어 밑바닥에서 개과천선하여 성공의 가도를 달리게 된다. 식민지 농장과 유럽과의 교역, 카리브 해의 밀무역 등을 통해 목숨을 담보로 위험천만을 무릅쓰고 막대한 부를 쌓는다.

 

피카레스크 소설의 결말은 대개 비극이다. 인생의 나락에 놓인 주인공이 자신의 어둡고 비참한 일생을 회고하면서 자신의 삶을 본보기삼아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라는 교훈을 남긴다. 반면 잭 대령의 후반기 생은 우여곡절을 겪었음에도 매우 성공적이다. 잘못된 출발을 하였지만 올바른 삶, 적극적인 노력을 통해 생의 행, 불행이 뒤바뀔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 작품을 고리타분한 교훈을 의도한 따분한 소설로 오해할 필요는 없다. 교훈은 던져버리더라도 로빈스 크루소보다 훨씬 극적이고 치열한 삶을 살아가며 당대 사회의 밑바닥과 식민지 농장의 엄혹한 실정을 독자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게다가 그가 벌이는 스페인령과의 밀무역은 품목과 수량, 거래방법 등이 대단히 사실적이어서 새삼 작가인 디포의 풍부한 관련 지식에 놀라게 된다.

 

전반부의 잭 대령이라는 인물은 양면적이다. 그는 스스로를 천성적으로 착한 아이라고 주장하며 무수한 죄악을 범하면서도 이를 무지와 나쁜 환경의 탓이라고 되풀이하여 변호한다.

 

나는 선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고 악의에 대해서도 그 기미조차 몰랐다. 다시 말하자면 내 관점에서 내가 영위하던 삶은 악의가 전혀 없는 삶이었다. (P.52)

 

앞서 말했듯이 배운 게 아무것도 없었던 어린 시절로 말미암아 나는 그저 무지했고, 함께 지내던 아이들의 무디어진 양심과 못된 심성의 영향으로 분별력을 가질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더해서 내 무지는 내가 지금까지 쭉 해온 일들 탓이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나는 양심에 대해 그 어떤 의식도 없었고 일탈 범죄를 저지르는 일에 대해 그 어떤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P.76)

 

이런 그의 태도는 일생에 걸쳐 지속된다. 서두에서 글을 읽고 쓸 줄 안다고 했으면서도 후에 불리한 순간이 오면 글을 읽을 줄 모른다고 발뺌한다. (작가의 의도일까 아니 단순 실수일까?)

특정한 정치적 의식도 갖추지 못한 채 프랑스군 또는 스코틀랜드 군에 합류하여 모국인 영국군에 저항하는 일종의 반역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여러 차례의 실패한 결혼생활도 자신과 무관한 전적으로 운명 또는 부인들의 귀책사유 탓이다. 이 작품 또한 <로빈슨 크루소>와 마찬가지로 남성 중심의 남성소설이다. 그럼에도 전작과는 달리 여성의 비중이 다소 늘어났으며, 국왕의 사면을 받기 위한 장면에서는 전적으로 부인에게 의존하는 주인공의 유약한 면모를 보여준다.

 

한편 잭 대령은 상업과 무역상 영리행위 추구에는 대단히 민감하다. 그는 성공한 농장주로서 농장 경영에 만족하거나 일부 양보하더라도 영국과의 교역으로도 충분한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부의 맹목적 축적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로빈슨 크루소>에서도 일부 드러났듯 상업자본주의의 팽창에 따른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리라. 다만 그것이 바람직한 인간상의 전형으로 제시된 것인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작가는 <로빈슨 크루소>와 마찬가지로 <잭 대령>에서도 종교적 심화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무인도에서 종교적 반성과 참된 신앙회복을 통해 꿋꿋하게 버텼던 것처럼 잭 대령도 지식인 노예와의 대화를 통해 죄와 회개의 의의를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무인도의 로빈슨과는 달리 잭 대령은 종교적 각성이 사고와 행동을 이끄는 지배가치로 자리 잡지 못하였다. 이후에도 그는 잘못된 행위와 그릇된 판단을 무수히 반복한다. 이 점은 전작의 나이브함에 대한 인간성의 복잡 미묘함의 사실적 묘사에 가깝다.

 

이 소설에는 특히 시대를 앞서 간 디포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는데, 농장주의 흑인노예들에 대한 가혹한 처우와 체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다. 후에 잭 대령은 농장관리인이 되고 농장주가 되어서 노예들에게 인도주의적 대우를 해준다. 스토 부인의 소설이 발표되기 백년도 훨씬 전에 작가는 사회적 문제의식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잭 대령의 일생은 로빈슨 크루소보다 훨씬 다채롭고 극적이다. 양 대륙을 넘나들며 종횡무진하게 전개하는 그의 활동과 맞닥뜨리는 각종 사건들. 독자들은 잭 대령의 삶의 여정과 궤적을 뒤따라가기에도 숨이 벅차다. 왠지 작가가 서두르는 기미마저 느껴진다. 방대한 서사를 한 권에 무리하다시피 집어넣다보니 혼란스러움이 생겨난 것은 아닐까.

 

무심하게 전면을 주시하고 있는 천진한 소년 그림의 표지가 인상적이다. 어린 시절의 잭 대령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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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물고기
다니엘 월러스 지음, 장영희 옮김 / 동아시아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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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의 아버지는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P.7)

 

미소 짓는, 신비로운, 신화와 같은, 그리고 알 수 없는 나의 아버지. (P.200)

 

신화는 역사 이전, 인간이 아닌 신들의 이야기다. 신화로서의 아버지는 시간적, 물리적 거리감과 비일상성의 의미를 함축한다. 다름 아닌 아버지를 우리 자신에게서 구분 짓고 분리한다.

 

아버지의 권위 상실과 존재감 박탈은 근대를 거쳐 현대로 오면서 유독 두드러진 현상이다. 이는 아버지의 역할 변화와도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아버지는 더 이상 존경하고 본받을 롤 모델이 아니다. 단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주 수입원에 불과하다.

 

그가 집에 없을 때는 매혹적이고 신비로운 존재였지만 일단 집에 오면 그저 평범한 존재가 되어야 했다. (P.30)

 

작가는 신화가 된 아버지의 삶을 탐구하며 신화를 인간화한다. 에드워드 블룸의 경이로운 탄생, 동물과 이야기를 나누는 비상한 능력, 탁월한 박식함 등. 믿거나말거나 아이들의 성장 과정에서 사소한 일화라도 부모에게는 하나의 신화인 법이다. 거인 카알 길들이기와 거대한 메기에 끌려 호수 밑 세상을 구경하는 대목은 신화와 환상의 절묘한 결합이다. 물론 아이에게 부모는 신과 같은 절대적 존재이며, 부모에게 아이 역시 무한한 전능성을 가졌다는 의미에서 신과 마찬가지다.

 

나는 그것이 내 운명이라고 생각했어. 큰 연못에서 노는 큰 물고기, 그게 바로 내가 원했던 거란다. 처음부터 그랬어. (P.37)

 

어린 시절 장래의 꿈과 희망에 대하여 질문 받을 때 평범한 인생을 갈구하는 아이들은 없다. 누구나 위대한 사람을 꿈꾼다. 반면 아버지에게도 청춘이 있었을까? 그도 한때 청운의 꿈으로 가슴 부푼 시절이 있었을까? 우리는 의심하고 가능성을 일축한다. 우리에게 아버지는 가족 아닌 가족의 구성원, 엉거주춤하게 상석을 점유한 가정 내 이방인인 경우가 잦다.

 

윌리엄이 아버지 에드워드의 삶을 정면으로 인식한 계기는 역설적으로 죽음을 앞둔 아버지를 대면하면서였다. 전에는 그저 타인에 불과하였던 존재, 이제는 바로 옆에서 일상과 어머니를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 그럼에도 무관심할 수 없고 삶의 여정과 가치를 궁금하게 만드는 인물. 그렇기에 작품의 구조는 반복되는 아버지의 죽음 장면을 축으로 아버지의 개인사가 번갈아 현실로 불려온다.

 

이 작품은 에드워드와 아들 윌리엄의 대화와 관계 설정을 통해 일종의 성장소설을 지향한다. 특히 에드워드가 고향 애쉴랜드를 떠나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꿈을 실현하려고 큰 물고기가 되기 위하여 길을 나서나 모두 제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꿈의 찌꺼기만을 남긴 채.

 

고향을 떠나 새로운 도시에 정착하고, 우여곡절 끝에 아내를 얻고 아이를 낳고 직업 생활을 꾸리며 아버지는 살아간다. 힘겹지만 사랑하는 이들과 이따금 누리는 행복을 위안 삼으며. 여기에 아들이 추억하는 아버지와의 단편적 일화들이 삽입된다. 하지만 생활에 매진할수록 아버지는 행복스럽지 않다. 가정이 낯설게 느껴지며 사랑과 애정이 의무와 부담, 그리고 속박으로 다가온다. 에드워드가 작은 마을 스펙터를 통째로 사들이며 즐거움을 느끼는 장면은 꽤 긴 분량을 차지하는데, 일종의 현실도피이자 안타까운 몸부림이라 할만하다.

 

아버지의 대단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행복한 것 같지는 않았다. 엄마도 나도 그리고 분명히 아버지도 행복하지 않았다. 가족이 가족답지 않다는 생각에 차라리 아예 따로 살까 하는 말도 있었다. (P.216)

 

문득 궁금해진다. 모든 이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받고 부귀와 명예를 한 몸에 지닌 한 사람, 임종 무렵 가족으로부터 좋은 남편, 훌륭한 아버지로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의 삶은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반대로 그저 그런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사회적으로도 별달리 두드러진 존재감이 없는 남자가 임종 무렵 가족으로부터 진실로 훌륭한 남편, 좋은 아버지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어떨지를.

 

나는 좋은 아버지였어.” ......

그래요,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예요.” ......

고맙다.” (P.117~118)

 

아들과 아버지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영원히 소원하며 대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일까? 작가는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려고 애쓴다. 진지한 주제를 놓고 아버지와 못다 한 대화를 하고자 노력하는 아들, 반면 아버지는 농담만을 일삼는다. 아버지의 농담은 도피 아니면 거부인가, 또는 삶의 진지함을 정면으로 주시하는 다른 차원의 대응일까? 공고한 신화적 틀을 깨뜨리고 신비의 구름에서 일상의 대지로 하강할 때 아버지와 아들의 바람직한 관계가 이루어질 것임을 우리는 안다, 이성의 도움 없이 직관적으로.

 

나는 내가 아버지를 좀더 잘 알았더라면, 삶을 좀더 함께 보냈더라면, 그리고 그가 내게 그렇게 빌어먹을 완벽한 신비덩어리가 아니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P.261)

 

이 작품은 열린 결말로 끝맺는다. 죽음의 순간 물고기로 변신하는 아버지의 의미는 읽는 이의 자유로운 해석을 요구한다. 물고기를 되찾은 꿈으로 또는 죽음에 대비되는 생명으로 읽을 수 있다. 의무와 속박을 벗어난 자유의 표상으로 이해도 가능하다. 아니면 농담 아버지와 진지 아들 간 화해 불가능의 상징이라고 간주해도 좋다. 실제로 물고기가 되었다고 믿지만 않는다면 별 상관없다. 아니, 어차피 신화라면 물고기가 되었다고 한들 어떠하겠는가.

 

이제까지 나의 아버지는 물고기가 되고 있었다.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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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 자서전 - 세기를 넘는 젊은이들의 인생 교과서
벤자민 프랭클린 지음, 강미경 옮김 / 느낌이있는책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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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프랭클린이 어떤 인물인지 웬만한 사람들은 대개 알고 있다. 아이들의 위인전 전집에도 등장하며, 그의 이름을 딴 유명한 다이어리도 팔리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에 관한 기록물을 남겼다. 그것도 매우 뛰어난 수준으로.

 

아마 내가 그의 자서전을 처음 읽은 것도 중학생 때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범우 사루비아문고라는 청소년 문학시리즈의 한 권인데 제법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난다. 물론 대단한 사람이라는 흐릿한 인상에 남았을 뿐이지만. 제대로 된 프랭클린 자서전을 읽어보고 싶다. 그래서 프랭클린이란 인물이 진정 얼마나 위인인지 진면목을 이제 성숙한 시각에서 알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 책을 펼쳐든다.

 

무엇보다 그의 솔직성이 두드러진다. 그는 자신의 공과를 가감 없이 적는다. 공적은 자랑하지 않고 과오는 숨기지 않고 자기비판한다. 젊은 시절 한때의 방탕과 친구의 아내에 대한 성적 집적거림 등을 보면 그 역시 평범한 젊은이였을 따름이다.

 

이것이야말로 내 인생의 가장 큰 실수였다. 다시 한 번 삶이 주어진다면 절대로 그런 방탕한 생활은 하지 않을 것이다. (P.106)

 

하지만 이건 정말이지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인생에 있어서 또 커다란 잘못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P.111)

 

프랭클린의 훌륭한 인품과 태도는 대부분 후천적이다. 스스로 지켜야 할 덕목들을 선정해서 계획표에 따라 주간, 월간, 연간으로 실행 여부를 관리하는 방식은 훗날 자기계발 유형의 원조 격에 해당할 정도로 효과적이며 선구적이다. 그가 제시한 13가지 덕목들을 언급하는 것은 오늘날도 유효하다. 절제, 침묵, 질서, 결단, 절약, 근면, 진실, 정의, 중용, 청결, 침착, 순결, 겸손. 이 덕목들을 지키고 체화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했으니 그가 후년에 고매한 인품과 덕의 상징으로 추앙받았음은 놀랄 일이 아니다.

 

번개가 전기임을 증명한 과학자로서 유명하지만, 인쇄업자로 출발한 그는 신문발행인이자 당대의 저명한 정치가요 독립운동가인 동시에 사회개혁가이기도 하였다. 현재의 필라델피아 도서관을 설립하고, 소방대와 병원, 대학 설립 등 새롭게 인식한 주요 업적 등은 그의 전인적 풍모를 알게끔 한다.

 

여기서 프랭클린의 생을 뒤쫓으며 시시콜콜 그의 업적을 찬양할 필요는 없으리라. 프랭클린 자신도 그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자랑의 목적으로 자서전을 썼다면 이 책은 당대에 조용히 사멸할 운명에 처해졌을 것이므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변변찮은 교육도 받지 못하고 어릴 때부터 생업 현장에 뛰어든 인물이 훗날 수많은 미국인과 세계인들이 흠모하는 인물이 되었다는 점은 범상하지 않다. 그 과정 속의 근면과 절제, 치열한 분투 등은 당연할 것이며, 보다 완벽한 인격 수양을 위한 노력도 간과할 수 없다.

 

난 건전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언제까지나 간직하겠다고 결심했었다. (P.142)

 

정통적, 보수적인 기독교 교리에 반감을 지니고 있던 그가 타락의 길에 빠져들지 않았던 사유 중 하나는 바로 사고의 건전성에 있었다. 특정 종교에 무관하게 훌륭한 인간으로서의 공통적 자질을 쌓고 지키려고 노력한 건전함 말이다.

 

그는 행운과 요행을 고대하지 않고 자신의 발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성취를 중시하였다. 관념의 허상에서 허우적거리지 않고 일상과 현실의 사회를 개선시키기 위해 고민했다. 건전한 실용주의라 할만하다.

 

인간의 행복이란 어쩌다 생기는 횡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발견하는 소소한 일에 있는 것이다. (P.297)

 

뛰어난 가문 출신 또는 하늘이 내린 천재와 같은 인물들은 비록 외경하고 감탄할망정 존경의 념이 들지 않는다. 좌우를 둘러볼 때 우리와 비슷한 처지인 사람이 각고의 노력(물론 정직하다는 전제로)을 기울여 세상에 큰 족적을 남겼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들을 숭배하고 존경한다. 그것이 얼마나 지난한 여정이었음을 본능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바로 그런 유형의 위인이다. 많은 후대인들이 여전히 실패하면서도 본받으려고 계속 애쓰는 연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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