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대령
다니엘 디포 지음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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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 크루소>의 작가 디포의 소설이다. 디포만큼 명성의 빛과 그늘이 두드러지는 작가도 드물 것이다. 어지간한 문학전집과 어린이용 동화전집에도 모두 수록될 만큼 유명한 대표작이 있는 반면 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작품은 전적으로 외면 받고 있으니. 대표작의 위용이 드높은 만큼 읽는 와중에 자연스레 상호 비교 및 대조를 하게 된다.

 

떠돌이 부랑아로 태어나 소매치기로 살았고, 병사가 되었고, 탈영까지 저지른 인간이 바로 나였다. 이 넓은 세상에 안락한 집도 없고, 먹고 살 변변한 직업도 없고, 그저 날 때부터 한 짓이라고는 나쁜 짓거리뿐이었던 인간이 바로 나였다. (P.146)

 

피카레스크 소설 또는 악한소설로 분류되는 장르가 있다. 디포의 경우에는 <몰 플랜더스>가 여기에 속한다. 잭 대령의 전반부는 분명 피카레스크적 성격이 강하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나 일찍부터 생계를 위해 도둑질의 길로 뛰어들어 출중한 실력을 발휘하고 유유상종이라고 비슷한 무리들과 어울려 전형적으로 타락의 나락으로 빠지기 직전의 잭. 여기서 한 가지 피카레스크 소설은 주인공의 나쁜 행위에만 초점을 두고 있지 않다는 점, 주인공이 그러할 수 밖에 없게 되었던 당대 사회 현실에 대한 엄정한 고발도 내포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작가의 대표작 <로빈슨 크루소>는 단순한 모험소설이 아니다. 근대인의 상업과 무역의 요소와 개척자적 정신이 주인공의 삶에 어우러져 있다. 이 요소를 더 극대화한 게 <잭 대령>의 후반에 해당한다. 주인공은 구세계(영국)에서 신세계(아메리카)로 추방되어 밑바닥에서 개과천선하여 성공의 가도를 달리게 된다. 식민지 농장과 유럽과의 교역, 카리브 해의 밀무역 등을 통해 목숨을 담보로 위험천만을 무릅쓰고 막대한 부를 쌓는다.

 

피카레스크 소설의 결말은 대개 비극이다. 인생의 나락에 놓인 주인공이 자신의 어둡고 비참한 일생을 회고하면서 자신의 삶을 본보기삼아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라는 교훈을 남긴다. 반면 잭 대령의 후반기 생은 우여곡절을 겪었음에도 매우 성공적이다. 잘못된 출발을 하였지만 올바른 삶, 적극적인 노력을 통해 생의 행, 불행이 뒤바뀔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 작품을 고리타분한 교훈을 의도한 따분한 소설로 오해할 필요는 없다. 교훈은 던져버리더라도 로빈스 크루소보다 훨씬 극적이고 치열한 삶을 살아가며 당대 사회의 밑바닥과 식민지 농장의 엄혹한 실정을 독자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게다가 그가 벌이는 스페인령과의 밀무역은 품목과 수량, 거래방법 등이 대단히 사실적이어서 새삼 작가인 디포의 풍부한 관련 지식에 놀라게 된다.

 

전반부의 잭 대령이라는 인물은 양면적이다. 그는 스스로를 천성적으로 착한 아이라고 주장하며 무수한 죄악을 범하면서도 이를 무지와 나쁜 환경의 탓이라고 되풀이하여 변호한다.

 

나는 선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고 악의에 대해서도 그 기미조차 몰랐다. 다시 말하자면 내 관점에서 내가 영위하던 삶은 악의가 전혀 없는 삶이었다. (P.52)

 

앞서 말했듯이 배운 게 아무것도 없었던 어린 시절로 말미암아 나는 그저 무지했고, 함께 지내던 아이들의 무디어진 양심과 못된 심성의 영향으로 분별력을 가질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더해서 내 무지는 내가 지금까지 쭉 해온 일들 탓이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나는 양심에 대해 그 어떤 의식도 없었고 일탈 범죄를 저지르는 일에 대해 그 어떤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P.76)

 

이런 그의 태도는 일생에 걸쳐 지속된다. 서두에서 글을 읽고 쓸 줄 안다고 했으면서도 후에 불리한 순간이 오면 글을 읽을 줄 모른다고 발뺌한다. (작가의 의도일까 아니 단순 실수일까?)

특정한 정치적 의식도 갖추지 못한 채 프랑스군 또는 스코틀랜드 군에 합류하여 모국인 영국군에 저항하는 일종의 반역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여러 차례의 실패한 결혼생활도 자신과 무관한 전적으로 운명 또는 부인들의 귀책사유 탓이다. 이 작품 또한 <로빈슨 크루소>와 마찬가지로 남성 중심의 남성소설이다. 그럼에도 전작과는 달리 여성의 비중이 다소 늘어났으며, 국왕의 사면을 받기 위한 장면에서는 전적으로 부인에게 의존하는 주인공의 유약한 면모를 보여준다.

 

한편 잭 대령은 상업과 무역상 영리행위 추구에는 대단히 민감하다. 그는 성공한 농장주로서 농장 경영에 만족하거나 일부 양보하더라도 영국과의 교역으로도 충분한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부의 맹목적 축적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로빈슨 크루소>에서도 일부 드러났듯 상업자본주의의 팽창에 따른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리라. 다만 그것이 바람직한 인간상의 전형으로 제시된 것인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작가는 <로빈슨 크루소>와 마찬가지로 <잭 대령>에서도 종교적 심화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무인도에서 종교적 반성과 참된 신앙회복을 통해 꿋꿋하게 버텼던 것처럼 잭 대령도 지식인 노예와의 대화를 통해 죄와 회개의 의의를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무인도의 로빈슨과는 달리 잭 대령은 종교적 각성이 사고와 행동을 이끄는 지배가치로 자리 잡지 못하였다. 이후에도 그는 잘못된 행위와 그릇된 판단을 무수히 반복한다. 이 점은 전작의 나이브함에 대한 인간성의 복잡 미묘함의 사실적 묘사에 가깝다.

 

이 소설에는 특히 시대를 앞서 간 디포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는데, 농장주의 흑인노예들에 대한 가혹한 처우와 체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다. 후에 잭 대령은 농장관리인이 되고 농장주가 되어서 노예들에게 인도주의적 대우를 해준다. 스토 부인의 소설이 발표되기 백년도 훨씬 전에 작가는 사회적 문제의식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잭 대령의 일생은 로빈슨 크루소보다 훨씬 다채롭고 극적이다. 양 대륙을 넘나들며 종횡무진하게 전개하는 그의 활동과 맞닥뜨리는 각종 사건들. 독자들은 잭 대령의 삶의 여정과 궤적을 뒤따라가기에도 숨이 벅차다. 왠지 작가가 서두르는 기미마저 느껴진다. 방대한 서사를 한 권에 무리하다시피 집어넣다보니 혼란스러움이 생겨난 것은 아닐까.

 

무심하게 전면을 주시하고 있는 천진한 소년 그림의 표지가 인상적이다. 어린 시절의 잭 대령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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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물고기
다니엘 월러스 지음, 장영희 옮김 / 동아시아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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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는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P.7)

 

미소 짓는, 신비로운, 신화와 같은, 그리고 알 수 없는 나의 아버지. (P.200)

 

신화는 역사 이전, 인간이 아닌 신들의 이야기다. 신화로서의 아버지는 시간적, 물리적 거리감과 비일상성의 의미를 함축한다. 다름 아닌 아버지를 우리 자신에게서 구분 짓고 분리한다.

 

아버지의 권위 상실과 존재감 박탈은 근대를 거쳐 현대로 오면서 유독 두드러진 현상이다. 이는 아버지의 역할 변화와도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아버지는 더 이상 존경하고 본받을 롤 모델이 아니다. 단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주 수입원에 불과하다.

 

그가 집에 없을 때는 매혹적이고 신비로운 존재였지만 일단 집에 오면 그저 평범한 존재가 되어야 했다. (P.30)

 

작가는 신화가 된 아버지의 삶을 탐구하며 신화를 인간화한다. 에드워드 블룸의 경이로운 탄생, 동물과 이야기를 나누는 비상한 능력, 탁월한 박식함 등. 믿거나말거나 아이들의 성장 과정에서 사소한 일화라도 부모에게는 하나의 신화인 법이다. 거인 카알 길들이기와 거대한 메기에 끌려 호수 밑 세상을 구경하는 대목은 신화와 환상의 절묘한 결합이다. 물론 아이에게 부모는 신과 같은 절대적 존재이며, 부모에게 아이 역시 무한한 전능성을 가졌다는 의미에서 신과 마찬가지다.

 

나는 그것이 내 운명이라고 생각했어. 큰 연못에서 노는 큰 물고기, 그게 바로 내가 원했던 거란다. 처음부터 그랬어. (P.37)

 

어린 시절 장래의 꿈과 희망에 대하여 질문 받을 때 평범한 인생을 갈구하는 아이들은 없다. 누구나 위대한 사람을 꿈꾼다. 반면 아버지에게도 청춘이 있었을까? 그도 한때 청운의 꿈으로 가슴 부푼 시절이 있었을까? 우리는 의심하고 가능성을 일축한다. 우리에게 아버지는 가족 아닌 가족의 구성원, 엉거주춤하게 상석을 점유한 가정 내 이방인인 경우가 잦다.

 

윌리엄이 아버지 에드워드의 삶을 정면으로 인식한 계기는 역설적으로 죽음을 앞둔 아버지를 대면하면서였다. 전에는 그저 타인에 불과하였던 존재, 이제는 바로 옆에서 일상과 어머니를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 그럼에도 무관심할 수 없고 삶의 여정과 가치를 궁금하게 만드는 인물. 그렇기에 작품의 구조는 반복되는 아버지의 죽음 장면을 축으로 아버지의 개인사가 번갈아 현실로 불려온다.

 

이 작품은 에드워드와 아들 윌리엄의 대화와 관계 설정을 통해 일종의 성장소설을 지향한다. 특히 에드워드가 고향 애쉴랜드를 떠나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꿈을 실현하려고 큰 물고기가 되기 위하여 길을 나서나 모두 제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꿈의 찌꺼기만을 남긴 채.

 

고향을 떠나 새로운 도시에 정착하고, 우여곡절 끝에 아내를 얻고 아이를 낳고 직업 생활을 꾸리며 아버지는 살아간다. 힘겹지만 사랑하는 이들과 이따금 누리는 행복을 위안 삼으며. 여기에 아들이 추억하는 아버지와의 단편적 일화들이 삽입된다. 하지만 생활에 매진할수록 아버지는 행복스럽지 않다. 가정이 낯설게 느껴지며 사랑과 애정이 의무와 부담, 그리고 속박으로 다가온다. 에드워드가 작은 마을 스펙터를 통째로 사들이며 즐거움을 느끼는 장면은 꽤 긴 분량을 차지하는데, 일종의 현실도피이자 안타까운 몸부림이라 할만하다.

 

아버지의 대단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행복한 것 같지는 않았다. 엄마도 나도 그리고 분명히 아버지도 행복하지 않았다. 가족이 가족답지 않다는 생각에 차라리 아예 따로 살까 하는 말도 있었다. (P.216)

 

문득 궁금해진다. 모든 이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받고 부귀와 명예를 한 몸에 지닌 한 사람, 임종 무렵 가족으로부터 좋은 남편, 훌륭한 아버지로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의 삶은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반대로 그저 그런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사회적으로도 별달리 두드러진 존재감이 없는 남자가 임종 무렵 가족으로부터 진실로 훌륭한 남편, 좋은 아버지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어떨지를.

 

나는 좋은 아버지였어.” ......

그래요,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예요.” ......

고맙다.” (P.117~118)

 

아들과 아버지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영원히 소원하며 대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일까? 작가는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려고 애쓴다. 진지한 주제를 놓고 아버지와 못다 한 대화를 하고자 노력하는 아들, 반면 아버지는 농담만을 일삼는다. 아버지의 농담은 도피 아니면 거부인가, 또는 삶의 진지함을 정면으로 주시하는 다른 차원의 대응일까? 공고한 신화적 틀을 깨뜨리고 신비의 구름에서 일상의 대지로 하강할 때 아버지와 아들의 바람직한 관계가 이루어질 것임을 우리는 안다, 이성의 도움 없이 직관적으로.

 

나는 내가 아버지를 좀더 잘 알았더라면, 삶을 좀더 함께 보냈더라면, 그리고 그가 내게 그렇게 빌어먹을 완벽한 신비덩어리가 아니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P.261)

 

이 작품은 열린 결말로 끝맺는다. 죽음의 순간 물고기로 변신하는 아버지의 의미는 읽는 이의 자유로운 해석을 요구한다. 물고기를 되찾은 꿈으로 또는 죽음에 대비되는 생명으로 읽을 수 있다. 의무와 속박을 벗어난 자유의 표상으로 이해도 가능하다. 아니면 농담 아버지와 진지 아들 간 화해 불가능의 상징이라고 간주해도 좋다. 실제로 물고기가 되었다고 믿지만 않는다면 별 상관없다. 아니, 어차피 신화라면 물고기가 되었다고 한들 어떠하겠는가.

 

이제까지 나의 아버지는 물고기가 되고 있었다.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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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 자서전 - 세기를 넘는 젊은이들의 인생 교과서
벤자민 프랭클린 지음, 강미경 옮김 / 느낌이있는책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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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프랭클린이 어떤 인물인지 웬만한 사람들은 대개 알고 있다. 아이들의 위인전 전집에도 등장하며, 그의 이름을 딴 유명한 다이어리도 팔리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에 관한 기록물을 남겼다. 그것도 매우 뛰어난 수준으로.

 

아마 내가 그의 자서전을 처음 읽은 것도 중학생 때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범우 사루비아문고라는 청소년 문학시리즈의 한 권인데 제법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난다. 물론 대단한 사람이라는 흐릿한 인상에 남았을 뿐이지만. 제대로 된 프랭클린 자서전을 읽어보고 싶다. 그래서 프랭클린이란 인물이 진정 얼마나 위인인지 진면목을 이제 성숙한 시각에서 알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 책을 펼쳐든다.

 

무엇보다 그의 솔직성이 두드러진다. 그는 자신의 공과를 가감 없이 적는다. 공적은 자랑하지 않고 과오는 숨기지 않고 자기비판한다. 젊은 시절 한때의 방탕과 친구의 아내에 대한 성적 집적거림 등을 보면 그 역시 평범한 젊은이였을 따름이다.

 

이것이야말로 내 인생의 가장 큰 실수였다. 다시 한 번 삶이 주어진다면 절대로 그런 방탕한 생활은 하지 않을 것이다. (P.106)

 

하지만 이건 정말이지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인생에 있어서 또 커다란 잘못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P.111)

 

프랭클린의 훌륭한 인품과 태도는 대부분 후천적이다. 스스로 지켜야 할 덕목들을 선정해서 계획표에 따라 주간, 월간, 연간으로 실행 여부를 관리하는 방식은 훗날 자기계발 유형의 원조 격에 해당할 정도로 효과적이며 선구적이다. 그가 제시한 13가지 덕목들을 언급하는 것은 오늘날도 유효하다. 절제, 침묵, 질서, 결단, 절약, 근면, 진실, 정의, 중용, 청결, 침착, 순결, 겸손. 이 덕목들을 지키고 체화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했으니 그가 후년에 고매한 인품과 덕의 상징으로 추앙받았음은 놀랄 일이 아니다.

 

번개가 전기임을 증명한 과학자로서 유명하지만, 인쇄업자로 출발한 그는 신문발행인이자 당대의 저명한 정치가요 독립운동가인 동시에 사회개혁가이기도 하였다. 현재의 필라델피아 도서관을 설립하고, 소방대와 병원, 대학 설립 등 새롭게 인식한 주요 업적 등은 그의 전인적 풍모를 알게끔 한다.

 

여기서 프랭클린의 생을 뒤쫓으며 시시콜콜 그의 업적을 찬양할 필요는 없으리라. 프랭클린 자신도 그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자랑의 목적으로 자서전을 썼다면 이 책은 당대에 조용히 사멸할 운명에 처해졌을 것이므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변변찮은 교육도 받지 못하고 어릴 때부터 생업 현장에 뛰어든 인물이 훗날 수많은 미국인과 세계인들이 흠모하는 인물이 되었다는 점은 범상하지 않다. 그 과정 속의 근면과 절제, 치열한 분투 등은 당연할 것이며, 보다 완벽한 인격 수양을 위한 노력도 간과할 수 없다.

 

난 건전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언제까지나 간직하겠다고 결심했었다. (P.142)

 

정통적, 보수적인 기독교 교리에 반감을 지니고 있던 그가 타락의 길에 빠져들지 않았던 사유 중 하나는 바로 사고의 건전성에 있었다. 특정 종교에 무관하게 훌륭한 인간으로서의 공통적 자질을 쌓고 지키려고 노력한 건전함 말이다.

 

그는 행운과 요행을 고대하지 않고 자신의 발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성취를 중시하였다. 관념의 허상에서 허우적거리지 않고 일상과 현실의 사회를 개선시키기 위해 고민했다. 건전한 실용주의라 할만하다.

 

인간의 행복이란 어쩌다 생기는 횡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발견하는 소소한 일에 있는 것이다. (P.297)

 

뛰어난 가문 출신 또는 하늘이 내린 천재와 같은 인물들은 비록 외경하고 감탄할망정 존경의 념이 들지 않는다. 좌우를 둘러볼 때 우리와 비슷한 처지인 사람이 각고의 노력(물론 정직하다는 전제로)을 기울여 세상에 큰 족적을 남겼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들을 숭배하고 존경한다. 그것이 얼마나 지난한 여정이었음을 본능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바로 그런 유형의 위인이다. 많은 후대인들이 여전히 실패하면서도 본받으려고 계속 애쓰는 연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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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아이 여자아이 - 유치원생에서 고등학생까지
레너드 삭스 지음, 이소영 옮김 / 아침이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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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아이를 둘씩이나 키우는 처지이고 보니 육아가 힘겹게 여겨지는 사례가 자주 있다. 게다가 요즘은 초등학교 4학년인 큰아이와 애엄마가 날카롭게 대립하는 빈도가 증가하여 어찌 처신해야 할지 곤혹스럽기 그지없다. 아내의 의견과 입장을 십분 인정하지만 한창 혈기왕성하고 자유분방한 녀석을 책상머리에 잡아놓고 애엄마가 원하는 학습 수준을 강요하는 장면도 썩 보기 좋지는 않다. 가끔씩 오버랩 되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상기하면 때로는 입맛이 씁쓸하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하다 이 책을 펼쳐든다.

 

저자가 주장하는 요지는 간결 명료하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는 생물학적인 성차가 존재하므로 육아 및 교육 과정에서 이 점을 고려하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일견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새삼 주장하는 게 아닌가 생각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우리네 교육방식과 프로그램이 성적으로 무차별적이고 획일적임을 깨닫게 된다.

 

유치원과 초등학교는 남녀합반이 당연하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대세는 남녀공학으로 바뀌는 추세가 교육적으로 올바른 것인가. 상대방 성에 대한 자연스런 인식과 존중을 가져오며 선의의 경쟁을 유발할 것이라는 막연한 판단은 과학적 근거를 지니고 있지 않다고 저자는 말한다. 오히려 일정 시기까지는 동성들로만 이루어진 교육체계가 교육적으로 바람직하다고 하면서. 시대의 추이에 역행하는 발언이라고 하겠다.

 

임상의학자인 저자는 현재의 남녀공학 교육방식은 남녀평등론자들의 정치적 주장이 반영된 결과일 뿐 교육학적인 진지한 고민이 결여되어 있음을 밝힌다. 수많은 상담사례와 연구결과를 통해 이것이 남녀의 자연스런 성장 상의 차이를 반영하지 못하고 성별 차이에 대한 왜곡된 견해를 부각하고 강화한다는 것이다.

 

어린 남자아이는 손의 미세근육이 아직 발달되지 못하여서 여자아이에 비해서 예쁜 글쓰기에 불리하다. 이를 다그치면 오히려 글쓰기에 저항감을 갖게 된다. 또한 상대적으로 청력이 약하다. 대부분의 여자선생님들이 하듯이 조근 조근한 어투는 주로 뒷자리에 앉은 남자아이들에게 무슨 말인지 들리지 않으니 주의가 산만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언어능력도 늦게 형성되니 영락없이 부진아 또는 부적응아로 비치기 딱 좋다. 놀랍지 않은가!

 

남녀의 성 차이는 호르몬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유전적으로 결정된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여자의 뇌 조직과 남자의 뇌 조직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P.29)

 

단순히 발달과정 상의 늦고 빠름이 아니라 뇌 구조가 자체가 다르다고 한다. 아이나 어른을 불문하고 남자들은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하는데 서투르다. 여자아이가 수학이나 물리에 서투르고 공간 지각 면에서 취약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는 뇌 기능의 차이에 연원하니 무조건 상대방 성을 놀리고 비웃을 것은 아니다. 자연은 남녀의 성역할에 따른 구조와 기능의 차이를 태생적으로 부여한 것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많은 남자아이들이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현실이다. 학교의 규율은 활동적이고 모험적이며 공격 성향을 지닌 남자아이들의 욕구를 억제할 뿐 자연스럽게 발산하지 못하게 한다. 학습능력의 상대적 차이는 성적과 평가의 우등생과 열등생의 구조를 고착화시키며 상대방 성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커녕 질시와 갈등을 확산시킨다. 더구나 나이를 먹음에 따라 이성을 의식하면서 남녀의 전형적인 성역할이 오히려 강화된다고 한다. 여기서 여자아이는 외모에 대한 관심과 집착이 바람직스럽지 못할 정도로 중시된다.

 

모든 아이들은 각자의 개성이 있다. 그러나 각 아이가 독특하고 복잡하다는 사실 때문에 성별이 아동발달에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원칙 중 하나(다른 한 가지 원칙은 나이이다.)라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P.52)

 

이 책에서 소개하는 많은 놀라운 사실들과 인상적인 사례들을 계속 나열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흥미롭지만 효과적이지는 못하다. 중요한 점은 평등이라는 관념에 무의식적으로 사로잡혀 실질상의 차이를 간과하는 것이야말로 그릇된 평등이라는 사실이다. 저자의 주장이 비록 부분적으로 과장되고 침소봉대하는 것일지라도 일정 부분 진실에 가깝다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소중한 우리 아이들을 올바르게 키우는데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학교의 첫 번째 목표는 교육이다. 사회공학은 두 번째이다. (P.156)

 

후반부의 성 문제, 약물중독, 동성애에 관한 사안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네 사회와는 거리가 있을 것으로 치부하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광범위한 학교 흡연, 청소년 산모의 증가 등은 더 이상 남의 문제가 아니다.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게이와 호모라는 단어는 이미 친숙한 용어다.

 

이쯤에서 우리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저자의 견해는 사실 새로운 게 없다. 연령별, 남녀별로 각각의 조언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일반론적일 뿐 절대적 해결방안이 되지 못함을 스스로 인정한다. 다만 남녀의 성차를 제대로 인식하고 인정하며 이를 긍정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가지라고 한다. 때로는 부모의 권위도 올바로 행사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인다. 현대사회로 오면서 가정과 사회가 아이 중심적이 되면서 부모의 권위가 상실되었다고 하며 아이들을 양육하는데 있어 가정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한다. 제아무리 학교에서 제대로 교육하려고 노력하더라도 가정에서 어긋나면 바로잡기 어려운 법이다.

 

부모가 자기 자녀를 훈련시키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그 일을 대신 해주지 않을 것이다. (P.263)

 

육아 관련 많은 책들은 주로 육아의 테크닉을 다룬다. 기존에 읽었던 여러 책들도 마찬가지다. 일단 목표는 동일하다. 우리 아이를 남보다 공부 잘하고 똑똑하게 키우기 위해 어떻게 노력해야 할까.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기본원칙을 재발견하게 하고 있어 참신하다. 우리가 간과하고 있던 육아와 학교교육의 숨은 병폐를 제대로 짚어낸다. 잘난 아이로 키우기는커녕 시름시름 병들어가게 방치하고 있지나 않는지.

 

이 책을 읽고 난 후 육아 방식에 어떤 영향이 있을지 속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명약관화한 일부 사실은 뼈저리게 다가오며 그동안 내가 그것을 무시하거나 간과하였음을 자인할 수밖에 없다. 저자의 일부 견해는 다소 과격하고 급진적으로 보이지만 전체적 맥락에서 볼 때 저자의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정녕 육아는 어려운 과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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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자본론 - 모든 사람이 디자이너가 되는 미래
마스다 무네아키 지음, 이정환 옮김 / 민음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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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자부하는 츠타야 서점은 기실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서점 내에 음반점, 문구점, 때로는 커피점도 입점해 있는 구조는 일본과 우리네가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나머지는 모두 다르다. 도서의 분류 및 배치 방식, 전문적 능력을 갖춘 접객원(concierge)의 존재, 그리고 고객을 배려하는 디자인 등. 더욱이 도서관은 비교할 여지가 전혀 없음을 인정한다.

 

이 책에서 전개되는 저자의 논리 구조는 두 가지 방향이다. 먼저 비즈니스 환경변화에 대한 인식이다. 단순히 플랫폼만 제공하는 단계를 넘어서 소위 서드 스테이지라고 해서 고객의 라이프 스타일을 제안하는 단계라고 본다. 따라서 디자인이 매우 중시된다. 또 하나는 비즈니스의 지향점이다. 저자는 고객가치의 제고를 최우선시 한다. 판매자, 관리자의 시각이 아니라 고객의 가치와 행복을 늘리는 고객의 관점. 다이칸야마 츠타야 서점과 다케오 시립도서관이 획기적이면서도 생경하지 않은 점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게다가 편안함을 자아내는 휴먼 스케일도.

 

기획은 이 두 가지를 결합시키는 행위다. 즉 고객 가치를 제고하는 제안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기획이며 기획의 가치가 여기에 있다. 기획가는 곧 디자이너다. 따라서 기획은 고객이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에서 수립되어야 하며, 현장과 유리된 기획은 어불성설이다.

 

디자인은 가시화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디자인은 결국 제안과 같은 말이다. (P.50)

 

모든 사람이 디자이너가 되는 미래가 이 책의 부제다. 모든 사람이 디자이너가 된다고? 왠지 거부감이 드는 문구다. 모든 사람이 기획과 디자인 능력을 갖춘다면 좋은 일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디자이너가 아니라면, 기획 능력이 부족하다면 시대의 추세에 낙오되는 열등한 부류의 인간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책표지를 찬찬히 살펴보니, 원래의 부제는 조금 다르다. ‘모든 기업이 디자이너집단이 되는 미래’. 비슷하지만 뉘앙스가 다르다. 무엇보다도 주체가 다르다. 개인이 아닌 기업. 비즈니스를 영위하는 기업이라면 당연히 디자이너기업이 될 필요가 있다. 저자의 말마따나 지적 자본의 축적 여부가 기업의 사활을 좌우할 것이므로.

 

따라서 기업은 모두 디자이너 집단이 되어야 한다. 그러지 못한 기업은 앞으로의 비즈니스에서 성공을 거둘 순 없다. (P.41)

 

각설하고 CCC의 주력사업인 도서, 음반, 영상물 및 전자제품 등 유통은 오프라인이 쇠퇴하는 산업분야다. 제아무리 디자인과 고객가치를 외쳐본들 한물간 꽁무니를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차라리 대세인 온라인에 매진하는 게 보다 현명하며 수익성에서도 유리하지 않겠는가. 저자는 이렇게 밝힌다. 현실세계와 가상공간은 각기 장단점이 있으며, 현실세계는 즉시성과 직접성이라는 측면에서 우위에 있다는 점, 사람을 배려하는 편안함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온라인도 병행하지만 결코 오프라인의 미덕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이런 유형의 책은 저자의 성공담과 철학을 소개하는 외에 대개 독자를 향한 메시지도 던지는데, 저자의 당부는 자유 개념에서 두드러진다. 저자는 자유를 독특하게 개념 짓는다. 자유란 마음대로로 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으로 이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본다. 본능과 충동의 굴레에서 벗어나 이성과 목표에 충실한 삶의 태도.

 

어쩌면 다케오 시립도서관의 방문객 수, 츠타야 서점의 매장 수, T-포인트 회원 수 같은 계량화된 지표는 별 의미가 없다. 우리들이 마스다 무네아키의 경영철학과 CCC의 성공신화에 반드시 주목할 필요도 없다. 책장을 덮고 훌쩍 다이칸야마로, 하코다테로 아니면 다케오시로 떠나서 우리 자신의 눈과 몸과 마음으로 둘러보면 충분할 것이다. 고객가치라는 거창한 표현도 불필요하다. 이용객들로 활기찬 구내, 깨닫지 못한 라이프 스타일의 신선한 제안, 심신을 편안하게 만드는 디자인 등을 목도하면 모든 것을 알아차리지 않겠는가. 불현 듯 그곳에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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