랄프 왈도 에머슨 : 자연 위대한 생각 시리즈 3
랄프 왈도 에머슨 지음, 서동석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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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1. 자연

2. 자립

3. 보상

4. 경험

5. 운명

 

에머슨의 책을 다시금 꺼내든 이유는 제대로 확인해보고 싶어서였다. 애초 만만하게 시작했던 에머슨이 의외로 까다로워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었다. 특히 <자연론>. 덕분에 그의 글을 여러 번 읽은 점은 소득이지만 과연 제대로 읽어낸 점이 맞는지 그의 글이 실제로 난해한 지 여부를 정말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 면에서 결과적으로 에머슨 전공자가 번역하고 가장 최근에 출간된 이 책은 상당한 만족감을 주었다. 내용면에서 내가 이해한 개요가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주었으며, 가독성 측면에서는 에머슨의 글이 철학적이고 난해한 용어와 표현을 굳이 사용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용어에 관해서라면 심령영혼으로, ‘영혼정신으로 달리 번역하는 등 다른 곳과 차별성을 보이고 있는데, 통상적인 어휘가 사용되어 이해의 용이성에서는 유리하다.

 

이미 그의 글을 읽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옮긴이의 번역이 매끄러운 연유인지 알 수 없지만 그의 <자연>을 읽어나가는데 별다른 어려움과 걸림돌 없이 책장을 술술 넘길 수 있었다는 점은 무척이나 고무적이다. 에머슨을 처음 대하는 독자라면 일순위로 이 책을 권할 만하다.

 

에머슨의 논의는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이 순수한 영혼으로 자연과 교감을 갖고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 오성과 함께 이성을 갖고 인간 자신과 자연을 대할 때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정립될 수 있다. 이것이 마지막 장 전망에서 에머슨이 청자에게, 독자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아니었을까?

 

자신감또는 자기신뢰로 번역되곤 하는 <자립(Self-Reliance)><자연>과 마찬가지다. 불경에 나오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로 요지를 대변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믿는 것, 자신의 마음 속에서 자기에게 옳은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도 옳다고 믿는 것, 그것이 천재이다. 그대의 내면에 깃든 신념을 말하라. 그러면 그것은 보편적 의미가 될 것이다. (P.90)

 

위대한 사람은 바로 많은 사람들 한가운데에서도 참으로 부드럽게 고독의 독립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P.98)

 

에머슨은 교회에서 목사의 설교와 신도의 기도에서 현세 또는 내세에서의 보상을 갈구하는 경향에 매우 비판적이다. 만물은 양극성과 이원성을 띠고 있다. 동양의 음양론과 같은 이치다. 그리고 양자 간에는 종국적인 균형의 추가 작용한다.

 

모든 행위는 양면에서-첫째로는 그 자체, 즉 실제 본질에서, 둘째로는 그 상황 속에서, 즉 눈에 보이는 외면적 성질에서-보상되어, 말하자면 완전해진다. (P.147)

 

<보상>은 인생에는 항상 대가가 따른다는 점을 설파한다. 순간적인 이익과 쾌락은 이후 균형을 유지하는 뼈저린 의무와 보상을 치르게 된다. 속임수도 마찬가지다. 개인마다 천부의 재능은 획일적이지 않다. 장점은 겸손하게 이를 보전하고 계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단점은 겸허하게 인정하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현명한 자는 자신을 적에게 내던지는 법이다. 약점을 발견하는 것은 적의 이익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이익이다. (P.162)

 

보상 원칙의 배후에는 영혼의 본성에 대한 신뢰가 깔려 있다. 만물은 고립되고 단절된 것이 아니라 상호 연결되어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남의 이익과 나의 손해, 나의 장점과 남의 단점이 일방적인 우열 관계에 놓여 있지 않다. 나와 남, 나의 것과 그의 것은 상이하고 배척되지 않는다. 에머슨은 여기에서 사랑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통합을 시도한다.

 

에머슨은 인생이 충동적이며 예측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경험>에서 주장한다. 자연은 고착되기를 거부한다. 고착과 정체는 곧 생명의 반대를 의미한다. 그렇기에 아이의 죽음이 저자에게 가져다 준 슬픔과 충격이 시간의 추이에 따라 희미해져 가는 현상은 사뭇 당연한 것이다.

 

삶은 지적이거나 비평적인 것이 아니라 억센 현실이다. (P.189)

 

하나의 경험에 매달려 과거에 얽매여 있는 것은 자연의 본성에 어긋난다. 자연은 무한한 다양성과 끝없는 변화를 추구한다. 현실에 충실한 모습을 자연은 좋아한다. 거기에서 사람은 행복을 느낀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삶의 행복은 거창한 데 있지 않고 일상의 소소함에서 비롯됨을.

 

극단의 행복과 불행은 존재하지 않으며, 찰나의 순간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앞서 보았던 균형과 보상의 원칙이 곧 작동하기 시작한다. 행과 불행, 슬픔과 기쁨에서 중용의 자세를 가지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한편 마지막 수록작인 <운명>은 두 권의 에세이집에 실린 글이 아니다. 1860년에 발표된 <The Conduct of Life>(삶의 행위 또는 처세론)에 수록된 글 중 하나이다. 따라서 초기와 중기의 에머슨이 아닌 후기 에머슨 사상을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운명이라고 부르는, 자연 전체를 관류하는 요소는 우리에게 한계로 알려져 있다. 우리를 제한하는 모든 것을 우리는 운명이라고 부른다. (P.236)

 

이 글은 일견 <보상>의 확장편이라고 하겠다. 인생과 자연의 양극성과 균형의 원칙을 에머슨은 인간의 운명에도 적용한다. 우리는 종종 팔자 내지 숙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현재 내게 지워진 삶의 굴레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므로 이를 감내하고 순응하며 살 수 밖에 없다는 자포자기적 삶의 태도다.

 

에머슨의 운명은 이러한 태도에 반기를 든다. 생명을 지닌 자연의 일 존재로서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갖고 있음을 선언한다. 생명력은 자체의 본능과 원리에 따라 억압을 거부한다. 운명은 절대적이므로 완전한 회피는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운명의 거미줄이 심신을 완전히 휘감기 전에 안간힘을 쓴다면 부분적이지만 속박에서 벗어날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은 치열한 자유와 저항 정신으로만 가능하다.

 

운명은 개선을 포함한다. (P.251)

 

운명에 대한 해법으로 에머슨은 이중 의식의 개념을 제안한다. 그것은 만물의 연관성 내지 상호 의존 관계에 대한 인식에 기초한다. 운명에 맞닥뜨리면 그대로 주저앉아 좌절과 절망에 포기하지 말고 자연의 법칙과 보상의 원칙을 상기하자. 아울러 운명을 회피할 수 없다면 그 타격에 함몰되지 말고 훌훌 털고 일어나 다시금 새로이 출발하는 정신, 그것이 곧 이중 의식이다. 이는 생소한 개념이 아니라 에머슨이 과거부터 단편적으로 언급하고 논의하던 내용을 다듬어서 정리한 것이다.

 

<운명>은 본문을 읽을 때는 무슨 의미인지 금방 와 닿지가 않았는데, 역자 해설을 읽고서 비로소 대강의 뜻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에머슨의 사상을 간명하면서 핵심적으로 짚어내는 점에서 확실히 전공자의 내공을 알게 된다.

 

역자에 따르면 에머슨 철학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에머슨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에머슨의 철학이 관념의 철학이 아니라 삶의 철학이기 때문이다......에머슨을 단편적으로 보고 판단하면 그를 온전히 평가할 수 없다. 에머슨은 삶을 총체적으로 보고 있다. (P.267)

 

이제 에머슨과 떠나는 시점에서 그의 사상을 반추해 본다. 다양성과 통일성, 자기신뢰에 기반한 자립정신, 자연과 영혼의 대응과 보편적 영혼으로서의 초령, 보상의 원칙과 현재중심 주의 등. 그의 사고는 서양 고전과 기독교를 바탕으로 하여 인도, 페르시아와 중국의 종교와 철학까지도 아우르는 폭넓은 사상적 맥락을 근거로 삼고 있다.

 

그의 사상이 현재까지도 공명을 갖는 연유는 물질문명의 시대에 인간이 주체성을 지니고 영위하는 삶의 자세를 절묘하게 설파하고 있어서이다. 문명과 과학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왜소해지고 파편화된다. 인간이 능동태가 되지 못하고 피동체로 전락하는 상황에서 더구나 인간에 의한 자연 파괴가 가속화되는 시점에서 극단성을 배제하고 영혼과 자연의 교감과 균형을 중시하는 그의 태도는 생태학적 인식과도 상통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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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 왈도 에머슨 19세기 미국명시 2
랄프 왈도 에머슨 지음, 김천봉 옮김 / 이담북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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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머슨은 사상가이자 에세이스트 못지않게 당대의 저명한 시인이기도 하였다. 시인 에머슨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시 선집이 최초로 출간되었다. 영국과 미국 명시를 연달아 번역 출간하고 있는 김천봉의 스타일답게 짤막한 작가소개 겸 해설에 이어 주석조차 거의 덧붙이지 않은 시들이 영한 대역으로 수록되어 있다. 영한 대역을 실은 친절함에 가점, 원문과 번역문만 덩그러니 실어놓은 불친절함에는 감점. 군더더기 없이 작품 자체에 몰입하라는 좋은 의도로 해석하고 싶다.

 

시인은 보잘것없는 사물도 찬양하고 비천한 것들도 고양할 수 있어야 하고, 자연의 양극성을 조화시켜 다양성 속에서 통일을 추구해야 하며, 낡은 사상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고 새로운 사상을 고취시켜야 하고 인간과 우주의 관계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P.12)

 

앞의 해설 부분에 에머슨의 시론이 소개되어 있는데, 참고할 데 없는 독자에게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큰 도움이 된다. 본문에는 총 25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각자와 모두>는 개인과 전체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비단 이 작품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에머슨 시는 자신의 사상을 시 형태로 변환한 성격을 띠고 있다. 따라서 도덕적, 교훈적 어조가 강하게 드러나는 점은 특징인 동시에 단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여기서 시인은 새둥지와 조개껍질을 집으로 가져왔지만 더 이상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새와 조개는 자연 속에 함께 존재하고 어울려야 비로소 전체의 아름다운 일원이 될 수 있다. 실망한 시인이 탄식하는 순간 생생하게 살아있는 자연이 완전한 전체의 모습으로 바로 자신 곁에 있음을 깨닫는다.

 

그대 역시 모른다, 그대의 삶이

그대 이웃의 신조에 어떤 변수를 덧붙였는지.

모두는 각자에게 필요하다.

홀로 바르거나 선한 것은 없다. (P.15)

 

에머슨은 인도와 동양 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에머슨의 초령 개념도 순전히 독자적이기 보다는 특히 인도 철학과 연관성을 맺고 있다. 그런 에머슨의 일면을 이 <브라마>에서 보게 된다. 현상의 양극성과 이중성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일희일비하지 않으며 중도를 택할 것이다. 그것이 시인이 말하는 저 미묘한 길”(P.23)이 아닐런지.

 

먼 것도 잊힌 것도 내게는 가깝고,

그림자와 햇빛은 같은 것이다.

사라진 신들이 나에게 나타나고,

치욕도 명성도 나에게는 하나다. (P.23)

 

<사랑에게 다 주어라>는 시인으로서는 드물게 보는 순수시에 가깝다. 모든 것을 사랑에게 맡기라는 시인의 외침은 역설적으로 그러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질책으로 다가온다. 무엇보다 사랑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대목이 와 닿는다.

 

사랑은 비열한들을 위한 게 아니었다.

사랑은 굳센 용기를 요한다. (P.29)

 

<문제>는 자신의 종교적, 사상적 입장을 피력한 작품으로서 비교적 장시에 속한다. 목사직을 그만둔 이후 서양과 동양의 사상과 철학을 접목하여 독특한 초령 사상을 주창한다. 그는 기독교에 대한 믿음이 아무리 깊다 해도 두건 쓴 성직자와 선한 주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술회한다. 고대 그리스의 제신, 견자들과 무녀들의 말은 동일하게 성령의 말씀이므로.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밝힌다.

 

성령이 강조한 한 말씀

무관심한 세상이지만 길을 잃지는 않았다. (P.41)

 

<콩코드 찬가>는 명성에 비해서는 평범하다. 독립전쟁기념비 낙성식을 위한 시로서 자유를 찾아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 싸운 조상들을 기리고 있다.

 

에머슨의 정치관은 <정치>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교회가 사회적 가치일 때,

의사당이 따듯한 난로일 때,

그때라야 완전한 나라가 탄생한다.

공화국이 편안히 자리 잡는다. (P.55)

 

시인은 공포, 술책과 탐욕은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없다고 단언한다. 당대 미국의 정치 현실이 어떤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시인의 실망과 분개가 여실히 느껴진다. 이는 단순히 머나먼 남의 나라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세계-정신>은 맨 뒤의 <숲의 선율>을 제외하면 이 선집에서 가장 긴 시에 해당한다. 에머슨이 생각한 세계-정신은 무엇일지 궁금하다. 첫 번째 연과 두 번째 이하 연의 대조를 통해 독자는 시인이 자연을 예찬하고 도시와 문명사회에 비판적임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메마르고 삭막한 도시에서도 자연은 경이를 포기하지 않는다.

 

어김없는 아침은

지하실에 있는 이들을 찾아내고,

필시 만물을 사랑하는 자연은

어느 공장에서 미소하리라. (P.61)

 

이 시의 후반부에서 서술하는 문장의 주체인 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앞서 운명이 언급되고 다음 문장에서 인내심 강한 그 악의 화신”(P.65)이 등장하므로 운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파악되는데, 올바른 이해인지 자신이 없다. 이럴 때 친절한 해설이 그리워진다.

 

낡은 세상이 메마르고

시대가 활력을 잃으면,

그가 파괴의 잔해와 앙금으로부터

더욱 아름다운 세상을 완성해주리라. (P.69)

 

그의 존재의 정체성이 어찌하든 그는 낡은 세상을 새로이 하는 역할을 맡을 것으로 시인은 기대를 품는다.

 

이하 몇 편의 단시들도 여전히 사상가-시인의 철학이 스며들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화>는 산의 비난에 응대하는 다람쥐의 어투가 자못 당돌하다.

 

재능이 다를 뿐, 만물이 적절히 슬기롭게 어우러져 있어. (P.73)

 

자연과 세계의 아름다움은 누구나 끄덕일만한 글자 그대로의 아름다운 대상에만 깃들어 있지 않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시인이라면 범인들이 알아차리지 못한 세상의 숨어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추하고 더러운 사물과 현상들 사이에서. 그래서 시인은 노래가 아주 음험하고 야비한 것들”(P.77)사물들의 찌꺼기에도 더껑이”(P.79)에도 배어 있다고 <음악>에서 노래한다.

 

에머슨이 아서왕 신화 속의 멀린에 관심을 가진 연유는 알 수 없다. 멀린은 신화 속에서 아서왕과 왕국을 융성케 한 존재인 동시에 아서왕과 다소간 거리를 두고 있어 일부에서는 부정적으로도 평가받는 마법사다. 에머슨은 <멀린><멀린의 노래>에서 마법사 멀린을 되살린다. 친숙하면서도 낯선 모습으로. 그런데 에머슨의 멀린은 단순한 마법사가 아니다. 마법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시인으로 변신한다. 진정한 시인, 독자를 단숨에 사로잡는 강력한 시인의 모습과 단숨에 드높은 곳으로 솟구쳐 핵심으로 진입할 수 있는 시의 자세, 그것은 에머슨이 마음에 품은 시인과 시의 이상이리라.

 

왕의 시인으로서

현들을 거칠게 맹렬하게 쳐야만 하리라, (P.85)

 

언제나 곧바로 솟구쳐

시의 정상에 이르리라. (P.87)

 

멀린의 강력한 시구,

자연의 극단들을 조화시키고,

폭군의 의지를 꺾고,

사자도 온순하게 길들였나니. (P.91)

 

천저 바닥에 친정 꼭대기까지

드높이 날아오를 수 있는 새,

뮤즈의 치솟는 궤도에 올라

단숨에 여정을 넘어서리라! (P.91) (<멀린>에서)

 

나직이 불러도 드높이 불러도,

강자들보다도 더 강력한 노래,

오만한 자들을 벌하는 노래를. (P.95, <멀린의 노래>에서)

 

한편 각박한 도시와 근대문명에 대한 시인의 거부감, 그리고 역으로 자연의 순수성과 미에 대한 편애는 아래 시들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잘 있어라>는 오만한 세계에 작별을 고하고 숲속의 따뜻한 자신의 집으로 가겠다고 선언한다. 일종의 귀거래사라고 하겠다.

 

속된 발이 전혀 밟아보지 못한 곳,

사색에도 신에게도 신성한 곳으로.

......

인간의 지식과 긍지, 궤변학파들,

박식한 도당을 한껏 비웃어 주리라. (P.101)

 

시인은 집과 정원과 숲이면 더 이상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고 <월든>에서 말한다. 월든 호수가 어디던가? 소로의 명작이 탄생한 곳이다. 그곳은 또한 에머슨의 정원이기도 하다. 자신의 정원에 대한 시인의 자부심은 <나의 정원>에서 볼 수 있듯이 대단하다.

 

나의 숲에 노래 옷 입혀 거기서 누리는

즐거운 일들 전해줄 수 있다면,

뭇 사람들이 내 정원에 모여들어

도시들이 텅텅 비련만, (P.115)

 

화창한 봄날, 아름다운 정원 산책은 도시의 지루하고 칙칙한 학교 따위에 도저히 비할 수 없다(<사월>). 그러면서 시인은 독자와 지인에게 양해를 구한다. 자신이 숲속을 헤매고 게으름을 피우는 일상이 사실은 자연 속에 깃든 비밀과 신의 지혜를 알아내어 우리에 전해주고자 하는 노력의 소산임을.

 

숲의 신을 찾아 뵙고 그의 말씀

가져와 인류에게 전해주려 함이니,

......

하늘에 떠간 구름 조각 하나하나가

편지를 써주어 내 책에 담았나니.

......

내 손에 들린 과꽃 송이마다

생각 하나씩 싣고 집에 가는 길이니. (P.103, <변명>에서)

 

인간들은 자부한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며, 자연의 지배자라고. 한없는 오만은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까지도 망친다. 시인의 눈에 비친 인간의 우쭐거림은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하루살이의 팔랑거림 또는 하룻강아지의 성마른 깨갱 소리와 다를 바 없다. 인간 속에 깃든 자연의 의미를 발견하는 게 곧 신과 조우하는 길임을 아는 시인은 마음이 급할 뿐이다.

 

가장 인간적인 것도 인간의 것이 아니라,

철에 또 돌에 깃든 원자들에게서 빌려왔을 뿐이고,

인간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예술작품들에 담긴

대가의 솜씨도 여전히 자연의 요소일 따름이다. (P.139, <자연>에서)

 

숲의 속삭임, 새의 지절거림은 우리에게 자연의 지혜를 알려주지만 귀가 어두운 인간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우리가 그 숲의 선율을 들을 수만 있다면, 모두가 시인이 되어 순수한 심령을 지니고 자연과 일체가 될 것이다. 신에 가까운 행복을 누릴 수 있을 터이다.

 

신들을 담아내고, 하나의 의미,

다양한 음색을 지닌 기적 같은 시,

그런 시들은 자기 집에 갇힌 인간에게

신들의 삶터에 깃든 행복을 노래한다. (P.121, <나의 정원>에서)

 

<숲의 선율>은 수록된 작품 중 가장 긴 장시인데, 자연과의 교감을 홀로 즐기는 시인에 대한 찬미가다.

 

살아있는 만물의 연인,

마주치는 모든 것에 경탄하는 사람,

무엇보다도 스스로 경탄하는 사람, (P.143)

 

시인의 본질은 만물을 사랑하고 경탄하는 사람이다. 시인은 견자이며, 음유시인, 예언자이자 찬미자다. 그것이 시인의 역할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다른 명칭은 현명한 순례자이자 철학자인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있었다, 숲속의 견자,

자연의 사계를 노래하는 음유시인,

봄 유전형질들의 예언자,

천물절기의 운행을 미리 알려주는 현자,

산골짝들이 전하는 갖가지 기쁨을

가슴으로 알았던 진실한 찬미자가. (P.145)

 

어느덧 마지막 시에 이르렀다. <>는 시인의 유언이다. 자신이 후세에 기억되기를 바라는 개인적 면모와 함께 세상의 교화와 개선에 대한 한 가닥 미련을 포기 못하는 시인이 안타깝기도 하다.

 

아 각자가 자기만의 온순하고 청렴한

의지에 따라서 세상에 꿋꿋이 맞설 수 있는

정신들의 친교가 바로 천국 아닐까? (P.159)

 

독자의 감성에 직접적으로 소구하는 문학 형식이 기본적으로 시라고 생각한다. 감성을 일체 배제하면 더 이상 시가 될 수 없지만, 감성의 비율을 줄이고 이성의 비중을 늘리면 소위 지적인 시가 될 수 있다. 이미 읽은 시인들 중에서 에머슨만큼 지성의 비중이 높은 시인이 있었던가? 상기해 보아도 텅 빈 메아리만 울린다. 블레이크와 번즈는커녕 워즈워스와 콜리지조차도 상대적으로 감성과 이성이 비교적 균형을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에머슨의 시는 칙칙하고 따분하지 않다. 자칫 사상 면이 강조되기 쉬운 교훈적, 계몽적 입장이지만 간결하면서 재치 있는 표현, 심오한 지혜를 담고 있는 듯 엄숙하지만 심각하지 않은 문구, 참된 길을 알지 못하는 답답한 현실을 향한 투정어린 한줄기 비판 등은 그의 시에 따스한 혈액이 흐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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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구) 문지 스펙트럼 2
랠프 왈도 에머슨 지음, 신문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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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수록 작품>

1. 자연

2. 미국의 학자

3. 초령(超靈)

4. 경험

 

에머슨의 저작집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일찍이 출판된 책 중 하나다. 최근 에머슨의 잇따른 출판 행렬은 일종의 처세철학의 시각에 국한된 것이므로 순전한 에세이스트로서 미국 초기의 사상적 지도자로서의 에머슨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좋은 기획이다. 특히나 <미국의 학자>는 이 책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이하에서는 읽은 순서에 따른다.

 

1. 미국의 학자

 

미국의 지적 독립선언으로 일컬어지는 역사적 의의가 있는 글이다. 정치적 독립을 이루어냈지만 문화와 사상 면으로는 여전히 유럽에 종속되어 있는 미국의 지성인들에 각성과 분발을 촉구하고 있다. ‘생각하는 사람’(Man Thinking)이기를 그만두는 학자는 그저 남의 생각을 흉내 내는 앵무새에 불과하다고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어디 미국뿐이겠는가? 주체적 사고 없이 소위 선진국의 문물이라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국가, 사회, 개인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다.

 

참다운 학자를 교육하는 도구로서 에머슨은 자연, , 그리고 행동을 언급한다. 인간과 자연은 동일한 근원에서 나왔고 자연은 심령의 대응물이다. 따라서 자연과 자연의 법칙은 곧 자신과 자신의 정신의 법칙이라는 원리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 대목은 그의 사상의 지속적이며 핵심적인 부분으로서 다른 글들에도 반복적으로 회자된다.

 

책은 과거의 영향 중에서 최상의 형태이다 (P.102)

 

에머슨은 책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그러면서도 책에 함몰되는 것을 경계한다. 단순한 책벌레는 피하라는 것이다. 독서는 자신의 사상을 심화하고 발현하는 도구로서 가치를 지닌다.

 

책은 오로지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써만 쓸모가 있는 것이다. (P.104)

 

책을 바르게 읽기 위해서는 창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창조적인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창조적인 독서가 필요한 것이다. (P.108)

 

행동 없는 학자는 창백한 지성인이자 역사의 비겁자로 전락하고 만다. “행동이 없으면 사상은 숙성하여 진리가 되지 못한다.”(P.110). 에머슨에 따르면 사고는 부분적 행위에 불과하며, 행동과 결합해야 총체적 행위가 된다.

 

학자의 책무는 사람들에게 현상 가운데에서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고양시키고, 분발시키고, 지도하는 데 있다. (P.115)

 

대중이 언제나 학자와 진리를 이해해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학자는 외압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투명한 정신으로 영혼의 근원을 탐구한 후 철저히 자기 신뢰를 해야 한다. 그래서 학자는 자유롭고 용감해야 한다.”(P.119).

 

이 글의 마지막 대목은 웅변적이며 자못 계시적이다. 감정의 고조를 이끌어내는 강연이나 연설의 말미로서는 훌륭하지만 이렇게 글로 읽으면 조금 당혹스럽다.

 

에머슨의 사상에 따르면 자연과 인간은 동일한 법칙에 연원한다. 우주와 세상을 올바로 이해하고 싶다면 무엇보다도 인간 자신의 내면에 대한 탐구를 할 필요가 있다. 이 매우 중대하면서도 미지의 영역에 미국의 학자들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끝을 맺는다.

 

2. 초령

 

1 에세이집에 수록된 글이다. 초령은 영어의 over-soul을 번역한 어휘다. ‘초영혼또는 대령(大靈)’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초령 개념은 에머슨의 사상 전반을 관통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에머슨은 기본적으로 외면보다는 내면을 중시한다. 인간이란 존재의 외양은 그에게 있어 심령이 작용하는 기관에 불과하다고 본다.

 

인간을 신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작동시키는 원리, 그것이 곧 심령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존재하며 자체로 고유하며 자율적으로 기능한다. 심령은 개개인마다 상이하지만 한편으로 보편성을 지닌다. 즉 심령마다 존재하는 공통적인 본성이 초령이다. 초령과 심령은 통일성과 다양성의 관계를 지닌다. 초령을 통해서 인간은 개체로서의 독립성과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집단성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얻게 된다.

 

인간의 심중에는 만유의 심령, 현명한 침묵, 모든 부분과 분자가 균등하게 상호 연관되어 있는 보편적 미, 혹은 저 영원한 하나가 들어 있다. 우리가 그 속에서 존재하고, 그 모든 지복을 우리에게 허용하는 이 심원한 힘은 어느 순간에나 자족적이고 완전할 뿐만 아니라, 보는 작용과 보이는 것, 보는 주체와 객체, 주관과 객관이 하나로 합치된 것이다. (P.137)

 

그리고 에머슨은 초령을 신과 동일시한다. 그의 초령 개념이 통상적인 관념과 철학 체계와 달리 종교적 성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연유다.

 

그 제삼자 혹은 공통적인 본성은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몰인간적인 것이다. 곧 신 자체이다. (P.146)

 

심령은 초령과 인간을 연결하는 중계적 위치에 있다. 우리는 심령을 통해서 공통의 보편성의 일단을 접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근원적 진리의 단편이 이따금씩 찰나적으로 드러날 때 우리는 그것을 계시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인다. 에머슨은 따라서 심령을 진리의 인식자이자 계시자(P.148)로 파악한다.

 

자신의 내면이 황량하고 공허하지 않음을 깨달을 때 우리의 순수한 본성이 우주적 통일성과 잇닿아 있음을 자각할 때 우리는 본성이 더럽혀지는 것을 막고자 노력할 것이며 자신의 심령에 대한 신뢰의 끈을 놓지 않게 된다. 이처럼 자기 신뢰의 주장은 초령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3. 경험

 

이 글은 에머슨의 제2 에세이집에 수록되었다. 어린 아들의 죽음을 겪은 후 자신의 감정을 뿌리에서부터 되짚어보고 있다.

 

아이의 죽음은 글자 그대로 그에게 커다란 슬픔과 충격을 안겨주었다.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시간의 경과에 따라 슬픔의 그림자는 희미하게 퇴색하고 얼마 후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상으로 복귀한다. 고통과 비애에 잠겨 삶과 죽음의 비극적 역설에 깊이 상념을 품고, 이제는 새로운 나날과 삶의 태도를 다짐하던 때의 기억은 흔적도 없이 스러졌다. 일견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에머슨은 여기에 천착한다.

 

나는 슬픔이 나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고, 나를 단 한 발자국도 더 참된 자연 속으로 데려다주지 않는 것이 슬프다. (P.174)

 

우리는 미래를 계산하고 예측할 수 없다. 비약적이고 충동적인 자연은 따라서 자발적이다. 우리는 인생의 결과를 추산할 수 없으며, 우연적 사건의 조우의 결과로 경험을 갖게 될 뿐이다. 이런 자연과 인생의 속성에 순응하는 삶의 자세, 그것은 삶의 영위 그 자체이다.

 

인생은 지적인 것도 비판적인 것도 아니고 완강한 것이다. (P.186)

 

관망과 계산을 포기하고 순간과 시간에 충실한 삶, 순간을 충만하게 하여 행복을 누리는 것, 이것을 아는 것이 삶의 지혜이다. 미래를 알 수 없기에 섣부른 기대와 실망을 품지 않는다. 현재의 우리 자신의 삶의 행복에 감사하면 충분하다.

 

일견 비관적이고 허무하게 보이지만 철저한 현재중심의 삶의 자세임을 알 수 있다. 인생 행로에 다가오는 비극과 고통을 짐작하고 대비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슬픔과 고통의 존재를 외면하지는 않지만 거기에 함몰되어서도 안 된다. 자연과 인생이 요구하는 삶의 방식은 순간과 현재에 최선을 다하고 충만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이다. 이것이 에머슨이 주장하는 현세적 인생관이다.

 

4. 자연

 

에머슨 최초의 저작물이다. 초기의 글이지만 그의 사상의 핵심을 관통하는 기본적 태도와 개념들은 여기에서 이미 뚜렷한 맥락을 구비하고 있다. 범상하게 넘기기 마련인 자연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정립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욕이 문장마다 배어있다.

 

철학적인 견지에서 보면 우주는 자연과 심령으로 구성되어 있다. (P.16)

 

에머슨에게 자연과 심령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다. 자연은 심령의 대응물이며, 심령은 자연이 내면화된 존재이다. 에머슨의 자연은 혼합적이다. 순수한 자연과 관념적 자연이 혼재되어 있다. 그의 글에서는 영국 낭만주의 시인, 특히 워즈워스의 그림자가 언뜻 비친다. 그렇지만 보다 영적인 요소의 강조로 그만의 독자성을 내비치고 있다.

 

에머슨은 자연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여러 편익들을 제시하고 하나하나 살펴본다. 먼저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운 자연은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아름다움을 베푼다. 여기에 영적인 요소, 즉 인간의 의지와 결합되면 한층 뜻깊고 신성한 자연의 풍광이 완성된다. 나아가 아름다움을 지적 대상으로 삼는 경우도 소개한다. 지성과 예술이다. 지성은 사물의 절대적 질서를 탐구하며, 인간에 의한 아름다움의 창조가 곧 예술이다(P.36).

 

자연은 언어에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자연적 사실의 즉각적 대응물로서 언어 표현이 있음은 쉽사리 알 수 있으며, 저자가 보다 주목하는 것은 특정한 자연적 사실이 특정한 정신적 사실의 상징이 되는 사례이다. 여기서 에머슨은 이성과 영혼의 개념을 등장시킨다. 한편 자연은 영혼의 상징이므로 정신과 물질 사이에는 아래와 같은 관계가 성립한다.

 

자연 전체가 인간 정신의 은유이기 때문이다. 도덕적 자연의 법칙은, 마치 거울 속의 얼굴이 실제의 얼굴과 대응하듯이, 물질적 법칙과 대응한다. (P.45-46)

 

자연은 또한 오성의 훈련을 위한 학교이기도 하다. 자연과의 부단한 접촉을 통해 감각적 진리에 대한 오성은 강화된다. 여기에 이성과 양심이 추가로 반영되면, 자연은 돌연 도덕적, 윤리적 성격을 띠게 된다.

 

이상과 같은 자연에 대한 고찰은 자연의 실체적 존재성을 의심할 수 없도록 만든다. 감각과 오성의 인식에서 자연은 명확한 실체성을 지닌다. 반면 자연의 실체성에 대한 믿음을 흔들고 부정하는 의론이 관념론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관점이 매우 부정적인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관념론은 자연에 대한 이성의 우위를 내세운다. 시인과 철학자는 모두 자연을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존재로 파악하여 심령의 우위성을 주장한다. 반면 관념은 영속적이며 불변적인 존재이다. 자연은 덧없으며 관념은 이데아다.

 

관념론은 세계를 신 속에서 본다. 그것은 인간과 사물, 행동과 사건, 나라와 종교를 하나의 전체적 순환 속에서 바라본다. (P.76)

 

에머슨은 자연을 자체로서 이해하지 않는다. 자연은 보편적 영혼과 개인을 연결하는 중간 통로이자 창구의 역할을 수행한다. 아직 심령과 초령의 개념을 구체화하지 않은 시기이지만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고귀한 존재, 즉 심령과 심령들 간에 존재하는 보편적 영혼으로서의 초령의 본질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지고의 존재가 인간의 영혼 속에 존재함을 알고 있다. 우리는 또한 그 영혼이 지혜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고, 미도 아니고, 힘도 아니면서, 그 모두가 일체를 이루고 있고, 만물이 그 때문에 그리고 그에 의해서 존재는 어떤 보편적 본질을 창조한다는 것을 안다. (P.79)

 

이상과 같은 자연론의 입장에서 에머슨은 당대 사회가 자연을 오성만으로 정복하려 든다고 비판한다. 그러한 사람을 이기적인 야만인”(P.89)이라고 혹평한다. 부단한 자기 수양과 겸허한 마음가짐을 통해 보편적 영혼의 존재와 의의를 깨달을 때 진정한 자연주의자가 될 수 있다고 기술한다.

 

 

이상으로 에머슨의 4편의 에세이를 읽은 후의 단상을 마치고자 한다. 대개의 경우 일독에 그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이 책은 삼독을 하였다. 마지막 삼독 째는 책상에 정좌하여 메모해 가면서 교과서를 공부하는 자세로 임하였다.

 

그의 사상이 심오한가? 개성 있지만 심오한 편은 아니다. 그의 문장이 어려운가? 그렇지 않다. 그의 문장들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자체로서 격언이나 금언집에 수록되기에 충분할 정도로 재치가 반짝이며 촌철의 지혜가 넘친다. 그렇다면 삼독을 할 정도로 이해에 어려움을 겪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건 정확히 알 수 없다. 에머슨은 통일적이며 체계적인 사상가는 아니다. 그의 본질은 도덕가로서 에세이스트다. 여기에 문학적, 철학적 어휘와 표현이 전체 맥락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가중하였을 수도 있다. 물론 외서의 경우 언제나 그러하듯 번역의 문제일수도 있다.

 

비록 난관을 겪기는 했지만 그의 글을 반복적으로 읽는 자체는 매번 새로운 즐거움을 주었다. 참으로 독창적인 사상과 표현에 항상 감탄을 금하지 못하였다. 조만간 에머슨의 다른 에세이집을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내가 어려움을 겪은 게 혹시나 이 책 자체에 귀인하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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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반정보
   - 레이블: AMPLITUDE
   - 음반번호: CLCD-2-2501
   - 수록시간: 63:54(CD1), 54:21(CD2)

2. 연주자
   - 바이올린 : 김남윤 (Nam-Yun Kim)

   - 지휘 : Nikola Debelich

   - 연주 : Orchestre de Chambre de Zagreb

서울 예고를 졸업하고 뉴욕에 줄리아드 음악하교에서 갈라미안 교수를 사사.

이화 경향 콩쿨 특등, 동아 콩쿨 1, 줄리아드 음악학교 차이코프스키 콩쿨 1, 워싱톤 메리웨더 포스트 경연대회 입상, 허드슨 벨리 영 아티스트 콩쿨 입상, 로스앤젤레스 청소년 음악인 재단에서 캐리어 그랜트 수상, 스위스 티보르 바르가 국제 콩쿨 1등 수상.

1977년과 1979년에 한국음악펜클럽상, 1980년 제13회 난파음악상, 1985년 월간 음악상, 2회 음악동아상, 1987년에 제3회 한국 음악평론가상, 3회 채동선음악상 수상.

서울시향, KBS 교향악단, 런던 로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자그레브 방송교향악단 등 국내외 정상급 교향악단과 협연. 미국, 유럽, 아시아 등 여러 지역에서 독주회 개최. 서울 무지카 트리오, 서울 챔버 오케스트라, 뚤루즈 챔버 오케스트라, 자그레브 챔버 오케스트라 등과의 수많은 연주회를 가졌으며 현재 서울 챔버 오케스트라의 악장.

1회 대만 국제 콩쿨, 싱가폴 롤렉스 국제 콩쿨 심사위원 역임.

현재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부교수.

[내지에서...]

3. 녹음
   1) 녹음일자: 1990/07/09-14
   2) 녹음장소: Vatroslav Lisinski Hall, Zagreb

4. 프로그램

   [CD1]
        W.A.Mozart, Violin Concerto No.1 in B-flat Major K.207 

   01. Allegro moderato (6:55)

   02. Adagio (7:44)

   03. Presto (5:37)
        W.A.Mozart, Violin Concerto No.2 in D Major K.211

   04. Allegro moderato (8:12)

   05. Andante (6:42)

   06. Rondeau-Allegro (4:00)
        W.A.Mozart, Violin Concerto No.3 in G Major K.216

   07. Allegro (9:46)

   08. Adagio (8:27)

   09. Rondeau-Allegro (6:31)

 

   [CD2]
       W.A.Mozart, Violin Concerto No.4 in D Major K.218

   01. Allegro (11:41)

   02. Andante cantabile (7:33)

   03. Rondeau-Andante grazioso (7:33)
       W.A.Mozart, Violin Concerto No.5 in A Major K.219

   04. Allegro aperto (10:12)

   05. Adagio (9:36)

   06. Rondeau-Tempo di menuette; Allegro (9:00)
     
* 세줄평

국내 바이올린계의 대모로 일컬어지는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의 사십대 초반의 귀한 음반이다. 음반에 대해서 말하자면 캐나다에서 제작된 국외 음반인데 뒷커버와 내지에 한글 설명이 추가되어 있는 점이 이채롭다. 아마도 국내 배포용을 의도한 것이 아닐까. 만듦새는 썩 고급스럽지는 않으며, 연주 자체는 논외로 하더라도 녹음 자체가 소극적이고 경질이어서 훌륭하다고 하기는 어렵다는 점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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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학교 2 창비아동문고 155
E.데 아미치스 지음, 김환영 그림, 이현경 옮김 / 창비 / 1997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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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 느꼈던 생경함과 이질감, 그리고 일말의 거부감은 이제 많이 줄어들었다. 이미 시대적 배경과 작가의 집필 의도 내지 주제 의식을 보다 명확히 알 수 있게 된 연유다.

 

2권을 관통하는 전반적 기조도 이런 면에서 제1권과 다르지 않다. 통일 이탈리아의 단합과 결속을 공고히 하고, 단일국가로서의 국민의식과 애국심을 고취시킨다. 그리고 사회 전 계층의 화합과 장기적 발전을 위하여 초기단계에서의 학교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건강한 애국심이라면 물론 국민으로서 가슴에 품고 고취해야 할 감정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애국심이 변질되어 폭력과 비극을 양산하는 사례를 역사를 통해 익히 경험한 바 있다.

 

만약 내게 요구하셨다면 난 국왕께 다른 것들을 드릴 수 있었을 거요......바로 내 피요. (P.170)

 

퇴역군인인 꼬렛띠의 아버지가 국왕에게 바치는 충성심을 드러내는 문장이 가슴 뭉클한 동시에 당혹감이 생겨나는 것은 이것에서 유래한다. 긍정적 관점에서는 투철한 애국심, 부정적 관점에서는 맹목적 애국심, 훗날 이것이 나치즘과 파시즘으로 변질되었으니.

 

한편, 엔리꼬와 꼬렛띠 사이의 불화에 대해 엔리꼬의 아버지의 훈계는 진정한 용기를 직설하는 동시에 은연 중 군국주의를 흐를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있다. 이탈리아 통일전쟁에서 무수한 희생을 치룬 군인들에 대한 존경심을 인정하고 배양할 필요성은 납득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 제2권에서 특징적인 장면은 2, 이달의 이야기로 들려주는 아버지를 간호한 소년이야기다. 자신의 아버지로 알고 성심껏 간호를 하였는데 알고 보니 다른 사람이었다는 사실, 소년은 그 중환자가 숨을 거둘 때까지 변함없이 곁에서 돌봐준다. 진정한 휴머니즘의 발로!

 

학교를 이끌어가는 중추적 역할은 교사, 즉 선생님에게 있다. 학창시절을 회상해 보면 인생에 전환점을 마련해 준 선생님에 대한 추억은 대부분 갖고 있으며 이는 평생의 소중한 자산이다. 내게도 역시 그러한 분이 계시다. 되돌아보면 그분이 딱히 내게 특별한 배려와 정성을 쏟은 것은 아니었지만, 남과 달리 내게 믿음과 신뢰를 보여주셨다...오늘날 교사는 많지만 인생의 선생님이라고 칭할 만한 분은 점점 찾아보기 어려워지는 듯하여 안타깝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위해 많은 애를 쓰셨고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지식과 마음을 여러분에게 바쳤으며, 여러분을 위해 살고 죽는 분들에게 꼭 인사를 하고 이 곳에서 나가야 합니다. 바로 저기 계신 분들입니다. (P.124-125)

 

시상식 대목에서 평의원이 이렇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진정한 선생님의 중요성과 고마움에 대한 찬사일 것이다. 그리고 모처럼만에 이야기의 전면으로 등장한 엔리꼬의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자신의 어릴 적 옛 스승을 찾아가는 장면도 같은 맥락으로 연계된다.

 

학교의 존재 의의와 기능에 대한 논란은 오늘날도 여전하다. 대안학교의 수효와 영향력이 나날이 증가하는 현실은 공교육 체계가 전체 학생들을 포괄하지 못함을 가리킨다. 산업혁명 시절에 창안된 공장식 교실 시스템에 대한 반발도 제기된다. 하지만 여러 문제점을 인정하더라도 공립 보통학교의 다음 순기능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학교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고 친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P.104)

 

엔리꼬는 학교를 마친 후 친하게 지내던 노동계층 친구들과 헤어져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을 우려한다. 이때 엔리꼬의 아버지는 계급이 차이나고 훗날 직업과 신분이 다르더라도 어릴 적 친구들과의 관계를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오히려 타 계급 친구와의 우정이 갖는 소중함을 피력한다.

 

난 네가 속해 있는 계급 밖의 우정에 대해 말하고 싶은 거란다. 그런 우정을 지켜 나가지 않는다면 넌 한 계급 안에서만 살게 될 거야. 오로지 한 계급의 사람들만 사귄 사람은 한 권의 책만 읽는 학자와 마찬가지란다. (P.206-207)

 

우리의 경우도 국공립과 사립 등으로 체계가 구분된 경우 일부 부유층은 사립을 선택한다. 그들은 출발선상에서부터 보통의 다수와 차별을 둔다. 이른바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성장해서는 사회 지배층으로 자리 잡는다. 그의 친척과 지인, 친구들은 같은 계층에 국한되기 마련이다. 이런 사람들이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국민을 위해서, 서민을 위해서라는 영혼 없는 상투적 발언만 앵무새처럼 반복할 때 우리는 그네들의 진실성을 신뢰하기 어렵다.

 

맑은 하늘, 노래 부르는 어머니, 열심히 일하는 어른, 공부하는 소년들, 아름다운 것들이 여기 다 있구나...... (P.159)

 

멋진 봄날 아침, 엔리꼬의 선생님이 창문을 바라보면서 하는 말이다. 아름다운 자연과 각자 자기 역할에 충실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우러지는 장면. 아름다움은 세속과 동떨어진 곳에 있지 않으며 일상 속에 깃들여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참된 교육은 자연은 물론 타인과 함께 배려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데 있는 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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