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얀과의 대화
리처드 오스본 지음, 박기호.김남희 옮김 / 음악세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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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클래식 음악을 듣던 초기 시절에 카라얀을 무지 싫어하였다. 출시 음반은 온통 카라얀이고, FM에서 들려주는 연주도 카라얀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주류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과 후에 알게 된 그의 나치 전력, 게다가 그의 연주 해석에 대한 일부의 비판적 의견까지 맞물려 내게 카라얀은 클래식 음악계의 악의 제국이었다.

 

오늘날 자주는 아니지만 카라얀 연주를 간혹 듣곤 한다. 그의 연주는 어느 연주든 일정 수준 이상의 안도감을 안겨준다. 그리고 워낙 근래에 정격연주의 해석이 유행하다 보니 종래의 심포닉한 해석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카라얀이 항상 정해는 아닐지 몰라도 다른 가능성의 방향을 억지로 외면하고 싶지는 않다.

 

2. 카라얀의 나치 전력과 관해서는 여전한 논란이 존재한다. 일단 그의 나치 가입은 명확한 사실이다. 그가 나치 경력을 자신의 출세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느냐 여부가 관건인데, 정황 증거와 푸르트벵글러의 카라얀 혐오가 중시되는 듯하다. 1908년생인 카라얀이 나치 시절을 보낸 것은 30대라고 할 때, 과연 카라얀이 푸르트벵글러의 라이벌이라는 인식이 온당한 지 의문스럽다. 주요 포스트라고는 아헨 시절밖에 없던 카라얀이 전후 세계 최고의 지휘자로 급부상하면서 자연스레 전전에 과도한 의미와 해석을 부여한 것은 아닌 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카라얀이 이처럼 무시무시한 드라마에 출연한 위대한 배우였다고 상상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는 배우라기보다는 인질에 가까웠으며, 유능했고, 또한 열심히 일했으며, 기초가 불안정했다. (P.20)

 

그렇다고 카라얀의 나치 전력에 면죄부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많은 양식 있는 지성인과 예술인들이 나치에 저항하여 유무형의 피해를 입은 가운데 비록 일자리를 얻기 위한 목적이라고 하더라도 나치에 가입한 것은 자체로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 점에서 저자는 다소 소극적인 인상을 준다.

 

이러한 것들은 지금까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과 전쟁 기간 중 그가 나치 정권에 정치적으로 동조를 했을 것이라는 잘못된 정보를 분석하고 재활용하는 데 깊숙이 관련된 사람들이 고려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P.20)

 

3. 저자 리처드 오스본은 음반 평론가로서 활동하고 있는 전문적 식견을 가지고 있는 데다 내용을 보니 카라얀과 직업적, 개인적으로 접촉할 기회가 많은 인물이었다. 카라얀에 대한 저자의 입장은 대체로 호의적이며, 긍정적이다. 그가 카라얀을 음악적으로 인간적으로 존경하고 있음이 대번에 드러난다. 후에 그가 카라얀의 권위 있는 평전을 저술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리라.

 

4. 미디어 기술의 발전과 카라얀의 관계는 불가분이다. 그의 전성기는 LP시대의 본격적인 도래와 맞물려 시작되었으며, CD시대를 앞당긴 것에도 그의 지분은 분명하다. 게다가 영상매체의 중요성과 기술 구현에 매진한 것도 결국 시대를 앞선 혜안임은 분명하다. 오스본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는가.

 

사실 당신은 해석 예술가로서 영상을 당신의 작업에 없어서는 안 될 연장선으로 이용한 역사상 첫 번째 지휘자입니다. (P.187)

 

신기술과 신 포맷에 대한 카라얀의 적극적 관심은 테크놀로지에 대한 편향과 상업성의 발현이라는 단순한 설명으로는 마뜩치 않다. 차라리 다음과 같은 이유가 보다 설득력 높다.

 

많은 사람에게 음악을 전달하는 것은 내 삶의 가장 큰 기쁨이었습니다. 음악은 더 이상 학식과 경제력을 갖춘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그러한 청중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들 이외의 또 다른 청중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P.184)

 

5. 우리는 20세기 마지막 지휘계의 거장으로서 카라얀을 꼽는다. 카라얀의 사후, 번스타인, 솔티, 첼리비다케 등이 잇달아 작고하면서 카리스마를 갖춘 전통적 지휘자는 자취를 감추었다. 여러 음반 자켓과 영상물 등을 통해 우리는 카라얀과 카리스마를 당연히 결부시킨다. 범접할 수 없는 음악적 권위를 갖추고 오케스트라를 지도 편달하고 때로는 호통과 쓴소리도 아끼지 않으면 음악적 수준을 한층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는 거장. 하지만 오스본은 이것이 우리의 잘못된 환상임을 밝힌다. 카라얀은 토스카니니와 푸르트벵글러, 라이너, 셀 같은 유형이 아니라 오늘날 대다수 지휘자들과 같은 유형임을.

 

자신을 아르투르 니키시의 후계자라기보다는 사이먼 래틀의 선조로 만들어버린 카라얀의 업적과 영향력의 한 측면이다.....카라얀이 음악을 준비하는 방식은 형식적이거나 훈시적인 것이기보다는 실제적인 것이고, 상호협조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다. (P.27)

 

6. 과도한 신성화와 우상시는 자칫 대상의 인간적 면모를 흐릿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다. 카라얀의 실제 성격에 대한 면도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낯설다.

 

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었다면, 카라얀을 개인적으로 상당히 매력 있고 솔직하며, 또한 재미있지만 냉소적인 재치가 번뜩이는 진실된 사람이라고 말할 것 같다. (P.16)

 

하지만 그의 성격보다도 흥미로운 것은 음악 만들기에 대한 그의 견해일 것이다. 긍정적이든 아니면 부정적이든 완벽주의라는 용어가 카라얀의 음악관을 대변한다. 기술적 뒷받침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음악은 악보에 종속될 뿐이라는 의견은 음미해 보면 확실히 탁견이다. 스코어가 보여주지 못하는 것, 그리고 스코어를 넘어서는 것을 음악가는 찾아내고 연주할 수 있어야 한다. 한편 카라얀 사후 이십여 년이 경과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베를린 필은 기술적으로 최고 수준을 자부한다.

 

카라얀이 주장했던 것은 가능한 한 아름답고 정확하게 연주하기 위해서는 음악이 모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었다......단원들은 스코어에 종속되지 않고, 자유로운 지성과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고 음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자신들의 연주를 가능하게 하는 충분한 통제력을 가지고 즐겁게 연주한다. (P.31)

 

리허설에서 그것은 음표를 정확한 방법으로 연주하기 위한 정확한 방식을 확립하는 문제가 됩니다. 하지만 실제 공연에서 그것은 전혀 별개의 사안이 됩니다. 지휘에서 최고의 기술은 지휘를 해서는 안 될 때를 느낌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P.148)

 

7. 거장들의 회고담에서 찾을 수 있는 빼놓을 수 없는 색다른 묘미는 동시대 동료 음악가들에 대한 일화와 추억이리라. 이 책에서도 멩겔베르크, 제프리트, 토스카니니, 칼라스, 므라빈스키, 셀 등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있다. 푸르트벵글러와 관련된 내용이 없는 것은 아마도 양자 간의 관계에서 그가 후배이자 일방적 약자의 위치에 놓였던 탓이 아닐까 생각된다. 카라얀이 지휘자 중에서 특히 데 사바타와 탈리히를 높이 평가한 대목은 의외다. 자신이 진정으로 존경했던 사람으로 데 사바타를 꼽은 카라얀은 탈리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극찬한다.

 

그는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정말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오케스트라의 음향을 하나로 모으고 오케스트라를 하나의 악기처럼 통제하는 위대한 천재처럼 보였습니다. (P.79)

 

8. 카라얀은 작금의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에게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그도 점차 시대와 환경이 바뀌어 가고 있음을 의식하면서 그럴수록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본분을 지켜야 한다고 본다. 먼저 양자의 장기간의 협력 작업을 중시하며, 현대의 지휘자들의 재임기간이 갈수록 짧아지는 현상에 우려를 표명한다. 한층 높은 수준에 도달하기 위한 진정한 작업은 양자의 장기간의 지속적 상호 공동 노력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오늘날 오케스트라의 제1의 당면과제는 생존이다. 정부보조금과 기부금이 현저히 줄어든 시점에서 오케스트라는 자칫 생존을 담보로 독립성을 상실하기 쉽다. 카라얀은 오케스트라가 음악 외적인 것으로의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하고 해야만 한다고 본다. 그것이 어쩌면 카라얀이 상업적이라는 비판을 감수하고서라도 특히 음반 판매를 통해서 오케스트라와 단원들의 재정적 풍성함을 누리게 한 근본 목적이 아니었을까.

 

오케스트라가 개성과 독립성을 잃는다면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현재 새로운 계약에 따라 일하고 있는 독일 오케스트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연주나 리허설을 할 수 있거나 그렇게 하지 못할 때 특히 주장해야 할 내용일 것입니다. (P.126)

 

이백 쪽 남짓한 많지 않은 분량의 대담집이지만, 때로는 상당한 깊숙한 논의까지도 건드리고 있어 클래식 음악 이해의 측면에서도 유익한 책이다. 더구나 카라얀의 미처 알지 못했던 인간적 면모와 함께 그의 음악미학에 대해 새롭게 접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보다 열린 마음과 귀로 그의 연주를 들을 순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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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인이란 무엇인가 / 자기신념의 철학 동서문화사 월드북 127
랄프 왈도 에머슨 지음, 정광섭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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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머슨의 덫에 사로잡힌 형국이다. 애초 가벼운 심정으로 그의 에세이를 한 번 읽으려고 하였다가 잘 정리가 되지 않아 다른 책들을 펼치다 보니 뒤엉켜버리고 말았다. 거기다 태생적 게으름에다 공·사적 사정까지 겹치다 보니 진도는 한 달 이상이나 지지부진하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는 위인이란 무엇인가라고 하여 에머슨의 <대표적 인물(Representative Men>)을 담고 있다. 후반부는 자기신념의 철학이란 타이틀로 에머슨의 에세이, 일기 등에서 발췌한 내용들을 수록하고 있는데, 유명한 에세이집에 수록된 작품들 외에 다양한 출처를 지니는 점이 특색이다.

 

1. 위인이란 무엇인가 [대표적 인물]

 

에머슨은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구축한 인물이다. 기독교적 전통에다 동양사상을 덧붙이고 여기에 고유의 사념으로 용해하여 이른바 초월주의를 구현하였다. 그의 작품들, 즉 에세이, 연설문, 시 등은 모두 이 사상을 찾아가기 위한 과정 또는 사상 체득 이후 독자적 관점에서 바라본 현상을 반영하고 있다.

 

나폴레옹, 괴테, 셰익스피어, 스베덴보리, 플라톤, 몽테뉴라는 6인의 역사적 인물을 에머슨이 <대표적 인물>로 굳이 다른 위인과 구분하여 소개하는 까닭은 이들에게서 구별되는 대표성 내지 전형성을 발견하여서다.

 

먼저 나폴레옹은 새로이 부각되기 시작한 신흥 중산계층의 대표자다. 신흥세력은 자신의 앞길과 전진을 가로막는 구체제를 타파할 필요성을 느꼈으며 이를 구현할 인물로서 나폴레옹을 지지하였다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개인적 능력에 더하여 시대적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불세출의 정치 지도자로써 급부상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과 동시대를 살아 간 괴테는 전혀 다르다. 나폴레옹이 사회적, 시대적 요구를 대변한 반면, 괴테는 당대의 내면적 요구를 대표하는 위인으로 본 것이다. 시대의 요구는 정신적, 사상적 측면에도 영향을 미쳤다. 진리 탐구를 가로막는 일체의 장애물을 제거하고 이성과 사고의 힘으로 순수한 지성의 탐구를 요구했던 것이다. 이에 부응한 인물이 괴테라고 에머슨은 보았다. 다만 에머슨이 보기에 괴테가 지향한 것은 보편적인 자연·보편적인 진리를 탐구해 위대한 자아완성의 사람”(P.58)이 되는 것이어서 보편적인 영원한 진리를 중시하는 에머슨에는 다소 아쉬움을 남긴다.

 

어쨌든 나폴레옹과 괴테에 대한 에머슨의 평가는 이러하다.

 

나는 인간의 내적인 자연스런 목소리를 압살하는 형식뿐인 인습이나 권위주의를 타파한 인류의 대표자로서 나폴레옹과 괴테를 나란히 가리키고 싶다. 이 두 사람은 누구 못지않은 철저한 리얼리스트이고 동시대뿐만 아니라 다가올 미래의 사람들을 위해 위선이나 허식이라는 거목의 뿌리를 과감하게 없앤 것이다. (P.62-63)

 

에머슨은 거듭 강조한다. 시대와 민중이 요구하는 것을 선취하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한 차원 높게 발전시켜 실현하는 인물, 그가 대표적 인물이고 바로 영웅이라는 점을. 문학에서 그가 주목하는 인물은 셰익스피어다. 셰익스피어에 대한 문학적 평가는 과거와 현재가 똑같이 찬사일색이며 에머슨도 마찬가지다.

 

그는 도저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의 문학적인 세련이 극에 달하고 있다. 그것은 작가적 자질로도 최고봉이라고 해도 좋은데 그의 재능은 좁은 뜻에서의 작가라는 틀을 훨씬 뛰어넘고 있는 것이다. (P.78)

 

에머슨은 순전한 문학적 시각에서 셰익스피어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진정한 시인은 셰익스피어처럼 대지에 굳건히 뿌리내리고 시대성과 민중의 숨결을 온몸으로 생생하게 체감하고 호흡하면서 거목으로 우뚝 서야 한다.

 

다만 셰익스피어는 문학적 세련과 기교에 치중하다 보니 인간과 자연 속에 내재된 덕 자체의 의의에 대한 근원적인 통찰을 결여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자의든 타의든 그는 최고의 엔터테이너의 지위에 만족했다는 게 에머슨의 판단이다.

 

스베덴보리는 사상적으로 에머슨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임에 틀림없다. 에머슨의 초령이라는 개념과 스베덴보리의 만물의 근원에 대한 동일철학은 결국 본질적으로 같은 의미다. 에머슨의 말대로 인간 정신은 이성과 직관, 합리와 신비 사이를 방황하고 있다. 스베덴보리가 집중적으로 탐구한 부분은 직관적이며 신비한 영적인 세계이다.

 

스베덴보리는 계시를 받고 천국과 지옥을 두루 여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거기서 자신이 보고 듣고 깨달은 바를 대중에게 각성시키기 위하여 다양한 노력에 헌신하는데 우리에게는 기독교의 또 다른 분파로만 이해될 뿐이다. 이것이 에머슨이 토로하는 아쉬움이다.

 

아쉽게도 스베덴보리의 영적인 탐구가 오로지 신학적인 방향으로만 향해져 있었으므로, 그와 같은 모처럼의 대기획도 약간 독선적이고도 불충분한 것이 되고 말았다. (P.102)

 

기독교적 신비와 상징체계의 구현에 집착하다 보니 비기독교계는 당연히 무관심하고 기독교계 내부에서도 거부당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종교의 도덕적 본질을 놓친 데 대한 전직 기독교 목사의 비판은 의미심장하다.

 

플라톤의 등장으로 아득한 아시아적 상상력의 시대가 마지막을 고하고 대신 빛나는 유럽적 지성의 시대가 막을 열었다. (P.122)

 

에머슨은 플라톤을 유럽정신의 원형으로 간주한다. 플라톤에게서 나타나는 동일성의 원리는 스베덴보리는 물론 인도 사상과 함께 에머슨의 지적 형성에 기여하였다. 커다란 영의 존재, 만물의 통일, 유한과 무한을 향한 동시적 지향, 이 모든 것은 결국 플라톤뿐만 아니라 에머슨의 사유를 가리킨다.

 

이 책의 기이한 점이자 아쉬움은 몽테뉴 편을 누락하였다는 점이다. 이것이 번역의 저본으로 삼은 원본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번역자의 임의적 판단 내지 실수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모처럼 만에 에머슨의 뛰어난 저작이 번역되면서 흠결 있게 나온 점은 안타깝다.

 

2. 자기신념의 철학 [에세이 등]

 

앞서 밝혔듯이 후반부는 에머슨의 에세이, 일기 등에서 발췌한 내용들로 구성된다. 출처를 찾기 어려운 글들도 제법 있다. 한편 수록작 중에서 자신감을 살려라’[자기신뢰], ‘보상을 생각해 본다’[보상], ‘자연에 대하여’[자연]은 별도로 촌평할 기회가 있으므로 여기서는 제외한다.

 

1) 나의 길

 

여기서 에머슨은 기도의 본질을 명확히 한다.

 

기도란 가장 고귀한 관점에서 인생의 사실들을 고요한 마음으로 비추어보는 행위이다. 그것은 기쁨에 넘쳐 바라보는 영혼의 독백이며, 선한 업적을 선언하는 신의 정신이다. (P.199)

 

그리고 자기신뢰를 강조한다. 자신을 믿고 고집하라는 것인데, 이것은 무작정 고집부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원칙을 타협하지 말라는 뜻이다.

 

당신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자는 오로지 당신밖에 없다. 또한 당신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은 원칙의 승리밖에 없다. (P.208)

 

2) 나의 사랑

 

이 글은 에머슨의 제1 에세이집 중에서 <사랑>에 해당한다.

 

통속적 사랑론을 전개하는 대신 에머슨은 영혼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사랑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사랑의 감정은 인간이 야만을 벗어나 문명으로 진입하는 첫 순간이라고 선언한다. 부분적 사랑은 전체적 사랑의 단계로 확대되고 발전되며 사랑을 통해 인간은 완성되고 독자적인 영혼이 된다.

 

그는 이제 새로운 지각과 새롭고 더 훌륭한 목적, 그리고 성격과 목적에도 엄숙함을 지닌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다. 그는 더 이상 그의 가족과 사회의 부속물이 아니며, 중요한 무엇이다. 그는 인간이고 영혼이다. (P.215)

 

세월이 흐를수록 지성과 마음의 정화야말로 처음부터 미리 짐작되었고 준비된 것이며, 그들이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진정한 결혼임을 깨닫게 된다. (P.223)

 

3) 나의 일기

 

일기에서 주요 대목, 명문장 등을 발췌한 것인데 단편적인 문장들이므로 별도로 다루지 않는다.

 

4) 런던내기의 나라

 

에머슨은 유명한 두 권의 에세이집 외에 <영국인의 성격(English Traits)>이라는 저작도 남기고 있는데, 영국의 땅, 인종, 능력, 태도, , 대학, 종교, 문학 등을 두루 다루고 있다. 이 책에 소개된 부분은 그 중 제9Cockayne을 번역한 내용이다. 코케인은 전형적 뉴욕인을 양키라고 부르듯 런던내기를 지칭하는 속어다. 에머슨이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영국인의 자존심 또는 자만심이다. 섬나라의 편협성과 한계성을 노정하면서도 스스로에 대한 솔직함과 거리낌 없는 자신만만함을 표출하는 영국인의 성격의 단면을 강조한다.

 

5) 에이브러햄 링컨

 

링컨의 죽음을 추모하는 글이다. 아마도 링컨 암살 후 장례식 즈음에 맞추어 식사로서 쓴 글이 아닐까 추정해 본다. 링컨에 대한 후대인의 평가가 아닌 당대인, 그것도 저명한 지성인의 인식과 평가를 알 수 있어 흥미롭다.

 

6) 농사짓기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문구처럼 농사는 인간의 대표적인 원초적 노동이다. 에머슨은 이 글에서 농부의 역할, 농부를 돕는 자연의 기능과 농부와 관계 등을 서술하고 있다. 그는 농부를 진정한 자연인의 표상으로 평가한다.

 

7) 시골생활

 

내용적으로는 진짜 시골에서 사는 생활이 아니라 사실상 자연 속의 건전하고 건강한 생활, 즉 전원생활을 의미한다. 아울러 삭막하기 그지없는 도시와 학교, 교회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에머슨은 일찍이 <자연론>에서 시작하여 자연의 순수와 미덕을 예찬하는 글들을 지속적으로 남기고 있다. 이러한 자연 편향과 애호가 여기서도 나타난다.

 

우리는 이 믿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한 몸에 지니고 채색된 원소에 우리의 손을 씻으며 이 빛과 형체들 속에 우리의 눈을 적신다. 하나의 축제라고 할 전원생활의 호화로운 잔치, 용기와 미와 힘과 멋으로 장식된 가장 자랑스럽고 즐거운 연회가 이 순간 열리는 것이다. (P.271)

 

자연은 우리 안의 가장 선한 것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자연은 비록 사람이 살지 않는다 할지라도 아니 사람이 살지 않으므로 신의 도시로서 사랑을 받는다. (P.274)

 

인간은 타락했다. 그러나 자연은 똑바로 서서 인간에게 신성한 감정의 유무를 탐지해 주는 특이한 온도계로서 봉사한다. (P.275)

 

이 글은 표현 하나, 문장 하나가 햇빛에 산란되어 반짝이는 물결처럼 빛나고 눈부시다. 전체적 통합성과 구축적 전개보다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순간의 표현과 사상의 표현에 집중한다는 느낌이랄까.

 

8)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

 

에머슨의 제1 에세이집에 수록된 <역사>에 해당한다.

 

에머슨은 자신의 초월주의 관념에 견주어 역사를 해석한다. 개체를 넘어선 공통되고 보편적 본성과 마음을 초영혼이라고 한다면, 역사는 이 초영혼에 새겨진 일의 기록이라고 본다.

 

모든 개인에게는 공통된 한 마음이 있다. 모든 사람은 이 마음에 그리고 이 마음의 전체에 통하는 입구이다......이 마음에 남겨진 여러 가지 일의 기록이 역사이다. (P.358)

 

외부 세계와 사건은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보편적 본성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따라서 본질에 비추어 현상을 확인하고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모든 역사는 주관적이라는 에머슨의 역사관이 성립한다.

 

역사의 동일성이란 것은 역시 내재적이고, 그 다양성은 역시 외재적이다. 외면에는 사물의 무한한 변화가 있고, 중심에는 원인의 통일이 있다. (P.366)

 

다만 이 두 가지 사실, 즉 마음은 하나이다, 그리고 자연은 그 대응물이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서 역사는 읽히고 씌어져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P.381)

 

우리는 항상 자기의 사적 경험에서 역사의 사실을 확인한다. 모든 역사는 주관적으로 된다. 달리 말하면 세상에는 참된 뜻에서의 역사는 없다. 다만 전기가 있을 따름이다. (P.363)

 

역사는 사실의 단순한 연대기가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 역사는 보편적 본성의 발현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지혜로서 이다.

 

모든 역사는 우리의 친화 관계의 범위를 통찰하고, 사실을 표상으로 보는 지혜로써 씌어져야 한다. (P.382)

 

 

자기계발서에 가까운 몇 편의 에세이만 반복하여 소개되었던 에머슨의 <대표적 인물>이 유일하게 번역된 책이라 한계에도 불구하고 반갑다. 차제에 보다 완전한 형식으로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고 에머슨의 에세이도 전체가 체계적으로 번역 출간되면 더욱 기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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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풍선이 남작의 모험 환상문학전집 13
루돌프 에리히 라스페 지음, 귀스타브 도레 그림, 이매진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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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어린이용 책을 읽고 나니 문득 순화되거나 가공되지 않은 원작의 참모습이 궁금해졌다. 아울러 뷔르거 판본과 다른 라스페 판본의 내용도. 황금가지에서 나온 책을 구해 읽게 되니 다행이다. ‘독자에게 드리는 글에서 벌써 작품의 허풍이 시작된다. 모험담의 진실성을 선서하는 인물들이 누구인가? 걸리버, 신밧드, 알라딘.

 

남작의 모험 연대순으로 비교적 기록되어 있다는 점도 적이 다행이다. 제아무리 두서없고 자유롭게 읽어도 그만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한참 모험담이 전개된 후 후 불쑥 어릴 적 모험의 시초로 되돌아가면 다소 당황스럽다. 앞서 읽은 책과 비교하면 어린이용이 아니므로 사건과 표현이 보다 직설적이고 잡다한 수사와 친절한 설명이 배제되었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서술과 배경이 현실감을 강조하듯 객관적이다. 사자와 악어 이야기, 유명한 교회 첨탑에 말 매단 이야기와 썰매 끄는 늑대 등 익숙한 여행담이 처음부터 죽 이어지지만 곧 차이점이 슬슬 드러난다.

 

라스페 판본에서 친애하는 남작은 영국에 충성한다. 그것은 라스페가 인생의 후반을 위탁한 게 영국이고, 남작의 모험담을 펴낸 곳도 영국이어서이다. 여하튼 남작은 영국군 특급 군함을 타고 아메리카로 향하다가 거대한 고래와 조우한다. 지브롤터 방어전에서는 스페인군을 상대로 혁혁한 전공을 거둔다. 게다가 라이벌 프랑스인에 대한 경쟁심을 드러내고, 노골적으로 영국과 영국인을 칭송한다. 독일 남작이 영국에 충성한다는 설정은 독일인 뷔르거 입장에서는 못마땅하게 여겨졌을 터이므로 이러한 대목이 대폭적으로 수정된 것으로 보인다.

 

뮌히하우젠 남작의 허풍이 순전히 터무니없고 과대망상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기 어렵다. 이따금씩 내비치는 날카로운 현실비판과 풍자에는 라스페의 눈에 비친 사회의 부조리가 그대로 담겨있다. 거대한 기구로 의과대학을 통째로 석 달 동안 공중에 들어 올린 일화에서 남작은 슬그머니 말한다.

 

잘 알려진 사실대로 대학 전체가 허공에 매달려 있던 석 달 동안 환자를 보러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사람이 죽을 일도 없었던 것이지요......하늘에 떠 있는 기간 동안 약장사들이 활동을 활발하게 펼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장의사의 절반 정도는 망했을 겁니다. (P.72)

 

핍스 선장의 배를 타고 북극으로 향하다가 혼자서 북극곰 수천 마리를 죽인 이야기, 여행가 드 토트 남작의 출신에 관한 터무니없는 험담 등은 잔인하고 점잖지 않지만 역시 흥미롭다. 에트나 화산 아래로 들어가 불카누스 신과 만나고 지구 반대편으로 나와서 치즈 섬 탐험과 거대한 고려의 뱃속에서 탈출하는 등 숨 가쁘고 정신이 핑핑 돌도록 남작의 모험은 끊이지 않는데, 무엇보다도 첫 번째 모험 이야기의 대미를 장식하는 독수리를 타고 유럽과 아메리카를 두루 돌아다니는 낯설면서도 기이하며 장대한 모험담의 스케일은 압도적이다.

 

두 번째 모험 이야기는 뷔르거 판본에서는 온전히 누락되어 있다. 아마도 이 2부가 라스페 판본을 읽는 가장 큰 보람일 것이다. 작가는 2부를 온전히 아프리카 내륙 탐험에 할애하고 있어서 다양, 다기하지만 산만하기 그지없던 1부에 비하면 체계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다. 거대한 마차와 곡, 마곡, 스핑크스 등과 심지어는 돈키호테의 등장과 같은 공상과 환상이 난무하는 가운데 남작 일행은 아프리카 내륙에 도착하는데 성공하고, 남작은 통치자가 된다. 날고기를 먹는 관습을 없애기 위한 강력한 반발을 퍼지의 배포로 무마하고 이어 백성들을 총동원하여 대영제국에까지 이르는 거대한 다리를 건설한다.

 

1부의 모험담이 대체로 지리적, 문화적으로 생소하지 않은 지역과 배경들을 무대로 하여 엉뚱하고 황당한 모험과 여행 이야기로 구성되었다면, 2부는 유럽인들에게 미지의 대륙인 아프리카 오지를 직접 겨냥한다. 리빙스턴의 아프리카 내륙 탐험이 시도된 게 19세기 전반이므로 남작 이야기가 출판된 18세기 후반에는 그야말로 순전한 야만과 상상의 공간이었으리라. 그래서인 듯 남작은 물 만난 물고기마냥 좌충우돌하며 거리낌 없이 자신의 모험을 실현해나간다. 아무도 실체를 알 수 없으니 어떤 허풍을 늘어놓아도 부담되지 않았을 것이다.

 

인상적인 장면이 있는데 항해 중에 노예무역선과 마주치는데 흑인들이 백인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팔아넘기는 설정(P.156)이다. 남작은 사악함과 끔찍함에 치를 떨면서 노예무역선을 침몰시키고 백인들을 모두 구조한다. 이것을 흑인 폄하의 인종주의적 시각으로 액면 그대로 봐야할지 의문스럽다. 작중에는 이러한 흑인들을 비열하고, 사악하다고 비난하는데 라스페가 노예무역의 현실을 몰랐을 리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장면은 역으로 백인에 의한 흑인 노예무역의 비인도주의와 몰인간성에 대한 적나라한 비난이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아울러 2부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개척의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남작 일행은 아프리카 내륙에 영국식 정치 제도와 문화를 이식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들이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둔 것은 달콤한 퍼지였다. 눈앞의 얄팍한 편익과 쾌락을 제시하여 저항과 반발을 불식하고 유럽 문화를 수용하게 만드는 것. 남작 일행이 대영제국을 연결하는 거대한 다리를 건설하는 것은 공고한 지배체제를 구현하기 위한 인프라의 확충이 아니겠는가. 이때 퍼지를 향한 사람들의 기대와 관심과 반응을 보는 남작의 상념은 미묘하다. 남작은 알고 있다, 사람들의 마음을 조종하는 방법을.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표변하기 쉬운가를.

 

미치도록 동경하면서 엄청난 호기심과 상상을 키워 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사람들이 좋아했던 맛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어쨌거나 그들은 퍼지에 지독하게 빠져 들어갔습니다. 기쁨과 만족, 환호에 취한 거죠. (P.181)

 

모험은 이어서 와우와우 새를 잡기 위한 남작 일행들의 또 다른 세계 여행담으로 연결된다. 아메리카와 러시아를 넘다들다가 파나마 운하와 수에즈 운하를 파는 시대를 앞선 선구적인 혜안을 발휘하기도 한다. 이 두 곳의 운하 필요성에 대하여 당대에 이미 광범한 인식이 이루어졌던 것인지 아니면 순전히 작자의 현저한 혜안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한편 마지막 대목에서 남작은 루소와 볼테르의 계몽주의 세력의 대두를 물리치고 프랑스 국민 의회를 쫓아낸다.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한 시기, 온 유럽의 불안한 시선으로 프랑스 사태를 우려하고 있다. 라스페로서는 자신이 의탁한 영국의 왕정체제를 지지하고 민중지배체제를 적극적으로 비판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바알세불과 동일시하였다.

 

뮌히하우젠 남작 이야기를 정신없고 산만하며 좌충우돌에 우왕좌왕하는 단순한 모험담과 여행담으로 국한하고 가볍게 보아 넘길 수 있다. 상당수의 내용 또한 그러하다. 여기에는 당대인의 시각에 부합하는 오락적 요소가 가득하며 오늘날의 시각에서 볼 때 정치적, 도덕적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요인도 분명 존재한다. 반면 당대 부조리에 대한 스치듯 지나치지만 뼈있는 비판이랄지 노예무역에 대한 인도주의적 반대, 권력층과 지배세력의 가식과 허위에 대한 암시 등도 제법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제법 진지한 자기성찰과 역사인식도.

 

나는 그곳에서 세월의 황폐함과 파괴에 비탄을 금하지 못했습니다. 한때 웅장했던 건축물은 시간의 파괴에 대한 참으로 우울한 증거로서 스스로를 전시하고 있었던 겁니다. 나는 유적 주위를 몇 바퀴 거닐면서 지상의 모든 존재들이 지닌 덧없고 일시적인 본성에 대해 명상에 잠겼습니다. (P.121-122)

 

라스페는 재승박덕의 전형적 인간이다. 글 속에 그의 회한이 숨어있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겠는가. 그의 인생행로를 꼬이게 만든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절도와 사기로 점철된 어두운 삶이 오히려 뮌히하우젠 남작의 이야기를 편집하도록 하는 동인이 되었으니 또한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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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이드데일 로맨스 대산세계문학총서 50
나다니엘 호손 지음, 김지원.한혜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주홍글자><일곱 박공의 집>을 읽은 후 가벼운 마음으로 이 책을 들었다.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생각이 든 것은 불과 몇 쪽을 채 읽지 않아서이다. 호손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전작들을 염두에 두고 기대했다면 난감하면서도 당황스러울 것이다. 이 작품은 전혀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으니까. 그렇다. 이 소설은 기존에 호손이 즐겨 사용했던 전지적 삼인칭 시점을 과감히 포기하였다. 따라서 독자는 호손 특유의 농담과 빈정거림 등 이전 작품들에서 해학미를 안겨주었던 요소를 여기서 찾기 어렵다. 내용 전개는 커버데일이라는 작중 화자의 일인칭 시점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호손은 작품 형식면에서 여전히 로맨스를 채택한다. 서문에서 작가는 로맨스를 옹호하며 이렇게 말한다.

 

환상세계, 즉 현실 세계와 너무 흡사하여 적당한 거리에서는 그 차이가 무언지 도저히 알 수 없지만 묘한 마법의 분위기가 감도는 세계는 아직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그러한 분위기가 미국의 로맨스 작가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 (P.8)

 

현실이되, 현실 같지 않은 현실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작가는 보다 젊은 시절 잠시 참여하였던 사회주의 공동체 농장을 되살린다. 농장 시절은 그에게 썩 유쾌한 추억은 아니었던 듯하다. 공상,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한 실행은 이내 현실의 차디찬 벽을 넘어서지 못하였으니. 어쨌든 자신이 구상한 의도에 부합하여 가공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무대로서 작가는 농장을 선택하였다.

 

그것은 필경 내 일생에서 가장 낭만적인 일이었고, 백일몽에 지나지 않았지만 명백한 사실이었기에 허구와 현실 사이를 이어주는 발판 역할을 하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P.8)

 

호손 특유의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는 여기에서도 변함없다. 독자는 블라이드데일 농장을 다루는 작가에게서 두 가지 태도를 보게 된다. 먼저 농장을 묘사하면서 자연스레 독자에게 심어주는 불길한 전조, 그리고 커버데일의 생각과 판단으로 드러내는 농장의 미래에 대한 암시적 예감. 커버데일이 농장에 도착한 날의 악천후는 어둡고 거친 나날의 전망을 상징한다. 이상의 실현에 대한 부푼 기대와 희망을 품은 인물의 의지적 결단을 비추는 현상으로서는 이례적인 기술이다.

 

밤이 깊어가고 외부의 고독이 창문을 통해 우리를 엿보고 있었다. 그 고독은 그 순간 우리끼리만 재잘거리고 부산을 떨고 있는 따뜻하고 밝은 공간에 바짝 달라붙은, 또 다른 존재인 양 음산하고 거칠고 희미했다. (P.51)

 

사일러스 포스터의 충고는 블라이드데일의 삶이 목가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각인시켜 주며, 게다가 커버데일은 곧바로 건강이 악화되니 그야말로 설상가상이다. 이는 곧바로 커버데일의 의구심과 회의감으로 표현된다.

 

정말이지 좀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탐욕스럽고 서로 싸우고 이기적인 세상으로부터 이제 막 결별하자마자 제기된 첫 번째 문제가 바로 어떻게 하면 외부의 속물들보다 우위를 점하느냐 하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라니. (P.30)

 

전반적으로 볼 때, 이 사회는 좀처럼 함께 단결하기 어렵고, 또 오래 버티리라고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이른바 구부러진 지팡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유별난 개성을 지닌 사람들을 한 다발로 묶는다는 것은 용이하지 않다. (P.82)

 

작가는 항상 인간 성격의 탐구에 관심이 많다. <주홍 글자>가 죄와 죄의식, 그리고 양심이 주된 관심 영역인 반면, <일곱 박공의 집>에서는 위선과 인간상의 대비-탐욕적 인간상과 순수하고 이상적 인간상-라는 관점에서 탐구하였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커버데일의 시각에서 주요 인물 세 명-홀링스워스, 제노비아, 프리실라-을 이해하고 추측하고 판단한다. 농장의 무수한 다른 사람들과 그 밖의 인물들은 중요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작중 화자인 커버데일은 그러나 주인공이라고 부르기에는 마땅치 않다. 그는 관찰자다. 그는 사건의 핵심에서 살짝 비켜나있는 인물이면서 완전히 궤도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이 일에서 내 자신의 역할은 특이하게도 보조적인 입장이었다. 그것은 고전극에서 코러스의 역할과 비슷했는데, 자신의 중요한 미래에 대해서는 초연하면서도 다른 이들의 운명에 대해서는 대단한 희망이나 염려, 환희나 비애를 제공하는 그런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공감이 코러스와 다른 인물들 사이를 결속시켜준다. (P.123)

 

그는 다소의 건전한 상식과 충분한 이성과 (시인으로서) 빈약한 상상력을 지니고 있다. 그의 분석과 어조는 매우 합리적이며 현명한 판단력을 보여주며 정의감도 제법 충만하게 보인다. 반면 자기현시도 꽤 있는 편이다.

 

나와 같은 통찰력을 지닌 사람......그녀는 나의 뛰어난 이성과 감성을 높이 평가할 수 있어야 했다......이는 내가 너그러운 동정심과 예리한 직관력을 가지고 (P.200)

 

커버데일의 눈에 비치는 홀링스워스는 박애주의라는 이상에 매몰되어 버린 나머지 독선적이고 도의심을 잃어버리는 사람이다. 게다가 그는 무엇보다도 커버데일이 은연중 사랑의 감정을 품게 되는 제노비아와 프리실라의 마음을 송두리째 훔친 용서할 수 없는 연적이기도 하다. 홀링스워스가 작중에서 점차 부정적으로 변모되게 술회되며 화자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는 것은 양가의 감정이 복합 작용한 탓이리라.

 

하나의 대의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들은 항상 이러하다......그들에게는 사랑도 동정심도 합리적인 사고도 양심도 없다. 또한 그들은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한 어떠한 친구 관계도 유지하려 하지 않는다. (P.91)

 

세상의 박애주의자들이 빠지기 쉬운 죄는 도덕적으로 독선적이기 쉽다는 거죠. 그 사람들의 도의심은 다른 고결한 사람들의 도의심하고는 달라요. 그 사람들은 살아가는 동안 언제, 어디서일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정의를 경시하게 됩니다. 그들은 공공의 목적을 위해서는 개인의 양심 같은 건 버려도 괜찮다고 믿게 되죠. (P.168)

 

소위 박애주의라는 것은 직업에 반영될 때는 사회를 향한 정력적인 충동으로 인해 흔히 유용하다고 인정되지만, 한 개인을 지배하는 열정이 늘 한쪽 방향으로 치우쳐 흐르기 때문에 개인에게는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을 해치거나 심하게 망가뜨리려는 경향이 있다. (P.300-301)

 

프리실라와 제노비아는 여러모로 두드러지게 대조적이다. 그들이 이복자매라는 사실도 이러한 기질적, 운명적 대조성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솔직히 프리실라의 캐릭터는 그다지 흥미롭지는 못하다. 순진무구하다고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단순하고 착하기 그지없으며 때로는 모자라는 게 아닐까 의심마저 드는 인간상이랄까. 그것이 오히려 보호본능을 일깨워 주지만 결코 주체적인 삶의 영위자는 아닌 것이다. 그래도 스스로는 만족해하니 충분하다.

 

프리실라의 불완전함과 결함은 즐거운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면서 나를 사로잡았다......달리기 경주를 하는 프리실라의 독특한 매력은 달릴 때의 연약함과 불규칙한 움직임에 있었다. (P.95)

 

프리실라의 막연하고 겉으로 까닭 없어 보이는 충만한 행복감의 비결은 순결한 가슴을 축복하는 애정 때문인 것 같았다. (P.100)

 

나는 모두가 듣는 데서 물어보았다. 프리실라, 어디 가는지 알고 있나?

프리실라가 대답했다. 전 잘 몰라요. (P.216)

 

그리고, 제노비아! 농장에 생기와 화려함을 드리워 주고 커버데일의 가슴을 뛰게 만든 여인. 그녀는 아름답고 멋진 여성을 뛰어넘어 여권에 대한 당당한 주장을 펼칠 지성도 겸비한 인물이다. 그런 제노비아가 홀링스워스의 박애주의 이상에 함몰된 것은 단순한 사랑을 넘어선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었을까. 자신과 자신의 삶에서 부족하고 결여된 빛나는 가치, 그것을 홀링스워스는 지니고 있었고 불가능에 가까울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헌신할 마음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제노비아는 커버데일의 경악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의 드높은 이상마저도 기꺼이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곧 놀람과 동시에 화가 났는데, 그때의 제노비아가 단지 비굴해 보였기 때문이다. 제노비아의 눈에 다소 눈물이 어른거렸고, 그것은 분노보다는 깊은 회한의 눈물이었다. (P.156)

 

여자가 아주 조금만 인습에서 빗나가도 그만 타락한 여자로 전락해 그 후로는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되지요. (P.277)

 

후반부에 가서 우리는 제노비아의 과거 또는 정체를 추정할 수 있게 된다. 그녀는 죄의 수렁에서 벗어나오기 위해 블라이드데일에 귀의했지만 결코 빠져나오지 못하였다. 그로 인해 그녀는 사랑을 잃었고, 끝내 자신마저 잃게 되었다. 블라이드데일을 회상하는 그녀의 입을 통해 우리는 그녀의 한때마나 기쁨과 희망, 그리고 실망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정말 바보 같은 꿈이었어요.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유쾌한 여름날을 안겨주었고, 그 동안만이라도 밝은 희망을 주었죠. 그 꿈은 더 이상 아무 도움도 안 돼요. (P.280)

 

왜 우리는 삶의 다른 모든 방식을 버리고 몇 개월 전의 소박한 생활에만 만족해야 하는 거지요? 물론 그때가 좋았어요. 하지만 다른 삶의 방식 역시 좋고 어쩌면 더 나을 수도 있어요. (P.206)

 

인간에게 이상과 꿈은 현실을 지탱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삶을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원동력이다. 우리가 이상을 찬양하고 지향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추레한 삶을 도덕적으로 고양시켜 정화시켜 줄 것이라는 기대감에서다. 도덕과 종교적 윤리가 자칫 독선과 해악으로 변질되기 쉽다는 사실을 호손은 전작들에서 충분히 제시하였다. 이상도 마찬가지다. 이상은 무소불위와 전지전능이 아니다. 이상의 환상만으로 현실은 변화하지 않는다.

 

우리의 새로운 생활에 도사린 위험은 우리가 진정한 농사꾼이 될 수 없다는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농사꾼 외에는 아무것도 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의구심이었다. 우리의 계획이 단지 이론 단계에 머물러 있었을 때 우리는 노동의 정신적 의미화라는 달콤한 환상에 젖어 있었다. (P.85-86)

 

이상이 현실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시점에서부터 이상의 빛과 호소력은 깨어진다. 더 이상 눈부시고 화려하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던 구석과 그림자가 새삼스레 눈에 띄기 시작한다.

 

사실 이곳 생활은 이제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만큼 불편하고 지루했다. 이곳은 이제 더 이상 예전의 블라이드데일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갑작스레 퇴색해버렸다. (P.174)

 

주택의 앞면은 언제나 인위적이다. 그곳은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받기 때문에 외관을 포장하고 꾸미고 숨기는 곳이다. 진실은 뒤쪽에 있으며, 허세와 기만의 전위는 앞에 있다. (P.188)

 

그래서 커버데일은 일찍이 홀링스워스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나는 누군가가 죽음으로 이 장소를 신성한 곳으로 만들기 전까지는 이곳을 시적이고도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인생의 체제로 느끼지 못할 겁니다! (P.164)

 

제노비아의 생과 사는 블라이드데일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생시의 제노비아는 참으로 아름답고 화려하였지만, 죽은 제노비아는 추하고 끔찍스럽다. 제노비아의 자살 시도에 대한 커버데일의 논평도 자못 냉소적이다. 블라이드데일의 이상도 애초에는 얼마나 찬미할 만하였던가?

 

죽은 모든 형상들 가운데 제노비아의 시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추한 모습이리라는 생각이 든다. 젖은 옷이 끔찍스럽게 굳어 있는 제노비아의 사지를 감싸고 있었다. 그녀는 그야말로 죽음의 고통을 그대로 표현한 대리석 상이었다. (P.290)

 

홀링스워스에 대한 제노비아의 비난은 거짓 사랑을 깨달은 여인의 원성이자 맹목적 이상에 헌신하는 도덕적 위험성에 대한 경고이다.

 

당신의 간악한 죄는 당신의 깊은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양심을 억누르고 자신의 마음에 지은 엄청난 죄에요! 당신은 이 아이를 언제든 희생시킬 각오가 되어 있었잖아요. (P.270)

 

그럼에도 블라이드데일을 추억하고 회상하는 커버데일의 상념은 온정적임을 숨길 수 없다. 그것은 가슴 아픈 상처이지만 한때의 열정과 시간과 노력을 경주하였던 소중한 시절의 기억이므로. 결과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고매한 이상을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였으므로.

 

우리의 멋진 제노비아 만큼이나 각각 우수한 재능을 지녔던 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고귀한 소망을 기울였던 체제에 대해 이렇게 자기만족과 우월감에 차서 그럴 자격이라도 있다는 듯이 찬성과 비난을 드러내 보이자 나는 심기가 불편해졌다. (P.207)

 

그러니 그밖에 무엇을 후회하게 되든지, 내가 한때 이 세상의 운명에 대해 갖가지 소망을 갖고, 그래! 그러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 실천에 옮길 충분한 믿음과 힘이 있었다는 것을 죄악시하거나 어리석은 짓으로 치부하지 말자.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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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풍선이 남작의 모험 비룡소 클래식 34
고트프리트 뷔르거 지음, 한미희 옮김, 도리스 아이젠부르거 그림 / 비룡소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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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속에 말을 기둥에 매어놓은 후 깜빡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말이 교회 첨탑에 매달려 발버둥치고 있더라는 이야기, 늑대의 추격을 받아 전력으로 도망치는데 늑대가 말을 잡아먹고 대신 썰매를 끌더라는 이야기 등. 어릴 적 어디선가 읽어본 기억이 명백하다. 이때까지는 아마 그림형제 동화집일 거라고 막연히 추측했는데 이제 보니 뮌히하우젠 남작의 허풍담일 줄이야.

 

이 책에 나오는 일화들이 대개 그러하다. 사냥 중에 아니면 전쟁 중에 겪는 온갖 희한하기 그지없는 경험담 또는 모험담. 적정을 살피기 위해 대포알에 올라타고 왔다 갔다 하는 사례, 배고픈 사자에 쫓겨 도망치는데 앞에는 커다란 악어가 입을 쩍 벌리고 있다는 경우. 게다가 신기한 재주를 거느린 하인들 덕분에 당시의 터키, 즉 투르크 술탄의 보물 창고를 몽땅 털어올 수 있었다는 얘기. 남작의 입담은 인간계에 그치지 않는다. 달세계 탐험을 두 번이나 하지 않나 땅속 세상이 궁금하여 화산 아래로 뛰어들었다가 불카누스 신과 비너스 여신을 만났다는 등등.

 

누구라도 뮌히하우젠 남작이 들려주는 재밌는 이야기의 신빙성에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단지 흥미로운 허풍일 뿐이라고. 이에 대해 남작은 적극적으로 진실성을 주창한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수시로. 물론 스스로도 진실성을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내가 겪었던 이야기를 잘난 체 뻐기지 않고 해 줄 때면 늘 그렇듯, 나는 사실을 정확하게 전하려고 무척 애쓰고 있어. 한 마디도 빼거나 보태지 않고, 이야기를 부풀리지도 않고, 되도록 뒷전에 서서 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말이야. (P.30)

 

미리 말해 두지만, 나는 절대로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아. 잘났다고 뻐기지도 않고. 그냥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고개를, 최대한 고개를 높이 들고 다닐 뿐이야.

얘들아, 몇 번이나 말했듯이, 나는 근본적으로 겸손하고, 거짓말을 털끝만큼도 안 하는 사람이야. 만약 통닭처럼 내 몸의 털이 다 빠지면? 그럼 다른 표현을 생각해야겠지. (P.52)

 

18세기 독일의 한 남작으로부터 파생된 황당무계한 일화담이 이렇게까지 인기를 끌었던 이유를 생각해본다. 교통, 통신이 발달하지 못했고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했던 당대에서 살던 고장 내지 국가 밖으로의 여행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국적인 요소, 머나먼 미지의 세계로의 모험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받게 된다. 여기서 뮌히하우젠 이야기의 한 성격은 해명된다. 다만 단순한 허풍담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하는 문제는 남아있다.

 

자고로 우습고 재밌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인기를 끌었다. 서양만 해도 이솝 우화집, 가르강튀아와 라블레, 돈키호테 등에서 알 수 있다. 군주 곁에는 익살스러운 행동과 언조로 웃음을 자아냈던 광대가 항상 있었다. 민간을 면면히 흐르는 각종 민담과 만담, 재담 등의 대중적 우스개는 불변한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이 각박하고 냉엄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하여 험한 세상을 버티고 살아가게 도와주는 자양분과 같다. 게다가 상상과 환상을 창조하고 가공하는 능력은 나날이 중요도가 더해진다. 무엇보다도 남작의 이야기에는 재미 자체 외에 다른 불순한 의도를 지니고 있지 않는 순수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독자 모두는 대번에 알아차린다.

 

한 잔 술과 흥미로운 모험담(그것이 허풍일지라도)으로 껄껄하고 기분 좋게 웃다보면 문득 세상사가 하찮아진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아웅다웅 하면서 조금이나마 남을 앞서려고 이겨보려고 바싹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 채 언제나 전전긍긍하는가?

 

아름다운 우리 지구를 내려다보며 나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해 생각했단다. 인간들은 왜 서로 욕하고, 왜 티격태격 싸울까? 왜 아름다운 우리 지구를 더럽히고 망가뜨릴까? 세상만사가 다 무의미한 것 같더라고. (P.58)

 

뮌히하우젠 남작의 모험담의 원전은 크게 두 가지다. 라스페가 영국에서 펴낸 판본이 하나 있고, 뷔르거가 후에 독일어로 재편집한 판본이 이것이다. 다만 이 책의 경우 뷔르거 판본을 저본으로 하여 발브렉커가 어린이용으로 다시 편집하고 체제와 내용을 가다듬었다. 따라서 뷔르거 판본과 어느 정도 차이점이 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대략적 내용은 대동소이할 테지만 뷔르거 원작을 중시할 것인지 독자의 눈높이와 전달력에 초점을 둘 것인지는 아마도 판단의 사안일 것이다. 하긴 모험담 중에는 뮌히하우젠 남작의 일화 외에도 다양한 전래담을 그의 이름으로 끌어 모았다고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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