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위인이란 무엇인가 / 자기신념의 철학 ㅣ 동서문화사 월드북 127
랄프 왈도 에머슨 지음, 정광섭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에머슨의 덫에 사로잡힌 형국이다. 애초 가벼운 심정으로 그의 에세이를 한 번 읽으려고 하였다가 잘 정리가 되지 않아 다른 책들을 펼치다 보니 뒤엉켜버리고 말았다. 거기다 태생적 게으름에다 공·사적 사정까지 겹치다 보니 진도는 한 달 이상이나 지지부진하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는 ‘위인이란 무엇인가’라고 하여 에머슨의 <대표적 인물(Representative Men>)을 담고 있다. 후반부는 ‘자기신념의 철학’이란 타이틀로 에머슨의 에세이, 일기 등에서 발췌한 내용들을 수록하고 있는데, 유명한 에세이집에 수록된 작품들 외에 다양한 출처를 지니는 점이 특색이다.
1. 위인이란 무엇인가 [대표적 인물]
에머슨은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구축한 인물이다. 기독교적 전통에다 동양사상을 덧붙이고 여기에 고유의 사념으로 용해하여 이른바 초월주의를 구현하였다. 그의 작품들, 즉 에세이, 연설문, 시 등은 모두 이 사상을 찾아가기 위한 과정 또는 사상 체득 이후 독자적 관점에서 바라본 현상을 반영하고 있다.
나폴레옹, 괴테, 셰익스피어, 스베덴보리, 플라톤, 몽테뉴라는 6인의 역사적 인물을 에머슨이 <대표적 인물>로 굳이 다른 위인과 구분하여 소개하는 까닭은 이들에게서 구별되는 대표성 내지 전형성을 발견하여서다.
먼저 나폴레옹은 새로이 부각되기 시작한 신흥 중산계층의 대표자다. 신흥세력은 자신의 앞길과 전진을 가로막는 구체제를 타파할 필요성을 느꼈으며 이를 구현할 인물로서 나폴레옹을 지지하였다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개인적 능력에 더하여 시대적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불세출의 정치 지도자로써 급부상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과 동시대를 살아 간 괴테는 전혀 다르다. 나폴레옹이 사회적, 시대적 요구를 대변한 반면, 괴테는 당대의 내면적 요구를 대표하는 위인으로 본 것이다. 시대의 요구는 정신적, 사상적 측면에도 영향을 미쳤다. 진리 탐구를 가로막는 일체의 장애물을 제거하고 이성과 사고의 힘으로 순수한 지성의 탐구를 요구했던 것이다. 이에 부응한 인물이 괴테라고 에머슨은 보았다. 다만 에머슨이 보기에 괴테가 지향한 것은 “보편적인 자연·보편적인 진리를 탐구해 위대한 자아완성의 사람”(P.58)이 되는 것이어서 보편적인 영원한 진리를 중시하는 에머슨에는 다소 아쉬움을 남긴다.
어쨌든 나폴레옹과 괴테에 대한 에머슨의 평가는 이러하다.
나는 인간의 내적인 자연스런 목소리를 압살하는 형식뿐인 인습이나 권위주의를 타파한 인류의 대표자로서 나폴레옹과 괴테를 나란히 가리키고 싶다. 이 두 사람은 누구 못지않은 철저한 리얼리스트이고 동시대뿐만 아니라 다가올 미래의 사람들을 위해 위선이나 허식이라는 거목의 뿌리를 과감하게 없앤 것이다. (P.62-63)
에머슨은 거듭 강조한다. 시대와 민중이 요구하는 것을 선취하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한 차원 높게 발전시켜 실현하는 인물, 그가 대표적 인물이고 바로 영웅이라는 점을. 문학에서 그가 주목하는 인물은 셰익스피어다. 셰익스피어에 대한 문학적 평가는 과거와 현재가 똑같이 찬사일색이며 에머슨도 마찬가지다.
그는 도저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의 문학적인 세련이 극에 달하고 있다. 그것은 작가적 자질로도 최고봉이라고 해도 좋은데 그의 재능은 좁은 뜻에서의 작가라는 틀을 훨씬 뛰어넘고 있는 것이다. (P.78)
에머슨은 순전한 문학적 시각에서 셰익스피어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진정한 시인은 셰익스피어처럼 대지에 굳건히 뿌리내리고 시대성과 민중의 숨결을 온몸으로 생생하게 체감하고 호흡하면서 거목으로 우뚝 서야 한다.
다만 셰익스피어는 문학적 세련과 기교에 치중하다 보니 인간과 자연 속에 내재된 덕 자체의 의의에 대한 근원적인 통찰을 결여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자의든 타의든 그는 최고의 엔터테이너의 지위에 만족했다는 게 에머슨의 판단이다.
스베덴보리는 사상적으로 에머슨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임에 틀림없다. 에머슨의 초령이라는 개념과 스베덴보리의 만물의 근원에 대한 동일철학은 결국 본질적으로 같은 의미다. 에머슨의 말대로 인간 정신은 이성과 직관, 합리와 신비 사이를 방황하고 있다. 스베덴보리가 집중적으로 탐구한 부분은 직관적이며 신비한 영적인 세계이다.
스베덴보리는 계시를 받고 천국과 지옥을 두루 여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거기서 자신이 보고 듣고 깨달은 바를 대중에게 각성시키기 위하여 다양한 노력에 헌신하는데 우리에게는 기독교의 또 다른 분파로만 이해될 뿐이다. 이것이 에머슨이 토로하는 아쉬움이다.
아쉽게도 스베덴보리의 영적인 탐구가 오로지 신학적인 방향으로만 향해져 있었으므로, 그와 같은 모처럼의 대기획도 약간 독선적이고도 불충분한 것이 되고 말았다. (P.102)
기독교적 신비와 상징체계의 구현에 집착하다 보니 비기독교계는 당연히 무관심하고 기독교계 내부에서도 거부당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종교의 도덕적 본질을 놓친 데 대한 전직 기독교 목사의 비판은 의미심장하다.
플라톤의 등장으로 ‘아득한 아시아적 상상력의 시대’가 마지막을 고하고 대신 ‘빛나는 유럽적 지성의 시대’가 막을 열었다. (P.122)
에머슨은 플라톤을 유럽정신의 원형으로 간주한다. 플라톤에게서 나타나는 동일성의 원리는 스베덴보리는 물론 인도 사상과 함께 에머슨의 지적 형성에 기여하였다. 커다란 영의 존재, 만물의 통일, 유한과 무한을 향한 동시적 지향, 이 모든 것은 결국 플라톤뿐만 아니라 에머슨의 사유를 가리킨다.
이 책의 기이한 점이자 아쉬움은 몽테뉴 편을 누락하였다는 점이다. 이것이 번역의 저본으로 삼은 원본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번역자의 임의적 판단 내지 실수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모처럼 만에 에머슨의 뛰어난 저작이 번역되면서 흠결 있게 나온 점은 안타깝다.
2. 자기신념의 철학 [에세이 등]
앞서 밝혔듯이 후반부는 에머슨의 에세이, 일기 등에서 발췌한 내용들로 구성된다. 출처를 찾기 어려운 글들도 제법 있다. 한편 수록작 중에서 ‘자신감을 살려라’[자기신뢰], ‘보상을 생각해 본다’[보상], ‘자연에 대하여’[자연]은 별도로 촌평할 기회가 있으므로 여기서는 제외한다.
1) 나의 길
여기서 에머슨은 기도의 본질을 명확히 한다.
기도란 가장 고귀한 관점에서 인생의 사실들을 고요한 마음으로 비추어보는 행위이다. 그것은 기쁨에 넘쳐 바라보는 영혼의 독백이며, 선한 업적을 선언하는 신의 정신이다. (P.199)
그리고 자기신뢰를 강조한다. 자신을 믿고 고집하라는 것인데, 이것은 무작정 고집부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원칙을 타협하지 말라는 뜻이다.
당신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자는 ‘오로지 당신’밖에 없다. 또한 당신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은 ‘원칙의 승리’밖에 없다. (P.208)
2) 나의 사랑
이 글은 에머슨의 제1 에세이집 중에서 <사랑>에 해당한다.
통속적 사랑론을 전개하는 대신 에머슨은 영혼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사랑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사랑의 감정은 인간이 야만을 벗어나 문명으로 진입하는 첫 순간이라고 선언한다. 부분적 사랑은 전체적 사랑의 단계로 확대되고 발전되며 사랑을 통해 인간은 완성되고 독자적인 영혼이 된다.
그는 이제 새로운 지각과 새롭고 더 훌륭한 목적, 그리고 성격과 목적에도 엄숙함을 지닌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다. 그는 더 이상 그의 가족과 사회의 부속물이 아니며, 중요한 무엇이다. 그는 인간이고 영혼이다. (P.215)
세월이 흐를수록 지성과 마음의 정화야말로 처음부터 미리 짐작되었고 준비된 것이며, 그들이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진정한 결혼임을 깨닫게 된다. (P.223)
3) 나의 일기
일기에서 주요 대목, 명문장 등을 발췌한 것인데 단편적인 문장들이므로 별도로 다루지 않는다.
4) 런던내기의 나라
에머슨은 유명한 두 권의 에세이집 외에 <영국인의 성격(English Traits)>이라는 저작도 남기고 있는데, 영국의 땅, 인종, 능력, 태도, 부, 대학, 종교, 문학 등을 두루 다루고 있다. 이 책에 소개된 부분은 그 중 제9장 Cockayne을 번역한 내용이다. 코케인은 전형적 뉴욕인을 양키라고 부르듯 런던내기를 지칭하는 속어다. 에머슨이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영국인의 자존심 또는 자만심이다. 섬나라의 편협성과 한계성을 노정하면서도 스스로에 대한 솔직함과 거리낌 없는 자신만만함을 표출하는 영국인의 성격의 단면을 강조한다.
5) 에이브러햄 링컨
링컨의 죽음을 추모하는 글이다. 아마도 링컨 암살 후 장례식 즈음에 맞추어 식사로서 쓴 글이 아닐까 추정해 본다. 링컨에 대한 후대인의 평가가 아닌 당대인, 그것도 저명한 지성인의 인식과 평가를 알 수 있어 흥미롭다.
6) 농사짓기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문구처럼 농사는 인간의 대표적인 원초적 노동이다. 에머슨은 이 글에서 농부의 역할, 농부를 돕는 자연의 기능과 농부와 관계 등을 서술하고 있다. 그는 농부를 진정한 자연인의 표상으로 평가한다.
7) 시골생활
내용적으로는 진짜 시골에서 사는 생활이 아니라 사실상 자연 속의 건전하고 건강한 생활, 즉 전원생활을 의미한다. 아울러 삭막하기 그지없는 도시와 학교, 교회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에머슨은 일찍이 <자연론>에서 시작하여 자연의 순수와 미덕을 예찬하는 글들을 지속적으로 남기고 있다. 이러한 자연 편향과 애호가 여기서도 나타난다.
우리는 이 믿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한 몸에 지니고 채색된 원소에 우리의 손을 씻으며 이 빛과 형체들 속에 우리의 눈을 적신다. 하나의 축제라고 할 ‘전원생활’의 호화로운 잔치, 용기와 미와 힘과 멋으로 장식된 가장 자랑스럽고 즐거운 연회가 이 순간 열리는 것이다. (P.271)
자연은 우리 안의 가장 선한 것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자연은 비록 사람이 살지 않는다 할지라도 아니 사람이 살지 않으므로 신의 도시로서 사랑을 받는다. (P.274)
인간은 타락했다. 그러나 자연은 똑바로 서서 인간에게 신성한 감정의 유무를 탐지해 주는 특이한 온도계로서 봉사한다. (P.275)
이 글은 표현 하나, 문장 하나가 햇빛에 산란되어 반짝이는 물결처럼 빛나고 눈부시다. 전체적 통합성과 구축적 전개보다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순간의 표현과 사상의 표현에 집중한다는 느낌이랄까.
8)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
에머슨의 제1 에세이집에 수록된 <역사>에 해당한다.
에머슨은 자신의 초월주의 관념에 견주어 역사를 해석한다. 개체를 넘어선 공통되고 보편적 본성과 마음을 초영혼이라고 한다면, 역사는 이 초영혼에 새겨진 일의 기록이라고 본다.
모든 개인에게는 공통된 한 마음이 있다. 모든 사람은 이 마음에 그리고 이 마음의 전체에 통하는 입구이다......이 마음에 남겨진 여러 가지 일의 기록이 역사이다. (P.358)
외부 세계와 사건은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보편적 본성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따라서 본질에 비추어 현상을 확인하고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모든 역사는 주관적이라는 에머슨의 역사관이 성립한다.
역사의 동일성이란 것은 역시 내재적이고, 그 다양성은 역시 외재적이다. 외면에는 사물의 무한한 변화가 있고, 중심에는 원인의 통일이 있다. (P.366)
다만 이 두 가지 사실, 즉 마음은 하나이다, 그리고 자연은 그 대응물이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서 역사는 읽히고 씌어져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P.381)
우리는 항상 자기의 사적 경험에서 역사의 사실을 확인한다. 모든 역사는 주관적으로 된다. 달리 말하면 세상에는 참된 뜻에서의 역사는 없다. 다만 전기가 있을 따름이다. (P.363)
역사는 사실의 단순한 연대기가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 역사는 보편적 본성의 발현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지혜로서 이다.
모든 역사는 우리의 친화 관계의 범위를 통찰하고, 사실을 표상으로 보는 지혜로써 씌어져야 한다. (P.382)
자기계발서에 가까운 몇 편의 에세이만 반복하여 소개되었던 에머슨의 <대표적 인물>이 유일하게 번역된 책이라 한계에도 불구하고 반갑다. 차제에 보다 완전한 형식으로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고 에머슨의 에세이도 전체가 체계적으로 번역 출간되면 더욱 기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