곶감과 수필 태학산문선 301
윤오영 지음, 정민 엮음 / 태학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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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문학입문>을 읽고 윤오영을 다시 알고 싶어졌다. 수필문학을 향한 뜨거운 애정, 수필문학을 정립하기 위한 단호한 의지와 정연한 논리 등은 일개 단순한 글쟁이로 치부할 수 없는 높은 식견과 고고한 기상을 보여준다. 명수필가 피천득의 외우(畏友)라고 하니 범인은 분명 아닐 성 싶다.

 

그의 글은 간결하고 명료하다. 일체의 구질구질함과 중언부언이 없으며 가식 없는 담백함이 배어난다. ‘측상락(厠上樂)’을 읽으면 그의 성품을 알 수 있다. ‘처빈난(處貧難)’에서는 그의 오롯한 삶의 태도를 깨닫게 된다.

 

......대단스럽지도 못한 남들과 어깨를 맞추기 위하여 자기의 신조와 고집을 꺾고, 한가로운 자유의 행복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P.171)

 

윤오영은 수필문학은 작가의 삶과 일상에 토대를 둔 것이야 한다고 믿는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일상의 단편을 계기로 촉발한 수상(隨想)이다. ‘방망이 깎던 노인’, ‘마고자같은 잘 알려진 글들뿐만 아니라 사발시계도 무 구덩이를 파는 아내의 뒷모습에서 예전에 시계를 파묻던 기억을 되살린다.

 

수필문학은 청춘의 글이 아니요 중년과 노년의 글이다. 독자의 가슴을 요동치게 하는 격정적인 글이 아니다. ‘곶감과 수필’, ‘엽차와 인생과 수필’, ‘양잠설등 비유 대상은 다르지만 작가의 뜻은 오롯하다. 평범한 생활에서 위대성을 낚아 올리려면 수양과 연륜이 필요한 법이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 향기를 거두고 품을 쌓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수필이란 거기서 우러난 차향이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 진실을 깨치고, 그것을 아끼고, 또 음미하고 기뻐하고, 눈물과 사랑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 즐길 수 있는 글이다. (P.150)

 

윤오영의 호는 치옹(痴翁)’이다. 무엇이 그리 어리석을까. 그도 일개 생활인으로서 분명 야망을 품었을 것이다. 야심을 좇고자 하면 꼿꼿함을 버리고 낮은 곳으로 몸을 숙여야 한다. 그는 도저히 그리 할 수가 없다. ‘찰밥’, ‘치아에서 배어나는 씁쓸함은 시속의 명리에 맞추지 못하고 고집스럽게 고결함을 추구한 데 대한 일말의 자탄이리라.

 

어머니! 야망에 찼던 어머니의 아들은 이제 찰밥을 안고 흰 터럭을 바람에 날리며, 손등으로 굵은 눈물을 닦습니다. (P.36)

 

그의 글쓰기는 중국 명과 청 시대의 소품 및 연암 박지원을 전범으로 삼는다. 전자에서 동양적 수필문학의 현대적 근원을 발견한다. 연암의 글을 열애하지만 한계도 잊지 않는다. 여러 작품들에서 등장하는 한국적, 전통적 제재가 단지 회고적 취향을 벗어나 은은한 여운을 현대 독자에게도 드리우는 연유다. ‘촌가의 사랑방’, ‘오동나무 연상등이 풍기는 정서가 그러하며, 작가가 동매실주인(桐梅室主人)’이란 호를 사용한 것도 같은 뜻에서일 것이다.

 

한 세기 전에 태어났고 반세기 전에 발표된 글에 당대적 감각을 요구할 수 없다. 그의 사상적, 문학적 배경은 분명히 우리 고전과 인문학적 소양에 근거한다. 그럼에도 진부하지 않고 잔잔한 여운을 주는 까닭은 그의 문장이 사상의 표피가 아닌 심금을 건드려서일 것이다. 이 점이 이전 독서에서 내가 간과하거나 덜 주의를 기울인 부분이다.

 

모름지기 바램은 윤오영의 수필작품들과 <수필문학입문>이 한데 모아져 괜찮은 장정을 입히고 당당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으면 한다. 남긴 저작도 그다지 없으니 이 자체가 그의 문학전집이 될 터이니.

 

마지막으로 그의 독서론에서 인상 깊은 대목을 따온다.

 

나는 옛사람의 글을 읽고, 내 체험 위에서 내 인생을 음미하며, 내 영혼은 천고미도(千古未到)의 사색의 길을 끝없이 걸어간다.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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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연애시대 창비청소년문학 3
벌리 도허티 지음, 선우미정 옮김 / 창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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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너에게>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 본다. 청소년문학이지만 도허티의 주인공은 여전히 고교과정을 마치고 대학 진입을 앞둔 제스라는 여학생이다. 작가가 유달리 이 나이 때의 주인공을 선호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청소년과 성인의 과도기이자 접점이기에 생각할 여지가 많다고 판단해서일까.

 

나는 허물을 벗고 있는 한 마리 뱀이었다. 반짝거리는, 생명을 가진 그 무엇, 짙은 풀숲에 웅크린 보석 같은 것. 나는 진저리를 쳤다. 소름이 돋았고, 무서웠다. (P.18)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다>라는 영화가 있다. 본 적은 없지만 제목만은 친숙하다. 비밀, 가장 친한 친구, 연인, 부부 또는 가족 사이에도 비밀이란 존재는 빠지지 않는다. 꽁꽁 숨겨놓은 비밀, 그저 하찮다면 무시하고 외면해버릴 텐데, 그로 인해 마음을 온전히 열어놓지 못하고 오해와 갈등을 유발한다면 어찌할지. 창피함과 두려움과 아픔을 무릅쓰고 서로의 비밀을 공유한다는 것이 용이할까.

 

가족이란 매우 소중하고 친밀한 관계이지만 역설적으로 가까우면서도 먼 관계이기도 하다. 상처 입으면 회복되기 어렵기에 오히려 더한층 조심하고 피하게 된다. 가족 간에 비밀을 털어놓고 울고 웃으며 마음의 벽을 허무는 게 가능할까. 밝고 행복하고 평온한 얼굴의 이면에 가슴 아픈, 시릴 듯이 눈물겹고 파문을 일으킬 과거사. 더구나 그것이 가족사에 얽힌 것이라면.

 

대학 입학을 위해 떠나는 걸 축하하는 파티에서 제스의 가족들은 서로의 비밀과 사랑 이야기를 공유한다.

 

제스 외조부모 브라이디와 잭의 사랑 이야기. 가톨릭과 개신교의 종교적 차이 극복은 물론 사랑 하나에 전부를 걸고 홀로서기를 시도하는 대담한 로맨스. 사랑은 용기다.

 

백마 탄 왕자님을 꿈꾸는 여늬 소녀들과 다를 바 없는 제스의 할머니 도로시. 무도회에서 만난 왕자님과의 극적인 로맨스를 꿈꾸지만 공상에 허우적대는 대신 현실을 인정한다. 삶은 현실이므로.

 

제스의 아버지 마이클의 결혼 이야기는 제스 자신에게도 중요한 관심거리이므로 제법 길게 이어진다. 사고뭉치이자 스스로 실패작이라 여기는 그가 맘에 드는 여자친구를 사귀기 위해 동분서주 애쓰는 장면, 반면 마음씨는 모질지 못해 자신을 쫓아다니는 여자애를 끊지 못하고 쩔쩔매는 마이클의 모습이 절묘하게 오버랩 되면서 제스 엄마와 만나게 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사랑은 동정이 아니다. 루씨가 마이클에게 말했듯이.

 

이게 바로 사랑에 대한 내 생각이야. 평등하지 않다면, 그 사랑은 진짜가 아니야. 그리고 진짜가 아닌 사랑은 소유할 가치도 없는 거지. (P.118)

 

제스에겐 큰오빠가 있었다. 몸이 성치 못하고 어른이 될 때까지 살 수 없었던. 대니에 대한 추억은 가족 간 아련함의 근원이다. 그리고 죄책감도. 첫째 아이와는 사뭇 달랐던 제스의 작은오빠 존. 가족 간은 혈연의 끈으로 묶여 있지만 그것이 친밀과 공감, 유대를 담보하지는 못한다. 서로 간에 마음을 열고 상대를 받아들이기 위한 의식적 노력은 타인과의 관계에서만 해당하지 않는다. 비둘기 돌보기를 통한 제스 아빠와 작은오빠 간에 메워지는 간극. 사랑은 노력이다.

 

운하 길의 데이비 할아버지 편에서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 역시 사랑의 의미에 대해서다. 지탄받고 처벌받을 당사자는 열일곱 살의 기억에 갇혀 있는 노인네이지만, 제스는 달리 생각한다. 외롭고 상처받은 이를 따스하게 보듬을 수 있는 마음. 사랑은 따뜻함이다.

 

그제야 나는, 할아버지가 어떤 의미로 사랑이란 키스하고 껴안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말한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P.178)

 

루이 이모할머니와 길버트 할아버지 간의 관계 역시 사랑의 한 형태임에 틀림없다. 그것이 행복한 사랑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랑을 위해 일체의 것을 포기해야 하며, 그 사랑이 어둡고 슬픈 결말로 이어질 것을 알고 있다면. 카슨 매컬러스의 주인공들만큼이나 기이하며 슬픈 사랑이다. 사랑은 사랑 자체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제스 자신의 이야기. 도로시 할머니처럼 디스코장에서 만난 멋진 남자. 탄로 난 정체와 상처 입은 첫사랑. 그리고 스티브와 만남과 작별. 사랑은 깨우침이다.

 

제스가 타고 떠나는 기차는 어린 시절을 벗어나 성년으로 향하는 여정을 상징한다. 축하파티는 일종의 통과의례다. 가족에서 사회로, 독자적인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한 기쁨과 고통이 교차하는.

 

하지만 나는 어린애가 아니었다. 그리고 절대로, 결코, 두 번 다시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지 못할 터였다. 뱀이 드디어 허물을 벗은 것이다.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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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문학입문
윤오영 지음 / 태학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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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오영의 수필작품에 대한 소감은 <방망이 깎던 노인>(범우사) 편에서 이미 밝혔다.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개인적 호오가 병존한다. 교과서에 실릴 정도라면 참으로 빼어난 수필문학 작품일 텐데 심경에 썩 그리 다가오지 못하는 뭔가 애매함이랄까. 여기에는 결국 일개 고등학교 선생님이 끄적거린 신변잡기적 에세이가 아니겠는가 하는 폄하의식도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가 쓴 수필문학 개론서가 있다 길래 호기심에 슬쩍 읽어보았다. 대충 보다 재미없으면 덮어버리라 생각하고. 그리고 단숨에 끝쪽까지 읽고 말았다. , 이분 보통분이 아니시구나. 절로 탄성이 나온다.

 

문학 장르를 구분할 때 시, 소설, 희곡 그리고 수필로 분류한다. 전자의 셋은 성격이 분명하고 작가의 문학적 위상도 높다. 후자의 경우는 학창시절의 교과서에도 앞의 셋을 제외한 일체의 문학적 글. 또한 붓 가는 대로 쓴 글등으로 표현하고 있던 게 기억난다. 게다가 미셀러니니 에세이니 하는 구분도 떠오른다. 물론 시중에는 모두 수필류를 에세이로 지칭하지만.

 

저자는 문학으로서 수필의 정체성과 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일평생 노력하였다. 이 책은 그 노력의 산물이며 수십 년이 경과한 지금 시점에도 여전히 신선한 자극을 준다. 전체 2부와 부록으로 구성되었는데, 1부는 수필문학 글쓰기, 2부는 수필문학 개론으로 구분된다.

 

저자에 따르면 훌륭한 수필 쓰기는 웬만한 시나 소설 쓰기보다 어렵다. “수필은 인생의 낙수”(P.24)란 표현처럼 수필은 작가의 개인적 체험과 사상을 바탕으로 하며 익명과 허구의 탈을 쓸 수 없기에 벌거벗듯이 작가 자신을 독자에게 노출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

 

문맥(文脈), 문세(文勢), 문정(文情)과 서사(敍事), 설리(說理), 서정(敍情), 사경(寫景)은 본격적 수필 쓰기에 필요한 기법에 관한 내용이다. 소제목 자체가 생경한 한자투여서 딱딱한 느낌을 주지만 막상 내용 자체는 이해에 어려움이 없다. 각 항목을 설명하는 저자의 어조는 명쾌하며 단호하기조차 하다.

 

내용의 줄거리를 따라 정서를 실어가는 물줄기가 수필의 문맥이라면 이 물줄기를 밀고 나가는 기세가 곧 문세다. 이것이 없으면 글의 힘이 없고, 생생하게 넘쳐 흘러 독자를 육박하는 긴장이 없다. (P.41)

 

설리에 낭만이 없으면 문장이 각색하고 기경한 표현을 동반하지 아니하면 청신한 맛이 없고, 유머가 없으면 문장의 고갈을 면하기 어렵고, 정열이 없으면 진실감을 주기 어렵고, 묘사의 구사가 아니면 독자에게 기쁨을 주기 어려우니, 문장이란 실로 어려운 것이다. (P.77)

 

저자는 동시대에 명수필로 회자되던 글들을 자신의 엄격한 잣대로 평가한다. 피천득, 김용준, 이은상, 박종화, 양주동, 계용묵, 정비석, 김진섭 등의 글이 좋은 문장으로 예시되거나 줄줄이 흠결을 눈앞에 드러낸다.

 

저자는 무엇보다도 수필의 문학성을 확립하고 싶어 한다. 통상의 수필에서 비문학 유형을 배제한 순수한 문학으로서의 수필을 저자는 수필문학으로 지칭한다. 이하에서 잠시 저자의 수필관을 들여다본다.

 

수필은 자유로운 산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문학작품으로서의 산문이라야 한다. (P.161)

 

다른 문학은 마음 속에 얻은 것을 밖으로 펴지만, 수필은 밖에서 얻은 것을 안으로 삼킨다. 그러므로 수필의 대상은 자기다. 결국 수필은 외로운 독백일 수밖에 없다. (P.174)

 

수필과 인생은 생활의 연마 속에서 함께 형성되어 가는 것이다. (P.188)

 

수필은 그 전체에서 하나의 시격(詩格)을 얻어야 한다. 이것이 특히 동양적인 수필의 높은 경지다. (P.199)

 

솔직히 수필문학을 이렇게 본격적으로 고찰한 저서는 처음 접해 본다. 대개는 문학개론의 일개 지나가는 파트에 불과할 뿐인데. 더군다나 수필문학을 대하는 저자의 태도는 엄정하며 확고하다. 그것은 문학으로서 수필을 바로잡고자 하는 저자의 노심초사의 산물일 것이리라.

 

이쯤에서 저자 윤오영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렇듯 높은 기준을 설정한 그였다면 자기 자신의 글도 이 기준을 적용하였을 것은 분명하다. 그의 수필문학 작품들의 수가 그리 많지 않은 것은 엄정한 비판의 잣대에서 살아남은 글들만 세상에 공개하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제대로 된 평양냉면은 초심자가 처음 맛보면 그 무미함에 실망을 느낀다고 한다. 이후 수차 기회를 갖다보면 서서히 담백하며 미묘한 맛에 빠져든다. 나 또한 그러한 경험을 하였다. 그의 방망이 깎던 노인마고자등 일련의 수필작품은 수십 년 전의 시대적 배경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교과서 수록작이기에 어쩔 수 없이 묻게 된 진부한 손때를 벗겨보면 집필 당시 순수한 민낯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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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 박사의 섬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87
허버트 조지 웰즈 지음, 한동훈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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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스의 공상과학 소설은 기술문명의 찬가가 아니다. 그는 과학기술 발전 이면에 드리운 어두운 미래를 응시한다. 자연을 정복하고 신의 영역에 도달할 것을 자부하는 인류 문명의 오만과 독선을 냉엄한 시각으로 전망한다. 대표적 일련의 작품인 <우주전쟁><타임머신> 그리고 이 소설도 주제의식을 공유한다.

 

생체실험. 마루타로 대변되는 잔인하기 그지없는 인체실험이 떠오른다. 당연 불법이면서 비도덕, 비윤리, 비인간적인 처사이므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행위. 그렇다면 동물실험은 어떨까? 꽤 많은 사람들이 학창 시절 수업 시간에 개구리 해부를 해본 경험을 가지고 있다. 거창하게 실험이란 전문용어를 언급할 필요도 없이 식용 목적으로 사육 및 도축되는 무수한 동물의 시한부 생명들을 보라. 나아가 요즘은 생체실험조차도 불필요하다. 유전자 조작이란 보다 편리하고 효과적인 작업 기술이 있으니. 웰스는 의도하지 못하였지만 생체실험은 현대의 유전자 조작을 비추는 거울이다.

 

전에 그들은 짐승이었고 환경에 본능을 맞추면서 하나의 생명으로서 나름대로 행복했으리라. 그런데 지금은 인간성이란 족쇄에 묶여 몸부림친다. 결코 사그라들지 않는 두려움 속에 산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법 때문에 불안해한다. 고통으로 시작된 그들 가짜 인간으로서의 삶은 하나의 긴 내적 몸부림이자 모로에 대한 기나긴 공포에 다름 아니다. 무엇을 위해? (P.139)

 

모로 박사는 과학기술 종교를 신봉하는 현대인의 전형이다. 자연은 인간 존재를 위한 부속물에 불과하므로 언제든지 개조하거나 정복해야 할 대상이다. 인간은 자연을 마음대로 할 무소불위의 당연한 권리를 지녔다는 오만. 모로 박사는 연구윤리를 상실한 과학자의 표본이다. 과학자는 지적 호기심을 위해 과학 연구에만 매진할 뿐 그 이외의 것은 외면하는 게 당연하다는. 과학기술이 인간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증대할수록 과학자에 대한 책임성의 요구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심장이 쫄깃쫄깃 하는 스릴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모로 박사의 실험에 대한 주인공의 오해와 공포. 낯설기 그지없는 동물 인간들의 기괴한 형체와 습성. 미지의 세계와 문명에 접촉하는 긴장과 모험. 본질적 정체를 알 수 없기에 더욱 공포스러운 동물인간들의 행동양식.

 

완벽한 동물의 자세를 취하고서 눈빛을 번쩍이며 공포에 뒤틀린 그 불완전한 인간 얼굴을 보면서 나는 녀석이 인간과 다를 바 없음을 새삼 깨달았다. (P.137)

 

동물 인간의 본성 회귀는 사필귀정이자 인간 능력의 한계를 명시한다. 독자는 괴물화된 동물인간에 두려움을 품지만 동물 자체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품는다. 동물적 야만은 명백하기에 오히려 덜 두렵다. 가면 아래 은폐된 인간화된 야만성은 한층 무섭다. 주인공이 문명세계에 복귀하고 군중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공포에 휩싸이는 까닭이다. 우리 자신이 동물 인간이 될 수 있다.

 

나는 내 동포들을 둘러보고는 두려움에 빠져든다. 날렵하고 밝은 얼굴들, 무표정하고 위험스런 얼굴들, 단정치 못하고 불성실한 얼굴들을 지켜본다. 그들 중 이성적 정신의 차분한 소유자는 아무도 없다. 그들에게 동물성이 휘몰아치는 듯 보인다. 머잖아 여기 섬나라 사람들의 퇴화가 대규모로 재연될 것처럼 보인다. (P.190)

 

후대 전 세계를 휩쓴 전체주의 광풍과 종교적 광신은 웰스를 조지 오웰에 앞선 예언자로 각인시키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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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정 40년 - 4판 범우문고 20
변영로 지음 / 범우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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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날로 차가워진다. 음주운전 처벌은 계속 강화되며, 소위 주폭(酒暴) 단속도 엄격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음주 후 사고를 치더라도 관대히 용서 받았다. 술 먹고 그런 건데 뭐. 아니면 사람은 좋은데 술이 웬수지 하면서 말이다. 수주 변영로의 명정기(酩酊記)도 요새라면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글들이다.

 

참으로 대담하면서 일견 낯 두꺼운 글들이다. 명정(酩酊)이란 한마디로 곧 술주정이다. 글쓴이가 술 마신 내력의 자술서인 동시에 대취하여 술주정을 부린 광태를 기술한 글이다. 이 수필집이 출간된 연도가 1953년이며, 대다수의 수록글들이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하물며 글쓴이가 당대의 저명한 시인이라면 한구석의 조금이나마 탐탁지 않은 심정마저 스러진다.

 

아무나 명정기를 쓰지는 못한다. 적어도 글쓴이처럼 5, 6세부터 시작한 음주 내력에 술을 무엇보다도 사랑하고 그 이상의 주량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제아무리 담대한 인물이라도 자신의 술주정을 사회에 드러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너무나도 부끄러운 치부인 동시에 대체적으로 도덕적으로도 떳떳치 못한 법이다. 그럼에도 명정기를 거침없이 써내려가는 글쓴이라면 겉과 속이 한결같고 가식 없는 인품임을 알게 해준다. 스스로 도덕군자인양 위선을 부리지 않는다.

 

이른바 혼술이 아닌 바에야 술친구가 있을 것이며 술자리 전후로 맞닥뜨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당대의 저명한 문인, 학자들의 드러나지 않은 일화를 알게 되는 재미도 남다르다. 겨울밤 길바닥에 뻗어있던 수주의 목숨을 홍난파가 구해 준 일. 시인 황석우가 접시를 던져 뺨에 큰 상처가 났던 사건. 위당 정인보를 위하여 그의 아버지에게 술동무를 해드린 일. 오상순, 염상섭 등과 통음한 후 나체로 소를 타고 시내로 향하던 황당한 사건은 물론 염상섭과 대취한 후 취한들과 3 1의 난투를 벌인 일대 사건 등 무수한 사건과 사고. 우스꽝스럽고 때로는 낯부끄러운 일조차도 그는 솔직담백하다.

 

술 먹는 사람만이 술의 해와 폐를 참으로 가슴 쓰리게 느끼고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술 깨인 뒤에 치르고 겪는 그 고통 그 비참은 필설로 표현할 길이 없다. 때때로 자살까지도 염에 두어 본 적이 한두 번 아니었다. (P.84~85)

 

술 먹는 사람에게는 이런 종류의 기록이 종종 유지(有之)하나 지내 보면 턱없기 그지없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도덕적 추태감을 골수 깊이 느끼게 되는 것이다. (P.100)

 

때로는 대취하면 일경(日警)의 뺨마저 후려갈기던 당당한 기세의 그였지만, 음주의 폐해를 완전히 외면하지는 못한다. 애주가치고 금주, 애연가치고 금연을 생각해보지 않고 실행해보지 않은 이는 드물 것이다. 이에 그는 금주패를 몸에 차고 무려 수년간이나 금주를 결행하였으며, 수년 지나서 재차 금주를 결의하고 일간지에 금주 단행론을 공표하기도 하였다. 그가 여기서 초지일관하였다면 이 책은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지만, 사기 결혼(?)으로 재혼하는 데는 성공하였다.

 

정신이 말짱한 사람이 술 취한 인물을 바라보는 심경은 복합적이다. 당황스러우면서도 흥미롭다. 이 사람이 술 마시면 이렇게 변하는구나. 새삼 신기하다. 게다가 술주정이 그다지 민폐를 끼치지 않을 정도면 구경의 재미도 쏠쏠하다. 일견 부럽기조차 하다. 명정에 이를 정도의 정신적 여유와 애주에 이르는 몰입, 그것을 담아낼 주량과 체력. 속물들은 자칫 속내가 드러날까 봐 마시는 둥 마는 둥 술잔을 입에 댈 뿐이다.

 

수주의 명정기를 읽다 보면 그래도 그는 참으로 깨끗한 인물임을 알게 해준다. 가난한 시인이자 영문학자로서 시속과 세태에 물들거나 굴하지 않고 의연함을 견지하였다. 그의 연보를 통해 독립선언서를 일찍이 영어로 번역하였거나 해방 후 영시집을 발표하고 영문 일간지를 발간하는 등 당대 현실에서 위민과 애국의 길을 나아갔다. 이는 명정기의 마지막 편 나의 음주벽에서도 선명히 드러난다.

 

아는 이는 아다시피 나는 호주를 지나 탐주를 하였고 그간 금주 연한 몇 해를 빼어 놓고는 무일불취(無日不醉)하였으나 의롭지 않고 떳떳치 않은 술은 되도록 사퇴했다......(중략)......나는 불의와 악수는커녕 타협하여 본 적이 없음을 50이 지난 오늘날 자허(自許) 삼아 말하여 두는 동시에 어느 권세나 금력 앞에 저두평신(低頭平身)하여 본 적조차 없다. (P.14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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