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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문학입문
윤오영 지음 / 태학사 / 2001년 5월
평점 :
절판
윤오영의 수필작품에 대한 소감은 <방망이 깎던 노인>(범우사) 편에서 이미 밝혔다.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개인적 호오가 병존한다. 교과서에 실릴 정도라면 참으로 빼어난 수필문학 작품일 텐데 심경에 썩 그리 다가오지 못하는 뭔가 애매함이랄까. 여기에는 결국 일개 고등학교 선생님이 끄적거린 신변잡기적 에세이가 아니겠는가 하는 폄하의식도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가 쓴 수필문학 개론서가 있다 길래 호기심에 슬쩍 읽어보았다. 대충 보다 재미없으면 덮어버리라 생각하고. 그리고 단숨에 끝쪽까지 읽고 말았다. 아, 이분 보통분이 아니시구나. 절로 탄성이 나온다.
문학 장르를 구분할 때 시, 소설, 희곡 그리고 수필로 분류한다. 전자의 셋은 성격이 분명하고 작가의 문학적 위상도 높다. 후자의 경우는 학창시절의 교과서에도 앞의 셋을 제외한 일체의 문학적 글. 또한 ‘붓 가는 대로 쓴 글’ 등으로 표현하고 있던 게 기억난다. 게다가 미셀러니니 에세이니 하는 구분도 떠오른다. 물론 시중에는 모두 수필류를 에세이로 지칭하지만.
저자는 문학으로서 수필의 정체성과 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일평생 노력하였다. 이 책은 그 노력의 산물이며 수십 년이 경과한 지금 시점에도 여전히 신선한 자극을 준다. 전체 2부와 부록으로 구성되었는데, 1부는 수필문학 글쓰기, 2부는 수필문학 개론으로 구분된다.
저자에 따르면 훌륭한 수필 쓰기는 웬만한 시나 소설 쓰기보다 어렵다. “수필은 인생의 낙수”(P.24)란 표현처럼 수필은 작가의 개인적 체험과 사상을 바탕으로 하며 익명과 허구의 탈을 쓸 수 없기에 벌거벗듯이 작가 자신을 독자에게 노출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
문맥(文脈), 문세(文勢), 문정(文情)과 서사(敍事), 설리(說理), 서정(敍情), 사경(寫景)은 본격적 수필 쓰기에 필요한 기법에 관한 내용이다. 소제목 자체가 생경한 한자투여서 딱딱한 느낌을 주지만 막상 내용 자체는 이해에 어려움이 없다. 각 항목을 설명하는 저자의 어조는 명쾌하며 단호하기조차 하다.
내용의 줄거리를 따라 정서를 실어가는 물줄기가 수필의 문맥이라면 이 물줄기를 밀고 나가는 기세가 곧 문세다. 이것이 없으면 글의 힘이 없고, 생생하게 넘쳐 흘러 독자를 육박하는 긴장이 없다. (P.41)
설리에 낭만이 없으면 문장이 각색하고 기경한 표현을 동반하지 아니하면 청신한 맛이 없고, 유머가 없으면 문장의 고갈을 면하기 어렵고, 정열이 없으면 진실감을 주기 어렵고, 묘사의 구사가 아니면 독자에게 기쁨을 주기 어려우니, 문장이란 실로 어려운 것이다. (P.77)
저자는 동시대에 명수필로 회자되던 글들을 자신의 엄격한 잣대로 평가한다. 피천득, 김용준, 이은상, 박종화, 양주동, 계용묵, 정비석, 김진섭 등의 글이 좋은 문장으로 예시되거나 줄줄이 흠결을 눈앞에 드러낸다.
저자는 무엇보다도 수필의 문학성을 확립하고 싶어 한다. 통상의 수필에서 비문학 유형을 배제한 순수한 문학으로서의 수필을 저자는 수필문학으로 지칭한다. 이하에서 잠시 저자의 수필관을 들여다본다.
수필은 자유로운 산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문학작품으로서의 산문이라야 한다. (P.161)
다른 문학은 마음 속에 얻은 것을 밖으로 펴지만, 수필은 밖에서 얻은 것을 안으로 삼킨다. 그러므로 수필의 대상은 자기다. 결국 수필은 외로운 독백일 수밖에 없다. (P.174)
수필과 인생은 생활의 연마 속에서 함께 형성되어 가는 것이다. (P.188)
수필은 그 전체에서 하나의 시격(詩格)을 얻어야 한다. 이것이 특히 동양적인 수필의 높은 경지다. (P.199)
솔직히 수필문학을 이렇게 본격적으로 고찰한 저서는 처음 접해 본다. 대개는 문학개론의 일개 지나가는 파트에 불과할 뿐인데. 더군다나 수필문학을 대하는 저자의 태도는 엄정하며 확고하다. 그것은 문학으로서 수필을 바로잡고자 하는 저자의 노심초사의 산물일 것이리라.
이쯤에서 저자 윤오영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렇듯 높은 기준을 설정한 그였다면 자기 자신의 글도 이 기준을 적용하였을 것은 분명하다. 그의 수필문학 작품들의 수가 그리 많지 않은 것은 엄정한 비판의 잣대에서 살아남은 글들만 세상에 공개하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제대로 된 평양냉면은 초심자가 처음 맛보면 그 무미함에 실망을 느낀다고 한다. 이후 수차 기회를 갖다보면 서서히 담백하며 미묘한 맛에 빠져든다. 나 또한 그러한 경험을 하였다. 그의 ‘방망이 깎던 노인’과 ‘마고자’ 등 일련의 수필작품은 수십 년 전의 시대적 배경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교과서 수록작이기에 어쩔 수 없이 묻게 된 진부한 손때를 벗겨보면 집필 당시 순수한 민낯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