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 하나는 거짓말 (니트 에디션) (3종 중 1종 랜덤)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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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은 한강과 더불어 내가 애정하는 작가다. 근년 들어 잠시 소홀했는데, <이중 하나는 거짓말> 니트 에디션을 구매하면서 다시 관심을 두려고 한다. 내가 고른 파란색 표지는 채운 버전이라고 한다.

 

이 소설은 세 명의 청소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모두 24장 구성인데, 지우, 소리, 채운이 번갈아 가며 각 장의 화자를 담당한다. 그들이 풀어내는 이야기의 결은 밝거나 따뜻하지 않다. 차분하고 자성적인 그들의 내레이션은 흔히 기대하는 성장소설의 희망적인 성격과는 완연히 다르게 흘러갈 것임을 짐작케 한다. 게다가 작가 김애란도 초기작과는 달리 이후 작품들에서 상당히 다른 변모를 보이지 않았던가.

 

세 명 모두 가정사가 딱하다. 지우는 가정을 버린 아버지를 제외하고 엄마와 함께 엄마 애인 집에서 함께 사는데, 그 엄마가 어느 날 바다에 실족사한다. 채운은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실수로 아버지를 찌르고 엄마가 대신 감옥에 간다. 아버지는 식물인간 상태다. 그나마 소리가 낫다. 중병을 앓던 엄마는 교통사고로 사망하지만 그래도 멀쩡한 아버지가 있으므로. 작가는 이들을 같은 학급으로 몰아넣는다. 그전에는 서로 간에 전혀 알지 못하였던 그들을.

 

세상에 인간은 있되

구원도 없고 기적도 없고 선의도 없다는 걸 잊었습니다. (P.12)

 

아마도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분위기는 위와 같으리라. 대체로 어둡고 고요하게 가라앉고 고개를 들어도 눈앞에 밝은 빛을 찾을 수 없는 듯한. 작가는 자신의 말처럼 삶의 비정함을 전면에 내세우고 싶었던 것일까. 표제와도 같이 거짓 없는 삶은 없다는 것처럼. 단순한 자기소개에서조차 거짓이 개재되어 있듯이 삶 자체에는 얼마나 수많은 거짓이 있게 마련인가. 진실을 부각하기 위해 거짓을 허용하든,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거짓을 용인하든 진실과 거짓이 혼재된 것이 삶의 실체다.

 

등장인물은 제각기 거짓말을 내뱉는다. 의도가 좋고 나쁨과는 상관없이. 채운의 거짓말은 부작위에 의한 거짓이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를 찔렀음을 자백하지 않으며, 소리에게 아버지의 손을 잡아달라고 부탁할 때 진짜 이유를 밝히지 않는다. 채운 엄마는 자신이 부정을 저질렀음을 채운에게 밝힌다. 소리는 채운에게 그의 아버지의 상태를 솔직히 말하지 않는다, 그것도 완전한 오해에서. 소리 아버지는 소리 엄마의 죽음과 관련하여 아내의 절실한 부탁을 들어주지 못하였음을. 지우와 지우 엄마는 어떠한가. 엄마의 죽음을 지우는 단순 사고로 믿지 않는다. 불치병 진단을 받은 엄마가 자신을 속이고 의도된 죽음을 선택하였을 것으로 확신하고 용서하지 못한다.

 

작가는 주인공들을 깊은 수렁에 빠뜨린 채 방치하지 않는다. 절대적으로 홀로인 그들 곁에는 충직한 동반자가 있다. 지우에게는 용식이, 채운에게는 뭉치가. 용식이를 돌보며 지우는 따돌림 시절을 버텨낼 수 있었고, 만화를 그리면서 비참함을 견뎌낼 수 있었다. 채운에게 뭉치는 가족과 같은 존재다. 세상에 홀로 남아있는 그에게 유일하게 믿음과 애정을 베푼 게 뭉치가 아니던가. 소리는 그런 게 없다고? 아니다, 소리는 용식이가 죽기 전까지 그를 돌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아버지가 곁에 있다.

 

삶의 가장 엄혹한 시절을 겪으면서 세 사람은 서서히 자신의 길을 찾아간다. 소리는 무덤에서의 고백으로 엄마와 화해하고, 지우는 피가 섞이지 않은 선호 아저씨를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지우가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을까 전전긍긍하던 채운은 그날 밤 지우의 심적 상태가 무엇이었는지를 알아차리고 오히려 놀라게 된다. 자신은 그토록 처절히 불행하였건만 그 광경을 보면서 동경하던 사람이 있을 줄이야.

 

하지만 삶은 이야기와 다를 테지. 언제고 성큼 다가와 우리의 뺨을 때릴 준비가 돼 있을 테지. 종이는 찢어지고 연필을 빼앗기는 일도 허다하겠지.’ (P.232)

 

채운 엄마의 간절한 소망처럼, 그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하고 살게 될 것이다. 자신과 가족을 둘러싼 삶이 제아무리 가혹하게 자신의 뺨을 때릴지언정 어쨌든 살아내는 것이 그들의 몫이므로. 삶의 희로애락을 겪어야 비로소 어른이 될 수 있다. 어른이 된다는 것, 성장한다는 것은 힘들고 고달픈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 없다. 제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것을 거부할 수 없기에 최선을 다해 그것을 무릅쓰고 나아가야 한다. 삶의 이야기는 이렇게 형성된다.

 

그런데 그런 것도 성장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리는데 거의 표도 안 나는 그 정도의 변화도? 혹은 변화 없음도? 지우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P.233)

 

구성과 형식, 내용 전개 면에서 작가가 한땀 한땀 공들인 티가 묻어난다. 전혀 무관한 세 사람의 만남과 어울림, 그네들의 일상과 삶이 교묘하게 교차하거나 스쳐 지나가도록 하는 설정. 지우의 만화를 별도로 자세히 다룸으로써 그것 자체로 지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물론 이를 읽는 채운의 복잡한 내면도 연동되도록 하는 구상. 1인칭 화자의 제한된 시점임에도 독자는 화자의 심정은 물론 자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다른 인물의 내면도 다소나마 헤아릴 수 있다.

 

<비행운><두근두근 내 인생>에서 변화된 작가의 글쓰기는 여전하다. 어두운 삶의 현장에서도 한 줄기 빛과 웃음을 찾던 작가는 성장소설의 외양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성장소설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인가. 작가가 한껏 그려내려 애쓰는 삶의 희망적 측면이 그다지 희망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면 어찌할 것인가. 작가도 그들의 미래를 낙관하지 못하는 듯 희망 섞인 바람을 나타낼 뿐이다.

 

채운의 가정을 들여다보면서 새삼 개인의 성장에 있어 가정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이상적 뜻에서 가정은 언제나 찬미의 대상이다. 즐겁고 행복해야 마땅한 그 무엇으로. 현실은 과연 그러한가. 우리가 주변에서 항상 접하게 되는 것은 가정의 위기가 아니던가. 지우가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정작 채운은 지긋지긋하게 여겼던. 이상적이고 참다운 가정의 가치와 실현 곤란성에 이율배반성에 탄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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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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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스펙트럼

공생 가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감정의 물성

관내분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작가 김초엽을 알게 된 것은 <지구 끝의 온실>을 통해서다. 학교 추천 도서라고 하여 아이 책꽂이에 있길래 한번 읽어 보게 되었다. 나쁘지는 않지만 특별한 인상을 받지도 않았다. 다른 작품을 더 읽을 생각은 없었다. 2024년 고려대 도서관 대출 순위 상위 10권 내에 포함되어 있다길래 궁금해서 이 책을 읽는다.

 

인류의 미래가 유토피아로 나아갈 것인가, 디스토피아로 갈 것인가는 알 수 없지만, 개조된 DNA로 만들어진 신인류가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신인류가 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단절된 사회와 갈등의 대결 구도는 여러 영화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가.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처럼 순수한 장밋빛 의도로 출발한 기술이 밝은 미래로 이어지지 않는 모습은 돌고 돌아 결국 원점으로 회귀한다. 인간의 행복과 행복한 사회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신인류의 한계를 넘어 새로 만든 지구 밖 마을의 평화와 행복은 진실한 것인가. 무슨 연유로 순례자들은 시초지 지구에 남기를 선택하는가. 그토록 많은 괴로움이 그들에게 닥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때 나는 알았어.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 (P.54)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사실 우리가 빛의 속도로도 갈 수 없다면이 올바른 표제다. 워프 항법과 딥프리징의 기술, 이어서 고차원 웜홀 통로로 머나먼 우주여행이 실용화되었다면 인류와 지구 차원에서는 더없이 환영받는 발전이라고 하겠다. 모든 진보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가까운 우주 슬렌포니아가 근처에 웜홀 통로가 없기에 졸지에 먼 우주가 되어 경제성 부족으로 항로가 폐쇄된 지 백년 이상 지났다. 슬렌포니아에 가족이 있는 정거장의 노인은 이산가족이 되었다. 노인은 되묻는다. 사람 사이를 멀어지게 만드는 기술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P.181)

 

인간과 외계인의 조우는 우리 인간이 우주에서 지성을 가진 유일한 존재인가라는 질문에서 비롯된다. 외계인의 가능성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상반적이다. 인류의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는 누군가를 기대하는 동시에, 그것이 인류의 미래에 어둠을 드리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서. <스펙트럼>에서 외계인은 지구 밖 우주에 존재하지만, <공생가설>은 외계인이 인간 내부에 깃들어 있다고 가정한다. 전자에서 화자의 할머니는 여러 루이와 관계를 형성하면서 그들의 문화와 체제를 관찰하고 이해하려 애쓴다. 색상의 차이로 의미를 표현하는 무리인들은 우리네 기존 편견을 깨뜨린다. 할머니가 온갖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행성에 관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이유는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집단으로서 인간은 타자에 대한 이해에 앞서 그들을 향한 정복과 이익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므로.

 

<공생가설>은 영화 트랜스포머를 연상시킨다. 지구에 이미 먼 우주의 선진 문명을 가진 집단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그들이 개별 인간의 뇌 속에 자리 잡고 인간 문화 형성과 발달을 주도한다는 것, 인간이 일정 나이에 접어들면 유아기의 기억과 함께 개체를 떠난다는 것으로.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들을 그리워한다. 이 정도 되는 외계인이라면 충분히 공생 가능하리라.

 

류드밀라의 행성을 보며 사람들이 그리워한 것은 행성 그 자체가 아니라 유년기에 우리를 떠난 그들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P.141)

 

인간이란 존재는 이성만으로는 헤아리기 어렵다. 완벽한 논리를 거부하고 충동적 감정에 휘말리거나, 자신에 대한 이익을 거부하고 오히려 손해를 감수하는 선택을 감행하기도 한다. 타자의 눈에는 어이없지만 당사자는 굳이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 나만 좋으면 그뿐이다. <감정의 물성>처럼. 감정을 보고 만지고 냄새 맡을 수 있는 물체로 형상화할 수 있다면 좋은 감정이라면 환영을 받을 것이다. 반면 부정적인 감정은 혹시 마약류 같은 폐해를 낳지 않을까. 화자와 애인 보현의 인식차는 이해 불가능한 그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나는 내 우울을 쓰다듬고 손 위에 두기를 원해. 그게 찍어 맛볼 수 있고 단단히 만져지는 것이었으면 좋겠어.” (P.216-217)

 

우주 저편으로 넘어갈 터널 우주인이 될 수 있던 재경은 우주로 가는 대신 바다로 뛰어든다. 가윤의 우주 영웅은 삽시간에 온 세계의 비난 대상으로 전락한다. 힘든 시험과 신체 개조를 거치면서 인류의 대표자, 나아가 모든 여성과 소수자의 지향으로 추앙받던 그녀는 무슨 까닭으로 우주선 탑승을 거부했을까.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는 재경 이모를 이해하려는 가윤과 그녀의 행동을 통해 유의미한 선택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개조된 신체로 심해 탐사가 가능해진 재경은 처음부터 우주보다는 바다에 관심이 더 많았다. 그는 이기적 동기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였다. 가윤은 터널 너머 저편 우주를 보고 싶었고, 대단한 광경이 아님을 인정한다. 그녀의 인정은 그녀가 실제로 목숨을 걸고 저편 우주로 갈 수 있었기에 가능한 것임을 우리는 안다. 작품해설에서는 재경에 대한 비판이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더불어 확대되었다고 하는데, 과도한 해석이다.

 

<관내 분실>은 과학소설의 외양을 띤 여성주의 문학이다. 죽은 엄마의 영혼이 마인드 도서관 내에 보관되었다는 미래 과학적 설정은 물론 흥미롭다. 게다가 인덱스가 삭제되어 존재하면서도 사실상 존재하지 않게 된 엄마의 마인드도. 딸 지민은 생전 사이가 좋지 않은 엄마의 마인드를 대면하러 도서관에 온다. 그녀가 임신을 하였기 때문이랄까. 엄마의 마인드를 되찾기 위해 개인을 고유하게 드러낼 수 있는 물건을 찾으면서 소설은 여성주의로 넘어간다.

 

원래의 이름을 잃어버린 엄마. 세계 속에서 분실된 엄마. 그러나 한때는, 누구보다도 선명하고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이 세계에서 존재했을 김은하 씨. 지민은 본 적 없는 그녀의 과거를 이제야 상상할 수 있었다. (P.267)

 

북디자이너였던 결혼과 출산, 양육으로 엄마라는 이름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생전에 엄마는 이미 세계와 단절되어 있었기에 사후의 마인드 분실은 오히려 새로울 게 없다. 사회도 가족도 그저 엄마라는 역할만 인식하고 인정할 뿐 개인 누구라는 고유성을 알아주지 않기에. 지민은 마침내 마주한 엄마의 고유한 본체를 인식하며 엄마를 이해한다고 하며 눈물을 흘린다. 딸과 엄마, 모녀간 여성성의 불화와 화합. 아마도 이 작품이 주목받은 건 과학소설에 여성주의를 절묘하게 결합해서라는 의견이다. 개인적으로 다소 작위적이라는 생각이지만.

 

과학소설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과학기술이 구현된 미래를 다룬다. 이 책에만도 인간 개조, 외계인, 우주여행, 의식의 기록화, 물성화된 감정 등을 다루고 있다. 통상적 공상의 범위 내에 있는 소재도 있지만 어떤 것은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참신함으로 무장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각 작품은 낯설지 않다. 과학기술의 발전에도 인간 영혼과 감정은 변치 않아서다.

 

인간이 인간성을 포기하지 않는 한 백년이 지나도, 천년이 지나도 여전히 인간사는 복잡다단할 것이며, 그것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도 해결되기 어렵다. 어쩌면 그로 인해 한층 복잡해질 수도 있다. 이 작품집에서 표출되는 약자와 소수자를 향한 멸시와 혐오, 경제적 부로 양분되는 사회 체제, 경제성의 논리로 외면받는 인간의 기본권은 그것을 알려준다. 과학기술이 발달할수록, 혹시나 외계인과 조우하게 된다면 우리는 더욱 고민해야 할 것이다. 참다운 인간과 인간성은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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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5년 1월 11일(토) 20:00

장소 :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

연주 : 양지윤 (첼로)

프로그램

  -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5번 C단조 BWV 1011

  -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G장조 BWV 1007

  -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3번 C장조 BWV 1009


* 세줄평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은 여러번 들었지만, 실연은 처음이다. 확실히 1번과 3번이 귀에 와닿는다. 5번을 프로그램 중간에 놓았으면 어떨가싶다. 첫곡부터 어둡고 장중한 분위기가 가뜩이나 토요일 저녁이라 몸이 녹진녹진한데 더욱 집중하기 어렵게 만든다. 연주자는 명상적이거나 활기찬 곡 자체의 느낌을 최대한 명확히 표현하는데 주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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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초니에레 51~100 작가와비평 시선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지음, 김효신 옮김 / 작가와비평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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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옮긴이에 의해 2004년 간행한 칸초니에레 1~50편의 후속작이다. 이번에는 표제처럼 칸초니에레 중 51~100편의 시를 담고 있다. 다만 이번에는 단독 번역이다. 수록작은 주로 소네트 외 발라드 3, 마드리갈 2, 칸초네 5, 세스티나 2편이다.

 

축복 있으리니, 그날과 그달, 그 해, / 그리고 그 계절과 그때, 그 시각과 그 순간, / 그 은총의 마을, 그리고 나를 사로잡은 / 아름다운 그녀의 두 눈에 넋을 빼앗긴 바로 그곳. (P.54, 61)

 

역시 핵심을 차지하는 내용은 라우라에 대한 사랑이다. 라우라를 향한 사랑, 그리움, 갈망과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슬픔, 절망, 회한이 교묘히 엇갈린다. 사랑은 기쁨과 행복이지만, 보답받지 못한 사랑은 고통과 분노, 슬픔 나아가 증오로도 변모되기 마련이다.

 

<칸초니에레> 366편 중 거의 전부가 라우라와 사랑에 관련된 시이므로, 한꺼번에 읽다 보면 성마른 독자라면 물리고 지칠 정도이다. 이 정도면 단순한 사랑과 애정을 넘어서 거의 광기 어린 집착의 수준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다른 측면으로 보면 시인의 그녀에 대한 사랑이 그만큼 깊고 한결같음의 증좌라고 할 수 있으리라. 게다가 일순간의 감정에 휘말려 단기간에 폭풍같이 써 내려간 시가 아니고 10, 20년에 이르는 기나긴 기간에 걸쳐 쓰고 다듬고 복기하며 재음미한 시들이 아니겠는가.

 

이제 돌아보니, 나의 주여, 10년 하고도 또 한 해를 / 거부할 수 없었던 잔인한 멍에에 / 짓눌려 가혹한 삶을 살았나이다. (P.58, 62)

 

잔혹한 길, 불현듯 사랑에 사로잡혔네. / 매년 같은 계절이 돌아와 / 나의 해묵은 상처를 새롭게 하는구나. (P.240, 100)

 

무엇보다 시인은 라우라의 눈빛에 매혹당하고 지배받는다. 최초의 그 순간 그녀의 눈빛으로 공격받고 이후 영원히 거기서 헤어 나오지 못함을 무수한 시구에서 표현한다. 특히 이 책의 수록작 중에서 세 편의 칸초네(71~73)는 각 시의 분량도 압도적이거니와 라우라의 눈을 제재로 삼고 있는 점에서 특별하다. 라우라의 눈은 시인에게 기쁨과 고통을 동시에 안겨주는 양면적 존재다. 시인은 그 감정을 여과 없이 찬가와 애가로 형상화한다. 한편 84편 소네트는 구성 면에서 심장과 눈의 대화 형식으로 사랑의 불가피성을 나타내고 있어서 이색적이다.

 

사랑이 둥지를 튼 그대 어여쁜 눈에, / 내 어설픈 문체를 바치오니 / 본성은 게으르지만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네. (P.96, 71)

 

내 언제나 달려가네 / 그 빛을 향해, 마치 내 구원의 뿌리인 양, / 죽음을 갈망하며 달음질칠 때, / 그 빛에 머무는 시선만으로도 나 살아가리라. (P.128, 73)

 

앞서 읽은 페트라르카 서간문을 보면, 시의 주인공 라우라는 실제 세속의 인물인 동시에 시인 마음속에서 하나의 이상화된 불멸의 여인상으로 승격화된다. 신에게 끝없는 기도와 찬미를 드리듯 시인은 라우라의 노래를 지칠 줄 모르고 읊는다.

 

시인의 진정한 슬픔은 그녀를 향한 무한한 애정에도 불구하고 라우라의 냉대에 있다. 작중에서 라우라는 시종일관 시인의 마음을 일부러 외면하면서 경멸과 멸시의 눈초리로 냉대한다. 물론 그녀가 유부녀 신분이기에 당연하겠지만 극적인 대비를 위해 한층 과장하여 표현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이따금 라우라도 실제로는 마음 한편에 시인을 향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시구를 보면 사실일지 아니면 시인의 착각 내지 자기 위안인가 궁금하다.

 

사실인즉 만에 하나로 사랑을 이룬 나라오. / 나의 적은 정말 강했지만, / 나는 그녀의 가슴을 관통하는 슬픔을 보았다네. (P.198, 88)

 

라우라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 몇 편의 시는 오히려 많지 않기에 한층 주목하게 된다. 53편 칸초네는 콜라라는 인물에 대한 것이다. 서간문에서 콜라의 이념에 페트라르카가 열렬히 동조하였고, 그의 타락에 시인이 커다란 실망을 표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콜라와 그가 바꿔놓을 정치체제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잘 표현한다. 친구 콜론나에게 보내는 소네트(58)와 동생에게 바치는 소네트(91), 그리고 시인 치노의 죽음에 바치는 소네트(92) 모두 흥미롭다.

 

최근에 번역 출간된 <칸초니에레> 완역본을 얼마 전에 구입하였다. 천천히 시간 날 때마다 찬찬히 읽으면서 음미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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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크인 이야기 - 흉노.돌궐.위구르.셀주크.오스만 제국에 이르기까지 타산지석 21
이희철 지음 / 리수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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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를 보고 튀르크인의 민족적, 문화적 해설서로 알고 집었는데, 기대와는 다른 내용이었다. 튀르크인이 세운 나라의 역사 이야기, 더 정확히 말하면 그중에서도 제국을 형성한 흉노, 돌궐, 위구르, 셀주크, 오스만 제국의 약사에 해당한다. 돌궐, 셀주크, 오스만이 튀르크임은 알고 있었고, 이번 기회에 위구르도 튀르크의 한 종족임을 배우게 되었다. 다만 흉노도? 흉노의 민족 귀속 여부는 이견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저자는 과감하게 튀르크로 간주한다. 무슨 근거로? 이 책에서 저자는 전반적으로 튀르키예 편향적이다.

 

1부 초원의 최강 흉노 제국(기원전 209~216)

 

* 초원지대 거주인들의 언어가 대부분 튀르크 어족이므로 흉노는 튀르크 족의 조상으로 오늘날 터키인의 조상이라 할 수 있다. (P.23)

 

저자가 주석으로 부기한 내용이다. 바로 이어서 흉노를 튀르크, 몽골, 퉁구스계의 부족 연합체로 설명하면서도 저자는 이렇게 단순화시킨다. 이 책에서 여러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은 이렇게 흉노 편에 특히 많다. 흉노의 광역을 서로 아랄해에서 동으로 한반도 북부라고 설명하는데 통상적인 이해와 차이가 크다.

 

터키육군사령부는 흉노 제국의 창건자 묵돌이 정규군을 조직하고 즉위한 기원전 209년을 터키 육군이 창건된 해로 지정하고 있다. (P.39)

 

흉노를 튀르크라고 인식하는 튀르키예의 무리한 조치를 여과 없이 소개한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다를 바 없다. 이러한 점을 유념하면 이 책은 흉노와 훈의 역사에 대한 기본적 사실을 짤막하게나마 알려주고 있어 이 방면에 생소한 독자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다.

 

후기에는 한민족과 훈족의 연관성 논의를 다루고 있는데, 역사학계 일각의 주장이며 현재로는 설득력 있는 가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연관성 제시 근거 중 하나로 몽골반점을 언급하는데, 몽골반점은 이름 그대로 몽골계 인종에 특유한 현상이다. 훈족을 튀르크인이라고 하면, 튀르크인과 몽골인, 한민족도 모두 같은 종족이라고 하는 셈이 아닐까. 참고로 흉노의 민족적 기원에 대해서는 현재 여러 의견이 엇갈린다.

 

2부 동·서를 연결한 초원제국, 돌궐 제국(552~744)

 

돌궐은 국명, 종족명 자체가 튀르크를 나타낸다. 돌궐 역사의 특이성은 제1 제국과 제2 제국으로 나뉘어 있다는 점인데, 완전히 패망한 후에 부흥하였음을 보여준다. 돌궐은 광대한 영역에도 불구하고 존속 기간이 길지 않으며, 1 제국은 그나마 서돌궐과 동돌궐로 분리되기조차 하였다. 하지만 이때 돌궐 제국이 중앙아시아를 제패하면서 이후 중앙아시아는 튀르크인의 땅으로 자리 잡는다.

 

아무래도 중앙아시아 유목민족 가운데 최초로 문자를 만들어 자신들의 기록을 남긴 까닭이라는 생각이다. 흉노와 훈의 역사를 중국과 로마 등 적대국의 기록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것과는 천양지차다.

 

2 제국의 전성기는 너무나 짧다. 톤유쿠크의 죽음과, 빌게 카간과 퀼티긴의 독살로 비극으로 치닫는 모습은 훗날 대셀주크 제국에서 멜리크샤와 니자뮐뮐크의 콤비의 최후를 연상시킨다. 어쨌든 돌궐의 세 명은 모두 자신들의 비문을 통해 미처 못 이룬 꿈과 희망을 후대인들에 영구히 남기고 있다. 돌궐 역사는 추후 정재훈의 저작으로 자세히 살펴볼 계획이다.

 

3부 유목에서 정주 문명국가로 변신한 위구르 제국(745~840)

 

흉노와 돌궐이 유목사회라면, 위구르는 정착 사회로 이행하는 과도기다. 위구르 제국은 불과 100년도 버티지 못하였지만, 오늘날 위구르는 중앙아시아에서 큰 지분을 차지한다. 그들의 후손은 강역을 지키면서 중국 내에서 자치구를 형성하고 있으며 끊임없는 독립 투쟁을 전개하고 있음을 이따금 뉴스로 확인할 수 있다.

 

돌궐에 이어 위구르도 문자를 사용하였고, 특히 정주 생활을 통해 그들 나름의 풍요로운 문화유산을 남겨 이후 초원의 지식층구실을 하였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몽골은 위구르 문자를 채택하였고, 많은 위구르인이 몽골의 정치 사회 체제에서 핵심적 활약을 하였다고 하니 오늘날 그들의 암울한 현실만 보고 과소평가할 일은 아니다. 중국 역사에서 보더라도 돌궐은 남북조 시대와 당나라 초기에 활동하였다면, 위구르는 당나라 후기, 특히 안사의 난 이후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위구르 역사도 추후 정재훈의 저작으로 자세히 살펴볼 계획이다.

 

4부 이슬람 전사의 제국, 셀주크 제국(1040~1308)

 

드디어 튀르크인의 본격적 등장이다. 이슬람과 당나라의 일대 회전인 탈라스 전투는 중앙아시아 세계사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다. 이후 중앙아시아는 이슬람 문명권의 일원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중앙아시아 여러 국가와 위구르인이 모두 무슬림임이 이것을 입증한다.

 

튀크크인도 이후로 카라한 왕조를 필두로 이슬람을 믿게 되어 가즈나 왕조에서는 술탄 칭호를 부여받게 되며, 셀주크에 이르러 일대 제국으로 부상하게 된다. 특히 튀르키예 입장에서는 자기네들 직계 조상의 나라이니 더욱 큰 의미로 받아들이게 되었으리라.

 

1037년 투우룰 베이는 니샤푸르에서 독립을 선포하고 대셀주크 제국의 건국을 알렸다. 이는 터키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P.179)

 

대셀주크 제국은 이슬람 왕조의 보호자로서 정치적 지도자 국가였다는 점과, 최초로 아나톨리아 진출을 시도하였다는 사실, 그리고 술탄 멜리크샤 시기에 재상 니자뮐뮐크의 도움으로 절정기에 이르렀고 이들의 죽음 이후 급격한 혼란과 종말로 치달았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아나톨리아 셀주크 제국의 역사는 튀르크 인들의 아나톨리아 유입 및 정착과 유럽 십자군과의 전쟁의 역사로 점철되었다. (P.196)

 

셀주크 제국 하면 무엇보다 십자군 전쟁과 연관 검색어 관계다. 여기서 미처 몰랐던 사실 하나, 대셀주크 제국이 아니라 아나톨리아 셀주크 제국이라는 점이다. 대셀주크는 자체 붕괴하였지만, 아나톨리아 셀주크는 몽골의 위력에 굴복하였다. 훗날 오스만 제국 초기에 자칭 몽골의 후예 티무르에 패망 직전까지 몰렸던 것처럼 튀르크의 역사와 몽골은 뗄 수 없는 악연의 관계다. 이 책에서 셀주크의 가장 인상적인 정책으로 대상 숙소인 케르반사라이건축 사업과, 일종의 대상 보험 시스템을 소개하고 있는데 무척 흥미로운 사실이다. 다만 이때 셀주크가 대셀주크인지 아나톨리아인지 양자 모두를 지칭하는지 모호하다.

 

흔히 셀주크 제국 하나로 통칭하지만, 기실 이 두 나라는 전혀 별개로 간주해야 한다. 아나톨리아 셀주크는 셀주크의 일파가 따로 세운 국가로 대셀주크 제국도 독자적 국가로 인정했을 정도다. 이 책도 이러한 점을 언급하면서도 내용 소개로 들어가면 구분을 명확히 하지 않거나 혼용하는 사례가 있다.

 

5부 문화 다양성 세계 최강, 오스만 제국(1299~1923)

 

아주 예전에 도널드 쿼터트의 오스만 제국사를 읽은 적이 있지만 머릿속에 전혀 기억나는 내용이 없다. 따로 통사를 찾아 읽을 필요가 있겠다 싶다. 600년을 넘게 유지된 대제국으로 현대에도 존속하였던 국가이니만치 방대한 역사답게 모든 방면에서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겠지만 이 책은 일단 핵심적 내용 위주로 간략히 소개한다.

 

오스만 제국은 600년 넘게 유지되면서 광활한 영토에 20개의 다민족, 4개의 종교가 공존한 제국이었다. 오스만 제국은 정복을 통해 편입된 다양한 민족에게 그들의 문화적, 종교적 자치성을 보장해주었다. (P.245)

 

20세기 후반부터 비롯한 발칸 반도의 유혈극을 보면 오스만의 통치제도가 새삼 대단해 보일 정도다. 세계사에서 오스만의 영향은 엄청나게 크다. 비잔티움 제국을 끝내 멸망시킴으로써 유럽 르네상스 도래에 간접 기여를 하였으며, 수백 년간 발칸 반도를 지배함으로써 유럽 내 이슬람 전파의 결과를 가져왔다.

 

오스만 역사를 굽어보면 급격한 성장과 찬란하지만 단명의 전성기, 그리고 기나긴 쇠퇴와 몰락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 후반기의 오스만을 보면서 유럽의 열강들이 유럽의 병자라고 칭하면서 부정적으로 인식하였던 게 아니었던가.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은 제국의 치명적 선택이었다.

 

들어가는 글에서 저자는 튀르크인들의 역사가 저 멀리 흉노로부터 비롯된 유목민족의 전통 계승에서, 튀르크 제국을 이어 현재 튀르키예까지 이르고 있음을 표명한다. 이것이 이 책의 저작 의도라고 생각되는데, 일방적인 주장을 수용하고 있는 게 아닌지 조심스럽다. 좋은 내용의 책이 일부 무리한 주장으로 빛을 잃는 게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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