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이문열 중단편전집 4 (양장본)
이문열 지음 / 아침나라(둥지)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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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발견하게 되는 이문열 소설의 미학]

예전에 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국내 주요 문학작품을 단막극으로 제작하여 예술성 높게 보여주었는데, 그때 ‘금시조’를 처음 접하고 꽤나 감동받았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나와 이문열의 만남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후 난 언제나 이문열의 애독자였다.

‘사람의 아들’,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젊은날의 초상’ 등등. 이문열은 상당한 분량의 장편소설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초기에 비해서 후기로 갈수록 장편에서 그의 작품은 향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문학적 영감을 모아서 다듬고 오래 묵힌 다음에 내놓지 못하고, 너무나 유명해진 탓인지 공장에서 찍어낸 대량생산품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금시조’ 탓인지 난 이문열의 작가적 진면목은 여전히 그의 중단편에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초기의 대표작이 ‘금시조’라면, 후기의 분출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라고 하겠다.

이 작품이 처음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통해 나왔을 때의 인상을 잊지 못한다. 비꼬는 듯하면서 한편으론 엄석대에 대한 그리움이랄까, 그 가라앉은 열광. 창작력이 감퇴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일거에 씻어낸 쾌거였다.

하지만 그것이 촛불이 사위어지기 전 마지막 타오름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이 작품집에 실린 6편 중에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제외하고는 낯이 설다. ‘25년 전쟁사’와 ‘장군과 박사’는 희화적 가상역사물이라고 하겠다. 그 현란한 이야기 전개는 새삼 거장의 손길을 느끼게 한다. 전자가 치욕적 과거사를 가상적으로나마 뒤집어 재구성하여 당당한 역사관을 드러냈다면, 후자는 광복 이후 남북의 정치체제에 대한 신랄한 풍자를 보여준다.

‘타오르는 추억’은 6.25를 배경으로 상처받은 영혼의 방황을 그리고 있으며, ‘과객’을 통하여는 사라져 버린 과객(過客) 문화에 대한 엷은 향수를 되새기고 있다. 하지만 '두 겹의 노래’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터무니없을 정도로 신화적 분위기를 물씬 자아내면서 그러나 신화 속 남신과 여신은 삭막한 현대 도시 속에서 오히려 비정함을 자아낼 뿐이다.

그의 중단편에서는 상업주의에 물든 후기의 색채가 다행히도 아직은 드리워지지 않고 있다. 새삼 이문열 소설의 미학을 재발견하게 되는 기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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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5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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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노먼 베쑨 역사 인물 찾기 1
테드 알렌 지음, 천희상 옮김 / 실천문학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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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슈바이처, 전쟁과 인간애]

근자에 들어 우연치 않게 전기물을 연속으로 접한다. 이제 머리가 굵은 탓인지 아니면 세상사에 물들었던지 전기물을 대하는 내 자세도 위인전기를 대하는 어릴적과는 확연히 다름을 새삼 느낀다. 전기물에서 인간적인 내음을 원한다고 하면 지나친 바램일까.

노먼 베쑨이 누구인지는 잘 몰랐다. 그저 무슨 의사라고 하던데.. 의사라고 하니, 저절로 슈바이처가 떠오른다. 노먼 베쑨의 연표를 살펴 보니, 슈바이처와는 동시대 사람이다, 아니 그가 먼저 사망했으니 오히려 슈바이처보다 빠르다고 하겠다. 그런데 왜 슈바이처는 노벨상을 타고 유명해졌고 위인전기집에도 실려 있는데, 노먼 베쑨은 그러하지 못했을까. 이런저런 의문을 일거에 덮어버리는 사실은 그가 중국공산당을 위하여 의료행위를 하였다는데 있다. 소위 ‘중공’의 영웅이 어찌 냉혹한 냉전의 시대, 극렬한 이데올로기가 대립하는 대한민국에 그의 이름이 전해진다는 것이 가당하기나 했겠는가.

50년 그의 삶은 개인적으로 안온하고 행복하지는 못하였던 듯싶다. 결혼생활도 평탄하지 못하였고, 결핵으로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기도 했다. 그의 뛰어난 모습은 개인적 간난을 극복하고 스페인내전과 중일전쟁에서의 인도적 의료행위를 통하여 인간애를 널리 확산시킨데 있다. 그는 인간의 목숨을 파리목숨처럼 여기는 파시즘과 군국주의를 극도로 혐오하였지만, 그가 프랑코군과 일본군 병사를 개인적으로 미워한 것은 아니었다. 그에겐 전장터에서 거꾸러지는 모든 병사들이 모든 동등한 존재 가치를 지닌 환자였다.

캐나다와 중국에서 비록 그가 영웅으로 추앙받고 많은 이들이 그를 기리고 있다고 해서 그가 위대한 것은 아니다. 그는 불같은 성미로 전장터에서 일각이라도 치료를 지체하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환자를 앞에 두고는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끝내 수술을 멈추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목숨을 재촉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어찌 하겠는가, 바로 타고난 그의 숙명인 것을..

인간사는 수많은 전쟁을 통하여 전쟁영웅을 탄생시킨다. 우리들은 그들을 우러르고 신성한 존재로 떠받든다. 역사 속에서 전쟁영웅을 제외하면 얼마만한 영웅들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이렇듯이 우리들은 무수한 인명을 살상하는 전쟁을 혐오하면서도 한편으로 전쟁과 영웅의 출현을 갈망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파괴와 죽음의 본능이야말로 인간의 식욕과 성욕을 잇는 제3의 욕망이라고 표현한다.

분노와 광기의 한복판에서 문득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이 여기에 왜 있는가 자문할 때, 비로소 슈바이처나 노먼 베쑨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만시지탄에 빠져든다. 평상시에는 외면하다가 지치고 힘들 때, 따뜻한 손길과 부드러운 목소리를 원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인가 아니면 판도라의 상자가 상징하는 마지막 희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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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5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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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순례자 시튼 (양장) - 동물기의 작가 시튼이 쓴 자서전
어니스트 톰슨 시튼 지음, 작은우주 옮김 / 달팽이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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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의지로써 성취한 자연인]

파브르의 곤충기와 나란히 언급되는 동물기의 저자 시튼의 자서전이다. 곤충기는 어릴적에 아동판으로라도 읽은 기억이 나는데 반해 이상하게도 동물기를 읽은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튼의 동물기'는 실은 이름만이 유명한 것에 불과하였던말인가. 이런 오해는 '동물기'가 '곤충기'처럼 단일제목으로 된 시리즈라고 착각한데서 연유한다. 사실 '동물기'라는 표제는 없다. 다만 시튼이 발표한 일련의 저작물을 통칭하는 용어일 따름이다.

여하튼 '동물기'로 국내에서도 널리 알려졌지만, 정작 시튼이 누구인지, 어디 사람인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는 관심권 밖의 영역이었고, 마땅히 이를 안내해줄 책도 드문 형편인 시점에서 저자의 자서전을 접하게 되니, 반가움이 와락 다가선다.

책은 양장으로 꽤 두툼하다. 이는 최근의 유행이라고 할만한 책의 사이즈가 표준(신국판)보다도 작은데서도 기인한다. 체게바라 평전, 닥터 노먼 베쑨, 3일간의 자유(존 브라운 전기) 등도 역시 그러하니까.

시튼 자서전은 다른 자서전과는 내용면에서 약간은 차이점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생의 순서에 따라 구성되어 있지만, 개인적 삶의 세세한 부분을 드러내어 독자에게 보여주지는 않는다. 보다 중심이 되는 것은 인생에서 자연세계와 조우하여 그 경이로운 아름다움에 몰입하고 심취하게 되는 과정이다. 그런 탓인지 각종 동물 들의 삽화 및 스케치가 군데군데 보인다. 따라서 스토리 중심의 전기물에 익숙한 독자라면 쉽사리 재미를 붙이기 어려울 듯 하게도 여겨지지만, 동물기 등에 흥미를 품었던 사람이라면 오히려 여러 동물기의 저작 배경 등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되겠기에 장단점이 있다고 하겠다.

적어도 내게는 어렴풋하게 밖에 생각나지 않은 동물기 탓에 새로이 접하는 내용마냥 신선한 흥취를 자아내는 매력이 있다. 다 읽고 나서는 동물기를 제대로 읽고 싶은 생각에 인터넷서점을 검색하면서 무슨 타이틀이 번역되었는지 조회하는 나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시튼과 야생세계의 만남은 야외로 소풍가는듯 가볍고 유쾌하게 이루어진게 아니다. 시튼은 생의 수단으로 농장을 개척하려고 하려는 부모와 형제들 가운데 전형적인 개척민의 아들이었다. 그에게 캐나다 겨울숲의 냉혹함은 눈보라와 추위 등 낭만의 대상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었다. 거기서 그는 생명 유지를 위하려는 치열한 노력에서 야생과 마주쳤다.

곳곳에 보이는 삽화는 새삼 시튼의 예술가적 자질에 고마움을 느끼게 한다. 런던으로 유학가서 겪는 비참하기조차한 빈궁함, 청년의 자부심을 꺾게 만드는 탈장 정조대(?)에 관한 언급에서는새삼 연민의 정마저도 느끼게 한다.

근년들어 환경, 생태, 자연분야 등이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않았더라면, 어찌 이러한 책을 만날 수 있었을까. 앞으로도 좋은 책들이 잇따라 발간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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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5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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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트 신화와 전설
찰스 스콰이어 지음, 나영균.전수용 옮김 / 황소자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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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출간된 지 한 세기가 넘는 이 책이 켈트 신화에 대한 대표적 고전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기독교의 영향 아래 쇠잔하던 신화의 그림자가 급격한 근대화로 절멸의 단계로 접어든 데 연유할 것이다. 새로운 신화와 전설의 발굴은 고사하고 현존하는 유산도 사라질 판국이 된 게 아니겠는가?

켈트의 역사는 오래되었으며 그 영역은 유럽의 서부와 중부에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켈트 문화는 로마제국과 게르만족 이동 이전 유럽 문화의 원형이다. 로마의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싸운 대상이 바로 골족이라는 프랑스의 켈트인이었다. 오늘날 켈트의 뼈대는 사라졌지만 그 본질은 문학과 예술에 끊임없는 자양분이 되고 있다. 이성 우위의 서양사상에서 켈트는 “환상과, 해학과, 시 그리고 비논리성을 혼합”(P.10)한 독특한 색채를 부여하고 있다. 이것이 근대 예술에 깊은 영감을 불어넣었으며, 현대의 판타지 문학과 게임 등에서 상상력의 보고 구실을 하고 있다.

켈트의 흔적은 아일랜드, 웨일즈와 스코틀랜드에서 편린을 찾아볼 수 있다. 저자는 선대와 당대의 신화 단편들을 취합하고 종합 정리하여 그야말로 켈트 신화를 일목요연하게 독자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켈트 신화는 남유럽의 그리스 신화, 북유럽의 게르만 신화와 대등하게 자신의 자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켈트 신화를 단번에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데, 그것은 동일한 켈트의 신을 지칭하는 명칭이 지역별로 대단히 다양하다는 점에 있다. 귀디온과 아서의 간격은 너무 멀다.
“게일계나 브리튼계의 켈트족들은 군소 부족들로 나뉘어 있었으며, 각각은 근본적인 개념들은 같으면서 다른 이름으로 육화시킨 자기 지역의 신들을 가지고 있었다.” (P.300)

또한 켈트 신화의 특색은 인간이 신을 정복한다는 점에 있다.
“신들을 정복하는 인간의 이야기는 전형적인 켈트족 이야기이다. 게일 신화는 그런 이야기를 상세히 보존하고 있는 유일한 신화이다.” (P.117)

그리스 신화를 보면, 인간은 의지나 품성, 행위에 관계없이 신의 변덕에 운명이 좌우된다. 신에게 상처라도 입힐 수 있는 경우는 트로이 전쟁 외에는 없었다. 그런데 켈트에서는 신이 너무 쉽게 죽음을 맞는다. 영생불사의 신 개념이 아니다. 신은 적대 부족과의 전투, 또는 신들 간의 다툼에서 목숨을 뺏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 인간과의 싸움에서도 역부족이다.

이 책의 모든 이야기가 생경하면서도 대단히 흥미롭다. 투아하 데 다난과 포모르인들의 투쟁에서 비롯하여 헤라클레스에 비견되는 ‘쿨란의 사냥개’ 쿠훌린의 위업, 핀과 추종자 페니안의 전설 등.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서왕의 뿌리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수확이다. 원탁의 기사로 알려진 아서왕에 대하여 저자는 이것이 이교도 신을 인간화시킨 대표적 사례로 보고 있다. 켈트 신화에서 아서는 비교적 후대의 신으로서 그는 위대한 신 귀디온의 계승자이며, 북유럽 신화의 최고신 오딘에 해당된다. 아서왕 뿐만 아니라 원탁의 기사의 등장인물 모두가 선대 켈트의 제신들이다. 후대에 세속화, 기독교화하는 과정에서 신들이 각기 왕과 기사로 신분이 격하된 것이다.

브리튼족의 아서, 귄휘바르(기네비어), 메드라우트의 전설은 게일족의 아이렘, 에탄, 미처르의 이야기 사이에 놀라운 유사성이 있다고 한다(P.303). 게일족의 신화는 밤과 낮의 투쟁, 여름과 겨울의 대결, 삶(빛)과 죽음(어둠)의 투쟁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한다. 이제 아서왕의 전설을 진부한 영웅담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에서 조금이나마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서왕의 전설은 기독교와 연관되어 성배 탐색으로 이어져 서양문화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게 된다. 저자는 성배의 원형을 켈트족의 마술 가마솥에서 찾고 있다. 브란과 쿠훌린, 아서의 공통점은 그들이 가마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며, 쿠훌린과 아서는 힘겨운 노력을 통해 그것을 획득하였다. 원탁의 기사들은 성배를 찾기 위하여 길을 떠난다. 퍼시발 경은 민족을 뛰어넘어 중세 독일에서 파르치팔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갈라하드 경은 괄하메이 즉, 가웨인 경에 다름아니다. 모두 후대 아서왕 전설에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의 주요 인물들이다.

성배 이외에도 켈트 신화는 무수한 문학과 예술 작품을 낳았다. 바그너의 악극으로 유명한 트리스탄과 이졸데도 아서왕 전설에서 비롯되었다. 인간에게 세계를 양보하고 언덕의 집으로 물러난 신들은 왜소해져 요정이 되었는데, 스펜서와 셰익스피어는 켈트의 자산을 바탕으로 불후의 걸작을 후대에 남겼다.

이제 켈트의 신들은 몰락하고 멸망하였으며 그들의 종교도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 속에 깊이 뿌리박은 켈트의 영혼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서양의 각종 축제와 기념일(오월제, 할로윈 등), 진정한 의미를 감춘 제의적 행위들, 자연숭배의 관념 등은 모두 켈트 신화의 유산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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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빈 충만 법정 스님 전집 4
법정(法頂) 지음 / 샘터사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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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 진리의 향기]

법정 스님의 1980년대 후반의 글모음이다. 이미 70년대와 90년대의 글을 통하여 스님의 사상을 접해 보았기 때문에 대충 어떠하리라는 짐작이 있었다. 사람의 사고란 결코 급격한 변모를 보일 수 없는 법이다. 그것이 체험과 생활에 토대를 두었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시국에 대한 일갈, 교인에 대한 당부, 그리고 일반인들에 대한 깨우침 등 기본적인 스님의 논조와 골격은 변함이 없다. 오히려 변화를 기대한다는 것이 어쩌면 무리라고 여겨지는 것이 소위 진리 자체가 변함이 없는데 구도의 삶에 어찌 다름이 있겠는가.

日新又日新 하라는 말은 결코 외형상의 새로움을 추구하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일상적이고 평범한 듯 여겨지는 생활 속에서 진부해지기 쉬운 자세를 날마다 새로이 추스리라는 각성의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새로운 시작이 없으면 삶이 무료해진다. 삶이 무료해지면 인생 자체가 무의미하고 무기력하다."

무소유의 정신이 '텅빈 충만'이라는 표제에서도 그대로 묻어난다. 아무것도 갖지 않고 버려야만 비로소 세상 모든것을 내안에 품을 수 있는것.

진리는 단순하지만, 실천은 어려기 짝이 없는 법. 그래서 고금에 깨우친 이가 그리 적고, 따라서 우리들 같은 범인들이 그들을 존경하고 기리는 것이다.

문득 글에서 언급된 경전을 펼쳐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다. 나에게도 初發心이 생기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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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4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4.5.27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