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병법으로 돌파한다 1
박재희 지음 / 문예당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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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과 현대적 변용]

사이버강의 교재겸 참고도서로 증정받았다. 하긴 나같은 사람이라면 절대로 돈주고 사보지는 않을 것이다. 내용자체가 소위 후지다는 측면이 아니라, 차라리 원전을 보겠다는 말이다.

<손자병법>을 현대 경영활동에 어떻게 접목시킬 것인가가 이 책의 주안점이다. 전에 읽은 <빅토리>와도 연계된다고 하겠다. '손자병법'을 모르는 한국인은 별로 없을 것이다. 소설로도 윤색되어 화제작이 되었던 화려한 전력이 있는 동양의 고전이며, 동시에 서양에서도 열렬히 환호받은 군사교재이다.

1권에서는 전체 중 시계편, 작전편, 모공편, 군형편, 병세편을 다루고 있다. 손자는 결코 호전론자가 아니었다고 한다. 전쟁을 문제해결의 우선수단이 아니라 최후수단으로 간주했다는 것. 그리고 싸우지않고 이기는 것을 최선으로 여겼다는 점 등이 무척이나 흥미롭다.

전쟁을 준비하고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치밀하고도 세심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경영도 마찬가지다. 사전에 철저히 계산하고 준비하며, 치밀한 전략의 바탕에 조직을 편제하고, 조직원의 사기를 진작하라는 손자의 주의는 과거나 현재나 여전히 유효적절하다.

조직의 리더라면 감정에 휩싸여서 전략없이 무질서하게 조직원과 유리된채 독단적으로 조직을 이끄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많은 리더들이 그리함을 볼 때, 당위론의 한계가 엿보인다. 즉 따르고 안 따르고는 마음대로이다.

동양고전을 현대적 관점으로 재해석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우며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대부분 처세와 경영적 관점에 치우쳐 있다는게 위험스러울 뿐이다. <손자병법>의 태생상 어찌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논어><노자> 등에서 편리한 부분을 발췌하여 재구성한다면, 과연 원전을 모르는 사람들은 참으로 고전으로 마음속 깊이 새기게 될런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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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1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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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
버지니아 울프 지음 / 서원 / 199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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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가 내 귀에 다가왔던 기억은 시인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가 처음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후 몇년이 지나서 교과서에 실린 수필에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접하게 되었다.

간만에 서가를 훑어보던 중 발견한 이 책은 그 시절의 감흥을 상기시킨다. 새삼스레 책에 대해 미안한 감정마저 생긴다. 벌써 십여년 동안이나 방치했으니까.

버지니아 울프란 작가를 나는 오해했다. 그저 섬세한 필치로 신변잡기적인 소재로 독자의 낭만적 감정에 호소하는 유형으로 지레짐작했는데, 읽고난 소감은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소위 의식의 흐름 기법의 명작이라는데, 줄거리도 없고 썩 재미있지도 않다.

대하소설이나 극적인 사건 전개를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몇 장 넘기지 않고 곧바로 덮고 말 것이다. 등대여행을 가려다가 못 간 날로부터 십년 후에 비록 일부가 빠졌지만 등대로 간다. 이게 스토리의 전부니까.

'등대'는 현실상의 등대 자체를 가리킬 뿐더러 미묘한 암시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등대 불빛이 어둔 바다를 비쳐주듯이 등대로 가고자 하는 바램과 집념은 뿔뿔이 흩이지고 파편화되어 갈등을 겪고 있는 가족간에 밝은 빛을 던져주고자 하는.

가정에서 아버지의 존재의의와 역할에 대해 많은 변화가 있다. 전에는 가장으로서 지고의 위엄과 권위를 가지고 자식들이 함부로 범접할 수 없었고,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작품속의 램지 교수도 그러했듯이. 하지만 자식들은 경외와 동시에 완고함과 억압에 명렬한 적개심을 품는다. 더구나 아버지와 자식간에는 자연스런 대화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그 십년이란 시간동안 램지씨 일가에서는 부인이 죽고, 장녀도 출산중에 사망하고, 장남인 앤드루도 전쟁터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돌아온 별장에서는 늙은 램지씨가 딸 캠, 막내아들 제임스를 억지로 끌고 등대로 향한다.

나룻배 안에서 램지씨와 딸, 아들간에는 극복할 수 없는 단절의 벽이 가로막혀 있다. 그리고 배가 점차 등대로 다가가면서 비로소 점차적으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며, 그들간에 불화와 단절은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때마침 릴리도 램지부인과 화해하고 그림을 완성한다.

가족간, 사람간 이해와 배려와 존중의 결여와 부족때문에 얼마나 많은 갈등과 오해와 충돌이 빚어지는지 모른다. 따뜻하고 진실된 이해를 통하여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씩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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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1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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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살림지식총서 56
최광식 지음 / 살림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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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였던 듯 싶은데, 국회에서 몇몇 국회의원들이 간도가 우리땅이라는 결의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그래서 썩어빠진 연못에서도 연꽃이 피는 신기함을 느꼈었다.

한데 오늘 뉴스에 듣자 하니, 정부에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현영토에 대한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다고 약속하였다고 한다.

상반되는 소식을 바라보는 가운데, 현재 우리나라의 좌표가 눈에 보이는 듯 싶어 한편으로 씁쓸함을 금할 수 없다. 현시점에서 간도가 우리땅이라고 골백번 우겨봐도 아무 효과가 없음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조선말에 일본과 청이 제멋대로 간도협약을 체결하여 간도를 넘겨주었음을 국사시간을 통하여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누구는 남의 땅임에도 자기거라고 우기는데, 자기땅도 내것이 아니라고 손사레를 친는 작태라니.

그것은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의 일환인 고구려사 왜곡과도 맥이 닿아 있다. 비록 이 책이 최근의 한중 양국간의 구두약속 이전에 발간되어 문제제기에 그치는 한계가 있지만, 그럼에도 명백히 지적하는게 있다.

즉, 고구려사 왜곡은 순수한 학문적 목적이 아니라 치밀한 정치사회적 의도를 가지고 진행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는 만주지역의 조선족의 정체성을 중국인으로서 한계지우려는 것이며, 정치적으로는 현국경선을 유지한 상태에서 유사시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함이다.

그들에게 고구려는 일개 변경정권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한국인이라면 고구려가 떠올리는 회한은 이루 억누를 수 없다. 오죽하면 신라의 삼국통일을 거부하고 남북조시대라고 칭하며, 신라의 통일은 외세를 끌어온 반민족적 행위라고 비난하는 목소리가 근자에 들어서 드높아지고 있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약소국이라는 처지에 스스로 위축되어 강력한 일갈을 후려치지도 못하는 슬프디 슬픈 자화상이다. 자기 존재의의마저 상실당하는 판국에 신중한 외교적 이해득실을 고려한다는게 무슨 해괴한 변명인지. 정말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비하면,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은 조족지혈에 지나지 않는다.

글로벌시대라고 해서 국어와 국사수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날로 줄어들고 있다. 자기나라 말도 정확히 구사하지 못하면서 수개 외국어를 한다는게 큰 의미가 있을까. 내 뿌리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도록 하면서 중국의 역사 왜곡에 분개하고 항의하는 현상이 눈물나도록 우습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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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1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4.9.7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우체부 프레드 (양장) - 보잘것없는 일상을 특별한 날들로 만드는 유쾌한 이야기
마크 샌번 지음, 강주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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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상 지난주 중앙M&B의 비전 선포식에 갔을때 받은 기념품 중 하나이다. 행사에 참석하느라고 체육대회에 가지 못하여서 약간 불만스러웠는데, 기념품이 의외로 쓸만해서 다행이다.

'우체부 프레드'는 한마디로 자기계발/경영에 분류되는 도서다. 저자가 새로 이사간 동네의 우체부인 프레드는 일반적인 우체부와는 달랐다고 한다. 흔히 우체부하면 그저 우편물이나 배달해 주고 가는 존재로만 인식되는데, 프레드는 우편물 배달이라는 어찌보면 단순하고 지루하기 없는 업무에 중요성과 의의를 부여하여 이웃주민들과 교감을 나눈다.

'우체부 프레드'는 자신의 천직에서 즐거움과 보람을 찾는다. 우체부 노릇에 최선을 다하고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기 위하여 성심껏 노력한다. 보상은? 자기 자신의 만족감이다. 남이 즐겁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 그것이 그의 보상이다. 어머니들이 아이가 밥 먹는 모습을 보면 절로 배가 부르다고 하던 말이 연상된다.

우리가 프레드처럼 되기 위한 4가지 법칙이 있다고 한다. 그러면 적어도 프레드의 근처에는 도달한다고 한다. 여러분은 프레드가 되고 싶지 않은가?

참으로 무수한 자기계발/경영서적이 쏟아져 나온다. 그 숱한 책에 나오는 원칙과 법칙, 비결을 따라 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지고의 자기계발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고, 경영자는 자발적으로 업무에 매진하는 고용인을 보면서 뿌듯해 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다. 그러면 뭔가 문제가 있는 셈이다.

'우체부 프레드'는 과연 평범한 사람이고 할 수 있을까. 아무 보상도 기대하지 않고 순전히 이타적 정신에 의해서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경영자는 자신의 기업에 더많은 프레드가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할 것이다. 이 책을 포함한 많은 유사품의 한계는 특별한 예외적 존재를 일상적인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데 있다. 프레드는 유별난 존재이므로 별나게 대우받아야 한다.

직장내에서 두각을 나타내지도 못하고 구조조정의 희생양이 되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는 보통의 직장인에게 프레드는 사치스럽기 그지 없다. 차라리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직장내에서 표나지 않게 적당히 시간을 보내며 오래 직장생활하기' 비법이 아닐까. 물론 경영자는 굉장히 싫어하겠지만.

하여튼 나는 프레드가 되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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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1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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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이순신 8 - 불멸의 길
김탁환 지음 / 황금가지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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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멸의 이순신'의 빛과 그림자 -

내가 이 소설을 가까이 하게 된 계기이자 한 동안 게시판에 치열한 논쟁을 유발시킨 것은 동명의 TV 드라마이다. 나처럼 기존에 이러한 소설이 있었는지 조차도 몰랐던 사람도 꽤 있을 것이다. 처음에 게시판의 글들을 읽으면서 참으로 지독하게 역사를 왜곡하려고 애쓰는구나 싶었다. 소설은 자유로운 상상력을 기초로 하므로 때로는 사실(史實)을 파고들어 비틀고 재해석할 자유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명백한 역사 자체를 곡해하면 안된다. 더구나 인쇄매체와 영상매체는 시청자 다중에게 미치는 파급효과 면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

TV 드라마를 거의 시청하지 않는 내가 우연한 기회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순신이 무과에 뜻을 두고 훈련을 하는 장면부터이다. 횟수를 거듭할수록 이순신의 언행은 남다른 점이 있었다. 그동안 우리가 배제했던 젊은 이순신의 모습이었다. 갑자기 원작을 읽고 싶었다. '칼의 노래'는 이미 읽었으며, 극 전개상 후반부에나 소재로 사용될 것이다. 따라서 '불멸'을 읽을 생각으로 찾아보니, 개정판이 나왔다.

이제 오늘로써 '불멸의 이순신'을 완독하게 된다. 소설과 역사는 다르다는 점을 내내 염두에 되새기면서 책장을 넘겼다. 과연 작가가 사실을 얼마나 뒤집을지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원균을 드높이기 위하여 이순신을 얼마나 깔아뭉갤까 노심초사하였다. 그리고 지금 나는 웃는다. 참으로 심한 과민반응이다. 작가에게 이와같은 소재의 자유가 없다면 도대체 글쓰기가 가능한 것인가. 열띤 논쟁을 벌인 사실 자체가 우습게 느껴진다.

그동안 우리는 '성웅 이순신'의 신화에 너무 짙게 물들어 있었다. 이순신은 피와 땀이 흐르는 인간이 아니라고 여겼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완벽한 존재, 그것은 영웅을 뛰어넘은 성웅이었으며, 나아가 신의 모습이었다. 그러한 연유였을까. 내게 이순신은 존경하지만 범접할 수 없는 위인이다. '불멸의 이순신'에서의 이순신은 나와 똑같은 인간이다. 좌절하고 방황하며, 사랑으로 번뇌하고 늙고 병들어 끙끙거리는 힘겨운 삶을 영위하는 인간.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문에 비명을 지르며 기절하는 약하디 약한 존재. 그러면서도 전쟁으로 고초를 겪고 죽어가는 민초들을 구하기 위하여 밤잠을 설치고 동분서주하는 따뜻한 사람. 보다 인간답기에 더욱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음을 나는 고백한다.

원균은 사서와는 달리 맹장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최소한 겁쟁이는 아니기에 다른 신료들처럼 줄행랑을 치지 않고 천덕꾸러기 신세일지언정 끝까지 전장에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닐까. 다만 지략이 부족하여 오로지 돌격밖에 모름에도 자신을 과신했던 또하나의 평범한 인간. 그래서 더욱 괴로왔을 것이다. 원균을 재평가한다고 이순신의 위대성에 손상은 가지 않는다. 맹장 대 지장의 구도. 그러나 소설 중 한 인물의 입을 빌려 작가는 원균의 적절한 지위는 돌격장에 불과하다고 재삼 평가하고 있다.

오히려 이 소설을 통하여 발견한 점은 임금 선조의 철저한 무능력과 비뚤어진 권력욕이다. 그는 국가를 완전한 사유물로 간주하였으며, 국가와 백성의 안위보다 권력에 잠재적 위협이 되는 존재를 제거하는데 혈안이었다. 사서의 일반적 평가와는 다른 점이지만, 개연성은 충분히 높다고 본다. 그렇지 않다면 선조가 이순신을 견제하기 위하여 그렇게 치열한 노력을 기울였을까.

이제 역사소설을 읽기가 두려워진다. 공식적인 역사만을 배우고 알고 있을때가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이제 역사의 사건 하나하나를 쉽게 지나치지 못할 것 같다. 이것이 과연 사실일까, 아니면 우리가 간과한 이면의 진실이 존재하는가.

소설 자체로서의 문학성에 대해서는 판단을 내리기가 용이하지 않다.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고 애썼으나 무리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소년과 청년 이순신, 박초희와 소은우, 최중화 등. 대하소설적 요소를 갖추려고 노력했으나 때문에 주제로의 몰입이 산만해졌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곳곳에 허구로서의 소설이 주는 진한 대목들이 있다. 특히 이순신이 류성룡에게 유언을 남기는 대목에서는 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억누를수 없었다. 세상이 모두 혼탁한데 홀로 깨끗하고, 세상이 모두 술에 취했는데 홀로 깨어있는 자, 그것이 이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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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1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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