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이순신 7 - 백의종군
김탁환 지음 / 황금가지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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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기존의 이순신 논의와 다른 점은 이순신 대 선조의 갈등구조이다. 물론 이순신과 선조는 직접 대면한 적이 없다. 보다 정확히 하자면 선조의 의신증(疑臣症)이다.

국사책에서 선조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지만, 그것은 왜국의 야욕과 동서로 나뉜 신하 때문이지 선조 임금 자체는 그렇게 큰 과실이 없다. 선조는 격화되는 당쟁 속에서 나라를 제대로 유지하고자 노력한 불쌍한 군주로 각인되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선조는 끊임없이 신하를 의심하고 절대 왕정 체제를 구축하려는 카리스마를 가진 임금이다. 조금이라도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면 참이냐 거짓이냐를 묻지 않고 응징한다. 그리고 동서 붕당 체제를 조장하여 상호 견제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따라서 선조가 몽진을 가서 읊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뉜 조정을 탄식하는 싯구는 전쟁의 책임을 신하에게 떠넘기고 자신을 슬쩍 발을 빼는 교묘한 술책이라고 밖에 달리 해석할 수 없다.

정여립 사건을 확대하여 일찍이 전라도 유생을 몰살시킨 그가, 남도의병 가운데 대표적인 존재인 김덕령마저 역적으로 몰아 고문사시킨 잔혹함에 이르러서는 혀를 내두르게 된다. 조금이라도 백성의 지지를 받는 세력의 발호를 짓밟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이순신의 존재는 위협이 되기 마련이다. 반역의 땅인 전라도 지역 민심을 한 몸에 받고 있으며, 도망간 임금 대신 왜군을 연파하여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 신하. 일개 장수로서 이순신은 어느새 왕실과 대등하게 커버린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선조는 무군지죄로 혐의를 덮어 씌워 이순신을 잡아들인다. 만약 정탁의 목숨을 건 구명이 아니었다면, 이순신의 부활은 없었을 것이고, 아마도 오늘날의 역사는 또다른 현실이 되었을 것이다. 마지못해 이순신의 복직을 허락했지만 과연 종전 후에도 이순신을 그대로 두었을까? 이 소설의 후반부 갈등구조는 이런 의문에서 파생된다.

이순신의 존재와 명성은 왜군 뿐만 아니라 선조에게도 위험스럽다. 모든 영광은 임금에게로 향해야지 일개 장수에게 돌아갈 수 없다. 전쟁영웅은 찰나이고 곧 대역죄인으로 처형될 운명, 이순신도 그러한 조짐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순신에게 주어진 선택의 대안은?

우리 역사에는 가슴에 분노와 한을 품고 스러져간 많은 충신과 영웅 들이 있다. 조선시대로 들어와서만도 4차례의 사화를 통해 무수한 선비들이 목숨을 잃었다. 조선 후기의 당쟁을 통한 떼죽음도 숨길 수 없다. 하지만 이순신처럼 임금이 직접 죽임을 의도한 경우는 없다고 본다. 동인과 서인의 당쟁을 언급한다. 하지만 이 시기는 비로소 동과 서가 나뉘기 시작한 시점이다. 의견이 달랐을지언정 붕당의 차이가 상대방에 대한 절멸로 이어진 조선후기에 비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순신이 동인의 지지를 받았고 서인이 원균을 지목했지만, 원균 사후 이순신은 대안이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이순신은 죽을 수밖에 없는 궁지에 몰렸고 그렇게 만든 것이 바로 임금 선조인 것이다.

이제 이 '불멸의 이순신'도 종착역을 앞두고 있다. 최근 들어 이렇게 긴 분량의 소설을 단기간 내에 독파한 적은 없었다. 애초에 그럴 의도도 없었는데 어찌 하다보니 끝까지 오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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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1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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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이순신 6 - 삼도 수군 통제사
김탁환 지음 / 황금가지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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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순천의 낙안민속마을을 구경한 적이 있다. 성벽 위에서 조망하는 옛 시절의 초가집들. 작년 가을에 지붕을 새로 한 듯 황금빛 볏짚이 석양에 비쳐 자태가 아름답기 그지 없다. 저녁 식사 준비를 하기 위해 때는 불의 연기가 굴뚝을 통해서 모락모락 하얗게 피어 오르는 모습은 목가적인 전원 풍경 그 자체이다. 저절로 시 한 수가 배어나올 마음이 절로 흐뭇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스위스는 중부 유럽에 있는 나라다. 국토의 크기도 작은데다 대부분이 알프스 산맥에 놓여 있어서 강대국들의 영토 야욕을 자극하지 않는다. 덕분에 18세기 초에 영세중립국의 지위를 획득하고 평화를 유지하며 직접참여에 의한 민주정치를 구가하고 있다.

이러한 스위스가 인류문화에 끼친 영향이 별볼 일 없다고 혹자는 주장한다. 차라리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이 오히려 인류문화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것이다. 언뜻 생각을 해 본다면, 충분히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비행기의 상용화가 이루어졌고, 원자력발전의 기초가 쌓였으며, 수많은 식민지가 독립을 쟁취하였다. 그리고 UN과 같은 세계정부를 구성하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그 외 전쟁을 소재로 한 방대한 예술적 성취를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그에 반해서 스위스가 독립한 지 사백 년 가까이 되었지만 크게 내세울 만한 것이 무엇일까? 아름다운 자연환경은 말 그대로 자연환경이므로 배제시킨다면, 산업의 발달, 기술의 개발, 문화예술의 눈부신 발전 등 두드러지는 것이 없다.

결론적으로 인류문화의 발전을 위해서는 스위스 같은 평화롭고 안정된 민주정부를 유지하는 것보다 전쟁을 지속적으로 유발하는 것이 좋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러한 주장에 동의할 수 없음을 익히 알고 있다. 초가집과 스위스의 예는 모두 한가지 중요한 관점을 빠뜨리고 있다. 철저한 사후적 논리이고, 외부인의 시각인 것이다.

나보고 누가 낙안의 초가집에서 사는 게 어떠냐고 권유한다면 나는 한마디로 거절하겠다. 보는 것과 실제로 사는 것은 별개의 차원이다, 혹이나 무늬만 초가이고 내부는 현대적인 가옥이라면 재고를 하겠지만. 실제로 조선시대라면 인테리어에 큰 기대를 걸지는 못할 것이다. 따라서 초가집의 아름다움은 오직 외부인 만이 느낄 뿐이다. 거주자들에게 초가는 가난과 고통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새마을운동 노래에서 “초가집을 없애자고” 그렇게 목청껏 부르짖었던 것이 이런 연유이다.

전쟁이 그렇게 인류문화에 끼치는 공적이 크다면 계속 전쟁을 벌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때 위와 같은 주장을 펼치는 이들과 그들의 가족을 가장 먼저 전장터에 출전시키면 재미있을 것이다. 인류의 진보를 위하여 최 일선에서 활약할 기회를 갖다니 얼마나 영광스럽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아마도 기를 쓰며 펄펄 뛸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자기 몸, 자기 가족 중 일원이 부상을 당하거나 전사를 하게 되면 뼈저린 아픔을 느끼게 될 것이고, 그런 허무맹랑한 주장의 함정을 깨닫게 되리라.

전장에서 다치고 사망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그것을 단지 숫자로 인식하여 타자화(他者化)하지 말고 나 자신, 내 가족, 내 이웃과 친구라고 생각하면 사정은 달라진다.

‘불멸의 이순신’도 벌써 6권째다. 이순신 장군은 드디어 삼도수군통제사 직책에 오른다. 저 멀리 북쪽에 도망갔던 조정에서는 연일 공문을 내려 보내 부산포에 있는 적군을 공격하라고 성화가 심하다. 100여 척의 배로 500척에 이르는 적을 공격하라는 탁상공론의 극치다. 용맹하기 그지없는 장수들도 안절부절 못하고 어서 부산포를 공격하여 전쟁을 끝내기를 원한다. 쉽게 끝날 수도 있다. 공격 가서 모조리 몰살당하고 이어 왜군이 전라도를 돌아 곧장 국왕에게로 쳐들어간다면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다.

필부의 용기가 있고, 군자의 용기가 있다. 원균의 용맹이 필부의 용맹이라면, 이순신이 보여주는 용기는 군자의 용기다. 전쟁에서 죽어가는 군사들과 살륙당하는 백성들, 그들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기고 안타깝게 여긴다면 누구도 전쟁을 가볍게 여기지 못한다. 그 정신이 소중한 것이며, 이순신이 진정 불멸의 명장이 된 연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라크의 자이툰 부대를 파견할 때, 많은 논란이 있었다. 찬반양론의 대립이 극심하였다. 찬성론은 미국의 은혜에 보답하자는 것과 파병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내용이다. 국익에 보탬이 된다면 작은 희생이 따르더라도 파병하는 게 옳다. 누구도 그 논리에 당당하게 반대하지 못할 것이다. 大를 위해서 小를 바치는 정신은 뿌리깊은 미덕이다.

나는 한가지만 덧붙이고 싶다. 그 小가 남이 아니고 ‘나’라고 할 때도 당당히 小를 희생하라고 요구할 것인가. 의연히 희생에 자원하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사람들이 많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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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1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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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이순신 5 - 아, 한산대첩
김탁환 지음 / 황금가지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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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에서 이순신은 한산도대첩을 거쳐 부산포해전을 통하여 왜군의 서진을 저지하고 부산포 일대에 묶어두는데 성공한다. 한산도해전에서 선보인 학익진이라는 절묘한 진법의 사용은 이순신이 얼마나 창조적인 연구자인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순신이 걸어온 길이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러운 선택이었던가를.

이순신은 기록에 따르면 평생에 걸쳐 전장에서 세 번의 큰 부상을 입는다. 처음은 함경도에서 여진족과 전투 중에 다리에 화살을 맞는다. 그리고 사천해전(?)에서 조총을 맞아 왼쪽 어깨를 크게 다친다. 마지막으로는 그의 목숨을 앗아간 노량해전에서의 흉탄(일부에서는 그가 전사한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장수가 전쟁에서 부상당하는 게 무슨 그리 큰 일인가 쉽게 넘겨버린다. 여차하면 수백, 수만 명의 병사와 백성들이 몰살당하는 게 현실 아닌가. 하지만 남의 일로 치부하지 말고 그것이 바로 내게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해 본다면 느낌이 남다르다.

우리 모두는 살면서 크건 작건 부상을 당한 경험을 지니고 있다. 인큐베이터 속에서 곱디 곱게 자라지 않은 이상. 교통사고 같은 대형 사고는 언급하지 않더라도 다리를 삐끗하기도 하고 팔이나 다리가 부러지기도 한다. 더 작게 들어가 보면 칼에 손을 베기도 했고, 남들과 다투다가 주먹다짐을 하여 눈자위가 퍼렇게 되거나 코피가 난 경우도 있다.
 
이러한 각종 경험의 순간에 우리들이 느낀 아픔을 어떠했는지 상기하고 싶다. 참을 수 없는 통증에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었으며, 이 부상이 상처가 영영 치료되지 않아 평생을 불구로 살아야 하는 건 아닐까 공포에 질려 벌벌 떨었던 적도 있다. 아픈 몸은 마음을 약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쉽사리 절망하게 되고 만사를 포기한다. 즉 자포자기하는 것이다. 나를 믿지 못하고 남에게 의지한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 '엄마'와 '아빠'를 애닯게 외친다.

오늘날 질병과 부상이 과거에 비해 줄어들지는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새로운 시대는 새 병마를 요구한다. 그럼에도 현대의학은 많은 진보를 이루었다. 우리 조상들을 그렇게 괴롭혔던 천연두와 소아마비 등은 이제 박물관에나 가야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외과수술을 통해 웬만한 부상과 상처는 흔적도 없이 완치가 가능해졌다.

영화나 TV 등의 대중매체를 통하여 우리는 폭력에 너무 둔감해졌다. 조폭들이 난무하고 칼에 찔리는 것은 예사이며, 총격전을 재미 삼아 벌인다. 영화 한 편에서 수백 명이 몰살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400여 년 전의 과거로 돌아가자. 만일 내가 당신이 칼에 찔리거나 화살에 맞았다고 할 때, 어떻게 치료를 하였을까를 되새겨보자. 당시 마취제가 있었을까. 병균이 옮지 못하도록 철저한 방균,무균시설이 갖추어져 있었을까. 그렇지 못하리라. 상처중 아니면 수술중에 흘린 피를 보충하기 위한 수혈도 제대로 없었다. 이때의 수술은 그야말로 생살을 찢는 고통, 뼛속을 저미는 괴로움 그 자체이리라.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기절도 했다. 요행히 그럭저럭 수술이 성공하였다손 치더라도 수술전 몸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다리를 절뚝거리거나 제대로 팔에 힘이 들어가지 못한 경우도 있다. 또 후유증 때문에 궂은 날 상처자리가 움찔거리고 삭신이 쑤신다. 

우리들이 이러한 고통스러운 경험을 만약에 한 번이라도 겪었다면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애쓸 것이다. 왜! 그것이 얼마만한 아픔과 괴로움을 수반하는지 충분히 체득하였으므로.

병상에 누우면 철저한 자신만의 시간을 갖게 된다. 내 아픔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 아무리 옆에서 울며불며 하더라도 그것은 타인의 아픔일 뿐, 내 자신의 저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고통을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이때는 확연한 남이다. 나와 나 아닌 존재, 병마와 부상은 바로 이러한 진리를 파악하는 실존의 순간이다. 그것은 절대고독의 자리다.

난중일기에 보면 이순신은 자주 앓아 누웠다. 그의 몸은 강건한 편이 못 되었던 것이다. 애초부터 그의 몸이 골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과시험에 급제하지도 못했을 테니. 그렇다면 그의 건강은 잇따른 부상을 통해 급격하게 약화되었던 것이다. 부상과 불완전한 치료, 후유증, 그리고 이것의 반복. 한가로이 요양하면서 약해진 몸을 추스를 시간적, 심적 여유가 그에게는 없다. 눈앞에서 강산을 침범하고 백성을 절멸시키는 왜적을 몰아내는 일, 그것이 무엇보다도 그에게 주어진 절체절명의 과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이순신과 같은 자리에 있더라면 똑같은 길을 걸었을까? 쉽사리 답변을 하는 자는 둘 중의 하나다. 진정 위인이거나 아니면 위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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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1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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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이순신 4 - 조선의 칼, 조선의 방패
김탁환 지음 / 황금가지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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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권에 이르러서 드디어 우리가 알고 있는 영웅 이순신의 위업이 시작된다. 옥포해전에서 한산도대첩 직전까지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다. 왜냐하면 작가의 목적은 해전에서 눈부신 활약을 벌이고 이순신의 뛰어난 업적을 화려하게 드러내는데 있지 않다.

작가가 누누이 드러내고 싶어하는 이순신의 강점이 바로 '패배의 가능성을 말끔히 제하는 일'이다. 이순신은 섯불리 왜적에게 덤벼들다가는 몰살당하고 말며, 그러면 조선은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있다. 따라서 같은 편이 보기에도 때로는 비겁해 보일 정도로 안전하고 조심스럽게 모험을 회피한다.

얼마전에 며칠동안 남도를 돌아다니며 문득 느낀 바가 있다. 말로만 듣고 화면으로만 보던 조수간만의 차가 빚어내는 엄청난 넓이의 갯벌. 그것은 단지 물이 빠진 공간이 아니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막막한 그 곳. 경운기로 오가야 할 정도의 광막한 공간이 바로 갯벌이었다. 자칫 해전을 벌이다가 까딱 시간을 놓치면 그대로 함선은 갯벌에 주저앉고 만다. 이순신은 밀물과 썰물이 드나드는 시각까지도 절묘하게 계산하여 나아감과 물러남의 기준으로 삼았던 것이다.

시야를 가릴 것 하나 없는 망망대해에서의 해전과 남도처럼 해안선이 들쭉날쭉하고 크고 작은 섬들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는 곳에서의 해전은 방법론이 동일할 수 없다. 전자에서라면 오로지 힘과 힘의 대결이 가능할 것이다. 군사들의 사기를 추스리고 용맹을 발휘하여 적선을 깨뜨릴 수 있는 측이 승리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후자라면 사정이 다르다. 대책없이 돌진하다가는 순식간에 후면과 측면에서 복병을 맞이하고 포위당하기 십상이다. 더우기 섬을 끼고 빙 돌아서 후방이 공격당할 위험도 있다. 그래서 이순신은 꼼꼼하게 적이 있을 만한 곳을 하나하나 살펴가며 부수고 전진한다.

며칠전 서점에서 신간들을 들치다가 「이순신은 전사하지 않았다」(남천우, 미다스북스)를 약간 훑어볼 기회가 있었다. 과학자인 저자답게 논리적 근거로 이순신과 거북선에 관한 통념을 비판하고 있어 참신했다. 그중에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조선군의 판옥선과 왜선의 크기 비교에 관한 것이다. 흔히 판옥선이 크고 단단하여 상대적으로 작은 왜선을 돌진하여 깨는데 유리하였다고 사서나 소설에서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오히려 왜선의 크기가 더 크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왜선은 대양항해를 견딜 만큼 크고 강하다는 것이다. 확실히 난중일기 등을 보면 왜선의 대선에는 삼층 누각이 놓여진 경우도 있다고 하니 단순히 무시할 만한 것은 아니다. 왜선 한 척에 수백명에서 천명 가까이 탑승했다고 하며, 따라서 이순신이 해전을 통해 몰살시킨 왜군의 숫자는 이십만에 가까우리라는 것이 저자의 의견이다. 확실히 이 정도의 전사자가 발생했다면 왜군에게는 치명타일 것이며, 부산포에만 웅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순신이 왜군이 서해로 돌아서 직접 의주를 공격하지 못하게 하고 전라도를 지킨 공적외에 왜군 전력의 절반 가까이를 궤멸시켜 전투력을 급격하게 줄인 공로도 엄청나다는 것이다.

우리는 구국영웅의 이순신이라는 고정관념에 익숙해 있다. 나또한 어릴적부터 '성웅' 이순신을 존경해 왔다. 그것은 목숨을 희생하며 나라를 구한 위인에 대한 상투적 존경심이었다. 이순신의 무엇이 위대하며 전쟁에 임하는 이순신의 심정이 어떠했으며 쫓겨났을때 그 슬픔과 괴로움과 분노가 어떠했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김탁환의 이 작품은 사실과 가능성 여부를 떠나 새삼 역사를 되돌아보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음에 고마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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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1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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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이순신 3 - 폭풍 전야
김탁환 지음 / 황금가지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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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8권 중 제3권에서는 드디어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에 부임한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경상우수사 원균이 패주하는 것으로 일단락한다.

이순신이 정읍현감에서 순식간에 몇등급을 거쳐 전라좌수사에 부임한 것은 매우 파격적인 인사발령이다. 기업의 경우라면 대리에서 일약 이사로 승진한 셈일까. 류성룡은 이순신이 너무나 필요했다. 그래서 반대파를 무릅쓰고 강수를 둔 것이다. 만약 이순신이 실패하면 류성룡도 정치적으로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된다. 조선시대에서도 피추천자의 과오는 추천자에게도 책임을 묻는 관행이 있었다.

발탁인사에는 의례 불만이 터져나오기 마련이다. 연공서열이 중시되는 조직일수록 더욱. 그런 점에서 전라좌수영에 속하는 장수들이 가장 직접적으로 반발한다. 타부서의 하급자가 자신의 상급자로 영전오니 누군들 좋아하겠는가. 따라서 이순신이 어떻게 전라좌수영을 장악하고 강군으로 거듭나도록 만들었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순신하면 곧 거북선이 연상된다. 이제 왠만한 사람이라면 거북선이 이순신이 순수한 창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순신 혼자서 거북선을 고안하고 제작한 것도 아니었다. 요즘도 조선은 엄청나게 규모가 크며 기술과 노동집약적인 산업이다. 따라서 거북선을 만들기 위하여 노력한 무수한 사람들이 있었을텐데 우리는 이를 간과하고는 한다.

이상과 같은 점을 염두에 두고 스토리를 따라가면서 나는 이순신이 정말로 위대한 점이 무엇이었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류성룡의 말처럼 勇將은 여럿 있다. 원균, 이일, 신립 등. 하지만 치밀한 계책과 만반의 준비 없는 용맹은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이순신은 바로 智將 이었던 것이다. 국민병법서인 손자병법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위태롭지 않다'라고 하였듯이 이순신은 적을 알고자 노력했고 위태롭지 않은 싸움을 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고뇌하였다.

선조의 일본정복 야망은 한마디로 생뚱맞다. 바로 '나를 알지'도 못하는 한심한 형편을 적나라하게 노출하는 모습이다. 중국의 전통적인 華夷觀에 물들어서 군자를 구하는 조선에게 어찌 오랑캐 왜놈 따위가 상대가 되느냐는 일갈이 가소롭기 그지없다. 성인군자는 총칼도 비껴가는 모양이다.

허구인 소설에 지나친 의미와 해석을 부여하는 것은 과도하다고 하겠지만, 역사소설은 史實을 뼈대로 구성된다. 따라서 허구에서 상사하고 유추하여 역사를 재평가하고 이해하는 것도 나름대로의 讀法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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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1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5.1.2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