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 그 내밀한 지리학
나탈리 앤지어 지음, 이한음 옮김 / 문예출판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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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산 계기는 두가지에서였다. 먼저 여성 저자의 '여자'에 대한 가볍지 않은 즉, 진지한 탐구에 호기심이 일었고, 게다가 책표지에 자랑스럽게도 '전미도서상 수상작' 이라는 금박레이블이 붙여져 있었다.

근년들어 남성과 여성의 유사성과 차이성에 관하여 풀어쓴 대중서가 제법 인기를 끌었다. 이것은 그만큼 남녀의 양성이 상호간에 대해 궁금하게 여기는 것이 많다는 증거이리라. 왜 안 그렇겠는가? 인류의 절반을 각각 차지하며,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결합하여 또다른 남녀를 생산하는 두 주체인데.

나탈리 앤지어는 19장으로 세분하여 여자에 대한 여자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전반부는 난자, 클리토리스, 자궁, 가슴 등 육체적인 측면에서 여성의 몸을 샅샅이 재검토하고 있다. 그리고 점차 신체 내부로 들어가 여성성을 형성하는 호르몬의 작용을 살펴보고, 이어서 여성성을 인류학적, 심리학적 측면으로 확대하여 사회학적 영역에까지 이르고 있다.

앤지어는 많은 여성들이 자신들의 몸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창피하고 수치스러운 것, 그러기에 항상 감추고 공개하기를 꺼리는 것. 그것을 낱낱이 밖으로 꺼내놓는다. 그리고 우리(여성 및 남성)의 오해와 편견을 깨뜨리고 새로운 각도에서 조망하도록 요구한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여성 독자를 위한 책이다. 그래서일까. 나같은 사람은 때론 책장을 넘기기 불편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서술한다.

따로 밑줄을 긋거나 메모를 하지 않은 탓에 각각의 세부적인 내용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이 책이 '불순한'(?) 의도를 지녔음을 깨닫는다. 앤지어는 중간에 과거의 페미니즘의 잘못에 비판적 칼날을 들이대지만, 이 역시 페미니즘 저작이다.

제2의 성으로 소외되었던 여성이 스스로의 성 정체성을 발견하고 당당한 주체로서 자연과 사회에 올바른 자리매김을 하도록 일깨우는게 페미니즘이라면, 두말할 나위없이 적극적으로 동조한다. 반면,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의 피해와 박탈을 과장하고 부추겨서 그들로 하여금 남성에 대항하는 적대적 여성으로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잘못된 방향이다.

앤지어는 순수하게 생물학이라는 학문에 기초를 두고 남성성과 대비되는 여성성을 묘사하고 있다. 적어도 그렇게 보이도록 하고 있다.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남성보다 우월한 제1의 성일수도 있다는 점에 반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차이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기존의 가족과 사회제도에 대한 과도한 부정적 평가를 통하여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알 수 없다. 여성이 지배하는 새로운 체제를 창출하고 싶어하는지? 적어도 내게 있어 이따금씩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저자의 정치적 함의는 신경을 불편하게 만든다.

인간은 사물에 대한 지식은 많이 확보하였지만, 인간 자신에 대하여는 그렇게 많이 알고 있지 못하다. 남성 또는 여성이 여성과 여자에 대하여 지식을 확장하고 새로운 인식을 갖는데 일청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 하지만 표면적 지식을 넘어서 보다 깊숙한 데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그렇게 권하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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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1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4.12.28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징비록 - 지옥의 전쟁, 그리고 반성의 기록, 개정증보판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2
유성룡 지음, 김흥식 옮김 / 서해문집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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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드라마를 계기로 임진왜란과 이순신에 관련된 책을 계속 읽게 된다. 출발이 어떠하든 양서를 두루 접하기만 한다면 나름대로 의의가 있을 것이다.

이순신과 뗄래야 뗄수 없는 중요한 존재인 유성룡, 이순신이 '난중일기'로 인간의 비극을 기록했듯이 그도 역사의 참화를 '징비록'에 담아내었다. 그리고 그들의 노고는 각각 국보 76호와 132호로 보답받고 있다.

역사에는 가정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은 중요한 선택의 결과로 비롯된다. 따라서 후세인들은 그당시 다른 선택이 이루어졌다면 역사의 물줄기가 어떻게 바뀌었을까를 상상하곤 한다.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도 이러한 상상의 산물이다.

마찬가지로 율곡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을때, 당시 임금을 비롯한 조정에서는 뜨악한 반응을 보였다. 태평성대에 무슨 연유로 군비를 강화하자는 것인가. 사림에서 율곡의 지위 때문에 그 정도로 끝났지 다른 이였더라면 필시 돌에 맞아 저 세상으로 여행갔으리라. 유성룡도 십만양병설에 반대한 이들 중 하나이다. 따라서 율곡과 서애를 결코 동급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서애가 당시 관료들보다 뛰어났던 점은 뒤늦게나마 전화의 발자국소리를 듣고 대응에 부심하였던데 있었다.

일본에 다녀온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의 의견이 정반대라는 점은 두고두고 우리를 당혹케 한다. 그들이 방문하고 살펴본 왜국은 서로 다른 실체였던가. 이것이 당시 선비들의 수준이자 한계였고 조선왕조가 나라를 잃을뻔한 위기에 처한 배경이기도 하다.

징비록을 처음 펼쳐든 것은 아니다. 소년시절에 청소년용으로 윤색된 형태로 접하였던 기억이 있다. 인간의 본성은 위기에 처하면 저절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평시에는 그렇게나 임금에게 충성을 맹세하던 신료들이 왜적의 소문만 듣고도 이미 도시가 텅빌 지경이었다. 부산에 상륙한 왜군이 불과 보름여만에 선조를 피난케 만들었던데서 당시 나약한 조선의 모습을 엿보게 한다. 더구나 보병들이. 지금도 서울에서 부산까지 도보로 보름정도가 소요된다고 알고 있다. 그러면 왜군은 거의 무인지경을 가듯이 국토를 휩쓸었던 셈이다. 그리고 당대의 명장이라 일컬어지던 신립이 문경새재를 버리고 탄금대 평야에서 완패한 어리석음. 적은 병력으로 스스로 총알받이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났을까. 새재에서 끝내 막아내지는 못하였더라도 시일이라도 지체시켰다면 전황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누가 알겠는가.

임진왜란을 다시금 되새기면서 새삼 한국전쟁과의 유사성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일거에 밀려서 거의 패망 일보직전까지 이른 점. 외국의 원군을 받아서 간신히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게 된 점. 평화협상과 동시에 곳곳에 소모전이 벌어진 점. 두번째 파상공격이 있었던 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였다. 스스로 방비에 소홀한 결과는 수많은 인명의 살상과 국토의 유린, 그리고 외국에 의존하는 주체성의 상실이었다.

일국의 정승인 유성룡이 명나라 장수 앞에서 비를 맞으면 무릎꿇고 비는 장면에서 가슴속에 뜨거운 울분이 솟지 않는 이는 드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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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1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5.1.2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난중일기 - 임진년 아침이 밝아오다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7
이순신 지음, 송찬섭 옮김 / 서해문집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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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달간 이어온 이순신과 임진왜란 집중독서의 마지막이다.

'난중일기'에 대하여 모르는 우리나라 국민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 뇌리 속에 이순신 장군은 신화적 존재로서 굳건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음은, 비단 학교와 가정에서의 교육적 세뇌 작업에 귀인되지는 않는다. 전쟁은 영웅을 낳는다고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대첩의 탁월한 전략과 명량대첩의 불가사의, 그리고 그 드라마틱한 최후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숨길과 눈길을 한시도 놓아주지 않는 강력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한산섬 달밝은 밤에..."로 시작하는 시조 한 수, 왜적의 총탄을 맞아 스러져가면서 남기는 최후의 한 마디. 그것을 눈물 한 자욱없이 스치는 사람은 아마도 감수성이 바닥을 드러낸 사람으로 치부된다.

그래서일까. 영웅적 이순신 상에 대한 외경심은 오히려 우리에게서 이순신을 멀리하게 만들었다. 이순신 장군은 화폐에 나오는 그럴듯한 도안에 지나지 않는다. 그속에 어떤 인간적 감정이 개입할 수도 없다. '성웅'이라는 단단한 외피 속에 갖혀있는, 그래서 존경하지만 친근하지는 않는 존재, 그것이 작금의 이순신 장군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모순된 감정인 듯싶다.

'난중일기'를 읽다보면, 그가 얼마나 연약하고 인간적인 사람인지 깨닫게 된다. 피 한방울 나지않는 냉철하며 카리스마적 위인이 아니다. 수시로 병마에 끙끙 앓고 밤마다 식은땀을 흘리는 약하디약한 육체를 지닌 인간. 가까운 사람들, 특히 어머니와 막내아들의 죽음에 통곡하며 스스로를 원망하는 따뜻한 인간애. 자신을 모함하고 터무니없이 일처리하는 사람들에 대한 솔직한 감정의 토로. 그것은 우리같은 평범한 이들이 일기장에 적어놓는 내용과 똑같은 것이다. 더우기 일기에는 전쟁에 관한 중요한 내용 뿐만 아니라 사소한 것도 적혀있다. 누구에게 쌀 몇 말을 주었다는 것, 타고다니는 말이 병들어 죽어 묻도록 하였다는 것, 아무개가 병들어 마음이 아프다는 등 이 모두가 이순신이라는 석 자를 제외하면 눈여겨보지 않은 장면들이다. 하지만 바로 이순신 장군의 전쟁중 기록이기에 더할 수 없는 가치가 포함된다. 이순신 장군은 신화가 아니라 현실이다.

오래도록 명성만이 높았으나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난중일기'. 청소년본으로 접한 이후 성인이 되어서는 처음 읽는다. 노모의 죽음에 "어서 죽게 해달라"며 통곡하고, 내아들 면의 죽음에 대한 소식은 듣고 탄식하며 "내게 무슨 죄가 있어 이런 지경을 당한다는 말인가?"하는 부분에서는 절로 눈앞이 뿌여진다.

소박한 인간의 모습, 바로 그것이 '난중일기'에서 발견하는 이순신의 진면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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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1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5.2.2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몽고반점 - 2005년 제2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한강 외 지음 / 문학사상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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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도에 이어 두번째로 구입한 이상문학상작품집이다. 솔직이 작년도는 그렇게 썩 내게 다가오지 못했다. 그만큼 내 감성이 메마른 탓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금년도의 경우 두드러지는 점은 무엇보다도 대상 작가가 젊다는 것이다. 정확히 하자면 나와 동년배라는 데서 오는 일종의 유대감이라고 하겠다.

'몽고반점'을 맞닥뜨리며 우선 소재의 파격성이 눈에 띈다. 작품해설에서도 언급했듯이 "처제와 형수의 정사"라는 근친상간적이며 도발적인 소재를 작가가 어떤 식으로 문학적 승화를 이루어냈을까. 자칫 피상적 호기심을 유발하는 정도에 그칠 수도 있겠다. 그 경우 소위 야설이라 불리는 통속적 부류와 차이점이 없게 된다. '몽고반점'은 너무나 스토리텔링 이데아에 충실하다. 술술 매끄럽게 읽혀지는 장점 외에 문체와 표현이 한 폭의 화려한 채색화를 연상시킨다. 눈앞에 영상시각적 이미지가 확 펼쳐진다.

예술가의 극한적 표현욕을 추구하는 작품에는 과거에도 몇 편 있었다. 해설에서 언급하는 '서편제'와 '광화사'도 있지만 내 기억 속에 가장 강렬한 작품은 김동인의 '광염 소나타'이다. 그 끝간 데를 모르는 처절한 몸부림은 '몽고반점'의 '그'가 '처제'를 통하여 성취하고자 하는 이념과도 일맥상통한다. 대신 그 댓가는 파멸이다.

인상적인 작품을 덮은 후 혹시 작가가 센세이셔널리즘에 의존하는 유형이 아닐까 잠시 이력을 살펴보았다. 이미 각각 두 편의 작품집과 장편소설을 발표한 나름대로 역량을 갖추었다는 느낌에 안도의 심호흡을 하며 문득 작가의 또다른 작품들을 접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대상의 그림자가 너무 짙은 탓일까. 다른 우수상 수상작들이 크게 다가오지 않는다. 재미만으로는 '내 여자친구의 귀여운 연애'와 '표정 관리 주식회사'가 나아보인다. 다만 그것이 순순한 재미가 아니라 씁쓸함을 동반하는 데서 이들이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세 번째 유방'과 '갑을고시원 체류기'는 힘들고 암울했던 지난 시절을 상기시켜 준다. 특히 '갑을고시원 체류기'는 비록 짧으나마 나의 한때의 고시원 생활을 떠올려 공통의 체험의식이 갖는 끄덕거림의 미학이 있다. '세번째 유방'은 보기드문 레즈비언적 소재를 살짝 건드리고 있어 이채롭다. 또한 '너'라는 2인칭 화법만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 점은 성공적이진 못해도 의의있는 도전이라고 칭하고 싶다.

'나비를 위한 알리바이'는 TV와 현대인의 관계를 모색하고 있는데, TV와 '나'와 '그녀'가 엮어내는 변주가 썩 자연스럽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서두에서 연상시키는 '장자의 나비', 그리고 '나비'의 화려함과 경박함을 통한 현대문명 비판은 참신하다.

'도시의 불빛'은 잘 이해되는 편은 아니다. 난해성이란 면에서 오히려 현대소설답다고 평할 수 있으리라. 대면을 피하고 전화로, 네트워크로만 사람 관계를 소통하는 현대의 특성을 비판한 것인지 아니면 긍정한 것인지 어렵다. 특히 '수영'에 관해서는 해설을 읽고서야 비로소 동명이인을 알았을 정도이다. 이러한 기법의 효과성이 나같은 단순 독자를 헷갈리기 위한 시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소설이 사상서가 아닌 이상 독자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을 무시해서는 안되지 않나 싶다.

전년도의 작품집을 들고 책장을 넘기면서 마주친 당혹스러움이 올해는 상당히 많이 가셨다. 그동안 여러편의 소설책을 섭렵한 보람이 있어 기쁘기조차 하다. 단편소설 분야에만 국한하면 참으로 우리 작가들의 역량은 너무나 뛰어나다고 한다. 더욱더 매진하는 동시에 장편에도 많은 성과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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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1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5.3.6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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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다 극찬을 아끼지 않는 문학 작품에 대하여 나는 동감을 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당혹스러울까? 혹시 내가 작품을 잘못 대한 건 아닐까 하는 자문에서 시작하여 나의 문학적 감수성이 겨우 요것밖에 되지 않나하는 자기반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반응이 나올 것이다. 또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는 행위에서부터 머리를 쥐어뜯는 행동까지 자학의 형태도 색색이리라.

내 경우가 바로 이러하다. 파울로 코엘료, 수년전부터 국내를 휩쓴 소설가. 대중적 지지도와 평단의 호의적 언사로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작가이다. 그런 그의 작품을 나는 이제 처음 접한다. (작년 중반에 잠깐 '연금술사'를 읽은 적은 있었지만)

대개 소설을 완독하게 되면, 찐한 여운이 남는다. 때로는 가슴벅찬 감동일 수도 있다. 아니면 불의에 대한 울분과 주인공에 대한 애처로운 심경이기도 하고. 또는 단순히 슬픈 감정에 눈앞이 시큰해진 적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전혀 그게 아니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책장을 다 덮어도 아무런 뒷맛이 나지 않는다. 아무 언급할만한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십대 초반의 한창 나이에 자살을 시도한 젊은 여성. 자살 후유증으로 심장 이상으로 일주일 후에 죽음이 예정되어 있고,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는 여성이 일주일을 보내면서 삶의 의의에 대해 자각하고 한 남자와 정신병원을 탈출한다는 스토리. 사실 여성의 죽음 예고는 의사의 놀라운 실험이었다는 뜻밖의 반전. 이것이 줄거리로만 본 작품이다. 더구나 작품의 주제도 단 한문장으로 정리되어 있다. 그것도 독자들이 혼동하지 않도록 작중에 저자의 입을 빌려서, 친절하게도. "죽음에 대한 자각은 우리를 더 치열하게 살도록 자극한다" (296면)

요는 이러한 주제의식과 스토리를 어떻게 하나의 유기적인 요소로 엮어서 문학적 승화를 달성해 내는가가 관건이라고 하겠다. 그런 면에서, 적어도 내게는 아무런 감흥이 오지 않는다는 게 나의 대답이다. 이것이 작품 또는 독자의 수준이 낮다는 표현은 아니다. 단지 취향의 차이라고 언급하고 싶다. 지식의 영역에서는 불멸의 진리가 존재할 수도 있지만, 감성의 영역은 사정이 다르다. 만인이 좋다는 것도 홀로 싫어할 수도 있고, 그것이 허용되며 때로는 존중되기도 한다. 파울로 코엘료, <연금술사>에서는 괜찮은 듯 다가왔지만, 이 작품은 전혀 나의 취향에 맞지 않는다. 이 말로 끝맺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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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1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5.3.2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