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하몽유록 - 한국학연구소 학술총서 2
김광수 지음, 서신혜.박종훈 옮김 / 한양대학교출판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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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성 짙은 베스트셀러와 자기계발,어학 등 실용서 외에는 신문지면 상에서 책 광고는 본 지가 오래되었다. 그래서였는지 대학교출판부들이 연합하여 전면광고를 낸 것을 죽 훑어보니 제법 대중이 관심을 기울일 책들여 여럿 있었다.

그 중에서도 나의 눈을 먼저 끌어당겼던 것이 이 <만하몽유록>이다. '몽유록'이면 꿈에 의탁하여 작가의 소망을 거침없이 피력하는 소설계통인데. 그냥 한 번 읽고 싶다는 생각이 불끈 솟음쳐서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마침 있다.

작가 김광수는 19세기말 20세기초를 살았던 인물이다. 삼십대 초반에 사망했으니 요절이라고 칭할만하다. 게다가 이 작품을 쓴게 불과 이십대 중반이라니 갑자기 나는 도대체 뭔가 하는 자괴감이 들기조차 한다.

그냥 조선시대의 고전소설이겠거니 하고 가볍게 집어든 게 사실은 1907년작이니, 이게 도대체 고소설인지 아니면 신소설에 포함되는지 난감하다. 아울러 옛 묵향을 느껴보려던 계획도 차질이 생긴 듯하다.

도대체 조선말 시골선비가 순한문으로 기록한 글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하여튼 대출을 해왔으니 어떻게 끄적거렸는지 보기나 하자. 이런 심정으로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박람강기'니 '박학다식'을 들어봤어도 이러한 지독함은 처음 겪는다. 이런 젊은이가 언제 사서삼경과 제자백서, 시문 등을 두루 익혔는지 기가 막히다. 도처에 순수한 인용문과 패러디가 넘실거린다. 도대체 한문지식이 없는 사람은 제대로 음미도 하지 못하겠다. 본문보다 각주 읽기에 급급한 처지가 되버렸으니.

사실 고소설의 마지막 불꽃이 될 것인가 아니면 시대착오의 시골뜨기의 자기만족인지 우려했는데, 장이 넘어가면서 역시 시대상은 속일 수 없음을 발견한다. 여자가 대학에 가고 소위 개화되는 실정, 국제정세에 대한 지식, 패망해가는 조국에 대한 울분을 곳곳에서 피력한다. 그래서 옥황상제에게 상소를 올리나 이미 정해진 운세를 하늘이라고 어이하리오.

신선의 말과 배를 빌려타고 중국 각처의 사적과 명승지를 밟으며 감회에 젖어 시를 읊는 작가에게 능동적으로 접근하고 속여서 마침내 사랑을 얻는 옥낭에게서 진취적 여성상을 잠시 볼 수 있으나 곧 한계에 직면한다.

저자는 천성적 시인이었나 보다. 이리 다양한 형태의 시가 많이 들어간 소설류는 처음이다. 한시 한 구절 한 구절을 천천히 음미해야 참맛을 느끼겠지만, 천학한 나는 그저 한글 번역만을 스쳐지나갈 뿐이다.

몸이 약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시기의 다른 지식인들이 선택한 길을 그는 걸어갈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약함에 몸을 떨었는지도. 그렇지만 이 책에서 문학의 향기가 배어나오지 않는다. 작가가 토해내고 싶은 시대적 격정은 몽유록이라는 형식과 순한문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안타까움을 느낀다. 감동을 받지 못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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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9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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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지음, 정영목 옮김 / 사계절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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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칭기스칸이 화두다. TV에서는 중국에서 제작된 대하사극이 프라임타임에 방영되고 있다. 곳곳에서 칭기스칸과 그 후예들이 거둔 전대미문의 성취를 찬양하고 그 비결을 얻고자 노력하고 있다.

우리에게 칭기스칸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존재일까? 이 시점에서 그걸 되새겨 보는 것도 좋다고 본다.

칭기스칸은 동양의 울타리에서만 판단하기에는 그 활동범위가 너무 크다. 잭 웨더포드는 칭기스칸과 그가 남긴 자취를 좇아서 수년을 탐사하고 연구하였다. 서양인의 시각에서 칭기스칸은 어떠한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먼저 근대 유럽에서는 칭기스칸과 몽골(타타르)는 바로 모든 악마적이고 저열함의 대명사였다고 한다. 어떤 측면에서는 저주를 내렸다고 할 정도다. 왜 그랬을까? 몽골 제국이 유럽에 어떤 타격을 입혔단 말인가. 사실 몽골의 발흥에서 치명타를 입은 것은 중국과 아랍세계였다.

저자는 칭기스칸의 일생을 중심으로 몽골부족의 봉기와 세계제국으로의 발전, 그리고 칭키스칸 사망후 후예들의 통치와 제국의 몰락을 개괄적이며 세밀하게 그리고 있다. 단순한 역사서라고 선입견을 갖지는 말자. 저자가 관심을 갖는 것은 개인사가 아니다.

칭기스칸이 몽골부족을 통일시킨 것은 그의 어떤 자질이 발휘되었는가 통치철학과 시스템을 정밀하게 파헤친다. 아울러 취약해 보이는 몽골 대제국이 100년이상 유지되어온 이유는 무엇인가도 제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몽골 제국은 문자그대로 '세계제국'이 갖춰야 할 바람직한 시스템 구성요소를 제대로 배합하였다. 인종적, 종교적 편견없이 인재를 등용하였고, 잘 닦인 교역망으로 쉴새없이 제국내 물자가 분배되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몽골의 몰락은 이러한 안정적인 시스템이 깨진데 기인한다. 흔히 역사교과서에서 배운 바에 따르면 지도층의 타락, 지난친 수탈체제, 라마교에의 몰입 등이 기억난다. 하지만 여기서 저자는 처음듣는 논거를 제시하는데, 바로 페스트의 횡행이다. 남부중국에서 발생한 페스트가 실크로드를 따라서 유럽까지 퍼지면서 사회,경제체제를 무너뜨리면서 몽골의 교역시스템이 가동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위기에 지배층이 부적절하게 대처하면서 허무하게 대제국은 무너진다. 신기하기 그지없다. 발해의 멸망원인에서 언급되지 않는 화산폭발과도 같은 자연재해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현상이랄까.

우리는 그동안 동양의 시각에서 칭기스칸과 몽골을 바라보았다. 이 책은 이러한 시각에 균형추를 놓는 역할을 한다. 몽골을 이렇게 보면 새로운 인식이 생긴다.

한국사람이라면 중간에 굉장히 기분이 나쁜 지도가 나온다. 몽골의 강역도에 고려도 포함되어 있다. 격렬한 대몽 항쟁을 한 우리 고려가 어찌!하고 울분을 응당 토해냄이 당연하다. 한편 생각해 보면 저자가 그렇게 생각할 법도 하다. 어쨌든 항복을 하였고, 이후 멸망시까지 몽골의 간섭을 받았으며 더우기 일본정벌에는 병참기지, 조선소에 선봉장 역할도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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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9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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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밖의 예수 - 믿는다는것 2
일레인 페이젤 / 정신세계사 / 198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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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치 코드>는 명성과는 달리 내게 특별한 감흥을 주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다고 하겠다.

이 책은 제목과는 달리 성서 밖의 예수를 직접적으로 서술하지는 않는다. 혹시나 예수의 숨겨진 삶의 궤적, 막달라 마리아와의 결혼생활과 자식 등에 대한 기대를 품은 나같은 독자들에게는 꽤나 실망이다. 원제는 'Gnostic Gospels' 이니 '영지주의 복음서'라고 해석이 가능하겠다. 즉 지금은 이단으로 낙인찍혀 잊혀진 초기 기독교 시대의 복음서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오늘날 신약성경은 꽤나 정련된 모습을 보여주지만, 출발부터 완비된 상태에서 성경이 확립된 것은 아니었다. 다양한 견해와 논의가 백화난만하던 시기, 기독교는 발전의 도상에서 방법론을 가지고 크게 대립하였다. 그것이 정통파와 영지주의라고 하겠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익히 알고 있듯이 정통파의 승리이고, 정통파의 최고사제는 가톨릭의 교황이란 명칭으로 불리운다.

20세기 후반에 발견되어 놀라움을 안겨준 나그 함마디 문서를 통해 저자는 이단시되었던 영지주의가 주장하던 내용이 무엇이고 이들이 어떤 연유로 이단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차분하게 풀이하였다.

영지주의는 어찌보면 불교의 소승불교 혹은 선불교와 유사점을 지닌다. 예수, 하나님으로부터의 외적 구원이 아니라 내적 깨달음을 통한 구원이라는 개념이 대표적이다. 부처와 마찬가지로 예수는 누구나의 마음에 내재되어 있다. 그것을 깨닫는 과정이 곧 신앙이며 깨달았을때 예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도 영지주의는 인간 예수가 아닌 성령적 존재에 초점을 맞추었고 따라서 신도들이 헛되이 순교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영지주의는 정성적인 특성을 추구했으며 따라서 수행과정이 용이치 않은 단점 때문에 스스로 소수파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순교가 주는 효과는 너무나 강렬하다. 뭐든지 비둘기보다는 매가 주목을 받게 마련이다. 더구나 정통파는 예수를 믿고 사도와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면 신자로 받아들였다. 모든 사람이 투철한 수련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점에서 초기 기독교가 유럽 각국 나아가 세계종교화하는 과정에서 결국 영지주의는 도태되고 만다.

이 과정에서 정통파의 탄압은 오히려 부수적이다. 영지주의의 몰락은 차라리 자체의 숙명이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영지주의의 교리는 여전히 유효성을 상실하지 않고 있다. 가톨릭의 형식주의와 권위주의에 반발하여 각종 종교개혁이 발생한 것이 그러하다. 또한 기독교의 엄격한 남성중심적 권위체제는 반여성적 멍에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고정된 사제의 직위가 존재하지 않고 남녀 누구나 사제가 될 수 있고 비교적 평등하게 인정받았던 영지주의는 현대의 페미니스트에게 환영받은 소지가 다분했을텐데.

그동안 몰랐던 성경의 숨겨진 측면을 새로이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도 꽤나 유익하다. 특히 창세기 인류의 탄생을 두고서 정통파와 영지주의가 중시하는 구절이 상이한 점도 인상적이다. 조물주와 하나님을 구별하여 독선적 조물주를 갈파한 점도 흥미롭다.

요컨대 기존 성경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또는 성경이 맘에 안들어서 삐딱하게 들여다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하여 방대한 원서 '나그함마디 문서'를 이해하는 첩경이 되는 책으로서 평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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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9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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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내경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36
황제 지음, 이창일 옮김 / 책세상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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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내경>은 어려운 책이다. 기본적으로 동양의학서이다. 따라서 전문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맥을 짚는 법, 침을 놓는 법 등 일반독자로서는 불필요한 내용도 많이 있다.
그리고 방대하기조차 하다. '소문'편이 3권, '영추'편이 2권으로 나와있다. 어렵고 방대한 책을 눈앞에 들이대고서 그냥 고전이니까 읽으라고 한다면 누가 좋다고 할까? 그래서 이렇게 입문본 내지 요약본이 필요한 법이다.

오랫동안 <황제내경>에 주목하였다. 실용적 관점보다는 근저에 흐르는 동양사상의 깊은 맥락을 이해하고 싶었다. 음과 양을 주축으로 한 오행론에 입각한 동양의학은 현대에도 여전히 그 효과성을 발휘하고 있다. 그 뿌리가 <황제내경>이다. 그래서 김용옥은 한의대에 들어가 한의사로 개업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수천년 동안 동양의학의 뼈대는 변하지 않았다고 하며 해설부분에서 역자는 불가사의 중의 하나라고 언급한다. 보는 시각에 따라 그 말은 고리타분한 인상을 주기도 하며, 동시에 진리는 통시대성을 지닌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일상생활 어디에서도 음양오행은 쫓아다닌다. 산모가 출산일과 시각을 좋은 때로 맞추어 정한다. 이사할 때 길일을 정한다. 결혼날도 역시 길일을 택한다. 매년 토정비결로 운세를 점치고, 관상이나 손금은 어디서나 흔하다. 결혼을 앞둔 짝은 사주와 궁합을 본다. 묘를 쓸때 풍수지리는 어떠한가. 길가와 찌라시신문에 도배하는 철학관은 더욱 맹위를 떨친다. 한의학을 이 부류에 포함시킬 수는 없지만 그 근본이 완전히 다르다고 떼쓰는건 억지다.

<황제내경>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소문'은 일반이론이다. '영추'는 실제시술 방법론이다. 동양의학도는 후자에게 큰 관심이 갈 법하지만, 나같은 문외한이자 평범한 독자는 소위 동양의학의 기본정신을 이해하기 위하여 '소문'편이 흥미가 간다.

이 책은 전체적인 내용을 재편집하여 초입자가 비교적 용이하게 <황제내경>에 접근하도록 돕고 있다. 그렇다고 소설마냥 재밌거나 하지는 않으니 과도한 기대는 금물.

언제 기회가 닿으면 <황제내경 소문>전체를 공부하고 싶다. 인간과 자연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같은 대지에서 동일한 기의 운행에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이다. 그 정신이 20세기 후반부터 사회적 병폐에 허덕이던 서구권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어 역사의 퇴물이 아니라 바로 이 자리에서 생생하게 숨쉬고 있는 연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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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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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과 제왕 1 - 대륙의 별, 장군 고선지
이덕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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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고선지 장군의 위대한 업적와 일대기를 알고자 하는 이라면 이 책에서 분명 당혹감과 실망감을 갖게 될 점을 상기시키고 싶다. 여기서 고선지라는 인물은 당대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매개체로서의 의의를 지닐뿐이다.

이덕일 역사서라고 책 표지에 당당하게 직서하고 있듯이, 이덕일만이 갖는 역사서술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역사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이다. 주제와 주인공에 집중하기 보다는 그를 둘러싼 폭넓은 공간적 시간적 지평을 확대하여 그 속에서 다시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가 그러하며, <정약용과 형제들>도 마찬가지다. 그런 서술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미시적 접근이 놓치기 쉬운 거시적 파악, 즉 역사 전반에서 당해 인물과 사건이 갖는 위치와 한계를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의 이러한 접근방식은 학문적인 측면에서는 몰라도(왜냐하면 나는 전문적 역사학자가 아니므로) 적어도 대중적 측면에서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거기다가 개인적 미덕인 소설을 능가하는 박진감 넘치는 문체도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다.

이제 이덕일이 근대사에서 고대사를 시야를 돌아보고 있다. 그리고 당찬 포부를 내세웠으니 <장군과 제왕>이 그것이다. 왜 하필 이덕일은 대표적인 고구려 유민 두 사람의 엇갈린 삶을 대칭적으로 내세웠을까? 그들은 대조영과는 달리 당나라의 내부에서 고구려인으로서 굵직한 획을 긋는 인생을 살았다. 그들의 삶과 선택은 천년도 훨씬 지난 오늘의 시점에서 어떤 의의를 지니는 것일까 이런저런 궁금증이 떠오른다.

도중에 가끔 고선지에 대한 언급이 나오긴 하지만 고선지가 전면에 떠오르는 것은 책의 3분의 2가 경과한 지점에서다. 그때까지는 당 고종과 측천무후, 당 현종의 소위 '개원의 치'가 상세히 서술된다. 특히 또하나의 고구려 유민인 왕모중에 대한 내용이 흥미로왔다.

이어서는 고선지와 안녹산의 엇갈린 인생이 병치된다. 다같이 오랑캐인 두 걸출한 장군이 어찌 승승장구하고 또 어떻게 생사의 기로에서 어긋나는지. 이제까지 안녹산은 어쩌다 현종과 양귀비의 총애를 받아 출세가도를 달린 무능한 무장이라고만 생각하였다. 그런 그가 당나라 북방의 국경을 책임지고 거란족을 복속시킨 나름대로 뛰어난 장수일 줄이야.

그리고 고선지가 어째서 그렇게 추앙받는지도. 서양에서 한니발과 나폴레옹이 감행한 알프스 등정보다 훨씬 어려운 사막횡단과 이어진 파미르고원과 힌두쿠시 산맥의 돌파는 한두 명도 아닌 수만의 대군으로서는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1세기의 현시점에서도 중국서부와 중앙아시아의 혹독한 지형과 기후는 사람의 접근을 용이하게 하지 않는다. 하물며 당시에서야 말할 나위도 없다. 이는 내가 잠시 체험한 실크로드 여행에서도 깊이 느꼈던 것이다. 또한 세계사적 대사건인 탈라스전투에서의 패배도 내부의 배반으로 인한 것이니, 전적으로 그에게 책임지울 수는 없다는 것을 이미 당나라 조정에서도 인식하여 처벌대신 승진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고선지가 2권의 이정기나 발해를 일으킨 대조영과 구별되어 한편으로 진한 아쉬움을 남기는 것은 그가 철저한 당나라 장군으로서의 일생을 살았다는 점이다. 그는 죽음의 순간에서도 당나라에 대한 충성을 보여주었다. 그것이 오늘날 중국인이 기리는 억울하게 죽은 10대 장군에 포함되는 연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진정한 한민족으로서 고구려인으로서 당당하게 자리매김하지 못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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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5.12.19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