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박완서는 '엄마의 말뚝'의 작가다. 그게 내가 아는 전부다. 사실 이 소설도 신간 여행기를 구입하여 덤으로 얻은 것이니 진짜 관심이 있어서 펼쳐든 것은 아니다. 거기다가 여행기마저 내게는 큰 인상을 남기지 못했으니 덤이야 말할 필요조차 있겠는가.

다 읽고 난 후 갑자기 밀란 쿤데라의 <농담>이라는 소설이 떠오른다. 쿤데라의 열혈 독자에게는 돌맞을 소리겠지만 일단 '농담'이라는 어휘를 통해 연결이 이루어진다. 쿤데라의 경우 농담 한마디로 일시에 반동으로 몰려 그의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박완서의 경우는 어떨까. 어릴적 농담 한마디로 존경받는 의학박사 영빈은 수십년 만에 만난 동창과 밀회를 거듭하게 된다. 연관성은 전혀 없다. 더우기 박완서의 소설에서 불륜관계는 한 축의 역할을 수행할 뿐 작품 전체를 끌고가는 구동력은 지니지 못한다.

처음에는 중년 남성과 여성 간의 불륜을 그린 줄로만 받아들였다. 너무나 모범생적인 인생을 살아온 나름대로 성공한 중년 남성에게 평온하지만 재미없는 가정을 벗어나고픈 욕망이 있을 것은 십분 이해한다. 그런데 국민학교 시절의 결혼하겠다는 불순한 발언을 서슴치 않았던 여자 동창을 만나니 갇혔던 물꼬가 터지듯이 그의 감정이 분출한 것이려니.

그런데 어느 순간 이야기는 영빈의 동생 영묘에게로 넘어가 있다. 준재벌가의 맏며느리가 되었는데 남편의 갑작스러운 시한부 인생으로 삶의 색채가 달라지고 죽음을 기다리며 그리고 죽음을 보내는 과정에서 그녀는 철저히 돈으로 결부된 시댁의 인간관계에 몸저리를 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영빈의 아내로 공은 돌아간다. 아내는 남편의 외도를 모른 상태에서 딸만 둘인 상황에 불편함을 느끼고 늦동이 아들을 갖기 위한 주도면밀한 작업을 진행한다. 남편이 구박한 것도 아닌데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확고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인 것이다. 기막힌 사실은 그녀가 일자무식도 아닌 교사라는 그래도 합리적 이성과 판단을 하리라고 여겼던 직군이라는 점이다.

이 세 유형의 가족 관계가 서로 고리를 물고 있다. 어느 관계가 더 낳는가를 따지는 것은 오십보백보일 뿐. 흔히들 가족이야말로 모든 가치의 지고지선한 기둥으로 칭송하기 급급하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최고의 미덕은 가족의 가치를 옹호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실상에서 가족간에 바람직한 이상적인 관계형성을 얼마나 자주 볼 수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오히려 이 작품의 가족처럼 위악적인 가면을 드리우는 밋밋한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해설을 통하여 작가 박완서의 주된 관심사가 가부장적 가족관계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고 알게 되었다. 여기서도 영묘 시댁을 통하여 속물자본주의의 근성이 물씬 풍기고 있다. 또한 가부장적 가족관계에 대한 차가운 비난도 명백하다. 그렇지만 보다 더 큰 제재는 위선적 가족에 대한 소묘가 아닌가 싶다.

박완서는 연배에서는 지식인 작가다. 일찌기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하였었고 나이 마흔에 등단하였다는 점은 그가 얼마나 지적이며 정제된 문장과 어휘를 구사하는지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글은 너무도 깔끔하다. 언제라도 감성은 이성의 필터를 거쳐서 표출된다. 그의 글에서 뜨거운 감정의 분출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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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6.3.13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불의 기억 2 - 얼굴과 가면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지음, 박병규 옮김 / 따님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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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두번째 권은 1701년에서 1900년까지 200년간의 아메리카(미국은 아메리카가 아니다!) 역사를 고발하고 있다.

이 책을 통독하면서 새삼 절감하는 것은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무섭고 잔인한가이다. "가장 좋은 인디언은 죽어 있는 인디언이다"라는 말이 대변하듯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위시한 소위 유럽인들에게 아메리카 원주민은 인간이라는 관념을 찾아볼 수 없다. 황인종이 그러할진대 오로지 노예를 목적으로 납치해온 흑인들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럼에도 메스티소나 물라토의 존재를 보건대 동물적 육욕을 억제하지는 못했던 듯 싶으니 참으로 위선적인 가식의 얼굴이 아니겠는가).

어쨌든 식민지 산업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점차 본국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는 무리들이 생겨나고(주로 식민지 지배층이다) 이들이 원주민들을 감언이설로 꼬드겨 무기를 들고 본국에 투쟁하게 만든다. 제국주의에 대한 숭고한 항쟁이라, 얼마나 멋진 용어인가. 그대 순진한 원주민들이여, 그들은 제국주의 본국에 억압받고, 간사한 식민지배세력에 이용당하며, 끝내는 동족에 등을 돌린 머리없는 배신자에게 쫓겨나는구나.

19세기 중반부터 아메리카의 여러나라들이 차츰차츰 독립을 쟁취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지배층(사제,대지주)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한 독립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노예와 원주민들의 삶은 아무런 희망이 없다, 단지 지배층이 바뀌었을 뿐.

오늘날 중남미를 떠올린다. 그들의 경제적 빈곤, 정치적 혼란, 그 뿌리는 식민시대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불과 백여년에 이러한 암흑세상이 지구 다른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할 따름이다. 그러니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꿈틀거리는 원주민의 몸부림이 그치지 않을 수밖에.

시몬 볼리바르와 호세 아르티가스의 단절된 꿈에 더불어 슬퍼한다. 분열을 극복하고 대아메리카공화국을 이루고자 노력하여 한때는 성공한 듯 보였다. 사상누각도 이보다는 더 튼튼했을 것이다. 결국 그의 이름은 일개 국명에서 흔적을 남기고 있으니 그래도 아주 의의가 없었던게 아니라고 자위해야 할까. 호세 아르티가스는 찰나의 성공이나마 거두지도 못했으니 어찌하랴.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대국 사이에 낀 오늘날의 우루과이, 거기에는 불의에 굴복하지 않았던 아르티가스의 서사시가 묻혀있다.

기막힌 사실은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 연합군에 의한 파라과이 침공이다. 눈앞에 자신들과는 달리 정의의 길을 가는 그들이 그렇게 못마땅했나 보다. 오늘날 파라과이 영토는 갈기갈기 찢긴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니 말이다.

눈을 현대로 돌려 작금의 중남미는 왜곡된 사회구조가 교정되었는지 알고 싶다. 핍박받는 원주민과 하층민들에게 자신들의 나라는 기쁨과 감사의 대상일까 아니면 증오와 저주의 존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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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6.3.16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잊혀진 이집트를 찾아서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2
장 베르쿠테 지음 / 시공사 / 199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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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002.

작년이었던가 대영박물관 전시회를 관람했을 때 로제타석을 보았다. 물론 모조품이었다. 그외에도 많은 이집트와 중동지역의 고대유물을 인상깊게 보았다.

역시 작년에 중국 실크로드 여행을 다녀왔을 때다. 둔황 석굴을 들여다 보았더니 많은 석굴들이 도굴당한 상태였다. 독일, 프랑스 등등의 소위 탐험가 및 학자들에 의하여. 그때 통역을 해주던 박사 연구원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도둑놈'이라고 하는 소리가 잊혀지지 않는다.

몇달전 신문 한켠에 난 기사를 보았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에 의하여 세계문화유산인 바미안 석굴이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둔황석굴 내의 많은 벽화에서 부처의 눈이 도려내진 기억이 떠오른다.

많은 이집트학 선구자들이 유물을 발굴하거나 또는 도굴하는 기록을 보거나 읽으면서 내내 마음 한구석에 떠나지 않은 생각들이다. 고고학이란 학문은 한때 유물도둑과 동일시되었다고 한다. 다른 나라의 문화유산을 속여서 또는 몰래 빼가는 행위는 물론 비열하다. 동시에 어쨌든 그들 덕택에 많은 역사적 유물들이 망실의 위기에서 벗어난 것도 또한 사실이다. 양날의 칼인 셈이다.

그 찬란했던 이집트 문명이 완전히 잊혀지다시피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이미 로마시대에 이집트 문자는 아무도 해독불가능한 암호가 되다시피 하였고 중세를 거치면서 이집트에 고도의 문명이 존재했다는 기억조차 사라졌다니. 그러니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입 때 발견한 로제타석을 가지고 끈질긴 연구끝에 샹폴리옹이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하게 되는 과정이 드라마틱하게 여겨진다.

고대 이집트에 관하여 엄청난 연구가 이루어졌고 많은 사실들이 드러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집트의 많은 것이 신비에 싸여 있다. 소위 세계 몇대 불가사의라고 하는 피라미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많은 영화에서 이집트를 신비스러운 세계로 다루는 것도 이해가 된다.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는 처음 접하였다. 고급용지를 사용하였고 수많은 도판을 사용하여 읽기와 보기의 균형을 꾀하였다. 그럼에도 담고 있는 내용은 만만하지 않다. 대중적이지만 제법 깊이를 담고 있어서 쑥쑥 진도가 나가지는 못한다. 물론 낯선 분야인 탓도 있지만.

이 책의 도움을 받았지만 여전히 난 이집트에 무지하다. 영화와 소설을 통해서 람세스라든지 투탄카멘 등의 어휘는 귀에 익었고 당시의 의상과 건축도 제법 복원을 해놓았지만 당시 사람들의 삶이 어떠한가 그들이 어떤 역사적 굴곡을 겪은가에 대한 총체적 시각이 부족함을 절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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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6.3.18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불의 기억 3 - 바람의 세기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지음, 박병규 옮김 / 따님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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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마지막 세번째 권 읽기를 마치다. 읽는이가 이렇게 숨막힐진대 저자는 어떤 심경으로 이 처절한 작품을 집필할 수 있었을지 감탄과 경이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 권은 20세기 라틴아메리카 현대사를 아우르고 있다. 19세기 중반부터 유럽제국주의에서 잇달아 독립을 쟁취하여 진정한 그들만의 역사를 개척해 나가는 장면에서 한가닥 희망을 엿본다면 20세기 후반에 이르러도 그들 민중의 삶에는 일말의 개선도 없다는 현실 앞에서 좌절과 허탈을 금치 못한다.

비록 독립을 하였지만 단지 지배층의 교체를 의미할 뿐 국민 전체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오히려 더욱 악랄하게 탄압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혁명과 뒤집는 쿠데타의 연속. 유럽은 물러났지만 이제 미국의 강력한 개입과 조종은 이름만 독립국일뿐 여전한 식민지와 다름없다.

만약 지금의 우리사회에서 언론과 방송이 군부의 쿠데타를 노골적으로 요구한다면 국민들의 반응과 태도는 어떤 양태를 보여줄 지 궁금하다. 그런데 그런 일이 남미에서 자연스러운 일상적 현상으로 비일비재하다. 볼리비아의 역사 150년에서 쿠데타만 150번 이상이라니 이건 어떤 정권도 평균적으로 1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슬프기 짝이 없다.

남미 지배층과 국민들이 과연 동일한 국가 이념을 공유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수십만명의 목숨을 앗는 대량학살이 손쉽게 자행된다는 말인가. 식민역사의 오염된 유산이 아닐 수 없다.

민주주의 혹은 사회주의 이념은 모두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도구일 뿐이다. 무엇이 절대적으로 진리인지는 오직 신만이 알 것이다. 국민이 정당한 투표절차를 통해서 사회주의 이념을 채택하고 지지하였다면 그 대의를 존중하고 따르면 될 것이다. 어찌 타국에서 국민들의 선택을 집단적 어리석음이라고 낙인찍고 국가체제를 뒤흔들 수 있다는 것인지.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차라리 외세와 손잡고 기대는 특권층은 이미 국민이기를 포기한 존재들이다.

21세기 유일의 초강대국인 미국에 대해서는 워낙 많은 찬반여론이 거세다. 분명 나름대로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측면을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세계질서를 유지하고 재편하기 위하여 무수한 폭력적이며 야만적인 비열하기 짝이 없는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아직도 경제제재를 가하고 있는 쿠바가 단적인 예다. 단지 자신의 바로 앞에서 반대 체제가 들어섰다는 것 때문에 일체의 문호를 닫아걸고 국가를 전복하기 위하여 수십년을 공작해 왔다는 것. 카스트로의 쿠바가 미국을 공격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암울한 세계속에 가끔씩 한줄기 서광이 비치기 시작하나 그 빛을 너무 약해서 오래가지 못하다가 20세기 말에 이르러서 구름이 점차 걷히고 있다. 오늘날 브릭스라고 일컬어지는 브라질을 포함하여 여러국가에서 독재체제가 무너지고 자유주의가 자리를 잡고 있다.

중남미에서 한번이라도 제대로 된 체제가 자리를 잡은 역사는 없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침략 이전 그들의 역사는 기록되지 않았고 기억에서 삭제되도록 강요당하였다. 그리고 그후 그것은 주체의 역사가 아니라 억압과 피지배의 수난사였다. 이제 겨우 자신들의 진정한 역사를 꾸려나갈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하루바삐 안정된 사회체제를 구축하여 앞으로 다시는 어두운 과거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희망할 뿐이다. 그것이 유사한 경험을 공유하고 그들보다 몇발짝 앞서나간 이웃의 소박한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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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6.3.27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밤이여, 나뉘어라 - 2006년 제30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정미경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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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사서 읽는다. 별 대단찮은 일이지만 나름대로 일년에 최소한 한 권의 순수문학집을 사겠다는 결심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에 스스로 자부한다.

올해는 정미경의 '밤이여,나뉘어라'가 수상했다. 수상작가들의 면면을 보면 갑자기 나타나서 대상을 수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점에 특색이다. 정미경만해도 2003, 2004년에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그외 김경욱은 2003, 2005년에, 김영하, 전경린, 윤성희는 2003년에 각각 우수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다. 즉 차근차근 기초를 쌓고 꾸준한 작품활동으로 실력을 인정받은 작가들이 대상을 수상한다. 이것은 이상문학상 선정기준에 일시적 유행성보다는 문학 본연의 가치를 중시하는 긍정적인 자세이다.

수록작품에서 구광본의 '긴 하루'와 김경욱의 '위험한 독서', 김경하의 '아이스크림'이 재미있게 읽혀진다. 특히 김경하의 글은 일상적 에피소드를 소재로 삼아서인지 보다 친근미가 넘친다. 평소와 달리 다소 맛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식품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공유하는 바다. 하지만 그저 그것으로 끝난다. 두 부부가 상상하는 김부장의 실체는 단순한 가공일 뿐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간단한 소품적 재미만을 남길뿐이다.

구광본의 글은 사람이 아니라 카메라가 화자로 나서서 보고 느끼고 증언해준다. 사물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인간 군상의 행태. 그것은 그다지 밝은 세상은 아니다. 그럼에도 편의점 알바생에 대한 따뜻한 시각은 결국 사물의 외투만 뒤집어썼을뿐 근본은 따스한 작가의 눈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글쎄, '위험한 독서'는 독서계몽운동의 브로셔처럼 비쳐지기 딱 좋다. 이럴때는 이런 작품이 저럴때는 저런 글을 읽으면 심리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비타민처럼 현대사회에 독서붐이 일어날텐데. 그러나 독서치료사는 여자환자를 독서지도와 육체관계를 통하여 치료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정작 자신은 치료라는 미명하에 위장하였던 자신의 고독과 소외를 드러내고 말았으니 장차 어이할꼬.

함정임의 '자두'와 윤성희의 '무릎'은 가족관계를 다룬 공통점을 지닌 작품들이다. 솔직히 함정임의 글은 잘 다가오지 않는다. 탐탁치않은 결혼생활의 실패를 겪은 남자가 재혼 준비를 하며, 여자는 배다른 오빠가 보내준 그림을 보며 무언가를 느끼며 자두를 먹는다. 대체로 이런 스토리인데 남자의 결혼실패를 자세히 기술하며, 재혼을 위하여 상견례를 하고 집을 구하는 과정을 또 낱낱이 풀어놓는걸 보면 결혼으로 맺어지는 또다른 가족관계의 허상과 불안감을 표현하려는 노력인 것도 같건만..

'무릎'도 내용상의 비현실성에 있어서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잘것없는 물건들만을 모아놓은 박물관을 꿈꾸거나,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정원에서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게 하는 정원사로 일하는 주인공. 주인공은 가출하여 방황 속에서 자신과 가족의 가치를 깨닫고 돌아오는 돌아온 탕자인 듯 싶다. 그러기에 작가는 가족관계에서 무릎의 의의에 대하여 말미에 친절하게 풀어쓰고 있는게 아닐지.

대상은 정미경이 수상하였지만, 개인적인 취향의 선호도는 '야상록'이 가깝다. 왠지 공감이 느껴지지 않는 백야의 스칸디나비아 보다는 우리네 시골이 보다 가깝지 않을까. 그리고 아버지의 초상과 맞물리는 여자의 환영받지 못하는 애정관계. 슬프기 보다는 어둡고 비극적인 배경에서 서원의 검은 못물에 대비되는 하얀 꽃 무더기. 참으로 밤의 정서에 어울리는 흑과 백,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등이 현란한 문체와 어우러지며 묘한 감흥을 일으킨다.

'밤이여,나뉘어라'는 내가 인식한 주제의식과 심사위원들의 그것이 상이하여 당혹스럽다. 수상작 선정이유서에서 "사랑에 대한 미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채 나락으로 빼져든 인간의 비극적 파멸"이라고 적시하고 있는데, 과연 그럴까. P의 자기파멸이 사랑과 직접적 연관성을 지니는지 되새김질을 해봐도 찾아보기 어려운데, 나로서는. 북구의 백야에서 어두운 밤을 그리워하듯, 태양처럼 빛나는 인생에서 응달의 존재는 빛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데 그게 없다면 그건 빛이 없는 것과 다름없다는 소박하지만 강력한 진실의 웅변이다. P의 천재성이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면 좀더 성공적이고 평온한 삶을 누렸을 것이다. 그런면에서 '나'는 P를 쫓아가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P가 떠나버리자 삶의 지침을 상실하고 의학공부에서 영화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제 '나'는 P를 알지 못한다. 그가 아는 P는 이미 살아있다고 할 수 없다. 그의 삶도 이제부터는 평온치 못하리라, 인생의 나침반이 영영 사라졌으니.

처음에는 그다지 깊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술술 읽어 넘어갔는데, 후반부 작품론을 읽다 보니 가슴이 탁 막힌다. 얼마 안되는 단편 하나에 이렇게 깊은 의미를 부여하다니. 정말 작가는 평론에서 파헤친 그 모든 것을 머리속에 인지하고 작품을 그렸단 말인지. 침소봉대라는 말이 자꾸 뇌리를 어지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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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6.3.3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