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간 버지니아 울프 전집 7
버지니아 울프 지음, 정명희 옮김 / 솔출판사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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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껍지 않은 분량에 여유로운 행간이었는데 완독에 의외로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스토리가 복잡하지도 않은데.

사실 스토리 자체는 단순하다. 연극 상연과 그 전후로 포인쯔홀 사람들의 행동과 심리를 그리고 있다. 스토리가 단순한만큼 오히려 내용의 복잡성은 만만치 않다. 작가의 말처럼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이는 전작들에서 한두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그 독창성 여부에 대해서는 해설에서처럼 논란이 있지만 적어도 작가의 작품에만 국한하자면 구성 해체에는 성공한 듯 싶다. 한 문장도 쉽사리 독파를 허용하지 않는다. 문장 하나하나가 싯귀처럼 깊은 함의를 지니고 있다. 더우기 평범한 대사와 혼재된 고전의 무수한 인용은 영국 문학에 대한 지식없이는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그런 면에서 각주라도 인용의 출처를 밝혔으면 하는 한줄기 아쉬움.

이쯤에서 작품의 의도가 궁금하다. "나를 버리고 우리로 대치하자"라고 작품 구상에서 언급했다고 한다. "우리가 비록 다른 역할들을 행하지만 똑같다"는 목사의 연극 총평이 이를 가리키는가? 여기서 우리는 적어도 획일적인 의미를 지니지는 않을 것이다. 각각의 개성과 차이가 인정되고 존중되는 우리. 2차세계대전이 광분하는 시절. 나치와 파쇼가 전횡하는 시기. 그것은 소박하지만 절실한 바램이었을 것이다. 연출자 라 트롭양이 일탈의 존재로 묘사되지만 부정적으로 여겨지지 않는게 그런 연유다. 담배를 피워대며 술집에 들어가고 동성애자("침대와 지갑을 같이 썼던")임에도 말이다.

'막간'은 말 그대로 막과 막 사이를 가리킨다. 결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부분이 아니다. 연극이 상연되는 동안 관객은 자신을 잊고 무대에 빠져든다. 사이버 공간의 실재화, 반면 막간에서 사람들은 다시금 일상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러면 무대위와 아래 중 진정한 삶의 반영은 어디일까? 비약한다면 어디가 꿈이고 어디가 현실인가, 누가 나비고 누가 장주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작가가 최종적으로 타이틀을 변경한 것은 가벼운 변덕이 아니라고 믿고 싶다.

버지니어 울프의 대표작은 대개 <등대로>와 <댈러웨이 부인>을 꼽는다. 그만큼 이 작품은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고 있다. 즉 탁월한 작품에는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작가가 의욕에 지나치게 충만하여 작품의 구조 해체에 치우쳐 문학 자체의 본질 획득에 실패한 데 연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다른 무엇에 앞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곱씹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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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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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8 - 중종실록, 조광조 죽고... 개혁도 죽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8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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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동료가 한 번 보라고 주어서 그 존재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단순한 축약본이 아니라 만화 형태이므로 딱딱함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환영받을 만하다.

조선왕조실록은 "한글로 번역할 경우 320쪽짜리 책 413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를 축약하여 전달하고자 하면 불가피하게 편집자의 자의성이 개입되는데, 이게 때로는 약이 되지만 독이 되는 경우도 배제할 수 없다. 따지고 보면 내가 <이문열 평역 삼국지>를 싫어하는 것도 그 지나친 자의성이 거슬렸던 탓이다. 어쨌든 저자는 방대함 중에서 정치사에 한정하여 작가의 주관적 개입이 도저할 것이라고 일찌감치 선언하였고 그 결과는 꽤나 흥미로웠다.

역사적으로 중종시대는 사화로 물든 시기의 한복판이다. 반정으로 등극한 중종은 실권이 없어 공신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고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조광조를 중용하다가 다시 이를 내치다가 마침내는 김안로라는 희대의 간신을 잉태하고 말았으니 그야말로 혼돈의 극치였다. 작가는 이와같이 반정공신세력과 조광조, 김안로로 이어지는 시대 흐름을 종축으로 삼고 중종의 심중을 횡축으로 삼아 당대 정치사를 명쾌하게 그리고 있다. 모델링의 장점이 바로 현상의 단순화를 통한 이해의 증대가 아니었던가.

작가의 말마따나 중종에게는 성군이 되어 태평성대를 이루겠다는 아무 욕심이 없는지도 모른다. 신하에 의해 쫓겨난 임금, 이는 언제든 자신도 해당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종에게는 왕좌를 지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차대한 과업이며, 조광조는 주군을 잘못 선택한 것이다. 향년 38세의 나이, 며칠후면 내 나이가 그리 된다. 조광조는 비록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갔지만 후대에 성인 소리를 들으며 역사에 큰 자취를 남겼으니 무익한 생은 아니리라.

작가의 쾌도난마에만 함몰되지 않는다면 무척 흥미롭고 유익하게 볼 수 있다. 문득 작가의 나머지 책들도 손에 들고 싶다. 그나저나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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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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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
윤내현 지음 / 지식산업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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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동북공정 이후 우리 고대사에 대한 관심이 부쩍 증가하였다. 공중파 방송사에서 경쟁적으로 방영하는 드라마들-주몽, 연개소문, 대조영-은 바로 이를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더우기 이들 프로그램은 그 스토리를 기존 학계의 정설보다는 재야사학 내지 야사에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어 생경한 즐거움을 안겨주고 있다. 그리고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과 큰 차이가 있음을 알고 의아하게 생각한다. 이처럼 강단사학계와 재야사학계간에는 심연이 존재하고 있다. 그 심연의 한복판에 바로 고조선의 문제가 얽혀있다. 저자는 정통 강단사학계 출신이지만 통설과 다른 가설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오랜동안 학계에서 소위 '왕따'를 당했다. 선배의 학설을 따르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정보기관에 투서까지 하는 등, 어찌보면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을까하는 의아심이 들 정도다.

저자는 중국 고대사를 연구하다 보니 자연스레 우리 고대사에 접근하게 되었고, 기존 학설에는 한계점이 잇었다고 한다. 고조선에서 기자조선으로 이어져 위만조선이 한나라에 멸망되고 한사군이 설치되는 과정은 심각하게 역사가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우리 역사의 시초부터 잘못 이해되어 우리 민족은 초기부터 중국의 지배를 천여년간이나 받는 열등한 민족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걸 그렇다고 강변하는 것은 잘못이다. 단군은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으므로 역사가 아니라고 한다면 모든 인류의 고대사는 사라져야 한다. 트로이도 발굴되기 전까지는 한갓 호메로스가 전하는 신화에 지나지 않았다.

강단사학계는 학문탐구에 있어 좀 더 개방성을 보여야 한다. 재야사학계의 주장이 때로는 터무니 없다고 하더라도 '철학'이니 '문화'니 '경제'니 하는 어휘에 집착하여 사료를 외면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대로 사료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정말로 합리적 증거와 추론에 갑능 두는지만 확인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의 고조선은 대동강 유역의 조그만 영역에서 만주와 중국을 아우르는 초대국까지 시각에 따라 고무풍선과 다름없다.

세계화 시대에 민족을 논하는 것은 시대착오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WTO가 생기고 UR이 열리때 예상과는 달리 여전히 지역적 블록의 벽은 견고하고 민족적 자존심은 무너뜨리기 어렵다.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에서 프리드만은 세계화의 궁극적 승리는 올리브 나무를 어떻게 잘 관리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설파한다. 올리브 나무가 렉서스를 덮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만큼 인간적 가치, 전통의 가치는 커다란 힘을 갖고 있다. 민족주의가 곧 수구주의는 아니다. 민족주의가 나치와 파쇼로 전개되는 것도 아니다. 건강한 민족주의는 우리가 자신감을 갖고 타인을 상대하고 긍정적인 발전을 이루는 엔진 역할을 수행한다.

저자가 통탄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 그리고 그것이 순기능을 하도록 바로잡자는 것이다. 다가오는 시대에 역사가 중요한 이유는 종전의 분열적 시각이 아닌 통합된 역사적 시각은 올바른 역사 교육에서 나오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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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6.12.21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고조선의 강역을 밝힌다
윤내현 외 지음 / 지식산업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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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윤내현의 저서이다. <우리 고대사, 상상에서 현실로>가 비교적 가벼운 성격-내용은 그러하지 않지만-의 저작이라면 이 책은 본격적으로 고조선의 강역에 대한 탐구를 하고 있다. 그것도 혼자만이 아니라 고대 복식사와 고인돌 연구자의 든든한 지원을 받고서.

먼저 나는 고조선에 대한 윤내현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음을 밝혀둔다. 단군조선이 만주와 한반도 전역을 아우르는 대제국이며, 초기 연대를 올려잡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기자조선과 이를 뒤집은 위만조선의 강역은 단군조선 전체가 아니라 서부 변경 지역이라는 등등. 민족적 자존심을 달래는 그의 가설을 따라가자면 무한한 즐거움과 자긍심이 샘솟는 것을 억제하기 어려울 정도다. 하지만 저자가 순수한 학문적 자세로 고조선 연구에 매진하였듯이 나 또한 보다 비평적 시각으로 접근하고 싶다.

우선 윤내현의 고조선 강역 연구는 다른 연구자와는 달리 매우 철저한 문헌 고증을 통하여 사실에 꽤 근접하고 있다. 타연구자가 무시하거나 빠뜨리거나 곡해하는 부분을 그는 철저히 파고들어 바로 중국사료로써 고증하고 있다. 이로써 고대의 요수와 요동이 지금의 랴오허와 랴오둥과는 다름을 명쾌히 집어내고 있다. 그외에도 그의 고조선 연구는 남들과 구분되는 독창적이면서도 탄탄한 논리적 배경을 지니고있어 설득력을 높이고 있다. 저자가 다른 곳에소 토로하였듯이 학문적 문제를 비학문적으로 해결하려는 이들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럼에도 고조선이 수도를 4번 옮겼다는 주장은 아직 근거가 취약하게 다가온다. 여기에 기반한 고조선의 영역 팽창도 한반도-만주-한반도라는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또 위만조선의 멸망에 대한 상세한 고찰과 단군조선의 멸망과정은 어찌되었는지에 대하여도 침묵을 지키고 있다. 물론 이 책은 고조선의 '강역'에 집중하는 관계로 논의에서 빠졌을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여하튼 이 책에서의 윤내현의 연구만 가지고는 고조선 논의를 매듭짓지는 못하리라 여겨진다.

한편 박선희의 복식을통한 고조선 연구는 꽤나 흥미롭다. 기존 문헌에 치우친 연구와는 달리 고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한 그의 글을 토애 나는 비로소 고조선이 만주는 물론 중국 본토보다도 선진적인 문화를 전개했을 가능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조선의 문화가 중국과는 초기부터 뚜렷이 구분되는 독자적인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우리 고대사는 지나치게 문헌에만 치우친 점이 없지 안았다. 부족한 사료를 파헤치다보니 글자 한 자의 해석에 목매달고 절대시하는 사례도 없지 않다. 고고학과 가타 학문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러려면 사학도는 보디 폭넓은 시각을 배양하는 훈련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논란은 많지만 천문기상학적 관점에서 고대사를 재조명한 것은 참으로 갈채를 보낼만한 시도이다.

하문식도 고인돌을 통해 고조선의 강역에 접근하고 있는데 앞의 두 저자에 비해서는 상관성이 다소 처짐을 느끼게 한다. 특히 만주와 북한의 고인돌에 집중하여 남한의 고인돌은 생략하고 있어 한반도 남쪽이 진짜로 고조선의 강역에 속하는지 궁금증을 해소하기 어렵다. 보다 많은 연구가 필요할 듯싶다.

이 책 하나로써 고조선의 강역에 관한 모든 논쟁을 끝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금물이다. 오히려 이 책의 주장은 또다른 논쟁의 출발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새롭고 보다 합리적인 가설 제시와 반론은 학문발전의 기본 동력이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는 진실에 접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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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6.12.28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우리 역사 바로잡기 1
이덕일, 김병기, 신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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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을 필두로 한 일련의 최근 드라마는 고대사에 대한 오랜 열망에 다시금 불을 지폈다. 그래서 이 책 저 책을 구입하거나 도서관에서 빌려 보고 있는 중이다.

아직도 우리 교과서는 고조선의 주무대가 한반도 내이며, 마찬가지로 한사군의 위치도 국내로 비정하고 있다. 뿌리깊은 인식의전환은 그리 쉽지 않음을 강하게 알 수 있는 장면이다. 이러한 인식의 밑바탕은 조선 후기 소위 소중화사상에 젖은 고루한 유학자에게 연원이 있지만 일제식민사학자에 힘입은 바가 더욱 크다. 해방후에도 한동안은 큰 변함이 없었는데 나도 어릴적에 이와같은 내용을 철썩같이 믿고 줄줄 외우다시피 했었다. 좋다, 모든걸 긍정하는 의미에서. 과거에는 학문의 연수고 길지 않았고 깊이도 깊지 않았다. 그러니 그런 설익은 가설이 역사적 진실로 수용될 수밖에 없었음을. 하지만 최근들어 눈부시게 발전한 학문연구의 성과마저도 외면한채 수구적인 자세로 일관하는 것은 과연 어떠한 학문의 자세인가.

개인적으로 작가 이덕일에 대해서는 감탄하지만 사학도 이덕일에 대해서는 조금 우려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다작을 넘어 남작을 하는게 아닌가하는 걱정 탓이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에서의 감탄은 <장군과 제왕>에서 의아함으로 바뀌었고 슬쩍 들쳐본 다른 책들을 통해 그의 글쓰기 스타일을 알게 되었다. 확실히 대중이 호감가게 만드는 그의 능력에 감탄한다. 전문적인 내용을 평이하게 변환하는 기술, 핵심내용의 지속적 반복을 통한 각인 기법,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물이나 사건의 종횡적 배경에 대한 폭넓은 이해력 등. 그럼에도 일개인이 모든 영역을 커버할 수는 없는데 하는 아쉬움. 그래서 <장군과 제왕>에서 뭔가 허전함을 느꼈다. 그의 초기작에서 뿜어나오는 열기와 광채가 안 보이기에. 그래서 이 책의 구입을 망설이기도 하였다.

<고조선의 강역을 밝힌다>(윤내현)를 앞서 읽었기에 자연히 비교가 된다. 확실히 이 책은 보다 대중친화적이다. 어떤 의심스런 점에 대해서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해답을 구하기 보다는 문제의 소지를 밝히고 으심나는 부분의 근거를 일정 부분 던져놓고 최종 판단은 독자에게 맡긴다. 그리고 보다 깊은 내용은 전문연구서를 보도록 유인한다.

뿌리없는 민족은 역사의 미아가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세계 각 민족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계화 시대에서 정체성은 더더욱 존재의의가 커지는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그저 현재 지배하는 강역에 대한 정당화 작업일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어쩌면 중국의 속내는 압록강을 넘어서는데 있다는 주장에 코웃음치기가 두렵다.

이 책 자체로는 다소 미진한 면도 있지만 우리 고대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일조한다면 충분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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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7.1.9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