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진실 - 상 즐거운 지식 49
김준봉 지음 / 이담북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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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에 관한 국내 주요 저작은 대체로 원인론에 치우쳐 있다. 원인을 둘러싼 이데올로기적 논란이 치열하였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한편으로 브루스 커밍스의 기념비적 저작의 영향도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원인에 관한 논쟁은 일단락되었으므로 그동안 소외되었던 전쟁의 다른 측면에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특히 전쟁의 전개과정에 대한 관심이 매우 적은 편이다. 한국전쟁은 기습 남침과 낙동강 방어선, 인천상륙작전과 일사후퇴 그리고 휴전협정의 단순한 전개만이 아니다. 도대체 3년 동안 전쟁이 어떤 국면과 전환을 거듭했는지 아는 이도 적고 알려주지도 않는다. 전쟁은 원인과 결과도 중요하지만, 수많은 생명이 사선을 넘나들고 엄청난 물자가 소진되는 현장이다. 전쟁의 전개와 전투에 대해서는 전쟁사가 또는 군사(軍史)의 몫이라고 방치하면 안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상기 목적에 부합하는 유형의 저작이라고 하겠다. 저자는 직업군인 출신으로 사단장 즉, 소장까지 지냈으면서 육군대학 총장 등 학계에도 오랫동안 몸 담았다. 군 출신답게 시각은 보수적이며, 북한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이승만과 김일성에 대한 평가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과장해서 말하면 이승만은 유능하고 탁월한 정치력과 외교력으로 전대미문의 위기를 잘 넘긴 정치인인 반면, 김일성은 외세의 도움으로 권력을 손아귀에 쥔 억세게 운 좋은 순전히 무뢰한에 지나지 않는다.

솔직히 전쟁의 원인에 대한 지리한 논의를 하지 않아 마음에 든다. 서술방식은 사실 중심적이며 사실의 나열 속에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직설적으로 전쟁 흐름을 파악해간다. 비록 그의 시각과 필치가 마음에 쏙 들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론이 아닌 전쟁의 실제 전개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려줄 것으로 기대한다.

전쟁 초반의 파죽지세로 밀린 전세를 저자는 병력 운용의 기본개념이 부족하였던 것으로 이해한다. 역으로 말하면 조금만 평시 대비를 잘했다면 충분히 강력한 저항을 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군의 초전에서 가장 큰 과오는 군사력 운용에 대한 기본계획 내지는 기본개념이 없었던 것에 연유하였다고 본다. 후방지역에 있던 예비사단인 2, 3, 5사단을 김홍일 소장이 제안한 한강선 방어에 투입하였거나 한강대교 폭파를 전방사단 철수 이후로 조정하였다면 초기 전투에 그렇게 치명적인 타격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P.59)

일반국민은 물론 전체 병력의 절반이 한강 이북에 있었는데도 지레 겁먹고 한강교량을 끊어서 제풀에 역량을 상실하였으니 자해행위를 한 셈이다. 이것이 북진통일을 구호로 삼은 당대 정권과 군대의 실상이다.

한국전쟁에서 맥아더의 명성은 드높아서 인천 월미도에 그의 동상이 오래전부터 세워져 있다. 반면 전장에서 목숨을 바친 야전 총사령관 워커 중장에 대해서는 그의 공적이 너무나 무시되고 있다. 워커의 명확한 전세 판단 및 불굴의 전투의지와 노력이 없었다면 맥아더는 상륙작전을 구상할 여유도 없었을 것이며 진작에 한반도는 북한에 의해 통일이 이루어졌을 것은 불문가지다.

“우리는 공간을 내주면서 시간을 벌어야 한다. 감제고지는 가능한 한 오래 확보해야 한다. 방어는 종심 깊게 해야 한다. 예비대는 반드시 확보해야 측방경계를 소홀히 하지 말고 포병을 보호해야 한다. 어떤 대가를 치르든지 통신과 병참선을 견고하게 지켜야 한다. 결전을 피하라.” (P.113)
워커 자신의 말이다.

한국전쟁에서 맥아더의 가장 큰 실책은 중공군의 개입가능성을 외면하고 맹렬한 북진을 지휘한 데 있다. 하지만 사실 전장의 워커를 개인적 편견으로 불신하고 충분한 지원을 제공해 주지 않았으며, 종국에는 지휘권을 분할한 것이 더 크다. 자신이 문제를 자초해 놓고 책임을 워커에게 묻고 있으니 워커의 입장에서는 손과 발을 다 묶어 놓고 재주부리라는 격이니 어처구니없을 것이다.

“8군을 지원해야 할 위치의 참모장이 8군과 경쟁체제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탄약, 도하장비 등 보급의 우선권을 자신이 지휘하는 10군단에 두었을 것임은 더 논할 필요도 없다.” (P.256)

전쟁에서 후세에 기억되는 것은 전투에서의 커다란 승리다. 임진왜란 하면 육전에서 진주성 전투, 행주대첩 등이 떠오르며, 해전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위업이 두드러진다. 한국전쟁에서도 어찌 일방적으로 패전만 했겠는가? 비록 초전에서는 대세가 불리하였지만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겨야 할 승전의 소식을 빼먹으면 안 될 것이다. 1950년 7월 17일부터 일주일간 국군 17연대가 벌인 화령장 전투와, 8월 중순 1사단의 다부동 전투가 그것이다.

낙동강 방어선의 사수로 맥아더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리고 유명한 인천상륙작전을 이루어냈다. 책을 통해 당시 미국 정부와 워커 사령관은 상륙작전의 필요성에 공감하지만 장소는 인천보다 군산의 전략적 가치를 더 높이 평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실 인천이나 군산 모두 선택만 하면 성공가능성은 높은 편이었다. 미군이 제해권과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군사적으로는 군산이 타당하다. 상륙작전은 상륙 자체에 목적이 아니라 이후 협공을 통해 적군을 무력화 내지 궤멸시키는데 목적이 있다. 그렇다면 인천보다는 군산이 워커의 8군과 협력을 통해 일대 공세로 전환하기에 용이한 장점이 있다. 하지만 맥아더는 정치적 상징성을 중시하였다. 인천을 통해 서울을 점령한다면 그것이 갖는 심리적 효과는 심대할 것이다. 게다가 수도 탈환이라는 상징성도 매우 크다. 만약이라는 가정이지만, 군산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면 이후 전쟁의 흐름은 어떻게 달라졌을지 매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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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피카레스크소설 대우학술총서 신간 - 문학/인문(논저) 433
김춘진 지음 / 아르케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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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학술총서 433
 
피카레스크 소설의 발상지가 스페인임은 이의의 여지가 없다. 다만 장르의 본격적 시초를 <라사리요 토르메스>(1554)로 볼 것인가 아니면 <구스만 데 알파라체>(1599)로 인정할 지의 여부는 다소 논란이 있다.

이 저작은 세 작품 – 라사리요 토르메스, 구스만 데 알파라체, 사기꾼 –을 중심으로 스페인의 피카레스크 소설의 발생과 전개 및 장르의 특성 등을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초보적 저술”에 불과하다고 겸양하고 있으나, 실제 다루는 내용은 상당히 깊이 있는 분석이어서 작품을 읽었거나 읽을 독자에게 작품 이해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피카레스크 소설은 중세와 근대 문학을 잇는 교량적 역할을 맡고 있다. 근대 문학의 적자인 소설 장르의 출발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에 미친 피카레스크 소설의 지대한 영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돈 키호테>는 피카레스크 소설과 함께 로망스 소설에 대한 반발을 공유하며, 피카레스크 소설의 영향과 극복의 노력이라는 두 가지 가닥에서 이해해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이상주의적 로망스 소설이 현실과 이상의 거리를 거부하고 있었다면, 피카레스크 소설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오히려 부각시키고 있다.” (P.60)

“『돈 키호테』는 피카레스크 소설이 개척한 토양 위에서 맺어진 문학적 결실이기 때문이다.” (P.14)

피카레스크 소설의 발생은 16~17세기 스페인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서 비롯한다. 피카레스크는 근대 도시의 부조리와 불균형을 폭로하고 있다(P.32). 근세 도시화의 물결은 당대 유럽 사회 도처에서 발생한 경향인데, 유독 스페인에서만 피카레스크 소설이란 독특한 문학 장르를 탄생시킨 연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신대륙으로부터의 부의 유입 규모의 거대성에 있다. 당시 스페인에 흘러들어온 재화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지만, 안타깝게도 그 부는 스페인의 근대화에 거의 기여하지 못하고(P.43) 그대로 국외로 유출되어 서유럽 국가로 넘어갔다. 부의 선순환이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소수 지배층의 호화 사치는 극에 달했지만, 그 이상으로 하류 계급의 빈곤은 심화되었다. 전성기에서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하자 사회적 모순이 노정되고 사회적 불안정이 심화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경제적 상황이 스페인만의 종교적, 정치적, 인종적 갈등과 결부하여 유독 혈통과 명예를 중시하는 사회적 풍조가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피카레스크 소설과 주인공은 이중적 성향을 갖고 있다. 사회 밑바닥의 어두운 현실에 대한 직시를 통한 리얼리즘 인식과, 명예를 갈구하여 명예의 노예가 되는 억제할 수 없는 성향이다. 피카로는 결코 기득권층에 합류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결과는 언제나 좌절과 절망이다(P.91).

피카레스크 소설이 스페인의 특수성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여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떨어져 발생한 것은 아님을 저자는 지적한다.

“루치아노 식의 변신소설과 잡문, 기행 문학 등은 모두 리얼리즘 문학의 출현에 필요한 사실적 관찰과 구체적 현실 제시를 위한 서사 양식을 발전시켜 온 장르들이었다.” (P.82)

작품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라사로 출세기>는 피카레스크 소설의 기원인 동시에 세르반테스의 모태로 평가받는다(P.76). 이 작품은 해학적 리얼리즘이 두드러진다. 슬프되 슬퍼하지 않고,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가 역설적으로 웃음을 자아내는 경지. 이는 돈 키호테가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와 매우 유사하다.

저자는 작품의 형식에서 자서전체와 서간체, 대화체 등 피카레스크 소설의 형식적 요건이 모두 구비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즉 장르의 출발이지만 매우 완성도가 충실하다는 것이다. 작품의 의의도 남다르다. 르네상스기 인본주의 정신을 내적 원동력으로 삼아 여러 형식 요소들을 단순히 나열하지 않고 구조적 통합에서 얻어낸 서사적 구성 원리(P.124)를 발휘하고 있다.

<구스만 데 알파라체의 참회>는 직접 읽어본 작품이 아니므로 순전히 저자의 의견을 이해하는 수준에서 머물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이 작품은 희극적 리얼리즘과 실존주의적 고뇌가 결부된 이색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 피카로들은 한 곳에 정주하지 않는다. 항상 방랑한다. 구스만과 같은 이들의 방랑은 현실 도피와 체념을 모두 갖고 있다.

“방랑은 단순히 핍박을 벗어나는 해방이나 신분적 도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운명에 대한 체념의 의미를 내포한다.” (P.134)

구스만의 좌절은 이중적 분열의 결과이다.

“구스만의 좌절은 신분적 상승 노력의 좌절뿐만 아니라 도덕성의 좌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선과 악, 진실과 허위, 혈통의 순수성과 비순수성의 양극적 대립은 심리적 불안정을 일으킨다. 그 갈등은 계율적이고 규범적인 가치와 생존적 욕구 사이의 현실적 괴리를 말하는 것이다.” (P.135)

라사리요 토르메스의 비교적 단순한 사고관념과 구스만 데 알파라체의 의식은 극명한 대비를 보여준다. 이 점이 라사리요의 현실 타협과 구스만의 현실 부적응, 즉 실패를 예감케 한다(P.146).

구스만은 반종교개혁 시기의 내면적 갈등을 반영한다. 구스만은 피카로답게 반사회적 인물이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구원의 문제를 되짚고 있다는 점(P.141)에서 구별된다. 종교적 계율과 곤궁한 현실 사이에서 구스만의 이성과 본능은 끊임없이 갈등을 벌이고(P.136) 있다.

구스만의 참회는 단순한 기독교적 관점에서 해결되지 않는다. 외관상 종교의 승리로 비쳐지는 결말과 달리 문맥적 의미를 반추해 볼 때, 단순히 신학적 판단이 아니라 인간과 삶의 실존적 상황이라는 철학적 문제 인식이 보다 진실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P.144).

일전에 <사기꾼>을 읽으면서 개개의 일화는 흥미롭지만 하나의 작품 전체로서 쭉 읽어나가기에는 별로 재미없다는 느낌을 지녔다. 이것이 비단 나 혼자만의 잘못된 시각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사기꾼>은 통상 피카레스크 소설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작품이지만, 의외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대표적으로 일화들의 단순 나열로써 인과적 교직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견해다. 게다가 자전적 형식을 패러디하고 있어 주인공의 성격 발달이 불가능하여 작품구조 및 인물묘사가 입체적이 아니라 평면적 한계가 두드러진다.

“사건이 전개됨에 따라 인물의 반응 양식이 발달해 가는 인과적 교직이 아니라, 불연속적인 일화들의 염주식 나열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주인공의 인간적 생동감은 살아나지 않는다. 희화적으로 묘사된 광대의 모습만이 남는 것이다.” (P.152)

이는 작가인 케베도의 출신이 귀족계급이라는 점에 연유한다. 그는 라사리요와 구스만의 창조자와는 달리 피카로에 대해 공감하지 않는다. 그에게 피카로와 같은 반사회적 존재는 사회 안정과 계급이익에 위험한 요소이다. 따라서 그는 철저히 피카로를 희화화하고 농락한다. 독자는 라사리요와 구스만에 대해서처럼 파블로스에게 동정심을 갖지 않는다. 완전하고 철저한 광대의 배역, 이를 충실히 수행하는 파블로스에게 오히려 역설적으로 측은함을 느끼게 할 정도다.

“께베도의 분노에 찬 응징에도 불구하고 억압적 응징의 목소리가 높으면 높을수록 빠블로스가 희화적이 되면 될수록, 더 강도 높게 그의 꼭두각시 놀음은 인간적 몸짓으로 바뀌어 보인다.” (P.187)

<사기꾼>에게서 진정한 피카레스크의 미덕을 발견할 수 없다면 이것의 의의는 무엇일까? 저자는 언어미학의 탁월성을 지적한다.

“그의 소설은 언어적 굴절의 극치가 이룬 미학이며 현실 표현의 농축도를 높일 수 있었던 피카레스크 미학의 진일보를 의미한다.” (P.154)

즉, 작품의 내적 의미가 아니라 언어 표현상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번역본이라는 필요악을 거쳐야 하는 우리 같은 이들에게는 전혀 와 닿지 않는다. 따라서 작품의 결함 내지 부정적 측면만이 두드러질 뿐이다.

피카레스크 소설의 문학사적 의의는 이미 서두에 언급하였지만 그렇다면 인간적 측면에서는 무엇인지 저자의 말로 살펴본다.

“피카레스크 소설은 근대 사회에서 개인이 불가피하게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던 사회와의 갈등과 그 갈등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개인의 주체적 의식을 보여 준다.” (P.192)

“피카레스크 소설의 해학은 소외를 극복하고 휴머니즘을 향해 나가는 전진이며, 사회적 권력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를 향하는 희망이며, 인습의 허울을 벗고 개인의 진정성을 지향하는 인문주의 시대의 문학적 상상력의 결실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P.254)

마지막 장은 피카레스크 소설의 정전과 아류를 다루고 있다. 여성 피카로를 내세운 <안달루시아 여인 로산나>와 <피카라 후스띠나>를 소개하고 있으며, <속 라사로 출세기>와 기타 작품들도 살펴본다.

저자는 피카레스크 소설은 스페인 중심에서 인식한다. 피카레스크는 스페인에서 탄생하고 짧은 절정기를 누린 후 쇠퇴한다. 유럽 각국에 미친 피카레스크의 영향을 분명히 긍정하지만 이들이 예술적 완성도와 문학사적 중요도에서 결코 스페인의 영광을 회복하지 못하였으며 이류 장르로 몰락하였음도 잊지 않고 지적한다.

이러한 견해는 피카레스크를 매우 엄격한 범주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저자가 언급한 시대적, 형식적 요건을 완비하는 작품은 사실 몇 편에 지나지 않는다. 피카레스크와 피카레스크 적인 것을 엄격히 구분하는 실익은 무엇인가? 사실 넓게 보면 <돈 키호테>를 피카레스크 장르에 넣어도 큰 잘못은 아니다. 더구나 피카레스크가 야기한 근대 소설의 리얼리즘과 다양한 분화는 그의 정전을 명확히 하기 어렵게 만든다. 어찌 보면 귀족계급이 아닌 평범한 중하류 계층의 사람들이 등장하여 지지고 볶는 모든 유형의 작품은 결국 피카레스크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피카로와 피카라의 속성이 자리 잡고 있다. 차이점은 우리는 사회규범과 도덕에 순응하지만 그들은 이를 거부하고 떨치고 일어나는 데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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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로 출세기. 사기꾼 - 예문소설 2
께베도 외 지음 / 예문 / 198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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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두 편의 스페인 피카레스크 소설 대표작을 수록하고 있다. 1989년 출간되어 현재는 완전히 절판된 상태로 중고 외에는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수많은 책들이 절판되는 마당에 이 책이 그렇다고 하여 특별히 아쉬울 것은 없지만, 후자 <사기꾼>은 국내 유일의 번역본이라는 점을 유념하자. 한편 두 작품 모두 스페인어 원전 번역이 아니라 영문판의 중역이다. 처음 출판시기를 보면 중역이라도 출판된 것 자체가 기적이다.

<라자로 출세기>는 국내 번역본이 그나마 몇 편 있다. 당장 도서명을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의 삶 그의 행운과 불운>으로 조회해 보면 최신 출간본을 구할 수 있다. 앞서 이 작품에 대한 단상을 기록한 적이 있으므로 다시 반복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당시는 피카레스크 소설을 처음 접하기에 어느 정도 표피적 상념에 치중한 감이 든다. 재독을 해보니 간과한 대목이 심상하지 않게 다가온다. 가볍지만 경박하지 않으며, 단순하지만 속 깊은 작품인데도.

<사기꾼>은 피카레스크 소설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작가 프란시스코 데 께베도 이 비예가스는 스페인 황금세기의 시인으로 세르반테스의 후배격이다. 확실히 전자와 비하면 더 잘 짜여 있어 소설적 완성도가 높음을 대번에 알게 된다.

<사기꾼>의 정식 명칭은 <방랑아의 본보기 악당의 거울, 돈 파블로스라고 불리는 사기꾼의 생애 이야기>라고 한다. 너무 길어서 통상 ‘사기꾼’ 또는 스페인어 그대로 ‘부스꼰’으로 약칭한다.

일단 주인공 파블로 역시 평범한 집안 출신이 아니다. 아버지는 도둑이고, 어머니는 마녀이며, 삼촌은 사형집행인이다. 파블로는 귀족 집안의 자제 돈 디에고를 따라 친구 겸 하인으로 나름 교육도 어느 정도 받은 인물이다. 라사리요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생계를 위해 팔려 다니는 신세였다는 점에서 파블로와는 대조된다. 파블로는 단순히 생계가 아니라 소위 출세를 위하여 스스로 피카로가 된다. 여기서 출세는 경제적 부 뿐만 아니라 사회적 신분까지도 의미한다. 그는 신분을 속이고 여관집 딸에게 구애하다가 어느 순간 귀족 여성을 유혹하려고 한다. 교묘한 말솜씨와 글재주로 전형적인 사기꾼 짓은 물론 사람마저도 죽인다. 라사리요가 고난을 당하는 입장이라면 파블로는 이를 감수하고 자초한다.

파블로가 처음부터 타락하지는 않는다. 그와 돈 디에고는 기숙학교에 보내졌는데 거의 아사 직전에 구출된다. 이어 돈 디에고의 유학길에 동행하는데, 처음부터 여관에서 세상사의 쓴 맛을 본다. 여관 주인의 작별 인사는 앞길이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예언한다.
“젊은 나리, 아마 이런 일을 몇 번 더 겪으면 당신도 곧 어른이 될거요.” (P.126)

알칼라에 도착한 다음날 파블로는 거리의 건달들과 하인들에게 잇달아 낭패를 겪으며 절실히 깨닫는다. 그리고 남에게 당하지 않도록 더 한층 남을 못살게 구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다. 이제 피카로의 탄생이다.

이후 그의 삶은 악행으로 점철한다. 하숙집 가정부와 짜고 식료품 빼돌리기, 시중에서 물건 도둑질하기, 경찰서의 무기 뺏어오기 등등. 중요한 것은 이런 행위를 그는 즐긴다는 데 있다.
“정말로 그렇게 즐거운 일은 내 평생에 다시 없었던 것 같았다.” (P.144)

부모의 유산을 받으러 고향에 오는 도중 합류한 엉터리 노인 시인과의 에피소드(‘쓸모없고 어리석고 천치 같은 시인들에 대한 선언서’)는 작가 자신이 시인인 마당에서 세상의 무수한 얼치기 시인에 대한 고발이자 풍자이다.

그와 돈 토리비오의 마드리드 생활은 세르반테스의 세비야 건달 이야기의 확장판이다. 그만큼 도둑과 가짜 걸인, 사기꾼들의 생활방식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단순한 흥밋거리가 아니라 당대 음지 사회의 모습이 정밀하게 재현되어 있다. 바로 이런 것이 피카레스크 소설이 구름 위의 이야기가 아니라 단단한 대지를 두 발로 굳건히 디딘 자들의 희로애락을 가감 없이 드러낸 측면에서 후대 문학에 큰 기여를 한 부분이다. 인간세상의 어둡고 감추고 싶은 참모습 말이다.

이 작품의 말미는 주인공의 반생에 대한 회고이자 남은 후생에의 출발이기도 하다. 그는 스페인을 떠나서 아메리카로 향한다. 자신을 쫓아다니는 불행과 체포에서 안전하기 위한 선택이다.
“하지만 모든 일이 훨씬 더 나빠졌다.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지 않고 자리만 바꾸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늘 그런 식의 전철을 밟게 되기 마련인 것이다.” (P.288)

이것이 마지막 대목이다. 어째 끝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마치 1부가 종료되고 곧 2부가 시작될 것만 같다.

파블로의 캐릭터는 철저히 피카로적이다. 그는 오락가락하는 자신의 삶에서 마주치거나 걸리적거리는 모든 사람을 속이고 등쳐먹는다. 세상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하기엔 그의 사악한 심성은 너무 뿌리 깊다. 인간은 환경의 동물인가 아니면 의지의 주인이가? 해묵은 논쟁이다. 파블로의 사기꾼 행각은 찰나의 짜릿한 즐거움과 동시에 부메랑의 고통을 안겨주지만 그는 멈추지 않는다. 어디 그가 제대로 성공한 적이 있던가? 항상 사기의 성공 직전에 실패하여 심신의 추락을 동반한다.

그나마 라사리요는 세상과 타협하고 정부 관리로서 출세하고 결혼도 하여 안정을 갖게 되지만, 여기의 파블로는 결코 안주하지 않는다. 그에게 삶은 끊임없는 대결과 사기의 장이다. 그의 두 발이 온전하고 숨을 쉴 수 있는 한 그는 멈출 수 없다. 왜? 그는 타고난 피카로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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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
A.V.토르쿠노프 지음, 구종서 옮김 / 에디터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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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국전쟁에 관한 오랫동안의 연구는 주로 발발 원인과 개전 주체에 초점을 맞춰왔다. 많은 서적들에서 언급되었듯이 남침설과 북침설의 대립, 이어 남침유도설의 등장이 뒤따랐고 주체에 대해서는 김일성의 북한, 이승만의 남한, 모택동의 중국, 스탈린의 소련이 대두되었다. 심지어는 냉전시기 미국마저 언급되었을 정도니 이론과 가설이 난무하는 경연장이 따로 없을 정도였다. 전쟁의 성격은 어떠한가? 내전설, 냉전 확대설, 음모설, 대리전쟁설 등이 춤추었다.

그런데 이제 연구자들은 더 이상은 여기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 누가 왜 전쟁을 일으켰고, 누가 도움을 주었는지 만천하에 적나라하게 공개되었다. 그것은 냉전 시기 소련의 비밀문서들이 공개에 따른 결과였고, 이 책은 이를 입증하는 기념비적 저작이다. 이 책의 출간 이후로 한국전쟁의 연구 패러다임이 변화하였다.

이 책의 저자는 무슨 획기적인 주장을 펼쳐놓지 않는다. 전쟁 이전과 전쟁 도중에 김일성과 스탈린과 모택동 사이에 주고받은 핵심 기밀문서를 온전히 햇빛에 드러내는데 만족한다. 하지만 그 파급효과는 예상 이상으로 엄청나다.

한국전쟁은 김일성이 주도적으로 발의하고 추진하였다. 그는 주저하고 망설이는 스탈린을 계속 설득하여 승인을 하도록 만든다. 스탈린은 유엔국으로서 공개적으로 전쟁을 지원할 수 없음을 구실삼아 모택동으로 하여금 북한을 돕도록 요구한다. 신생 공산주의 정부인 모택동은 자의반 타의반 소련의 지시를 이행할 수밖에 없다. 물론 북한의 지정학적 성격이 자국에 미치는 안보도 감안했을 터이지만. 이 모든 것들이 이 책안에 들어있다. 그것도 편집을 거치지 않은 그들 자신의 육성으로, 전보의 형식으로 말이다.

전쟁 추진과 개전 초기의 성공기에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의존하였다. 그러다가 전황이 어렵게 되어 중국군이 참전하자 그 후 전쟁의 주도권은 모택동에게 넘어간다. 이것은 휴전 협상에서도 계속되어 김일성은 단지 들러리에 불과할 뿐 모든 것은 모택동이 판단하고 스탈린의 동의를 구하여 추진되었다.

삼국 사이의 관계가 항상 원만하지는 않았다. 김일성은 처음에 의도적으로 중국을 무시하고 모스크바만 거래하였다. 중국은 이 점에 매우 심기가 불편하였고, 스탈린은 둘 사이를 수습하는데 애썼다. 하지만 김일성은 결국 중국에 목숨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실제로 군대를 파병하여 도와줄 수 있는 게 소련이 아니라 중국이었기 때문이다.

소련도 수수방관하지는 않았다. 드러내놓고 무력을 지원할 수는 없었으므로 북한분과 중국군이 필요로 하는 전쟁물자 즉, 군수 지원을 거의 전담하였다. 당시 중국은 공산정권을 수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자체 군수생산 능력이 취약하였다. 따라서 전쟁에 투입된 수십 개 사단의 병력이 필요한 일체를 소련에 요구하였고 소련은 가능하면 이를 수락하였다. 이는 소련 입장에서도 만만한 일은 아니었으니 중국의 막대한 병력을 뒷받침하기에는 당시 소련의 능력으로는 한계 이상인 경우도 있어 잇따른 독촉에 감정이 상할 정도였다.

병력과 화력. 이 두 단어는 중국군과 미군의 무력을 대표한다. 그만큼 미군은 압도적인 전쟁장비로 중국군을 괴롭혔다. 아무리 수가 많아도 완벽한 제공권 장악과 장거리 포격에는 단순 보병만으로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한편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보내는 공격계획에서 먼저 옹진반도 남부를 공격하겠다고 밝혔다. 남한군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그대로 점령하여 대치선을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만약 남한군이 응전한다면 이를 빌미삼아 전면적 남침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갑작스레 남한군이 옹진반도에 대한 수비를 강화한다고 바로 전면전에 돌입하였다. 이것이 김일성의 판단 오류인지 아니면 스탈린에게 전쟁승인을 받기 위한 눈속임에 불과한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스탈린의 조언대로 따랐으면 상당한 성공가능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전쟁의 성격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일단 김일성 주도의 북한군이 당시 남한을 공격하였으며, 전쟁 명분이 분단된 국토의 통일에 있으므로 기본적으로 내전임은 명백하다. 내전은 곧 국제전으로 확전된다. 남한을 돕기 위하여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이, 북한을 지원하기 위하여 중국의 직접 참전과 소련의 간접 참전의 형식으로. 내전이 국제전으로 변모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냉전에 있다. 미국은 동유럽과 중국에 이어 남한마저도 공산화되는 것은 용인할 의향이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공산화의 도미노를 저지하여야 했다. 마찬가지로 공산권도 북한의 몰락을 견딜 수 없었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공산주의의 우월성에 대한 모욕이며, 군사적으로도 자본주의 세력과 직접 국경을 맞닥뜨려야 하는 위험이 생긴다.

씁쓸한 상념에 빠진다. 역사를 반추해 보면 국내의 소위 지도자라고 하는 이들은 모두 최종적인 순간에는 외세에 국운을 의존하였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임진왜란에서는 중국의 명나라에, 구한말에는 이해관계에 따라 일본과 중국, 러시아에 각기 매달렸다. 명분은 민족과 국가의 안녕과 발전을 위해서지만 기실은 자신의 사리사욕이 아님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 점은 실질적 대비가 전혀 없이 구두선으로 북진통일만을 앵무새처럼 되뇌었던 이승만 정권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유일한 재주는 일단 유사시에는 국민의 생명과 안위는 나 몰라라 하고 총알보다 더 빨리 안전한 곳으로 도망가는 능력밖에 없다. 이런 자를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하려는 자들이 있으니 우습다. 

"스탈린 동지, 상황으로 볼 때 지금 우리가 전체 한반도를 군사적 수단으로 해방하는 것이 필요하고 가능하다고 믿는다. 남조선 반동세력은 평화통일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북조선을 공격하기에 충분하다고 믿을 때까지, 나라의 분단을 영구화할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주도권을 확실히 장악할 수 있는 최선의 기회다. 우리 군대는 남한 군사보다 강하다. 게다가 우리는 남한 내에서 강력히 일고 있는 게릴라운동의 지지를 받고 있다. 남한의 인민대중들은 친미정권을 증오하고 우리를 도울 것이 확실하다." (P.44, 1949년 3월 스탈린과 김일성의 회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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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서정시선 - 서정시는 어떻게 쓰여지는가
아르킬로코스 외 지음, 오자성 옮김 / 청개구리아카데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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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서정시인과 그들의 대표작을 소개하고 있는 국내 유일의 책이다. 저자가 십여 년 전에 펴낸 사포 시 전집에 이은 후속작이기도 하다.

일단 서양 문학사는 서사시에서 출발하여 서정시를 거쳐, 희곡의 시대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서사시에서 서정시로 이어지는 단계는 인류가 신과 영웅의 인식을 뛰어넘어 인간 자체를 주체적으로 인식하였음을 증명한다. 이는 일순간에 이루어진 게 아니라 사회 경제의 발전과 인간의식의 성장의 결과이다.

“서정시는 이 자유로운 몸에서 태동하는 것이다. 신으로부터 전제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몸, 세속화된 몸으로부터 서정시가 태동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서정시의 언어는 세속화된 몸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P.20)

“도시적인 경제적 개인주의 생활양식과 자유 경쟁적인 사고방식이 지배적으로 됨에 따라 정신생활의 모든 분야에서도 개인주의적 주관주의적 세계관이 표면에 떠오르게 되었다.” (P.21)

서정시는 자유롭다. 서정시가 다루는 소재는 제한이 없다. 사랑, 인생, 사물, 우주 등은 물론 감정과 행동의 모든 측면을 거리낌 없이 포괄한다. 더 이상 신과 영웅의 위대한 업적에 억매일 필요가 없다.

“그들 모두는 독특한 목소리와 색조를 지니고 변혁기였던 당대의 다양하게 변화하는 모험에 찬 생활을 그려내었다. 그들은 통상에 참여해 여행하고, 전쟁에 종군하고, 방패를 버리고 전쟁터에서 달아나기도 하고, 혁명에 가담하고, 사랑하고 질투하였으며, 노래로써 동료 병사를 독려하거나 전사자를 기리고, 입법을 하고, 올림픽 우승자를 찬양하였으며, 여행을 하고, 동료들의 성격과 행동을 비난하기도 했다.” (P.23)

최초의 서정시인은 아르킬로코스(Archilochos)다. 호메로스와 거의 동시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에서 이미 후대 시인들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신의를 배신한 자에 대한 비난(‘배반’, ‘배신’)과 결혼 약속을 깨뜨린 여자친구의 아버지에 대한 비난(‘여자친구의 아버지에게’)이 토로되고, 성(性)에 대한 거침없는 표현(‘성기’, ‘성급한 사랑’, ‘창부’, ‘남성의 기관’)과 음주 예찬(‘주신 찬가’, ‘만취’)이 당당하다.

티르타이오스(Tyrtaios)는 애국시 내지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독전(督戰)시를 썼다. 개인적 견해와 사회적 요구를 반영한 것인데, 아무래도 순수시보다는 목적시 성격이 강하여 공감은 어렵다.

세모니데스(Semonides)는 인생과 여성에 대한 시가 두드러진다. 인생의 어두운 면을 부각하면서 삶의 유한성을 절절히 읊는다(‘인생’, ‘인생의 덧없음에 대하여’, ‘삶과 죽음’, ‘죽음 이후’). 한편 ‘여자의 기질’은 비교적 장시인데, 당대적 관점에서도 반(反)여성시라고 하겠다. 시에서 그는 여자를 암퇘지, 암여우, 암캐, 진흙, 바닷물, 당나귀, 족제비, 암말, 유인원, 꿀벌로 비유하여 분류하며, 꿀벌형 여자에 대해서만 긍정한다. 그에게 있어 여자는 역병에 불과하다.
“여자보다도 더 나쁜 역병은 없다네.” (P.59)

밈네르모스(Mimnermos)는 청춘 예찬과 노쇠에 대한 슬픔을 주로 그리고 있다.

알크만(Alkman)은 사랑, 인생, 자연 등의 다양한 소재를 시의 제재로 삼고 있는데, 심지어는 음식마저도 시화(詩化)한다(“알크만의 식성”).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대표작은 ‘처녀합창단을 위한 노래’라는 합창시다. 내용은 평범하지만, 형식의 독창성 면에서 흥미롭다.

알카이오스(Alkaios)는 사포와 동시대 시인이다. 참주 피타코스에 의해 고향에서 쫓겨난 이후 그를 맹비난하는 시를 많이 남겼다. 혁명시, 투쟁시 외에 추방된 이후 망명객의 쓸쓸한 처지를 노래한 시들도 제법 있다. 이 시들에서는 자기 처지에 대한 탄식, 참주에 대한 분노, 신세를 달래기 위한 음주(‘치료약’, ‘창문’, ‘취기’, ‘삼인일조’, ‘순번’)의 내용이 담겨 있다. 그는 참주 지배하의 레스보스 섬을 배에 비유(‘추방지에서’, ‘구조’)하고 있는데, 그가 비난하는 피타코스가 후세에서는 그리스의 7대 현인으로 추앙받고 있으니 시와 역사의 아이러니다.

사포(Sappho)에 대하여는 이미 단상을 기록한 적이 있으므로 생략한다. 다만 다시 읽어도 사포의 시는 시대를 초월한 통시대성을 지니고 있어 여전히 감정이 절절하고 현대적이다.

솔론(Solon)은 입법가답게 정치에 관한 제재를 다루고 있다. ‘지도자를 선출할 때’에서는 잘못된 지도자 선출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변호’에서는 자신의 업적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며, “한 사람이 너무 높이 올라가고 나면 그를 통제하기 어려워지네.”하고 독재에 대한 경고(‘독재의 징조’)도 아끼지 않는다. 한편 ‘준법’에서는 악법도 법이라는 언뜻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연상시키는 구절이 나와 이채롭다.

포킬리데스(Phokylides)는 대부분의 시에 “포킬리데스는 또한 이렇게 말했다”라는 표현을 삽입하고 있어 강한 자의식을 드러내며, ‘아내를 고르는 어려움’은 세모니데스의 시 내용과 연결되어 흥미로우며, ‘현자의 외출’은 현자인 체 하는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보여준다.

스테시코로스(Stesichoros)는 합창시와 장시가 대표적이라고 하는데, 이 시선에서는 단시만 수록하여 아쉽다.

이비코스(Ibykos)는 소위 연애시의 대가라고 하겠다. ‘늙은 경주마처럼’, ‘사랑의 계절’ 등 수록된 시편으로는 그의 온전한 면모 이해에 한계가 있다.

히포낙스(Hipponax)는 귀족 계층의 시인과 다르게 하층민의 불우한 처지를 반영하고 있어 이채로운데, 속어와 비어(‘엿 먹어!’, ‘불행의 표지’)를 거리낌 없이 시 속에 사용하고 개인적 원한에 의한 비난(‘악당 부팔로스’, ‘부팔로스의 여자’)도 숨기지 않는다.

아나크로온(Anakreon)은 구애와 사랑, 늙음(더 이상 사랑이 불가능함에 대한 아쉬움), 술 등 사랑과 낭만의 시인이다. 유사한 제재를 다룬 시인 가운데는 가장 뛰어나다고 하겠다.

크세노파네스(Xenophanes)는 철학자인 탓인지 시의 성향도 매우 이성적이다. ‘신들의 초상’과 ‘향연의 주제’는 신의 허구성을 비판하며, ‘물과 바람’과 ‘무지개의 근원’은 자연현상을 합리적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시모니데스(Simonides)는 페르시아 전쟁 시기를 살다간 시인답게 죽은 용사를 위한 송가를 여럿 남기고 있다. 전쟁은 죽음과 아울러 인간의 숙명, 유한성 등을 깊이 되새기게 한다(‘변화’, ‘인간의 운명’, ‘반신’, ‘유한한 인간’, ‘시간’ 등).

테오그니스(Theognis)는 키르노스에게 주는 교훈시로 유명한데, 이 시에서 그는 삶의 지혜, 도덕률, 교우관계, 처세 등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또한 “고귀한 사람이 매도당하고, 천한 사람이 존경받는”(‘시민의 변화’) 당대의 현실에 대해 비판과 우려를 품고 있다. 특히 교우관계에 대한 시들(‘교우’, ‘진정한 친구’, ‘우정’ 등)은 요즘도 유효하다. 한편 그는 키르노스에 대한 불평도 늘어놓는데, 그가 자신을 존경하지 않으며 거짓말을 한다(‘키르노스에 대한 불평’)는 것이다. 수용자의 거부감을 극복하는 과제는 교훈시의 한계임을 깨닫게 한다.

핀다로스(Pindaros)는 올림픽 경기와 피티아 경기의 우승자를 위한 송가를 많이 지었다. 그만큼 당대에 인정받는 시인이었다. 하지만 이런 송가는 공식적이고 의례적인 것이라 핀다로스의 내밀한 참모습을 파악하기 곤란하다.

바킬리데스(Bakchylides) 역시 올림픽 경기 우승자를 위한 송가를 제법 남겼다는 점에서 핀다로스와 유사하다. 그 외에 테세우스, 헤라클레스 등 신화적 인물을 내세운 시들도 있지만 역시 진면목을 알기 어렵다.

프락실라(Praxilla)는 여류시인으로서 사물에 대한 시를 썼는데, 수록된 4편의 시는 너무 적어서 시인의 시 세계를 이해하기 불가능하다.

마지막으로 플라톤(Platon)은 유명한 철학자로서 그의 시들은 ‘사랑하는 알렉시스’나 창부 레이스‘처럼 표현 수법상 흥미로운 점도 있지만 대체로 평이한 느낌을 안겨준다.

역자는 고대 그리스의 서정시를 소개하면서 그것이 현대의 한국시에 주는 의미를 이렇게 풀이한다.
“그것은 서정시가 필히 갖추어야 될 어떤 내재적 이념의 회복이 아닐까 한다.” (P.248)
우리 현대시는 양적인 면에서 폭발적 성장을 거듭했지만, 질적인 측면에서도 상승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한다.

여기 소개된 시들을 겉핥기나마 읽으면서 갖는 느낌 또한 역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의 시는 현대인에게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서정성과 소박성을 지니고 있음이다. 그것이 수천 년의 시간의 경과에도 박제물이 되는 것을 막아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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