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과 알 - 138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가와카미 미에코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수첩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일간지에 나온 서평을 보고 흥미가 생겨 읽다. 처음으로 읽는 일본 소설이다. 아니 오래전의 <빙점>을 제외하면. 일단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이라는 점, 게다가 작품의 소재가 특이하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먼저 책이 작고 얇은 데 놀라다. 역시 경박단소의 대가답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작가의 이력이 독특한 데 또 놀라다. 소위 술집 출신의 연예인이라는 점이.

여러모로 큰 부담 없이 숨에 읽어치울 수 있으니 환영이다. 실제로 통근 길에 오가며 수일 만에 완독이 가능하였다.

'젖과 알'은 엄마와 딸의 관계를 상징한다. 유방확대 수술을 통해 외양적 여성성의 쇠퇴에 불안해하는 엄마, 아빠와의 이혼 이후 술집에 나가 힘겹게 생계를 꾸리는 엄마를 본 후 알, 즉 난자로 대변된 여성성의 가치에 회의를 느끼는 딸. 양자의 관계는 삐걱거리고 의사소통의 부재와 단절은 필담 대화로 극화된다.

이 둘이 동경에 사는 엄마의 동생이자 딸의 이모집을 방문하고 돌아가기까지가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다. 본 플롯과 딸의 일기장(노트) 내용이 교차한다. 여기에 딸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여성성의 회의적 인식이 가감없이 드러나 있다. 난자, 월경, 생리대 착용, 가슴 등의 적나라한 기술은 서평대로 여자들은 다 알지만 다 드러내 보이는 것은 마뜩치 않아하는 영역이다. 그래서 더욱 말초적 관심과 아울러 균형 잡기가 요구되며 아마도 수상은 이의 성공을 반영하리라.

오사카로 돌아가는 모녀의 뒷모습은 올 때와 변함없어 보이지만 '나'와 독자는 알고 있다. 그들은 서로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들의 관계는 오기 전보다 한층 깊어질 수 있음을.

번역자의 후기에 따르면 원작은 오사카 사투리로 만연체로 서술되어 읽기가 용이하지 않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번역은 역시 필요악이다. 한편 필업된 <당신들의 연애는 빈사>는 별로 언급할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어느덧 일본의 문학도 외면하기 어렵게 되었다. 노벨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오에 겐자부로, 대중적 인기가 높은 하루키 외에도 소세키와 아쿠타가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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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2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8.12.29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습지대 - 열아홉 살 엽기소녀의 반위생학적 사랑법!
샤를로테 로쉬 지음, 김진아 옮김 / 문학세계사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역시 신문 서평을 보고 흥미가 끌려서 일독을 시도하였다. 중간에 그만둘까 싶기도 했지만 끝내 완독을 하였다. 그래야 이러쿵저러쿵 촌평할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겉표지 상단에 '열아홉 살 엽기소녀의 반위생학적 사랑법!'이라는 문구가 한마디로 이 소설의 내용을 대변한다. 작가의 약력을 보면 과연 평범치 않음을 알 수 있다. '기존의 가치에 반항하기 위하여 온갖 반사회적 행동들'을 했다고 하는데, 이런 체험이 자전적 소설의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유형의 소설에서 문학성(예술성)을 발견하려는 노력은 무의미하다. 뭐 카타르시스의 한 측면(배설)이라고 우기면 어쩔 도리가 없지만. 확실히 배설에 가깝다. 아마존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는 것은 사람들의 섹스와 관음에 대한 보편적 유혹을 반증할 뿐이다. 그렇다고 B급 내지 C급의 존재 가치를 외면하지는 않는다.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은 자체의 의의가 있다고 믿는다.

일단 비위가 약한 독자라면 구역질을 할 장면이 여럿 있다. 단순히 외설적인 수준을 넘어서 글자 그대로 철저하게 '반위생적'인 곳이. 하기는 주인공인 헬렌이 병원에 입원하게 된 동기 자체도 반위생적이다. 병명이 치질이라서가 아니라 입원하게 된 계기가 그러하다.

구성은 단순하다. 수술을 받고 병원에서 지내는 며칠 동안의 일상과 주인공의 상상이 교차한다. 그리고 다시 상처를 덧내고 가족 화합을 포기하고 병원에서 만난 남자의 집으로 간다.

미국 헐리우드 영화에서 최고의 가치는 가족에게 부여한다는 말이 있다. 온갖 폭력과 범죄 등은 모두 저지르면서도 마지막에는 반드시 가족 사랑이 포함된다. 마찬가지로 이 소설에서 이혼한 부모의 재결합 희구는 어떤 가치가 있을까. 작가는 이렇게 항변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도 내 소설이 아주 허접하지는 않아요. 요즘 뜨는 말로 '듣보잡'이 아님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서 잠깐. 주인공의 일탈 행위는 가족의 해체에 연유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부모가 재결합하면 주인공은 과거를 청산하고 바람직한 인간형으로 복귀하는가. 내 예상은 아니다 이다. 주인공은 명실에 엄마의 자살 장면을 그려놓고 남자와 떠난다. 그 남자는 자신의 가장 은밀한 부위와 장면을 모두 보았으며 나름 포용하는 태도를 보인다. 주인공의 수술 자국이 아물면 주인공은 다시 광란의 섹스를 벌일 것이다. 섹스에 변태는 없다고 한다. 구강성교, 항문성교는 물론 시대적 추세는 동성애마저 용인한다. 하지만 마약을 한다든지 체모를 미는 것, 생리 중 성교 등을 정상적으로 용인할 수는 없다.

삼백 면이 넘는 분량임에도 술술 읽힌다. 머리를 굴릴 필요가 없다. 이것도 굉장한 능력이다. 모두가 갖는 재능은 아니다. 하지만 예술이 예술로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되새김하고 싶다. 내게 <습지대>는 (문학으로서의) 소설이 아니다. 양지로 드러난 야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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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2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8.12.3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꽃피는 고래
김형경 지음 / 창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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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창작과비평>의 호평을 염두에 두었다가 마침내 읽다.

뭐라고 정리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내용이 어렵다기 보다도 작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헤아리기 어렵다. 그래도 나름대로 무리하게 범주화시킨다면 '성장소설'로 분류하고 싶다. 니은이 부모의 죽음을 극복하는 힘든 과정을 그렸다는 상투적인 요소가 하나라면 장포수 할아버지와  왕고래집 할머니도 역시 이에 포함된다. 어디 이들 뿐인가. 왕고래집 아주머니, 나무, 록까페에서 공연하는 언니들 등 등장인물 모두가 마찬가지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물론 비독자도 배제할 수 없다. 모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성장을 한다. 신체적 측면이 아니라 정신적 측면을 말한다.

니은이는 일순간에 부모를 상실하였다. 앞으로 혼자서 삶을 꾸려나가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하였다. 부모의 의의가 무엇을 말하는지. 존재의 가장 중요한 뿌리 같은 것. 장포수 할아버지가 고래배를 끌고 떠난 연유도 이에서 멀지 않다. 고래와 고래배는 그의 일생을 지탱해온 중추 자체이다. 고래배를 타고 다시 고래를 잡을 가망이 없다는 것, 그래서 고래와 고래배를 모두 포기해야 한다는 현실은 비록 이성적으로는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가슴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왕고래집 할머니는 어떠한가. 서방을 놓치지 않으려던 집착, 데려 기른 딸의 자포자기 삶에서 할머니는 다시는 제 손으로 목숨을 보내지 않겠다는 각오를 되새겼다.

가장 소중한 존재를 상실한 경험이 무엇을 말하는 지는 오직 겪어본 이만 알 수 있다. 누가 그랬던가.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사람이란 존재는 그렇다. 실패에서 배우고, 슬픔에서 성장한다. 니은도 초반에는 자신을 놓고 간 부모를 원망하였다. 그것이 후반에는 부모가 얼마나 아팠을까, 사랑하는 자식을 놓고 가려니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하는 타자적 입장을 깨닫게 되었다.

소설의 중반부는 이제 어른이 되고자 하는 니은이의 불안한 역정이 전개된다. 하지만 나이를 속여서 구한 편의점 알바의 실패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음을 보여줄 뿐. 결국 록까페에서 공연한 언니들을 통해 그리고 나이 일흔 넘어 한글공부를 깨치고 검정고시에 도전하는 왕고래집 할머니를 통해 니은은 서서히 어른이 되어간다. "나는 이제 어른이 된다는 것의 핵심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것 같았다...자기 삶에 대한 밑그림이나 이미지를 갖는 것."(P.256) 장포수 할아버지의 출항도 사실은 전혀 의외가 아니다. 어른으로서 자신의 삶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그것을 관광 상품화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제목 '꽃피는 고래'는 이중적이다. 언뜻 느껴지는 아름다운 정경과는 달리 그것은 고래의 생존을 위한 필사적 몸부림이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꽃피는 광경이지만 고래에게는 죽음의 분수인 것이다. 고래와 고래잡이가 주된 소재로 등장한다고 섣불리 고래를 다룬 소설로 속단하지 말자. 멜빌의 '모디 딕'도 사실은 고래 자체가 아닌 생명(인간과 고래를 포함한)의 모질기 이를 데 없는 엄숙함을 그려내고 있듯이.

그런데 난 여전히 고래가 신화처럼 숨쉰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니은이는 알아차린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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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2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1.11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소설 쓰는 밤 랜덤소설선 11
윤영수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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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비평>에서 호평을 한 기억을 되살려 읽다. 표지 안쪽의 사진을 보고서야 한 치의 의심도 없던 남성작가라는 선입관이 무너지다. 사진만 없다면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내용도 여성작가적 경향과는 거리가 멀다.

6편의 단편을 모은 소설집인데, 적어도 내겐 전체가 하나로 구성된 장편소설로 다가온다. 비록 외적인 구성은 느슨해 보이지만 내적인 응집력은 견고하기 이를 데 없다. 오히려 단편으로간주하기 위한 각각의 독자성은 덜 갖춘 듯도 하다. 작품 전체의 연결 고리는 인물 뿐만 아니라 시간과도 묶여 있다. 아난운서의 동일한 방송 멘트가 매편마다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작품의 통일성을 기하는 동시에 멘트를 통해 일차원적 존재로 살아가는 개미같은 인간에 대한 비판과 성찰이라는 주제의식과도 상통한다.

해설에 따르면 윤영수는 좋은 작가다. 과거에는 그럴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닌 듯하다. 아니면 독자에게는 덜 친절한 작가이든지. 소설집에 덧붙여진 해설치고는 상당한 분량이라는 점이 이를 예증한다. 이에 따르면 과연 그의 복귀를 환영할 만한 대단한 작가임을 알겠다. 거대담론의 1990년대 중반 현대사회의 왜소한 개인을 그려내 문단의 흐름을 바꾼 작가라니 정말 대단하다.

분명히 문학적 역량을 갖춘 작가의 작품이라는 사전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이 작품을 읽으면서 뭐야 이거! 그럴듯하게 평해 놓더니 도대체 작가로서의 기본도 안 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다. 병원의 한 병실에 누워있는 환자들과 그들의 가족들 일상사를 매 작품 인물과 초점을 달리하여 서술하고 있음은 나쁘지 않다. 그런데 그들의 인간관계를 지나치게 우연적이고 작위적으로 설정하여 황당하다는 느낌이 작품에의 몰입을 방해한다. 우연성도 한도가 있을 텐데.

서사 전개도 뭔가 껄끄럽다. 작중 분위기도 대체로 그로테스크하다. 일부러 시간적 배경을 밤으로 설정한 의도가 살짝 엿보인다.

해설에서 평론가는 단순한 세태소설이 아님을 지적한다. 독자의 섣부른 판단을 경계함이다. '무대 뒤의 공연'은 소설 전체의 서막이다. 등장인물을 소개하며 그들의 개략적 관계를 언급하는 동시에 향후 등장할 사건들의 싹을 키운다. 병실을 무대삼아 그 뒤에는 인간사의 불유쾌한 장면이 잇달아 등장한다. 연극의 한 장면처럼.

그나마 당뇨 여자의 아들 신입사원과 꽃집 아가씨의 만남('내 창가에 기르는 꽃')이 따뜻함을 안겨줄 뿐 다른 사건과 인물의 관계는 그렇지 않다. 성형의사와 아나운서의 외도 그리고 의사의 비극적 종말('당신의 저녁 시간'), 아나운서와 중국집 뽀이의 일시적 소통과 재차 단절('달빛 고양이'), 성형의의 아버지이자 통나무 노파의 남편으로 꽃집 아가씨의 엄마와 재혼을 통해 무성한 생명력을 구매하려고 하는 노인의 퇴행과 몰락('성주')이 현대인의 위선적이며 가식적 군상의 본보기로 제시된다. 특히 '성주'에서 노인의 늙은이로 태어나 어린이가 되기를 희구하는 몽상은 그의 육체와 정신이 퇴행하여 성과 함께 주저앉는 장면과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

소설집의 제목이기도 한 '소설 쓰는 밤'은 경비원과 소설가와 신입사원을 등장시킨다. 뚱딴지같은 소설가의 캐릭터는 더욱 황당하다. 약간 맛이 간 듯 하지만 예지 능력과 세상의 본질을 꿰뚫는 발언을 하는 그의 존재를 어찌 해석해야 좋을 지 애매하다. 그의 기행에서 문득 세례요한이 연상되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소설은 술에 취한 신입사원과 소설가가 꿈을 꾸는 것으로 끝난다. 갑작스럽고 의외의 종결. 역시 불친절하다. 보자기를 펼쳐서 안에 든 물건을 죄다 꺼내서 보여줬으면 다시 집어넣을 것이지 그냥 나 몰라라 한다.

작가의 우연성과 기이한 구성이 심사숙고의 산물임을 인정한다. 그리고 이 작품을 통해서 무엇을 말해주고 싶은지도 대강은 짐작할 듯도 싶다. 하지만 '소설 쓰는 밤'에서 작가는 우리에게 바람직한 인간상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진작 깨달았을까.

소설(<소설 쓰는 밤>) 읽는 밤에 이렇게 난 어줍잖은 촌평을 끄적거린다.

* 알라딘 검색 중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단편 2편이 우수상으로 뽑혔다고 한다. 두 권 다 나도 가지고 있는 건데 어떤 내용인지 기억이 가물가물. 틈내서 반추해야지.. 아 정정해야지, 달랑 한 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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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2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1.4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미얀마 산책 - 아름다운 풍경에도 슬픔이 묻어나는 땅
크리스틴 조디스 지음, 사샤 조디스 그림, 고영자 옮김 / 대숲바람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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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에 혹해서 집어든 책이다. 신비와 은둔의 나라 미얀마에 대한 호기심을 달래기 위하여. 다시 한 번 제목에 현혹되어서는 안 됨을 절감한다. 단순한 여행기 내지 가이드북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원제가 불어라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부디스트 미얀마'라고 하였으므로 불교적 시각이 많이 들어가 있다.

실제로 저자의 해박한 불교 지식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확인을 원한다면 50면 전후를 들쳐보라. 저자는 빗나간 불교 신앙에 대해 예리한 비판도 때로는 서슴지 않는 비판적 불교학도이면서도 예수와 부처의 차이를 언급한 유년시절(P.225~226)에서처럼 불교에 매혹당한 영혼이기도 하다.
 
미얀마, 흔히 버마는 양곤(랑군) 사건을 통해 비로소 우리에게 존재가 각인된 나라이다. 그 나라로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겠지만 말이다. 남의 얘기를 할 것도 없다. 많은 세계인에게 한국은 한국전쟁의 참상으로 기억되다가 근래에 들어 올림픽이나 월드컵으로 조금 이미지가 변화되었을 따름이다. 그래서일까? 경영에서 노이즈 마케팅이 극성을 부리는 연유가.
 
근자들어 미얀마는 해외여행 소개에 이따금씩 소개되고 있다. 내가 꾸준히 보는 매일경제신문의 월요일판에는 별지로 Travel Guide가 나오는데 대개는 상투적인 여행지가 소개되지만 가끔은 낯선 장소가 소개된다. 미얀마의 인상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고요와 평온의 불교사원(파고다)의 나라로, 또한 산악 소수민족의 특이한 문화로 다가온다.
 
파고다. 번잡한 세속에 지친 속인들에게 그것은 신선한 샘물 한 줄기가 목을 축이는 기쁨과 경탄을 일깨운다. 상상해보라. 여명을 뚫고 아스라이 비치는 파고다의 숲. 석양의 찬란한 광채에 황홀감을 자아내는 황금빛 파고다.
 
하지만 물들지 않는 소박한 아름다움에 파묻혀 미얀마인들의 빈곤과 억압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관광객의 존재는 그들에게 끊이지 않는 재앙을 연장시킬 따름이다.

이 책은 미얀마의 현실 고발이나 가이드의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 모호하고 추상적인 미얀마인들의 일상과 내면에서 어우러지지 않은 인상기에 불과하다. 개인적 소회나 일상의 소소한 체험이 빠져있어 독자에게 실체감 없이 뜬구름 잡는 허우적거림을 안겨준다. 여행기로만 따지면 흥미진진한 몰입감이 부족하다는 의미. 그럼에도 망각된 존재를 세인에게 각성시키는 구실은 미약하나마 그런대로 수행하였다.

후반부는 그나마 루비계곡인 몽곡 방문기로 앞과는 확연히 다른 현실감을 제공한다.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가 연상됨은 어인일일까? 다이아몬드와 루비의 차이는 있을망정 보석의 존재로 그들의 삶은 오히려 행복을 상실 당하였다. 쇼윈도에 걸린 루비와 몽곡의 루비가 주는 이중성의 극명함이 가슴을 저미게 한다.

말미에 미얀마의 민주화 약사를 수록하고 있다. 미얀마의 잘못된 단추는 독립의 주역인 아웅산이 암살당한 때로부터 꿰여졌다. 그렇다고 아웅산 수치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는 저으기 의문스럽다. 그는 단지 하나의 아이콘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미얀마의 불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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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5.14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