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바라타 - 불멸의 인도문학 2
비야사 지음, 주해신 옮김 / 민족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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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인도문학 2.
 
마하바라타는 라마야나와 쌍벽을 이루는 인도의 고대 서사시다. 무려 10만 구절의 20만행의 분량만으로도 초대작인 이 작품은 그 유명한 그리스의 양대 서사시를 합한 것의 8배에 해당하는 분량이고 한다.
 
작가는 비야사라고 하는데, 대개 고대 서사시가 그러하듯 이는 상징적 의미를 지닐 뿐 오랜 기간의 무명 악사들에 의한 공동 작업의 결과물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인도인들은 "이 세상 모든 것이 마하바라타에 있나니 여기에 없는 것은 이 세상에는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다고 한다. 참으로 이 대작에는 인간사의 모든 측면이 깊숙이 드리워져 있다.
 
크게 보면 판다바들과 카우라바들의 친족 간 왕위 계승 전쟁에 불과하지만, 마치 <일리아스>에서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 동맹군이 세계(그들이 아는 범위 내에서)의 패권을 건 일대 혈투를 벌이듯 온 인도의 국가들이 양측에 갈라져 격전을 벌인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외관상 판다바들의 승리로 끝나지만 수많은 혈육과 친지, 지지자들을 잃은 마당에 상처뿐인 영예를 차지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런지. 오히려 이를 계기로 고대 인도의 정치체제가 붕괴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신화를 보면 언제나 고대는 완전하고 선한 세상이다. 성경에서 아담과 이브가 그러하며, 고대 중국의 요순 시절에 대한 회귀적 갈망이 또한 그러하다. 그리스신화에서 황금시대에서 철의 시대로 오는 과정도 다르지는 않다. 마찬가지로 인도에서도 바라타족의 전쟁을 계기로 환상이 깨지기 이전에 신성과 절대선은 추앙을 받았다. 라마야나와는 달리 이 작품에서는 친족 간의 살해가 빈번히 등장한다. 그리고 다르마(도덕)의 기준 자체가 흔들리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만큼 라마야나보다는 후대에 기술되었음을 추정케 한다.

카우라바들은 판다바들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하다 실패하고 결국 대전쟁으로 귀착되는데, 이 과정에서 판다바들의 부인에 대한 비겁한 모욕으로 씻을 수 없는 분노를 유발한다. 이 분노의 결과 비마는 일백 명에 달하는 카우라바들을 한명만 제외하고 모조리 죽여버린다. 또한 상호 전투 과정에서 엄숙하게 선서하고 지켜지던 계율들, 즉 무기없는 자는 공격하지 않는다, 비전투요원을 공격하지 않는다, 전투는 일몰과 함께 끝난다, 하체는 공격하지 않는다 등등의 전투가 진행되면서 하나씩 무시되고 마침내 비마는 두료다나의 두 다리를 공격하여 전쟁을 종결짓지만 이로 인하여 다르마를 위배했다는 비난을 판다바들은 얻게 되고 잔여세력의 야습이라는 복수를 당하게 된다. 그리고 다르마푸트라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받던 유디슈티라는 거짓말로 드로나를 속여 그를 죽게 만드나 그 대가로 "언제나 지상에서 한 뼘쯤 떠서 다녔던 그의 전차가 드디어 지상에 닿았다는 것은 그 또한 속세의 속물로 떨어지고 말았다는 뜻이었다(P.403)."
 
교과서에서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 대하여 듣지 못하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사실 보다 더 세분된 신분계급이 있다고 하는데, 속세를 다스리는 지배층은 크샤트리아며, 마하바라타 역시 크샤트리아들 간의 전쟁이다. 브라만은 고행을 통하여 영적인 신통력을 지닌 승려계급으로 원칙적으로 속세에는 관여하지 않으나 전투에 참가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 크샤트리아의 다르마는 "늙거나 병들어 침대에서 죽기보다는 전쟁터에서 자랑스럽게 죽기를 원하다"(P.289)고 하는데, "싸움터에서 죽는 무사에게는 남들이 크게 고생해야 얻을 수 있는 천국에의 길이 쉽게 열린다"(P.366)고 한다. 곧 크샤트리아는 전쟁이 다르마인 것이다. 그들에게 죽음을 바치는 대가로 속세의 지배권과 천국에의 약속을 보장하는 것이 인도의 계급 제도다. 한편 브라(흐)만은 속세를 떠나 숲속 등에서 은둔의 고행을 통해 신의 능력을 가지게 되는데, 고행자의 분노와 저주는 세속의 왕 뿐만 아니라 하늘의 신까지도 두렵게 만든다. 즉 천신조차도 위대한 브라만에게 고개를 숙인다. 439면을 보면 불의 신 아그니가 브라흐마차리야 삼바르타의 분노에 벌벌 떠는 장면이 소개되어 있다.
 
라마야나와는 달리 마하바라타에서는 신과 아수라 같은 인간 이상의 존재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크리슈나는 비슈누신의 화신이지만 결코 신 자체의 역할을 맡지는 않는다. 즉 바라타족의 전쟁과 패망은 신에 의해 운명지어졌지만 결국 이를 실행에 옮긴 것은 바라타족 자신인 것이다. 카우라바들의 아버지인 드리타라슈트라의 소시민적 선과 소극적 방관이 불화를 비극으로 이끈 계기가 되고 있다. 마하바라타의 시대에 와서 신은 인간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맹인의 코끼리 다리 만지는 우화가 있다. 마하바라타를 400여 면의 압축된 한 권의 책으로 진면모를 알았다고 하면 세인의 조소를 받게 될 것이다. 그나마 이것에라도 감사할 따름은 이조차 없다면 우리는 인도인의 정신세계의 큰 자리를 차지한 이 고전에 대해 발가락이라도 만져볼 기회가 없음에서이다.

판다바는 선하고 카우라바는 무조건 악하다고 비난할 수 없다. 어쩌면 보다 인간적인 것은 두료다나일 것이다. 뻔히 자신의 능력이 미치지 못함을 알고 맞부딪히면 깨질 것을 감수하면서도 그는 운명에 떠밀려서 한편으로는 감수하면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가 천국에 올라간 것은 전쟁터에서 죽은 크샤트리아로서가 아니라 악의 숙명을 묵묵히 감내한 그의 동정이 불가피한 인간적 속성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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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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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야나 - 불멸의 인도문학 1
발미키 지음, 주해신 옮김 / 민족사 / 199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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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인도문학 1.
 
<마하바라타>와 더불어 인도의 양대 고전문학의 하나인 <라마야나>는 기원전 3세기에 발미키라는 시인이 집대성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가 호메로스의 한사람의 창작이 아니듯 발미키 역시 주요한 정리자의 일익을 담당하였을 것이다. 
 
분량 면에서 그리스의 이웃들을 가볍게 제치는 대서사시이지만 아쉽게도 국내에는 제대로 된 번역본이 없다. 그나마 20여 년 전에 나온 이 책 덕분에 대략적인 맛보기라도 할 수 있음을 다행으로 여겨야 함이 우습기 그지없다.
 
<라마야나>는 ‘라마의 이야기’라는 의미라고 한다. 말 그대로 라마를 주인공으로 하여 라마의 부왕인 다사라타 왕과 아우 락슈마나 그리고 아내인 시타 등이 등장하며, 라마가 억울한 사정에도 다르마를 굳게 지키며, 아우와 함께 원숭이족의 도움으로 아내를 빼앗아간 략샤사의 우두머리인 라바나를 물리친다는 내용으로 그다지 복잡하지는 않다.
문화권 자체가 우리와 달라서인지 고유의 종교적 색채가 짙게 배어있는데 이의 함의를 파악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힌두교와 불교가 등장하기 이전 인도의 브라만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느니만큼 브라만교의 신들이 다수 등장하고, 또한 략샤사, 락샤시 등 악의 속성을 지닌 인물도 있다. 또한 성자들의 존재가 특이하다. 이들의 위상은 신들마저 우러를 정도이다.
 
라마는 최고신 나라야나의 현신으로 용기와 지혜를 겸비하였지만 겸손하며 다르마(도덕?)에 충실하다. 그래서 매우 이상화된 인물로 설정되어 후세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게끔 하고 있다. 사람들은 영웅의 고난에 동정을 금치 못하게 마련이다.
 
역자의 해설을 통해 비로소 인도와 동남아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라마야나>의 위력을 알게 되었다. 태국의 왕호가 ‘라마’인 연유, 앙코르와트에 라마와 라바나의 전쟁 장면을 그린 대형벽화가 있다는 사실 등등. <라마야나>는 종교와 민족을 떠나 동남아인들의 소중한 공통 문화유산인 것이다.
 
또 특이한 점은 원숭이족 임금인 발리와 수그리바, 그리고 충성스러운 하누만이다. 발리 섬이 여기에서 유래한 것은 아닌가 궁금하다. 하누만의 대활약상조차 낯설지 않다.
등장인물들의 이국적 명칭과 선악의 대결, 무수한 신들의 등장과 신들의 무기(아스트라)의 사용 등. 갑자기 국내 컴퓨터 게임들이 생각난다. <창세기전>의 주인공들은 동서양의 고대신화에서 캐릭터를 가져왔음을 알게 된다.
 
그리스의 서사시를 능가하는 이만 사천행의 대작이면서 문체가 세련되고 아름답다고 하지만 언감생심 그림의 떡이다. 거칠더라도 완역본이나 나왔으면 좋겠지만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긴 그 유명한 <일리아스>만 하더라도 근년 들어서야 비로소 원전 번역본이 나온 게 우리네 인문학의 얄팍한 실정이다.
 
줄거리만 따라가는 수준이지만 고전의 편린이나마 맛보았다는 점에서 위안을 삼는다. 또한 상대적으로 생소한 인도권 종교와 문화를 약간이나마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수한 낯선 용어와 인물들에 의하여 머릿속은 여전히 뒤죽박죽이다. <마하바라타>를 읽으면서 조금 나아지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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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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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귀에 들리는 사랑의 숲 이야기
사아디 지음, 김택 옮김 / 선우출판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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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전에 사아디의 우화집을 읽었다. 너무나 자그마한 판형에 간략한 내용이라 부담 없이 흥미롭게 읽었지만 사아디의 참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여기저기 알아보니 그의 유명한 ‘장미원’의 번역본이 국내에 나왔음을 알게 되었고 절판된 책을 수소문해서 결국 인터넷 헌책방을 통해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부제가 잠언집이라고 하였는데, 너무 딱딱한 표현이고 ‘교훈적 이야기와 시’ 정도로 받아들이면 좋겠다. 페르시아어를 전공한 역자가 원전에서 직역한 것이니 중역 편집본보다 신뢰감이 훨씬 높다.
 
13세기 당대에 중세 페르시아는 문예 방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고 있었다. 사아디와 사위 허페즈(하피스)를 비롯하여 또 하나의 대시인 루미 등이 드높은 예술 수준을 오늘날까지도 전해오고 있다.
 
구성은 일화(이전의 사아디 우화집의 내용과 많이 겹침)를 소개하고 이어 짤막한 교훈시로 끝맺음하는 방식이다. 각 편이 대개 한 장을 넘기지 않는 경우가 많아 역시 가볍게 책장을 넘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우화와 잠언시의 병행 구조라 단지 일화만 소개할 때보다 가슴에 좀 더 와 닿는다.
 
주된 내용은 가난 예찬, 권세 비판, 위선 비난 등 수피즘의 관점에서 인생과 사회의 지침이 될 만한 교훈을 담고 있다. 때로는 과도하게 자기 위안 내지 합리화를 강조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작가 자체가 권력계급보다는 거지성자에 가까우니 말이다. ‘천국가는 발걸음’(P.118~119)에서는 부자는 빈자보다 천국가는 길이 무겁다며 가난을 예찬한다. 그러면서 위선적인 거지성자에 대한 따끔한 비판도 잊지 않는다(‘거지성자의 길’, P.70~71). 사실 “마음이 하늘과 함께 한다면”(P.76~77) 참된 OO가 되는 것이 어디 거지뿐이랴.
 
‘거짓도 때로는 진실의 힘을 갖는다’(P.128~129)는 선의의 거짓과 악의의 진실에 대하여 재삼 생각할 기회가 된다. ‘상처의 흔적’(P.140~141)은 진정으로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을 재발견할 수 있다. ‘잠수부가 악어를 두려워하면 어찌 귀한 진주를 얻으리’(P.144~153)는 가장 긴 이야기로서 이채로운데 안락에 안주하지 않고 고생을 하는 힘이 장사인 아들을 통하여 노력하는 가짐의 의의를 되새긴다. 그리고 ‘좋은 약이 입에 쓸까’(P.178~179)는 고언(苦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한편 ‘인생은 허망한 꿈’(P.159)의 시구는 그 자체로 세상을 이별하는 시, 즉 사세구(辭世句)다. 여기에는 슬픔과 회한, 체념의 정서가 물씬 배어있다. 마지막 ‘지혜에 이르는 통로’와 ‘지혜의 속삭임’은 일화 없이 순전한 잠언과 교훈시 모음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다. 그 중 침묵의 중요성을 언급한 대목(P.191~192)이 기억에 남는다.
 
이 책을 교훈서로만 받아들이면 사아디가 무척이나 슬퍼할 것이다. 사아디는 그래서 일화와 시의 형식을 통해 독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하였다. 심오한 내용을 경쾌한 수단으로 구사하는 기법을 가지고 인생의 지혜를 밝혀 주고 싶었던 것이다. 괜히 무겁고 진지하게 책장을 넘기지 말자. 슬며시 감도는 미소 속에, 그렇지! 하는 탄식 속에 어느덧 “마음의 눈”을 열고 사아디가 전하고자 한 “사랑의 숲 이야기”들 듣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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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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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아디의 우화 정원 - 위대한 페르시아 수피 붓다 지혜의 우물 1
사아디 지음, 이현주 옮김 / 아침이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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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만 한 부피에 분량도 170면 내외에 불과하다. 아담하여 누구나 부담 없이 읽을 만하다. 게다가 어려운 책도 아니고 ‘우화’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사아디는 누구인가? 겉표지에는 ‘위대한 페르시아 수피’로 적혀 있다. 간단한 약력을 확인해 보니 13세기 페르시아의 시인으로 하피즈[허페즈]와 더불어 대표적인 저명 작가라고 한다. 작품 중에서는 <굴리스탄(장미정원)>과 <부스탄(과수원)>이 유명하다는데, 국내에는 당연히 번역본이 있을 리 없고(예전에 굴리스탄이 번역되었다고 하지만 이미 절판되었다 ㅠㅠ), 이 우화집이 출판된 것만도 감지덕지하다. 다만, 아서 숄리의 편집본을 번역한 것이므로 작가의 원작의 출전에 대해서는 아무 정보가 없다.
 
약 80여 편의 짤막한 교훈적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각 이야기는 대개 두 면 남짓하며 짧은 것은 반 면도 채 되지 않는다. 그리고 ‘우화’라고 하였지만, 동물이 등장인물인 이야기는 몇 편 되지 않으므로 그냥 옛이야기 모음집으로 이해하면 맘 편하리라.
 
훈육을 목적으로 하는 이야기는 고금과 동서의 차이를 물론하고 비슷한 형태와 주제를 갖기 마련이다. 어차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방식은 유사한 법이다. 여기에 문화적 차이가 비슷비슷한 가운데 독특함을 부여하는 양념 역할을 해준다.
 
인상에 남는 몇 편의 이야기만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목이 비틀어진 왕’ 편에서는 목이 비틀어진 왕을 고쳐주었는데도 아무런 감사를 표하지 않자 의원이 다시 목을 비틀어지게 해놓고 사라진다는 내용이다. 즉 배은망덕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 사람이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틀리다는 속언과 별반 차이 없다.
 
‘술탄과 탁발승’ 편은 알렉산더 대왕과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일화를 연상시킨다. 디오게네스에겐 한 줄기 따뜻한 햇살이 소중했듯이 탁발승은 술탄에게 자신을 성가시게 하지 말라고 요청한다.
 
‘구두쇠와 아들’ 편도 어디선가 들어봤음직한 이야기다. 재화를 땅속에 묻어놓는 것은 돌멩이와 다름없다는 표면적 교훈인데, 내게는 부자 삼 대 못 간다는 속설의 근본적 원인에 대한 해답으로 여겨졌다. 선대의 근면과 절약 정신을 후대는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탁발승과 여우’ 편은 고사성어 수주대토(守株待兎)가 연상된다. 토끼를 기다리는 농부와 가만히 누워서 먹을 것을 기다리는 탁발승이 어떤 차이점이 있을는지.
 
‘고삐 끈 이름’ 편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의 먼 조상 격이다. 진정한 양의 고삐 끈은 친절과 사랑이라는 소년의 말이 가슴에 뜨끔하다.
 
‘겁에 질린 여우’ 편에서 여우가 두려워하는 것은 집단행동의 맹목성이다. 그 맹목성에 일단 포위되면 정의는 사라지고 광기만이 난무한다. 여기에 희생된 억울한 개인은 누가 보상할 것인가
 
‘좋은 선생’ 편은 교육과 교육자의 본질에 대해 깊은 상념에 빠지게 한다. 교육의 민주성은 어디까지 보장해 주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일정 정도의 비민주성이 불가피한 것인가. 강제적 방식으로 교육을 받은 이들이 훗날 개인의 인성 존중과 자율성에 기반한 민주적 사회를 성공적으로 구성하고 운영할 수 있을 것인가.
 
‘신성한 나무’ 편은 재화가 인간관계에 미치는 악영향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재화가 혈연에 선행하는 것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만이 아니었다.
 
작가 사아디는 몽골의 침략 이후 방랑 세월을 보내다가 노예가 된 경험도 있다. 어찌 보면 그리스의 이솝과 마찬가지 경험을 한 셈이다. 그래서일까 이야기 중에 자신을 등장인물로 삼은 경우도 있다. ‘불쌍한 노예, 사아디’ 편은 개인적 체험을 객관화시켜 더욱 사실성을 담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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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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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 신화
조철수 지음 / 서해문집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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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후반부터 세계문학을 통독해 보겠다는 불가능한 목표를 야심만만하게 시도하였다. 우선 문학의 시원인 신화부터 시작하여 시대 순으로 내려올 생각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의 대표격인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를 펼쳐들었다. 그 후 불현 듯 인도의 고대 문학작품이 궁금하여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 <샤쿤탈라>, <메가 두타> 등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호기심은 고대 인도문화의 영향을 받은 페르시아를 향해 서쪽으로 나아가 우화집 <칼릴라와 딤나>로 시작하여 사아디와 허페즈의 교훈적 이야기와 시를 살짝 맛보았다. 이번에는 다시 메소포타미아로 건너뛰었는데 <길가메쉬 서사시>를 실제로 대면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길가메쉬는 고립무원의 독립된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수메르 신화의 광대하고 풍요로운 토양에서 생산된 산물의 일부라는 사실을. 그래서 수메르 신화와 문명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어 이런저런 책들을 섭렵해 나갔다. 처음에는 낯설기 짝이 없던 신들의 계보와 용어, 수메르 어휘가 가리키는 깊은 중의적 의미, 찬란한 고대 서양 문명과 신화가 수메르에게 크게 빚지고 있었음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진실. 게다가 터무니없이 고대이면서 때로는 초현대적이기 조차한 그들의 문명 세계. 인류가 그토록 오랜 세월 수메르를 잊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몇 권의 수메르 저작물을 읽어나가면서 레퍼런스로 소장할 책을 골랐다. 수메르 인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윤색을 거치지 않고 날것 그대로 맞대면하고 싶었다. 그것은 국내에서 수메르 문자를 해독할 줄 아는 단 두 명의 인물인 김산해의 <길가메쉬 서사시>와 조철수의 <수메르 신화>이다. 다행히 김산해의 책은 쉽사리 구할 수 있었던 반면, 조철수의 것은 시중 서점에서 절판되어 구할 수 없어 출판사에 직접 전화하여 재고분을 겨우 습득할 수 있었다. 그러니 더욱 뜻 깊다.
 
사실 <수메르 신화>의 내용은 대부분 전혀 새롭지 않다. 이미 앞서 읽은 책들에 한두 번 내지 많게는 대여섯 번도 등장했던 토판의 이야기들이다. 지우수드라의 홍수 이야기, 아트라하시스, 에누마 엘리쉬 등 수메르 신들의 창세기. 그리고 유명한 인안나와 무두지의 사랑과 비극, 길가메쉬 이야기 등.

그렇다고 이 책을 읽는 게 별 의미가 없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인용이 많고 해설이 풍성하다고 해도 원작을 접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사안이다. 그렇다, 나는 수메르 탐험의 휴지부를 여기서 찍을 작정이었다. 그래서 수메르 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었다. 그것이 수메르에 대한 걸맞은 에티켓으로 생각하였다. 그 의도에 이 책은 십분 부합한다.
 
수메르 연구는 현재진행형이다. 수메르가 재발견된 지 겨우 이백여 년 남짓. 수메르 문자가 해독되고 토판들이 연구되기 시작했던 게 얼마 전이던가. 현재까지의 연구만으로도 수메르는 인류 문명의 선구자로 더욱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의 연구 결과가 더욱 기대되는 것은 수메르가 갖는 양면성이 어쩌면 고대 인류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뒤엎을 잠재력을 내포할 가능성에 기인한다. 그 날이 올 때까지 수메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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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31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1.15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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