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로미오와 줄리엣 열림원 이삭줍기 6
고트프리트 켈러 지음, 정서웅 옮김 / 열림원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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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의 하인리히>에 이어 그의 또 다른 명작 <젤트빌라 사람들>이다. 독일어 노벨레 문학의 걸작이라고 평가받는 작품집인데, 열편의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전편은 ‘뾰로통한 아들 팡크라츠’, ‘레겔 암라인 부인과 막내아들’, ‘세 명의 정의로운 빗 제조공’, ‘마을의 로미오와 줄리엣’, ‘작은 고양이 거울이’로 이루어져 있고, 후편은 ‘옷이 날개다’, ‘행복한 대장장이’, ‘악용된 연애편지’, ‘디테겐’, ‘잃어버린 웃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직 국내에는 완역본이 나와 있지 않으며, ‘세 명의 정의로운 빗 제조공’과 ‘마을의 로미오와 줄리엣’, ‘작은 고양이 거울이(고양이 슈피겔), 그리고 ‘옷이 날개다’ 만이 문고판형의 소책자로 접할 수 있다.

그런데 노벨레 문학은 일반적인 단편소설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듯하다. 잠깐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확인해 보자.

신기하지만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사건을 예술적 구성으로 간결하고 객관적인 묘사로 재현한 비교적 짧은 산문 또는 운문 작품. 내용의 전개는 로망(소설)과는 반대로 어떤 갈등에 집중시켜 그것이 하나의 전환점이 되어 종말로 유도되는 점이 드라마(희곡)와 흡사하다. G.보카치오 이래의 ‘새로운 사건’을 중심으로 한 노벨레는 뷔란트, 괴테 및 낭만파를 거쳐, 심리적인 새로운 방향을 개척하여 그 내용의 이상성(異常性)을 주인공의 영혼에까지 추구하려고 했다. 19세기의 독일은 A.슈팁터, 마이어, H.T.슈토름, T.폰타네, H.V.클라이스트 등의 작가에 의하여 노벨레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것으로 보아 노벨레는 ‘신기한 사건’을 중점적으로 하여 간결하게 구성한 작품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이 책 <마을의 로미오와 줄리엣>도 작품 해설을 제외하면 100면 남짓의 짧은 분량이다. 스위스의 가상 마을 젤트빌라에서 벌어진 사랑의 죽음 사건을 제재로 하고 있다. 영국의 대선배 작가에게서 제목을 차용하고 있는데, 그만큼 두 작품의 제재가 유사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작품에서 주목할 점은 소시민의 덕성과 그 한계이다. 농부 만츠와 마르티는 19세기 시민사회의 평범한 일원으로 근면한 미덕을 갖추고 있다. 이들의 도덕률은 깨뜨린 것은 두 사람 소유의 밭 가운데 방치되어 있는 버려진 황무지 밭이다. 농부의 토지 소유 욕구는 상인의 돈 욕구만큼이나 자제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밭 소유권을 둘러싼 두 사람의 갈등은 자신과 가족을 영락과 타락의 길로 이끌며, 이들은 이것을 상대방의 탓으로 귀인하고 더욱 원망한다.

셰익스피어의 봉건사회와 달리 시민사회에서라면 잘리와 브렌헨은 로미오와 줄리엣과는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의구심이 든다. 희망 없는 가족을 떠나서 다른 도시에서 또는 이웃 국가로 가서 두 사람 만의 새로운 삶을 꾸려나가는 방안이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시민 세계에서는 명예롭고 양심에 거리낌없는 결혼을 통해서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감정이 그(잘리)는 물론 브렌헨의 마음속에도 살아 있었다.”(P.102)

그렇다. 당대의 가치관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작금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오늘날 결혼에서 부모의 찬성과 동의는 물론 중요하지만 절대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잘리와 브렌헨의 시대에서 그것은 필수 요건이며 나아가 당사자들의 의사보다 더욱 중요하게 여겨졌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켈러의 문체는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다. 손주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할아버지처럼 담백하면서 다소의 문학적 색채를 불어넣어 독자로 하여금 아련한 감성을 불러일으키게 유도한다. 해설에서는 이것을 ‘시적 사실주의’로 칭하고 있는데 과학적 사실주의에 대비되는 용어로 사용한 것이다. 스위스의 소박하며 아름다운 자연이 작가의 마음과 글에 시적 정감을 불어넣어준 것이리라. 
 

* 작곡가 델리어스가 이 작품을 오페라 형식으로 작곡하였다고 한다. 한번 감상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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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9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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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의 하인리히 2 한길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60
고트프리트 켈러 지음, 고규진 옮김 / 한길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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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권과 제4권은 전반보다 분량이 더욱 길다. 600면에 가까운 압도적 분량과 양장본의 외형은 소설이 아니라 딱딱한 학술서를 연상케 한다. 그렇다고 지루하기 짝이 없을 것으로 속단하지는 말자. 통근시간 외엔 틈을 내지 못해 지하철 안에서 띄엄띄엄 읽는 바람에 오랜 시일이 소요되었지만 읽는 도중에 지루하다거나 흥미롭지 않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앞선 두 권에서 작가는 하인리히 레의 유년 시절과 소년 시절의 순수하고 아련한 스위스 시골의 추억을 더듬고 있다. 다소 굴곡은 있지만 주인공의 소심하면서 열정적인 성격은 도시와 학교라는 틀에 갇히기보다 숲과 호수의 자연에서 위안과 풍요로움을 거두고 있다. 그리고 안나와의 풋풋한 사랑도.

후반부에서 하인리히는 시골과 스위스를 떠나 미술 수업을 위해 독일로 간다. 그 계기는 안나의 갑작스런 죽음이다. 안나와 유디트는 주인공의 사랑관의 극점인 동시에 접점이기도 하다. 순수함과 정신적 사랑, 그리고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육체적 사랑. 사실 남녀 간의 사랑에서 일방을 배제한 한 방향의 사랑은 건전하지 못하다. 하인리히는 아직 이해하지 못하며 받아들일 수도 없다.

독일로 간 그는 미술 수업과 작품 활동 보다는 새로 사귄 친구들과의 우정과 애정세계에 관여하기도 하며, 대학 강의 청강에 흥미를 느껴 대학생들과 어울리는 등 청춘다운 부주의함과 태만으로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게 된다.

주인공의 서서히 스러져가는 희망처럼 작품 전개의 톤은 대체로 어둡고 우울하다. 그런데 켈러는 여기서 모종의 장치를 마련한다. 즉 여러 에피소드를 삽입하여 독자가 지나치게 하인리히의 처지에 몰입하는 것을 억제하며 교양소설에 부족하기 쉬운 다양한 사건과 체험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즉 동반자 두개골의 주인 쯔비한의 일화, 친구 리스와 에릭슨 그리고 아그네스와 로잘리에의 애정사, 사육제의 떠들썩한 정경 등 어찌 보면 그다지 중요하다고 볼 수 없는 이야기들이 나열되어 있다. 이것은 작가 특유의 우울한 유머, 가벼운 문체와 결합하여 어둡되 암울하지 않은 작중 분위기를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제4권의 후반부에서 하인리히의 인생은 그야말로 극적 반전이 이루어진다. 어찌 보면 우연의 남발로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지만 이 자체가 이미 허구인 만큼 심각하게 지적할 필요는 없다. 주인공의 습작의 가치를 알아본 백작과의 만남, 뜻하지 않은 유산 상속과 도르트헨에 대한 연모. 귀향을 꾸물거리다 마주치게 된 어머니의 쓸쓸한 말년에 대한 자책. 잿빛 공직 생활과 유디트와의 재회.

19세기에 씌어진 이 작품이 오늘날에도 지니는 가치는 무엇일까? 스위스와 독일 사람이라면 조금 더 직접적인 공감을 가질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물설고 말도 선 시대와 장소를 달리하는 여기, 우리나라에서는. 그것은 젊은 영혼의 자유로운 삶의 모색과 치열함이 시대를 초월하는 공통의 현상이기에 그렇다. 하인리히가 펼치는 신학적 관점과 소위 포이에르바흐에 감화된 사상의 편린을 언급할 때 오의와 진의를 해득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 순정과 열정에 마음 한켠이 끌린다. 문득 이문열의 초기작이 연상되는 것은 어떠한 연유인지. 치열한 인생구도?

교양소설이라는 진지한 외피에 흥미를 못 느낀다고 하면, 지난 세기 시골과 도시에서 스위스인들이 꾸려가는 일상의 모습을 탐방한다는 생각만으로도 꽤나 읽어볼 만하다. 사람이 살아가는 양태는 시공간적 배경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는 변함이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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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9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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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의 하인리히 1 한길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59
고트프리트 켈러 지음, 고규진 옮김 / 한길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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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의 독일어권 작가인 켈러는 이 작품으로 ‘스위스의 괴테’라는 찬사를 받는다고 한다. 이 점에서는 다소 의아한 데 괴테가 비록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라는 걸출한 교양소설로 선구자적 위치를 점했지만 괴테의 성명을 후세에 드날리게 한 것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파우스트>로, 교양소설 또는 성장소설은 그의 본령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여튼 괴테에 비견될 평가를 받게 된 것으로 보아 그 작품의 탁월성은 충분히 예감하게 한다. 그럼에도 이 책이 국내 초역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대형서점의 서가에 수북이 쌓여 있는 무수한 세계문학 전집은 무엇인가.

괴테와 켈러 등의 교양소설은 시대적 산물이다. 고전적 시민사회가 근대사상과 함께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는 때, 작가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추론해 본다. 세상이 바뀌어가고 있음을 충분히 체감하지만 그때까지 자신의 사고와 가치의 지주 역할을 했던 시민사회가 구시대로 물러나고 있음에 대한 애틋한 비애. 불안하지만 역동적이고 새로운 기대로 충만하여 호기심을 이끄는 다가오는 근대에 대한 동경. 즉 비애와 동경이 교양소설을 전개하는 원동력이다. 교양소설의 명작이 괴테와 켈러는 물론, 노발리스와 횔덜린과 같이 고전과 낭만의 전환기에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교양소설은 20세기 들어 성장소설로 변모한다. ‘교양’이라는 어휘 자체가 이미 현대 사회와는 어울리지 않게 되고 만 탓일까.

교양소설의 속성 상 주인공은 젊은이가 된다. 어린 시절, 소년 시절, 청년 시절을 거쳐 한 인간으로 사회의 당당한 일원이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어떤 면에서 교양소설을 읽는 행위는 전기를 읽는 것과 유사하다. 다만 전자는 허구의 인물을 대상으로 하고, 또한 역사적 위인이 아니라는 점이 구별된다.

이 <초록의 하인리히>는 이런 점에서 흥미롭다. 항상 초록색 옷만 입고 다녀서 붙은 별명이다. 스위스의 소도시에서 홀로 된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하인리히 레. 그는 소심하면서도 열광적인 성격으로 소년 시절에 학교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시골에서 외삼촌 및 사촌들과 함께 지내며 화가의 꿈과 천사같은 안나에 대한 사랑을 키운다.

기본 뼈대를 둘러싼 숱한 에피소드와 정경 묘사 등이 작품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 번역을 통해서도 원작의 재미와 분위기를 놓치지 않을 수 있음은 커다란 기쁨이다. 이 점에서는 번역자의 공이 자못 크다. 여하튼 합쳐서 900면에 달하는 두 권으로 된 문학작품을 어지간해서는 독자에게 지리함을 안겨주기 쉬운데, 첫 권을 빠르지 않지만 흥미를 잃지 않고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하인리히는 저자의 또 다른 자아다. 일찍이 청년 시절에 발표하여 세간에 외면 받았던 이 작품을 그는 노년까지 붙들고 개작하여 명작을 낳은 것이다. 하인리히가 그림에 관심을 쏟았던 것처럼 켈러 자신도 인정받는 화가가 되기 위하여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전화위복이라고 하겠다. 그는 결국 후대에 추앙받는 작가로 남게 되었다. 이제 그의 명성이 국내에도 퍼지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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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9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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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가라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제13회 동리문학상 수상작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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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위태하다. 그리고 처절하다.

한강의 신작 장편소설을 읽으며 연상되는 단어가 이러하다. 한강은 예술과 통속의 절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아슬아슬함을 자아내는 감각적 즐거움이 그의 작품에서 물씬 배어나온다.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몽고반점>의 감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출발은 평범하다. 전개는 무난하다...결말은 상궤를 벗어나 참혹하다.

화가 서인주의 죽음과 강석원의 글에 대하여 작중 ‘나’인 이정희의 심경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누구보다도 서인주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고,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다고 내적으로 자신하였던 나, 따라서 강석원에게 딱 부러지게 응대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녀와 서인주의 삼촌 간에는 남모를 추억이 배어있지 아니한가. 그래서 그녀가 몰랐던 서인주에 대한 다른 사실을 접하였을 때 반응은 한마디로 상실감이었다.

“입술을 악물었다...모든 것을 잃은 걸 같았다. 모든 것에 굴복한 것 같았다. 모든 것에 버림받은 것 같았다.” (P.149)

그리고 ‘나’는 서인주의 자살이 사실이 아님을 입증하고 강석원의 책에 반박하기 위하여 서인주와 관계된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서서히 드러나는 친우 인주의 숨겨진 과거. 따라서 일부 평자의 말대로 탐정소설의 성향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문득 궁금하다. ‘나’와 서인주의 관계가 얼마나 깊고 끈끈했기에 그토록 필사적으로 인주의 마지막과 죽음에 몰입하고 있는지를. 통상적인 절친한 교우의 수준에서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지 자신의 일상을 중단하면서 이미 죽은 이를 위하여 타인의 생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상례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나’는 그토록 깊숙한 관계를 서인주와 맺고 있었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나’의 심리적 소유욕과 자신감에 상처와 배반감으로 함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나는 인주를 몰랐다.
인주가 나를 몰랐던 것보다 더.

인주는 나에게 한번도 어머니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삼촌에 대해 인주가 말할 수 있는 상대가 있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P.241)

소설은 ‘나’의 현재 상황과 ‘나’와 서인주의 과거가 교차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나’의 힘겨운 노력의 정당성을 지지하게끔 유도한다. 한편 서인주의 삼촌의 죽음, 인주의 부상, 그리고 화가로의 전이 등을 통해 서인주의 삶이 결코 안온하고 밝지만은 않다는 것을 조금씩 독자에게 비쳐준다. 감질날 정도로 조금씩, 그리고 독자가 다가올 사건 전개를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단편적으로.

상류와 중류의 거칠고 굴곡진 흐름을 마친 강물이 보다 느릿하고 유유한 하류로 흐르리라 생각하고 있을 때 난데없이 급류와 암초가 난무하는 협곡을 만나면 모두들 당황하게 된다. 한강이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결말이 꼭 그러하다.

우연과 필연으로 만나게 된 상담소장과의 조우. 그리고 그로부터 알게 된 서인주의 어머니와 상담소장 자신, 그리고 그들이 학생시절 가르치던 과외학생과의 천길 낭떠러지 위의 병적인 관능의 죽음에 이르는 일탈.

작가는 서인주의 죽음이 자살인지 아니면 명확히 알려주지 않는다. 그것은 자살일 수도 자살이 아닐 수도 있다는 암시와 함께.

오히려 이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결국 강석원의 행동은 서인주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의 근원에 철저히 회귀하도록 하는 매개체의 역할이었다. 사십년 전 진수 학생과 상담소장의 불완전한 마무리를 그는 깔끔하게 수행하였다. 그리고 그녀를 하나의 신화로 부활하여 영생시키려고 한다. 따라서 이를 가로막는 ‘나’의 존재와 행위를 그는 용납할 수 없다. 그 아니면 ‘나’ 둘 중에 하나는 살아남을 수 없다. 나는 머리 속으로 그를 죽이고 싶었지만 그는 머리 밖에서 실제로 ‘나’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것이 둘의 차이점이다. 그래서 독자는 강석원을 증오할 수 없다. ‘나’의 처지에 전적으로 동정하지 않는다.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면서 우울한 상념에 빠져든다. 한강의 글쓰기 양식이 원래 이러한가. 극한의 상황으로 인물과 독자를 몰고 가는 것. 물론 절대 극한에서 인간은 솔직하고 겸허해지며, 여기서 종교가 비로소 탄생한다.

그런데 꼭 이렇게 백천간두에서 외줄타기를 해야만 할까. 병적인 집착이 그의 주인공의 트레이드마크임은 섣부른 속단일 수 있겠으나 자꾸만 뇌리에서 맴도는지.. 정녕 알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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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9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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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
김인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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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국내 역사소설의 흐름은 김훈을 기점으로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그전까지 역사소설은 박종화, 유주현 등으로 이어지는 소위 사실주의 역사소설로 부를 수 있다. 정사를 중심으로 야사를 섞지만 본질은 사실(史實)에 두고 작가의 상상력은 여백을 채우는 데 있다. 한편 김훈 이후 심리주의 역사소설은 시대와 장소를 과거에서 따왔지만 역사적 사실(史實)의 정밀한 재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위급하고 절박한 상황에서 선택을 해야만 하는 개인의 고뇌와 심리적 흐름을 주로 서술한다.

김인숙의 <소현>은 그런 점에서 소위 김훈 류의 역사소설이다. 작가는 병자호란 후 청에 대한 항복의 대가로 심양에 볼모로 잡힌 소현세자의 상황과 내적 갈등을 꼼꼼하게 묘사한다.

숭명배청(崇明排淸)의 조선을 존청(尊淸)으로 포장 해야 하는 소현.
적에게 잡혀와서 적의 쇠망을 기원하나 나날이 강성해지는 적을 바라보는 소현.
인질에서 풀려나려면 적이 강해야 하나 그러면 조선에서 설 자리가 없는 소현.
청의 우의와 임금의 의심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해야 하는 소현.

그래서 작중의 소현은 고독하다.

한편 소현에 비친 임금도 그러하다. 타인의 의지로 임금이 되었고, 오랑캐 왕 앞에 머리를 조아렸으며, 언제 옥좌에서 내몰릴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임금. 끝내 아들마저 의심의 눈초리로 흘겨보아야만 하는 임금.

적의 수장 도르곤(섭정왕)은 어떠한가. 임금의 귀염 받는 막내아들로 태어나 죽음보다 힘든 삶을 겪은 왕자. 황상 대신 황제를 만드는 킹메이커를 선택한 이. 살아서 황제를 능가하는 권세를 누렸으나 죽은 후 몇 년 안 되어서 부관참시와 멸족을 당한 이. 그도 또한 고독하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은 모두 고독하다. 만상, 막금, 요망한 여인 흔... 따라서 소설 자체가 고독하다. 이 작가의 글쓰기 유형이 원래 고독함의 원천일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시대적 상황은 그만 나열하고 소설적 재미를 헤아려본다. 이 책은 글 읽는 속도감에서 한참 뒤처진다. 흡입력이 약하다는 것이다. 작가는 등장인물과 둘러싼 정경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독자는 소현의 고독에 동정할 수는 있어도 공감할 수 없다. 만상과 막금과 흔의 처지를 욕하거나 딱해 할 수는 있어도 더불어 웃거나 울지 못한다. 지나치게 건조하다. 이것이 김훈의 성공한 작품과 차이점이다. 김훈은 치열한 상황 및 심리묘사로 극적 긴장을 배가하고 여기에 현학적인 문체로 작품에 윤기를 덧붙인다.

김인숙의 작품을 많이 접하지 못하여 아직 그 특성을 모른다. <바다와 나비>는 가물가물하고 <칼날과 사랑>은 너무 멀리 있다. 근년 들어 더욱 주목받고 있는 작가 김인숙. 나의 촌평이 그저 허접 데기에 불과하고 대내외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게 되기를 바란다. 소설의 근원은 상상력에 있다. 그리고 작품이 작가의 손을 떠나면 이해와 오해는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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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9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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