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재판관
박철 지음 / 연극과인간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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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1편으로 큰 성공을 거둔 세르반테스는 자신의 마지막 작가적 역량을 발휘하여 <모범소설>등에 이어 <돈키호테>2편과 함께 <8편의 희극과 8편의 막간극>을 1615년에 발표한다.

<8편의 희극과 8편의 막간극>은 세르반테스가 꾸준히 써왔던 극작품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것으로 연극 장르에 대한 작가의 총결산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막간극’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막간극은 귀족들의 연회 도중 휴식시간에 상연하거나 긴 연극의 막 사이에 분위기 전환용으로 상연하는 짧은 극작품을 가리킨다. 어떻게 보면 장편 연극에 대응되는 단편 연극이라고 하겠다.

8편의 막간극은 다음과 같다.
–  이혼 재판관
–  뜨람빠고스라는 홀아비 뚜쟁이
–  다간소 마을의 시장선거
–  성가신 감시
–  가짜 비스까야 사람
–  기적의 인형극
–  살라망까 동굴
–  질투심 많은 늙은이

각각의 작품은 짧은 분량에도 온전한 개성을 드러내며 성격이 명확하다. 더욱이 돈키호테 정신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작가는 고상하고 젠체하는 귀족과 왕정에서 멀리 떠나 범인(凡人)과 속인(俗人)의 세계로 거침없이 뛰어든다. 그가 보는 세상은 부조리하고 허점투성이다. 따라서 조소와 해학을 아끼지 않지만 그가 보는 시선을 결코 차갑지 않다. 그는 당대의 평범한 사람들에 따뜻한 애정을 품고 있다. 그래서 작중에서는 악인도 악인답지 않으며, 인간은 선과 악이, 그리고 고결과 비속이 혼재된 존재임을 은연중 깨닫게 된다.

<이혼 재판관>에는 이혼 허가를 요청하는 네 쌍이 등장한다. 나이든 남편에 대한 성적인 욕구 불만, 남편의 생활 무능력, 상호간의 증오, 창녀와 술김에 결혼한 인부의 아내의 나쁜 성격과 행실 등 그 사유는 다채롭기 그지없다.

재판관은 “이런 이유가 이혼 사유가 된다면 끝없는 이유를 대며, 결혼의 속박에서 지을 털어놓을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소?”(P.15)하며 이들을 만류한다. 반면 서기는 “그렇게 되었다가는 여기 이 법정의 서기들과 검사들은 굶어죽게요? 그래서는 안 되지요. 오히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혼신청을 했으면 좋겠습니다.”(P.17)라는 입장이다.

결론은? “제 아무리 나쁜 부부라도 가장 좋은 이혼보다는 낫다.”(P.18)는 악사의 노랫말.

과연 그럴까? 가장 좋은 부부를 능가하는 것은 없겠지만, 때로는 가장 좋은 이혼이 인간관계의 파탄을 막아줄 수도 있는 법.

<뜨람빠고스라는 홀아비 뚜쟁이>는 창녀와 기둥서방이 등장한다. 당대는 몸을 파는 직업에 대하여 커다란 거부감을 지니지 않은 듯하다. 인간의 불완전함에 대한 겸손한 순응이랄까. 뜨람빠고스는 자신의 창녀의 죽음으로 상실감에 빠져있다. 뜨람빠고스와 다른 뚜쟁이 치끼스나께 간의 대화는 그야말로 진지한 해학의 참면모를 보여준다. 뜨람빠고스가 진정으로 뻬리고스의 죽음을 슬퍼했을까? 천만에, 단지 그는 수입원이 사라진 게 아쉬웠을 뿐이다. 그래서 새로운 창녀를 고른 후 파티를 벌인다. 이때 레뿔리다의 애인이었던 건달 에스까라만이 증장하여 한바탕 걸쭉한 춤과 노래로 막을 내린다.

대체 이게 뭐냐고? 막간극에서 뭔가 진지한 것을 기대하지 말자. 막간극의 용도가 무엇인지 벌써 잊었는가?

<다간소 마을의 시장선거>는 시장선거에 출마한 4명의 후보자를 학사와 서기, 시의원이 면접시험 하는 희화화하고 있다. 두 시의원 빤두로와 알론소의 말꼬리 잡는 험담은 그들의 수준을 여실히 보여주는데, 후보자들도 만만치 않다. 암송만 잘하는 이, 뛰어난 포도주 맛 감별력, 새총 맞추기에 탁월한 솜씨 등.

분위기는 뻬드로 데 라나의 진지하며 성실한 시장 직무관 피력으로 사뭇 엄숙해지지만 곧 등장한 집시들의 가무로 흐트러진다. 지켜보던 성당지기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던지자 바로 치도곤을 당하고 쫓겨난다.

“정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아는 사람들에게 맡기는 걸세. 바로 우리 같은 사람들이지.”(P.58)

복합적 결말이다. 막간극의 재미를 잃지 않으면서 종교의 정치 간섭에 대한 거부감, 어리석은 정치인들에 대한 반감, 그리고 소박한 정치에 대한 소망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성가신 감시>는 군인이 자신의 연정을 받아들이지 않는 여인의 집 밖을 지키고 서서는 경쟁자의 출입을 일체 금지하는 내용이다. 구두상인과의 얼토당토 않는 흥정이 웃음을 선사한다. 결국 하녀는 집주인 앞에서 군인 대신 성당지기를 선택하고, 투덜과 자축의 말로 극이 끝난다.

<가짜 비스까야 사람>은 두 젊은이가 자칭 영특하다고 하는 세비야 출신의 매춘부를 놀려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유는 묻지 말자. 막간극에서 그런 질문은 예의에 어긋나므로. 가짜 비스까야 사람으로 위장하고 끄리스띠나에게 값비싼 목걸이를 담보로 맡겨 공돈을 벌 수 있겠구나하는 헛된 희망을 품게 한 다음, 목걸이가 가짜로 바뀌었다며 소동을 벌인다. 매춘부 여인은 당당하게 시장 앞으로 나가 진실을 주장할 수 없다. 직업적 연유로 시장이 그녀를 나쁘게 인식하고 있는 판국이다. 결말은 놀림이었음을 밝히고 저녁식사에 초대하는 해피엔딩! 만약 놀림이 아니고 진짜 발생한 일이라면 끄리스띠나의 앞날은 샛노랗게 변했을 터인데 장난이 죄없다고 누가 주장하는가?

<기적의 인형극>은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과 유사한 제재를 다룬다. 아무것도 상연되지 않는 인형극 무대, 하지만 관객들은 기적이 보이는 양 연출가의 대사에 맞장구치기 급급하다. “기독교로 개종한 유태인의 피가 조금이라도 흐르거나, 합법적인 결혼을 한 부모에게서 임신되고 출생되지 않은 사생아들”(P.110)로 비난받을까 두려워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 게 보이니 그야말로 ‘기적의 인형극’이 아닌가?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아무 사정도 모르는 기병대 장교를 저주받은 창녀의 아들이나 천박한 유태인으로 마음껏 희롱한다. 바보들의 행진이다!

“당신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것을 보니, 그 치들 중 하나가 틀림없소!...개종한 유태인이나 사생아 같은 자들은 용감하지 못하지! 따라서 우리는 말하지 않을 수 없소. 당신은 그런 인간들 가운데 하나요. 그들 중 하나야.” (P.123)

또 하나의 바보들의 행진이 있다. 바로 <살라망까 동굴>이다. 첫 장면은 애틋하지 그지없다. 나흘간 집을 비우는 남편의 부재를 눈물로 슬퍼하며 기절까지 하는 아내, 진정한 부부애의 전형이다. 하지만 남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 여자의 반응은?

“꺼져 버려, 다시는 돌아오지 말아! 사라져버리고 마는 연기처럼!” (P.128)

아내는 정부(情夫)를 불러 즐거운 밤을 보낼 생각에 하녀와 더불어 몸이 달아있다. 하룻밤 유숙을 청하는 가난한 살라망까 출신의 대학생의 등장. 남편의 갑작스런 귀가는 이들을 일대 혼란에 빠트린다. 그리고 대학생은 살라망까 동굴에서 터득한, 인간의 형상을 한 악마를 불러오는 기술을 능청스러운 연기한다. 졸지에 악마가 돼 버린 두 명의 정부(情夫)! 순진한 남편은 모두를 식당으로 안내한다.

인간 악마와 남편 빤끄라시오 간의 대화가 포복절도하게 만든다. 악마가 식사를 하며, 노래도 부르며, 유명한 춤도 잘 춘다는 사실에 남편은 놀란다. 악마는 더 이상 무서운 존재가 아니고 친근한 동네 이웃과도 같이 대화를 주고받는다.

<질투심 많은 늙은이>는 나이어린 여성과 결혼하여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늙은이와 이를 속여 외간남자와 바람을 피우는 젊은 아내에 관한 이야기다. 늙은이는 일체 외출을 금하고 문과 창문에 자물쇠와 철책을 설치하며, 이웃조차도 대문을 들어오지 못하게 철저히 단속한다. 그에게 도냐 로렌사는 늘그막의 “여생의 동반자이자 선물”(P.151)에 불과하다.

인간의 근원적 욕구는 억누를 수 없는 법, 그래서 도냐 로렌사와 하녀는 이웃인 오르띠고사와 짜고서 한 사내를 몰래 집안으로 들이고 굶주린 아내는 회포를 푼다. 그림 속의 사내와 현실의 사내. 남편을 속이기 위한 아내와 하녀, 오르띠고사 간의 절묘한 화음은 부조화 속의 조화를 연상시킨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에서 유명한 4중창 장면의 분위기와 흡사하다.

세르반테스가 가벼운 마음으로 쓴 짤막한 단편극에 진지하고 심오한 사족을 굳이 덧붙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정치와 사회제도의 부조리, 결혼제도의 모순과 불평등, 억압당하는 여성의 사회적, 가정적 지위 등 이것저것 주워오면 꽤나 그럴듯하다.

세르반테스는 요컨대 외형적 가면과 속박을 벗어난 소위 생얼의 인간상을 드러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것은 쑥스러움과 재미를 동시에 관객에게 안겨준다. 물론 비평가들의 현학성도 충족시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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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만시아.사기꾼 페드로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13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김선욱 옮김 / 책세상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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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반테스는 동시대의 셰익스피어와 함께 세계 문학계를 대표하는 거장이다. 그의 <돈키호테>는 서양문학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일컬어진다. 그것이 우리가 아는 세르반테스의 거의 전부다. 혹 좀 더 관심 있는 독자라면 <모범소설> 정도 이름을 들어봤을 뿐으로,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는 거의 동일어로 취급받는다.

이런 사실을 세르반테스가 알면 몹시 슬퍼할 것이다. 당대 스페인 문학의 황금시기에 많은 작가처럼 세르반테스도 극작에 상당한 심혈을 기울였다. 비록 다수가 소실되고 현전하는 것은 몇 편 되지 않지만, 그에게서 극작을 빼놓는다면 그의 문학세계의 한 축을 빼놓는 셈이다.

세르반테스의 사고와 문학은 세금징수관으로 일하던 중 겪게 되는 억울한 옥살이로 급격히 변모한다. 전기가 체제 긍정적, 애국적 경향이라면, 후기는 당대의 부패와 타락을 사회비판과 풍자 등으로 폭로하고 있다.

<누만시아>는 애국주의의 극적인 발로의 대표작이다. 누만시아는 오늘날 스페인 중북부 소리아 주에 해당하며, 스페인의 원류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승승장구하던 로마 공화국에 의하여 누만시아가 점령당하는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세르반테스는 누만시아인의 저항과 용기를 예찬하고 그들의 비극이 후세 스페인 제국의 영광의 밑거름이 되었음을 드높여 외친다. 세르반테스는 절정을 구가하던 펠리페 2세 치하의 스페인에 대한 무한한 자긍심을 문학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누만시아인의 강력한 저항으로 장기간 공격에도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총사령관 스키피오는 성을 완전히 포위하고 물자 출입을 단절시킴으로써 고사시키는 작전을 사용한다. 굶주림으로 허덕이는 성 안, 사람들은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가진 것을 모두 불태우고 스스로를 절멸시켜 로마인들에게 텅 빈 성에 들어오게 함으로써 전쟁의 목적을 헛되이 하며, 누만시아인의 불굴의 기개를 떨쳐보인다.

극한의 상황에서 기아에 쓰러져가는 성안 사람들. 연인 리라를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성 밖에 나가 식량을 구한 후 죽어가는 모란드로. 모든 것을 버리자는 테오헤네스의 의견과 이의 실행, 그리고 처절한 죽음과 죽임의 잇달음. 과연 이것이 연극의 제재와 전개 상 적합한 지에 대한 일말의 의문마저 들 정도다.

하지만 이들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 마법사 마르키노는 어찌할 수 없음에 사전에 목숨을 끊지만, 인격화된 스페인과 두에로 강은 오늘의 고통과 비극이 내일의 영광을 예언하고, 역시 인격화된 명성이 이를 반복하여 증언한다.

“이 비할 데 없는 업적으로 인해 이 조상들의 강인한 피를 이어받은 후예들은 미래에 강한 스페인을 만들 것이다...결코 정복되지 않았던 기상과 용기는 계속 전해져야 한다.” (P.120)

그런데 전원 분사를 선택한 누만시아인의 선택은 과연 올바른 것인가? 스키피오와 로마세력은 폭압적 정복자가 아니다.

“내가 그리도 야만적이고 거만하며 오직 죽음만을 생각하는, 자비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이던가? 혹시 내가 피정복민을 그리도 매몰차고 가혹하게 다루는 사람이던가? 누만시아는 나에 대해 너무나 잘못 알고 있었어. 나는 승리 후에 패배자를 용서해주는 사람인데...” (P.114)

누만시아인은 죽음으로써 그들의 대담성과 불굴성을 드러냈지만, 후대 스페인인과 그들은 아무 혈연적 연관성도 없다. 같은 땅에 시대를 달리하여 살았다고 동일한 민족이라고 할 수 없다. 차라리 항복의 치욕을 무릅썼더라면 민족의 삶은 존속되고 후일 재기의 기반을 마련하였을 것이다. 테오헤네스의 절규(P.107)와 누만시아인의 집단자살행위는 인간성의 모짊과 집단 광기를 새삼 상기시켜 전율케 한다.

전자와 달리 <사기꾼 페드로>는 조금 더 익숙한 세르반테스의 모습에 가깝다. 사회 체제와 지배층에 대한 풍자와 비판, 그것은 웃음으로써 경각심을 일깨우는 세르반테스의 주특기가 아니던가?

무엇보다도 주인공 격인 페드로 데 우르데말라스가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는 사기꾼으로 분명 악당에 속한다. 하지만 그는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속성을 지닌 복합적 유형이다. 피카레스크 소설의 주인공처럼. 그래서 피카레스크 희곡(P.278)으로 불리는 것도 타당성을 지닌다.

페드로가 거친 직업만 열거해도 그의 인생편력을 알 수 있다. 버려진 아이로 시작된 그의 삶은 고아원을 나와 견습 선원, 소매치기, 일꾼, 거짓 사제, 포주, 수송병, 장님 시종, 노새 몰이꾼, 야바위꾼을 거쳐 시장의 보좌관을 하고 있다. 그는 자연스레 세상의 악과 타락에 물들었으나 그의 본성은 선의를 지니고 있다.

“페드로가 비록 사기꾼이긴 해도 부정적으로만 그려지지 않고, 어떠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항상 새로움을 찾아 나서는, 밉살스럽지 않고 오히려 친근감 있는 낙천적인 인물로 제시”(P.278)되는 것은 바로 페드로가 스페인 민중의 생동하는 자유분방함을 대변하는 인물인데서 연유한다.

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다. 왕이 되거나, 아니면 수도자나 교황일 될 운을 타고났다고 믿고 시장 보좌관을 그만두고 예언을 좇아 집시의 일원이 된다(P.155). 집시가 되어 벨리카를 만나고 이를 계기로 왕에게 극단을 만들어 줄 것을 요청하여 승낙 받는다. 이제 그는 무대 위에서 꿈꾸던 모든 직분을 다 해볼 수 있게 되었다.

반면 벨리카는 긍정적인 성격 유형이 아니다. 뛰어난 미모를 자랑하지만 집시 신분에서 자신의 출생에 대해 망상을 품고 있다. 후에 비록 우연한 계기로 사실로 드러나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는 분명 망상이다. 그리고 왕족으로 탈바꿈한 후 집시들을 외면하여 자신의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표출한다.

이 작품에는 두 가지의 에피소드가 부가되어 있다. 하나는 클레멘테와 클레멘시아의 결혼이며, 파스쿠알과 베니타의 결합이 다른 하나다. 어찌 보면 작품의 큰 줄기와는 무관한 듯하지만, 첫부분의 크레스포 시장의 송사와 함께 모두가 페드로의 재치와 선의를 드러내는 장면이다. 그리고 스페인 민중의 꾸밈없는 소박함을 엿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사기꾼 페드로>는 가볍고 재미있는 희극으로서, 소설 <돈 키호테>의 정신이 여기에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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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
박태균 지음 / 책과함께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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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은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좀 늦었지만 일련의 한국전쟁 관련 서적을 읽어볼 계획이다. 왜냐고? 그건 내가 이 나라의 국민이며 이 나라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타이틀 부제처럼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은 전쟁’이며, ‘끝나야 할 전쟁’이다. 우리나라의 미래는 한국전쟁의 진정한 종전 이후에 가능하다.

한국전쟁, 솔직히 아직은 6·25사변이라는 명칭이 더 입에 익숙하다. 수십 년간 교육받은 결과는 하루아침에 바꿔지지 않으니까. 한국전쟁은 종결된 전쟁이 아니며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리고 잊혀진 것도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여전히 우리의 가족 중 연장자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살아왔다. 나는 해당 없다고 섣불리 단언하지 말라. 우리 현대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방면에서 좋건 나쁘건 한국전쟁과 그 후폭풍에 압도적인 영향을 받아왔다.

그런데 우리는 한국전쟁을 잘 알고 있는가? 교과서에서 나열된 단편적인 상식, 그리고 가끔씩 TV에서 보여주는 낯선 흑백화면들. 무척 잘 알고 있을 듯하지만, 사실은 대부분 혹은 전혀 실상을 알지 못한다. 그 원인은 무엇이고, 전개과정은 우리가 알 듯 영웅적이었는지, 휴전 협정과 그 이후는 어떠했는지 말이다.

저자는 대단히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가급적 한 발짝 떨어져서 차분한 어조로 한국전쟁에 관한 각종 주장과 학설들을 소개하고 비판한다. 물론 그도 뜨거운 한국 사람인지라 부분적으로 감정이 치솟는 것을 억제하지 못하는 때도 있다. 그것을 단점으로 칭한다면 가혹한 일일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여기서 한국전쟁에 관한 모든 것을 다루려고 하지 않는다. 개론서의 미덕에 충실하다. 여기서 드라마틱한 전쟁 장면의 전개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것이다. 나도 조금은 실망하였다. 하지만 작가의 진짜 관심은 전쟁 그 자체가 아니라 전쟁으로 피해 받은 인간과 사회이며, 여기에 안타까움과 애틋함을 감추지 않는다.

한국전쟁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과거 분분한 논의가 있었다. 전통적인 전격 남침설에, 브루스 커밍스의 유명한 저작에 힘입은 수정설, 그리고 일부의 북침설 등. 그동안 학교에서 교육받은 원인은 물론 전격 남침설이다. 피에 굶주린 북괴가 전격적으로 38선을 넘어와 평화롭게 살아가던 남한을 일대 아수라장으로 몰고 갔다는 것이다.

브루스 커밍스의 공헌은 한국전쟁에 대한 기원을 단지 1950년에 맞추었던 인식을 1945년으로 끌어올린 데 있다. 해방과 곧 이은 분단, 그리고 분단의 고착과정이 전쟁의 진정한 원인이며, 1950년은 고조된 긴장이 분출된 시점이었다. 저자 박태균은 좌우익의 대립이라는 내적 기원론과 미국과 소련에 귀인하는 외적 기원론을 세심하게 분석 및 비판하고 있다. 부분적 책임은 있지만 전체를 귀인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다.

“한국전쟁의 기원을 정치세력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당시 정치세력들 사이에는 갈등의 골을 메울 수 있는 공통분모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P.55)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식민지 지역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이라는 문제에 부딪혔던 것이다...미국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정책을 실시해야 했다. 그리고 그러한 정책이 한반도의 분단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P.71)

“문제는 외세가 어떻게 한 나라를 분단시킬 수 있었는가를 해명하는 점이다. 이는 외세의 힘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분단을 하려는 외세의 힘에 부합하는 내부의 힘이 있어야 한다. 앞서 살펴본 다양한 정치세력의 갈등, 그리고 그 갈등을 통합으로 풀기 보다는 외세와 결탁하여 특정 지역에서라도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던 정치적 이해관계가 바로 분단의 충분조건이 되는 것이다.” (P.81)

우리 현대사의 비극은 과거사가 청산되지 못한 상황에서 민족보다 개인의 야망이 우연성과 결부하여 필연성으로 나아갔다는 점이며, 그 여파는 21세기의 대한민국을 여전히 옥죄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재평가하자는 논의를 제기하고 있지만,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가 아니라, 올바른 건국을 망치고 민족과 국가에 영영 씻어낼 수 없는 상처를 만든 장본인이라는 명약관화한 사실은 결코 외면되거나 은폐할 수 없다.

“이승만 정부의 북진통일론은 이승만이 주장한 민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보여준다. 그가 주장한 민족은 보통 국민들로 구성된 민족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민족 구성원들을 또다시 죽음으로 몰아넣는 북진통일론을 주장하지 말았어야 했다. 민족 구성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 대관절 어떤 민족을 구하려 했단 말인가? (P.297)

저자는 분단과 분단극복 활동에 특별히 한 장을 할애하여 서술하고 있다. 저자의 좌우합작세력에 대한 지지와 여운형의 실패에 대한 아쉬움은 무엇보다 그것의 성공이 분단의 조기 극복과 장차 다가올 거대한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는 유일한 해법이라는 인식에서이다. 하지만 역사는 주전파와 매파의 선명성을 선호하며, 주화파와 비둘기파는 언제나 회색분자로 매도당하기 십상이다.

“여운형은 통일국가가 수립되었을 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정치인이었다. 통일국가가 수립되었을 때 다양한 정치세력들을 포괄하면서 미국과 소련의 합의를 끌어낼 인물이 그 말고는 없었다.” (P.107)

“역사에는 결과론적으로만 평가해서는 풀리지 않는 측면이 있다...분단국가가 수립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국민 정서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당시 좌우합작운동과 남북연석회의는 사회적인 공감대를 충실하게 반영한 것이었다.” (P.109)

한국전쟁은 기본적으로 내전이다. 전개과정에서 미군과 유엔군의 참전, 중공군의 참전이 잇달아지면서 국제전으로 확전되었지만, 발발 최초에는 남과 북의 군대 간 힘겨루기였다. 미국과 소련의 정보 공개 이후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김일성의 남침 요청에 스탈린은 매우 망설였다. 그러다가 1949년 이후 정세 변화에 따라 개전해도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고, 단시일 내에 전쟁을 종결지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전쟁을 승인하였다.

“전쟁 계획을 입안한 것은 북한이었다. 다만 개전 후 외부 세력이 개입할 경우 북한 단독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는 어렵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북한 지도부는 동분서주했다. 소련과 중국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P.170)

“전쟁은 기습적이고 신속해야 합니다. 남조선과 미국이 정신을 차릴 틈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강력한 저항과 국제적 지원이 동원될 시간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P.167)

전쟁의 전개과정을 저자는 남과 북의 각각 실패과정으로 파악한다. 북한은 당초 구상대로 조기에 남한을 통일하는데 실패하였다. 그리고 미군은 간신히 낙동강방어선을 확보하고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북한국의 허리를 끊는데 성공했지만 완전히 제압하는데 실패하였고 무분별한 북진으로 중공군의 참전과 뼈아픈 후퇴를 겪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한국전쟁의 전개과정에 대한 서술은 대개 ‘성공’의 과정으로만 그려져 왔다...그러나 이제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참혹한 이 전쟁은 앞에서 보았듯이 실패의 연속과정이었다. 그렇기에 어느 누구도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P.243)

그런데 전쟁은 단순한 정치적 게임이 아니다. 전쟁의 피해는 고스란히 군인과 민간인에게 돌아간다. 대개의 경우 그들의 피해는 드러나지 않거나 공론화되지 않을 뿐이다. 최근에서야 노근리 학살사건 등 민간의 전쟁 피해의 실체가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저자는 민간인 피해와 세균전 의혹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지만, 이는 개론적 차원에 국한하고 있다. 다른 저자의 <전쟁과 사회>가 전자에 대한 본격적 연구서이며, 후자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 연구가 진행되지 못하였음을 토로한다.

“불행한 사실은, 실패의 피해는 전적으로 병사들이나 후방의 민간인들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전쟁 지휘자들이 실패에 대해 지는 책임은 지극히 적거나 또는 전혀 책임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 (P.244)

“전쟁에서 가장 직접적인 피해를 입는 것은 전선에서 싸우는 군인들이다. 그러나 전쟁은 전선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후방에서도 벌어지기 때문에 군인 아닌 민간인도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민간인학살과 같은 피해도 있고, 정치적 갈등이나 경제적 곤란 같은 피해도 있다...민간인학살과 이산가족 문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P.328~329)

한국전쟁의 결과는 무수한 인명과 막대한 재산의 손실만이 아니다. 전쟁은 잠정 분단을 영구화하였고, 이후 미국과 소련의 외교정책에 영향을 미쳐 국제 정세는 이데올로기 간 첨예한 냉전 체제가 강화되었다. 게다가 남과 북은 모두 김일성과 이승만에 의한 독재 체제가 구축되어 북쪽에서는 여전히 그리고 남쪽에서는 최근까지도 억압이 끊이지 않았음을 상기해야 한다.

“한국전쟁은 분단을 고착화시켰다. 단지 눈에 보이는 분단을 넘어서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분단을 고착화시킨 것이다.” (P.360)

“한국전쟁의 경험은 베트남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을 가로막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점 또한 한국전쟁이 미국의 대외정책에 미친 중요한 변화가 될 것이다. 38선 이북으로의 진격이 가져왔던 엄청난 실패는 그 후 10년이 지나도록 미국이 제3세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P.362)

이 책이 한국전쟁 전반을 아우르는 총서가 아니다. 400면 남짓한 분량으로 우리 역사와 사회에 처참한 상흔을 남긴 일대 전쟁의 전모를 어찌 담아내겠는가. 그래서 저자는 중요한 쟁점을 중심으로 논점을 명확히 하거나 과거의 관습적 인식에 날카로운 분석의 칼을 던지고 있다. 이를 통해 한국전쟁의 성격이 무엇이고 그 여파에 오늘날까지 드리워져 있음을 독자에게 일깨우고 싶었던 게 아닐까?

*  앞으로 천천히 읽어나갈 한국전쟁 관련 책들이다. 앞으로 갈길이 아득하지만, 우리 현대사를 올바르게 인식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콜디스트 윈터 (데이비트 핼버스탬) : 미군의 시각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백선엽) : 한국군 최고지휘관의 시각
마지막 한발 (앤드류 새먼) : 영국군의 시각
한국전쟁1 - 맥아더·클라크·리지웨이 보고서 (미 해외참전용사협회) : 미군 최고지휘관의 시각
전쟁과 사회 (김동춘) : 민간인피해
한국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 (A.V.토르쿠노프) : 전쟁 발발의 기원
한국전쟁 (정병준) : 한국전쟁의 총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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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할 수 없는 사랑의 가벼움
마리아 데 사야스이 소토마요르 지음 / 현재 / 1999년 10월
평점 :
절판


17세기 스페인 여류 문학가 마리아 데 사야스 이 소토마요르. 그녀는 세르반테스의 후세대로서 보카치오와 세르반테스의 강한 영향을 받아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독자적 작품을 남겼다. 각 10편으로 이루어진 <Novelas amorosas y ejemplares>(1637)와 <Desengaños Amorosos>(1647)이 그것이다. 각각 ‘사랑의 모범소설 또는 사랑에 눈먼 이야기’와 ‘사랑의 환멸’로 번역될 수 있다.

특히 전자는 작품명에서 세르반테스의 <모범소설>의 직접적 영향을 드러낸다. 세르반테스를 제외하고 국내에서 그다지 없는 스페인 황금세기 문학, 더구나 여류작가의 작품이 부분적이나마 출간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경이롭다.

이 책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의 가벼움>은 바로 <Novelas amorosas y ejemplares>에서 5편을 발췌하여 번역한 것이다.

수록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용서할 수 없는 사랑의 가벼움
- 나는 모자란 여자가 더 좋아
- 속고 속이는 사랑의 종말
- 대가없는 사랑은 없다
- 순결한 사랑은 마법보다 강하다

전체적으로 데카메론 유형의 가벼우면서도 당대 현실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필치가 자못 흥미롭다. 읽는 데 있어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다. 더구나 제재가 영원한 테마 ‘사랑’에 관한 것이므로.

흔히들 기독교적 가치관의 강력한 지배와 명예와 정조 관념이 투철한 당대 스페인 사회(비단 동시대 유럽도 마찬가지지만)에서는 귀족층의 경우 도덕적으로 순결성이 유지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이 한낱 착시에 불과함을 이 작품은 일거에 산산조각 낸다. 더구나 여성에 의한 적극적 고발이기에 참신함과 설득력을 배가한다.

그럼으로써 옮긴이의 말마따나 “외모와 돈으로 표상되는 공허한 사랑의 굴레는 현대 사회의 특유한 현상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한 인간 사회의 변함없는 엄연한 진리”(P.236)임을 깨닫게 된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랑의 가벼움>에서 아민타의 순결을 빼앗고자 하는 하신토를 돕는 정부 플로라의 마음가짐이 이채롭다. 연인의 바람기를 돕는다! 하지만 그녀의 속셈은 참으로 무섭다.

“플로라는 하신토가 아민타를 품에 넣고 나면 금세 지겨워할 것이고, 또 아민타도 이제 곧 불행의 늪으로 빠질 거라 생각하면서 그들을 신방으로 안내했다. 플로라는 하신토가 아민타에게는 치욕과 불행만 남기고, 다시 자기 품안으로 돌아올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P.31)

결국 아민타는 자신의 명예를 깨뜨린 하신타와 플로라를 죽임으로써 복수에 성공하고 마르틴과 결합하여 행복하게 살았다. 해피엔딩이다!

그런데 정말 행복한 결말일까? 아민타의 입장에서는 행복하다. 하지만 본인의 실수로 인한 작은아버지와 가문의 불행과 불명예는? 약혼자인 사촌 루이스의 입장은? 여기에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작가는 주인공의 운명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은연중 타인의 피해와 불운은 외면하는 당대의 세태를 여실히 보여준다.

<나는 모자란 여자가 더 좋아>의 파드리께를 비난할 수 있는 이는 없다. 그는 자신의 잇달은 체험으로 신념을 강화시켰다.

“나쁜 여자가 있으면 좋은 여자도 있다. 모두가 한결같을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그는 여자들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특히 똑똑하고 현명한 여자일수록 더 믿을 수 없다는 거였다.” (P.66)

그래서 공작부인의 설득력 있는 반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멍청한 여자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잘 모른답니다. 오히려 총명한 여자가 그런 위험에서 자신을 지킬 줄 알지요. 그건 당신의 편견이에요. 모든 이치를 깨달은 총명한 여자가 훨씬 나을 거예요.” (P.96)

파드리께는 똑똑함과 굳은 정조를 동일선상으로 파악하는 우를 범했다. 똑똑하면서 소위 헤픈 여성도 있지만 진실로 현명함과 정조를 동시에 갖춘 여성도 있는 법이다.

설사 그렇게 믿었는데 그게 아니라면? 그것은 파드리께의 깨달음에서 찾을 수 있다.

“파드리께는 그제야 똑똑한 여자들이 체면을 지킬 줄 알며, 만의 하나 체면에 어긋난 행동을 해도, 명예에 금이 가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공작부인의 말을 떠올렸다.” (P.110)

이는 씁쓸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만의 하나 정조를 깨뜨려도 남의 이목에 드러나지 않게 행동하는 게 똑똑한 여자의 미덕이다. 세상의 남자들이여 여자의 정조를 믿지 마라. 그대들이 여성들을 유혹하려 드는 것처럼.

<속고 속이는 사랑의 종말>에서는 마르코스의 불행에 불쌍함을 금할 수 없다. 마르코스의 잘못은 절정기에 다다른 스페인의 사치와 낭비의 관습에 동참하지 않은(사실은 동참할 여력도 안되지만) 사실이다. 근검절약으로 돈을 모아 오붓한 가정을 꾸리고자 하는 그를 악인으로 볼 수 없다. 따라서 우습지만 차마 웃을 수 없음에 마음이 아프다.

<대가없는 사랑은 없다>를 보면, 작가는 작품에서 권선징악을 의도하지 않음을 명확히 알게 된다. 사실 선과 악의 명확한 경계를 설정하기 어렵다. 평범한 주인공이 한 순간 악인으로 변했으나 다시 선인으로 돌아와 뒤늦은 행복을 누린다. 호르헤는 그렇게 콘스탄사를 포기하고, 테오도시아를 얻었다. 호르헤의 동생 페데리코, 질투에 눈 먼 형에게 죽임을 당하는 불운을 맞이하는 그는 쓸쓸히 잊혀졌다.

<순결한 사랑은 마법보다 강하다>를 읽으며, 후대의 제인 오스틴을 떠올린다. 사랑과 결혼이 인생의 주된 과제인 여성. 이는 여성의 지위가 남성 즉, 남편에 의해 좌우되는 현실에서 여성에게는 가장 첨예한 이해가 달린 사안인 탓이다. 현실은 17세기에도 그리고 21세기의 요즘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변함없다. 그래서 독자는 페르난도에 대한 후아나의 질긴 사랑과 운명에 동정을 보내며, 클라라의 헌신과 현명한 처신, 그리고 되찾은 행복에 박수를 보내게 된다.

마리아 데 사야스 이 소토마요르의 작품집이 온전한 형태로 국내에 출간될 수 있다면, 그만큼 우리의 문학적 이해도와 감수성을 더욱 폭넓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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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엔테오베후나 지만지 고전선집 556
로페 데 베가 지음, 김선욱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스페인의 셰익스피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황금세기 문학의 거장 로페 데 베가의 국내 유일한 번역본이다. 그는 코미디아를 1,800편, 성찬신비극을 400편 가까이 쓴 엄청난 다작가이기도 하며, 후배 칼데론, 몰리나 등과 함께 당대 스페인 희곡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린 대가이다.

‘푸엔테오베후나’는 마을 이름이다. 마을 이름을 작품명으로 삼은 연유는 단지 장소적 배경에 기인하지 않는다. 이것은 등장인물들의 갈등이 벌어지는 무대이며, 정의를 실현하는 주체이다.

대체적으로 칼데론의 <살라메아 시장>과 흡사한 구조를 보인다. 군대가 등장하고 군대 장교의 독선적이고 안하무인적 태도가 그러하다. 지배자의 폭압에 항거하는 평민인 마을사람들의 봉기, 그리고 정의 실현의 화룡점정 역할을 담당하는 국왕의 결정과 이에 대한 찬미!

15세기 스페인 통일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는데, 아직 왕권이 미치지 못하는 푸엔테오베후나는 칼라트라바 기사단령이다. 페르난 고메스 사령관은 마을의 지배자이지만, 계급관념이 확실하다. 그는 마을을 억압하면서 강제적으로 여성들을 취한다. 일개 평민의 저항은 안중에도 없고 필요하면 무력 사용도 불사한다.

하지만 명예 관념은 비단 지배층의 전유물이 아니다. 칼데론의 크레스포는 예외적 현상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은 고메스 사령관에게 명예 존중을 요구하나 비웃음만 당한다.

“시의원1: 각하께서 말씀하신 건 옳지 않습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희들의 명예를 욕보이시면 안 됩니다.
사령관: 그대들에게 명예가 있는가? 이런 칼라트라바 기사님들을 보았나?
...
사령관: 어떻든 간에 그대들의 부인들에게는 명예로운 일이오.
시장(알론소): 그런 말들이 바로 그들을 불명예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걸 믿을 사람도 없고요!” (P.66~67)

“제 아비는 명예로우신 분입니다. 각하만큼 고귀한 신분은 아닐지라도, 지금까지 살아오신 동안의 행실은 각하보다 훨씬 더 고귀하십니다.” (P.78)
마을 처녀 하신타의 정당한 반박은 사령관의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히려 병사들로 하여금 집단 강간하도록 한다. 그리고 시장의 딸 라우렌시아의 결혼식을 방해하고, 시장을 폭행하며, 신부를 겁탈하려 한다.

마을 사람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여 아래로부터의 폭동이 일어난다. 역사를 볼 때 수많은 민란과 하층민들의 저항은 어김없이 지배층의 폭압과 약탈에 기인한다. 어리석은 지배층은 자신들이 바다 위의 쪽배에 타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온화한 바람과 잔잔한 물결이 변치 않으며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어디든 나아갈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한다. 대양의 거대함을 알지 못한 채.

이 작품에 주목되는 점은 여성들의 적극성이다. 라우렌시아는 소극적인 여성상이 아니다. 그는 남자들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다가 프론도소의 용기를 보고 구애를 받아들인다. 남자들이 봉기를 할 것인지 망설일 때 라우렌시아는 산발한 모습으로 들어와 그들을 비난하여 결국 봉기의 도화점이 된다.

“당신들이 잘난 남자들인가? 당신들이 아버지들이고 친척들이냐고요? 당신들은 이렇게 고통을 당한 걸 보고 아무렇지도 않나요? 겁쟁이들! 내게 무기를 줘요...오, 신이시오, 저희 여자들 스스로가 압제자들로부터 명예와 피를 되찾겠습니다...” (P.104)
“마을의 여인들이여! 이리로 모이세요. 우리들의 명예는 우리들 힘으로 되찾아야 합니다. 모두 모이세요.” (P.105)

국왕은 평민들이 봉기하여 귀족 지배자를 처단한 것에 경악하며 심문관을 급파한다. 심문관은 마을 사람들을 가혹하게 심문하며, 특히 노약자 등을 집중 고문한다. 마을사람들의 유일한 대답은 오직 하나, 즉 푸엔테오베후나가 그렇게 했다는 것. 결국 국왕은 모두를 죽이든가 용서하든가의 갈림길에서 더 이상 수사를 진행할 수 없으므로 모두를 사면시킨다.

푸엔테오베후나가 사령관을 죽였다는 대답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한 개인의 원한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게 아니다. 지역공동체의 공분(公憤)의 대상으로 타도된 것이다. 마을과 마을사람들을 존중하지 않는 지배자는 언제든지 전례가 반복될 수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작품명이 마을과 마을의 집단정신의 상징, 푸엔테오베후나가 된 것은 매우 합리적이다.

한편 기실 국왕이라고 평민계급이 지배계급에 항거하는 것을 용서할 명분은 없다. 자칫하면 이는 왕권에 대한 도전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절대주의 왕권체제가 갖춰지지 못하고 국왕권과 귀족권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귀족권의 몰락은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된다. 실제로 푸엔테오베후나도 기사단령에서 국왕령으로 귀부를 요청하고 있다. 그래서 국왕은 모호한 사면령을 내려 무마한 것이다.

이 한 편에서 로페 데 베가의 진면목을 독해할 수 없다. 다만 이 짤막한 코미디아에서 데 베가는 장황하게 중언부언하지 않고 간명하면서도 긴박감 넘치는 극적 전개와 서술로 등장인물의 특징적인 인물 묘사와, 등장인물 간 팽팽한 대결 구도를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다. 결말에서는 정의의 승리와 국왕에 대한 찬가를 통해 당대 민중과 국왕 모두를 만족시키는 절묘함으로 그가 어떻게 국민작가의 칭호를 얻었는지 추측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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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파 2012-11-12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너무 잘 봤습니다. 이 책은 완역본인가요?

성근대나무 2012-11-14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분량이 많지 않으므로 전체가 수록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