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 이야기 파랑새 클래식 이삭줍기주니어 2
테오필 고티에 지음, 김주경 옮김, 송수정 그림 / 주니어파랑새(파랑새어린이) / 2006년 7월
평점 :
절판


화려한 표지에 단단한 제본까지 청소년용으로 나온 책으로서 꽤 고급스럽다. 요는 우리의 주니어들이 이런 책을 구입 또는 대출해서 볼 것인지에 대한 기대감인데, 이는 분명 부정적이다. 수험 공부의 압박에 시달리는 그들에게 꼭 필요하지도 않은 고대 이집트의 미라를 다룬 소설 작품이라니...

진작 테오필 고티에의 ‘죽은 여인의 사랑’을 읽은 후 그의 대표작인 <모팽 양>을 나아가는 여정의 기항지로 이 작품을 골랐다. 솔직히 시덥잖은 미라와 스핑크스, 파라오 등의 이야기는 성에 차지 않을게 분명하다. IT 혁신의 한복판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과거의 신비를 머릿속의 정다운 공상으로 담기에는 너무 이성적이다. 그나마의 상상력도 이미 영화 ‘미이라’를 필두로 한 SF 영화의 압도적 인상으로 메말라버렸다.

그럼에도 이 책을 펼쳐드는 내 심경은 오로지 작가 고티에의 글을 읽어 본다는 일말의 의무감에 기인한다. 국내에 출간된 몇 안 되는 그의 작품 중 하나를 부러 빼먹기는 싫다는 일종의 자위수단.

고티에는 소위 ‘예술을 위한 예술’의 주창자로 유명하다. 문학 작품은 순수한 예술을 반영해야지 작가의 도덕, 철학, 사상, 주장 등을 담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 순수한 예술, 그것은 언어적 표현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게 아닐까? 즉 화려하고 다채로운 수사, 형식적 구성미 등 문학의 고유미를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미라 이야기>는 액자소설 방식이다. 도굴되지 않은 이집트 무덤을 발굴하기까지의 모험이 1부를, 미라와 함께 수장된 파피루스 기록물이 2부를 이루며, 그 중에서도 타오제르의 사랑 이야기인 2부가 핵심이 된다.

고티에의 예술론은 책 전반부에 충실히 반영되어 있다. 문학 작품의 탁월성을 사물 묘사로 매길 수 있다면 단연 최상위권에 속할 것이다. 작가의 눈에 비치는 모든 사물의 철저한 세부 묘사, 사진이 없는 시기에 그림으로 생생하게 묘사하듯 글로써 그림을 대신하려는 작가의 노력이 가상하다. 다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지루하기 짝이 없음이 문제다. 소설 또는 희곡을 3단계 내지 5단계 전개로 구분하는 것은 그만큼 작품의 내적 흐름의 방향과 속도를 인정함에 있다. 그런데 고티에는 이를 철저히 외면한다. 단순한 묘사의 나열로 작품을 이끌어간다. 작품은 강의 흐름이 아니라 호수의 반짝이는 수면에 가깝다.

다행이 타오제르의 포에리에 대한 짝사랑, 파라오의 타오제르에 대한 집착, 그리고 포에리와 라헬의 사랑이 어긋나고 모세가 등장하여 출애굽기와 연결되며 작품은 묘사를 던지고 솟구치는 서사의 힘을 받아들인다. 비로소 읽는 재미가 느껴진다.

이 작품을 쓴 이후에야 고티에는 이집트를 방문했다고 하며, 그때도 배경인 테베는 가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순전한 상상력의 빼어난 발로인지 아니면 작가적 체험이 없는 탓에 참고자료에만 의지하여 어설프게 그려낸 불완전한 작품인지. 판단은 읽는 이의 몫이지만, 이 책만으로 테오필 고티에의 작가적 역량을 섣불리 예단하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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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러의 <젤트빌라 사람들> 전편에 수록되어 있는 노벨레 작품이다. 노벨레의 특성은 신기한 사건을 중심으로 벌어진 간결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보면 이 작품이야말로 가장 충실한 작품이라고 하겠다. 덧붙여 풍자성과 교훈성마저 갖추고 있으니 재미라는 측면에서는 앞선 <마을의 로미오와 줄리엣>보다도 우월하다.

작품에는 일반적인 젤트빌라 사람들과는 다른 유형의 세 명의 빗제조공이 등장한다. 이들은 근면과 인내와 검소를 지상가치로 신봉하는 이들이다. 타인과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고 외형상 모범적인 생활을 한다는 측면에서 그들은 ‘정의로운’ 사람들이라는 호의적 평판을 받고 있다. 그런데 켈러는 그들의 정의가 허울 좋은 외피에 감싸인 위선인지를 신랄하게 폭로하는데, 여기에 빗공장의 직원 감원과 취스 뷘츨린이라는 처녀와의 관계가 도화선 역할을 한다.

작가가 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한마디로 조소와 희화화이다. 그가 보기에 그들은 ‘기이한’ 존재이다.

“이들은 하급 유기체 즉, 기이한 작은 동물과 물과 공기에 의해서 우연히 그들의 번식의 자리로 옮겨지는 씨앗보다도 더 자유롭지 못한 인간과 같았다.” (P.20)

“그는 진정으로 영웅적인 현명함과 인내와 온화하면서도 비열한 냉혹함과 무감각이 혼합된 극도로 기이한 감정의 인간이었다.” (P.21)

여기서 자본주의 성숙과정에서 생겨난 새로운 유형의 인간상에 대한 작가의 냉소적 관점을 파악할 수 있다. 즉 공장 일과에 맞춰 생활 리듬이 단조롭게 굳어지고 삶의 희노애락에 무감각하게 변하는 자본주의 인간형이다. 노동자는 타락하고 자본가는 부유해지는 당대의 현실을 단순화시켜 비판하고 있다.

“장인은 이 세 사람이 오로지 여기에 남기 위해서 모든 것을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보수도 없애고 음식도 더 적게 주었다...바보같은 노동자들이 밤낮으로 어두운 작업장에서 지칠 대로 지쳤으면서도 서로 일을 더하려고 하는 동안 그(장인)는 점점 더 허리띠의 구멍들을 늘려갔고 그 도시에서 상당한 역할을 차지하게 되었다.” (P.27~28)

취스 뷘츨린은 정의와 위선의 또 다른 복합체다. 그녀는 고귀한 학식과 덕망을 지닌 듯 처신하지만 한편으로는 물질적 탐욕에 물들어 있으며, 세 명의 빗제조공 중 그나마 돈을 조금 지니고 있는 욥스트와 프리들린이 경주에서 이기도록 하기 위해 젊은 디트리히를 어설프게 유혹하려는 술책을 사용한다. 그러다 오히려 호젓한 숲 속에서 젊은 빗제조공의 열렬한 구애에 본인이 유혹당하고 만다. 즉 가장 가난한 빗제조공과 결혼하게 된 것이다.

나는 욥스트와 프리들린의 비참한 말로에 동정을 금치 못한다. 그는 당대의 관점에서는 기이한 존재일지 몰라도 현대 사회에서는 평범한 소시민일 따름이다. 그의 꿈은 소박한 것이었다. 무일푼인 노동자가 근면과 인내와 검소를 통해서 부를 축적하여 자기 소유의 공장을 갖겠다는 것, 그것은 오늘날 대다수 월급쟁이의 바램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취스 뷘츨린이 일생의 안식을 구하기 위하여 사랑보다 유복한 남자와 인연을 맺고자 애쓰는 모습은 여성들이 남성의 지위와 경제력을 중요시하는 작금의 사고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켈러는 이 작품을 통해서 만연되어 가는 자본주의 사회와 소시민계급의 표리부동한 행동양식을 과장된 수법으로 희화화하고 있지만, 수백 년의 시간이 경과한 후 여전히 자본주의가 지배적 가치를 지니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 내게 그것은 어릿광대로 변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웃는 난장이의 느낌을 주고 있다.

*  참고로 이 책은 더 이상 시중에서 구해볼 수 없다. 책표지 이미지라도 구하기 위해 네이버링과 구글링을 해보았지만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하였다. 여기 올린 책표지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디카로 촬영한 것이다. 

 

* <젤트빌라 사람들> 번역본이 근래 출간되었다. 완역이 아니라 대표작 4편만 수록되어 아쉽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럴듯한 판형으로 출간된 최초의 책이니만치 의의는 충분하다. (201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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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당시의 신세대 명연이다.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듯한 굴다의 피아노는 투명함 그 자체이다. 황제의 위풍당당한 모습은 오히려 슈타인 지휘의 빈필이 들려준다. 영롱하고 화려하게 조탁한 피아노 사운드와 장중한 관현악은 언뜻 이질적이면서 묘하게 잘 어울린다.  

브렌델-하이팅크 콤비의 내면적 충실성을 논외로 한다면 '황제'라는 부제가 주는 곡상의 외향적 화려함을 잘 표현한 연주... 

하지만 개인적으로 굴다의 피아노는 모차르트에 보다 적합하다는 생각이 이 연주를 들으면서 계속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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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세르메의 연주는 무엇보다도 선명한 색채감이 특징이다. 서두르지 않는 차분한 템포로 개별 곡의 섬세한 묘사에 노력하면서도 금관의 시원한 분출에서는 거대한 스케일마저 느끼게 한다. 당시 데카의 뛰어난 녹음도 한몫을 하고 있다. 

물론 무소르그스키의 러시아적 정취를 선호하는 이에게는 지나치게 화려하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라벨 편곡의 프랑스적 오리지낼러티를 제대로 살린 음반으로서는 첫손에 꼽힐 만하다. 

라이센스 LP로 소장하고 있는데, 현재나온 CD 음반으로는 구입하기가 마땅치 않다. 데카에서 레전드 시리즈 또는 오리지날스 시리즈로 출반해 주면 당장 구입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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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스 텐슈테트. 개인적으로는 그저그렇게 평가하는 지휘자다. 몇 장의 음반을 접했지만 딱히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유명세는 영국 평론가들의 띄우기로 치부하곤 하였다.

그런데 이제 그가 지휘하는 말러의 제5번을 제대로 들었다. 1988년 그의 암 투병에서 복귀 무대다. 이건 좋은 의미에서 독일적인 소박함과 강건함을 지닌 연주다. 다소 어두우며 내재적으로 응축된 에너지는 과도하지 않으면서도 이따금 폭발적 에너지를 표출한다. 그의 유명한 라이브 연주들, 즉 제1번과 제6번 등과는 달리 작위적인 과장이 드러나지 않는다.  

텐슈테트의 지휘 스타일과 실황 연주라는 특성상 음악이 물흐르듯이 매끄럽게 흘러가지는 않지만 결코 느슨해지거나 유기적인 끈을 놓치지 않는 점은 불가사의다. 횡적으로 또 종적으로 고르지 않지만 무뚝뚝하나 퉁명스럽지 않은 어투로 들려주는 말러도 제법 매력적이다. 여기서 그의 신경질적 자극을 기대하지는 말자.

어쨌든 번스타인, 카라얀 등과 확연히 대비되는 또다른 차원의 명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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