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든파티 (양장)
캐서린 맨스필드 지음, 한은경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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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만에서

가든파티

죽은 대령의 딸들

비둘기 씨와 비둘기 부인

어린 소녀

마 파커의 일생

현대식 결혼

항해

브릴 양

첫 번째 무도회

노래 수업

낯선 사람

은행 휴일

이상적인 가족

하녀

 

<가든파티>로 유명한 작가의 단편 소설집이다. 짙은 연둣빛의 양장본 표지를 보면서 떠올렸던 이미지는 로나 세이지의 <서문>을 읽으면서 불길함에 휩싸였고 하필 작가의 가장 긴 작품인 <만에서>를 읽을 때 이미 산산이 부서졌다. , ‘가든파티캐서린 맨스필드의 어감과는 전혀 상극으로 작가는 전혀 호락호락하지 않은 스타일의 작품을 썼던 것이다. 이 소설집은 그녀의 마지막 단편집이다. 그녀만의 작풍을 확립한 그녀의 농익은 작품세계를 한껏 풀어놓았으니 나처럼 어설픈 독자가 당혹감을 느끼는 건 당연지사다. 그럼에도 수박 겉핥기지만 생소하면서도 뇌리를 살짝 건드리는 뭔가를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맨스필드 작품의 매혹 포인트라면 정말 좋겠지만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다른 작가와 구별되는 맨스필드 문학의 특징은 무엇일까. 우선적으로 두드러지는 점은 남성(아빠, 남편)의 배제 또는 약화다. 그녀의 세계에서 남성은 항상 주변적이다. 가계를 꾸리기 위해 존재하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있거나 없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있으면 다른 데 눈을 돌려 여성 주인공을 심란하게 만들 뿐이다. 이것은 작가가 자신의 가족인 보샹 가를 탈출한 계기가 되었다고 하며, 그녀가 평생 헤매었던 결혼 생활과도 관련 있으리라. <만에서>의 가장 스탠리는 아무도 그에게 공감하지 않음을 이해할 수 없다. 처제 베릴은 한층 더하다.

 

베릴은 하고 싶은 것을 이제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축하하고 싶었다. 그들을 방해할 남자가 없었다. 이 완벽한 하루가 그들의 것이었다. (P.44)

 

<죽은 대령의 딸들>에서 대령은 죽어서도 서랍장 안에서 딸들을 감시하고 억압하는 부정적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상적인 가족>의 니브 씨는 늙은 스탠리와 다를 바 없다. 거미처럼 비쩍 마른 채 정작 가족에서 잊히고 소외당하는 가장의 모습. <항해>는 언뜻 이와 관계없어 보이지만, 페넬라는 할머니와 함께 아빠를 떠나 할아버지에게 간다. 할아버지처럼 나이 든 노인은 부정적 인식의 남성과 차이가 있을 것 같지만, 작가는 냉혹하다. 그녀는 다른 작품에서 늙은 노인이 젊은 가정교사 아가씨에게 치근덕대는 장면을 교묘하게 다룬다.

 

그녀의 작품에서 등장인물은 죽음과 친연성을 지닌다. 사람에게 있어 죽음은 멀리하고 싶지만 가까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유독 맨스필드의 서사와 인물은 죽음을 달고 다닌다. 작가의 소설들에서 죽음의 올가미를 벗어나 진정으로 밝고 화창한 작품이 있을지 회의적이다. 이는 가족사에서 남동생의 사고사 영향이라고 귀인 하기에는 곤란하다. 그녀 자신의 가치관과 인생관이 투영된 것이라고 봐야 하리라. <가든파티>에서 파티를 망칠 뻔한 사건은 대문 밖 한 남자의 사고로 인한 죽음이다. <죽은 대령의 딸들>은 당연하고, <마 파커의 일생> 역시 마 파커는 사랑하는 손자의 죽음에 맞닥뜨린다. <항해>의 페넬라는 엄마를 잃었다. 죽음이 작품의 주제 의식을 이끌어 가는 중요한 역할을 맡은 소설이 바로 <낯선 사람>이다. 배를 타고 오는 아내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해먼드는 이제 더는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삼을 수 없다. 아내의 팔에서 죽은 한 남자로 인해 그는 아내를 죽음에게 빼앗겨 버렸다.

 

그는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두 팔로 그녀를 안았다.

그들의 저녁을 망쳤다! 둘만의 시간을 망쳤다! 그들은 다시는 둘만 있을 수 없을 것이다. (P.263)

 

맨스필드 소설의 결말은 항상 모호하다. 좋게 말하면 열린 결말이지만, 달리 말하면 작가는 독자에게 명확한 길 또는 자신의 생각을 제시하지 않는다. 등장인물 간에는 모호한 문구로도 공감대가 통할지 모르지만 독자의 관점에서는 작가가, 주인공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머리를 굴려 추론해야 하는 고달픔이 따른다. <만에서>에서 케지어와 페어필드 노부인은 절대로 안 하겠다고 한 게 무엇인지 두 사람 모두 잊는다. 헤리 켐버가 베릴에게 던진 질문은 공허하게 울린다.

 

인생이, 인생이...”

그녀가 더듬었다. 하지만 인생이 어떤 것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로리는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정말 그렇지?

로리가 말했다. (P.114)

 

<가든파티>에서 인생을 설명하려고 헛되이 애쓰는 로라를 오빠 로리는 이심전심으로 이해한다. 독자만이 글밖에서 당혹스러울 뿐이다.

 

진리는 원래 모호하다고 옹호할 수 있지만, 이는 진실을, 또는 자신의 진심을 말하기 두려워하는 사람의 태도에 대한 묘사라고 바라볼 수 있다. <죽은 대령의 딸들>의 조세핀과 콘스탄티아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주체적인 삶을 걸어갈 기회를 얻지만, 무슨 말을 할지 서로 잊는다. <마 파커의 일생>에서 고된 인생을 살아온 마 파커는 울고 싶지만 억지로 울음을 참는다. 감정을 여과 없이 배출해냄으로써 카타르시스를 얻을 기회를 마 파커는 스스로 놓치고 있다. 그만큼 삶에 진솔하지 못하다.

 

나는, 나는 그들과 같이 나갈 거야. 윌리엄에게는 나중에 편지를 쓰지 뭐. 다음에, 나중에. 지금은 아니야. 하지만 분명히 쓸 거야.” (P.203)

 

<현대식 결혼>의 이사벨은 어떤가. 그녀는 남편과 소원해진 관계를 복구할 절호의 순간을 맞이하지만, 나중에 다음으로 미룬다. 사람 간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진실의 순간에 침묵하거나 망설이는 인물들.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가든파티>의 로라 역시 파티 취소 의견이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나중에 생각하는 게 가장 적절하다고 회피해 버린다. 이 작품집에서 유일하게 진심을 토로하는 인물은 <비둘기 씨와 비둘기 부인>의 앤이다.

 

이 모든 것을 맨스필드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거칠게 말하자면 삶이란 모호하고 다층적이어서 사람을 전적으로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우리네 삶에는 항상 모순과 역설이 가득 차 있고 개인적 좋고 싫음과 무관하게 삶은 이렇게 굴러간다. 빛과 어둠처럼 삶과 죽음이 한데 어울린 삶은 한바탕의 연극 무대와도 같다. 사람들은 모두 제각기 연극의 등장인물처럼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자신의 역할을 연기하는 것이다. <브릴 양>의 브릴 양이 깨달았듯이. 그렇게 보면 <노래 수업>에서 전보를 받기 이전의 메도스 양과 이후의 메도스 양의 표변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다. <첫 번째 무도회>에서 기대와 기쁨에 부풀어 있던 라일라가 늙고 뚱뚱한 남자로 인해 의기소침하였지만 이내 청춘답게 다른 파트너와 신나게 춤추면서 늙은 남자를 잊는 것 역시 마땅한 이치다.

 

그럼에도 인생의 종착지는 죽음이기에 삶은 결코 눈부시게 화창할 수 없다. 이렇게 주장하는 게 <브릴 양>이라면 지나칠까. <가든파티>의 화려함은 일말의 그림자도 없다고 해야 할까. <만에서>의 스탠리 못지않게 린다의 무기력함은 어떻게 바라봐야 좋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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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Q대학교 입학처입니다 - 제2회 넥서스 경장편 작가상 우수상 수상작 넥서스 경장편 작가상
권제훈 지음 / &(앤드)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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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입시는 국민 모두 초미의 관심사다. 수능시험이 치러지는 날은 수험생 이동에 온갖 교통수단이 총동원되며, 고사 중에는 일체의 소음 유발 활동이 중단된다. 시험의 난이도와 문항 오류 관련 논란도 여전하며 작금은 킬러 문항 배제가 이슈가 되고 있다. 입시 자체는 어떠한가. 수시와 정시로 나눠진 데다 내신 위주 전형, 학생부종합 전형, 논술 전형, 특기자 전형 등등의 유불리에 따른 수험생과 학부모의 민감도는 극도에 달한다. 대학별 평가에서도 서류평가와 면접평가 등 정성평가의 공정성에 대한 의구심, 자기 자녀가 내신성적이 더 우수함에도 서류평가를 통과하지 못한 것에 대한 학부모의 울분에 찬 항의 전화와 심지어는 국민신문고를 통한 투서 등 모든 이해당사자가 본인이 원하는 대학과 학과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게 이 세계다.

 

이 소설은 대학입시를 업무로 삼고 있는 대학 입학처의 실제와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민낯을 제대로 보여준다. 대개의 수험생과 학부모에게 입학처는 블랙박스 같은 존재다. 원서접수를 받고 합격자발표를 하기까지 내부에서 뭔가가 이루어지지만 내용을 알 수 없고, 사람이 하는지 기계가 하는지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조직이랄까. 작가는 이 작품에서 입학처도 인간미 물씬 풍기는 사람들이 일하는 곳이며,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희로애락에 반응하는 평범한 직장인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직위 체계와 친소, 시기와 질투 관계가 엄연히 존재하며 정규직과 비정규직, 보직과 승진 등을 둘러싼 암투도 들여다볼 수 있다.

 

대학입시를 겪어보지 않거나 최근의 입시에 무심한 독자는 이 책을 통해 대학입시가 이렇게 다양하고 복잡하며 경우의 수도 많다는 것에 놀랄 것이다. 신입생과 재외국민은 물론 여기서 다루지 않지만 편입학까지. 가장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고자 하는 대학들의 바람과 노력은 동일하지만, 수험생 역시 가장 우수한 대학에 진학하고자 하므로 선발한 합격자가 그대로 등록할 것을 기대할 수 없다. 소위 대학 서열에 따라 연쇄적으로 합격자 이동이 일어나고 추가합격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니 어떤 수험생은 수시 6장의 카드에 모두 통과하여 어디를 갈까 행복한 고민에 빠지는 반면 다른 수험생은 6장의 카드에 전부 실패하고 추가합격의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까지 절망과 희망의 수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이 작품은 소설일까 다큐일까. 한때 동종 업계에서 일한 경험으로 판단컨대 작중에서 언급된 대학입시의 내용은 모두가 사실이다. 작가는 한덕수 입학처장을 다소 극단적으로 희화하였을 뿐 대다수 입학처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 그들과 학부모, 교사의 관계 모두가 사실에 입각하고 있다. 다큐의 무미건조함을 피하기 위해 입학처 사람들의 개인적 생각과 삶을 좀 더 투영하여 사람 냄새 나는 방향으로 작가는 덧붙였다고 본다.

 

입학업무를 전문적으로 담당하고 있으니까 그들 자녀의 대입 교육은 남들과 다르지 않을까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거대한 대하의 흐름에서 홀로 버티기 쉽지 않을뿐더러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학입시는 일개인으로 풀 수 있는 사안이 아닐뿐더러 제도, 인식, 문화 등이 복합적으로 꼬인 문제라고 할 때 그네들의 이중적인 행태를 비난할 수 없다.

 

너 완전 양아치다. Q대가 좋다고 동네방네 다 떠들고 다니면서 네 딸은 못 보내겠다? 다른 사람 자녀 인생은 망쳐도 네 딸 인생은 망칠 수 없다 이거냐?”

, 못 보내. 죽어도 못 보내.” (P.117)

 

경지혜 책임사정관과 장대현 차장이 나누는 대화는 솔직하기에 오히려 현실적이다. 이상은 저 멀리 있지만, 자식의 미래라는 현실은 바로 눈앞에 다가와 있다. 김지민 과장의 고민은 상대적으로 소수만 고려하였겠지만, 이 세계를 잘 알고 있는 학부모라면 충분히 고민했을 수도 있는 건이다. 3년 특례 또는 12년 특례를 잘만 활용하면 훨씬 더 쉽게 명문대학에 입학시킬 기회가 생기는데 어떤 부모라도 배척하겠는가. 기회균형 특별전형 또는 사회통합전형 중 농어촌전형 역시 마찬가지다. 도시와 농촌의 경계가 모호한 수도권에서 조금만 외곽으로 이사 가면 훨씬 유리한 기회를 얻을 수 있기에 알만한 학부모들은 일찌감치 선제적으로 행동한다.

 

김지민도 그런 자신이 싫었다. 비교하면 끝이 없다는 걸 잘 알지만 애들이 자랄수록 욕심도 함께 부풀어 올랐다. 극성인 엄마 밑에서 자란 김지민은 절대 그런 엄마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마음을 비우고 자식을 키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P.162)

 

이렇게까지 하는 게 맞느냐 반문할 수 있지만, 부모의 책임감은 무한하다. 홍지원 입학사정관을 괴롭히는 열성 의대 엄마를 허구적이라고, 있더라도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판단하기 어렵다. 더구나 요즘 같은 의대 열풍이 부는 시절이라면 한층 더하다. 초등학생 대상 의대입시반이 개설되는 게 현실 아닌가.

 

한덕수 처장의 말대로 입시는 전쟁이다. 상위권 대학은 우수 학생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입결 하락을 막으려고 전전긍긍한다. 자기 학교는 대학서 열을 추월당하지 않으면서 경쟁대학을 뛰어넘길 바란다. 중하위권 대학으로서는 부럽기 그지없다. 그들은 어떻게든 충원하려고 미달을 막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뛴다. 학생의 우수성은 다른 나라 얘기다, 무조건 뽑아서 등록시키는 게 지상과제다. Q대학교 입학처는 한덕수 처장과 오현종 팀장이 떠나면서 새로운 도전에 놓였다. 새 처장과 팀장이 누가 될지 알 수 없으나 Q대학교 입학처가 획기적으로 바뀔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아마 어려울 것이다. 대입을 둘러싼 법적, 제도적, ·재정적, 사회적 규제가 너무나 강력하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Q대학교 입학처 사람들은 이 소설 속 인물들처럼 똑같이 정신없이 압박감을 받으면서 피로에 지친 채 한 해를 보낼 것이다. 안타깝지만, 그래도 그렇지 못한 대학의 입학처보다는 낫다고 위안 삼은 채.

 

안수현과 이원석의 행복을 바란다. 그들은 생활인으로서 쳇바퀴 탈출을 선택했다. 오현종 팀장과 한덕수 처장이 평안한기를 바란다. 그들은 방식을 다를지언정 입학업무와 학교를 향한 사랑은 동일하다. 그리고 장대현 차장과 경지혜 책임사정관 이하 Q대학교 입학처 사람들이 성공하길 바란다. 부서든 개인이든, 입학업무를 어떻게 바라보든.

 

작가의 말에 따르면 입학사정관을 지낸 경험을 토대로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작품 속 내용이 매우 사실적인 건 그래서이다. 다만 2020년에 취재한 내용이므로 매년 조금씩 변해가는 입시 상황에는 세부적으로 부합하지 않을 수 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당장 작중에서 빈번하게 언급되는 자기소개서는 더 이상 제출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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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1837년판 초판본 표지 디자인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박형규 옮김 / 써네스트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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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쉬킨은 소설가, 극작가이기에 앞서 시인이다. 어쩌면 푸쉬킨의 본령은 시인이라고 좋다. 소설 <예프게니 오네긴>은 운문체이며, <보리스 고두노프>를 비롯한 주요 희곡들도 모두 운문체로 쓰였으니 말이다. 이 책은 푸쉬킨의 주요 서정시를 수록하였다. 서정시인으로서 푸쉬킨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다. 서사시인으로서 푸쉬킨은 앞서 읽은 책에 나타나 있다.

 

애국, 사랑, 시골(유배지 포함), 자유. 그의 시를 읽다 보면 머릿속에 떠오른 일관된 주제어다. 초창기의 시에는 애국 의식이 엿보이는데, <싸르스코예 셀로에서의 회상>은 최초로 인정받은 작품으로 순수한 애국심의 발로가 전면에 나와 있는 시다.

 

시인의 애국심은 곧바로 현실 정치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과 충돌하며 이후 체제 비판적 방향으로 전개된다. 그 대가로 시인은 러시아 남부 카프카즈 및 크림반도 지역으로 유배당한다. 간혹 보이는 러시아 남부의 이국적 풍광을 다룬 작품의 이것과 관련되어 있다. <기다랗게 늘어선 흐르는 구름 엷어지고>는 유배지 크림 지방의 인상을 떠올리며, <바다에 부쳐>는 흑해 바다를 추억한다.

 

이때 접하는 카자크 민족과의 만남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니, 단순한 이국적 호기심에 그치지 않고 <스첸카 라진의 노래> 같은 시는 물론이고, <푸가초프 반란사><대위의 딸> 등 카자크 반란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스첸카 라진과 푸가초프 등 러시아 정부 시각에서는 사악한 반란 수괴가 그의 작품에서는 독특한 매력을 지닌 인물로 그려지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마을>의 전반부는 시골, 전원의 아름다움을 잘 묘사하여 독자는 상쾌한 마음을 품는데, 후반부는 완전히 일변하여 전후의 극적 대비가 인상적이다. 시인은 시골 마을의 지주와 귀족들이 가하는 압제 광경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며 농노 제도가 사라진 이상적인 시골 마을을 꿈꾼다.

 

무엇보다 자유, 그리고 사랑은 아마도 푸쉬킨이 가장 중점을 둔 주제가 아닐는지. 행복과 불행이 교차한 시인의 짧은 삶을 압축적으로 설명하는 동시에 그의 문학세계를 이해하려면 중요한 키워드다. 푸쉬킨의 유배로 점철된 삶은 그의 반체제적, 반정부적 태도와 문학세계와 관련되어 있다. 특히 데카브리스트와의 친분은 결국 그의 삶을 앞당긴 계기가 되었다.

 

황제들이여, 이제 배우라- / 형벌과 포상, / 감옥과 제단, 그 어느것도 / 그대들의 믿음직한 방책이 되지 못함을. / 미더운 법의 보호 아래 / 먼저 고개 숙이라, / 민중의 자유와 평안이 / 왕관의 영원한 보초가 되리라. (P.54)

 

남러시아로 추방당하게 된 계기가 된 시 <자유>의 일부다. 민중의 편에 서서 황제를 비롯한 권력층을 맹공하고 있으니 그들의 분노를 사고 위험인물이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리라.

 

하지만 러시아의 지배체제는 견고하고 황제의 권력은 막강하다. 기대를 걸었던 민중은 계몽과 투쟁의 길에 동참하길 망설인다. 견디다 못한 시인은 절망하고 그네들을 향한 실망과 질타를 퍼붓는다(<자유의 외로운 씨를 뿌리는 사람인>). 이 또한 시인의 자유를 향한 염원의 크기를 반증한다. 친구 챠다예프에게 보낸 시(<챠다예프에게>)에서 압제 속에서도 자유의 희망을 놓지 않는 시인의 마음을 여전히 헤아릴 수 있다.

 

푸쉬킨의 삶을 들여다볼 때 그가 나탈리야와 결혼하지 않았으면 그가 요절하지 않았을 거라는 안타까움이 생긴다. 언제나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시(<고백>)를 남긴 시인은 정작 현실에서는 참다운 사랑의 인연을 만나지 못하였다니. 아마도 그의 삶은 평범한 행로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듯하니, 보론쏘바 총독 부인, 안나 케른에게 바치는 시(<불태워진 편지>, <명예의 희구>, <안나 케른에게>)를 보면 아름다운 유부녀를 연모하는 시인에게서 훗날 자신의 상황이 그대로 반영된다. 자기 아내의 부정에 대한 근심과 모욕감, 질투와 분노. <그대는 용서하겠는가, 질투에 찬 내 공상>은 일종의 예언시라고 할 만하다.

 

시인은 다짐하고 결심한다. 삶이 자신을 속이더라도, 사랑의 불길에 자신을 태우지 않도록 경계하고 조심하나 사람의 마음이 어디 마음대로 되는가. 훗날 독자는 이 시들을 되뇌면서 시인의 불행한 역설적 삶을 회상할 따름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슬퍼하지 마라, 성내지 마라! /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 기쁨의 날이 옴을 믿어라. (P.126, (삶이 그대를 속이지라도))

 

아니다, 아니다, 하지 말아야 한다, 할 수도 없고 감히 해서도 안된다, / 사랑의 흥분에 분별없이 몸을 내맡기는 것을. / 내 마음의 평화를 굳게 지키리라, / 사랑의 불길에 마음을 불태우게 하거나 무아경에 빠지도록 하지 않으리라. (P.219, ...에게)

 

사랑과 자유를 희구하였으나 둘 다로부터 배척받은 시인은 모두를 거부한다. 그의 주위에는 자신과 사상을 같이할 동지도 없으며, 가정에서도 기쁨과 평안을 얻지 못한다. 그는 세상의 주변인, 이방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일찍이 러시아 남부로 유배당하였을 때 겪었던 것처럼. 그때 시인은 자신을 동향으로 유배되었던 오비디우스와 동일시하지 않았던가. 낯선 곳을 정처 없이 방랑하다가 타지에서 숨을 거두고 마는.

 

내 앞에는 목적이 없다- / 가슴을 공허하고 이성은 무위롭다, / 생활의 단조로운 소음이 / 우울함으로 나를 괴롭힌다. (P.176, (1828526))

 

총알이 가슴을 관통하지 않았더라도 푸쉬킨은 제명을 누리지 못하였을지 모른다. 삶의 의미와 사랑을 잃은 시인에게 더 남은 게 무엇이며, 삶을 지탱할 의욕이 어디 있겠는가. 시인은 시와는 다른 삶을 선택한 것이다.

 

이 책은 2009년에 초판, 2020년에 개정판이 나왔다고 하는데, 간간이 고색창연한 표현과 어휘가 보여서 요즘 시대의 산뜻한 느낌은 없다. 1세대 러시아문학 번역자인 옮긴이를 생각하면 예전 번역본을 그대로 재발간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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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아 프랑수아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조르주 상드 지음, 이재희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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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요정 파데트>, <마의 늪>에 이어 계속 읽는 조르주 상드의 전원소설이다. 목가적이니, 전원풍이니 하면 시골과 자연 속 아름답고 낭만적인 정경만 머릿속에 떠오르기 마련이다. 도시와 시골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는 이런저런 성격과 사고, 행동 유형 그리고 관습과 문화가 섞이고 부딪치기 마련이다. 어찌 조화와 평화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 작품에서도 시골의 아름다움보다는 환경과 역경을 헤쳐 나가는 한 개인의 뛰어난 자질이 유독 돋보인다. 바로 사생아프랑수아다. 여기서 먼저 정리할 대목이 있는데, ‘사생아란 표현이 버려진 아이 또는 고아를 지칭하며, 통상적 의미와는 다르다는 점이다. 어쨌든 전통 사회에서 사생아는 부정적 존재로 인식되고 취급되기에 온전한 성인으로 성장하는 경우가 흔치 않다고 한다. 작품 내에서도 사생아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여러 폄하적 발언이 반복된다.

 

다른 사생아들은 그들의 숙명 때문에 거의 항상 굴욕적인 삶을 살아갔고, 사람들은 그들에게 애당초 기독교인으로서의 긍지마저 박탈당한 인생이란 것을 너무나 가혹하게 일깨워 주었다. 그래서 사생아들을 그들을 낳아 준 사람들에 대한 증오 속에서 자라났다. (P.77-78)

 

주인공 프랑수아는 다르다. 물론 블랑셰 부인의 거둠과 보살핌, 부인 자신의 온후한 인품의 영향을 받은 점에서 유리할 수 있지만 결국 세인의 은연중 괄시와 냉대를 극복하고 멋진 청년으로 자라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수아 자신의 미덕과 노력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에 세베르 부인이 그를 유혹하려고 시도했으며, 자네트도 그를 자신의 남편감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냉정한 시어머니, 방앗간 사업에 무심한 데다 드러내놓고 외도까지 하는 남편, 와중에 점점 어려워지는 살림살이를 힘겹게 이끌면서 지탱해가는 블랑셰 부인. 여기서 독자는 당대 시골의 삶이 결코 관념적이거나 이상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마들렌은 놀라서 사생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아이의 두 눈 속에는 가장 현명한 사람들의 눈빛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깃들어 있었다. 더없이 선하면서도 더없이 의연한 그 무엇인가에 이끌려 마들렌은 어안이 벙벙했다. (P.46)

 

블랑셰 부인의 프랑수아를 향한 보살핌과 애정은 매우 순수하고 따뜻한 인간 본성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프랑수아의 말과 눈에서 아마 그녀는 프랑수아의 참다운 인간성을 발견하였으리라. 그녀는 프랑수아를 자기 아들처럼 사랑하였다. 하지만 남편과 주변 사람은 그렇게 순수한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물론 블랑셰 부인을 비방하려는 악의적 의도로 한 말이겠지만, 피가 섞이지 않은 남녀 사이, 게다가 훌쩍 멋진 청년으로 성장한 프랑수아와 블랑셰 부인의 나이 차는 십여 세밖에 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발언을 통해 볼 때 십여 세 연상연하의 결혼은 당대에 드물지 않았음을 생각해 보면 그들의 모함과 우려도 결코 허튼소리가 아닐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블랑셰 부인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으며, 프랑수아도 결정적 계기에 이르기까지는 어머니로서 사랑한다고 믿는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사랑이 순수한 모성애이자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라고 믿었다.

 

제아무리 프랑수아가 뛰어난 청년이라고 하더라도 인위적, 우연적 요소가 추가되지 않았다면 소설은 좋은 방향으로 진행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가 시골 사람으로서는 드물게 읽고 쓸 수 있는 지적인 능력이 있었다는 점, 나중에 생모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다는 점이다. 프랑수아는 남편의 빚과 죽음으로 몰락한 블랑셰 부인과 방앗간을 되살릴 수 있었고, 이제 그는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블랑셰 부인과 대등한 지위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농민]의 노고, 지주들의 땀 한 방울, 돈 한 푼 들어가지 않은 경작의 대가로, 그 땅의 가치가 두 배로 오르게 되면 그들은 그것을 다시 회수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힘없는 잉어들은 늘 대어의 사냥감이 되고, 우리의 탐욕 때문에 벌을 받는다. (P.186)

 

프랑수아가 세베르 부인의 음모를 파헤치고 블랑셰 부인을 돕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가운데, 작가는 시골 토지 소유와 관련한 부조리를 고발한다. 시골 농민은 소작농으로 열심히 경작하지만 거의 모든 대가는 토지를 소유한 지주에게 돌아간다는, 어찌 보면 인류사에서 항상 되풀이되지만 근원적 해결이 어려운 현상. 이 작품이 사회고발 소설이라면 이 사안만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집중적으로 조명하겠지만, 작가는 더 이상의 진전을 요구하지 않는다.

 

사실상 이 작품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독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대목은 프랑수아와 마들렌, 즉 블랑셰 부인의 결혼이라는 설정이다. 작품 속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시종일관 혈연에 근거한 모자 관계에 준하는 돈독한 가족에 가깝다. 마들렌은 프랑수아를 큰아들로, 프랑수아는 마들렌을 어머니로 여겼다.

 

마침내 마들렌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프랑수아는 그녀가 자기를 남편으로 받아들인 데 대해 무릎을 꿇고 감사했다. (P.246)

 

모자간의 애정이 갑작스럽게 남녀 간의 사랑으로 바뀌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사랑의 성격이 일순간에 완전히 뒤바뀌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인정해야 가능하다.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가능성은 단 하나, 두 사람의 사랑은 언제부턴가 남녀 간의 사랑이었지만 외관상 모자간의 것으로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위장하였다는 것. 후자가 진실에 가깝다면 블랑셰가 우려하고, 세베르와 마리에트가 주고받은 대화는 근거가 있는 셈. 자네트는 프랑수아에게 이 점을 분명하게 깨우쳐 준다.

 

마들렌이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기에 프랑수아의 생각이 그러하였을 수도 있겠지만, 악마에 걸고 부인하던 마들렌의 변심은 놀랍기 그지없다. 이러한 사례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적어도 내 관점으로는 흔쾌히 인정하기 어렵다. 내가 애들이 말하듯 틀딱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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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슈킨 선집 : 희곡.서사시 편 - 보리스 고두노프.집시.폴타바 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2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최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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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품>

희곡 편 : 보리스 고두노프, 파우스트의 한 장면, 인색한 기사,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석상 손님, 페스트 속의 향연

서사시 편 : 가브릴리아다, 집시, 눌린 백작, 폴타바, 안젤로, 청동 기사, 황금 수탉

 

푸쉬킨의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은 아무래도 <대위의 딸><예프게니 오네긴>으로 대표되는 소설이다. 이 책에 수록된 희곡과 서사시는 나를 포함한 일반독자에겐 아무래도 생소하다. 그렇기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푸쉬킨의 다른 모습을 찾는 기회이기도 하다.

 

러시아 음악계는 일찍부터 푸쉬킨의 작품에 주목하였는데 특히 많은 오페라 작품의 대본으로 푸쉬킨을 선택하였다. 차이코프스키(<스페이드 여왕>, <예프게니 오네긴>, <마제파>(폴타바)), 라흐마니노프(<알레코>(집시), <인색한 기사>), 림스키코르사코프(<황금 수탉>,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무소르그스키(<보리스 고두노프>), 큐이(<페스트 속의 향연>) 등의 면면에서 그의 인기를 확인할 수 있다.

 

푸쉬킨은 러시아 문학계에서 난데없이 튀어나온 작가가 아니다. 그는 서구의 문학 전통을 충실하게 흡수하고 러시아 특유의 문화를 조화하여 서구와 구별되는 러시아 만의 문학 세계를 창출하였다. 이를 희곡과 서사시에서 특히 찾아볼 수 있는데, 무엇보다 셰익스피어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제재와 형식 모두에서 셰익스피어 사극의 직접적 연관성이 나타난다. <눌린 백작><안젤로>는 셰익스피어의 <루크리스의 능욕>, <자에는 자로>에 대한 패러디다.

 

전반부는 희곡 편이다. 가장 먼저 장편 희곡 <보리스 고두노프>이다.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다툼이라는 면에서 일련의 영국 사극과 <맥베스>의 러시아 버전이다. 정통성 면에서 보리스나 참칭자 모두 차이점이 없다. 보리스는 공포와 사랑, 그리고 명성”(1)의 기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유능한 통치자다. 그가 어린 황태자를 암살하고 황제 추대를 짐짓 사양하는 연출은 희귀한 사례가 전혀 아니다. 그리고리가 참칭자임을 반란 세력은 모두 알고 있다. 그가 진짜 황태자인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반 보리스파의 상징일 뿐이다. 귀족들은 그를 내세워 보리스를 무너뜨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중에 그를 허수아비로 부려 먹건 폐위시키건 그때 가서 정하면 된다.

 

여기서 푸쉬킨은 보리스 몰락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다. 그의 정통성이 문제가 아니라 그의 통치가 귀족과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반감을 초래하였기에 일개 참칭자에 의해 무너져버리고 말았다는 것. 출신과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바스마노프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는 장면과 아들에게 전해주는 긴 유언을 보면 우리는 보리스가 흔한 말로 평범한 폭군이 아니라 비범한 황제였음을 알 수 있다.

 

보리스가 황태자를 살해했다고 비난하던 세력이 도리어 보리스의 부인과 아들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대목은 권력 앞에서 모두가 마찬가지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 와중에 백성들은 생존을 위해서 우는 시늉을 하느라 양파를 문지르거나 침을 바르는 연기를 보여준다. 언뜻 보면 바람에 흔들리는 들풀처럼 마냥 연약한 부류로 보이지만 마지막 장에서 보리스 가족의 살해를 경악 속에 침묵”(25)으로 대응하는 그들에게서 진실을 파악할 줄 아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푸쉬킨은 이 작품의 원제에 희극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무엇이 희극일까, 전혀 희극적 내용이 아닌데. <작품 해설>을 보자.

 

이 작품은 두 통치자의 유사성과 그들이 이루어 가는, 또 그들과 함께 이루어지는 역사에 대해 아이러니한 웃음을 보내는 푸슈킨의 시선이 담겨 있다. (P.468)

 

<파우스트의 한 장면>은 권태를 제재로 한다. 유독 19세기 러시아 문학에서 권태가 주요 제재로 나오는 것은 무엇일까. 일각의 주장처럼 사상적 진보를 억누르는 정치적 체제로 충분한 설명이 가능할지 아니면 또 다른 까닭이 있을지 궁금하다. 메피스토펠레스의 말처럼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도 권태는 가능하다. 한가하든 분주하든.

 

<인색한 기사>는 인색한 부자인 알베르와 아버지 남작의 상반되는 행태에서 인색함의 본질을 되새긴다. 남작은 재물 축적을 숭배하며, 자식에 대한 사랑은 인색하다. 알베르는 재물 낭비를 숭배하며, 아버지에 대한 존경은 인색하다. 아버지를 고발하는 아들, 아들에게 누명을 씌우는 아버지. 결투를 제안하는 아버지, 결투를 수락하는 아들. 이쯤 되면 막장 집안이다. 영주의 분노로 결투는 성사되지 않지만, 과도한 정신적 흥분으로 늙은 아버지는 숨을 거둔다. 행복과 명예와 영광을 품고 있는 황금을 그대로 놓아둔 채. 진부한 표현이지만 죽고 난 다음에 수북하게 쌓인 보화는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는 알베르의 불효를 비난할 수 있지만, 애당초 그렇게 자식을 키운 책임에서 아버지 남작은 자유롭지 못하다. 작가가 굳이 인색한 기사라고 표제를 단 이유 역시 같은 의미리라. 끔찍한 시대, 끔찍한 마음이여!” (P.164, 3)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내용은 영화 <아마데우스>와 비슷하다. 성공한 음악가이지만 재능 면에서는 모차르트의 상대가 되지 못함을 알고 있는 살리에리. 그의 뿌리 깊은 시기는 천재를 향한 범인(凡人)의 공통적 감정이다. 자신의 끊임없는 노력과 헌신을 무색하게 만드는 게으른 방탕아. 존경할만한 구석은 털끝만큼도 없건만 그가 만들어낸 음악은 천상의 경지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은 과연 살리에리의 말대로 세상에 헛된 희망만을 일으킬 뿐 소용없는 존재일까. 그나마 소수의 선택받은 한가한 운 좋은 사람들.”(P.180, 2)의 덕택으로 우리는 천국의 노래를 들을 수 있게 되었고,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이데아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지 않은가.

 

(살리에리) 그리고 내가 옳았다! 드디어 나는 / 나의 적을 발견했고, 새로운 하이든은 / 나를 열광으로 경이롭게 취하게 한다! (P.175, 1)

 

위 대목에서 새로운 하이든이 베토벤을 지칭하는 거라면, 살리에리는 하이든에서 자신을 거쳐 베토벤으로 이어지는 계보에서 음악의 정통성을 찾으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석상 손님>의 주인공은 난봉꾼 돈 환. 이 책에서는 돈 구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돈 환의 러시아식 명칭인 듯하지만 매우 낯설다. 푸쉬킨은 돈 환의 이야기 중에서 그의 최후 장면을 선택하였다. 자신이 죽인 기사단장의 미망인 돈나 안나를 유혹하는 데 성공하는 돈 환. 그는 기사단장 석상에게 나중에 와서 문간의 파수나 보라고 조롱하는 만용을 부린다. 석상과 함께 땅속으로 가라앉는 돈 환은 권선징악의 전형이다. 다만 여기 불쌍한 돈나 안나가 남는다. 그런데 돈나 안나를 향해 돈 환이 내뱉은 말, 즉 자신은 진정한 사랑을 해보지 못하였다는 고백은 단지 거짓과 유혹일까 아니면 진심의 토로일까?

 

<페스트 속의 향연>은 자칫 불건전하고 비윤리적인 사상을 옹호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수많은 인명을 빼앗고 마을을 황폐화한 페스트를 찬양하다니. 이런 말이 있다, 삶의 진정한 가치와 행복을 실감할 수 있는 존재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불멸의 존재는 삶에 대해 절박함이 없다, 필멸의 존재인 인간만이 삶을 찬양할 수 있다. 페스트는 인간 삶의 절대적 위협이기에 역설적으로 그만큼 삶의 소중함에 대한 인식의 크기는 커질 수밖에. 작가는 이렇게 의장의 입을 빌려 주장한다.

 

후반부는 서사시 편이다. 모두 7편을 담고 있다. <가브릴리아다>는 기독교적 기준으로 매우 불온한 작품이다. 동정녀 마리아가 여호와의 은총을 받아 예수를 낳았다는 성서의 기록에 완전히 배치된다. 신에 앞서 사탄과 대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품에 안았으며, 마리아는 이를 전혀 이상하거나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시는 젊은 시절의 시인답게 육체적 쾌락의 가치를 역설한다. 아담과 이브의 권태를 즐거움과 행복으로 바꿔준 게 뱀, 즉 사탄이며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육체적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는 주장은 참신하다. 미남 가브리엘이 신도 탐낸 미인 마리아에게 매혹을 느낀 것 또한 당연하다. 신을 오쟁이 진 남편들의 옹호자”(P.256)로 지칭하는 시인은 자신의 미래를 예감했던 것일까.

 

<집시>는 비극이다. 알레코와 젬피라의 사랑은 <카르멘>의 호세와 카르멘의 그것과 동질적이다. 집시와 더불어 살고 사랑하지만, 집시의 가치 기준을 지니지 않은 남자. 자유로운 영혼과 더불어 자유로운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는 여자. 남자는 모든 것을 버리고 문명사회를 떠나 집시와 합류하였지만 끝끝내 집시를 이해하지는 못하였다. 오늘날 연인도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지만 그것이 깨질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모두가 인정한다. 결혼에 이르러도 이혼하는 사례가 빈발하는 현실이다. 하물며 젬피라처럼 젊고 아름다우며 자유로운 영혼에게 그것을 강제할 수 있겠는가. 노인의 충고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알레코에게 남은 것은 오직 비극적 선택일뿐.

 

<눌린 백작>은 패러디다. 루크리스[루크레티아]는 타킨의 능욕 시도를 정말로 거부할 수 없었는가. 루크리스의 능욕으로 로마 왕정이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게 사실일까. 눌린 백작은 권태에 지친 안주인 나탈리야의 마음을 잘못 읽고 밤에 몰래 들어갔다가 뺨을 얻어맞은 채 나오고 만다. 이틀 아침 동안에 이 작품을 쓰면서 푸쉬킨은 무척 즐거웠으리라. 독자는 루크리스의 소극성에 대비되는 나탈리야의 적극적 저항과 정조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꼬리를 만 채 도망치듯 떠나는 눌린 백작과 뒤늦게 이 사실을 전해 듣고 펄펄 뛰는 지주 남편, 여기까지는 모양이 좋다. 잠깐, 가장 크게 웃는 스물세 살의 이웃 지주는? 여기서 푸쉬킨이 단지 패러디만 시도한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앞부분 나탈리야의 생활 모습과, 눌린 백작과 안주인 간 식탁 대화와 함께 그가 정작 노린 것은 다른 데 있음을 깨닫게 된다.

 

<폴타바>를 맨 나중으로 미루고 다른 시들을 먼저 살펴보련다. <안젤로> 역시 셰익스피어 작품에 대한 패러디다. <눌린 백작>에 비하면 패러디성은 약하고, 극 작품을 단순화한 구조의 시 작품으로 변용하였다. 사랑과 애정의 자연스러운 표출을 억지로 막는 인위적 법 규범은 실행 불가능하다. 법률 집행의 수호자인 안젤로조차 비난받아 마땅한 수단을 써서라도 자신의 욕정을 채우려고 하지 않는가. 원작에 비해서 더 마음에 드는 점은 순결한 이사벨라가 공작과 난데없이 결혼하는 이상한 설정이 없어서다.

 

<청동 기사>페테르부르크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페테르부르크, 페트로그라드, 레닌그라드,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다양한 이력을 자랑하는 도시. 표트르대제가 유럽을 향한 창으로 네바강 하구에 설계한 계획도시이자 러시아 제2의 도시. 러시아인에게, 그리고 시인에게 있어 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라는 거인의 당당함과 제정 러시아의 위대한 힘을 내비치는 자랑스러운 상징물이리라.

 

찬미는 여기까지다. 시인은 곧바로 1824년의 대홍수를 꺼내 든다. 거센 역풍으로 바다로 빠져나가지 못한 채 도시를 완전히 침수시킨 강의 어마어마한 위력. 사랑하는 여인 파라샤와 소박한 미래를 꿈꾸는 예브게니, 높이 솟은 청동 기사상에 매달려 겨우 목숨을 구한 예브게니. 그의 여인이 살던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의 꿈은 대홍수로 산산조각이 난다. 절망에 빠진 채 방황하던 그의 눈앞에 불쑥 나타난 청동 기사상.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그에게 감사해야 하는지, 자연을 거스르고 바다 밑에 도시를 세운그 사람의 파멸적 의지를 비난해야 할지. 연약한 예브게니는 다만 세상을 살아갈 의미를 잃는다.

 

<황금 수탉>은 일종의 우화다. 거세된 현자의 지혜로 평화를 이루었지만, 샤마한 공주의 마술은 현자보다 강력하다. 왕자들은 서로 다투다 죽고, 매혹에 압도된 황제는 슬픔도 지혜도 모두 잊는다. 그렇다, 이것은 사랑의 마술이자 주문이다. 그것 앞에서는 제아무리 현명하고 뛰어난 인물도 암컷을 욕망하는 한 마리 수컷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의 본능은 강력하지만, 이것에 빠진 채 인간의 기본적 본성을 잃는다면 비극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그때 가서 사랑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평화를 지키던 황금 수탉의 공격으로 비극은 완성되고 공주는 사라지고 상황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종료된다, 교훈적으로. 시사적이다.

 

이제 <폴타바>. 수록된 서사시 중 가장 장편인 동시에 역사적 사건을 제재로 삼은 역사시다. 때문인지 상당히 많은 시인의 주석이 덧붙여 있다. 러시아와 스웨덴 간 북방전쟁을 다루었는데,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우크라이나 카자흐 족장인 마제파가 주인공이다. 이 인물은 후대에 이르러 매우 유명해졌는데, 러시아 제국에 정면 도전한 실패한 영웅으로서 여러 시인과 작곡가들이 작품을 썼다.

 

러시아 사람인 푸쉬킨은 마제파를 달리 본다. 여기서 마제파는 늙은 족장으로서 친우로 여겼던 코추베이를 배신하고 그녀의 딸이자 자신에게는 대녀인 마리야를 꾀어낸다. 마제파를 가리키는 시인의 표현은 부정적이다. 악당, 교활, 거짓, 사악, 범죄, 냉혹, 뻔뻔함 등. 러시아로서는 저항 세력의 대장이었으니 서구 측과는 관점의 차이가 있는 게 당연하다.

 

코추베이와 이스크라의 어찌 보면 억울한 죽음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음을 인정한다. 다만 코추베이를 고문하면서 숨긴 재물을 요구하는 오를릭을 통해 시인은 마제파 세력의 비도덕성을 강조한다. 카자흐의 시각에서 볼 때 마제파는 민족의 독립 투쟁을 이끈 영웅이다. 오랜 기간 머리를 숙이고 복종하는 채 은인자중하면서 때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스웨덴 국왕과의 연합이 성공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은 채. 스웨덴 국왕 카를과 카자흐 마제파의 연합 세력과 표트르 대제의 러시아 간 일대 회전이 바로 폴타바 전투다. 여기서의 승전을 계기로 북방전쟁은 결정적으로 러시아 우위로 넘어서는데, 이 서사시의 두 주인공, 마제파와 마리야 역시 비극으로 치닫는다.

 

역사는 영웅을 기억한다. 푸쉬킨의 의도와는 반대로 마제파는 시인과 음악가들의 덕택으로 역사적, 예술적 영웅으로 영생을 누리게 되었다. 불쌍한 마리야는? 가족을 버린 채 남자 하나만을 보고 따라왔건만 사랑하는 이에 의해 아버지는 목이 잘려버렸다. 사랑과 미움 사이에서 제정신을 잃은 그녀에게 시인은 더없는 동정을 표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침략국보다는 피침략국이자 약소국인 우크라이나에 마음이 쏠림은 당연하다. 우리도 같은 처지에 있으므로. 그래서일까, 우크라이나 독립을 위해 봉기하는 마제파의 외침이 남다르게 다가옴이.

 

(마제파) 사랑스러운 자유와 명예 없이 / 우리는 바르샤바의 보호 아래 / 모스크바의 전제 군주 아래 / 오랫동안 고개를 숙였소. 하나 이미 / 우크라이나가 독립할 / 시기가 온 거요. / 피 흘리는 자유의 깃발을 / 표트르를 향해 쳐드오. (P.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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