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과 생태 쫌 아는 10대 - 우리, 100년 뒤에도 만날 수 있을까요? 과학 쫌 아는 십대 3
최원형 지음, 방상호 그림 / 풀빛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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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청소년을 대상으로 환경과 생태의 문제점을 인식시키고 각성하도록 촉구하는 내용의 책이다. 환경과 생태에 사람들이 관심 갖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일단 경제적 궁핍 수준을 벗어나야 비로소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기기 마련이다. 과거에 비해선 진일보한 게 사실이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아직 멀었음을 깨닫게 된다. 오히려 예전과 비교할 때 환경과 생태 문제가 사회적, 경제적으로 복잡하게 얽혀있어 개선과 극복이 한층 어려워졌음도 알게 된다.

 

우리가 먹는 것이 책에서 예시한 컵라면, 바나나, 아보카도 , 입는 것- 이 책에서 다루는 패스트 패션, 롱패딩 -, 그리고 플라스틱, 전자제품, 화학물질 등처럼 일상생활에서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 환경과 생태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나아가 인류의 복지와 생존과도 직결된다는 점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이 모든 우려를 누구 하나의 잘못으로 치부하고 덮어버리기가 곤란한데, 인간의 욕망, 기업의 속성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와 사회 체제의 근본적 특성 등이 한데 어우러져 있어서다. 모두가 편리하고 쾌적한 삶을 원한다. 맛있고 진귀한 음식을 맛보고 싶어 하는 바람은 식도락가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패션모델만이 자신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포장하기 위해 애쓰는 게 아니다. 좀 더 편리하며, 아름답고 돋보이고 싶어 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충족을 위해, 때로는 욕망 발현을 부추기기 위해 기업은 다양한 상품을 생산하고 광고하며 유혹한다.

 

글쓴이는 즐거운 불편을 감수하자고 하는데, 누구라도 불편을 일부러 추구하는 사람은 없다. 취미 영역이라면 몰라도 일상생활 영역은 오직 빠르고 편리한 게 최고의 미덕이다. 환경과 생태 보전을 위해 컵라면을 먹지 말고, 휴대폰을 자주 바꾸지 말자고 하기 동의를 구하기 어렵다. 패션에 진심인 사람들한테 한가지 옷을 오래 입고, 화장품도 가급적 줄이자고 하면 지지받기 어렵다. 현대 사회는 절약이 아닌 소비를 권장하는 체제이며, 일정 정도 과소비를 전제로 경제가 돌아가는 게 자본주의 시스템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필요를 끊임없이 만들어 주고 있어. 어딜 가든 우리의 시선을 집요하게 끌어당기는 광고는 소비를 부추기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지. 새로운 물건을 지속적으로 소비자들에게 노출해서 지금 가지고 있는 물건을 낡고 진부한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거야. (P.109)

 

기업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더라도 기업이 자발적으로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환경과 생태에 신경 쓰도록 기대하는 건 어렵다. 기업의 목적은 이윤 추구에 있으며, 최대의 이익 추구를 위해 최소의 비용만을 투입하기 위해 애쓴다. 농작물 플랜테이션과 식품 회사, 플라스틱 제품과 전자제품 회사, 의류 회사들이 어쩔 수 없이 환경과 생태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도록 외부의 감시와 지도가 필요하며, 자발적으로 환경과 생태에 신경을 써야만 하도록 유인하는 정책과 제도가 요구된다.

 

일상에서 사용하는 거의 모든 것에 화학물질이 있는데, 그럼 어쩌라는 거냐고 항변할지도 모르겠구나. “이게 대안이야하고 내놓을 방법은 사실 없어. 집에서 먹거리를 싸 들고 다닐 수도 없고, 무턱대고 화장을 그만하라고 할 수도 없지. 다만 좀 줄여 보자는 거야. (P.151-152)

 

이처럼 이 책에서 제시된 여러 문제점은 개인 차원에서 당장 해결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지금 당장 문제점을 해결하지는 못하더라도 이런 사안에 계속된 관심과 주의를 쏟는 것은 의미가 있다. 수많은 개인의 관심과 목소리가 결집하면 기업도, 정치권도 결국에는 이를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십 년 전과 비교해서 우리나라의 환경오염과 생태 보전이 현저히 개선된 것은 기업과 정부의 선제적 자발적 조치가 아니라 수많은 개인과 단체들의 요구를 마지못해 수용하는 과정이 반복된 결과이다.

 

이런 까닭으로 글쓴이와 출판사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이 책을 기획한 것이다. 기성세대가 아니라 앞으로 이 사회와 국가의 주역이 될 그들을 향해서 문제점을 알아달라고, 조금이나마 고쳐보려고 노력해달라고 말이다. 2의 그레타 툰베리가 나올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 책을 읽는 사람 중 누가 그럴 준비가 되어 있을까? 이제 어른에게 더는 기대하지 말고 미래를 스스로 지킬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였으면 좋겠어. “나 혼자 이런다고 뭐가 되겠어?”가 아니라 나라도 해 볼까?”하는 생각이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걸 툰베리가 보여줬듯이 말이야!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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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클리스 - 전예원 세계 문학선 325 셰익스피어 전집 325
셰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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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타이어(Tyre)는 영어식 발음인데, 오늘날 레바논지역의 도시 이름이다. 티레, 티르, 티로 등이 원래 명칭에 가깝다. 이 작품은 타이어, 앤티어크[안티오크], 에페서스, 타서스[타소스], 펜태폴리스[펜타폴리스] 등과 같이 동지중해를 지리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두 번째, 이 작품과 <겨울 이야기>, <심벌린>, <템페스트>, <두 귀족 친척>을 일컬어 낭만극 또는 로맨스극이라고 부른다. 셰익스피어의 최후기 희곡들은 희극이지만 초기의 희극과 명확히 구별되며, 같은 비희극이지만 문제극과도 차이가 두드러진다. 이 작품을 대하면 차이점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데, 우선 형식 면에서 막마다 서사가 있어서 막간의 사건 경과를 설명해 준다. 때로는 무언극을 추가하여 더 가시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내용 면에서 차이는 더 두드러지는데, 1막부터 종막에 이르기까지 주인공은 온갖 역경과 불행에 맞닥뜨린다. 결말은 희극으로 끝나지만 비극적 성격이 압도적이다. 주인공이 겪는 고초는 인간에 의한 게 아니라 운명과 자연 등 인간의 힘으로 어찌해볼 도리가 없이 감내해야 하는 속성을 지닌다. 이 점에서 중기의 비극과도 구별된다.

 

세 번째, 고전 희곡은 삼일치의 법칙을 대체로 준수하며, 셰익스피어의 작품도 큰 틀에서는 이를 따른다. 이 작품은 시간과 장소에서 그의 작품 중 가장 압도적인 규모를 보인다. 시간으로는 페리클리스가 구혼하러 앤티오크를 방문하는 데서부터 성인이 된 딸 마리나와 재회하는 장면까지 수십 년을 가로지르며, 공간으로는 앞서 말했듯 동지중해의 다채로운 국가들을 넘나들고 있다.

 

이 작품의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고결한 품성을 지니고 있다. 페리클리스와 그의 아내 타이사, 딸 마리나가 그러하며, 충신 헬리케이너스와 타이사의 생명을 구한 세리먼도 마찬가지다. 라이시머커스는 고결하다고 하기에는 약간 애매한데, 클리언과 다이어나이자에 비하며 훨씬 낫다. 클리온은 자체로서 그리 나쁜 편은 아니지만, 아내와 딸을 향한 쏠림을 극복하지 못한 소심함 때문에 비참한 최후를 마치게 된다.

 

(라이시머커스) 내가 결코 야비한 의도를 갖고 이곳에 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여라. 이 문들이고 저 들창들이고 내겐 구역질이 난다. 그럼 잘 있거라. 넌 미덕 그 자체이다. (P.125, 46)

 

고매한 성격의 극치는 마리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녀는 해적에게 붙잡혀 유곽에 팔려 가지만, 매춘부로 타락하기를 거부한다. 찾아온 손님들에게 신성한 설교를 하여 개심시켜 유곽 판을 떠나게 하고, 태수 라이시머커스를 감복시킨다. 4막에 등장하는 유곽 장면은 셰익스피어가 원작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추가한 부분으로서 전반적으로 무겁고 진지한 극 분위기에 이색적이면서 해학적인 면모를 제공하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페리클리스의 개인사를 꼬이게 만든 계기는 근친상간을 알아차린 그에게 복수하려는 앤티어크의 왕이다. 앤타이어커스 왕과 공주의 비윤리성은 훗날 페리클리스와 마리나의 도덕성과 윤리성에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페리클리스는 자신으로 인해 고국이 침략당할까 우려하여 잠시 외유를 떠난다. 이후로는 전적으로 자연의 힘이 개입한다. 타서스를 떠났을 때와 펜태폴리스에서 고국으로 귀향할 때 각각 거센 폭풍우에 맞닥뜨린다. 전자에서 그는 펜태폴리스로 떠내려가 결국 아내를 얻지만, 나중의 폭풍우에서 그는 아내를 잃게 된다. 즉 폭풍우는 그가 가족을 이루도록 하다가 다시금 뿔뿔이 흩어지게 만드는 역할을 맡는다.

 

영주는 타서스에 더 오래 머물러 있지 /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 영주는 이 충언을 전해 듣고 다시 바다로 나갔습니다. / 그곳 바다도 그에겐 평온하지는 않은 곳이었습니다. / 바다에 나가자 갑자기 바람이 무섭게 휘몰아쳐 / 머리 위에선 천둥이, 다리 아래에선 거센 파도가 / 뒤끓고 그를 지켜야 하는 배도 나뭇잎처럼 / 희롱 당하다가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P.50-51, 2막 무언극)

 

그들의 배가 / 해양의 높은 파도에 흔들리고 흔들리면서 겨우 바다 / 한 가운데쯤 지났을 때 변덕쟁이 운명의 여신이 / 또다시 변덕을 부려 사납게 휘몰아치는 북풍은 / 태풍을 불러일으킵니다. 그 때문에 / 가엾게도 배는 오리처럼 물 속에 잠겼다가 물위에 / 뜨곤 하면서 겨우 파도를 헤쳐 나갔습니다. (P.81, 3막 무언극)

 

인간은 거역할 수 없는 자연과 운명의 위력 앞에서 절망하고 자포자기하기 마련이다. 페리클리스가 상실한 가족의 기억을 털어버리고 새 출발 하였다면, 마리나가 자신의 처지에 순응하여 유곽의 일개 매춘부로 영락하였다면, 이 작품의 주인공이 맞는 행복한 결말에는 이르지 못하였을 것이다. 앤타이어커스 왕과 공주는 표피적 본능에 이끌려 천륜을 어겼으며, 클리온과 다이너나이자는 딸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은혜와 도덕을 모두 외면하였으니 그들의 말로는 아름답지 못하였다. 5막 종장에서 서사역의 가워는 다음과 같이 요약 정리한다.

 

(가워) 앤타이어커스와 그의 딸 사이에 있은 / 불륜은 당연하고 정당한 응보를 받았습니다. / 페리클리스와 왕비, 공주에게는 한때 / 가혹하고 격렬한 악운이 그들을 괴롭혔으나 / 미덕은 잔인한 파멸의 폭풍을 견뎌내고 / 신의 가호로 결국 기쁨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P.155, 5막 종장)

 

결론적으로 고난을 극복하고 가족 상봉을 이루었고, 마리나는 라이시머커스와 결혼하게 되니 두루 잘 마무리되었다고 하겠지만, 못내 찝찝하다. 정말로 행복한 결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각기 죽음과 치욕과 슬픔과 절망의 나날 속에 잠겨 인생의 수십 년을 보냈는데 그들이 속절없이 보내버린 세월과 가슴속 깊이 새긴 상처는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치부해도 괜찮은 건지를. 단순한 고통이 아니다, 죽음에 이를 정도로 깊고 뼈저린 아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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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좋으면 다 좋아 셰익스피어 전집 2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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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문제극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희극도 비극도 아닌 어중간한 성격의 작품을 문제극으로 분류하는데, 분명 결말은 희극으로 끝남에도 독자에게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작품들이다. 이 희곡 <끝이 좋으면 다 좋아>도 마찬가지다. 신분 차이에도 불구하고 짝사랑하던 헬레나가 버트람과의 결혼을 성취한다는 점에서 누가 봐도 희극이라고 할만하나 헬레나와 버트람의 결혼 성사가 정상적인 수단과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과연 정당하게 이루어진 것인지 의구심이 들게 한다. 특히나 버트람의 처지에서 보면 당황스럽고 황당하기 그지없는 결혼이라고 볼 수 있다.

 

여주인공 헬레나의 개인적 자질에 대해서는 극 중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백작부인은 그녀를 딸처럼 키웠으며 헬레나가 아들을 사랑하는 것을 눈치채고도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지원한다. 5막에서 헬레나가 죽었다고 오인한 왕은 그녀를 보물에 비유하며 애석해한다. 이 모두가 헬레나가 뛰어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평가다.

 

(헬레나) 그분을 사모하는 건 천상의 빛나는 별을 연모하여 그와 결혼하려는 것과 같아, 그분은 별처럼 그렇게 높은 곳에 계시지 뭐야. 내가 감히 어찌 그 성좌에 오를 수가 있담. 다만 그 별에서 비쳐오는 빛을 받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P.25, 11)

 

(헬레나) ! 이루지 못 할 사랑인 줄 뻔히 알면서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 불쌍한 것을 가엽게 여겨 주세요. 찾을 것을 애써 찾을 수도 없고, 남몰래 사랑을 가슴속에 간직한 채, 신음하며 살다가 죽어갈 것이니 말이에요. (P.45-46, 13)

 

헬레나는 자신의 신분상 한계를 자각한다. 그녀가 버트람을 연모하지만 현실에서는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명확하게 자각한다. 그저 마음속에만 품을 생각이라고 다짐하던 그녀는 왕의 병을 치료하는 조건으로 버트람과의 결혼을 요구한다. 버트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과연 그가 자신을 아내로 받아들일지 여부 등에 대해서는 한 치의 고민도 없다. 어떤 수를 써서든 쟁취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는 판단인 것이다. 이렇듯 그녀는 상반되는 행동 변화를 일으키며 버트람이 그걸 받아주길 무리하게 기대한다.

 

(헬레나) 전 제가 얻은 이 부귀를 받아들일 가치도 없는 여자고, 또 감히 제것이라고 주장할 생각도 없지만... 역시 제것은 제것이에요. (P.87, 25)

 

버트람의 생각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전근대적인 사회에서 결혼은 당사자의 의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양가의 부모가 합의하면 충분하고, 혹여 남성이 자신이 마음에 둔 여성과 결혼하려고 부모를 설득하는 사례는 있지만, 여성이 전면에 나서서 결혼을 추진하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다. 버트람은 헬레나를 결혼 상대로 전혀 생각조차도 해 본 적이 없다. 그의 눈에 헬레나는 하녀에 가까운 존재일 뿐이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아내 지위를 차지하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일 것이다. 그로서는 거부할 수 없다. 거부는 곧 왕명을 거역하는 셈이므로.

 

(버트람) 신은 저 처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선친께서 거둬 교육시킨 빈한한 의사의 딸인데, 그런 여잘 신의 아내로 삼으라는 말씀이십니까? (혼자말로) 차라리 멸시로 영원히 파멸하는 것이 오히려 낳겠다! (P.72, 23)

 

(버트람) 난 강제로 결혼 당한 거요, (P.124, 42)

 

헬레나는 버트람을 확실한 자기 남편으로 만들기 위한 계책을 꾸민다. 이른바 침대 속이기를 통해 남편의 반지를 가로채고 동침하여 임신한다. 이런 책략에 대해서 자신이 그의 법적인 아내이므로 정당화하는데, 여기서 표제의 문구가 등장한다.

 

(헬레나) , 그럼 출발해요, 마차 준비도 돼있어요, 세월이 가면 우리도 되살아 날 거예요. “끝이 좋으면 다 좋아예요. 그리고 끝은 면류관이죠. 어떤 험한 길을 가고 나면 명예가 있어요. (P.144, 44)

 

나중에 왕도 헬레나와 버트람의 재회 장면을 바라보면서 비슷한 논평을 한다.

 

() 차차 모든 전말이 세세히 밝혀질 테지. 어쨌든 만사 끝이 좋으면 다 좋게 되는 법이니 좋은 일이 아니냐. 씁쓸한 지난 일은 다 흘려버리고, 앞으로 달콤한 일들만이 반갑게 찾아올 것이다. (P.174, 53)

 

끝이 좋으면 다 좋아는 철저한 결과 지상주의적 표현이다. 현대사회의 우리네 가치관과는 전혀 배치되는데, 결과가 제아무리 좋아도 과정과 절차에서 비도덕적이거나 하자가 있다면 결과 자체도 인정받지 못하는 게 지금이다. 즉 표제의 지향점은 전근대적인 사고를 내포하고 있는데, 셰익스피어가 이를 표제로 삼은 게 긍정적 의미인지 아니면 역설적 의미로 사용했는지 미묘하다.

 

왕과 백작부인이 헬레나의 가치를 못 알아보고 떠나버린 버트람을 비난하기에 앞서, 헬레나가 보물임을 알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버트람에게 주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버트람을 속여서 반지를 빼내고 아이를 잉태하였음을 조건으로 제대로 된 결혼을 요구하는 헬레나의 태도, 침대 속이기에서 여인 헬레나라는 사실을 모른 채 열렬한 사랑을 보여준 버트람을 조소하는 듯한 발언 등을 보면 헬레나에 선뜻 호감을 갖기 어렵다.

 

(헬레나) “내 손가락에서 이 반지를 빼내고, 내 자식을 잉태하였을 때 등. 이제 다 이뤄졌어요. 둘 다 말씀대로 됐으니 이젠 당신은 저의 남편이 되어 주시겠습니까? (P.173, 53)

 

(헬레나) 남자란 이상도 해요. 그토록 미워하던 사람을 그렇게 어여쁘게 대해 줄 수 있다니 말예요.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눈이 멀어서, 암흑도 무색할 정도로 욕정의 불꽃을 튀기니! 색정이란 그런 건가 봐요, 사람이 바뀐 줄도 모르고, 역겨워하던 사람을 그렇게도 애무하다니 이 얘긴 나중에 또 하기로 해요... (P.144, 44)

 

버트람은 헬레나의 높은 기대와 평가를 받기에는 다소 부족해 보이는 인물이다. 그는 극히 평범한 귀족 자제에 불과하다. 패롤리스라는 비열한 허풍쟁이를 친구이자 동료로 믿었으며, 예쁜 여자를 보면 넘보기에 허겁지겁하는 그에게 별다른 미덕을 찾기 어렵다. 게다가 자신의 부끄러운 행위를 숨기기 위해서 정숙한 여성을 미친 여자, 천한 창녀로 모욕적인 언사도 함부로 하는 어리석은 면모까지 보인다. 뻔히 드러날 거짓말을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남용하니 한심스럽기조차 하다. 그렇더라도 그가 헬레나의 속임수에 빠져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되는 사건이 용납된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이 극에서 희극적 역할을 담당하는 배역은 어릿광대와 패롤리스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어릿광대는 무겁고 진지한 분위기에서 유독 제 마음대로 지껄이는 특권을 부여받은 존재인 동시에 아무도 발설하지 못하는 진실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인물이다. 이 작품에서 어릿광대는 희극적 분위기 조성에 기여할 뿐 그리 큰 인상은 남기지 않는다. 오히려 패롤리스가 해학과 악역의 이중적 역할을 맡아서 존재감을 과시한다. 그에 대한 극 중 인물의 평가는 철저히 부정적이다.

 

(라후) 이제 너의 정체는 다 드러나고 말았어. 그러니까 너 같은 잔 없어져도- 눈 하나 까닥하지 않는다 이 말이다. 길바닥에서 주운 넝마밖엔 안 되는 자이니까. 아니 그만한 가치도 없단 말이다. (P.76, 23)

 

(백작부인) 아주 치사하고 못난 사람이지. 사악한 간교에 차있고요. 내 아들의 타고난 착한 심성도, 그자의 요살스런 농간으로 타락한 겁니다. (P.97, 32)

 

(마리아나) 이 악당아, 콱 뒈졌으면 좋겠다! 패롤리스란 관리인데, 그 젊은 프랑스의 백작에게 추잡한 짓을 시키려는 곱살 낀 쓰레기 같은 뚜쟁이라구요. (P.103, 35)

 

(귀족2) 그잔 참으로 비열한이오, 터무니없이 큰 거짓말쟁이입니다. 거기다가 약속을 떡먹듯이 어기는 자죠. 백작께서 신임하시는 그 심덕을 받을만한 점은 전혀 없는 자입니다. (P.108, 36)

 

패롤리스는 주위 사람들의 함정에 빠져 버트람의 뒤통수를 치고 자신의 본색이 탄로 난다. 대개 악역은 정체가 드러나면 그것으로 회복할 수 없는 나락으로 빠져버리는데 이 작품에서 패롤리스는 그렇지 않은 게 이색적이다. 알고 보면 패롤리스는 극 중 인물들이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악한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리숙한 버트람을 뜯어먹고 호의호식 하려다가 자충수에 걸려든 미워할 수 없는 악당에 가까울 수도. 겉만 그럴듯하지만 실은 겁 많고 단순한 허풍쟁이로. 라후가 그를 받아주는 까닭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패롤리스) 그저 타고난 그대로 살아가야지. 스스로 허풍쟁이로 아는 자는 조심해야한다. 제가 아무리 허풍을 떨더라도 언젠가는 꼭 들통이 나서 바보가 되고 말 테니까 말이다. 검이여, 속슬어라! 붉어진 뺨이여, 냉정을 찾아라! 패롤리스는 치욕 속에서 편히 살리라! 바보 꼴이 됐다면 바보답게 번창할 것이다! (P.142,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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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미터 그리고 48시간 낮은산 키큰나무 17
유은실 지음 / 낮은산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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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자신의 투병 경험을 토대로 쓴 작품이다. 그레이브스병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다. 발병 원인과 특이한 증상, 그리고 치료 방법에 대해서도. 내 몸의 방어체계가 내 몸의 기관을 적으로 오인하여 공격하기에 발병한다는, 참으로 어이없어 웃고픈데 당사자로서는 괴로울 뿐이니 난감하다.

 

작가는 여고생 정음이를 화자로 내세워 환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회의 모습, 그리고 가족 간 관계와 진실한 우정 등을 곱씹는다. 전체적 어조는 슬프고 가라앉기보다는 오히려 차분한 가운데 유머러스한 맛을 풍기며 독자의 심경을 덜 무겁게 하고 있다.

 

표제의 ‘2미터‘48시간은 화자가 방사성 요오드를 복용한 후 타인에게 방사능이 피폭되지 않도록 거리를 두어야 하는 공간과 시간의 범위다. 소설의 큰 줄기는 정음이가 방사성 요오드 치료를 받기까지, 그리고 받은 후 안전한 은거 장소로 이동하기까지의 난관을 헤쳐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게 뭐 대수로운 일인가 싶지만, 정음이에게는 상당한 난제인 게 그의 집안 형편이 여유롭지 않기에 대중교통으로 이동하고 비좁은 아파트에 거주하는 처지다.

 

정음에게 아빠는 자신과 가족의 삶을 어렵게 만든, 그리고 책임을 저버리고 도망친 존재에 불과하다. 아빠는 정음네 가족의 주변부를 배회할 뿐 가족의 일원으로 되돌아오고자 하는 노력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빠의 조언 덕택으로 발병을 인지하게 되었고, 안전한 거처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한가득 준비한 무요오드 음식과 반찬은 정음을 향한 아빠의 마음이지만, 정음에게 아빠는 여전히 불편한 존재이다.

 

나랑 같이 있는 게 불편하니?”

아빠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는 곧 집에서 나갔다. 그게 끝이었다. 그 집에서 보낸 시간 동안 누군가와 함께 있었던 건. (P.153-154)

 

방사성 치료는 정음이를 둘러싼 교우 관계의 음영도 낱낱이 드러낸다. 친구로 우정을 맹세했던 HS는 정작 피폭을 두려워하여 병원에 함께 가는 걸 회피한다. 홀로 병원에서 고군분투하던 정음이의 눈에 비친 것은 학급의 짝인 인애다. 그는 단지 짝 이상의 관계는 아님에도, 정음이가 홀로 치료를 받게 됨을 걱정하여 보충수업도 빼먹고 찾아온 것이다. 정음이는 처음에 자신의 현실이 부끄러워한다.

 

나는 가만히 김인애를 보았다. 김인애도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봤다. 눈을 마주치는 게 불편했다. 다 들켜 버렸다. 친구도 가족도 없이 혼자 이렇게 있는 걸. 목욕탕에서 발가벗은 채 아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부끄러웠다. (P.88-89)

 

인애가 보여준 새로운 우정의 행동과 특히 컵라면을 얻어먹기 위한 계획, 즉 놀랍고 대단하고 치밀하고 방대한 모습은 서서히 정음이 마음을 열고 진실한 우정을 받아들이게끔 해준다. 그리고 정음은 다소간의 행복을 느낀다.

 

나는 조금 행복했다. 깨끗하게 낫는 날은 오지 않더라도, 인애와 함께 나란히 앉아 컵라면을 먹는 날은 꼭 올 거 같아서. (P.155)

 

여기서 우리는 정음이와 아빠의 관계, 정음이와 HS의 관계가 정리될 것으로 섣부르게 예상해서는 안 된다. 정음이는 주름 가득하게 늙어 가고 있는 아빠 얼굴을 코앞에서 바라보았으며, 2미터 밖으로 물러나 버렸지만 여전히 옅은 우정이나마 이어나갈 것이다. 인간관계란 게 칼로 무 베듯 딱 잘라질 수 있는 게 아니므로.

 

병은 사람을 아프게 하고 때로는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지만, 사람과 세상을 보는 관점을 달리하게 만드는 존재이다. 출세와 성공을 위해 맹목적으로 돌진하던 사람이 중병을 선고받은 이후 삶의 우선순위가 바뀐 이야기를 간혹 접하게 된다. 정음이도 좋건 싫건 간에 그레이브스병에서 여러 영향을 받았다. 가장 먼저 갖게 된 것은 두려움이다.

 

엄마가 나와 내 병을 함께 품어 주는 느낌이었다. 따뜻했다. 그리고 불안했다. 나라는 존재 안에 병이 스며들어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까 봐. 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레이브스 환자 역할이 내 인생에서 잠깐 맡은 배역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P.40)

 

사람들은 환자에게 무리하게 요구하지 않는다. 일상적 기대의 수준을 대폭 하향하거나 아예 기대를 품지 않는다. 환자의 무기력증은 병세 자체에도 원인이 있지만, 정음이의 고백처럼 질병에 책임을 전가하는 무의식적 타성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골치 아픈 개인사와 세상사가 질병 하나로 장막 뒤로 감춰져 버린다.

 

지난 4, 나는 병 때문에 아주 괴로웠지만 그만큼 병을 의지했다. [......] 성적, 친구 관계, 감정의 기복, 대학 입시, 늘어나는 체중...... 많은 문제를 그레이브스 씨에게 뒤집어씌웠다. 그러고는 그레이브스 씨가 드리워 주는 그늘에 숨어 버리곤 했다. (P.97-98)

 

환자의 심정은 본인이 환자가 되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다. 환자와 환자의 간병인의 어려움에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낀다. 또한 전에는 무심하게 지나치고 무심하게 여겼던 타인의 말과 행동, 그리고 마음 씀씀이가 더는 대수롭지 않게 다가온다. 아파도 잘 웃어야 한다는 J의 어설픈 충고, 죽음을 기다리는 할머니의 거친 숨소리.

 

내 새끼, 아픈 몸으로 사느라고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 아무도 모른다. 아파 보기 전에는 몰라.”

할머니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러고는 멍해졌다. 엉덩이뼈가 부서진 채 누워서, 6인실의 소음을 견디며 죽음을 기다리는 할머니. 그 할머니가 단단히 잠겼던 빗장을 열고 내 마음속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P.144)

 

이 작품은 좁게 보자면 그레이브스병에 걸린 여고생의 자잘한 신상과 주변 상황을 담고 있는 소품이지만, 넓은 시각으로 바라보면 질병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다양한 관계에 대해 인식의 재조명을 하는 가벼우면서도 진지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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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마음은 태양
E. R. 브레이스 웨이트 지음, 박중서 옮김 / 청미래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이 책이 내 독서 위시리스트에 무슨 까닭으로 포함되어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한 흑인 교사가 무너져가는 교육 현장을 힘겹게 재건한다는 내용이 관심을 끌었을 수도 있겠다. 직업적으로, 개인적으로도 학교 현장을 내게 남의 일은 아니므로.

 

영화를 통해 이 작품을 접한 사람(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은 이 작품의 한쪽 측면만 보았을 뿐이다. 교사 브레이스웨이트가 변두리에 위치한 열악한 고등학교 학생들을 올바르게 이끌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은 작품의 중요한 내용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브레이스웨이트가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겪으면서 이를 극복하는 힘겨운 여정이 작품의 또 다른 축을 형성한다. 독자는 소설을 읽으면서 주인공이 자신에 대한 부당한 차별에 얼마나 고통을 겪고 괴로워하는지를 생생하게 보게 된다. 너무나도 익숙하고 당연하던 것이 피부색의 차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불가능하고 불인정 받는 당대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표출되는 장면들을. 이 작품이 출간된 게 1959년인데, 미국이 아닌 영국에서도 차별이 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소설은 작가의 자전적 체험이 짙게 반영되어 있어 주인공이자 화자는 곧 작가 자신이기도 하다. 브레이스웨이트는 영국 식민지 출신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공군 조종사로 활약했으며, 전후에는 물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똑똑하고 전도유망한 청년이다. 그가 고등학교 교사가 된 것은 매우 우연한 기회였다. 당초 그의 계획대로 전문분야에서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면 전혀 꿈도 꾸지 않았으리라. 이 모든 게 그가 흑인이라는 사실에서 비롯하였다.

 

나는 흑인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 면접 장소에서 벌어진 일이야말로, 지금까지의 내 굳은 믿음에 대한 배신이 아닐 수 없었다. [......] 그리고 인종이나 종교와는 무관하게 내 자격에 걸맞는 직업을 선택해서 일할 자유가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인권에 관한 그럴듯한 이야기도 이제는 헛소리 같이 여겨졌다. (P.63)

 

피부색은 소설의 시작부터 끝까지 항상 그를 따라다닌다. 그가 일자리를 구하고, 학생들을 지도하며, 하숙집을 찾고, 신문의 흥미로운 취재 대상이 되며, 레스토랑에서 푸대접을 받으며 끝내는 그가 일생의 반려자를 구하는 데도 중대한 장애 요인이 된다. 오늘날에도 간간이 유럽과 미국에서 유색인종에 대한 인종차별이 뉴스로 부각될 정도이니 당대로서는 차별이 보편화되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역지사지라고, 나 자신이 부당한 차별 대상이 된다면 그 심정이 어떠할지 예상하기 어렵다. 그 모멸감과 좌절, 그리고 분노 등등. 끝내는 증오만이 남았을 것이다. 여기 화자도 그러하다. 다만 그는 더 현명하여 이를 자기 극복의 계기로 삼았고, 학생들에게 차별이 옳지 않음을 가르칠 수 있었다. 그랬기에 실즈의 모친상에 조문을 꺼리는 학생들의 태도에 좌절을 느끼는 그에게 공감할 수밖에 없다. 수 개월간의 교육 덕택에 아이들이 편견을 벗어던졌을 거로 생각했던 자신의 믿음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으므로.

 

아무것도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가르침도, 토론도, 모범도, 인내도, 걱정조차도, 그 모두가 거짓이었다. 이 아이들도 결국, 버스나 기차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오로지 피부색으로 판단할 뿐이었다. 결코 그 피부 속의 사람자체를 보지는 못했다. (P.267)

 

오늘날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관련 교육도 받아야 하고 자격증도 있어야 한다. 화자가 아무런 경력과 자격 없이 덜컥 교사, 그것도 우리로 치면 고3 교사가 된 걸 보면 당대에는 요구 조건이 느슨했던 모양이다. 어쨌든 초보 교사로서 그가 맞닥뜨린 교실 현장은 녹록지 않다. 제아무리 교육관과 교육철학이 훌륭하더라도 현장에서 이를 실현하지 못하면 공염불에 불과하다. 초보 교사 릭도 실패를 거듭하다 어렵사리 길을 찾았으니 학생들을 아이가 아니라 어른으로서 대우하는 방식에서였다. 학생이든, 자식이든 아이로 취급하는 순간 수직구조가 생성되고 지시-복종 관행이 발생하기 쉽다.

 

나는 이제부터 여러분을 아이가 아니라 어엿한 성인 남자와 여자로 대해주기로 했습니다. 나뿐만이 아니라, 여러분끼리도 서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아이의 위치에서 벗어나면, 지금보다는 더 높은 수준의 품행을 요구받게 마련이므로...” (P.113)

 

상대가 나를 진정으로 존중하고 예우한다면, 내가 상대에게 함부로 하기 어렵기 마련이다. 교사를 무시하고 대들며 규칙을 위반하던 학생들이 변하기 시작한 건 자신이 선생님으로부터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받고 존중받는 자각에 있다. 교사가 학생에게 그렇게 하는데 학생끼리 종전의 막무가내처럼 행동하기는 더 어렵다. 그야말로 신의 한 수라고 하겠다. 하지만 그것은 무엇보다 진정과 신뢰가 바탕에 놓일 때 가능하다. 릭이 안정된 틀을 허물어뜨릴 수 있는 위험한 도전에 때때로 직면할 때가 있지만 현명하게 대처한 덕분에 그와 학생들 사이에 믿음과 사랑이 싹틀 수 있었다.

 

선생님이 저희한테 말씀하시는 방식이 저희는 무척이나 좋았어요. 그러니까 애들한테 말하듯 하는 게 아니라, 꼭 어른을 대하듯 하시는 거 있잖아요. 선생님은 저희한테 정말 잘해주셨어요.” (P.299)

 

교사의 역할은 어디까지일까? 릭이 학생들의 존중과 신뢰를 얻음에 따라서 학생 개개인에 대한 그의 영향력이 커진다. 파멜라와 패트릭은 개인적 사안으로 교사가 자신의 사적 영역에 개입하도록 직간접적으로 요청하기에 이른다. 학교와 교실에서라면 교사의 조언과 지도는 당연하겠지만, 가정사에도 관여하는 게 바람직한지 그리고 가능한지 화자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생각할 여지가 많다. 학교는 교사가, 가정은 부모가 담당하는 게 원론적으로 마땅하지만, 그렇게 공과 사가 물 베듯 명쾌하게 갈라질 수 있는 게 아님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럼에도 교사는 학생의 사생활은 외면하는 게 타당한지 화자는 당혹해한다.

 

작가는 인종차별의 사안을 한 축으로, 교육 현장의 사안을 다른 한 축으로 삼아 작품을 전개한다. 양자는 나란히 또는 교차로 전개되면서 갈등과 해소를 거듭한다. 독자는 끝내 알아차린다, 양자의 본질이 결국은 동일함을. 즉 중요한 건 사람자체라는 점을. 갈등은 실즈의 모친상을 계기로 해소되고 화자와 학생들은 극적인 화합을 이룬다. 주인공 개인으로서는 질리언과의 결혼 약속으로 나타난다.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결혼 이후의 삶도 결코 간단하지는 않겠지만 릭은 위험과 어려움을 무릅쓰기로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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