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석 목양신 - 또는 몬테 베니 이야기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273
너다니엘 호손 지음, 김용수 옮김 / 나남출판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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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는 <몬테 베니 이야기>인데, 몬테 베니는 작중 주요 인물 네 명-미리엄, 힐다, 케년, 그리고 도나텔로-가운데 도나텔로를 지칭한다. 도나텔로의 집안이 토스카나 지방의 유서 깊은 몬테 베니 백작 가문이다. 이 작품 역시 작가에 따르면 로맨스. 호손은 자신의 주요 소설들을 로맨스로 굳이 구분한다. 신생 미국에서 로맨스를 쓰는 어려움을 토로한 호손이기에 유럽, 그것도 로마라면 풍부한 로맨스의 소재가 넘쳐났을 것이다. 로맨스는 중세에 연원한 형식이므로.

 

호손의 작품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방대-<주홍글자>에 비하면 거의 두 배 분량이다-한 이 소설을 읽다 보면 독자는 전형적인 호손의 특성과 함께 생경하고 당혹스러운 의문감이 끊이지 않고 내심에서 분출하게 된다. 방대함의 적절성에 대한 의구심이다.

 

주요 인물들 간의 대화와 사건의 얽히고설킨 전개는 그렇다 하자. 또 도나텔로를 제외한 그들의 직업이 예술가, 즉 두 명은 화가, 한 명은 조각가이므로 회화, 조각, 건축 등에 대한 비평과 작품 소개 및 감상이 일정 부분 등장하는 것도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 그럼에도 로마의 유적과 유물에 대한 과도할 정도로 상세한 소개와 묘사는 불필요하게 작품의 방대화에 기여한다는 인상이다. 이 부분을 대폭 축소하였다면 최소한 <일곱 박공의 집> 정도에 가깝게 독자에게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었을 텐데.

 

문득 소설이 아닌 기행문의 시각으로 바라보자 모든 의문이 해소되었다. 약 이백년 전 미국인들 가운데 유럽 여행을 해본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네들의 문화적, 정신적 뿌리가 유럽이므로 많은 호기심이 있었음에도 시간적, 경제적 형편상 극소수만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로마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서 작가는 로마의 유서 깊은 문명의 자취에 대한 당대인의 지적 호기심과 갈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을 반영한 게 아니었을까. 나중에 작품해설에서 옮긴이는 많은 당대인들이 이 작품을 로마 여행서로 받아들였다고 언급하여 이 추측을 입증한다.

 

작품을 이끌어가는 동력은 미리엄과 그녀를 둘러싼 전혀 대조적인 두 인물 간의 과거와 갈등, 그리고 대립이다. 도나텔로와 대리석 목양신 조각상의 놀랄만한 유사성은 작품 첫머리에서 인물들 간에 화제거리가 되지만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반복적인 농담을 통해 복선을 구축한다. 외면에서 내면으로. 게다가 빼어난 미모의 미리엄의 주위를 배회하는 정체모를 인물 모델의 음험하고 사악하기 조차한 이미지. 이 둘은 빛과 그늘, 지상과 지하, 낮과 밤, 순진과 죄 등 완전히 상반되는 유형의 인물이다.

 

여기에 미리엄의 모호함과 비밀이 곁들여져서 작품을 다소 어둡고 모호하며 신비스럽게 이끌어간다. 그녀는 뭔가를 숨기고 있다. 어둠과 죄악에 대한 거역할 수 없는 속박을 암시하는 미리엄의 대사는 절실함과 동시에 숙명적 체념을 담고 있기도 하다.

 

당신 자신을 위해서 날, 떠나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운명이 지워진, 다른 세상에서 온 여자인 나와 함께 이 숲에서 헤매는 것은 당신이 상상하는 것만큼 그리 행복한 일이 아니야. (P.103)

 

당신은 날 떠나야 해!......당신의 시간은 지났고, 그의 시간이 왔어! (P.112)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원죄를 지니고 태어난다. 순수하고 무구한 사람은 없다. 이 점에서 미리엄은 지극히 인간적이며 사실적이다. 반면 도나텔로와 힐다는 비현실적이다. 그들은 순진과 순수를 상징한다. 느리고 단조롭게 흘러가던 시간은 운명적인 사건 이후 급변한다. 그들 넷은 뿔뿔이 흩어지고 단편적으로 재회하지만 결코 과거를 회복할 수 없다.

 

신화 속 목양신처럼 자연과 환력, 순진의 화신이었던 도나텔로는 미리엄을 사랑하게 되면서 서서히 변모하며, 운명적 사건 이후 전혀 다름 사람이 되었다. 풍부하고 즐거우며 건강한 삶, 단순하고 흠 없는 기쁨으로 가득했던 도나텔로는 에덴동산을 떠나게 된 아담이 되었다. 그 사건이 미리엄에게 미친 파장보다 도나텔로에 심대한 영향을 준 것은 이런 연유다.

 

조각가는......얼마나 철저하게 그 멋지고 신선한 야수적 기운의 광채가 그의 얼굴에서 떠나버렸는지를 목격하고는 깜짝 놀라고 경각심이 일었다......모든 그의 젊은이다운 쾌활함과, 그와 함께 단순한 매너가, 완전히 없어지진 않았어도 그림자로 가려졌다. (P.216)

 

이따금, 불쌍한 도나텔로는 마치 비명을 들은 듯 깜짝 놀랐고, 가끔은, 마치 보기에도 두려운 어떤 얼굴이 자신의 얼굴에 가까이 들이밀어진 듯, 뒤로 움츠렸다. 이 음침한 분위기 속에서, 죄와 슬픔에 대한 신기함으로 당황하여, 유사함 때문에 그리고 장난삼아서 그의 세 친구들이 환상적으로 그를 바로 그 <프락시텔레스의 목양신>으로 인식했던 그 기이한 유사함이 그에겐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P.238)

 

죄를 저지른 미리엄과 도나텔로와 달리 힐다는 순수 그 자체이다. 옛 대가들의 영혼과 일체화된 공감을 지니고, 성모의 성소를 지키며 비둘기들이 힐다를 따르는 설정에서 독자는 작가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우연히 목도하게 된 죄의 현장, 그리고 범죄와 윤리, 우정 사이에서 그녀는 미리엄을 이해하고 용서하길 거부한다. 그녀는 자신의 순수함을 유지하고자 애쓰나 고뇌는 날로 깊어진다.

 

힐다의 상황은 모든 자신의 고민을 자신의 의식 안에 가둘 필요성으로 인해 무한히 더 비참해졌다. 미리엄의 범죄에 대한 인식을 자신의 연하고 섬세한 영혼 안에 간직한 이 순수한 소녀에게는, 그 효과는 마치 자신이 그 범죄에 참여했던 것과 거의 같았다. (P.376)

 

죄로 얼룩진 비참한 자들보다 어느 누가 순수한 자의 부드러운 구원을 더 필요로 하겠는가! 그리고, 우리 자신의 옷이 얼룩이지지 않도록 이기적으로 조심하는 것으로 인해 우리가 그 죄지은 자들을 우리의 심장에 가까이 껴안지 못해야 한다면, 우리가 순수하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어디에 그들의 가장 안전한 더 이상의 악으로부터의 도피처가 있는가! (P.439)

 

조각가 케년은 이해자이자 중계자이다. 그는 도나텔로의 변화를 통해 죄의 윤곽을 알아차리면서도 도나텔로를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미리엄에 대한 힐다의 완고함을 책망하면서 세상이 선과 악의 단순한 이분법적 구조가 아님을 지적하는 그는 건전한 이성과 감성의 소유자라고 하겠다. 그는 도나텔로와 미리엄의 재회와 화해를 유도하면서 그들에게 참회와 속죄의 삶을 살아가도록 권고할 수 있었다. 물론 그의 정신적, 예술적 감성은 아폴론적이라는 근원적 한계를 지녔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 힐다, 당신은......악한 것들에 어떠한 선의 혼합물이 있을지, 그리고 아무리 엄청난 범죄인이라도 그의 행위를 그 자신의 견지에서, 아니면 어떤 측면 지점에서라도 바라보면 결국은 그렇게 논의의 여지없이 유죄로 보이지는 않을지 모른다는 것을 모르오. (P.437)

 

세속적 희열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질고 고통스러운 삶을 향한 상호간의 높임과 격려를 위해서, 당신들은 서로의 손을 잡으시오. 그리고 만일, 옳은 일들을 향한 수고, 희생, 기도, 회개, 그리고 진지한 노력에서 결국은 음울하고 사려 깊은 행복이 나오거든, 그걸 맛보고 하늘에 감사하시오! (P.369)

 

호손의 전작들을 관통하는 공통 주제어는 죄와 죄의식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다. 이 작품에서도 그것이 명확히 드러난다. 천방지축이던 도나텔로는 죄를 통해 변모하였다. 어떤 점에서 보다 성숙해졌다고 하는 게 마땅하다. 죄를 통해 도나텔로는 양심을 자각하게 되었으며, 내면에의 성찰과 도덕적 기준에 대한 인식,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재고하게 되었다. 섣부르게 단언하면 죄와 죄의식은 인간의 성숙에 있어 필요악적인 역할을 담당한다고도 하겠다. 그렇다고 볼 때 에덴동산에서의 원죄는 결국 인간이 자연 세계에서 벗어나 진정한 인간 세계로 진입하게 되었음을 상징하는 셈이다.

 

그것은 그를 불붙여 어른으로 만들었었고, 그의 내부에 우리가 여태껏 알아왔던 도나텔로의 어떠한 원래의 성격도 아닌 어떤 지성을 생성시켰었다. 그러나 저 단순하고 기쁨이 넘치는 인물은 영원히 떠나갔다. (P.206)

 

그 어조는 또한 변화되고 깊어진 성품을 말해 주었다. 그것은 슬픔과 양심의 가책을 통해 왔었던 생생해진 지성과 정신적인 가르침에 대해 말해줬다. 그래서 제멋대로인 소년, 장난기 어리고 동물적인 성격의 존재, 숲의 목양신대신에, 여기 이제 감성과 지성을 지닌 남자가 있었다. (P.366)

 

케년의 추론은 오래된 교회당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와 같이 예술과 종교로의 확장을 넘어 인간과 종교의 근원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아담과 에덴동산까지 이르는 근본적 문제제기에서 케년과 작가는 한 발짝 물러난다. 케년은 힐다의 사랑을 얻고 놓치지 않기 위해서 불가피하였다. 반면 작가는 이 작품이 가져올 종교적 논란의 불씨를 확대하고 싶지 않았서였을 것이다. 작가는 예술가이지 사회변혁가는 아니며, 호손 자신도 노예해방 사안에서는 미온적 내지 온건한 입장이었다고 한다.

 

이 작품을 로마 유적과 유물과 연관하여 읽어나가면 무척 흥미로울 듯하다. 대리석 조각상과 케년의 클레오파트라 조각상, 힐다가 모작한 르네상스기의 거장들 회화, 보르게세 장원의 즐거움과 카타콤브의 음울함, 트레비 분수와 콜로세움 등등. 하나 작가가 이를 사건과 주제를 드러내기 위한 소재와 배경으로 삼았음은 명백하다.

 

작품해설에 따르면,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실패한 낭만주의 작품이라고 지적한다. 느슨하고 흐트러진 구성, 모호하고 난해한 신화적 상징성으로의 편향 등을 제기하면서. 근대적 소설이 아닌 로맨스의 관점에서 볼 때 모호함과 신화적 상징성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조성하였으니 전혀 단점이 될 수 없다. 구성 역시 <보카치오><캔터베리 이야기>, 아니면 <돈키호테>만 떠올려 봐도 전혀 느슨하지 않으며 오히려 현대성을 지니고 있어 작품 성격에 부합하는 의도된 선택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게다가 작가는 이 작품에서 상징적 알레고리를 과거와 현재가 공존과 대립을 병행하는 로마라는 역사적 도시의 풍요로운 유산에 힘입고 있다.

 

케년과 힐다는 현실에 복귀하고 안주하는 길을 따른다. 도나텔로와 미리엄은 현실에서 추방됨에도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현실을 한 단계 초월하는 길을 택한다. 두 사람이 지향하는 길은 작중에서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하지만 인습과 전통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보다 진실 된 인간 자신을 발견하는 길임은 확실하다.

 

모든 인간들이 존재의 표면과 환각적 즐거움들 밑의 어느 것이든 알려면 그 동굴 속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나올 때, 비록 첫 번째 대낮의 눈부신 빛에 눈이 부시고 앞이 캄캄해지지만, 그들은 그 이후 영원히 더 진실 되고 더 슬픈 삶에 대한 견해를 취한다.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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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학교 3 창비아동문고 156
E.데 아미치스 글, 김환영 그림, 이현경 옮김 / 창비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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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찾아 삼만 리>의 원작은 제3권에 드디어 등장한다. ‘이 달의 이야기5월에 해당하는데, 여기서의 표제는 압뻰니니 산맥에서 안데스 산맥까지. 압뻰니니 산맥, 우리에겐 아펜니노 산맥으로 익숙한데 이탈리아를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어 이탈리아를 상징하고 있다.

 

열세 살 마르꼬가 소식이 끊긴 엄마를 찾으러 홀로 아르헨티나로 떠나는 이야기는 모두에게 친숙하다. 요즘에는 이탈리아가 아르헨티나보다 생활수준이 높지만, 19세기에는 아르헨티나가 보다 잘 사는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마르꼬가 아르헨티나로 가서 단번에 엄마를 찾은 게 아니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로자리오를 거쳐 꼬르도바, 다시 뚜꾸만으로 글자 그대로 삼만 리와 수개월의 시간이 소요되는 대장정을 인내하였음도 새삼 알게 되었다.

 

이 이야기만큼 가족 간의 단절될 수 없는 사랑을 극적으로 드러낸 작품도 드물 것이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머나먼 아르헨티나로 식모살이를 떠난 엄마, 어린 나이에도 온갖 고난과 두려움을 무릅쓰고 일편단심으로 엄마를 찾기 위해 전력하는 아들. 그네들의 극적인 상봉은 비단 동화가 아닌 소년소설에서도 결코 감동을 줄이지 못한다.

 

이 이야기는 또 한 가지, 이탈리아인과 이탈리아 소년이 갖추어야 할 투철한 의지와 도전정신을 은연중에 강조하고 있다. 범선에서 슬픔에 잠긴 소년을 위로하며 진정한 제노바인의 정신을 소리 높여 외치는 뱃사람, 무일푼이 된 마르꼬를 데리고 선술집에서 동포들에게 애국심 발휘를 호소하는 롬바르디아의 할아버지와 이에 호응하는 이탈리아인들. 그리고 다음 문장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마르꼬는 고개를 꼿꼿이 들었습니다. 강인하고 훌륭한 제노바인의 피가 그의 가슴에서 자존심과 대담함이 담긴 뜨거운 물결로 다시 흘렀던 것입니다. (P.84)

 

마르꼬의 이야기는 이 작품에 소개된 여러 이 달의 이야기중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어 제3권의 거의 1/3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다른 에피소드가 적은데, 통상적인 애국적 소재는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인 가리발디 장군의 서거와 국경일 행진 등이 그러하다. 특히 이딸리아라는 장에서 아버지가 엔리꼬에게 국경일을 맞이하여 조국에 인사하고 맹세하라고 알려주는 내용과 표현은 거의 기도문의 수준일 정도로 비장함에 오글거린다.

 

난 당신을 존경하며 온 마음을 바쳐 사랑합니다. 그리고 당신에게서 태어난 것, 그리고 당신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성스러운 조국이여! 당신의 모든 자식들도 형제와 같이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나는 정직하고 부지런하며 끊임없이 내 자신을 발전시켜 나가는 시민이 되겠습니다......당신이 허락해 준다면 나의 소질과 몸과 마음을 바쳐 겸손하게 그리고 용감하게 당신에게 봉사할 것을 맹세합니다. (P.123~124)

 

이 권에서는 마르꼬 외에도 휴머니즘을 담은 이야기가 여러 편 들어있다. ‘곱추 어린이들농아 소녀가 그렇고, 마지막 이 달의 이야기난파선도 소녀를 살리고 자신은 죽음을 택한 이탈리아 소년의 이야기를 담담하면서도 감명 깊게 서술하고 있다.

 

신생 통일 이탈리아의 화합과 단결과 발전을 기원하는 작가의 심경은 작품 곳곳에 직간접적으로 투영되어 있다. 그것에 대한 집착과 전념이 강렬하여 때로는 부담스러움을 자아내지만 그럼에도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 것은 결국 작가가 꿈꾸는 조국의 미래는 모두가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따뜻한 세상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서는 계급과 신분, 신체장애에 의해 누구도 차별받지 않으며, 서로가 상호 배려를 아끼지 않는 아름다운 사회가 될 것이다. 그래서 작가가 유달리 마지막 권에 집중적으로 휴머니즘을 드러내는 이야기들을 수록한 게 아니었을까. 결국 순수한 사랑이 무엇보다 우선한다는 점을.

 

그리고 학교는 바로 아이들, 미래를 이끌어갈 존재들인 그들을 올바르게 교육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기에 중요하다. 어머니는 학교를 어머니에 비유하며, 엔리꼬에게 학교를 잊지 말 것을 당부한다.

 

덧창이 닫힌 이 소박한 흰 건물, 네 지성이 처음 꽃봉오리를 피운 이 작은 정원은 네 삶이 끝나는 날까지 머릿속에 그리게 될 거야. 내가 너의 목소리를 처음 듣던 집을 아직도 그려 보듯이 말이다. (P.168)

 

한 학년을 마치는 시기는 어수선하며 기쁨과 슬픔이 어우러져 착잡하다. 한 반으로 지냈던 친구들 중에서 다른 반으로 갈리는 친구는 헤어져야 한다. 물론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게 되는 기대와 설렘도 있지만. 친구들과 작별을 고하는 엔리꼬. 하지만 엔리꼬가 다시 그들을 볼 수 있을지는 기약할 수 없다. 아버지의 일 때문에 이사를 하고 전학을 가게 되었으므로. 그리고 <사랑의 학교>는 끝난다. 우리에게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남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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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반정보
   - 레이블: SEM(성음)
   - 음반번호: DE-0055
   - 수록시간: 57:54

2. 연주자
   - 플루트 : 양혜숙 (HYE-SOOK YANG)

   - 지휘 : 최용호 (YONG-HO CHOI)

   - 연주 : Amadeus Orchestra Sofia

3. 녹음
   1) 녹음일자: 1996/10/26-27
   2) 녹음장소: Bulgaria national Palace of culture

4. 프로그램
        Mozart, Flute Concerto No.1 in G, K.313

   01. Allegro maestoso  (10:50)
   02. Adagio man non troppo  (10:04)
   03. Rondo, Tempo di minuetto  (7:40)
        Mozart, Flute Concerto No.2 in D, K.314

   04. Allegro aperto  (8:45)
   05. Andante ma non troppo  (7:04)
   06. Allegro  (5:58)
   07. Mozart, Andante for Flute & Orchestra in C, K.315  (7:08)

* 세줄평

제작사가 이제는 기억도 아련해지는 성음이다. 국내제작 음반이지만 내지는 모두 영문으로만 적혀 있다. 플루트에 연상하기 쉬운 상큼하기 보다는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연주인데, 녹음이 선명하지 않은 느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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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 왈도 에머슨 : 자연 위대한 생각 시리즈 3
랄프 왈도 에머슨 지음, 서동석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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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1. 자연

2. 자립

3. 보상

4. 경험

5. 운명

 

에머슨의 책을 다시금 꺼내든 이유는 제대로 확인해보고 싶어서였다. 애초 만만하게 시작했던 에머슨이 의외로 까다로워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었다. 특히 <자연론>. 덕분에 그의 글을 여러 번 읽은 점은 소득이지만 과연 제대로 읽어낸 점이 맞는지 그의 글이 실제로 난해한 지 여부를 정말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 면에서 결과적으로 에머슨 전공자가 번역하고 가장 최근에 출간된 이 책은 상당한 만족감을 주었다. 내용면에서 내가 이해한 개요가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주었으며, 가독성 측면에서는 에머슨의 글이 철학적이고 난해한 용어와 표현을 굳이 사용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용어에 관해서라면 심령영혼으로, ‘영혼정신으로 달리 번역하는 등 다른 곳과 차별성을 보이고 있는데, 통상적인 어휘가 사용되어 이해의 용이성에서는 유리하다.

 

이미 그의 글을 읽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옮긴이의 번역이 매끄러운 연유인지 알 수 없지만 그의 <자연>을 읽어나가는데 별다른 어려움과 걸림돌 없이 책장을 술술 넘길 수 있었다는 점은 무척이나 고무적이다. 에머슨을 처음 대하는 독자라면 일순위로 이 책을 권할 만하다.

 

에머슨의 논의는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이 순수한 영혼으로 자연과 교감을 갖고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 오성과 함께 이성을 갖고 인간 자신과 자연을 대할 때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정립될 수 있다. 이것이 마지막 장 전망에서 에머슨이 청자에게, 독자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아니었을까?

 

자신감또는 자기신뢰로 번역되곤 하는 <자립(Self-Reliance)><자연>과 마찬가지다. 불경에 나오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로 요지를 대변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믿는 것, 자신의 마음 속에서 자기에게 옳은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도 옳다고 믿는 것, 그것이 천재이다. 그대의 내면에 깃든 신념을 말하라. 그러면 그것은 보편적 의미가 될 것이다. (P.90)

 

위대한 사람은 바로 많은 사람들 한가운데에서도 참으로 부드럽게 고독의 독립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P.98)

 

에머슨은 교회에서 목사의 설교와 신도의 기도에서 현세 또는 내세에서의 보상을 갈구하는 경향에 매우 비판적이다. 만물은 양극성과 이원성을 띠고 있다. 동양의 음양론과 같은 이치다. 그리고 양자 간에는 종국적인 균형의 추가 작용한다.

 

모든 행위는 양면에서-첫째로는 그 자체, 즉 실제 본질에서, 둘째로는 그 상황 속에서, 즉 눈에 보이는 외면적 성질에서-보상되어, 말하자면 완전해진다. (P.147)

 

<보상>은 인생에는 항상 대가가 따른다는 점을 설파한다. 순간적인 이익과 쾌락은 이후 균형을 유지하는 뼈저린 의무와 보상을 치르게 된다. 속임수도 마찬가지다. 개인마다 천부의 재능은 획일적이지 않다. 장점은 겸손하게 이를 보전하고 계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단점은 겸허하게 인정하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현명한 자는 자신을 적에게 내던지는 법이다. 약점을 발견하는 것은 적의 이익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이익이다. (P.162)

 

보상 원칙의 배후에는 영혼의 본성에 대한 신뢰가 깔려 있다. 만물은 고립되고 단절된 것이 아니라 상호 연결되어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남의 이익과 나의 손해, 나의 장점과 남의 단점이 일방적인 우열 관계에 놓여 있지 않다. 나와 남, 나의 것과 그의 것은 상이하고 배척되지 않는다. 에머슨은 여기에서 사랑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통합을 시도한다.

 

에머슨은 인생이 충동적이며 예측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경험>에서 주장한다. 자연은 고착되기를 거부한다. 고착과 정체는 곧 생명의 반대를 의미한다. 그렇기에 아이의 죽음이 저자에게 가져다 준 슬픔과 충격이 시간의 추이에 따라 희미해져 가는 현상은 사뭇 당연한 것이다.

 

삶은 지적이거나 비평적인 것이 아니라 억센 현실이다. (P.189)

 

하나의 경험에 매달려 과거에 얽매여 있는 것은 자연의 본성에 어긋난다. 자연은 무한한 다양성과 끝없는 변화를 추구한다. 현실에 충실한 모습을 자연은 좋아한다. 거기에서 사람은 행복을 느낀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삶의 행복은 거창한 데 있지 않고 일상의 소소함에서 비롯됨을.

 

극단의 행복과 불행은 존재하지 않으며, 찰나의 순간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앞서 보았던 균형과 보상의 원칙이 곧 작동하기 시작한다. 행과 불행, 슬픔과 기쁨에서 중용의 자세를 가지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한편 마지막 수록작인 <운명>은 두 권의 에세이집에 실린 글이 아니다. 1860년에 발표된 <The Conduct of Life>(삶의 행위 또는 처세론)에 수록된 글 중 하나이다. 따라서 초기와 중기의 에머슨이 아닌 후기 에머슨 사상을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운명이라고 부르는, 자연 전체를 관류하는 요소는 우리에게 한계로 알려져 있다. 우리를 제한하는 모든 것을 우리는 운명이라고 부른다. (P.236)

 

이 글은 일견 <보상>의 확장편이라고 하겠다. 인생과 자연의 양극성과 균형의 원칙을 에머슨은 인간의 운명에도 적용한다. 우리는 종종 팔자 내지 숙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현재 내게 지워진 삶의 굴레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므로 이를 감내하고 순응하며 살 수 밖에 없다는 자포자기적 삶의 태도다.

 

에머슨의 운명은 이러한 태도에 반기를 든다. 생명을 지닌 자연의 일 존재로서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갖고 있음을 선언한다. 생명력은 자체의 본능과 원리에 따라 억압을 거부한다. 운명은 절대적이므로 완전한 회피는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운명의 거미줄이 심신을 완전히 휘감기 전에 안간힘을 쓴다면 부분적이지만 속박에서 벗어날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은 치열한 자유와 저항 정신으로만 가능하다.

 

운명은 개선을 포함한다. (P.251)

 

운명에 대한 해법으로 에머슨은 이중 의식의 개념을 제안한다. 그것은 만물의 연관성 내지 상호 의존 관계에 대한 인식에 기초한다. 운명에 맞닥뜨리면 그대로 주저앉아 좌절과 절망에 포기하지 말고 자연의 법칙과 보상의 원칙을 상기하자. 아울러 운명을 회피할 수 없다면 그 타격에 함몰되지 말고 훌훌 털고 일어나 다시금 새로이 출발하는 정신, 그것이 곧 이중 의식이다. 이는 생소한 개념이 아니라 에머슨이 과거부터 단편적으로 언급하고 논의하던 내용을 다듬어서 정리한 것이다.

 

<운명>은 본문을 읽을 때는 무슨 의미인지 금방 와 닿지가 않았는데, 역자 해설을 읽고서 비로소 대강의 뜻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에머슨의 사상을 간명하면서 핵심적으로 짚어내는 점에서 확실히 전공자의 내공을 알게 된다.

 

역자에 따르면 에머슨 철학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에머슨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에머슨의 철학이 관념의 철학이 아니라 삶의 철학이기 때문이다......에머슨을 단편적으로 보고 판단하면 그를 온전히 평가할 수 없다. 에머슨은 삶을 총체적으로 보고 있다. (P.267)

 

이제 에머슨과 떠나는 시점에서 그의 사상을 반추해 본다. 다양성과 통일성, 자기신뢰에 기반한 자립정신, 자연과 영혼의 대응과 보편적 영혼으로서의 초령, 보상의 원칙과 현재중심 주의 등. 그의 사고는 서양 고전과 기독교를 바탕으로 하여 인도, 페르시아와 중국의 종교와 철학까지도 아우르는 폭넓은 사상적 맥락을 근거로 삼고 있다.

 

그의 사상이 현재까지도 공명을 갖는 연유는 물질문명의 시대에 인간이 주체성을 지니고 영위하는 삶의 자세를 절묘하게 설파하고 있어서이다. 문명과 과학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왜소해지고 파편화된다. 인간이 능동태가 되지 못하고 피동체로 전락하는 상황에서 더구나 인간에 의한 자연 파괴가 가속화되는 시점에서 극단성을 배제하고 영혼과 자연의 교감과 균형을 중시하는 그의 태도는 생태학적 인식과도 상통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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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 왈도 에머슨 19세기 미국명시 2
랄프 왈도 에머슨 지음, 김천봉 옮김 / 이담북스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에머슨은 사상가이자 에세이스트 못지않게 당대의 저명한 시인이기도 하였다. 시인 에머슨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시 선집이 최초로 출간되었다. 영국과 미국 명시를 연달아 번역 출간하고 있는 김천봉의 스타일답게 짤막한 작가소개 겸 해설에 이어 주석조차 거의 덧붙이지 않은 시들이 영한 대역으로 수록되어 있다. 영한 대역을 실은 친절함에 가점, 원문과 번역문만 덩그러니 실어놓은 불친절함에는 감점. 군더더기 없이 작품 자체에 몰입하라는 좋은 의도로 해석하고 싶다.

 

시인은 보잘것없는 사물도 찬양하고 비천한 것들도 고양할 수 있어야 하고, 자연의 양극성을 조화시켜 다양성 속에서 통일을 추구해야 하며, 낡은 사상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고 새로운 사상을 고취시켜야 하고 인간과 우주의 관계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P.12)

 

앞의 해설 부분에 에머슨의 시론이 소개되어 있는데, 참고할 데 없는 독자에게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큰 도움이 된다. 본문에는 총 25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각자와 모두>는 개인과 전체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비단 이 작품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에머슨 시는 자신의 사상을 시 형태로 변환한 성격을 띠고 있다. 따라서 도덕적, 교훈적 어조가 강하게 드러나는 점은 특징인 동시에 단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여기서 시인은 새둥지와 조개껍질을 집으로 가져왔지만 더 이상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새와 조개는 자연 속에 함께 존재하고 어울려야 비로소 전체의 아름다운 일원이 될 수 있다. 실망한 시인이 탄식하는 순간 생생하게 살아있는 자연이 완전한 전체의 모습으로 바로 자신 곁에 있음을 깨닫는다.

 

그대 역시 모른다, 그대의 삶이

그대 이웃의 신조에 어떤 변수를 덧붙였는지.

모두는 각자에게 필요하다.

홀로 바르거나 선한 것은 없다. (P.15)

 

에머슨은 인도와 동양 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에머슨의 초령 개념도 순전히 독자적이기 보다는 특히 인도 철학과 연관성을 맺고 있다. 그런 에머슨의 일면을 이 <브라마>에서 보게 된다. 현상의 양극성과 이중성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일희일비하지 않으며 중도를 택할 것이다. 그것이 시인이 말하는 저 미묘한 길”(P.23)이 아닐런지.

 

먼 것도 잊힌 것도 내게는 가깝고,

그림자와 햇빛은 같은 것이다.

사라진 신들이 나에게 나타나고,

치욕도 명성도 나에게는 하나다. (P.23)

 

<사랑에게 다 주어라>는 시인으로서는 드물게 보는 순수시에 가깝다. 모든 것을 사랑에게 맡기라는 시인의 외침은 역설적으로 그러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질책으로 다가온다. 무엇보다 사랑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대목이 와 닿는다.

 

사랑은 비열한들을 위한 게 아니었다.

사랑은 굳센 용기를 요한다. (P.29)

 

<문제>는 자신의 종교적, 사상적 입장을 피력한 작품으로서 비교적 장시에 속한다. 목사직을 그만둔 이후 서양과 동양의 사상과 철학을 접목하여 독특한 초령 사상을 주창한다. 그는 기독교에 대한 믿음이 아무리 깊다 해도 두건 쓴 성직자와 선한 주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술회한다. 고대 그리스의 제신, 견자들과 무녀들의 말은 동일하게 성령의 말씀이므로.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밝힌다.

 

성령이 강조한 한 말씀

무관심한 세상이지만 길을 잃지는 않았다. (P.41)

 

<콩코드 찬가>는 명성에 비해서는 평범하다. 독립전쟁기념비 낙성식을 위한 시로서 자유를 찾아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 싸운 조상들을 기리고 있다.

 

에머슨의 정치관은 <정치>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교회가 사회적 가치일 때,

의사당이 따듯한 난로일 때,

그때라야 완전한 나라가 탄생한다.

공화국이 편안히 자리 잡는다. (P.55)

 

시인은 공포, 술책과 탐욕은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없다고 단언한다. 당대 미국의 정치 현실이 어떤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시인의 실망과 분개가 여실히 느껴진다. 이는 단순히 머나먼 남의 나라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세계-정신>은 맨 뒤의 <숲의 선율>을 제외하면 이 선집에서 가장 긴 시에 해당한다. 에머슨이 생각한 세계-정신은 무엇일지 궁금하다. 첫 번째 연과 두 번째 이하 연의 대조를 통해 독자는 시인이 자연을 예찬하고 도시와 문명사회에 비판적임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메마르고 삭막한 도시에서도 자연은 경이를 포기하지 않는다.

 

어김없는 아침은

지하실에 있는 이들을 찾아내고,

필시 만물을 사랑하는 자연은

어느 공장에서 미소하리라. (P.61)

 

이 시의 후반부에서 서술하는 문장의 주체인 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앞서 운명이 언급되고 다음 문장에서 인내심 강한 그 악의 화신”(P.65)이 등장하므로 운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파악되는데, 올바른 이해인지 자신이 없다. 이럴 때 친절한 해설이 그리워진다.

 

낡은 세상이 메마르고

시대가 활력을 잃으면,

그가 파괴의 잔해와 앙금으로부터

더욱 아름다운 세상을 완성해주리라. (P.69)

 

그의 존재의 정체성이 어찌하든 그는 낡은 세상을 새로이 하는 역할을 맡을 것으로 시인은 기대를 품는다.

 

이하 몇 편의 단시들도 여전히 사상가-시인의 철학이 스며들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화>는 산의 비난에 응대하는 다람쥐의 어투가 자못 당돌하다.

 

재능이 다를 뿐, 만물이 적절히 슬기롭게 어우러져 있어. (P.73)

 

자연과 세계의 아름다움은 누구나 끄덕일만한 글자 그대로의 아름다운 대상에만 깃들어 있지 않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시인이라면 범인들이 알아차리지 못한 세상의 숨어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추하고 더러운 사물과 현상들 사이에서. 그래서 시인은 노래가 아주 음험하고 야비한 것들”(P.77)사물들의 찌꺼기에도 더껑이”(P.79)에도 배어 있다고 <음악>에서 노래한다.

 

에머슨이 아서왕 신화 속의 멀린에 관심을 가진 연유는 알 수 없다. 멀린은 신화 속에서 아서왕과 왕국을 융성케 한 존재인 동시에 아서왕과 다소간 거리를 두고 있어 일부에서는 부정적으로도 평가받는 마법사다. 에머슨은 <멀린><멀린의 노래>에서 마법사 멀린을 되살린다. 친숙하면서도 낯선 모습으로. 그런데 에머슨의 멀린은 단순한 마법사가 아니다. 마법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시인으로 변신한다. 진정한 시인, 독자를 단숨에 사로잡는 강력한 시인의 모습과 단숨에 드높은 곳으로 솟구쳐 핵심으로 진입할 수 있는 시의 자세, 그것은 에머슨이 마음에 품은 시인과 시의 이상이리라.

 

왕의 시인으로서

현들을 거칠게 맹렬하게 쳐야만 하리라, (P.85)

 

언제나 곧바로 솟구쳐

시의 정상에 이르리라. (P.87)

 

멀린의 강력한 시구,

자연의 극단들을 조화시키고,

폭군의 의지를 꺾고,

사자도 온순하게 길들였나니. (P.91)

 

천저 바닥에 친정 꼭대기까지

드높이 날아오를 수 있는 새,

뮤즈의 치솟는 궤도에 올라

단숨에 여정을 넘어서리라! (P.91) (<멀린>에서)

 

나직이 불러도 드높이 불러도,

강자들보다도 더 강력한 노래,

오만한 자들을 벌하는 노래를. (P.95, <멀린의 노래>에서)

 

한편 각박한 도시와 근대문명에 대한 시인의 거부감, 그리고 역으로 자연의 순수성과 미에 대한 편애는 아래 시들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잘 있어라>는 오만한 세계에 작별을 고하고 숲속의 따뜻한 자신의 집으로 가겠다고 선언한다. 일종의 귀거래사라고 하겠다.

 

속된 발이 전혀 밟아보지 못한 곳,

사색에도 신에게도 신성한 곳으로.

......

인간의 지식과 긍지, 궤변학파들,

박식한 도당을 한껏 비웃어 주리라. (P.101)

 

시인은 집과 정원과 숲이면 더 이상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고 <월든>에서 말한다. 월든 호수가 어디던가? 소로의 명작이 탄생한 곳이다. 그곳은 또한 에머슨의 정원이기도 하다. 자신의 정원에 대한 시인의 자부심은 <나의 정원>에서 볼 수 있듯이 대단하다.

 

나의 숲에 노래 옷 입혀 거기서 누리는

즐거운 일들 전해줄 수 있다면,

뭇 사람들이 내 정원에 모여들어

도시들이 텅텅 비련만, (P.115)

 

화창한 봄날, 아름다운 정원 산책은 도시의 지루하고 칙칙한 학교 따위에 도저히 비할 수 없다(<사월>). 그러면서 시인은 독자와 지인에게 양해를 구한다. 자신이 숲속을 헤매고 게으름을 피우는 일상이 사실은 자연 속에 깃든 비밀과 신의 지혜를 알아내어 우리에 전해주고자 하는 노력의 소산임을.

 

숲의 신을 찾아 뵙고 그의 말씀

가져와 인류에게 전해주려 함이니,

......

하늘에 떠간 구름 조각 하나하나가

편지를 써주어 내 책에 담았나니.

......

내 손에 들린 과꽃 송이마다

생각 하나씩 싣고 집에 가는 길이니. (P.103, <변명>에서)

 

인간들은 자부한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며, 자연의 지배자라고. 한없는 오만은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까지도 망친다. 시인의 눈에 비친 인간의 우쭐거림은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하루살이의 팔랑거림 또는 하룻강아지의 성마른 깨갱 소리와 다를 바 없다. 인간 속에 깃든 자연의 의미를 발견하는 게 곧 신과 조우하는 길임을 아는 시인은 마음이 급할 뿐이다.

 

가장 인간적인 것도 인간의 것이 아니라,

철에 또 돌에 깃든 원자들에게서 빌려왔을 뿐이고,

인간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예술작품들에 담긴

대가의 솜씨도 여전히 자연의 요소일 따름이다. (P.139, <자연>에서)

 

숲의 속삭임, 새의 지절거림은 우리에게 자연의 지혜를 알려주지만 귀가 어두운 인간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우리가 그 숲의 선율을 들을 수만 있다면, 모두가 시인이 되어 순수한 심령을 지니고 자연과 일체가 될 것이다. 신에 가까운 행복을 누릴 수 있을 터이다.

 

신들을 담아내고, 하나의 의미,

다양한 음색을 지닌 기적 같은 시,

그런 시들은 자기 집에 갇힌 인간에게

신들의 삶터에 깃든 행복을 노래한다. (P.121, <나의 정원>에서)

 

<숲의 선율>은 수록된 작품 중 가장 긴 장시인데, 자연과의 교감을 홀로 즐기는 시인에 대한 찬미가다.

 

살아있는 만물의 연인,

마주치는 모든 것에 경탄하는 사람,

무엇보다도 스스로 경탄하는 사람, (P.143)

 

시인의 본질은 만물을 사랑하고 경탄하는 사람이다. 시인은 견자이며, 음유시인, 예언자이자 찬미자다. 그것이 시인의 역할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다른 명칭은 현명한 순례자이자 철학자인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있었다, 숲속의 견자,

자연의 사계를 노래하는 음유시인,

봄 유전형질들의 예언자,

천물절기의 운행을 미리 알려주는 현자,

산골짝들이 전하는 갖가지 기쁨을

가슴으로 알았던 진실한 찬미자가. (P.145)

 

어느덧 마지막 시에 이르렀다. <>는 시인의 유언이다. 자신이 후세에 기억되기를 바라는 개인적 면모와 함께 세상의 교화와 개선에 대한 한 가닥 미련을 포기 못하는 시인이 안타깝기도 하다.

 

아 각자가 자기만의 온순하고 청렴한

의지에 따라서 세상에 꿋꿋이 맞설 수 있는

정신들의 친교가 바로 천국 아닐까? (P.159)

 

독자의 감성에 직접적으로 소구하는 문학 형식이 기본적으로 시라고 생각한다. 감성을 일체 배제하면 더 이상 시가 될 수 없지만, 감성의 비율을 줄이고 이성의 비중을 늘리면 소위 지적인 시가 될 수 있다. 이미 읽은 시인들 중에서 에머슨만큼 지성의 비중이 높은 시인이 있었던가? 상기해 보아도 텅 빈 메아리만 울린다. 블레이크와 번즈는커녕 워즈워스와 콜리지조차도 상대적으로 감성과 이성이 비교적 균형을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에머슨의 시는 칙칙하고 따분하지 않다. 자칫 사상 면이 강조되기 쉬운 교훈적, 계몽적 입장이지만 간결하면서 재치 있는 표현, 심오한 지혜를 담고 있는 듯 엄숙하지만 심각하지 않은 문구, 참된 길을 알지 못하는 답답한 현실을 향한 투정어린 한줄기 비판 등은 그의 시에 따스한 혈액이 흐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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