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구) 문지 스펙트럼 2
랠프 왈도 에머슨 지음, 신문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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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수록 작품>

1. 자연

2. 미국의 학자

3. 초령(超靈)

4. 경험

 

에머슨의 저작집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일찍이 출판된 책 중 하나다. 최근 에머슨의 잇따른 출판 행렬은 일종의 처세철학의 시각에 국한된 것이므로 순전한 에세이스트로서 미국 초기의 사상적 지도자로서의 에머슨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좋은 기획이다. 특히나 <미국의 학자>는 이 책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이하에서는 읽은 순서에 따른다.

 

1. 미국의 학자

 

미국의 지적 독립선언으로 일컬어지는 역사적 의의가 있는 글이다. 정치적 독립을 이루어냈지만 문화와 사상 면으로는 여전히 유럽에 종속되어 있는 미국의 지성인들에 각성과 분발을 촉구하고 있다. ‘생각하는 사람’(Man Thinking)이기를 그만두는 학자는 그저 남의 생각을 흉내 내는 앵무새에 불과하다고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어디 미국뿐이겠는가? 주체적 사고 없이 소위 선진국의 문물이라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국가, 사회, 개인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다.

 

참다운 학자를 교육하는 도구로서 에머슨은 자연, , 그리고 행동을 언급한다. 인간과 자연은 동일한 근원에서 나왔고 자연은 심령의 대응물이다. 따라서 자연과 자연의 법칙은 곧 자신과 자신의 정신의 법칙이라는 원리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 대목은 그의 사상의 지속적이며 핵심적인 부분으로서 다른 글들에도 반복적으로 회자된다.

 

책은 과거의 영향 중에서 최상의 형태이다 (P.102)

 

에머슨은 책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그러면서도 책에 함몰되는 것을 경계한다. 단순한 책벌레는 피하라는 것이다. 독서는 자신의 사상을 심화하고 발현하는 도구로서 가치를 지닌다.

 

책은 오로지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써만 쓸모가 있는 것이다. (P.104)

 

책을 바르게 읽기 위해서는 창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창조적인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창조적인 독서가 필요한 것이다. (P.108)

 

행동 없는 학자는 창백한 지성인이자 역사의 비겁자로 전락하고 만다. “행동이 없으면 사상은 숙성하여 진리가 되지 못한다.”(P.110). 에머슨에 따르면 사고는 부분적 행위에 불과하며, 행동과 결합해야 총체적 행위가 된다.

 

학자의 책무는 사람들에게 현상 가운데에서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고양시키고, 분발시키고, 지도하는 데 있다. (P.115)

 

대중이 언제나 학자와 진리를 이해해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학자는 외압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투명한 정신으로 영혼의 근원을 탐구한 후 철저히 자기 신뢰를 해야 한다. 그래서 학자는 자유롭고 용감해야 한다.”(P.119).

 

이 글의 마지막 대목은 웅변적이며 자못 계시적이다. 감정의 고조를 이끌어내는 강연이나 연설의 말미로서는 훌륭하지만 이렇게 글로 읽으면 조금 당혹스럽다.

 

에머슨의 사상에 따르면 자연과 인간은 동일한 법칙에 연원한다. 우주와 세상을 올바로 이해하고 싶다면 무엇보다도 인간 자신의 내면에 대한 탐구를 할 필요가 있다. 이 매우 중대하면서도 미지의 영역에 미국의 학자들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끝을 맺는다.

 

2. 초령

 

1 에세이집에 수록된 글이다. 초령은 영어의 over-soul을 번역한 어휘다. ‘초영혼또는 대령(大靈)’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초령 개념은 에머슨의 사상 전반을 관통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에머슨은 기본적으로 외면보다는 내면을 중시한다. 인간이란 존재의 외양은 그에게 있어 심령이 작용하는 기관에 불과하다고 본다.

 

인간을 신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작동시키는 원리, 그것이 곧 심령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존재하며 자체로 고유하며 자율적으로 기능한다. 심령은 개개인마다 상이하지만 한편으로 보편성을 지닌다. 즉 심령마다 존재하는 공통적인 본성이 초령이다. 초령과 심령은 통일성과 다양성의 관계를 지닌다. 초령을 통해서 인간은 개체로서의 독립성과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집단성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얻게 된다.

 

인간의 심중에는 만유의 심령, 현명한 침묵, 모든 부분과 분자가 균등하게 상호 연관되어 있는 보편적 미, 혹은 저 영원한 하나가 들어 있다. 우리가 그 속에서 존재하고, 그 모든 지복을 우리에게 허용하는 이 심원한 힘은 어느 순간에나 자족적이고 완전할 뿐만 아니라, 보는 작용과 보이는 것, 보는 주체와 객체, 주관과 객관이 하나로 합치된 것이다. (P.137)

 

그리고 에머슨은 초령을 신과 동일시한다. 그의 초령 개념이 통상적인 관념과 철학 체계와 달리 종교적 성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연유다.

 

그 제삼자 혹은 공통적인 본성은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몰인간적인 것이다. 곧 신 자체이다. (P.146)

 

심령은 초령과 인간을 연결하는 중계적 위치에 있다. 우리는 심령을 통해서 공통의 보편성의 일단을 접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근원적 진리의 단편이 이따금씩 찰나적으로 드러날 때 우리는 그것을 계시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인다. 에머슨은 따라서 심령을 진리의 인식자이자 계시자(P.148)로 파악한다.

 

자신의 내면이 황량하고 공허하지 않음을 깨달을 때 우리의 순수한 본성이 우주적 통일성과 잇닿아 있음을 자각할 때 우리는 본성이 더럽혀지는 것을 막고자 노력할 것이며 자신의 심령에 대한 신뢰의 끈을 놓지 않게 된다. 이처럼 자기 신뢰의 주장은 초령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3. 경험

 

이 글은 에머슨의 제2 에세이집에 수록되었다. 어린 아들의 죽음을 겪은 후 자신의 감정을 뿌리에서부터 되짚어보고 있다.

 

아이의 죽음은 글자 그대로 그에게 커다란 슬픔과 충격을 안겨주었다.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시간의 경과에 따라 슬픔의 그림자는 희미하게 퇴색하고 얼마 후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상으로 복귀한다. 고통과 비애에 잠겨 삶과 죽음의 비극적 역설에 깊이 상념을 품고, 이제는 새로운 나날과 삶의 태도를 다짐하던 때의 기억은 흔적도 없이 스러졌다. 일견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에머슨은 여기에 천착한다.

 

나는 슬픔이 나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고, 나를 단 한 발자국도 더 참된 자연 속으로 데려다주지 않는 것이 슬프다. (P.174)

 

우리는 미래를 계산하고 예측할 수 없다. 비약적이고 충동적인 자연은 따라서 자발적이다. 우리는 인생의 결과를 추산할 수 없으며, 우연적 사건의 조우의 결과로 경험을 갖게 될 뿐이다. 이런 자연과 인생의 속성에 순응하는 삶의 자세, 그것은 삶의 영위 그 자체이다.

 

인생은 지적인 것도 비판적인 것도 아니고 완강한 것이다. (P.186)

 

관망과 계산을 포기하고 순간과 시간에 충실한 삶, 순간을 충만하게 하여 행복을 누리는 것, 이것을 아는 것이 삶의 지혜이다. 미래를 알 수 없기에 섣부른 기대와 실망을 품지 않는다. 현재의 우리 자신의 삶의 행복에 감사하면 충분하다.

 

일견 비관적이고 허무하게 보이지만 철저한 현재중심의 삶의 자세임을 알 수 있다. 인생 행로에 다가오는 비극과 고통을 짐작하고 대비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슬픔과 고통의 존재를 외면하지는 않지만 거기에 함몰되어서도 안 된다. 자연과 인생이 요구하는 삶의 방식은 순간과 현재에 최선을 다하고 충만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이다. 이것이 에머슨이 주장하는 현세적 인생관이다.

 

4. 자연

 

에머슨 최초의 저작물이다. 초기의 글이지만 그의 사상의 핵심을 관통하는 기본적 태도와 개념들은 여기에서 이미 뚜렷한 맥락을 구비하고 있다. 범상하게 넘기기 마련인 자연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정립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욕이 문장마다 배어있다.

 

철학적인 견지에서 보면 우주는 자연과 심령으로 구성되어 있다. (P.16)

 

에머슨에게 자연과 심령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다. 자연은 심령의 대응물이며, 심령은 자연이 내면화된 존재이다. 에머슨의 자연은 혼합적이다. 순수한 자연과 관념적 자연이 혼재되어 있다. 그의 글에서는 영국 낭만주의 시인, 특히 워즈워스의 그림자가 언뜻 비친다. 그렇지만 보다 영적인 요소의 강조로 그만의 독자성을 내비치고 있다.

 

에머슨은 자연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여러 편익들을 제시하고 하나하나 살펴본다. 먼저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운 자연은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아름다움을 베푼다. 여기에 영적인 요소, 즉 인간의 의지와 결합되면 한층 뜻깊고 신성한 자연의 풍광이 완성된다. 나아가 아름다움을 지적 대상으로 삼는 경우도 소개한다. 지성과 예술이다. 지성은 사물의 절대적 질서를 탐구하며, 인간에 의한 아름다움의 창조가 곧 예술이다(P.36).

 

자연은 언어에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자연적 사실의 즉각적 대응물로서 언어 표현이 있음은 쉽사리 알 수 있으며, 저자가 보다 주목하는 것은 특정한 자연적 사실이 특정한 정신적 사실의 상징이 되는 사례이다. 여기서 에머슨은 이성과 영혼의 개념을 등장시킨다. 한편 자연은 영혼의 상징이므로 정신과 물질 사이에는 아래와 같은 관계가 성립한다.

 

자연 전체가 인간 정신의 은유이기 때문이다. 도덕적 자연의 법칙은, 마치 거울 속의 얼굴이 실제의 얼굴과 대응하듯이, 물질적 법칙과 대응한다. (P.45-46)

 

자연은 또한 오성의 훈련을 위한 학교이기도 하다. 자연과의 부단한 접촉을 통해 감각적 진리에 대한 오성은 강화된다. 여기에 이성과 양심이 추가로 반영되면, 자연은 돌연 도덕적, 윤리적 성격을 띠게 된다.

 

이상과 같은 자연에 대한 고찰은 자연의 실체적 존재성을 의심할 수 없도록 만든다. 감각과 오성의 인식에서 자연은 명확한 실체성을 지닌다. 반면 자연의 실체성에 대한 믿음을 흔들고 부정하는 의론이 관념론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관점이 매우 부정적인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관념론은 자연에 대한 이성의 우위를 내세운다. 시인과 철학자는 모두 자연을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존재로 파악하여 심령의 우위성을 주장한다. 반면 관념은 영속적이며 불변적인 존재이다. 자연은 덧없으며 관념은 이데아다.

 

관념론은 세계를 신 속에서 본다. 그것은 인간과 사물, 행동과 사건, 나라와 종교를 하나의 전체적 순환 속에서 바라본다. (P.76)

 

에머슨은 자연을 자체로서 이해하지 않는다. 자연은 보편적 영혼과 개인을 연결하는 중간 통로이자 창구의 역할을 수행한다. 아직 심령과 초령의 개념을 구체화하지 않은 시기이지만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고귀한 존재, 즉 심령과 심령들 간에 존재하는 보편적 영혼으로서의 초령의 본질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지고의 존재가 인간의 영혼 속에 존재함을 알고 있다. 우리는 또한 그 영혼이 지혜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고, 미도 아니고, 힘도 아니면서, 그 모두가 일체를 이루고 있고, 만물이 그 때문에 그리고 그에 의해서 존재는 어떤 보편적 본질을 창조한다는 것을 안다. (P.79)

 

이상과 같은 자연론의 입장에서 에머슨은 당대 사회가 자연을 오성만으로 정복하려 든다고 비판한다. 그러한 사람을 이기적인 야만인”(P.89)이라고 혹평한다. 부단한 자기 수양과 겸허한 마음가짐을 통해 보편적 영혼의 존재와 의의를 깨달을 때 진정한 자연주의자가 될 수 있다고 기술한다.

 

 

이상으로 에머슨의 4편의 에세이를 읽은 후의 단상을 마치고자 한다. 대개의 경우 일독에 그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이 책은 삼독을 하였다. 마지막 삼독 째는 책상에 정좌하여 메모해 가면서 교과서를 공부하는 자세로 임하였다.

 

그의 사상이 심오한가? 개성 있지만 심오한 편은 아니다. 그의 문장이 어려운가? 그렇지 않다. 그의 문장들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자체로서 격언이나 금언집에 수록되기에 충분할 정도로 재치가 반짝이며 촌철의 지혜가 넘친다. 그렇다면 삼독을 할 정도로 이해에 어려움을 겪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건 정확히 알 수 없다. 에머슨은 통일적이며 체계적인 사상가는 아니다. 그의 본질은 도덕가로서 에세이스트다. 여기에 문학적, 철학적 어휘와 표현이 전체 맥락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가중하였을 수도 있다. 물론 외서의 경우 언제나 그러하듯 번역의 문제일수도 있다.

 

비록 난관을 겪기는 했지만 그의 글을 반복적으로 읽는 자체는 매번 새로운 즐거움을 주었다. 참으로 독창적인 사상과 표현에 항상 감탄을 금하지 못하였다. 조만간 에머슨의 다른 에세이집을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내가 어려움을 겪은 게 혹시나 이 책 자체에 귀인하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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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반정보
   - 레이블: AMPLITUDE
   - 음반번호: CLCD-2-2501
   - 수록시간: 63:54(CD1), 54:21(CD2)

2. 연주자
   - 바이올린 : 김남윤 (Nam-Yun Kim)

   - 지휘 : Nikola Debelich

   - 연주 : Orchestre de Chambre de Zagreb

서울 예고를 졸업하고 뉴욕에 줄리아드 음악하교에서 갈라미안 교수를 사사.

이화 경향 콩쿨 특등, 동아 콩쿨 1, 줄리아드 음악학교 차이코프스키 콩쿨 1, 워싱톤 메리웨더 포스트 경연대회 입상, 허드슨 벨리 영 아티스트 콩쿨 입상, 로스앤젤레스 청소년 음악인 재단에서 캐리어 그랜트 수상, 스위스 티보르 바르가 국제 콩쿨 1등 수상.

1977년과 1979년에 한국음악펜클럽상, 1980년 제13회 난파음악상, 1985년 월간 음악상, 2회 음악동아상, 1987년에 제3회 한국 음악평론가상, 3회 채동선음악상 수상.

서울시향, KBS 교향악단, 런던 로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자그레브 방송교향악단 등 국내외 정상급 교향악단과 협연. 미국, 유럽, 아시아 등 여러 지역에서 독주회 개최. 서울 무지카 트리오, 서울 챔버 오케스트라, 뚤루즈 챔버 오케스트라, 자그레브 챔버 오케스트라 등과의 수많은 연주회를 가졌으며 현재 서울 챔버 오케스트라의 악장.

1회 대만 국제 콩쿨, 싱가폴 롤렉스 국제 콩쿨 심사위원 역임.

현재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부교수.

[내지에서...]

3. 녹음
   1) 녹음일자: 1990/07/09-14
   2) 녹음장소: Vatroslav Lisinski Hall, Zagreb

4. 프로그램

   [CD1]
        W.A.Mozart, Violin Concerto No.1 in B-flat Major K.207 

   01. Allegro moderato (6:55)

   02. Adagio (7:44)

   03. Presto (5:37)
        W.A.Mozart, Violin Concerto No.2 in D Major K.211

   04. Allegro moderato (8:12)

   05. Andante (6:42)

   06. Rondeau-Allegro (4:00)
        W.A.Mozart, Violin Concerto No.3 in G Major K.216

   07. Allegro (9:46)

   08. Adagio (8:27)

   09. Rondeau-Allegro (6:31)

 

   [CD2]
       W.A.Mozart, Violin Concerto No.4 in D Major K.218

   01. Allegro (11:41)

   02. Andante cantabile (7:33)

   03. Rondeau-Andante grazioso (7:33)
       W.A.Mozart, Violin Concerto No.5 in A Major K.219

   04. Allegro aperto (10:12)

   05. Adagio (9:36)

   06. Rondeau-Tempo di menuette; Allegro (9:00)
     
* 세줄평

국내 바이올린계의 대모로 일컬어지는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의 사십대 초반의 귀한 음반이다. 음반에 대해서 말하자면 캐나다에서 제작된 국외 음반인데 뒷커버와 내지에 한글 설명이 추가되어 있는 점이 이채롭다. 아마도 국내 배포용을 의도한 것이 아닐까. 만듦새는 썩 고급스럽지는 않으며, 연주 자체는 논외로 하더라도 녹음 자체가 소극적이고 경질이어서 훌륭하다고 하기는 어렵다는 점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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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학교 2 창비아동문고 155
E.데 아미치스 지음, 김환영 그림, 이현경 옮김 / 창비 / 199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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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 느꼈던 생경함과 이질감, 그리고 일말의 거부감은 이제 많이 줄어들었다. 이미 시대적 배경과 작가의 집필 의도 내지 주제 의식을 보다 명확히 알 수 있게 된 연유다.

 

2권을 관통하는 전반적 기조도 이런 면에서 제1권과 다르지 않다. 통일 이탈리아의 단합과 결속을 공고히 하고, 단일국가로서의 국민의식과 애국심을 고취시킨다. 그리고 사회 전 계층의 화합과 장기적 발전을 위하여 초기단계에서의 학교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건강한 애국심이라면 물론 국민으로서 가슴에 품고 고취해야 할 감정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애국심이 변질되어 폭력과 비극을 양산하는 사례를 역사를 통해 익히 경험한 바 있다.

 

만약 내게 요구하셨다면 난 국왕께 다른 것들을 드릴 수 있었을 거요......바로 내 피요. (P.170)

 

퇴역군인인 꼬렛띠의 아버지가 국왕에게 바치는 충성심을 드러내는 문장이 가슴 뭉클한 동시에 당혹감이 생겨나는 것은 이것에서 유래한다. 긍정적 관점에서는 투철한 애국심, 부정적 관점에서는 맹목적 애국심, 훗날 이것이 나치즘과 파시즘으로 변질되었으니.

 

한편, 엔리꼬와 꼬렛띠 사이의 불화에 대해 엔리꼬의 아버지의 훈계는 진정한 용기를 직설하는 동시에 은연 중 군국주의를 흐를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있다. 이탈리아 통일전쟁에서 무수한 희생을 치룬 군인들에 대한 존경심을 인정하고 배양할 필요성은 납득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 제2권에서 특징적인 장면은 2, 이달의 이야기로 들려주는 아버지를 간호한 소년이야기다. 자신의 아버지로 알고 성심껏 간호를 하였는데 알고 보니 다른 사람이었다는 사실, 소년은 그 중환자가 숨을 거둘 때까지 변함없이 곁에서 돌봐준다. 진정한 휴머니즘의 발로!

 

학교를 이끌어가는 중추적 역할은 교사, 즉 선생님에게 있다. 학창시절을 회상해 보면 인생에 전환점을 마련해 준 선생님에 대한 추억은 대부분 갖고 있으며 이는 평생의 소중한 자산이다. 내게도 역시 그러한 분이 계시다. 되돌아보면 그분이 딱히 내게 특별한 배려와 정성을 쏟은 것은 아니었지만, 남과 달리 내게 믿음과 신뢰를 보여주셨다...오늘날 교사는 많지만 인생의 선생님이라고 칭할 만한 분은 점점 찾아보기 어려워지는 듯하여 안타깝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위해 많은 애를 쓰셨고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지식과 마음을 여러분에게 바쳤으며, 여러분을 위해 살고 죽는 분들에게 꼭 인사를 하고 이 곳에서 나가야 합니다. 바로 저기 계신 분들입니다. (P.124-125)

 

시상식 대목에서 평의원이 이렇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진정한 선생님의 중요성과 고마움에 대한 찬사일 것이다. 그리고 모처럼만에 이야기의 전면으로 등장한 엔리꼬의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자신의 어릴 적 옛 스승을 찾아가는 장면도 같은 맥락으로 연계된다.

 

학교의 존재 의의와 기능에 대한 논란은 오늘날도 여전하다. 대안학교의 수효와 영향력이 나날이 증가하는 현실은 공교육 체계가 전체 학생들을 포괄하지 못함을 가리킨다. 산업혁명 시절에 창안된 공장식 교실 시스템에 대한 반발도 제기된다. 하지만 여러 문제점을 인정하더라도 공립 보통학교의 다음 순기능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학교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고 친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P.104)

 

엔리꼬는 학교를 마친 후 친하게 지내던 노동계층 친구들과 헤어져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을 우려한다. 이때 엔리꼬의 아버지는 계급이 차이나고 훗날 직업과 신분이 다르더라도 어릴 적 친구들과의 관계를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오히려 타 계급 친구와의 우정이 갖는 소중함을 피력한다.

 

난 네가 속해 있는 계급 밖의 우정에 대해 말하고 싶은 거란다. 그런 우정을 지켜 나가지 않는다면 넌 한 계급 안에서만 살게 될 거야. 오로지 한 계급의 사람들만 사귄 사람은 한 권의 책만 읽는 학자와 마찬가지란다. (P.206-207)

 

우리의 경우도 국공립과 사립 등으로 체계가 구분된 경우 일부 부유층은 사립을 선택한다. 그들은 출발선상에서부터 보통의 다수와 차별을 둔다. 이른바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성장해서는 사회 지배층으로 자리 잡는다. 그의 친척과 지인, 친구들은 같은 계층에 국한되기 마련이다. 이런 사람들이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국민을 위해서, 서민을 위해서라는 영혼 없는 상투적 발언만 앵무새처럼 반복할 때 우리는 그네들의 진실성을 신뢰하기 어렵다.

 

맑은 하늘, 노래 부르는 어머니, 열심히 일하는 어른, 공부하는 소년들, 아름다운 것들이 여기 다 있구나...... (P.159)

 

멋진 봄날 아침, 엔리꼬의 선생님이 창문을 바라보면서 하는 말이다. 아름다운 자연과 각자 자기 역할에 충실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우러지는 장면. 아름다움은 세속과 동떨어진 곳에 있지 않으며 일상 속에 깃들여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참된 교육은 자연은 물론 타인과 함께 배려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데 있는 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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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얀과의 대화
리처드 오스본 지음, 박기호.김남희 옮김 / 음악세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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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클래식 음악을 듣던 초기 시절에 카라얀을 무지 싫어하였다. 출시 음반은 온통 카라얀이고, FM에서 들려주는 연주도 카라얀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주류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과 후에 알게 된 그의 나치 전력, 게다가 그의 연주 해석에 대한 일부의 비판적 의견까지 맞물려 내게 카라얀은 클래식 음악계의 악의 제국이었다.

 

오늘날 자주는 아니지만 카라얀 연주를 간혹 듣곤 한다. 그의 연주는 어느 연주든 일정 수준 이상의 안도감을 안겨준다. 그리고 워낙 근래에 정격연주의 해석이 유행하다 보니 종래의 심포닉한 해석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카라얀이 항상 정해는 아닐지 몰라도 다른 가능성의 방향을 억지로 외면하고 싶지는 않다.

 

2. 카라얀의 나치 전력과 관해서는 여전한 논란이 존재한다. 일단 그의 나치 가입은 명확한 사실이다. 그가 나치 경력을 자신의 출세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느냐 여부가 관건인데, 정황 증거와 푸르트벵글러의 카라얀 혐오가 중시되는 듯하다. 1908년생인 카라얀이 나치 시절을 보낸 것은 30대라고 할 때, 과연 카라얀이 푸르트벵글러의 라이벌이라는 인식이 온당한 지 의문스럽다. 주요 포스트라고는 아헨 시절밖에 없던 카라얀이 전후 세계 최고의 지휘자로 급부상하면서 자연스레 전전에 과도한 의미와 해석을 부여한 것은 아닌 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카라얀이 이처럼 무시무시한 드라마에 출연한 위대한 배우였다고 상상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는 배우라기보다는 인질에 가까웠으며, 유능했고, 또한 열심히 일했으며, 기초가 불안정했다. (P.20)

 

그렇다고 카라얀의 나치 전력에 면죄부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많은 양식 있는 지성인과 예술인들이 나치에 저항하여 유무형의 피해를 입은 가운데 비록 일자리를 얻기 위한 목적이라고 하더라도 나치에 가입한 것은 자체로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 점에서 저자는 다소 소극적인 인상을 준다.

 

이러한 것들은 지금까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과 전쟁 기간 중 그가 나치 정권에 정치적으로 동조를 했을 것이라는 잘못된 정보를 분석하고 재활용하는 데 깊숙이 관련된 사람들이 고려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P.20)

 

3. 저자 리처드 오스본은 음반 평론가로서 활동하고 있는 전문적 식견을 가지고 있는 데다 내용을 보니 카라얀과 직업적, 개인적으로 접촉할 기회가 많은 인물이었다. 카라얀에 대한 저자의 입장은 대체로 호의적이며, 긍정적이다. 그가 카라얀을 음악적으로 인간적으로 존경하고 있음이 대번에 드러난다. 후에 그가 카라얀의 권위 있는 평전을 저술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리라.

 

4. 미디어 기술의 발전과 카라얀의 관계는 불가분이다. 그의 전성기는 LP시대의 본격적인 도래와 맞물려 시작되었으며, CD시대를 앞당긴 것에도 그의 지분은 분명하다. 게다가 영상매체의 중요성과 기술 구현에 매진한 것도 결국 시대를 앞선 혜안임은 분명하다. 오스본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는가.

 

사실 당신은 해석 예술가로서 영상을 당신의 작업에 없어서는 안 될 연장선으로 이용한 역사상 첫 번째 지휘자입니다. (P.187)

 

신기술과 신 포맷에 대한 카라얀의 적극적 관심은 테크놀로지에 대한 편향과 상업성의 발현이라는 단순한 설명으로는 마뜩치 않다. 차라리 다음과 같은 이유가 보다 설득력 높다.

 

많은 사람에게 음악을 전달하는 것은 내 삶의 가장 큰 기쁨이었습니다. 음악은 더 이상 학식과 경제력을 갖춘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그러한 청중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들 이외의 또 다른 청중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P.184)

 

5. 우리는 20세기 마지막 지휘계의 거장으로서 카라얀을 꼽는다. 카라얀의 사후, 번스타인, 솔티, 첼리비다케 등이 잇달아 작고하면서 카리스마를 갖춘 전통적 지휘자는 자취를 감추었다. 여러 음반 자켓과 영상물 등을 통해 우리는 카라얀과 카리스마를 당연히 결부시킨다. 범접할 수 없는 음악적 권위를 갖추고 오케스트라를 지도 편달하고 때로는 호통과 쓴소리도 아끼지 않으면 음악적 수준을 한층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는 거장. 하지만 오스본은 이것이 우리의 잘못된 환상임을 밝힌다. 카라얀은 토스카니니와 푸르트벵글러, 라이너, 셀 같은 유형이 아니라 오늘날 대다수 지휘자들과 같은 유형임을.

 

자신을 아르투르 니키시의 후계자라기보다는 사이먼 래틀의 선조로 만들어버린 카라얀의 업적과 영향력의 한 측면이다.....카라얀이 음악을 준비하는 방식은 형식적이거나 훈시적인 것이기보다는 실제적인 것이고, 상호협조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다. (P.27)

 

6. 과도한 신성화와 우상시는 자칫 대상의 인간적 면모를 흐릿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다. 카라얀의 실제 성격에 대한 면도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낯설다.

 

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었다면, 카라얀을 개인적으로 상당히 매력 있고 솔직하며, 또한 재미있지만 냉소적인 재치가 번뜩이는 진실된 사람이라고 말할 것 같다. (P.16)

 

하지만 그의 성격보다도 흥미로운 것은 음악 만들기에 대한 그의 견해일 것이다. 긍정적이든 아니면 부정적이든 완벽주의라는 용어가 카라얀의 음악관을 대변한다. 기술적 뒷받침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음악은 악보에 종속될 뿐이라는 의견은 음미해 보면 확실히 탁견이다. 스코어가 보여주지 못하는 것, 그리고 스코어를 넘어서는 것을 음악가는 찾아내고 연주할 수 있어야 한다. 한편 카라얀 사후 이십여 년이 경과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베를린 필은 기술적으로 최고 수준을 자부한다.

 

카라얀이 주장했던 것은 가능한 한 아름답고 정확하게 연주하기 위해서는 음악이 모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었다......단원들은 스코어에 종속되지 않고, 자유로운 지성과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고 음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자신들의 연주를 가능하게 하는 충분한 통제력을 가지고 즐겁게 연주한다. (P.31)

 

리허설에서 그것은 음표를 정확한 방법으로 연주하기 위한 정확한 방식을 확립하는 문제가 됩니다. 하지만 실제 공연에서 그것은 전혀 별개의 사안이 됩니다. 지휘에서 최고의 기술은 지휘를 해서는 안 될 때를 느낌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P.148)

 

7. 거장들의 회고담에서 찾을 수 있는 빼놓을 수 없는 색다른 묘미는 동시대 동료 음악가들에 대한 일화와 추억이리라. 이 책에서도 멩겔베르크, 제프리트, 토스카니니, 칼라스, 므라빈스키, 셀 등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있다. 푸르트벵글러와 관련된 내용이 없는 것은 아마도 양자 간의 관계에서 그가 후배이자 일방적 약자의 위치에 놓였던 탓이 아닐까 생각된다. 카라얀이 지휘자 중에서 특히 데 사바타와 탈리히를 높이 평가한 대목은 의외다. 자신이 진정으로 존경했던 사람으로 데 사바타를 꼽은 카라얀은 탈리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극찬한다.

 

그는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정말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오케스트라의 음향을 하나로 모으고 오케스트라를 하나의 악기처럼 통제하는 위대한 천재처럼 보였습니다. (P.79)

 

8. 카라얀은 작금의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에게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그도 점차 시대와 환경이 바뀌어 가고 있음을 의식하면서 그럴수록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본분을 지켜야 한다고 본다. 먼저 양자의 장기간의 협력 작업을 중시하며, 현대의 지휘자들의 재임기간이 갈수록 짧아지는 현상에 우려를 표명한다. 한층 높은 수준에 도달하기 위한 진정한 작업은 양자의 장기간의 지속적 상호 공동 노력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오늘날 오케스트라의 제1의 당면과제는 생존이다. 정부보조금과 기부금이 현저히 줄어든 시점에서 오케스트라는 자칫 생존을 담보로 독립성을 상실하기 쉽다. 카라얀은 오케스트라가 음악 외적인 것으로의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하고 해야만 한다고 본다. 그것이 어쩌면 카라얀이 상업적이라는 비판을 감수하고서라도 특히 음반 판매를 통해서 오케스트라와 단원들의 재정적 풍성함을 누리게 한 근본 목적이 아니었을까.

 

오케스트라가 개성과 독립성을 잃는다면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현재 새로운 계약에 따라 일하고 있는 독일 오케스트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연주나 리허설을 할 수 있거나 그렇게 하지 못할 때 특히 주장해야 할 내용일 것입니다. (P.126)

 

이백 쪽 남짓한 많지 않은 분량의 대담집이지만, 때로는 상당한 깊숙한 논의까지도 건드리고 있어 클래식 음악 이해의 측면에서도 유익한 책이다. 더구나 카라얀의 미처 알지 못했던 인간적 면모와 함께 그의 음악미학에 대해 새롭게 접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보다 열린 마음과 귀로 그의 연주를 들을 순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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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인이란 무엇인가 / 자기신념의 철학 동서문화사 월드북 127
랄프 왈도 에머슨 지음, 정광섭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에머슨의 덫에 사로잡힌 형국이다. 애초 가벼운 심정으로 그의 에세이를 한 번 읽으려고 하였다가 잘 정리가 되지 않아 다른 책들을 펼치다 보니 뒤엉켜버리고 말았다. 거기다 태생적 게으름에다 공·사적 사정까지 겹치다 보니 진도는 한 달 이상이나 지지부진하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는 위인이란 무엇인가라고 하여 에머슨의 <대표적 인물(Representative Men>)을 담고 있다. 후반부는 자기신념의 철학이란 타이틀로 에머슨의 에세이, 일기 등에서 발췌한 내용들을 수록하고 있는데, 유명한 에세이집에 수록된 작품들 외에 다양한 출처를 지니는 점이 특색이다.

 

1. 위인이란 무엇인가 [대표적 인물]

 

에머슨은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구축한 인물이다. 기독교적 전통에다 동양사상을 덧붙이고 여기에 고유의 사념으로 용해하여 이른바 초월주의를 구현하였다. 그의 작품들, 즉 에세이, 연설문, 시 등은 모두 이 사상을 찾아가기 위한 과정 또는 사상 체득 이후 독자적 관점에서 바라본 현상을 반영하고 있다.

 

나폴레옹, 괴테, 셰익스피어, 스베덴보리, 플라톤, 몽테뉴라는 6인의 역사적 인물을 에머슨이 <대표적 인물>로 굳이 다른 위인과 구분하여 소개하는 까닭은 이들에게서 구별되는 대표성 내지 전형성을 발견하여서다.

 

먼저 나폴레옹은 새로이 부각되기 시작한 신흥 중산계층의 대표자다. 신흥세력은 자신의 앞길과 전진을 가로막는 구체제를 타파할 필요성을 느꼈으며 이를 구현할 인물로서 나폴레옹을 지지하였다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개인적 능력에 더하여 시대적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불세출의 정치 지도자로써 급부상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과 동시대를 살아 간 괴테는 전혀 다르다. 나폴레옹이 사회적, 시대적 요구를 대변한 반면, 괴테는 당대의 내면적 요구를 대표하는 위인으로 본 것이다. 시대의 요구는 정신적, 사상적 측면에도 영향을 미쳤다. 진리 탐구를 가로막는 일체의 장애물을 제거하고 이성과 사고의 힘으로 순수한 지성의 탐구를 요구했던 것이다. 이에 부응한 인물이 괴테라고 에머슨은 보았다. 다만 에머슨이 보기에 괴테가 지향한 것은 보편적인 자연·보편적인 진리를 탐구해 위대한 자아완성의 사람”(P.58)이 되는 것이어서 보편적인 영원한 진리를 중시하는 에머슨에는 다소 아쉬움을 남긴다.

 

어쨌든 나폴레옹과 괴테에 대한 에머슨의 평가는 이러하다.

 

나는 인간의 내적인 자연스런 목소리를 압살하는 형식뿐인 인습이나 권위주의를 타파한 인류의 대표자로서 나폴레옹과 괴테를 나란히 가리키고 싶다. 이 두 사람은 누구 못지않은 철저한 리얼리스트이고 동시대뿐만 아니라 다가올 미래의 사람들을 위해 위선이나 허식이라는 거목의 뿌리를 과감하게 없앤 것이다. (P.62-63)

 

에머슨은 거듭 강조한다. 시대와 민중이 요구하는 것을 선취하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한 차원 높게 발전시켜 실현하는 인물, 그가 대표적 인물이고 바로 영웅이라는 점을. 문학에서 그가 주목하는 인물은 셰익스피어다. 셰익스피어에 대한 문학적 평가는 과거와 현재가 똑같이 찬사일색이며 에머슨도 마찬가지다.

 

그는 도저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의 문학적인 세련이 극에 달하고 있다. 그것은 작가적 자질로도 최고봉이라고 해도 좋은데 그의 재능은 좁은 뜻에서의 작가라는 틀을 훨씬 뛰어넘고 있는 것이다. (P.78)

 

에머슨은 순전한 문학적 시각에서 셰익스피어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진정한 시인은 셰익스피어처럼 대지에 굳건히 뿌리내리고 시대성과 민중의 숨결을 온몸으로 생생하게 체감하고 호흡하면서 거목으로 우뚝 서야 한다.

 

다만 셰익스피어는 문학적 세련과 기교에 치중하다 보니 인간과 자연 속에 내재된 덕 자체의 의의에 대한 근원적인 통찰을 결여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자의든 타의든 그는 최고의 엔터테이너의 지위에 만족했다는 게 에머슨의 판단이다.

 

스베덴보리는 사상적으로 에머슨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임에 틀림없다. 에머슨의 초령이라는 개념과 스베덴보리의 만물의 근원에 대한 동일철학은 결국 본질적으로 같은 의미다. 에머슨의 말대로 인간 정신은 이성과 직관, 합리와 신비 사이를 방황하고 있다. 스베덴보리가 집중적으로 탐구한 부분은 직관적이며 신비한 영적인 세계이다.

 

스베덴보리는 계시를 받고 천국과 지옥을 두루 여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거기서 자신이 보고 듣고 깨달은 바를 대중에게 각성시키기 위하여 다양한 노력에 헌신하는데 우리에게는 기독교의 또 다른 분파로만 이해될 뿐이다. 이것이 에머슨이 토로하는 아쉬움이다.

 

아쉽게도 스베덴보리의 영적인 탐구가 오로지 신학적인 방향으로만 향해져 있었으므로, 그와 같은 모처럼의 대기획도 약간 독선적이고도 불충분한 것이 되고 말았다. (P.102)

 

기독교적 신비와 상징체계의 구현에 집착하다 보니 비기독교계는 당연히 무관심하고 기독교계 내부에서도 거부당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종교의 도덕적 본질을 놓친 데 대한 전직 기독교 목사의 비판은 의미심장하다.

 

플라톤의 등장으로 아득한 아시아적 상상력의 시대가 마지막을 고하고 대신 빛나는 유럽적 지성의 시대가 막을 열었다. (P.122)

 

에머슨은 플라톤을 유럽정신의 원형으로 간주한다. 플라톤에게서 나타나는 동일성의 원리는 스베덴보리는 물론 인도 사상과 함께 에머슨의 지적 형성에 기여하였다. 커다란 영의 존재, 만물의 통일, 유한과 무한을 향한 동시적 지향, 이 모든 것은 결국 플라톤뿐만 아니라 에머슨의 사유를 가리킨다.

 

이 책의 기이한 점이자 아쉬움은 몽테뉴 편을 누락하였다는 점이다. 이것이 번역의 저본으로 삼은 원본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번역자의 임의적 판단 내지 실수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모처럼 만에 에머슨의 뛰어난 저작이 번역되면서 흠결 있게 나온 점은 안타깝다.

 

2. 자기신념의 철학 [에세이 등]

 

앞서 밝혔듯이 후반부는 에머슨의 에세이, 일기 등에서 발췌한 내용들로 구성된다. 출처를 찾기 어려운 글들도 제법 있다. 한편 수록작 중에서 자신감을 살려라’[자기신뢰], ‘보상을 생각해 본다’[보상], ‘자연에 대하여’[자연]은 별도로 촌평할 기회가 있으므로 여기서는 제외한다.

 

1) 나의 길

 

여기서 에머슨은 기도의 본질을 명확히 한다.

 

기도란 가장 고귀한 관점에서 인생의 사실들을 고요한 마음으로 비추어보는 행위이다. 그것은 기쁨에 넘쳐 바라보는 영혼의 독백이며, 선한 업적을 선언하는 신의 정신이다. (P.199)

 

그리고 자기신뢰를 강조한다. 자신을 믿고 고집하라는 것인데, 이것은 무작정 고집부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원칙을 타협하지 말라는 뜻이다.

 

당신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자는 오로지 당신밖에 없다. 또한 당신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은 원칙의 승리밖에 없다. (P.208)

 

2) 나의 사랑

 

이 글은 에머슨의 제1 에세이집 중에서 <사랑>에 해당한다.

 

통속적 사랑론을 전개하는 대신 에머슨은 영혼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사랑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사랑의 감정은 인간이 야만을 벗어나 문명으로 진입하는 첫 순간이라고 선언한다. 부분적 사랑은 전체적 사랑의 단계로 확대되고 발전되며 사랑을 통해 인간은 완성되고 독자적인 영혼이 된다.

 

그는 이제 새로운 지각과 새롭고 더 훌륭한 목적, 그리고 성격과 목적에도 엄숙함을 지닌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다. 그는 더 이상 그의 가족과 사회의 부속물이 아니며, 중요한 무엇이다. 그는 인간이고 영혼이다. (P.215)

 

세월이 흐를수록 지성과 마음의 정화야말로 처음부터 미리 짐작되었고 준비된 것이며, 그들이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진정한 결혼임을 깨닫게 된다. (P.223)

 

3) 나의 일기

 

일기에서 주요 대목, 명문장 등을 발췌한 것인데 단편적인 문장들이므로 별도로 다루지 않는다.

 

4) 런던내기의 나라

 

에머슨은 유명한 두 권의 에세이집 외에 <영국인의 성격(English Traits)>이라는 저작도 남기고 있는데, 영국의 땅, 인종, 능력, 태도, , 대학, 종교, 문학 등을 두루 다루고 있다. 이 책에 소개된 부분은 그 중 제9Cockayne을 번역한 내용이다. 코케인은 전형적 뉴욕인을 양키라고 부르듯 런던내기를 지칭하는 속어다. 에머슨이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영국인의 자존심 또는 자만심이다. 섬나라의 편협성과 한계성을 노정하면서도 스스로에 대한 솔직함과 거리낌 없는 자신만만함을 표출하는 영국인의 성격의 단면을 강조한다.

 

5) 에이브러햄 링컨

 

링컨의 죽음을 추모하는 글이다. 아마도 링컨 암살 후 장례식 즈음에 맞추어 식사로서 쓴 글이 아닐까 추정해 본다. 링컨에 대한 후대인의 평가가 아닌 당대인, 그것도 저명한 지성인의 인식과 평가를 알 수 있어 흥미롭다.

 

6) 농사짓기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문구처럼 농사는 인간의 대표적인 원초적 노동이다. 에머슨은 이 글에서 농부의 역할, 농부를 돕는 자연의 기능과 농부와 관계 등을 서술하고 있다. 그는 농부를 진정한 자연인의 표상으로 평가한다.

 

7) 시골생활

 

내용적으로는 진짜 시골에서 사는 생활이 아니라 사실상 자연 속의 건전하고 건강한 생활, 즉 전원생활을 의미한다. 아울러 삭막하기 그지없는 도시와 학교, 교회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에머슨은 일찍이 <자연론>에서 시작하여 자연의 순수와 미덕을 예찬하는 글들을 지속적으로 남기고 있다. 이러한 자연 편향과 애호가 여기서도 나타난다.

 

우리는 이 믿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한 몸에 지니고 채색된 원소에 우리의 손을 씻으며 이 빛과 형체들 속에 우리의 눈을 적신다. 하나의 축제라고 할 전원생활의 호화로운 잔치, 용기와 미와 힘과 멋으로 장식된 가장 자랑스럽고 즐거운 연회가 이 순간 열리는 것이다. (P.271)

 

자연은 우리 안의 가장 선한 것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자연은 비록 사람이 살지 않는다 할지라도 아니 사람이 살지 않으므로 신의 도시로서 사랑을 받는다. (P.274)

 

인간은 타락했다. 그러나 자연은 똑바로 서서 인간에게 신성한 감정의 유무를 탐지해 주는 특이한 온도계로서 봉사한다. (P.275)

 

이 글은 표현 하나, 문장 하나가 햇빛에 산란되어 반짝이는 물결처럼 빛나고 눈부시다. 전체적 통합성과 구축적 전개보다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순간의 표현과 사상의 표현에 집중한다는 느낌이랄까.

 

8)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

 

에머슨의 제1 에세이집에 수록된 <역사>에 해당한다.

 

에머슨은 자신의 초월주의 관념에 견주어 역사를 해석한다. 개체를 넘어선 공통되고 보편적 본성과 마음을 초영혼이라고 한다면, 역사는 이 초영혼에 새겨진 일의 기록이라고 본다.

 

모든 개인에게는 공통된 한 마음이 있다. 모든 사람은 이 마음에 그리고 이 마음의 전체에 통하는 입구이다......이 마음에 남겨진 여러 가지 일의 기록이 역사이다. (P.358)

 

외부 세계와 사건은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보편적 본성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따라서 본질에 비추어 현상을 확인하고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모든 역사는 주관적이라는 에머슨의 역사관이 성립한다.

 

역사의 동일성이란 것은 역시 내재적이고, 그 다양성은 역시 외재적이다. 외면에는 사물의 무한한 변화가 있고, 중심에는 원인의 통일이 있다. (P.366)

 

다만 이 두 가지 사실, 즉 마음은 하나이다, 그리고 자연은 그 대응물이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서 역사는 읽히고 씌어져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P.381)

 

우리는 항상 자기의 사적 경험에서 역사의 사실을 확인한다. 모든 역사는 주관적으로 된다. 달리 말하면 세상에는 참된 뜻에서의 역사는 없다. 다만 전기가 있을 따름이다. (P.363)

 

역사는 사실의 단순한 연대기가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 역사는 보편적 본성의 발현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지혜로서 이다.

 

모든 역사는 우리의 친화 관계의 범위를 통찰하고, 사실을 표상으로 보는 지혜로써 씌어져야 한다. (P.382)

 

 

자기계발서에 가까운 몇 편의 에세이만 반복하여 소개되었던 에머슨의 <대표적 인물>이 유일하게 번역된 책이라 한계에도 불구하고 반갑다. 차제에 보다 완전한 형식으로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고 에머슨의 에세이도 전체가 체계적으로 번역 출간되면 더욱 기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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