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감 - 랄프 왈도 에머슨의
랄프 왈도 에머슨 지음, 이창기 옮김 / 하늘아래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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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에머슨의 글을 한 권 읽었는데 난삽하여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좀 쉽게 정리된 책을 찾다 보니 이 책을 알게 되었다. 옮긴이는 에머슨의 두 권의 에세이집 가운데 일곱 편을 그것도 전문이 아니라 부분 발췌하여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단순한 역자가 아니라 편역자이다.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용이한 접근과 이해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자 에머슨 입문으로서의 역할은 충분하다고 본다.

 

오늘날 에머슨의 이름은 후기지수인 소로의 명성에 바래지고 있는 듯하다. 에머슨 당대와 이후 미국 사회와 문단에서 그의 영향력은 자못 지대하였다고 한다. 사상적으로는 수많은 강연과 연설문을 통해서, 문학적으로는 두 권의 에세이와 함께 시집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혹자는 오늘날 미국과 미국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만든 이가 바로 에머슨이라고 한다. 그런 만큼 에머슨의 글에 도전할 명분과 가치는 충분하다.

 

<자신감>. 또는 자기신뢰로 번역하기도 한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생각을 믿고 신뢰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이다. 독불장군처럼 오만하라는 뜻이 아니라 타인의 의견과 이해관계 등에 흔들리지 말고 주체적이고 순수한 판단을 통해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마음의 태도를 견지하라는 언명이다. 쉬운 말이나 실천은 어렵다. 그래서 사회 일반은 자신감을 증오한다고 밝힌다. 참되려면 혼자서 가야함을 무릅써야 한다. 정신을 고양하기 위해 고립을 자초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구속받지 않고, 세인의 평판에도 흔들림 없이 오로지 현재에 순수하게 살아가야 함을 강조한다.

 

위인이란, 군중의 한가운데 있으면서 철저하게 온화한 태도로 고고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P.19)

 

에머슨의 현재 중시의 주장은 <경험>에서 반복된다. 많은 사람들은 삶의 바로 이 순간을 소홀히 여기고 항상 장래와 미래에 중점을 둔다. 그러고는 자신들의 삶이 덧없음에 한탄을 아끼지 않는다. 에머슨은 딱 잘라 말한다.

 

삶이란 지적인 것도 아니고, 비평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강인한 것이다. (P.45)

 

마음의 안정을 이룰 수 있는, 내가 아는 유일한 길은, 오직 현재라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P.47)

 

현재로서의 삶, 소소한 일상으로서의 찰나를 놓치지 말고 매순간 충실하게 영위하다고 보면 큰 지혜는 자연스레 따라오게 된다는 것이다. 호손의 <큰 바위 얼굴>과도 상통한다. 사실 우리는 생의 이후가 어떻게 전개되고 결말지어질지 알 수 없다. 현재를 외면하고 미래만 주시하는 것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오늘의 노력에 따라 내일의 모습은 전혀 다르게 변할 수 있다.

 

<보상>. 에머슨은 마음의 안정을 중요시한다. 순수한 자기신뢰에 근거한 항상심과 부동심을 가지고 세간에 흔들림 없이 현재의 소소한 삶에 충실한 것. 그가 보는 인생의 핵심은 이러하다.

 

인간의 참된 생활과 만족은, 지나치게 가혹하거나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경우를 피하고, 어떤 상황이나 환경 속에서도 태연하게 마음의 안정을 찾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P.61)

 

에머슨은 사물과 현상은 모두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개별로 흩어지지 않고 유기적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자 하는 성향은 우주는 물론 인생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원인과 결과, 수단과 목적, 씨앗과 열매는 서로 분리할 수 없다. 결과는 이미 원인 속에서 꽃피기 시작했고, 목적은 수단 속에, 열매는 씨앗 속에 이미 들어 있기 때문이다. (P.63)

 

요행은 없다. 반드시 새로운 책임이 뒤따른다. 고통과 패배는 자체로 힘들고 괴롭지만, 그 속에서 뭔가를 깨닫고 배울 수 있다면 보다 큰 성공과 승리의 기틀이 된다. 늘 승리만을 거둔 자는 한 번의 패배로 나락에 떨어지지만, 자신의 약점에서 개선과 보완을 발견하는 자는 끝내 성취하게 된다.

 

<자연>. 에머슨은 자연을 사랑하였다. 그의 <자연론>에 감화되어 소로는 월든 호반에 은거하기로 결심하였다. 에머슨에게 자연은 다정하고 꾸밈없는 소박한 기쁨”(P.79)을 안겨주는 존재로서 결코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이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덕, 가치에 대한 그의 찬미는 이어진다.

 

문학이나 시, 그리고 과학은......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자연의 비밀에 바치는 인간의 경의이다. (P.82)

 

자연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자연은 비록 사람이 살지 않는다 할지라도, 아니 오히려 그 이유 때문에 신의 도시로서 사랑을 받는다. (P.82)

 

자연은 언뜻 보아 비합리적인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소소하고 하찮아서 쓸모없어 보이는 현상도 편재한다. 성마른 사람들은 이런 관점에서 자연을 비판하지만 사실 자연의 비합리와 낭비와 무용성은 철저히 합목적적인 장치다. 이처럼 자연은 인간의 이해의 한계를 넘어서는 수많은 비밀을 감춘 채 찬연한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가르친다.

 

<정치>. 법과 정치에 대한 에머슨의 견해는 상대주의적이다. 그는 법은 하나의 비망록에 불과”(P.98)한 것으로 간주한다. 일국의 정치체제란 개인의 권리와 재산의 권리를 지키려는 동일한 요구의 반영이지만, “독특한 국민성”(P.104)에 좌우되므로 타국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민주정도 군주정도 나름의 존재가치가 있으므로 절대시할 수 없다.

 

우리가 전적으로 의지해야 할 것은 모든 법을 꿰뚫고 빛나는 자애로운 필연성에 있다. (P.109)

 

에머슨은 진리와 정의의 지배를 현자에 의한 지배”(P.110)라고 간주한다. 플라톤의 철인과도 상통하는 개념인 현자는 저절로 쉽게 태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불가피하게 합법적 절차를 마련하여 국민들이 이의 지배를 받도록 하고 있지만, 만약 현자가 나타난다면 사정은 바뀌게 된다.

 

합법적인 지배의 남용을 억제하는 해독제는 개별적인 인격의 영향, 개인의 성장이다. 그것은 곧 대리권을 폐지시키는 원리의 출현이며, 현자의 출현이기도 하다......(생략)......현자의 출현과 더불어 국가는 소멸한다. 인격의 출현은 국가라는 존재를 불필요하게 만든다. (P.113~114)

 

<역사>. 에머슨에 따르면 모든 개인들에게는 누구나 한결 같은 마음이 있다.”(P.117). 이 한결 같은 마음은 나와 남 사이를 소통하여 보편적인 마음이 된다. 그리고 이런 마음이 한 일들을 기록한 것이 바로 역사”(P.117)라고 한다. 보편적인 마음 내지 본성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발현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게 이 장의 취지다. 그는 우리는 옛것의 숭배자”(P.72)라고 단언한다. 고대의 인물과 사상을 숭배하는 것은 단지 오래되고 낡은 것에 대한 찬미가 아니다. 그 보편적인 마음 내지 본성에 대한 찬미”(P.132)라고 해야 할 것이다.

 

<초영혼>. 여기서 에머슨의 유명한 초령내지 대령(大靈)’ 개념이 등장한다.

 

사람이란 모두 개별적인 존재라는 생각을 받아들이면서도, 인간이 아닌 다른 모든 존재와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 바로 통일이자 초영혼이며, (P.140)

 

인간의 마음속에는 우주의 영혼, 현명한 침묵, 모든 부분과 분자가 균등하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 보편적 아름다움, 또는 저 영원한 하나가 들어 있다. (P.140)

 

우리의 영혼은 혼자이고 독창적이고 순수한 그 자신을, 역시 혼자이고 독창적이고 순수한 초월적 영혼에게 바친다. (P.158)

 

인간의 영혼들의 공통적인 본성이 그의 초영혼이다. 초영혼은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몰개성적인 것, 곧 신 자체이다.”(P.145). 우리는 에머슨이 목사였다는 점, 이후 기독교 교리의 영역을 벗어나 자유로이 인간에 대한 고찰을 해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신은 여호와도 예수도 아니라 인간 영혼과 공통적인 본성에 근거한 일종의 정신적인 에너지라고 그는 파악하였다. 신은 초월적 존재가 아니고 인간에 근거한 것이므로 신을 찬미하는 삶의 방식 또한 달라져야 한다.

 

위대한 신에게 경배하고자 높이 오르는 영혼은 평범하고 진실하다......그저 열심히 일상의 날들을 살아가며 지금 이 시간에 안주한다. (P.153)

 

성실한 마음으로 신을 떠받드는 가장 소박한 사람, 그가 바로 신이다. (P.153)

 

인간이 자기를 신뢰하고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까닭은 이처럼 신적인 최고의 존재가 인간 자신에게 깃들여 있어서이다.

 

에머슨의 에세이에서 많은 인용과 사례들, 그리고 난삽하고 장황한 대목들을 제외하고 보니 남은 것은 도덕서처럼 되고 말았다. 그의 글들이 일종의 자기계발서로 거론되는 이유도 전혀 황당하지는 않다. 그는 강연과 글을 통해 당대 미국 사회의 여러 폐해를 지적하고 개선하고자 노력하였다. 19세기 초반의 미국은 정치적으로 독립을 쟁취하였으나 사회, 사상, 문화면에서는 여전히 구대륙의 유산에 충실하였다. 에머슨은 유럽과 차별되는 정신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우월한 사회 건설이 미국에서 가능하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주창한 것이다. 그리고 에머슨이 후대 미국 사회에 남긴 영향은 아래 인용으로 충분하다.

 

에머슨은 낙관적, 이상주의적, 민주적, 외향적, 개인주의적 등 미국 국민성의 여러 요소들을 대변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우리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급자족을 가르쳤다. (<평생 독서 계획>(클리프턴 패디먼 외), P.236)

 

한편 이 책은 부록 에머슨의 세상을 바라보는 눈으로 그의 글에서 뽑은 경구들을 수록하고 있다. 그는 영어 경구의 대가로 오늘날에도 명성이 자자하다고 하니, 촌철살인하는 듯이 의표를 찌르는 날카로운 표현의 재미를 누려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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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박공의 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2
너대니얼 호손 지음, 정소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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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 글자>의 강렬한 인상에 힘입어 후속작인 <일곱 박공의 집>을 꺼내든다. 이전에 이미 단편선집도 읽었으니 본격적으로 호손의 세계에 뛰어드는 순간이다. <주홍 글자>와는 달리 남은 세 편의 장편소설들은 국내에 별로 인기가 없다. 번역본도 달랑 한 종류씩뿐, 따라서 무얼 읽을지 선택의 고민이 없어서 좋은 면도 있다.

 

호손은 자신의 장편 소설을 로맨스로 지칭한다. 이른바 소설과는 분명한 선을 긋고 있는데, 아무래도 작품 제재와 전개방식에 있어서의 비현실성 내지 자유로움을 지향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럴듯한 허구가 아니라 그럴듯하지 않은 허구로서의 로맨스라면 충분히 납득가능하다. 환상문학이 현대에 와서 강력하게 주류 문학으로서의 입지를 구축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마법사로 화형당한 매슈 몰의 저주, 대를 이은 핀천가 주인의 의문사, 앨리스 핀천의 불행한 죽음, 그리고 급작스러운 해피엔딩. 고딕적 괴기와 선혈 낭자한 범죄, 저주와 최면 같은 로맨스적 성격은 물론 흥미롭다. 권선징악적 해피엔딩은 진부하지만 독자의 기분은 불편하지 않다. 다만 이것이 전부라면 뭔가 미진하다. 독자의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로 몰입감이 좋은 편이 아니며, 말초신경을 자극할 짜릿함도 부족하다. 게다가 홀그레이브의 신분은 작중에서는 결말 부분에 공개되지만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이미 중반부에서 추론이 가능하다.

 

기실 이 작품은 흥미로운 로맨스 소설이 아니라 전작과 마찬가지로 인간 성격에 관한 진지한 탐구로 접근해야 마땅하다. 전작은 죄와 죄의식, 그리고 양심이 주된 테마로 등장한 반면, 여기서는 위선과 인간상의 대비-탐욕적 인간상과 (동화 같은) 순수하고 이상적 인간상-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호손의 인간탐구 시리즈 제2부라고 불릴 만하다.

 

전작보다 훨씬 많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흐름은 느릿느릿하다. 성미 급한 독자라면 중반까지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책장을 살포시 덮고 치워버리기 딱 좋다. 작가는 느긋하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당대에서 이백여 년을 거슬러 올라간 식민지 초창기 시절에 벌어졌던 어두운 사건을 상세히 소개한 후 일곱 박공의 집의 현재로 돌아온다. 이 점에서 내내 과거에 머물렀던 전작과는 차이점을 보여준다.

 

독자는 곧 주요 인물들의 성격에 대해 알 수 있다. 헵지바의 괴팍한 외모와 선한 성격의 대조를 기술하는 장면을 통해 독자는 다소간 헵지바에게 연민을 품게 되고 이후 그녀의 무능력과 약점을 눈감아주게 된다. 클리퍼드는 살인범으로 수십 년간 지하 감옥 형기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선하고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라는 작가의 말로써 흉악한 인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반면 핀천 판사는 지역사회의 유지로 관대하고 친절한 언행으로 세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인데, 작가는 홀그레이브가 보여주는 핀천 판사의 은판 사진과 핀천 판사와 헵지바, 피비의 조우 장면으로써 겉보기와는 다를 수도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드리운다.

 

그것은 후손에게 상속하고자 하는 재산과 명예에 관련해 인간의 법이 확립하고자 했던 계승의 과정보다 훨씬 더 확실한 과정을 통해서 약점과 결점들, 악한 감정들이나 비열한 경향들, 그리고 범죄로 이어지는 도덕적 질병들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 내려진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P.162)

 

특히 이날 오전 핀천 판사의 친절한 면모가 지닌 따뜻함이 너무 도가 지나쳐, 적어도 마을에 도는 소문에 따르면 지나치게 쏟아지는 햇볕 때문에 생긴 먼지를 가라앉히기 위해 따로 물차가 따라다녀야 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P.177)

 

위 대목의 해학성에 주목해본다. 이미 전작에서 형식상 두드러진 특징으로 불성실한 화자로서 작가의 의도적 개입을 언급하였다. 이 작품에서도 작중 사건과 인물에 대한 작가의 시점은 대체적으로 전작과 유사하다.

 

그러면 이제, 곧 알게 되겠지만 아주 소박하게 우리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하자. (P.42)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이야기의 문턱에서 소심하게 어슬렁거리고 있을 뿐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헵지바 핀천이 이제 막 하려는 일을 들추어내기가 도무지 싫은 것이다. (P.49)

 

하지만 여기서는 정도가 더욱 현저하다. 작가는 전지적 시점으로 전개를 해나가다가 불현 듯 순진한 관찰자의 외투를 덮기도 한다. 마치 무성영화 시절의 변사처럼 소리 없는 영상 속 사건과 인물을 관객에게 설명해주는데 만담 풍으로 의도적으로 조소적, 해학적 촌평을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게다가 이러한 촌평의 분량이 짤막하지 않고 대체로 길다는 점이 흥미롭다.

 

, 불쌍한 클리퍼드! 당신은 결코 당신이 겪어서는 안 될 괴로움에 시달려 지치고 늙었구나. 당신은 반쯤은 정신이 나가고 반쯤은 바보가 되었다......(중략)......그러니까 할 수 있을 때 그 행복을 잡아라. 투덜대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최대한 누려라! (P.213)

 

이러한 사례의 압권은 핀천 판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소개하며 기술하는 제18장이다. 헵지바를 협박하여 그녀가 클리퍼드를 데려오길 기다리는 핀천 판사의 모습이 독자가 아는 마지막이다. 그리고 작가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독자도 마찬가지이길 기대하면서 조상 전래의 의자에 앉아있는 핀천 판사를 향해 이러저러한 대화를 건넨다. 다소 길고 반복적이지만 해학적 어조로 그의 죽음을 서서히 알리는 과정을 통해 독자는 핀천 판사의 진정한 면모, 즉 치밀한 일상과 맹렬한 야심을 비로소 확연히 알게 된다.

 

제발, 핀천 판사, 이젠 시계를 좀 봐요! 눈길도 안 주나요? 저녁 시간이 십 분밖에 안 남았는데!......(중략)......맙소사, 이 만찬! 그 진짜 목적이 뭔지 정말 잊은 건가요?......(중략)......그러니까 서두르십시오! 당신이 할 역할을 해요! 당신이 지금까지 얻기 위해 그렇게 노력하고 싸우고 기어 가며 어렵게 오른 데 대한 보상을 이제 바로 거머쥐기만 하면 돼요! 만찬에 참석해야 해요! 그 고귀한 와인을 한두 잔 마시고 가능한 한 나직한 목소리로 선서를 해야죠! 그러면 식탁에서 일어날 때 사실상 당신은 오래된 주의 영예로운 주지사가 되는 겁니다! 매사추세츠 추의 핀천 주지사!......(중략)......그러니까 일어나요, 핀천 판사, 일어나라고요! 하루를 다 낭비했고 곧 내일이 올 거예요. 늦지 않게 일어나서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그래요? 내일이라고요! 내일! 내일! 살아있는 우리는 내일 일찍 일어날 거예요. 오늘 세상을 뜬 사람에게 내일을 부활의 아침이 될 테고요. (P368~372)

 

해피엔딩의 주인공인 홀그레이브와 피비에 대해 빼놓을 수 없다. 일단 홀그레이브에 대한 작가의 평가는 주저하면서도 대체로 호의적이다.

 

삶의 초기에 가진 오만한 믿음이 마지막에는 훨씬 겸손한 믿음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중략)......그의 신념과 불충, 가진 것과 부족한 것 모두에서 그 예술가는 고국 땅의 많은 동료들을 대표하는 인물로 충분히 나설 만했다. (P.243~244)

 

반면 피비는 작품 내에서 가장 완벽한 미덕을 지닌 완벽한 인성의 보유자로 그리고 있다. 그녀가 일곱 박공의 집에 등장하는 것은 낡고 음습한 저택에 한줄기 빛이 비추는 것과 같다. 그녀의 존재는 헵지바와 클리퍼드를 돕고 위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홀그레이브마저 변화시킨다.

 

그녀는 실재였다. 손을 잡으면 무언가를, 따뜻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실체이면서 온기를 가진 것. 그래서 부드럽기도 한 그 손을 꽉 붙잡고 있기만 하면 서로 공감하는 인간 본성의 전체 연쇄 속에서 자신이 확실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세상은 이제 단지 망상이 아닌 것이다. (P.189~190)

 

피비의 진정한 미덕은 그녀가 매우 실제적이라는 사실이다. 헵지바와 클리퍼드는 스스로를 유령이라고 탄식한다. 그들은 사실상 유령 같은 존재들이다. 오라버니는 타의에 의해 오랫동안 세상과 단절되어 지냈으며, 누이는 세상에 대한 반감으로 스스로를 세상과 단절시켰다. 그들은 모두 당대에 착근하지 않고 과거에 사로잡혀 세상을 부유하는 인물이라고 하겠다. 반면 작가의 표현처럼 피비는 여성적 품위와 유용성이 결합된 당대의 이상적 여성상에 해당한다.

 

여기에 이 작품의 또 다른 이야기가 드러난다. 귀족사회에서 공화주의 사회로 정치 체제가 변화하였고, 농경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경제 체제도 변모되는 사회에서 시대의 변천에 따른 귀족계급의 부침과 몰락, 대응이라는 전개 과정을 흥미롭게 살펴볼 수 있다. 독자는 작품 초반부에서 헵지바가 생활을 위하여 상점을 여는 것에 대한 그토록 끔찍하게 여겼던 것을 기억한다.

 

그것은 스스로 옛날 귀족층이라 칭했던 것의 최후 단계였다......그리고 우리는 귀족 부인이 평민 아낙네로 변신하는 바로 그 순간의 헵지바 핀천을 불경스럽게 훔쳐보게 된 것이다. (P.53)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삶에서 배제되고 회피한 헵지바와 클리퍼드는 과거의 인물들이다. 삶에 있어 보다 실제적이고 주도적인 피비와 홀그레이브는 분명 현재와 미래에 속하는 인물이리라. 그렇다면 핀천 판사는? 그는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파도를 타고 높이 비상하려고 했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다만 그는 다가오는 시대의 부정적 측면에 함몰되어 스스로를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게 만들었다.

 

우리는 핀천가에서 두 명의 억울한 인물을 찾을 수 있다. 앨리스 핀천과 클리퍼드 핀천. 핀천 대령의 청교도적 가면을 쓴 파멸적 욕망에 못지않게 앨리스 핀천을 죽음으로 몰고 간 목수 매슈 몰의 죄악도 크다. 인간의 영혼에 대한 존중을 저버린 점에서 그는 전작의 칠링워스와 닮은꼴이다.

 

작가는 세상의 정의에 대해 회의적이다. 부정의와 부조리를 없앤다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하다고 본 것일까. 어설픈 위로와 위안보다는 차라리 상처받은 이들이 아픔을 가슴속에 묻은 채나마 이전보다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게 낫다고 제언한다.

 

우리 인간 세상에서 정말 잘못된 일은, 내가 행한 것이든 당한 것이든 진정으로 바로잡히지 못한다는 것이 진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더 고귀한 희망을 암시하지 않는다면 또한 아주 슬픈 진실이 되기도 할 것이다......그보다 나은 치유는 고통을 당한 사람이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이라고 여겼던 그것을 뒤로 한 채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P.425)

 

작품 주제와 별로 연관성은 없지만 인상 깊은 대목이 하나 있다. 바로 클리퍼드가 기차 안에서 어떤 노신사에게 피력한 사상이다. 거기서 클리퍼드는 문명의 발전이 우리네 삶을 유목민의 그것으로 돌려놓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노매드로 불리는 21세기적 인간형과 세태에 대한 적확한 예견이 무척이나 놀랍다.

 

철도의 발견은, 속도에 있어서나 편리함에 있어서나 우리가 바라는 만큼 광범위하고 불가피하게 점점 향상되면서 가정과 난롯가라는 그 케케묵은 생각을 없애 버리고 그보다 나은 것으로 대체할 것입니다.......(중략)......놀라울 정도로 향상되었고 계속 향상하고 있는 교통시설이 분명 우리를 다시 유목민의 상태로 되돌려 놓을 거라는 게 제가 받은 인상입니다. (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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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 글자 펭귄클래식 32
너새니얼 호손 지음, 김지원 외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세계문학사상 손꼽히는 명작을 이제 처음 읽는다. 내게는 다소간 편벽된 취향이 존재하는데 불륜의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설은 기피한다. 일단 여성 주인공이라면 선뜻 이끌림이 덜 하는데 불륜을 저질렀다면 내용 자체가 식상하리라는 지레짐작이다. <보바리 부인><안나 카레니나>도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 작품도. 호손의 일련의 작품들을 읽어볼 순서가 되기도 하였고, 얼마 전에 읽은 고 장영희 교수의 책에서 이 소설에 대한 언급도 있어서 새삼 책장을 펼치게 되었다.

 

책의 플롯 자체는 널리 알려졌다시피 단순하다. 죄 지은 남과 여, 남자는 신분을 드러내기 어렵고 여자는 모든 수모를 감수하면서 함구한다. 여의 남편은 남자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서서히 올가미를 죈다. 도덕적 양심의 기로에서 쇠락하는 남자. 복수에 혈안이 되어 인성이 타락하는 남편. 여자의 가슴에 아로새겨진 주홍 글자의 의미.

 

이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죄와 양심이다. 딤즈데일과 헤스터 사이의 간통은 요즘 관점에서라면 화젯거리도 되지 않는다. , 직업으로 인한 놀람은 존재하겠다. 더구나 헤스터의 경우 남편은 수년간 종적이 묘연한 처지이고 보면 동정표도 받을 만하다. 호손의 시기로부터 이백여 년을 거슬러간 미국 식민 초창기의 유난히도 엄격한 청교도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라는 점에서 둘 사이의 죄와 죄의 댓가로서의 주홍 글자가 심오한 의미를 지닌다. 모든 사회의 공통적 범죄 몇 가지, 예컨대 살인, 도둑, 강간 등을 제외하면 죄의 요건은 상대성을 지닌다. 특히 문화적, 종교적 죄는 편차가 심하다. 일순간의 잘못으로 인한 죄를 불구대천의 엄청난 범죄인 듯이 낙인찍는 사회의 부당성, 굴욕과 수모를 감수하면서 그 마을에서 살아가는 것만이 죄씻김을 받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가치관. 이것은 오늘날 기준에서 보면 모두 이성적이지 못한 비정상에 해당한다.

 

딤즈데일이 목사가 아니었다면 양심의 고뇌는 한결 덜했을 것이다. 성인에 준할 정도로 당대에서 추앙받는 젊은 목사. 반면 내면에서는 죄를 범했으며 떳떳하게 고백하지도 못하였다. 한결 대범한 목사였다면 또 이래저래 넘어갔을 수도 있으련만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인 그는 그러하지도 못하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스스로를 학대한다. 그가 악한 인성을 지닌 이가 아니라는 점은 헤스터가 그를 원망하지 않으며, 끝끝내 그의 정체를 숨기고 감싸는 데서도 추측할 수 있다. 헤스터는 딤즈데일을 이해하고 용서해주었다. 오랜만에 마주친 그의 용모가 비길 데 없이 쇠락해진 데 충격을 받을 정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여전히 그를 사랑한다.

 

비참한 운명의 두 연인 사이를 음울과 냉혹으로 갈라놓은 존재는 헤스터의 남편 칠링워스다. 그는 비록 신체적으로 불구의 몸이지만 드높은 학식과 고매한 지성을 지닌 것으로 기술된다. 자신이 헤스터를 사랑했는지 아니면 아내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가정의 이념적 평온과 안온을 기대하던 그는 복수만을 꿈꾼다. 화끈하게 단번에 정체를 폭로하고 가증스러운 가면을 벗겼다면 최소한 뭇사람(적어도 동병상련의 처지에 놓인 남편들)의 지지는 받았으련만 그는 딤즈데일을 고사시키는 방식을 택했다. 서서히 끊임없이 그의 연약하고 민감한 양심의 줄을 건드려 불안과 고뇌 속에 허덕이게 만들고 죄의식에 몸부림치게 만들면서. 법적 용어에서 과잉금지의 원칙이 있다. 칠링워스는 바로 이 점을 크게 위반하였다. 딤즈데일을 괴롭히면서 죽지 않을 만큼만 건강을 유지시켜주는 그의 모습은 외모뿐만 아니라 내면에서도 이미 악마에 가깝다.

 

지금의 내가 어떻게 변했는지 당신한테 이미 말했잖아! 난 악마야!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 (P.228)

 

작품의 형식과 관련하여 시점 내지 화자가 다소 독특하다. 작가는 이야기의 창조자가 아니라 옛 두루마리에 적힌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주는 전달자의 역할을 자임한다. 작가는 이야기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독자에게 스스럼없이 드러낸다. 자신은 제삼자에 불과하므로 때로는 전달자, 또는 독자와 함께 이야기의 전개와 작중 인물에 대해서 주저 없이 개입하고 임의로 재단하며 심판하고 독자에게 권고하며 구구절절한 촌평을 주워섬기기도 한다. 주요 인물 세 사람의 주도적이고 능동적인 행위와 대화로 작품이 진행되지 않는다. 이야기의 진행과 휴지, 속도의 증감, 이야기 자체의 충실과 딴청부림 등은 오로지 화자를 가장한 작가의 전유한 특권이다. 사건과 대화 위주로 정신없이 흘러가는 유형의 소설에 익숙한 독자라면 매우 낯설고 답답함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의외로 책장을 넘기는데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점에서 과연 명작이라고 하겠다.

 

헤스터 프린이 이 세상에서 자기보다 더 큰 죄를 지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애써 믿으려한 사실이야말로, 자신의 연약한 천성과 인간 사회의 가혹한 규범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그녀가, 완전히 타락하지 않은 증거라고 독자들은 받아들여 주기 바란다. (P.116)

 

목사는 교활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는 위선자였기에 그의 애매한 고백이 신도들 눈에 어떻게 비칠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목사는 죄책감을 고백하는 것으로 제 자신을 속이려 했으나 자기기만에서 얻는 일시적인 안도감도 없이 도리어 수치스러운 자기 합리화라는 또 하나의 죄를 더했을 뿐이었다. (P.189)

 

작품의 또 다른 핵심 키워드는 진실이다. 그것이 삶이든 내면이든 진실은 소중하다. 세인에게 질타당하고 배척받더라도 진실을 가슴에 품었다면 외롭지 않고 당당할 수 있다. 진실이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를 알면서도 공개할 수 없는데서 양심은 괴로움을 겪고 죄의식에 빠지게 된다. 목사는 반쪼가리 진실만을 간신히 붙들고 버틴다. 커다란 진실을 은폐한 그이지만 스스로를 해할 정도의 자책과 고뇌는 진실에서 영구 추방을 면하게 하였다.

 

헤스터는 죄를 인정하고 댓가를 순순히 감내하였다. 아무리 수치스럽고 모멸감을 안겨주는 처벌일지라도 그녀는 양심과 진실 앞에서는 거리낌을 갖지 않았다. 그녀가 타락의 길에 빠지지 않고 올바른 길을 갈 수 있었던 동력이 여기에 있다. 그녀는 진실한 삶을 살았다. 주홍 글자를 피하지 않고 직면한 용기를 통해.

 

진실하지 않은 자에게는 온 우주가 거짓이자 허무이며 붙잡기가 무섭게 줄어들어 아무 흔적도 남지 않는 법이다. (P.191)

 

나는 이 주홍 글자가 가르쳐준 덕분에 영혼 속까지 태우려 드는 시뻘건 불덩이 같은 진실을 깨달았어요. (P.229)

 

진실하라! 진실하라! 진실하라! (P.346)

 

작품이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못하리라는 점은 헤스터가 주홍글자를 벗어던지자 딸 펄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거부하는 장면에서 암시하고 있다. 새로운 땅으로 떠나려는 계획도 틀어지자 목사에게는 신의 뜻으로 해석되었을 것이다. 타락한 목사의 허위로 가득 찬 삶에 대한 처벌. 더할 나위 없이 쇠약한 그가 처형대에 올라 숨겨왔던 진실을 토로하는 대목은 더없이 극적이며 감동적인 순간이다. 이로써 그는 죄를 인정하고 진실을 회복하였으며 양심의 가책을 벗어던질 수 있게 되었다. 피할 수 없더라도 그의 죽음의 양태는 분명 이전과 달라졌으리라.

 

헤스터,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죄인인 것은 아니오. 이 타락한 목사보다도 더 나쁜 놈이 있소. 그 노인네의 복수는 나의 죄보다 훨씬 더 흉측하오. 그 작자는 냉혹하게도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신성을 깨뜨렸소. 헤스터, 당신과 나는 결코 그런 죄는 범하지 않았소! (P.260)

 

우리가 깨뜨린 율법! 여기서 무섭게 폭로된 죄! 이것들을 늘 생각하시오! 나는 두렵소! 두려워요! 우리가 하나님을 잊었을 때, 우리가 서로 다른 사람의 영혼에 대한 존중을 저버렸을 때, 그때부터 우리가 내세에서 영원하고 순수한 결합을 하길 바랐던 희망은 깨지고 말았을 겁니다. (P.343)

 

주홍 글자는 외견상 헤스터 프린의 가슴에 덧붙여졌지만 사실은 딤즈데일과 칠링워스의 가슴 깊숙이 지울 수 없이 견고하게 새겨졌다. 각각 진실의 외면과, 그리고 마음 속 신성을 파괴한 댓가로서.

 

앞서 수록된 <세관>은 반쯤은 호손의 삶의 단편을 들여다보는 재미로써 나머지는 헤스터 프린 이야기의 발견 계기로 의미가 있다. 작가는 이를 통해 <주홍 글자>의 진술의 정당성과 진실성을 주장한다. 한편 말미의 작품 해설에서 호손 작품에서 진술자의 독특성과 진술의 모호성에 대한 설명은 무척 흥미롭다. 역자는 작가가 작품과 일부러 간격을 떨어뜨려놓고 서술자라는 간접적 존재의 등장으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텍스트의 개방성을 목적하고 있다고 풀이한다. 그것이 작품의 위대성을 직접 대변하지는 못하더라도 음미해볼 가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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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학교 1 창비아동문고 154
E.데 아미치스 글, 김환영 그림, 이현경 옮김 / 창비 / 199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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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에는 꽤나 유명한 작품으로 평가받았지만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엄마 찾아 삼만 리>의 원전으로만 기억되는 잊혀진, 그래서 어찌 보면 불운한 작품이라고 해야겠다. 무슨 연유인지는 책을 몇 장 넘기다 보면 절로 알게 된다. 의도된 목적성, 지나친 교훈성.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을 화자로 내세워 일기 형식으로 전개되지만, 작가는 여기에 부모와 교사로 대표되는 성인의 가치관, 당대 사회의 주도적 국가관을 강력하게 투입하고 있다.

 

깔라브리아에서 온 소년에서는 새로 전학 온 깔라브리아의 소년을 맞이하면서 선생님이 반 대표에게 새로 온 친구를 안아 주라고 지시한다. “삐에몬떼의 어린이가 깔라브리아의 어린이에게 하는 포옹이란다.” 자칫 오버하는 듯한 선생님의 의도는 다음 대목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너희는 서로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 우리 고장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친구를 모욕하는 사람은 이딸리아 국기가 지나갈 때 쳐다볼 자격도 없는 사람이다. (P.25)

 

이쯤해서 이탈리아의 역사를 반추해 보면, 수세기 동안 분열되었던 이탈리아가 통일을 달성한해가 1861년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아미치스가 이 작품을 발표한 해는 1886, 작가는 통일전쟁에 참전한 군인이었다. 신생 이탈리아는 통일 국가로서 기틀을 확립하기 위한 정치, 사회, 문화의 다방면에서 질서 확립과, 국민의식 고취, 애국심의 배양 등 사회 통합적 장치를 필요로 하였다. 이 작품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애국심의 강조가 여기에서 연유한다. 매월마다 선생님이 들려주는 형식을 빌린 이달의 이야기네 편 중 빠도바의 꼬마 애국자’, ‘롬바르디아의 소년 보초병’, ‘사르데냐의 북 치는 소년’, 이 세 편의 주제도 여일하다.

 

작품의 정치적 배경과 합목적적 교훈성을 배제하고 순수한 이야기로 이 책을 읽으면 나름대로 재미있는 일화들의 나날임을 알 수 있다. 화자인 꼬마 엔리꼬가 바라 본 학급과 급우들은 사회의 축소판이다. 우등생이자 모범생인 데롯씨, 용감하고 정의로운 가르로네 같이 누구에게나 존중받고 가까이하고 싶은 친우들이 있는 반면 프란띠처럼 도저히 구제불능이라고 할 만한 아이도 존재한다. 귀족의 아들, 석탄장수 아들, 꼬마 벽돌공, 가롯피 등 대다수의 학생들은 제각기 장단점을 지니지만 인간 본성에서는 착한 아이임이 밝혀진다.

 

학급의 선생님은 정의의 화신이자 투철한 가치관과 애국심의 사도라고 불릴 만하다. 그는 불의에 대해서는 불같이 분개하며, 아이들의 단합과 충성을 고취하는데 헌신한다.

 

너희는 너희를 괴롭히지도 않은 친구를 모욕하고, 불행한 친구를 조롱하고 자기를 방어할 힘도 없는 허약한 친구를 괴롭혔다. 인간으로서 가장 비열하고 가장 수치스러운 행동을 한 거야. 비겁한 녀석들! (P.32)

 

작품에서 교사와 함께 엔리꼬를 올바르게 훈육하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인물이 또 있는데, 그것은 엔리꼬의 부모이다. 그들은 엔리꼬의 일기를 읽고 이따금씩 메모를 덧붙이는데, 매우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아울러 군국적, 애국적 기조를 띠고 있다. 사실상 작가의 목소리라고 할 이 대목을 빼버렸더라면 딱딱함이 훨씬 덜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용기를 내라, 거대한 훈련장에 나가 있는 꼬마 군인아. 책은 너의 무기이고 교실을 부대이며 전세계가 전투의 현장이다. 그리고 그 승리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문명이란다. 비겁한 군인이 되지 않길 바란다, 엔리꼬. (P.42)

 

통일 국가와 사회에서 가장 긴요한 일은 분열적 요인을 극력 억제하는 것이다. 지방색의 배제와 함께 계급 갈등의 방지는 사회 안정에서 중요하다. 당대 이탈리아에서 사회주의 사상이 풍미하고 있었음을 작중에서 노동의 가치와 노동자의 존중 대목을 통해 알 수 있다.

 

노동은 더러운 게 아니야. 일터에서 돌아오는 노동자를 보고 더러워.’라고 말하면 안 된다. ‘옷에 노동한 흔적과 자취가 있구나.’라고 말해야지. 이 점을 잘 기억해라. 그리고 꼬마 벽돌공을 아껴 주어라. 무엇보다도 네 친구니까, 그리고 노동자의 아들이니까. (P.118)

 

초등학생들이니만치 여러 자잘한 사고와 사건도 끊이지 않는다. 밝고 즐겁고 행복한 순간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슬프고 우울하고 잘못하여 혼도 맞으면서 아이들은 관찰과 사고와 상상을 통해 학습한다. 그렇게 아이들은 커나가는 것이다. 이어지는 2권과 3권에서는 활기찬 아이들의 목소리를 더욱 많이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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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리지 시선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지음, 윤준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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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즈워스 시집을 읽었으니 콜리지 시선을 읽지 않고 어찌 넘어갈 수 있겠는가. 워즈워스보다 콜리지의 인기가 덜함은 시중에 나와 있는 시집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한편으론 옮긴이가 워즈워스 시선과 동일인에 기쁜 마음에 이 책을 꺼내든다. 콜리지의 주요 시작품들이 연대순으로 거의 수록되어 있어 한 권만 제대로 감상하면 그의 시세계를 제대로 조망할 수 있으리라. 다만 여전한 아쉬움은 영한 대역이 아니기에 전적으로 번역자의 능력에 의존해야 함에서 비롯된다.

 

<풍명금>, 이올리언 하프는 초기작임에도 자연의 전일성에 대한 편향이 두드러진다. 애니미즘에 가까운 그의 상념은 후반에 이르러 기독교 전통으로의 급격한 복귀와 대조되는데, 아무래도 초기작이므로 그의 시적 이념이 굳건하지 못함을 보여준다. <내 감옥, 이 라임나무 그늘>도 전작과 유사하게 자연 예찬이다. “전일한 생명이 자연 도처에 편재해 있다면 반드시 풍광이 수려한 명승지가 아니라 할지라도 자연이 존재하는 그곳에서 우리는 자연의 신비와 진리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노수부의 노래>는 특이하게도 라틴어 제사와 산문 방주를 수록하였는데 1817년 판본이라는 점에서 초판본 또는 2판본과의 차이가 있어 이 책만의 독특한 또 다른 재미를 드러낸다. 다만 몇 부분에서 기존의 번역본과는 두드러진 차별성이 존재하는데 원문과 대조해도 이해가 애매하다.

 

그녀의 입술은 붉고, 표정은 거리낌 없고,

머리칼은 황금처럼 누런색이었소.

살결은 문둥이처럼 하얗고,

그녀는 공포로 사람의 피를 얼어붙게 만드는

몽마(夢魔) 사중생(死中生)이었소. (P.29)

 

<쿠블라 칸>은 여전히 내게 시 자체보다 시작 배경에 대한 작가의 서문이 더 인상 깊다. 에피소드로 과대평가된 미완성 시편이라고 봐야 하리라. 같은 미완성이지만 <크리스타벨>은 훨씬 더 음미할 가치가 크다. 번역본으로는 유일하게 이 작품을 수록한 점이 이 책의 큰 장점이다.

 

독자는 제럴다인 양의 정체에 대한 암시를 곳곳에서 알 수 있다. 성문 문턱을 혼자 못 넘음, 성모 마리아 찬미의 회피, 마스티프 종 개의 신음 소리, 갑자기 날름거리는 불길 등. 중세 기사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마녀, 기사, , 음유시인, 수호 정령 등 온갖 탈현실적인 기이한 요소가 시 전편을 휘감는데, 무엇보다 관능과 순수(내지 순결) 간 팽팽한 대립이 현저하다. 작품명이자 작중 주인공인 크리스타벨은 간계나 죄 같은 건 전혀 모르는 처녀”(P.102)이다. 마녀는 그녀를 타락시키고 정복하기 위해 그녀의 수호 정령인 어머니의 영혼을 내쫓고 주문을 외워 마법을 발현시킨다. 독자는 알 수 있다. 마녀의 본색이 뱀이라는 점을. 마법에 걸린 크리스타벨은 슈웃 소리를 내거나 눈을 위로 쳐든 모습으로 뱀의 시늉을 하고 있다. 시인은 간밤 꿈에서 비둘기를 괴롭히는 뱀을 본다.

 

중세시대 기독교적 전통과 미덕이 강하게 지배하는 곳에서 여성에게 요구되는 가장 큰 미덕은 바로 순결이다. 마녀는 순결하고 무구한 크리스타벨에게 젖가슴의 이미지를 통해 관능을 심어준다. 크리스타벨은 마법에 압도되면서도 본능적으로 위험성을 절감하고 회피하려고 한다. 이 작품이 완성되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알 수 없지만 단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무척이나 흥미로워 <노수부의 노래> 못지않거나 이를 능가할 수 있으리라는 점이다.

 

이후 수록작들은 <한밤의 서리><나이팅게일>을 제외하면 거의 국내 초역이다. <프랑스-송가>는 자유를 주제로 하여 그의 사상적 이념을 드러내는 시인으로서는 드물게 보는 이념시라고 하겠다. 자유를 찬미하는 시인에게 있어 자유의 현실적 실현인 프랑스 대혁명은 자체로서 극진한 칭송의 대상이다. 자유 프랑스에 반대하는 반동적 국가야말로 오히려 지탄받아 마땅하다. 혁명 이후의 혼란마저도 불가피한 것으로 시인은 긍정한다. 이런 시인을 분노케 하는 것은 자유 프랑스가 자유 스위스를 침공한 사실이다.

 

나를 용서해 다오, 자유여! , 그 몽상들을 용서해 다오! (P.117)

 

땅과 바다와 하늘에 내 존재를 쏘며

더없이 열렬한 사랑으로 만물을 소유하는 동안,

, 자유여! 내 정신은 그곳에서 너를 느꼈노라. (P.119)

 

시인은 절망한다. 회한에 사로잡힌다. 현실에서 그의 이상은 사라졌다. 이제 시인은 자연 속에서 이상을 의탁하고 발견한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임을.

 

이후의 시들은 다소간 재미가 떨어진다. <낙심-송가>에서 시인은 자신의 생기와 상상력이 저하되고 쇠퇴하였음을 탄식한다. 시인에게 그것은 낙심천만한 치명적 위기이니 상상력과 아름다움을 만드는 환희를 상실한 까닭이다. <잠의 고통>은 아편의 부작용으로 인한 불면에 시달리는 시인의 처참한 공포와 고통이 뼈저리다. <관념적 대상을 향한 한결같은 마음><사랑의 기억>에 뒤이어 <희망 없는 일>에서도 이른 봄의 깨어나는 활력과 대비되는 자신의 쇠약함에 다시 한 번 낙담한다.

 

빛을 잃은 입술과 화관 없는 이마로 난 배회하고 있으니. (P.155)

 

<윌리엄 워즈워스에게>는 워즈워스의 <서곡> 낭송을 들은 후 감회를 술회하고 있다. 두 쪽에 걸쳐 <서곡>의 주제와 제재들을 열거한 후 친구 시인 워즈워스와 그 작품에 대한 예찬을 아끼지 않는다.

 

성스러운 두루마리인 그대의 작품은

진리의 이어진 노래, 심오한 진리의

연속된 감미로운 노래, 배운 것이 아니라

타고난 그 자체의 자연스러운 곡조를 들려준다오! (P.147)

 

작품을 듣던 순간의 행복한 회상과 상념으로 마무리하는 장면에서 독자는 두 시인 간의 오랜 친교와 함께 시적 창조력이 고갈되어 씁쓸해하는 시인의 친구에 대한 부러움과 찬미가 혼합된 감정을 느낄 수 있으리라. 시인으로서의 후년의 자괴감은 그의 <묘비명>에도 여전하다.

 

따뜻한 가슴으로 읽어 주요, 이 무덤 속에

한 시인이, 아니 한때 시인 같았던 이가 누워 있으니.- (P.156)

 

콜리지의 충실한 해설이 이 책의 다른 장점이다. 역자는 초기 시편에서 자유의 이상에의 헌신, 사악한 압제자들에 대한 분노와 순결하고 억압받는 이들에 대한 인간애, 인간 조건을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인다고 언급한다. 이어 대화시의 의미와 대화시와 풍경시의 관계, 그리고 대화시의 의의를 상세히 논평하고 있어 유익하다.

 

대화시가 다른 한편으로 17.18세기 풍경시의 전통 속에 자리해 있음을 시사한다. (......) 시적 상상력에 의해 주체와 대상, 정신과 자연 간에 뜻깊은 관계를 맺어 주는 상징적 지각의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18세기 풍경시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 (P.161)

 

대화시의 철학적 핵심은 바로 이 생명의 전일성에 대한 신념이다. (P.161)

 

개별 작품으로 들어가면 <노수부의 노래>에서 단순한 괴이한 항해담이 아니라 인간성에 내재한 악의 성격에 관한 진지한 탐색의 기록”(P.163)임을, 시인이 여기에 스스로의 고통, 두려움, 죄의식, 회한, 무력감 등의 감정을 투영했음을 밝히고 있다.

 

<크리스타벨>에서도 이 시의 매력은 표층적인 고딕 로맨스의 요소들보다는 여러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를 통해 선과 악, 사랑과 증오, 순수와 관능, 외관과 실재 간의 모호한 상호 관계 또는 양가성의 문제를 진지하게 탐구하려는 콜리지의 노력에서 비롯된다.”(P.165)고 하여 작품의 성격과 의의를 명쾌하게 정리한다.

 

요컨대 이 책은 원문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는 아쉬움만 제외한다면 주요 작품의 수록과 상세한 해설로 콜리지의 시세계를 전반적으로 조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꽤나 흥미로우면서도 유익한 책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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