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호섬 파랑새 클래식 이삭줍기주니어 6
로버트 밸런타인 지음, 박정호 그림, 이원주 옮김 / 주니어파랑새(파랑새어린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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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로빈슨 크루소의 청소년 버전이라면 금방 이해가 될 것이다. 십대 뱃사람 세 명이 무인도에 난파하여 겪는 체험과 모험을 담고 있는 이야기책이다. 시기적으로도 디포와 스티븐슨, 베른을 잇는 중간 무렵이다.

 

전반부에서 배가 폭풍우에 난파하여 겨우 세 명의 어린 뱃사공만이 남태평양의 이름 모를 산호섬에 떠밀려온다. 제일 연장자이고 경험 많은 잭을 중심으로 해서 무인도에서 그들만의 생존을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인다. 무인도 생활은 예상보다 비교적 안락하고 즐겁기조차 한 것이었으니 낯익은 문명세계로의 복귀라는 염원만 아니었다면 그들은 그곳에 정주하는데 불만이 없을 정도이다. 산호섬을 샅샅이 탐험하고, 해저 동굴도 발견하며, 앞바다의 펭귄섬까지 항해하는 모험도 감내한다. 앞선 로빈슨과 마찬가지로 열대의 무인도는 풍요롭다. 그들은 별 수고를 하지 않아도 해산물과 빵나무 열매, 그리고 야생 돼지고기를 구할 수 있다. 기후와 일기도 쾌적하여 지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소박하나마 상상 속의 이상향이라고 불릴 만하다.

 

소설이 이렇게 내내 전개된다면 주인공들은 행복할지 모르지만 독자들은 금방 지루해하기 마련이다. 후반부에서는 파란만장한 모험담이 벌어진다. 우선 주인공들이 섬에서 원주민 간 전투에 개입하여 몰살당할 뻔했던 한 부족을 구해준다. 이어 주인공 랄프가 해적선에 잡혀가 온갖 고생을 겪는다. 이 장면에서 <보물선>이 연상된다. 우여곡절 끝에 산호섬을 돌아온 그들이 망고 섬의 원주민들과 격렬한 대립을 빚다가 갑작스런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것으로 끝. 여기서는 원주민들의 식인 풍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당대 원주민 대상 무역과 기독교 전파에 따른 종교적 갈등의 현장이 생생하게 제시된다.

 

구성 상 다소간 억지스러운 면이 명확하고 인위적 설정이 자연스러운 몰입을 방해하지만, 눈높이를 청소년 수준에 맞춘다면 그럴듯한 재미를 안겨준 모험소설로 인정할 만하다. 게다가 주인공들이 십대 중후반의 동년배들이라면 마치 자신들이 주인공인 된 마냥 이입 효과가 더해질 테니. 아무리 그렇더라도 후반부에서 거대한 해적선을 한 명 또는 세 명의 어린 뱃사람들이 몰고 가는 장면은 사실성 부여에서 한계가 있다. 더구나 달랑 세 명이서 망고 섬의 원주민들과 맞서 전투를 벌이고 기독교 종교를 가진 원주민 여인을 구하려고 목숨을 거는 대목은 기사도 정신을 강조하는 목적성 설정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무역 회사에 근무했을 뿐 한 번도 해양 모험을 해보지 않은 작자가 이런 소설들을 발표한 것은 당대에 상당한 수요가 존재하였음을 가리킨다. 때는 19세기 중반, 대영제국의 최전성기를 향해 나아가던 시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건설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무역과 해군력은 절체절명의 필수 사항이었다. 이국의 기이한 관습과 풍경에 대한 세인들의 호기심을 충족하고, 아울러 사람들의 흥미와 도전 정신을 고취하고 관심을 해외로 돌리고자 하는 이해관계가 상호 맞아떨어졌다. 식인 야만인들에게 기독교 문명의 세례로 정화한다는 종교적 사명감도 대외적 팽창과 정복을 정당화시켜 주었다. 그렇다고 만사를 부정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당대의 시각에서는 그것은 분명 옳고도 정당한 사고이자 행동이었으므로.

 

이 작품을 청소년들이 읽도록 굳이 안내할 가치가 있을까? 분명 재미와 교훈적 측면에서라면 동종의 전후 작품들에 비하여 두드러진 장점은 없다. 문화적, 종교적 편향성도 분명히 드러난다. 구성과 전개의 비현실적 요소도 언급한 바 있다. 일단 이러한 한계를 인식한다면 그래도 성인들이 아닌 청소년들이 주인공이 되어 주체적인 판단과 결정으로 자신들의 앞날을 선택하는 장면, 고난과 역경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나름의 즐거움을 발견하는 대목, 그리고 무엇보다도 읽는 이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대양에서의 모험과 무인도에서의 삶 등이 주는 흥미는 일독해도 괜찮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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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 MBC 느낌표 선정도서, 보급판, 최순우의 한국미 산책, 학고재신서 1
최순우 지음 / 학고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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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작고한 지 30년이 지난 비교적 오래된 분의 글임에도 여전히 세인들의 사랑과 선택을 받는 이유는 방송의 힘과 아울러 후학들의 노력 덕택이다. 물론 저자의 글 자체가 스스로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간직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대놓고 말하자면 한국의 미, 즉 한국미를 발견하고 예찬하는 유형의 글은 여럿 있다. 교과서에서도 읽은 기억이 나며 일본의 야나기 무네요시란 인명도 기억에 떠오른다. 당장 온라인 서점에서 한국의 미라는 주제어로 검색해 보면 리스트가 죽 나타날 것이다. 그럼에도 내게 있어 파편화된 정보와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감성적 측면에서 한국미는 여전히 가슴에 확 다가오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저자가 부러운 동시에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우리 것의 사소한 단초에서도 진실한 미를 발견하는 일을 놓치지 않는다. 그가 본 무량수전과 내가 본 것은 똑같은 것이련만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P.78)을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사실 이 책은 읽기 그리 만만하거나 쉬운 책은 아니다. 한국미 전반에 대한 총론과 아울러 유형별 분류에 따른 개별 예술품에 대한 세세한 감상까지 이 책은 우리 전통예술에 대한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다루고 있다. 제대로 읽으려면 한 편 한 편 소개된 유물과 유적을 실제로 접하면서 음미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저자의 글만 읽으면 반쪽(이것도 후하다!)짜리 이해에 불과하다. 한편 그가 쓰는 문체와 용어는 모두 1980년대 이전이라서 지금과는 달리 다소간 생소함이 존재하며, 수록된 도판도 죄다 흑백이라 저자가 공들여 찬미하는 아름다움의 실체를 확인하기에 어렵기도 하다.

 

한국미에 대한 기존의 평가는 대체로 이렇다. 무기교의 기교, 고졸(古拙)의 미, 가냘픈 선의 아름다움. 욕심을 부리지 않는 담박한 아름다움 등. 저자의 견해도 여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어찌 보면 그가 주로 활동했던 1960년대와 70년대가 한국미의 재발견을 집중 조명하였던 때였으니 그 또한 이러한 인식에 기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저자가 이 책에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이미 진부하고 상투적인 케케묵은 것의 반복에 불과하단 말인가? 그가 순전히 총론적인 미학만을 반복했다면 그러하였을지 모른다. 그는 미에 대한 추상적, 형이상학적 전개를 꺼린다. 그는 구체적인 예술품에 근거하여 거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칫 간과되기 쉬운) 사실적 아름다움을 세인들에게 알리고자 애쓴다. 전혀 무관한 미지의 대상이지만, 일단 알게 되면 관심을 갖게 되고 좋아하고 사랑하게 된다. 신라 토우 편에서 그는 이런 특성들이 한국미가 지니는 체질의 원천적 역할”(P.210)이라고 하는데 물끄러미 토우를 들여다보면 그럴 듯도 하다.

 

저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 것의 아름다움에 눈뜨고 사랑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경제 기적의 시대, 사람들은 오로지 서양의 것, 최신의 것만을 최고의 가치인 줄 추구한다. 조상의 오래된 지혜, 대대로 이어진 전통의 아름다움은 헌신짝처럼 버려진다. 비원의 연경당을 바라보면서 저자가 품은 탄식과 바램은 오늘날 아파트 공화국으로 변모한 도시의 풍광에 비추어 보면 오히려 소박하기조차 하다.

 

문화와 예술은 토양과 민족의 토대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신라의 석조보살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얼굴상과 온화한 미소는 정녕 한국 사람의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움 자태”(P.122)를 무의식중에 반영한 것이다. 화엄사의 유명한 사자석탑이 언급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저자는 범인들이 흘려보기 쉬운 탑 앞에 마주보고 있는 공양상을 주목한다.

 

이 한 토막의 정경에서 우리는 한국의 아름다움과 한국인의 아름다움을 한자리에서 보는 느낌이며 민족적인 아름다움이란 어디서나 그 자연과 인문 그리고 그 족속의 감정이 멋지게 해화를 이루었을 때 비로소 격조가 생기는 것이라는 표본을 여기에서 보는 듯도 싶다.” (P.152)

 

도자기에 대한 과거의 논의를 보면 고려의 비색 청자와 상감 청자를 제일로 평하고, 분청사기는 청자의 퇴화로 간주하던 시기가 있었다. 저자의 글에서도 간혹 분청사기를 퇴화, 타락, 변질 등으로 표현하는 문구가 발견된다. 백자의 경우도 지금이야 건강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이 평가받지 한때는 한갓 자기에 불과하던 시절이 있었음을 저자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하긴 조선의 막사발의 가치를 일본에서 먼저 인식하지 않았던가. 저자는 분청사기와 백자에 대해서 아름답다는 자구 외에 잘 생겼다는 말로서 찬미를 하는데, 그 소박하고 무심스러우며 순진한 아름다움을 지칭하는 적절한 어휘로 사용하고 있다. 분청사기철회초문대접의 순진미, 백자철회포도무늬 항아리의 잘 생긴 아름다움 등이 인상적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아름다움을 평가하고 식별하는 절대적 기준은 없다. 세인들의 문화와 기호의 변천에 따라 미의 기준은 상대적 차이를 보인다. 청자는 청자대로, 분청사기와 백자는 그것들대로 당대의 사람들과 문화의 시대적 요구를 충실히 반영한 것뿐이다. 그것을 만든 도공들은 후대의 평가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이를 확장하면 우리와 중국, 일본의 문화 예술에 대한 인식과 평가의 비교에도 적용할 수 있다. 모든 예술이 고유의 토양과 문화를 반영한 것이라면 중국의 예술에는 중국 사람들의, 일본의 것에는 일본 사람들의 정서와 미학이 깃들여 있음은 당연하다. 이를 다른 나라의 시각에서 거대하고 과시적이라느니, 인공적이고 장식적이라느니 비판적으로 봐서는 안 될 것이다. 그네들과 우리의 것과는 응당 차이가 존재하므로 우리 것을 잘 인식하기 위한 도구로서 비교한다면 모를까 그네들의 예술품을 평가하기 위한 잣대로 삼아서는 옳지 않다고 본다. 한국미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예찬하다보면 모르는 사이 우물 안 개구리 또는 국수주의적 함정에 빠지기 쉽다. 저자의 글에서 이따금 이런 분위기가 감지되는 것(예컨대 청화백자선도연적)이 나만의 착각이라면 다행이다.

 

청자와 백자의 대비가 회화에서는 수묵화와 풍속화로 이어진다. 오직 먹빛의 농담 하나만으로 화려한 채색이 넘보지 못할 심원한 경지를 구축한 화인들의 옛 그림을 물끄러미 보노라면 모노크롬의 흑백 영화에서 또는 모노럴 사운드의 SP 음반을 통해 접하게 되는 아려하면서도 예스러운 격조와 기품을 떠올리게 된다. 수묵화의 수준은 화인 자신의 천품과 비례한다는 말은 단순한 재주와 기법의 현현을 뛰어넘은 정신적 경지를 뜻한다. 이것은 문인화에 그치지 않고 산수화에도 적용할 수 있다. 정선의 통천문암도와 조옹도가 유독 심경에 다가온다.

 

단원과 혜원은 물론 긍재 김득신의 대장간 그림에서 볼 수 있는 풍속화는 인간 중심의, 대중 사회가 도래하였음을 여실히 입증한다. 세상은 신선과 도인들이 아니라 서민들의 적나라한 희노애락을 문화와 예술에서도 반영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전 세대의 초월적 미는 부족할지 모르지만 당대의 사실적 미는 특유의 해학미와 어우러져 보기 드문 감흥을 안겨준다.

 

이 책을 덮고 나서도 한국미는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는다. 우리네 고유의 예술을 창조한 이들과 그들이 살아간 당대라는 개체적, 시대적 한계를 극복해야 할 것이며 예술품이 지니는 독자적 미의 발현을 체득해야 한다. 아마도 한국미를 느낄 수 있게 되기를 영원히 갈구만 하다 마칠지도 모른다. 그래도 간단없이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네 조상들이 남긴 자취이자 바로 우리들의 것이기 때문이리라.

 

이 책은 2002년도에 발간되었는데, 2008년도에 체제를 바꾸고 컬러도판을 사용한 개정판이 나왔다. 이 단상에서 제기한 이해와 접근성의 문제점을 상당부분 해소하는 데 유익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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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티 클래식 - 클래식 음악의 낯선 거장 49인
이영진 지음 / 현암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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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계의 49명의 음악가를 작곡가, 지휘자, 피아니스트, 현악 연주가로 분류하여 소개한다. 이들은 어지간한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에게는 매우 낯선 인물들이다. 다행이 익히 아는 인물도 음반을 가지고 있는 음악가들도 있지만 이름만 들어보았거나 처음 듣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들만이 어찌 클래식 음악계의 마이너리거겠는가. 그 외에도 무수한 실력 있는 작곡가나 연주가들이 제대로 된 인정과 평가도 받지 못한 채 역사 속에 스러져 간다. 요는 대가의 것이 아닌 생소한 곡이나 연주이므로 외면할 것인가 아니면 고정관념과 편견을 넘어서 열린 마음으로 음악과 음악가를 대할 것인가라고 하겠다. 메이저리거 음악가들에 못지않게 음악적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들도 기뻐하겠지만 개인적으로도 크나큰 혜택일 것이다.

 

애초에 소개된 음악가들에 대해 간단한 코멘트를 덧붙일 생각이었으나 얼마 쓰지 않은 촌평도 박박 지우고 말았다. 몇 줄씩만 언급해도 도대체 몇 장 분량이나 될 것인가. 최소 대여섯 장을 넘어갈 텐데 내가 무슨 전문 리뷰어나 평론가도 아니고.

 

저자가 마이너리거 음악가를 발굴하여 대중 앞에 소개한 진의를 곱씹어본다. 그들의 삶은 대개 고통과 비극으로 점철되었으며 죽음조차도 평온하게 맞이하지 못한 사례가 대다수다. 전쟁, 인종, 이념, 성격, 정치, 파벌, 가난, 질병, 사고, 매니지먼트 등 사유는 제각각 다르지만, 한 가지 그들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음악의 본질을 찾아서 매진하였다. 음악 앞에 한없이 겸손하였으며, 음악 자체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일생을 헌신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저자가 이들 마이너리거들을 새삼 기억의 늪에서 꺼내올려서 독자들에게 상세한 삶과 디스코그래피를 제시하여 준 연유다. 겉멋과 허영에 물든 현대 음악계에 대한 비판의식도 잠재해 있다.

 

저자는 독자들이 그네들의 슬픈 생애에만 천착하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을 음악가로 기억나게 하는 이유는 그들의 예술 자체에 있다. 모진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그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예술을 구현하기 위해 온 삶을 불살랐던 것이다. 그들의 예술성이 부족해서 청자에게 잊혔다면 할 말이 없지만, 단순히 대중적이지 않아서 미처 알지 못하여서 그네들의 음악을 접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예술을 통해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면 마이너리거들에게나 독자와 청자들에게나 모두에게 비극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들도 메이저리거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함이 공평하지 않은가.

 

그런 측면에서 소개글을 읽으면서 짧게나마 그들의 작품과 연주를 일부러라도 찾아서 듣게 된 것은 커다란 소득이다. 요하임 라프의 교향곡 5<레노레>를 들어보니 슈만과 차이코프스키의 건전한 중도풍의 인상이다. 강렬하거나 격렬하지 않고 강주에서도 온건미와 건강미가 자리 잡고 있다. 진작부터 관심 있지만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그의 음악을 듣고 싶다. 한스 로트는 어떠한가. 브루크너와 말러를 제외하면 이리 장대한 교향곡이 당대에 있을까. 1악장의 낭랑하며 유장한 개시부가 가슴을 울리며, 2악장에서는 말러에게서 익숙했던 선율이 명료하게 드러난다. 마지막 악장 역시 브루크너와 말러의 느낌이 물씬하다.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해서 브람스를 원망하고 싶지는 않다. 자신의 음악관에 어긋나는 로트를 인정하지 않음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터이므로. 로트의 단명은 차라리 숙명이다. 흑인 작곡가 윌리엄 그랜트 스틸의 교향곡에서는 재즈풍의 악상이 귓가에 확 다가온다. 프란츠 슈미트, 루에드 랑고르, 하르트만, 알란 페테르손의 음악도 하나하나 다 듣고 싶다.

 

지휘자와 연주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지휘자들의 경우는 대부분 연주를 들어본 생소하지 않은 인물들이어서 다행이다. 폴 파레와 마뉴엘 로장탈, 유진 구센스의 유명한 사건, 명성만이 자자한 미트로풀로스와 비극적인 헤르베르트 케겔, 열광적인 카를로스 파이타, 에두아르도 마타 등등. 오스카 프리트는 연대가 오래되어 유감스럽게도 남겨진 음반의 품질이 열악하다. 바흐 음악에서 경탄하는 카를 리슈텐파르트가 소개되어 반갑고, 너무 늦게 되어서야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게오르그 틴트너의 브루크너 교향곡 음반을 전집으로 소유하고 있어서 기쁘다. 근래 들어 깊은 관심을 지니게 된 카렐 안체를도 찬사를 보내고 싶다.

 

피아니스트 중에서는 마르셀 메이에르의 라모 연주를 일찍이 듣고 그녀의 음반을 구해 가지고 있다. 마리아 유디나의 바흐와 베토벤 변주곡을 꼭 듣고 싶다. 마리아 그린베르크의 베토벤 소나타 전집도. 콘라드 한젠과 한스 리히터 하저, 윌리엄 카펠 등은 여전히 감당하기엔 내공이 부족하다. 발레리 아파나시에프와 유리 에고로프, 알렉시스 바이젠베르크는 숱한 연주자 중의 하나로 치부하였는데 편견은 금물이다. 루돌프 피르쿠슈니는 레퍼토리 상 아직 가까이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디노 치아니가 기쁘다. 예전에 그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에로이카 변주곡을 듣고 감탄하였으며 동곡에 관한 한 나의 여전한 레퍼런스다.

 

현악 연주가들은 대체로 친숙하지 않은 편이다. 요한나 마르치는 제외하고. 크리스티앙 페라스와 마이클 래빈은 단명한 천재 연주자로서 성숙한 예술성에 대한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다. 다닐 샤프란의 진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엔리코 마이나르디와 첼리스트 안토니오 야니그로, 윌리엄 프림로즈도 마찬가지다. 시몬 골드베르크와 롤라 보베스코는 괜찮은 인상이지만 좀 더 겪어봐야 할 듯. 이온 보이쿠, 반다 빌코미르스카, 콘스탄티 안제이 쿨카 같은 겨우 귓가를 스친 기억이 있는 연주자들이 새롭다. 갑작스레 비에냐프스키와 시마노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흥미가 당긴다.

 

이런 유형의 책은 단숨에 읽고서 던져 버릴 게 아니라 곁에 두고 가이드로서 챙겨봐야 할 부류다. 그래서 저자는 각 음악가들의 주요 작품과 음반, 연주를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비인기 예술가들이므로 상당수는 국내에서 구하기 힘들다는 한계는 있지만. 여기에 소개된 음악가들과 친숙하게 되면 더 이상의 마이너리티 클래식은 존재하지 않을까? 천만에 말씀. 당장에라도 저자가 2편을 쓰게 되면 꼭 상세한 소개를 요청하고 싶은 음악가들이 한 둘이 아니다. 작곡가 아테르베리, 페르디난드 리스, 아놀드 백스, 딜리어스 등. 지휘자의 경우 한스 로스바우트, 야샤 호렌슈타인, 블라디미르 골쉬만, 콘스탄틴 실베스트리, 최초의 흑인 지휘자인 딘 딕슨도 언급해주었으면 한다. 연주자로서는 피아니스트 사무일 페인베르크, 니키타 마갈로프, 이반 모라베츠, 귀요마르 노바에스, 야코프 플리에르는 어떨지. , 이본느 르페부르도 있구나. 현악에는 미하일 바이만, 가스파르 카사도, 브로니슬라프 짐펠이 우선 떠오른다. 원래 MLB를 봐도 메이저리거보다 마이너리거의 숫자가 훨씬 많음을 여기서도 새삼 발견한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의 입장에서는 매우 가치 있는 책이다.

 

연대 표기에서 제법 오류가 많다. 보다 꼼꼼한 교정이 필요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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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쿠라노소시
세이쇼나곤 지음, 정순분 옮김 / 갑인공방(갑인미디어)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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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작품에 앞서 책 자체에 대해 언급하련다. 시중에는 쓰잘때기 없는 책은 넘쳐나는 반면 정작 소중한 책은 쉽사리 품절 내지 절판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 책과 같이, 존재를 알았을 때는 이미 늦다. 출판사가 사라졌으니 더 이상 구할 방도가 없다.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중고를 구입하지 않을 바에는. 이 책의 메리트는 양장본의 깔끔한 본책 외에 헤이안 당대의 복식과 궁중 건물 배치도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별책부록이다.

 

세이쇼나곤은 <겐지이야기>를 쓴 무라사키시키부와 동시대 인물이다. 전자는 데이시 중궁을, 후자는 쇼시 중궁을 섬긴 차이가 스스로의 삶에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으니 세이쇼나곤은 데이시 중궁의 몰락과 죽음 이후에 잊히고 말았다. 오직 이 작품 하나만이 그녀의 까칠하면서도 지적인 면모를 후대에 남겨줄 뿐이다.

 

이 작품은 일본 문학사에서 고전 수필의 원류로 일컬어진다. 처음에는 지나친 찬사가 아닐까 싶었는데 막상 읽어보니 과찬 내지 허찬은 아니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 중궁을 모시던 중류귀족 출신의 한 뇨보는 궁중 생활과 자신의 개인적 상념을 두서없이 적어두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더라도 무척이나 흥미롭고 참신하다.

 

전체 302단으로 이루어졌는데 내용상, 형식상에서 네 가지로 구분된다. 우선은 ‘OO...’ 이라고 하면서 관련된 항목을 죽 나열한다. 10(산은), 11(장터는), 12(봉우리는), 13(들판은)부터 273(곶은), 274(집은)에 이르기까지 경치, 사물, 자연현상, 음악, 의복 등 다루는 범주도 다양하다. 재밌거나 이채로운 것, 작자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된 것 등 지적인 측면이 강하다. 각 단의 분량도 길어야 서너 줄 정도로 매우 짧다.

 

또 하나는 ‘OO하는 것이라고 하여 앞 유형과 유사하지만, 단순한 나열에만 그치지 않고 대체로 작자의 의견과 상념이 기술되어 있다. 22(흥 깨지는 것), 23(게을러지기 쉬운 것), 24(사람들한테 무시당하는 것)에서 289(보고 있으면 금방 따라하는 것), 290(마음이 안 놓이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사물보다는 작자의 심경과 판단이 두드러지며 분량도 한 줄에서 몇 쪽까지 편차가 심하다. 앞 유형보다는 좀 더 읽는 맛이 낫다.

 

기실 이 작품의 문학적, 역사적 가치를 드높이는 것은 세 번째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수필의 특성에 가깝다. 1(사계절의 멋), 2(한 해의 절기)부터 301(밀회), 302(노래 한 수)에 이르기까지 제재와 형식 모두 자유롭게 때로는 운문이 주가 되기도 하며 전해들은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기도 하다. 작자의 체취가 문장에서 물씬 풍긴다. 자신만의 독특한 미적 감성과 사고가 스스럼없이 솔직하고 담백하게 드러나 읽는 이가 새삼 작자를 반추하게 만든다.

 

봄은 동틀 무렵, 산 능선이 점점 하얗게 변하면서 조금씩 밝아지고, 그 위로 보랏빛 구름이 가늘게 떠 있는 풍경이 멋있다.” (1, 사계절의 멋)

 

“9월경 밤새 내린 비가 아침에 그치고 해가 반짝 얼굴을 내밀었을 때, 뜰에 핀 화초에 이슬이 굴러 떨어질 듯 소담스럽게 매달린 것은 매우 운치 있다. 그리고 사립 울타리나 초라한 지붕 처마의 거미줄에 빗방울이 떨어져 맺힌 것도 마치 진주가 맺힌 듯이 맑고 예쁘다.” (126, 구월의 아침)

 

작자 당대에 이렇게 주관적 미감과 감흥을 대놓고 당당하게 표현하는 이가 있었던가. 게다가 착상은 신선하고 표현도 생생하다. 그녀는 똑 부러지게 자신만의 멋과 운치를 놓치지 않는다. 글을 통해 보건대 세이쇼나곤은 가식 없는 솔직 담백한 인물이다. 물론 그녀의 솔직함이 지나쳐서 당사자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녀는 까딱하지 않는다. 아래 문장을 보자. 오히려 가식적이지 않고 인간적인 면모가 아닌가.

 

다른 사람이 자기를 험담한다고 화를 내는 사람은 정말 몰상식한 사람이다. 어떻게 남의 험담을 안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자기 일은 제쳐두고 남의 결점을 늘어놓으며 마구 비난하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 (255, 남 험담하는 즐거움)

 

밉살스러운 사람이 안 좋은 일을 당했을 때도, 천벌 받을지 모르지만 기쁜 마음을 억누르기 힘들다.” (261, 환희-기쁜 것)

 

작자는 중궁 데이시를 섬겼다. 중궁은 그녀를 각별히 총애했던 것으로 보인다. 글에서 나타나는 둘 간의 훈훈한 관계, 이심전심의 마음, 중궁에 대해 애정과 연민으로 일관하는 작자의 태도. 중궁 데이시의 몰락과 중궁 쇼시의 등장과 같은 역사적 사실을 작가는 일체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일개 뇨보의 신분으로써 정권 교체와 같은 사건에 무슨 언급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작자는 중궁 데이시와 부친, 오라버니를 둘러싼 화려하고 단란했던 전성기 시절의 가문 모습을 반추하고 있을 뿐이다. 공식적 역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헤이안 시대 후기의 천황과 상류 귀족사회의 영화가 개개의 일화를 통해 아련하게 서술되어 있다. 여기에 작자 자신의 일화도 일부 추가하여 이들과의 애틋한 관계를 회상하고 있다. 5(대진 나리마사네 집), 20(고킨슈 강독회)에서 263(샤쿠젠지 공양), 277(비 오는 날의 방문), 297(명왕의 잠)까지. 구체적인 이야기를 기술하다 보니 분량 상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하지만 그날 그렇게 훌륭하게만 느껴지던 중궁 일가의 영화도 지금 상황에 비추어 보면 너무도 허망하게 생각되어, 다 쓰지 않은 것도 많다.” (263, 샤큐젠지 공양)

 

작자는 자아에 대한 프라이드가 무척이나 강했던 듯 싶다. 21(전문직 여성)을 보면, 남편만을 의지하는 여성을 한심하다고 비난하며 뇨보로 입궐하여 사회생활을 하는 게 더 낫다고 주장한다. 설산이 녹을까봐 전전긍긍하고 사라지자 어찌할 줄 모르는 작자의 태도(83, 거지중 히타치노스케와 설산)도 지기 싫어하는 그녀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두견새 탐방을 가서 노래를 읊지 않은 걸 중궁이 한소리 하자 발끈해서 앞으로 일절 읊지 않겠다고 뻗대는 장면(95, 두견새 탐방)은 어떠한지. 그래서일까, 작자 자신을 칭찬하는 일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수록하며 글을 읽는 독자도 또한 아무렇지 않게 당연한 듯이 넘기게 된다.

 

당대의 혼인 관습의 특수성에 따른 남녀 관계의 애환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새벽녘 여자네 집에서 돌아가는 남자는 헤어지기 싫은 듯 마지못해 일어서며 이별을 아쉬워하는 말을 주고받으면 좋으련만 대개의 남자는 무심히 휙 일어서서 휑하니 가버린다고 꼬집는다(60, 새벽에 헤어지는 법). 남녀 간 입장차에 따른 심경의 대비가 눈에 보이는 듯 우스우면서도 당대 여성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안타깝기도 하다. 이 글을 포함해서 이따금씩 드러나는 문장과 남성에 대한 비난 글을 보면 단순한 전언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담에서 우러나온 글이 아닐까 싶다.

 

분명히 오리라고 생각하고 밤새도록 우두커니 앉아서 남자를 기다리다가 새벽녘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까마귀가 까악까악 울어서 하늘을 쳐다보니 어느새 한낮이 되었을 때는 정말이지 어이없다.” (93, 기막힘)

 

남자다는 동물은 처지가 딱한 여자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딴 여자에게 가는 냉혈 동물......정말 남자란 동물은 도저히 이해 안 된다.” (120, 불안 초조)

 

남자란 나 같은 여자 쪽에서 보면 참으로 기묘한 동물이다. 그 속을 전혀 알 수가 없다.” (253, 남자의 속마음)

 

물론 그녀도 철저히 계급의식에 사로잡힌 중류 귀족 출신이니만치 자신보다 낮은 계급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며 때로는 편견에 사로잡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어이없는 비난도 퍼붓는다. 작자의 시대적, 문화적 한계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볼품없는 우차에 볼품없는 치장을 하고 구경 나온 사람은 정말 마음에 안 든다......도대체 그런 작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그런 행색으로 구경을 나오는지 모르겠다.” (223, 구경 나오는 우차의 자격)

 

지체 높으신 분을 굉장히 자상하신 분이지요하고 하녀가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그 순간 그분의 가치가 뚝 떨어지는 것 같다. 그런 하찮은 것들에게는 오히려 험담을 듣는 편이 낫다.” (295, 칭찬)

 

헤이안 시대의 특정한 요소를 감안하면 읽는 내내 당대 인물의 사고, 느낌, 감각, 취향이 의외로 고리타분하고 구태의연하지 않음을 강하게 깨닫게 된다. 해설에 따르면 “<마쿠라노소시>는 어떤 사물에 대해 밝은 마음으로 찬미하고 지적인 흥취를 느끼는 오카시정서”(P.544)를 표현했다고 한다.

 

해설에 이 작품에 대한 적절한 평이 실려 있어 이를 인용하며 마치고자 한다.

 

자연의 정취나 인간사의 양태를 속속들이 파헤쳐 평론한 것으로, 주제를 파악하는 방법이 독특하고 착상은 신선하며, 관찰은 예리하고, 묘사는 매우 개성적이라 인상 깊다.” (P.547)

 

그나저나 세이쇼나곤은 65(노래집)에서 <만요슈><고킨슈>가 최고의 노래집이라고 평한다. 겉핥기에 지나지 않을지언정 아무래도 두 책을 읽어보지 않을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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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160
메리 셸리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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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체구의 흉포한 괴물. 인간을 닮았지만 자연이 아닌 인간이 만들어낸 불의한 존재. 그것이 지칭하는 명칭의 어감만으로도 공포감을 자아내는 괴물 인간, 프랑켄슈타인이다. 대중매체의 집중적인 관심으로 괴물 인간의 인지도는 비약적으로 상승하였지만, 문학사적으로는 여전히 B급 장르문학으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작품이다.

 

이 소설을 읽는 독자는 대체로 실망하기 마련이다. 프랑켄슈타인 괴물의 잔인한 살상행위와 이에 대항하는 인간의 결투 등을 기대했다면 실제적 살인과 대결 등의 묘사는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하나 프랑켄슈타인 괴물을 주인공으로 생각하고 괴물의 행동은 물론 내면까지도 심도 깊게 기술되어 전모를 확연히 알 수 있게 되리라고 생각했다면 주인공은 괴물이 아니라 괴물을 창조해 낸 젊은 과학자이고, 그의 이름이 프랑켄슈타인이며 괴물은 딱히 이름도 없다는 사실이다.

 

작품의 부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대의 프로메테우스. 프로메테우스는 신화에서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신으로 기억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진흙으로 인간을 빚어낸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작가는 인간이 신을 흉내 내어 유사 생명체를 창조해 내지만 그것이 얼마나 독신 적이며 반인간적 행위임을 신랄하게 파헤치고 있다.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과학적 지식을 향한 인간의 집착, 만들어 낸 존재에 대한 창조자로서의 무책임한 방치와 증오, 신체적으로 지적으로 우월한 피조물에 이끌려 다니며 무력하고 나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양태 등. 괴물이 아닌 인간 프랑켄슈타인의 관점에서 작품을 읽어나가면 그의 오만과 좌절, 비겁과 나약, 분노와 증오가 파노라마처럼 작중에 펼쳐져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두 프랑켄슈타인의 미래가 전개되는 귀결에 목말라함을 느끼게 된다.

 

작자는 메리 셸리는 영국 낭만주의 시기 대표적 시인인 퍼시 셸리의 아내다. 진보적 철학자 아버지를 둔 가정환경에서 자라 지적으로 조숙한 그녀는 퍼시 셸리의 두 번째 아내가 되어 바이런의 스위스 별장에서 이 작품을 착안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그녀의 나이 불과 19. 소설을 읽다 보면 구성을 과도하게 비틀어놓으면서도 진행은 나이브하게 느껴지곤 하는데 여기에 연유한 탓이리라.

 

대중적 관심은 단연 괴물 프랑켄슈타인에게 집중되겠지만, 이 작품이 던지는 도덕적, 사회적 함의는 제법 묵직하다. 현대는 과학진보주의에 대한 낙관적 환상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지만, 줄기세포, 유전자 조작 등 발전을 거듭하는 생명공학 분야에서 한계와 기준 설정에 대한 공감대는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상태다. 궁극적으로 인간 복제와 대체가 가능하다면, 결국 괴물 프랑켄슈타인을 만든 인간 프랑켄슈타인과 동일한 입장에 처하게 되는 셈이다.

 

! 그 얼굴이 안겨 주는 공포를 견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시 살아난 미라도 그것만큼 소름끼칠 수는 없었다. 일이 끝나기 전에도 그를 가만히 뜯어본 적이 많았다. 그때도 물론 보기 흉했지만 막상 근육과 관절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단테도 상상 못 할 그런 악마가 되고 말았다.” (P.83)

 

인간 프랑켄슈타인은 스스로의 손으로 창조한 괴물 프랑켄슈타인의 혐오스런 외모에 치를 떨면서 외면하고 방치해 버린다. 괴물은 창조자로부터 애정과 보살핌을 받고 떳떳한 하나의 생명체로서 인정받기를 원하지만 아무도 그를 원하지 않는다. 창조자마저 버린 괴물이니 어느 누가 그를 받아들이겠는가. 그 자신은 어린 시절에 애정 어린 양육과 교육을 받았으면서도 그것을 피조물에게 베풀지 못하였다.

 

인간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손으로 과학적 기적을 생산할 수 있다는 학문적 열망과 세속적 욕망에만 눈이 어두운 나머지 생산 이후의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인식과 자각도 하지 못하였다. 인간으로 눈을 돌려서 남녀가 서로의 사랑에만 매달려서 낳은 아이를 방치하고 유기한다면 중대한 반인륜적 범죄로서 지탄과 처벌을 받게 됨은 자명하다. 오늘날 생명공학 연구자들이 자신들의 연구에 대해 학문적, 상업적, 세속적 욕망 외에 도덕적 인식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지 여부는 사실 알 수 없다.

 

인간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을 구조한 로버트 월턴의 과학진보주의에 대한 소신을 듣고 터뜨린 신음은 자신의 뼈저린 체험에서 비롯된 이러한 깨달음일 것이다.

 

불행한 사람! 당신도 나 같은 광기를 지닌 거요? 당신 역시 그 도취의 한 모금에 취한 거요?” (P.44)

 

나는 선한 의도로 삶을 시작했고, 그것을 실행에 옮겨 내가 인류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되는 순간을 갈망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무너져 버렸다. 과거를 흐뭇하게 돌아보고 거기에서 새로운 희망의 약속을 끌어내는 양심의 평화는 사라지고, 후회와 죄의식이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지옥으로 나를 몰아댔다.” (P.125)

 

그래서 괴물 프랑켄슈타인의 항변은 섣불리 무시하기 어려운 도덕적 명분의 울림을 지닌다.

 

어떻게 생명을 가지고 그런 장난을 친단 말이오? 나에 대한 의무를 다하시오. 그러면 나도 당신을 물론 다른 인간들에 대해 내 의무를 다할 테니.” (P.136)

 

나는 당신의 정의를, 당신의 너그러움과 애정을 받아야 마땅하오. 나는 당신의 피조물이잖소. 나는 당신의 아담이어야 했건만 타락한 천사가 되었고, 아무 잘못도 없는 나를 기쁨에서 몰아내었소.” (P.137)

 

비록 당신에 대해서는 야속한 감정밖에 없었지만 내가 구원을 기대할 사람도 당신뿐이었으니까. 무정하고 냉혹한 창조자 같으니! 당신은 내게 인지력과 열정을 주어 놓고선 세상 밖으로 내팽개쳐 인간의 경멸과 공포를 사게 만들었소.” (P.184)

 

공상과학 문학이나 영화 등 장르에서 즐겨 다루는 소재 중 로봇이 있다. 괴물 프랑켄슈타인도 일종의 로봇이라고 부를 수 있다. 차페크의 희곡 <R.U.R.>이나 아시모프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아이 로봇>, 일본 애니메이션인 <은하철도 999>도 피조물 로봇이 인간 세상을 지배하려고 하는 대목은 공통이다. 다소 다르지만 <도롱뇽과의 전쟁>도 기본 접근은 유사하다. 인간을 닮은 고급 복제물(로봇 포함)일수록 자신이 인간에게 복종하고 지배당하는 현실을 계속 감수하지는 않을 것은 당연한 추론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인간을 지배하기를 원하게 된다. 괴물 프랑켄슈타인은 초보적 인식 단계에 머무르지만 궁극적 지향에 이르는 길은 멀지 않으리라.

 

넌 노예야. 그렇게 설득했건만 넌 내가 애써 겸손 떨 가치도 없음을 스스로 입증하고 말았어......넌 나를 만들었지만 네 주인은 나야. 어서 복종해!” (P.220)

 

발표 당시에는 대단한 찬사를 받았지만 곧 세인에게 잊히는 경우도 있지만, 처음에 그저 그런 정도로 여겨졌지만 시간이 경과할수록 의의와 평가가 점점 높아지는 예술 작품이 있다. 진정한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소설 <프랑켄슈타인>도 여기에 해당한다. 작자가 200년 후 현대의 과학적 진보를 예견하고 이 작품을 쓰지는 않았을 테지만, 인간과 과학과 도덕이 맞물리는 난해한 지점을 천재적 직감으로 선취한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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