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2
정유정 지음 / 비룡소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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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작가 정유정 인생의 일대 전환점이 분명하다. 작가의 말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작가는 3년 동안 필력을 쏟아 부으면서 어떻게가 아닌 무엇에 집중하였다. 그 결과는 굳이 1회 세계청소년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수식이 따라붙지 않더라도 매우 흥미진진한 소설로 이렇게 우리 앞에 나왔다.

 

심사평 중 사건의 개연성이나 리얼리티에 대한 의문은 잠시 제쳐두자. 작가가 리얼리즘에 입각해서 글을 쓰겠다는 선서를 하지는 않았으니. 그의 후작 중 <7년의 밤>은 한층 처절한 리얼리즘적 허구를 구현하였으니 오히려 정유정의 작품 세계의 중요한 특성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관념이 아닌 사건과 행동에 무게중심을 놓고 여지를 주지 않고 파상적으로 몰아붙이는 저돌적 전개.

 

이 작품은 로드 소설이다. 열다섯 살 소년과 소녀가 낯선 할아버지와 개 한 마리와 함께 수원 옆 Y읍에서 광주를 거쳐 임자도 옆 안개섬까지 이르는 여정과 도중에 발생한 사건이 핵심적 스토리라인이다. 5명의 사람과 동물은 제각각 다른 동기와 목적을 숨기고 그룹을 이루고 있으며 더구나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야 하니 여행길이 순탄할 리 없다.

 

이 작품은 성장 소설이다. 승주와 준호, 정아는 모두 부모와의 관계에서 갈등과 상처를 입은 청소년들이다. 아빠를 잃은 준호, 아빠를 잃는 편이 차라리 더 나았을 정아는 외면적으로 상처가 드러나지만, 부모가 막강한 재력의 소유자인 승주는 극성스러운 엄마로 인해 오히려 드러나지 않는 갈등을 지닌다. 여행과 고생을 함께 겪으며 아웅다웅하던 그들은 서서히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고 배려의 염을 품게 된다. 담금질이 쇠를 강하게 하듯 험한 여로는 아이들을 내면적으로 단단하게 단련시키는 것이다.

 

상처 입은 사람 또 한 명을 빼놓을 수 없으니 할아버지다. 걸쭉한 남도 방언을 뱉어내는 정체불명의 할아버지는 이들의 남도행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결정적 역할을 하면서도 한 점 의혹을 남긴다. 후반에 드러나는 참혹한 개인사는 개인적 수준의 아픔을 넘어서 시대적, 제도적 차원의 비극으로까지 이어진다.

 

여기에 1980년대의 짙은 시대적 그림자를 작품 전반에 드리우고 있으니 준호의 남도행도, 아빠의 실종도, 할아버지가 딸을 잃게 되는 계기도, 일행이 광주를 비롯한 행로에서 계속적으로 맞닥뜨리는 위험도 광주 항쟁의 연장선상이다. 청소년 소설치고는 너무 무겁고 어두운 제재와 배경을 도입한 것은 아닌가 우려되면서도 한편으로 주요 인물들이 청소년이라고 해서 굳이 청소년 소설이라고 치부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작가는 이 점을 의식해서인지 의도적으로 작품에 경쾌하고 해학적인 요소를 반영하여 분위기를 좀 더 밝고 가볍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준호와 승주의 다툼, 할아버지의 걸쭉한 입담과 행동, 루스벨트와 준호 사이의 어처구니없는 일화 등등. 투철한 목적의식과 사명감을 지니며 제법 머리회전도 빠른 준호가 루스벨트를 포함한 일행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면서 겪는 고초와 되씹는 자조는 그래서 독자에게 소량의 동정심과 다량의 웃음을 제공한다.

 

루스벨트는 발성 연습을 하듯 목을 길게 빼고 짖었다. 선물이야. 나는 또 한 번 심한 상처를 받았다. , 내가 이걸 기쁘게 주워 먹을 거라 믿는단 말이지? 그것은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개뼈다귀 같은 선물이었다.” (P.159)

 

루스벨트는 신나게 구령을 붙였다. , , ! 개 소리를 듣자 타령이 절로 나왔다. 중대 임무를 부여받고 길을 떠난 거물 김준호가 개 소리에 발맞춰 뛰며 수레나 밀야 하다니. 무슨 이런 개소리 같은 일이 다 있는가 말이다.” (P.287)

 

처음으로 돌아가서 작가가 어떤 심경과 자세로 이 작품을 썼을까 상상해 본다. 그것은 처절한 자기부정과 각성에서 비롯하였다. “폼 나게 쓰고 싶다는 어떻게에 대한 집착은 나를 궁지로 몰고 갔다......머릿속의 무엇들은 죄 사라져 버렸다.”(P.388).

 

작가는 펜이 이끄는 대로 조금씩 전진해간다. 자칫 진지하거나 무거워질만한 요소는 철저히 다듬는다. 이야기는 최대한 흥미진진하면서도 극적으로 터무니없을 것 같은 모험적 사건들-철교 횡단과 따이한 농원 등-도 삽입한다. 또래 청소년들이라면 공감할 성적 요소들 살짝 터치한다. 독자 못지않게 작가도 쓰는 내내 왠지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것 같다.

 

최근 들어서 소설의 이야기적 재미에 물씬 빠져든 경우가 과연 있었던가. 제아무리 소설이 다양한 가면과 치장을 하더라도 허구이며 이야기라는 본원적 태생을 외면할 수는 없으리라. 이 점을 간혹 작가들이 놓치고 새롭고 현학적인 기법과 언설에 몰두하는 우를 범한다. 그런 스타일에 적합한 작가들도 물론 있지만 자기 스타일을 잃고 유행에 휩쓸리는 것은 바람직하다. 이 점에서 작가 정유정은 현명하다. 그의 성공적인 후작들이 여실히 입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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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오래된 미래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원작자, 박희은 지은이, 원유미 그림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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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를 읽은 후 같은 저자의 어린이용 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느낀 감정의 울림과 파장을 아이도 같이 느끼기를 바랬다. 한편으로 궁금과 우려가 교차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저작을 어린이용으로 변용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 일단 노르베리 호지가 직접 어린이용으로 쓴 책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원작과는 체제와 구성, 형식 등에서 상당한 차이점이 보였다. 출판사 측에서 원작의 이름을 빌려 어린이용으로 책을 내고 저자에게 인정받은 게 아닐까 싶다. 즉 저자의 직접적인 손길과 호흡을 원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반쯤은 실망한 채로 펼쳐든 책은 첫 부분에서 당혹의 연속이다. 노르베리 호지의 라다크 체험기는 아동용 소설 형식으로 탈바꿈하였다. 주인공의 이름은 헬레나, 나이는 열두 살. 헬레나는 아빠와 이혼하고 라다크에 푹 빠져버린 엄마 제니를 만나 따지려고 스웨덴에서 라다크 행을 감행한다. 헬레나는 소남과 데스키트 가족과 함께 생활하면서 동갑내기인 돌마와 친구가 된다...잠깐만, 내가 고대했던 원작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아이들에게 원작의 폭넓으면서도 깊이 있는 지식과 사고를 모두 이해시키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저자가 주장하는 핵심적 내용만이라도 깨닫고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다면 대성공이다. 중요한 것은 절대 따분하고 지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주인공으로 독자들과 비슷한 또래를 설정하고 재밌는 이야기 형식을 채택하여 나 또는 우리와 멀리 떨어진 현실이 아니라는 점을 각인시킬 필요도 있다. 앞선 실망은 원작을 읽어본 소위 성인의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래된 미래>가 무슨 책인지, 저자가 누군지 전혀 알지 못하는 어린이들로서는 원작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법이다. 오직 자신이 읽는 책이 어떤 내용인지 충분히 알며, 재밌게 가슴에 다가올 수 있다면 그것으로 대성공이리라.

 

이런 관점에서 내용을 찬찬히 훑어가면 제법 충실하게 원작의 사상과 주장을 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가축의 똥을 말려서 땔감으로 쓰고, 가장 심한 욕이 숀 찬’(화를 잘 내는 사람)이라는 것 하며, 무엇보다 사람들 상호간의 배려와 양보의 미덕이 그러하다. 이웃의 보리밭에 들어가서 보리를 망친 쪼를 이웃사람이 다치게 한 경우의 고바의 판결, 방을 추가로 빌리기 위해서는 원래 묵고 있던 집인 데스키트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점 등.

 

우린, 모두 함께 살잖아. 그게 다야. 서로 조금만 양보하면 다 행복할 수 있으니까.” (P.63)

 

라다크 사람들에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거든.” (P.66)

 

전통 점성가인 온포가 헬레나와 돌마를 보고 라다크 하늘의 두 개의 별이라고 알려주는 대목은 유치하지 않고 오히려 가슴 찡하게 다가온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소남네 가족은 라다크의 중심지인 레로 이사를 간다. 소남은 가족을 위하여 많은 돈을 벌고 싶어 한다. 그의 소망은 가족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 있다. 시골인 헤미스 마을에서는 돈을 벌 기회가 거의 없다. 경제개발 초기에 수많은 농어촌 사람들이 서울로, 서울로 몰려들던 현상을 복기하면 충분하다. 그네들은 어떻게든 서울로 상경하여 서울특별시민으로 편입하고 싶어 하였다. 무수한 판잣집과 달동네가 그렇게 하여 만들어졌던 것이다. 레의 뒷골목처럼, 열악하고 꾀죄죄한 처지를 무릅쓰고. 레의 학교에서는 전통을 부정하고 서구식 문물에 절대적 우위를 둔다. 그것이 뒤쳐진 라다크를 개발시키기 위한 비법으로 알고 있다. 농약은 아무런 위험과 사용주의 안내도 없이 무작위로 남용하여 사람과 경작지를 오염시키며, 생활의 주체성을 빼앗긴 여성들은 소극적이고 무능력한 존재로 퇴락하게 된다. 이 모든 게 소녀 헬레나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뿐이다. 라다크 사람들이 닮고 싶어 하는 서구 문명과 문화는 완벽하지 않으며 무수한 사회적, 심리적 문제점을 양산하고 있다. 라다크 사람들이 자기들의 고유의 미덕과 문화를 존중하고 유지하면 기쁘겠다.

 

라다크 프로젝트는 에끄니끄 박사의 마법 쇼를 통해 데스키트와 소남을 변모시키고 신축 호텔을 라다크 전통식으로 짓기로 한다. 호텔 이름이 헬로 라다크에서 줄레 라다크로 바뀌는 점도 시사적이다. 라다크 사람들은 서서히 자신들의 장점과 미덕을 깨닫게 된다. 많은 서구인들이 라다크를 여행하고 부러워하는 이유는 자신들에게 없는 것이 그들에게 있음을 알고 있음에서이다.

 

라다크 사람들은 마음 깊은 곳에 행복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P.199)

 

그것은 돌마가 말한 대로이다. 야크 털신 대신 운동화를 부러워하고, 할머니가 구워주시는 빵보다 레의 빵집에서 파는 빵이 더 맛있다고 여기지 않게 된다면, 라다크 전통 옷을 입고 라다크 노래를 부르는 것을 창피하게 여기지 않게 된다면 라다크는 더욱 건강하고 행복해질 것이다.

 

우리는 라다크보다 훨씬 멀리 지나쳤다. 서구식 주택과 아파트가 익숙해졌고 한복은 평생 특별한 날에만 어쩌다 입는 의상으로 전락하고 청바지와 운동화, 양복과 구두가 옷장과 신발장에 가득하다. 안락과 편리를 무한정 추구하다 보니 정작 귀하고 소중한 것이 거의 소멸되어 버렸다. 무엇보다 무서운 점은 소멸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인식 못하는 데 있다. 그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이런 점에서 라다크는 오히려 운이 좋은 사례이다.

 

선입견을 담은 실망에서 출발하였지만, 어린이들에게 매우 좋은 책임을 인정해야겠다. 흥미를 잃지 않도록 노력하면서도 핵심적 주장을 빼놓지 않고 담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비단 어린이뿐만 아니라 원작을 읽어보지 못했거나 재미를 느끼지 못한 성인 독자들에게도 충분히 권할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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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암 창비아동문고 19
정채봉 지음, 이현미 그림 / 창비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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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작가 정채봉의 작품집이다. 표제작 오세암은 영화로도 제작되어 유명세를 탔지만 그 외에도 수록된 23편의 단편동화들 모두가 음미할 가치가 있는 작품들이다. 4부 구성인데, ‘오세암은 제4부에 해당된다.

 

1부의 동화들은 흰구름을 화자로 삼고 있다. 경계 없이 이리저리 정처 없이 떠도는 구름은 예부터 사연이나 소식의 전달자 역할을 하였다. <메가두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특히나 흰구름은 먹구름과 달리 맑고 경쾌하며 깨끗하고 선하며 아름다운 이미지를 지닌다. 이는 작가의 모토라고 할 수 있는 맑은 이야기, 보기에 좋은 것”(P.3)의 구현이다. 평화와 기쁨, 행복을 여기에서 얻을 수 있다.

 

작중에서 흰구름의 말은 곧 작가가 독자에게 들려주고 동감해주기를 바라는 강한 바람이 깃들어있다.

 

나는......수많은 일들 가운데서 맑은 것만 가려서 보고 있어.” (‘강나루 아이들’)

넓은 하늘을 온통 내 흰구름으로 가득 덮고 싶은 날이었어.” (‘강나루 아이들’)

나는 이 아름다움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높은 산 위로 올라갔어.” (‘꽃그늘 환한 물’)

기쁨으로 가득 찬 내 가슴이 뭉게뭉게 부풀어오르는 한낮이었어.” (‘풀꽃 꽃다발’)

내 가슴은 평화로 가득 출렁거리곤 하지.” (‘하늘나라 우체부’)

교통 순경도 그리고 그의 윗사람도 함께 너털웃음을 웃었지. 나도 기분이 좋아 뭉클뭉클 웃었고.” (‘신호등 속의 제비집’)

 

1부의 7편 외에도 제2부의 천사의 눈’, ‘모래성’, 3부의 진주와 제4부의 오세암에도 흰구름의 이미지는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정채봉의 동화들은 종교적 소재와 배경을 삼는 이야기가 제법 있다. 먼저 불교의 소재. 1부의 꽃그늘 환한 물’, 2부의 바다 종소리’, 그리고 제3부의 오세암이 여기에 해당한다. 기독교의 소재는 더 빈번하다. 1부의 풀꽃 꽃다발’, ‘저 들 밖에서’, 2부의 ’, ‘성모님의 유치원’, ‘천사의 눈’, 3부의 진주’, ‘별이 된 가시나무’.

 

작가의 종교적 요소의 도입은 특정 종교에 대한 관심과 신봉의 차원은 아니다. 종교 일반이 지향하는 생명 사랑과 존중,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심, 선에 대한 추구 등의 가치관은 사람들의 삶을 보다 바르고 따뜻하고 풍성하게 하는 면에서 근원적 동질성을 지닌다. ‘꽃그늘 환한 물오세암’, ‘풀꽃 꽃다발성모님의 유치원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작가의 동화들을 읽으면 무척 기분이 좋아지고 흐뭇해진다. 여기에는 등장인물의 성격과 행동에도 일체 악한 구석이 없는 연유도 있다. 장편이라면 평면적으로 흐를 수 있지만 단편이기에 흠이라고 할 수 없다. 게다가 작가도 스스로의 작품 성향을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은가.

 

꽃그늘 환한 물의 스님의 언행의 아름다움, ‘풀꽃 꽃다발의 아름답고 고귀한 꽃다발은 물론, ‘위문 온 매미의 김 일병을 본다. 독자마저 절로 행복해진다.

 

크지는 않지만 깊은 산속에서 피는 풀꽃 같은 눈빛이랄까, 아무튼 병영에서는 보기 드문 고요한 눈이었어.”

날아오르는 매미, 팔랑거리는 나뭇잎 그리고 휘파람을 부는 김 일병. 이들보다 행복한 이들이 어디 있을까.”

 

씽씽 칼바람이 부는 광장 모퉁이의 장님 부부와 이를 돕는 신사와 부인 간의 대화(‘저 들 밖에서의 거들어 드릴까요? - 환한 얼굴 크리스마스 인사 감사합니다)는 각박하고 냉엄한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요인을 새삼 되새기게 한다. 가난한 자, 소외된 이웃에 대한 관심은 성모님의 유치원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하느님은 저 이름없는 꽃일지도 모른다.” (‘성모님의 유치원’)

 

그렇다면 풀꽃 꽃다발거울 나라의 풀꽃은 무명과 소외의 은유를 넘어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순수와 자연의 상징이 아닐는지.

 

하늘처럼 새처럼 실제의 문도 마음의 문도 활짝 열어놓으면 병이 안 생길 것이라는 이야기(‘’)와 바깥 세상은 껍데기에 불과하고 진짜 세상은 마음 세상이라는 의견(‘거울 나라’)까지 작가가 작중에서 함축하는 메시지의 스펙트럼은 폭넓기 그지없다. 2부의 모래성에서 내가 눈물을 끝내 글썽이는 이유는 슬퍼서가 아니라 참된 아름다움에 마음이 정화되어서이다. 참된 사랑이란 무엇이겠는가? 은하처럼 자기를 잊고 헌신하는 것이리라.

 

3부는 동물과 사물의 시선으로 바라 본 인간의 모습이다. 우화라고 해도 무방하다.

 

은하수의 노래에서 엿보이는 인형의 운명은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를 떠오르게 한다. 피 토하는 청년과 로사 언니의 모습은 전란 직후 대조적 사회 현실을 살짝 건드린다. 로사 언니와 재회를 기다리다 죽음을 맞이한 할아버지와 아버님의 은혜를 뒤늦게 깨달은 로사 언니 중에 행복한 이는 누구일까?

 

돌아오는 길은 성 나자로 마을의 옹달샘에서 착상을 하였을 성싶다. 교만한 성수는 외관상 보기 좋은 길, 넓은 길보다는 바위 많은 비탈길과 좁은 길이야말로 겸허히 하늘의 뜻을 따르는 길임을 깨닫게 된다. 어찌 성수만 해당되겠는가.

 

진주에서 백합은 아름다운 육신을 상징한다. 백합이 내면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되면서 죽게 될지도 모를 고난을 겪게 되지만 대신 진주조개가 될 가능성도 지니게 되었다. 마음속의 진주는 희망이다.

 

행복한 눈물은 비장한 우화다. 문득 작품이 쓰인 당대 사회현실을 상기하게 되자 앵무새의 절규는 천근의 울림을 지닌 다짐이자 경고로 이해된다.

 

헛보고, 헛살지 말고 바로 보고 바로 살아야겠다.”

갇혀서 살수록 당당해져야 돼......비굴하게 아부해서 살찌고 사느니보다는 적게 먹더라도 진실되게 떳떳이 사는 삶이 더 소중한 것 아니겠어?”

 

선배 앵무새는 부조리한 현실에 순응한 아리스티포스라면, 이 앵무새는 시조새와 같이 양심을 지킨 디오게네스이다. 비록 현실의 문제의 새는 맞아서 죽더라도 시조새의 말처럼 진실의 횃불이 밝히는 날, 우리 함께 부활하여 저 푸른 하늘을 훨훨 날자꾸나.”

 

다른 동화들이 분량상 장편(掌篇)에 가깝다면 오세암은 전형적인 단편으로 분류될 수 있다. 그만큼 이 동화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함을 알 수 있다. 부처가 되는 다섯 살 길손이는 세속의 눈으로 보면 장난꾸러기 철부지에 불과하다. 길손이는 타고난 천성에 따뜻한 마음씨를 갖추었고 순수한 마음을 더해 마침내 성불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길손이의 성품은 가을아침 물빛처럼 시린 눈총”(P.166)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길손이의 생과 사에 동행하는 친구가 흰구름이라는 점, 작가에게서 흰구름의 막중한 상징성을 염두에 두면 좋을 것이다.

 

무엇보다 여늬 사람들과는 다른 길손이의 마음씀씀이다. 2부의 바다 종소리에서 아이가 바라보는 부처님은 피곤해 보인다. 빚쟁이마냥 사람들은 부처님에게 복과 명과 높은 자리를 끝없이 간구한다. ‘오세암에서의 부처님도 마찬가지다.

 

부처님도 참 성가시겠다. 그지, 누나? 사람들이 자꾸자꾸 조르기만 하니까. 나 같으면 부처님을 좀 즐겁게 해드리겠는데......에이......” (P.171)

 

그림 속 보살님을 소리 내어 웃게 하고 싶어 방귀를 뀌고 시치미를 떼는 길손이, 마음을 다해 부르면 보살님, 즉 엄마가 꼭 오신다고 믿는 길손이. 관세음보살은 이렇게 길손이를 평한다.

 

이 어린아이는 곧 하늘의 모습이다. 티끌 하나만큼도 더 얹히지 않았고 덜하지도 않았다. 오직 변하지 않는 그대로 나를 불렀으며 나뉘지 않은 마음으로 나를 찾았다.” (P.196)

 

작가의 어휘는 섬세하게 조탁되고 정제되어 있다. 마치 시어마냥 미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예민한 문장은 맑고 깨끗한 감성을 담고 있다. 통상의 동화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지극히 순도 높은 예술적 분투노력의 산물임을 알게 한다. 독자는 이야기 한 편 한 편을 읽어 나가며 절로 마음이 순수해지며 정화되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어른을 위한 동화로 볼 수도 있는 게 이 깊고도 투명한 떨림을 아이들이 깨우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드는데 기인한다. 되풀이하여 읽어도 물리지 않는 옹달샘의 약수를 마시는 청량감이 충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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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카쿠가 남긴 선물 - 사이카쿠의 마지막 작품
이하라 사이카쿠 지음, 김임숙 옮김 / 제이앤씨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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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세의 대표적인 우키요조시(浮世草紙) 작가인 이하라 사이카쿠의 유작으로 <호색일대남>과 같은 유의 호색물이다.

 

일본 근세는 독특한 시대적 문화를 낳았다. 상업의 발달로 경제적 부를 축적한 상인 계급이지만 정치적으로는 피지배층에 속하여 자신들의 점증하는 활력을 분출할 여지를 갖지 못하였다. 정치적으로 평온한 시기에 그들은 사회적으로 공인되고 암암리에 장려된 유곽 문화에 빠져들고 이것은 당대의 특징적인 문화로 자리 잡았으니 유곽 출입은 더 이상 숨기고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유곽에서 호탕하고 질펀하게 놀면서 돈을 방탕하게 흩뿌리는 사람을 다이진(大尽)이라고 부르며 스이(), 즉 풍류를 아는 멋쟁이로 칭송받을 정도였다. 어디 여색뿐이겠는가 당대는 남색도 보편화되다시피 한 사회였으니.

 

서문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의 거짓이 한데 모여 스이라는 아름다운 놀이가 되었다.” (P.8)

 

스이는 거짓이다. 화류계에서는 손님이나 유녀나 아게야의 사람들 모두가 거짓을 말하고 행동한다. 모두가 거짓임을 알면서 모르는 체, 진심인 체 행동하는 게 유곽의 특징이다. 스이는 아름답다. 도덕적 가치를 배제한 채 다이진은 유녀의 미색과 자태를 탐한다. 색욕이 즐겁고 아름답지 않다면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탐닉하고 헤어 나오지 않는 일이 생기겠는가. 스이는 놀이다. 놀이의 즐거움은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 영원할 것 같은 쾌락과 행복의 꿈은 가진 재화가 바닥나는 순간 차디찬 현실로 내동댕이쳐진다.

 

사이카쿠는 총 515편의 짤막한 이야기를 통해 유녀놀음에 빠져서 자제할 줄 모르고 끝내 신세를 망쳐버린 사람들의 신상을 보여준다. 대개의 이야기는 비슷한 패턴을 반복한다. 부유한 신세였던 다이진이 다유같은 최상위의 유녀에게 빠져 흥청망청 돈을 뿌려대고 한껏 기분을 내며 꿈같은 시절을 보낸다. 빈털터리가 된 다이진에게는 두 개의 운명이 갈림길에서 기다리고 있다. 날품팔이 처지에도 여전히 미몽을 잊지 못하고 옛날의 화려한 시절을 되새긴다. 또는 거금을 주고 기적에서 빼준 다유와 함께 궁핍한 삶을 꾸려나간다.

 

여하튼 일상화된 유곽 출입은 사회와 가족 질서 유지 차원에서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가산을 탕진하기 일쑤며, 자식이 또는 아비가 다이진이 되면 신분과 가족 질서도 혼란스럽게 된다. 엄정한 도덕률의 차원에서 보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응당 교훈적이고 씁쓸한 뒷맛을 남겨야 하지만 의외로 각 이야기는 흥겹고 산뜻하다. 다이진들의 영락한 말년을 들려주면서 작가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래, 이들은 지금 몰락해서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어. 하지만 그들은 아름다움에 탐닉했던 유쾌했던 호시절을 후회하지 않지. 다시 기회만 주어진다면 그들은 다시금 에도와 나라, 교토의 유곽들을 신나게 순례할 것이야.

 

그런 탓일까? 내게는 역자의 설명과는 달리 인간 욕망의 파멸적 결과에 대한 주의를 담은 메시지로 이해되지 않는다. 이왕 경고하려면 좀 더 따끔하게 신랄하게 해야 옷깃을 여미고 자신을 돌아보지 않겠는가. 사이카쿠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예전의 멋있고 감탄스러웠던 스이가 당대에서는 퇴색하고 변질되어 더 이상 멋을 찾기 어렵다는 탄식을 하고 있다. 때에 따라서는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듯한 뉘앙스마저 글에서 묻어나온다. 그렇다면 사이카쿠의 이 작품은 지금은 사라져버린 스이의 아름다움을 기리는 송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유녀는 세련된 마음을 가지고는 있으나 품위가 없지요.”

 

요사이 노는 방법을 보면 한심한 손님이 많다......차야온나와도 놀 수 없을 것 같은 남자가 한껏 멋을 부리고 덴진을 사러 온다.” (P.142)

 

여하튼 지금은 진짜 다이진을 찾아볼 수 없다......호탕했던 예전의 유녀놀음이 그립기만 하다.” (P.146)

 

유난히 기억에 남는 다이진과 유녀 이야기가 있다. 4-2섣달 그믐밤의 이세신궁 참배, 와라야의 금이 그것이다. 나가사키의 시카라는 다이진은 시마바라의 다유 요시노를 기적에서 빼낸 후 초가집에서 오붓한 생활을 즐긴다. 비록 넉넉한 삶은 아니지만 물욕을 버리고 자연을 벗 삼아 느긋하게 풍류를 즐기며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삶을 누리고 있다(P.135).

 

사이카쿠의 작품은 지극히 사실적이며 고상한 체하지 않는다. 스스로 대중작가임을 인정하고 호색과 관련된 인물들의 언행과 사건을 경쾌하고 치밀하게 묘사하여 일본 근세의 사회상을 살아있는 듯 독자에게 보여준다. <호색일대남>과 이 작품을 통해서 당대의 유곽 문화와 용어, 화폐 단위 및 기타 풍습 및 유흥 문화 등에 대해 고고한 역사서를 통해 알 수 없는 서민층의 생활 습속을 상세히 알 수 있게 된 점이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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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할아버지와 버섯 마을 - 생각하는 지혜동화 02
김태광 지음, 시내 그림 / 꿈소담이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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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지혜 동화라는 타이틀의 시리즈로 나왔는데, 10편의 교훈적 이야기를 독립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버섯 마을이라는 지역적 배경에, 나무 할아버지가 등장하여 들려주는 형식을 통해 전체적 연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나무 할아버지는 마을에서 가장 지혜로운 인물로서 주민들의 어렵고 힘든 사정을 들어주고 적절한 이야기를 들려주어 스스로 깨닫게 함으로써 해결해 준다. 여기에 소개된 각각의 이야기가 들려주는 지혜와 교훈은 명쾌하다. 이 책을 읽는 초등학생 저학년이 이해하고 생각할 수 있는 수준에 맞추기 위해서다.

 

욕심쟁이 영감에서는 지나친 욕심을 경계한다. 욕심의 노예가 되지 말자는 것.

 

아름다운 도전은 브라운대학 총장이 된 루스 시몬스라는 흑인 여성을 통해 꿈과 목표, 열정의 소중함을 강조한다.

 

조개와 진주는 자신과 타인을 소중히 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준다. 소년의 괴로움은 남을 잘 이해할 수 따뜻한 마음(진주)을 품고 있어서라는 나무 할아버지의 말이 와 닿는다.

 

의심 많은 물고기를 통해 타인의 진심을 믿는데서 인간관계가 출발함을 알게 해준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약은 긍정적 마인드와 자기 확신의 효과를 보여준다. 소심하고 자신감 없는 영진이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다.

 

억울한 황새의 황새는 억울해할 필요가 없다. 옛말에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고 하였다. 바르고 옳지 않은 일과 사람은 처음부터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자기 탓이다.

 

가장 아름다운 일은 작가 카프카의 어린 시절 일화를 알게 해준다. 선한 마음과 행동은 사람을 즐겁고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다.

 

우리 몸에 입은 한 개이지만 귀는 두 개라는 사실을 자주 잊곤 한다. 혀는 모든 불행의 근원이라는 말도 잊지 않은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가족과 친구에게 커다란 상처를 준 경우는 부지기수다.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이 주는 교훈이 이에 해당한다. 언행은 신중해야 한다.

 

우리는 흔히 사람의 한 단면을 통해 그 사람을 지레짐작한다. ‘똑똑한 바보는 그 잘못과 위험성을 경계한다. 특히 어린이들은 겉으로 드러난 친구들의 외모와 행동을 보고 놀려대며 무시하기 일쑤다. 누가 참다운 바보일까?

 

버섯마을 사람들은 나무 할아버지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감사장을 전달한다. 모든 이들은 참으로 흐뭇한 마음이다. 나무 할아버지는 링컨 대통령의 일화를 들려준다. 링컨이 훌륭한 인물인 점은 업적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배려하는 아름다운 마음 때문일 것이다.

 

나오는 이야기가 커다란 흥미를 자아내거나 극적인 소재가 아니고 구성 자체가 평면적이어서 아이들이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책을 다 읽기에는 지루해할 수도 있겠다. 아니면 작가와 출판사의 기획 의도는 한 번에 한 편씩 차근차근 읽고 꼼꼼히 되새겨 이야기에 함축된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것일 수도 있겠다.

 

책 디자인과 편집, 만듦새는 매우 뛰어나다. 삽화도 이야기의 내용과 인물의 성격을 적절히 반영하는 범위에서 깔끔하게 그려져 있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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