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하게 피는 꽃 이치요
히구치 이치요 지음, 박영선 옮김 / 북스토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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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절한 일본 근대의 대표적 여류 작가의 일기 모음집이다. 기본적으로 작가가 공개를 염두에 두지 않는 일기의 출간에는 다소 부정적 입장이지만, 저명한 문인 및 학자들의 사후 출간된 일기를 무작정 외면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읽고 싶은 강한 흥미를 느끼게 하는데, 한 개인의 내밀한 사적 영역을 엿보는 일종의 관음증적 욕망과 함께 겉으로 언명되지 않아 더욱 진실에 가까울 수 있는 저자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음에서이다.

 

이백면 정도 분량의 이 책이 히구치 이치요가 쓴 일기 전부를 수록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15세와 19세 이후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기록을 보건대 일부만 공개된 게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할 따름이다. 독자는 여기에 담고 있는 내용만 보더라도 히구치 이치요의 삶의 척박함과 굳건한 의지, 문학에의 열정을 공감하기에 충분하다.

 

문학 수업과 연관 지을 수 있는 활동은 15세부터 시작한 와카(和歌) 수업과 19세에 나카라이 도스이와의 만남이다. 수년 간 지속된 와카 수업은 그녀의 독특한 문체적 특징을 형성하고 그녀의 작품에서 쉽사리 발견할 수 있는 시적인 간결함과 정서적 기조를 갖출 수 있도록 하는데 일조하였을 것이다. 한편 나카라이 도스이를 통해서는 본격적인 소설 작법을 수업하였을 것이며 그녀가 문단에 진출하는 데도 도움을 받는다.

 

그녀의 삶에서 나카라이 도스이는 양가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문학적 스승으로서 존경심을 품었던 그에게 또한 스캔들 유포로 인한 실망감과 배신감을 갖기도 하였고 심적 혼란은 이치요에게 극심한 영향을 미쳤음을 일기에서 여실히 찾을 수 있다.

 

나는 너무나 깜짝 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나카라이 선생님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너무나 결백한 나에게 있지도 않은 오명을 씌우고, 자기 자신은 사람들에게 기세등등한 얼굴을 하다니! 너무나 미워서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다.” (P.78)

 

나카라이 도스이에 대한 감정은 존경과 사랑의 감정이 혼재되어 있었을 것이다. 갓 스물을 넘은 그녀가 지속적인 교제를 하는 유일한 남성, 선배 문인, 가르침을 받는 존경하는 선생님 등 이런 감정을 갖는 것은 당연할 수 있다.

 

19세 자신의 일기에 새싹 사이로라는 제목을 붙인 그녀. 자신의 글을 평하기를 꽃의 아름다움도 없고 문장도 요염하지 않다”(P.16)라고 하였다. 그녀는 알았을 것이다. 아름다움과 요염함이 문장의 본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잎을 통해서 가지와 줄기로 면면히 흐르는 강인한 생명력이야말로 진실한 기초이자 핵심임을.

 

그녀에게 소설은 한낱 여흥과 여기가 아니었다. 현실적으로는 엄연히 가족의 생계수단이지만

경박한 대중에게 영합할 의사는 추호도 없다. 일기를 통해서 이치요의 솔직한 소설관을 알게 된다. 그녀에게 소설은 자신의 온 생애를 쏟아 부어야 하는 필생의 과제이다.

 

나역시 소설가라 그저 그런 작가의 작품처럼 한번 읽고 곧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그런 글은 쓰지 않으려 한다......인간의 진심에 호소하는 것을 쓰고, 인간의 진심을 그려낸다면 설령 단 한 장의 작품이라도 문학으로서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P.62)

 

일기 곳곳에 그녀 삶의 궁핍함을 느낄 수 있는 대목들이 많다. 부족한 생활비로 고심하고 돈을 빌리고 원고료에 일희일비하는 이치요. 일기가 아니라면 적나라한 그녀의 탄식을 어디에서 들을 수 있겠는가.

 

이번 달은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겠다. 아아, 쌀도 떨어지고, 돈도 전혀 들어올 것 같지 않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무조건 붓을 들고 뭔가를 쓰는 일밖에 없다. 그렇게 해도 원고료 한 장 값은 얼마 안 된다.” (P.153)

 

요시하라 유곽 근처로 이사한 일은 그녀에게 매우 상심되는 사건이었다. 21세 그녀의 일기는 티끌에 묻혀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영락해가는 자신의 환경을 티끌 속에 묻혀버리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이런 그녀가 걱정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은 의외로 사랑의 상실에 대한 우려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초라해져 버려 일생동안 그 선생님도 뵐 수가 없을 것 같다. 결국 나의 사랑은 흘러가는 구름처럼 허무하게 사라져버리고 말 것인가......두번 다시 만나주지도 않을 테고......” (P.114)

 

절교하였지만 나카라이 도스이에 대한 감정의 끈을 놓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며 두 사람은 나중에 오해가 풀리고 다시 교제를 재개하게 된다.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히구치 이치요는 오히려 마음을 단단히 추스른다. 역경에 굴하지 않고 시련은 오히려 그녀를 더욱 옹골차게 만든다.

 

나는 이 인간 세상에 고통과 실망을 위로하기 위해 태어난 시신詩神의 자식이다. 교만한 자를 포용하고 고통속에 있는 사람을 구하는 것이 나의 의무이다. 그래서 한시라도 자신에게 경계를 게을리할 수 없다. 내가 쓰러져 죽는 그 순간까지 이 미를 향한 정신을 남기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이 멸망치 않는 한 나의 시(소설)는 사람들의 생명으로 남게 될 것이다.” (P.142)

 

22살의 봄날에 그녀는 확고한 결심을 굳힌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추구해야 할 길, 자신의 앞에 높인 가시밭길을 헤쳐 나갈 각오를 다진다. 이것이 기적의 14개월을 이룩하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내 마음은 이미 천지자연과 일체이다. 나의 뜻은 국가의 대본大本이다. 힘이 모자라 쓰러져 내 몸이 들판에 버려져 굶주린 개의 먹이가 될 지라도 뜻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바칠 것이다.” (P.143)

 

어느 날 문득 그녀의 작품들이 잇달아 세상의 호평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키재기>는 당시 문단의 양대 산맥인 모리 오가이와 고다 로한 양자에게서 극찬을 받게 되었다. 세인들의 열광적인 호응과 칭찬에도 이치요의 심경은 오히려 차분하고 담백하다. 기쁨에 못지않게 슬픔을 토로한다. 찬사와 비방을 손바닥 뒤집듯 거리낌 없이 하는 세상의 명성은 헛되고 덧없음을 그녀는 알고 있다.

 

마지막 해의 220일자 일기를 살펴보면 이것이 대체 24살 한창 때의 아가씨의 글인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그녀를 염세가로 지칭하는 이들도 있다고 하는데, 분명히 글을 통해 본 그녀는 염세적 성향을 풍긴다. 가난과 고독, 허약한 몸 그리고 몰인정한 세상인심은 이치요를 오래전부터 서서히 갉아먹고 있었다. 그리고 회복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저 별 볼일 없이 써 놓은 글은 세상에 내면 대단한 작가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과장되게 칭찬을 남용해 놓고는 내일을 같은 입으로 비방을 한다. 얼마나 기막히고 허무한 일인가.

매일 만나는 사람 중에서 단 한 사람도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다. 나를 정말 이해해주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니, 나 혼자 이 세상에 태어난 생각이 든다. 정말 견딜 수가 없다.” (P.173~174)

 

부족하나마 이 일기를 통해서 우리는 히구치 이치요에 보다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책의 표제대로 그녀는 치열하게 피는 꽃이었다. 그 꽃이 아름답거나 요염하지는 않더라도 개화를 위해 몸부림친 그 치열함만은 적어도 인정해야 한다.

 

히구치 이치요가 무라사키 시키부와 세이 쇼나곤을 평한 대목이 있다. <겐지이야기><마쿠라노소시>의 작가들이므로 유독 관심이 쏠렸다. 무라사키 시키부와 비교하면 쇼나곤의 재능에 비해서 인덕의 부족함을 인정한다. 넉넉하지 못한 생활형편 상 노력하고 키워야 하는 인덕의 양성 면에서 미흡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녀와 자신의 불우한 처지에 공감을 한 탓인지 쇼나곤에 대해서 이해와 동정을 아끼지 않는다.

 

소일거리로 썼다고 하는 마쿠라소시를 읽어보면 표면적으로 단풍잎 같이 아름답기만 해보이지만, 두세 번 읽다보면 애처롭고 쓸쓸한 마음이 그 속에 깃들어 있다.”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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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스필드 파크 2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7
제인 오스틴 지음, 김지숙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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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제인 오스틴에게,

 

앞서 띄운 서신에서 당신이 어떤 식으로 작품을 전개할지 무척 궁금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특히나 말미에 공언된 패니에 대한 헨리의 유혹 말이지요. 서둘러 2권을 읽어나가면서 당신이 독자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정확성에 새삼 놀라게 됩니다.

 

1권과 동일한 패턴으로 2권이 전개되었다면 인내심이 부족한 독자들은 지루함을 못 이겨 이내 읽던 책을 내던지고 자리를 박차고 나설 것입니다. 가련한 독자들의 바램은 매우 소박합니다. 착하고 겸손한 우리 패니가 헨리의 유혹을 잘 견디기를 바라며, 마음 한구석에 간직한 사촌오빠 에드먼드에 대한 사랑이 행복한 결실을 거두기를 간절히 소망할 따름입니다. , 또 하나 있군요. 패니를 그렇게도 구박하는 노리스 이모가 응분의 보답을 받았으면 하는 것이지요. 그래야 고진감래와 사필귀정이 권선징악으로 이어지는 상투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진정한 대단원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반부 플롯의 대세는 패니에 대한 헨리의 끈질긴 구애입니다. 작중에서 헨리는 비록 악역이지만 제인 당신은 그에게 동정할 미덕과 여지를 남기고 있습니다. 패니의 아름다움을 최초로 깨달은 사람이 바로 헨리 아니겠습니까. 헨리가 패니에 관심을 기울인 연유도 실상은 여느 아가씨와는 다른 미덕을 발견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불순한 동기로 시작된 헨리의 사랑놀이는 얼마 후 불타는 진실한 감정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때부터 패니 대 헨리 및 맨스필드 가문 간의 팽팽한 대치가 시작됩니다. 패니는 매우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헨리의 성격상 결점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부유하면서 훌륭한 신사의 전형일 수밖에 없으니 패니의 거절을 이해하기 어렵겠지요. 패니를 한순간에 난처한 궁지로 몰아넣은 제인 당신의 솜씨와 한편 비정함에 아연할 따름입니다.

 

당신이 구성한 결말과 다르게 헨리와 패니가 맺어졌으면 어떨까 궁금합니다. 솔직히 무리한 추론은 아니지요. 당신은 패니의 마음이 조금씩 약해지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었으니 헨리가 시간의 도전을 극복했다면 충분히 가능한 전망입니다.

 

헨리가 이상하리만큼 좋아졌다. 좀 전에도 패니는 그 생각을 했었는데, 그녀의 생각의 흐름 속에서 가장 위안에 가까운 것은 이것뿐이었다......패니는 자신의 건강과 안락을 그토록 염려하는 헨리의 말투와 태도에서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그토록 자신에게 섬세하게 신경을 써주는 만큼 그녀가 몹시 괴롭게 여기면서 완강하게 거절해온 구혼을 이제는 받아들여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었다.” (P.266)

 

마음을 다잡은 헨리의 끈질긴 구애에 패니가 마음을 열고 청혼을 받아들였다면, 헨리가 러시워스 부인과 도주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겠지요. 패니의 감화로 헨리는 점차 바람직한 모습으로 변화하였을 테죠. 에드먼드와 메리 사이도 바램대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아졌을 것이며 에드먼드의 다소간의 실망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모든 사람들이 커다란 불행 없이 그네들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는 재미가 없겠죠. 독자들도 이를 바라지 않고요. 톰은 중병에 걸리게 하고 러시워스 부인은 헨리와 다시 만나 가정을 버리는 극단적 선택을 하며 줄리아마저 애인과 줄행랑을 칩니다. 토머스 경의 입장으로서는 통탄할 노릇일 테죠. 메리의 근본적 성격상 흠결을 깨달은 에드먼드의 결별, 이혼당한 마리아를 돌보기 위한 노리스 이모의 자발적 은거. 사건 진행은 일사천리로 급속도로 흘러갑니다. 1권의 유유자적하고 느릿느릿함에 비하여 폭풍 같은 전개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겁니다. 격류의 대단원은 에드먼드와 패니의 결혼으로 이어지는 거죠. 모두가 열렬히 기대마지 않은 바로 그것.

 

결론적으로는 제인 당신은 독자층의 기대에 부응하여 당신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해피엔딩으로 이끌어 가는데 성공합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여전히 이색적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답니다. 왜냐고요?

 

줄리아가 감행했던 사랑의 도피는 이전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소재였으므로 새롭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미혼 남녀의 섣부른 행동은 결국 결혼으로 무사히 수습되었으니까요. 떳떳하지는 않지만 도덕적으로 지탄의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결혼한 여성의 경우는 다르지요. 마리아의 간통과 가출은 이제까지 당신의 작품 성향에 비추어 볼 때 이례적으로 파격적인 소재입니다. 당신의 지론은 가족 간, 연인 간 티격태격하더라도 결국은 행복으로 귀결된다는 밝고 긍정적인 플롯을 항상 지향하고 있었지요. 이 작품에서 처음 일탈이 나온 겁니다. 당신이 대충 아무런 소재나 끌어다 쓰지는 않았을 테지요. 작품 세계에서 이전과 다른 시도를 하려고 했던 것 아닌가요.

 

메리에 대한 패니의 감정과 평가는 어떠했던가요. 패니는 사촌오빠와 메리의 교제를 대단히 불만족스럽게 받아들입니다. 자신과 메리의 친분에 대해서도 탐탁지 않아 합니다. 결과론적으로 봤을 때 옳은 판단이라고 할 수 있지만 중간 대목에서는 패니의 질투라고 밖에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메리에 대한 부당할 정도의 잇따른 비판과 두 사람 간의 진척에 극도의 초초함을 표명합니다. 사촌오빠에 대한 순수한 애정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정도가 과하다는 뜻입니다.

 

역시 천성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어서 메리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마음은 바르지 않은 쪽으로 치닫고 눈이 멀어 있는 건 분명한데도 자신은 그것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그러므로 패니가 메리의, 앞으로의 향상 가능성을 거의 절망적으로 봤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P.199)

 

패니가 포츠머스에 있는 친 가족을 방문하여 머무르는 장면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 작품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패니는 맨스필드 파크에서 괄시받는 처지에 있어서 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환상을 한켠에 지니고 있었지요. 이것이 산산이 부서지고 전혀 회복이 되지 않습니다. 특히나 부모에 대해서는 구제불능으로 창피하게 여길 정도지요. 그녀에게 있어 진정한 가족은 낳아준 부모가 있는 곳이 아니라 바로 맨스필드 파크가 된 것이지요. 이것은 북적대는 가족들 간의 아옹다옹을 정답고 행복한 모습을 그렸던 여타 작품들과는 상당히 대조적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리고 패니의 성격과 관련하여서인데 맨스필드 파크에서 패니는 거의 아무런 자율성을 보장받지 못하고 매사에 수동적이고 의존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포츠머스의 생가에서 그녀는 기대고 의존할 존재에 없습니다. 자신의 판단과 행동을 통해 사태의 악화를 막아야 하고 조금이나마 개선시키려고 노력을 해야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되니 비로소 그녀에게 감추어져 있던 독립성과 자율성이 발현되었던 겁니다.

 

자기 명의로 무엇이 된다는 것이 놀랍고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이 경이로울 뿐이었다. 패니는 누구의 강요도 받지 않고 스스로 읽고 싶은 책을 자기가 직접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P.244)

 

이것이 매우 중요하였던 점은 풍비박산이 난 맨스필드 파크에서 버트램 가 사람들을 위로하고 의지가 되며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던 사람은 패니가 유일하였다는 데 있었습니다. 매사에 소극적이고 구석이나 다락방에서 숨어 눈에 띄지 않았던 그녀가 자신의 겸손과 분별을 유지한 채 전면에 당당히 나설 수 있는 토대가 포츠머스에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여곡절 끝에 패니는 당당한 주인공으로서 에드먼드와 사랑의 결실을 이루었습니다. 관찰자의 지위에서 우려를 극복하고 중심인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독자들도 충분한 보답을 받았지요. 2권에서는 앞서 와는 달리 밀고 당기는 사랑의 줄다리기, 자신과 상대방의 세밀한 심리와 행동에 대한 치밀하면서 미묘한 묘사 등 제인 당신에게 기대할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을 재발견할 수 있었으니까요. 무엇보다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흥미로움과 읽는 재미가 두드러졌답니다.

 

이제 당신이 공들여 쌓아온 맨스필드 파크를 떠날 시간이 되었군요. 다음 행선지는 아마도 노생거 사원이 될 것 같습니다. 다만 바로 향하지는 못할 것 같고, 당분간은 일본 중세와 근세를 한번 돌아볼 생각입니다. 그럼 다시 만날 때를 기약하며 여기서 작별을 고합니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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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스필드 파크 1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6
제인 오스틴 지음, 김지숙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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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제인 오스틴에게,

 

당신이 남긴 여섯 편의 소설 중에서 어느덧 네 편째를 읽고 있군요. 남은 두 편인 <노생거 사원><설득>은 사후에 발간된 작품들이니 생전에 당신이 심혈을 기울여 다듬은 작품으로서는 마지막입니다.

 

당신의 작품들은 국내 출판계에서 꽤나 인기 있는 아이템이기도 합니다. 유독 이 작품 <맨스필드 파크> 만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가 오히려 이상한 정도지요. 왜 그럴까요? 작품의 분량이 가장 방대한 점이 아무래도 다소간 영향을 미치겠지요. <엠마>의 경우 무리해서라도 한 권으로 수록이 가능하지만 이 작품은 두 권으로 분책이 불가피합니다.

 

이 작품은 여타 작품들과 전개방식과 분위기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당신의 작품들에서 기대하는 경쾌하고 발랄한 진행과 재치 있는 대사와 유머 감각 등과는 다른 뭔가 낯설고 이질적인 요인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대중독자들에게는 동질감을 느끼기 어렵게 하는 듯합니다. 당신은 여기서 작풍의 변화를 꾀하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요?

 

먼저 주인공을 보면 다른 소설들에서는 중심 화자가 곧 주인공이었지요. 모든 사건은 주인공을 둘러싸고 발생하며 독자는 주인공의 눈을 통해 사건의 전개를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소설에서는 패니 프라이스가 중심 화자의 역할을 담당하는데, 주인공인 듯하면서도 사실은 작중에서 충실한 관찰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적어도 1권에서는 말이지요. 작중의 사건은 맨스필드 파크의 집안 식구들과 헨리 자매들 간에 복수적으로 발생하며 패니는 옆에서 한발 비켜난 상태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사실 당신의 작품들에서 관찰의 의미는 매우 중요합니다. 당신이야말로 세심하며 충실한 관찰자로 불릴만합니다. 당신의 글을 통해 우리는 18세기 영국 귀족사회와 그들의 가정생활 및 문화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패니가 중심인물이 아니다 보니 관찰이 사건전개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지 못하고 단조롭게 흘러가는 인상을 주는 것은 어쩌면 불가피하겠지요.

 

소설의 초반부는 맨스필드 파크의 가족사와 패니가 이종사촌의 집에 오게 된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이어 어린 패니가 아가씨로 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지요. 그렇습니다. ‘성장이 들어가 있다는 점도 역시 다른 소설들과 차이를 보이는 점입니다. 간단한 배경 설명 후 곧바로 인물과 사건들이 쉴 새 없이 밀고 당기기를 시작해야 하는데 여기서는 한참 후에야 등장하니 말입니다. 성장과 관찰이라는 두 요소는 소설 전개를 느슨하게 하고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됨을 부인할 수 없군요.

 

그러면 제인, 당신이 작품 구성을 이렇게 설정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허투루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이야깃거리가 부족하여 이렇게 질척거리도록 하지도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혹시 제가 예상했던 그 목적이었다면 충분히 납득이 갑니다만.

 

패니는 집안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이 두드러지지 않는 존재이니 관찰자로서는 최적입니다. 패니를 굳이 관찰자로 비중을 축소한 연유는 그녀 자신의 행위보다 타인의 행위를 관찰하는데 주력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닐까요? 남을 관찰하는 행위는 정확한 이해력과 판단력을 필요로 하며, 필연적으로 관찰 결과에 대한 도덕적 평가가 뒤따르게 됩니다. 패니를 통해 독자들은 버트램 가를 둘러싼 인물들의 성품과 언행, 사고방식 등을 적나라하게 알 수 있으며 그들이 보여주는 미덕에는 감탄하지만 어리석음에는 탄식을 금할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이 제인, 당신이 노리는 의도라고 생각이 드는군요.

 

패니의 관찰자적 역량을 알 수 있는 대목을 한두 개 보도록 하지요.

 

패니는 모든 장면을 시종일관 지켜보았기 때문에 자초지종을 알고 있었으므로 줄리아가 질투심에 눈이 멀어 이성을 잃은 것이라 생각하니 여간 측은해지지 않았던 것이다.” (P.226)

 

사촌들은 자기네가 선택하고 있는 희곡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했는지, 그것을 판단할 만한 분별력도 없는지 의심스러워는 것이었다.” (P.227)

 

그럼 당신과 패니의 눈으로 살펴본 버트램 가의 인물들을 한번 확인해 보지요.

 

토머스 경은 대체로 여러 장점을 지닌 긍정적 인물로 소개됩니다. 다만 가정생활에서 평온함을 우선시하며, 딸들에게 애정을 겉으로 표현해주지 않음으로써 나중에 딸들이 올바르게 자라지 못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는데 단초를 제공하게 됩니다.

 

버트램 영부인에 대해서는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없네요. 동생인 노리스 이모는 작중에서 유일하게 시종일관 패니를 구박하는 악역을 전담하고 있으며 그녀의 말과 태도를 통해 당대 사회의 신분제 질서에 대한 보수적 인식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패니와 버트램 가는 사촌 간이지만 친척 간의 정은 신분의 격차를 넘을 수 없다는 점 말이지요. 덕분에 패니도 이를 당연히 수용하게 됩니다.

 

사촌 언니들의 흥겨움에 대해서 들을 때면 몹시 부럽기도 했지만 자기는 신분이 낮다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곳에 나가게 되리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그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특별히 자기와 관련있는 일이라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P.61)

 

““패니는 정말 은혜라곤 눈곱만치도 모르는 아이 같구나. 이모나 사촌들의 소원을 그토록 박정하게 거절하니 말이야. 정말 몰라도 너무 몰라.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절대 그렇게 하지는 못할 거야.” 노리스 부인이 쌀쌀맞은 태도로 말했다.” (P.242)

 

패니는 이모의 말이 분명히 이치에 닿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녀 자신은 안락함을 누릴 권리를 박탈당한 너무나 비천한 신분이라는 것을 노리스 이모의 표현으로 다시 한 번 깨달아야 했던 것이다.” (P.351)

 

사촌오빠로는 톰과 에드먼드가 있는데, 장남인 톰은 귀족가문의 전형적인 맏아들 유형으로 유쾌하지만 경박하고 사치스러움이 두드러집니다. 반면 패니가 좋아하는 에드먼드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성품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에드먼드의 태도는 항상 조용하고 침착했다. 어쩌면 그런 진지하고 침착하고 소탈하기조차 한 올바른 성품이 그의 매력인지도 몰랐다.” (P.116)

 

사촌언니들인 마리아와 줄리아. 두 자매의 장점은 외모에 치중된 반면 작중에서는 점차로 그네들의 결점이 사건이 전개될수록 두드러집니다. 먼저 마리아의 결혼에 대한 인식과 결혼의 조건은 시대적 통념을 반영하고 있으며 우리 세대와도 별반 차이가 없으므로 비난하고픈 마음은 없습니다.

 

그녀는 가능하다면 제임스와 결혼하는 게 당연하고도 명백한 의무라는 생각이 들었고, 결혼 상대자를 선택하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경제적인 조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P.67)

 

마리아의 허영심은 또 어떻습니까?

 

사륜마차가 저택의 현관 앞 넓은 돌층계 앞에 멎었을 때, 그녀의 기분은 우월감과 허영심으로 가득 차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고 몹시도 흥분한 상태였다.” (P.143)

 

그녀 주체적으로 인생을 결정하고 책임지려는 의지조차 없이 오로지 주변의 입김과 허영심을 따른 결과, 헨리와의 사랑놀음에 상처받고 홧김에 제임스와 결혼식을 서두릅니다. 여기에는 부친의 속박에서 벗어나고픈 강렬한 욕구도 한몫 거들지요.

 

마리아는 평온하기 짝이 없는 집에 대해서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조금도 틈을 주지 않는 아버지의 속박에 대해서는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실연으로 인한 슬픔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자신이 결혼하려는 상대에 대한 경멸감도 그만큼 컸다. 하지만 그런 일로 인해서 오히려 결혼식을 치를 마음의 결정을 빠르게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P.323)

 

사실 마리아는 순수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만과 간계를 모르는 그녀는 제대로 된 만남을 가졌다면 제법 훌륭한 귀족부인이 될 수 있었을 겁니다. 러시워스와의 섣부른 약혼 이후 헨리에 대한 그녀의 마음은 진실한 것이었으니까요. 마리아가 헨리에게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는 대목은 그녀의 처지에 빗대어서 매우 인상적입니다.

 

전망이라고요? 말씀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을까요? 그래요, 정말 눈부신 전망이 펼쳐지고 있군요. 정말 햇빛은 찬란하게 빛나고 파크는 무척 아름답군요. 하지만 불운하게도 저 철문은 굳게 닫혀 있어서 속박과 무정한 느낌을 전해주고 있군요. 도저히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요.” 마리아도 헨리와 마찬가지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진심을 털어놓은 그녀는 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P.169)

 

동생인 줄리아는 어떨까요? 그녀도 언니와 유사한 면모를 보여줍니다. 뛰어난 미모에 비해 이성적 능력의 부족함. 작중에서는 이러한 그녀의 단점이 직설적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줄리아에겐 참을성이 부족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바른 배려도 부족했고, 자기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옳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나 원칙도 그녀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본래 그런 것들은 교육의 본질적인 면을 이루고 있는 것이었는데 줄리아는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던 것이다.” (P.155)

 

또 다른 인물 축인 헨리와 메리 크로퍼드 남매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빠인 헨리는 사랑놀이를 즐기고 도덕적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한마디로 바람둥이 인물입니다. 그에게 젊은 여성을 유혹하는 행위는 하나의 심심풀이 유희에 불과합니다. 버트램 가의 두 딸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는 유복한 신분이면서도 본받을 만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분별력이 없고 자기 욕심대로만 행동하려 하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그저 눈앞의 일밖에 보려고 하지 않았고 미래를 내다보면서 행동하거나 계획할 줄도 몰랐다. 미인이고 영리하며 자신을 좋아하는 듯한 두 자매는 그의 가슴속에 하나의 놀이 대상이었던 것이다.” (P.194)

 

에드먼드가 사랑을 품은 메리도 흠잡을 데 없는 듯하면서도 이따금씩 표현하는 언행에서 결점이 드러납니다. 특히 결혼관과 목사에 대한 인식에서 말이지요.

 

인간사 중에서도 이 결혼이라는 거래에 있어서는 상대방으로부터는 최대의 것을 기대하면서 자기 자신은 가장 부정직하게 되거든요......결혼이란 밀고 당기고 하는 일종의 거래 같은 흥정이라고 생각해요.” (P.81)

 

목사란 게으르고 자기중심적이며, 신문이나 읽고 날씨나 살피고 부부 싸움을 하는 정도밖에 하는 일이 없죠. 일은 전도사가 모두 처리해주니까요. 평생 동안 하는 일이란 식사하는 것뿐이에요.” (P.186)

 

메리의 결혼관은 매우 현실적이며 내밀한 사회적 본질을 꿰뚫고 있습니다. 결혼에서 이러한 속성이 있음을 부인하기란 어려우니까요. 특히 목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메리 개인의 편견이 아니라 당대의 일반적 견해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나아가 제인 당신의 인식이 반영된 것은 아닌가요?

 

이렇게 패니의 입장과 시각에서 등장인물들을 보면 외관상 번지르르한 우리들 개개인들이 얼마나 성격과 행동 면에서 흠결을 지닌 존재들인지 잘 알 수 있게 됩니다. 다른 작품들에서는 이러한 결점을 지닌 인물들의 좌충우돌이 작품을 맛깔나게 하는 양의 작용을 하는데 반해 여기에서는 철저히 비판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어 작중 분위기가 밝고 화사하지 않고 객관적이며 다소 냉랭함을 안겨주어 이채롭습니다.

 

너나 누님이나 식구들은 최근 한 달 반 동안 그 아가씨의 인물이 매혹적이게 아름다워졌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 것 같더라.” (P.364)

 

어느덧 패니는 열여덟 살이 되어 소녀에서 아가씨로 자라게 되었습니다. 패니의 미모가 한층 빼어나게 되어 미운 오리새끼가 백조로 변했음을 알아차린 것은 헨리가 처음입니다. 그리고 헨리는 동생에게 패니를 유혹할 계획을 털어놓습니다.

 

이것으로 1권은 끝을 맺는데 2권에서는 제인 당신이 어떤 식으로 패니와 헨리의 관계를 구성할지 무척 궁금합니다. 패니가 계속 관찰자의 영역에 머무를지 아니면 알을 깨고 나와서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으로 거듭날지도 마찬가지랍니다. 당신이 이색적인 작품 분위기를 이대로 견지할지 많은 독자들이 기대하는 기존의 작품들처럼 시트콤적 성향으로 복귀할지도요. 제인 당신의 행보를 주목하겠습니다.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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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무렵 무라사키
히구치 이치요 지음, 박영선 옮김 / 북스토리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수록 작품>

1. 매미

2. 십삼야

3. 키재기

4. 제 아이는 말이죠

5. 해질 무렵 무라사키

 

옮긴이와 출판사의 노력과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 거의 십년 전에 국내에 그다지 인지도가 높지 않은 이치요의 소설집 두 권과 일기 한 권을 동시에 출간해 내놓다니. 이야말로 시대를 앞선 혜안이 아니겠는가. 수록 작품 5편 중에 <십삼야><키재기>를 제외한 세 편을 일독하기 위해 이 책을 꺼내들었다. 곁들여 상기 두 작품을 재독하는 즐거움도 나쁘지 않다.

 

<십삼야><키재기>에 대한 감상은 을유문화사 판에 서술한 소감이 여전히 유효하며 여기에는 미비한 점을 첨언한다. <십삼야>에서 작가는 애정 없는 결혼의 비극적 실체를 여실히 보여준다. 요는 이러한 선택이 당사자 개인의 자율적 의지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전통적 가족관계의 역학과 자식과 가족에 대한 내적 윤리의식이 여기로 이끌고 벗어나지 못하도록 꽉 짜인 틀을 구축하고 있다. 남편이 아니고 원수로 생각되는 하라다의 사모님이라는 허울을 벗어던지길 원하는 세키는 견고한 그물에 포위되어 현실에 주저앉는다.

 

아이를 불쌍하게 만들어 버린 것 같아 소리 내어 울고 싶은 심정이다.” (P.47)

 

아아, 나 혼자 내 멋대로 남의 출세 길을 막을 순 없다. 돌아가야 하나, 돌아가야만 하나. 그렇게 비인간적인 사람 곁으로 돌아가야 하나. 그 냉랭하고, 비정한 남편이 있는 집으로,,,,,,” (P.44)

 

하지만 부모를 위해, 또 동생을 위해, 타로도 있지 않니, 여태까지 참고 살았는데 앞으로도 못 해나갈 것이 뭐가 있니?” (P.61)

 

앞으로 그녀는 남은 생을 허위적허위적 헤쳐 나가게 될 것이다. 하라다의 처로 남은 세키는 살아 있으되 살아 있지 않은 존재가 된다. 그것이 모두의 소망임을 알고 있으므로. 그것이 일본 근대에도 여전한 여성 억압적 가치관과 질서 체계라는 점을 작가는 모두에게 명백히 알리고 있다.

 

그저 제가 죽은 셈치고 살면 풍파도 일어나지 않고 아이도 부모 손에 자랄 수 있지요.” (P.61)

 

<키재기>의 종반부를 특징짓는 사건은 미도리의 일변한 태도에 있다. 이전까지의 구김 없고 자유분방하던 미도리는 어느 날 시마다 머리를 하고 그토록 친하던 쇼타에게도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열네 살 아이는 얌전하고 부끄러움을 잘 타는 소녀가 되었다. 도대체 미도리에게 무슨 일이 생겼던 걸까?

 

어제까지의 미도리로서는 전혀 알지도 못할 일이 생긴 것이었다. 그 부끄러움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P.155)

 

요 며칠 동안 일어난 일 때문에 자신이 자신 같지 않았다. 그저 뭐랄 것도 없이 부끄럽기만 했다.” (P.160)

 

을유문화사 판의 해설에 따르면 두 가지 견해가 두드러진다. 초경을 겪은 데 따른 심신의 충격이라는 설과, 미도리 언니의 직업과 가족들이 사는 곳이 유곽이니만치 어린 소녀가 소위 머리를 얹었다는 설이다. 개인적으로 미도리의 나이로 보아 후자의 추정은 과도하게 인식된다. 오히려 요즘에 비해 예전에는 초경이 다소 늦은 점을 감안한다면 전자가 타당성이 높다. 소년의 첫 몽정, 소녀의 초경은 모두 당혹스럽기 그지없다는 사실을 우리들 자신의 기억에서 상기해 보자.

 

확실한 것은 이 사건으로 인해 미도리는 성적 자각을 하게 되어 더 이상 또래의 소년들과 어울리기를 원치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미도리의 앞날의 방향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으나 이제부터는 여성으로서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신뇨도 스님 수행을 하기 위하여 머리를 깎는다. 요시하라 아이들에게 인생의 한 시절이 마무리되고 있다.

 

나머지 세 편은 비교적 소품들이다.

 

<제 아이는 말이죠>는 다중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십삼야>와 같이 행복하지 않은 결혼 생활이 여성 화자의 독백에서 주된 내용을 차지하고 있다. 다만 여기서는 부부 간 불화의 원인이 명확하지 않다. 오히려 화자의 일방적 의심과 딱딱한 언행이 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생각될 정도다.

 

우울하고 지겹다. 어째서 이런 남편과 인연이 닿아 길고 긴 인생을 빛도 들어오지 않는 어둠에서 살아가야 하는 걸까. 지루한 일상. 어처구니없는 인생.” (P.167)

 

파국으로 향하던 이들의 관계에 전환점이 된 것은 아이의 탄생이다. 아이의 방긋거리는 얼굴을 보고 미소 짓고 대화를 시작하는 부부. 이들 가족의 앞날에는 구름이 걷히고 서광이 비칠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해피엔딩? 왠지 께름칙하다. 일방적 희망찬 전망을 비추기에는 그들 사이의 상흔이 너무 깊다. 갈등의 원인이 진정 해소되었는가? 메울 수 없는 갈등과 다툼, 그리고 화해와 미소, 그것은 정도의 차는 있지만 모든 가정 내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미완성인 <해질 무렵 무라사키>의 여성 화자는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녀의 가정은 외형적으로 평온하고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한 가지 그녀는 남편에 대해 전혀 애정이 없다. 결혼은 했지만 그녀는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몰래 만나고 있다.

 

나는 악녀야!” (P.185)

 

악인이라 뭐라 해도 나는 상관없어.” (P.189)

 

남편을 속이고 외간남자를 만나는 자신의 행동이 옳지 않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녀는 스스로 당당하다. 이렇게 스스로를 악녀라고 선언한다. 이 작품은 여기에서 멈추는데 작가가 요절하지 않고 마무리를 하였다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갔을지 무척 흥미롭다.

 

여성의 전통적인 이상적 모럴은 정조를 지키는 데 있다. 처녀성을 보전하고 있다가 남편에게 순결을 바친 후 이후로는 절대 외간남자에 눈 돌리지 않는 것. 이것은 엄격한 유가사회의 동양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일부일처제의 기독교 사회도 이를 찬미하고 있다. 극단적으로는 순결과 정절을 위해 목숨마저도 아끼지 않는 정신과 행동은 사회적 예찬과 권장 사항이기도 하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악녀가 되어 온갖 비난과 심지어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한다.

 

<매미>는 정신이상이 된 유키코라는 젊은 여성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그녀가 정신이상이 된 것은 우에하라의 죽음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그는 유키코를 범하려다 실패하고 죄책감으로 자살하였다. 그녀는 이러한 사태에 충격을 받고 발작을 일으킨다.

 

일이 이렇게까지 벌어진 건 유키코가 아무 일도 아닌 걸 가지고 고민을 너무하다가 이렇게 된 것이지만,......이렇게까지 정조라는 걸 지켜온 것을 가엾게 여겨 주기 바라네.” (P.27)

 

그런데 유키코는 발작 중에 끊임없이 우에하라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이름을 끄적거린다. 잘못한 건 그녀 자신이었다는 외침! 그녀와 우에하라는 무슨 관계인가? 양자가 사랑하는 사이였다면, 유키코의 부모가 이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관계였다면, 이는 단순한 정조유린의 실패 사건이 아닐 수 있다.

 

만약에 (반쵸) 도련님이 없었더라면 아가씨가 이렇게까지 가슴 아프게 되지 않았을 거야......” (P.37)

 

하녀들의 대화에서 얼핏 진상이 드러난다. 유키코는 오빠인 양자로 들어온 반쵸와 앞날이 정해진 상태다. 여기에 우에하라가 등장하고 그를 사랑하게 된다. 사랑과 의무, 내면의 감정과 사회적 질서.

 

우에하라의 의외의 불행한 죽음에 그녀는 매미가 될 수밖에 없었다. 허물을 벗어 빈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유키코. 그녀의 영혼은 이미 우에하라를 따라 스러졌다. 육신의 외양은 뜰에 굴러다니는 매미 껍데기”(P.35)가 되어 곧 바람에 흩날리게 되리라.

 

이상에 보듯이 비교적 어린 나이임에도 그녀의 통찰력은 심오하다고 일컬어질 수준에 도달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녀가 관찰하고 드러내고 제기한 사안은 당대의 일본 사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상황에서는 언제든 마주치기 마련인 보편적 질문을 근원적 차원에서 되묻고 있다. 삶과 죽음의 본질에 대해서, 그리고 사랑과 결혼의 의의에 대해서. 이것이 백여 년 전에 이십대 초반에 삶과 이별한 한 여성 작가의 단편들이 우리에게 생생하게 다가오는 연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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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눈으로 본 현대 예술 - 삶을 어루만지는 예술 그리고 철학 이야기
최도빈 지음 / 아모르문디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사연이 있는 책이다. 에라스무스의 격언집에 대해 남긴 촌평을 보고 출판사 담당자가 인문학에 관심을 기울여줘 고맙다고 신간인 이 책을 보내주었다. 그때부터 이 책은 내게 계륵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선의와 감사의 표시로 받은 책이니 어떻게든 읽긴 읽어야 하겠는데...가뜩이나 골치아픈 현대 예술을 게다가 철학의 눈으로 본다고 하니...그리고 벌써 일년이 흘렀다.

 

저자는 미국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있는데, 소개에 따르면 미술과 건축을 좋아한다고 한다. 철학자가 무슨 예술 관련 서적을? 하고 의아하게 여길 수 있겠지만, 순수 철학이 아닌 미학을 전공하였으므로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설사 순수 철학 전공이라고 하더라도 예술을 논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 조항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 판형보다 가로가 1cm 정도 더 긴 개성적 판형이다. 예술 서적이란 특성상 지질도 고급용지를 사용하였고 미술관과 작품들의 컬러 도판이 듬뿍 들어가 있다. 요컨대 만듦새는 꽤 고급스럽고 그럴 듯하다.

 

전체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현대 미술(시각 예술)의 현재를 다루고 있으며, 2부에서는 미술(시각 예술)의 영역을 확장하는 현상을 소개한다. 각 장의 내용은 특정 미술관(주로 미국의 미술관 위주)에서 이루어지는 전시를 보며 작품전이 내세우는 작가 또는 주제를 통해 현대 미술의 실제와 핵심으로 직접 파고드는 방식을 취한다. 한편 3부에서는 미술(시각 예술)의 범위를 뛰어넘어 공연 예술의 현장을 살펴보고, 예술의 발전을 위한 고언과 자기반성으로 끝을 맺는다.

 

과연 철학도답게 단지 예술적 관점에서만 공간과 개인과 사물을 파악하지 않는다. 작품의 행간과, 예술가의 행위 배후를 고찰하며, 미술관의 설립 의의와 지향점을 철학적 무게감을 실어(주로 동서양의 고전적 철학자들의 사상 인용을 통해) 살펴보고 있다. 1부보다는 2부에서 책 표제에 부합하는 철학적 안내와 인용이 두드러진다. 각 장마다 본문 뒤에 ‘Reflections’라고 하여 보충적 설명 또는 저자의 소회를 수록한 점도 특색이다.

 

 

뉴욕 현대 미술관은 고전이 되지 않는 현재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다.

 

예술이 기념비가 되는 순간 그 예술적 힘은 죽고 만다. 예술의 힘은 과거를 기념하는 데서 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은 현재를 고발하고, 미래를 향한 새로운 길을 제시할 수 있으며, 또한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래서 예술은 늘 파괴와 전복을 꿈꾼다.” (P.40)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예술은 정체되는 순간 화석이 되고 만다. 그 중에는 기념비가 되어 유명 미술관에 전시되는 영예를 누릴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의 존재 가치와 의의를 상실하게 되는 모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예술가는 결국 배불러서는 결국 안 되고 고난과 궁핍에 시달려야 한다는 말과 다를 게 없다. 예술을 위해서는 불가피하겠지만, 인간으로서의 예술가에게는 불행한 일이다.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에서는 유튜브 전시회를 보면서 진정한 보수주의를 논한다. 묵수적 수구를 보수와 혼동하는 우리네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보수는 무변화가 아니라 점진적인 변화를 뜻한다. 고인 물이 썩는 것은 자연현상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진정한 보수주의를 실현하기는 어렵다. 보수주의의 핵심인 내적 기준은 끊임없는 자기비판으로 벼려져야 하는데, 권력을 쥐게 되면 스스로에게 너무도 관대해지기 때문이다.” (P.52)

 

일반 감상자들에게 여전히 골치아픈 구상과 추상의 비교를 통한 미술의 본질에 대한 물음을 저자는 런던의 테이트 모던에서 제기한다. 버려진 발전소 건물을 그대로 활용하여 현대적 미술관으로 탈바꿈시킨 영국인들의 해법은 전통과 혁신의 공존과 균형을 찾는데 성공한 사례이다. 여기에는 오래된 건물은 무가치하다고 판단하여 무조건 철거하고 최신공법의 건물 신축만 일삼는 현실에 대한 일침이 숨겨 있기도 하다.

 

리히터는 끊임없이 회화의 본질에 대해 물었다. 그 결과 대척점에 있는 듯한 현대 회화의 두 갈래-구상과 비구상-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자신의 작품 세계 속에서 보여 주었다. 대상의 모방이라는 회화의 전통과 자유분방함에서, 비결정성에서, 무목적성에서, 궁극적으로 그림 그리는 행위 자체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현대적 혁신을 동시에 담아내는 그의 긍정적 양면성50년 동안 보여 준 작품 활동 안에 오롯이 담겨 있다.” (P.64)

 

테이트 모던과 리히터가 보여준 전통과 혁신의 긍정적 양면성이 부럽다면, 그 성과는 보다 나은 것, 보다 본질적인 것에 대한 끈질긴 질문과 사유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P.66)

 

사람들이 테마파크와 동물원을 찾는 이유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다. 거기서는 일단 지루할 여가가 없다. 인파로 북적거리고 다이내믹한 체험 또는 언제 봐도 마냥 신기한 동물의 세계 등. 동물원 옆 미술관은 어떠한가? 진실로 미술에 관심과 흥미가 있어서 자발적으로 오는 수가 얼마나 될지 의심스럽다.

 

도쿄 롯폰기의 모리 미술관 편에서 저자가 찾아낸 미술관의 현대적 기능은 우리들 상식에서 벗어난 효용의 변용 가능성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더 이상 전시물을 보려고 미술관을 찾지 않는다고 한다.

 

관객의 방문 목적이 더 이상 어떤 가치 있는 대상을 보는 것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관람행위의 관심은 오히려 그 대상이 아닌 행위 자체에 쏠려 있다. 여가 시간은 교양 있게보냈다는 자족감을 들게 하는 데는, 전시물의 유의미성보다는 사람들이 몰리는 고품격 장소의 방문 경험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P.96)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농담을 주제로 한 전시회는 저자에게 표현의 자유와 풍자라는 상념을 일깨운다. 저자는 아직은 연령 면에서나 의식 면에서 기성세대에 분류되고 싶지 않은 의사가 역력하다. 진정한 예술 애호인이라면 응당 뼛속부터 반골기질이 당연하리라. 그는 이편에서 그들이 줄기차게 폭로하고자 했던 권력자의 국가 사유화를 짚으면서 표현의 자유가 지닌 사상적 무게에 대한 우리의 몰이해를 돌아보고 싶었다.”(P.140)고 밝힌다. 더불어 표현의 자유에 있어 과도한 지 여부를 누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도 반문한다.

 

우리는 과거부터 배운 사실과 겪었던 경험 등을 토대로 하여 판단에 있어 불변의 준거점을 나름대로 설정하고 이에 근거하여 세상을 판단하고 평가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보수적이며, 변화에 저항적인 타성적 속성을 지닌다.

 

관성은 인간의 개별적 믿음이나 사회적 통념에도 적용된다.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끊임없이 변화함에도, 자신의 믿음은 예전 상태로 유지하며 바꾸지 않으려 한다.” (P.230)

 

예술은 본질적으로 변화와 혁신을 지향한다. 당대인들의 냉대로 실의와 절망 속에 숨을 거둔 무수한 천재 예술인들의 이야기를 모두가 알고 있다.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고 과연 이것도 예술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 의아해할 정도로 예술의 영역을 나날이 새롭게 커지고 있음을 코닝 유리 박물관에서 우리는 깨닫게 된다.

 

3부에서 저자의 관심 영역은 시각을 벗어나 청각과 함께 한다. 먼저 버펄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이야기가 나온다. 마이너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지휘계에서 마이너인 여성 지휘자, 그리고 나치에 의해 역사에 파묻혀 마이너 작곡가로 잊혀진 티베르크. 그리고 마이너 음악으로 전락한 클래식 음악의 위상...하지만 마이너가 곧 하급 또는 저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미국 독립기념일의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연주회에서 저자는 애국의 본질을 반문한다. 국가에 대한 사랑과 헌신의 강조는 개인을 말살하고 전체주의에로 경도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합리적 비판을 하는 사람들은 비애국자이자 반역자, 나아가 매국노로까지 지탄받는다. 민주주의 국가에도 함정은 상존한다. 개인에게 내재한 심적 유약성과 미디어의 통제와 조작 가능성이 항상 유령처럼 따라붙어 우리는 항상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국가의 간섭과 개인의 삶 사이의 바람직한 균형, 즉 개인과 집단 간의 예의’(P.302~303)가 중요성을 갖는다.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는 것에서 그 이론적 기반을 찾는다. 그렇다면 그 운영 원리는 다수결이 될 수 없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동등한사람들의 생각을 존중하는 것, 그것을 바탕으로 서로 끊임없이 소통하며 예의를 지키는 가운데 합의를 낳는 과정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P.305)

 

라스베이거스 태양의 서커스 쇼는 매우 예술적인 공연이라고 평가가 자자하단다. 저자는 예술적인 서커스 쇼가 진짜 예술이 되지 못하는 연유를 쇼를 보면서 깨닫는다.

 

진정한 예술이라 어떠한 물음을 품지 않고는 존립할 수 없다......현실을 망각하고 환상을 반복적으로 공급하는 일는 예술적이라고 칭할 수는 있어도 그 자체로 예술이 되지는 못한다.” (P.326)

 

문제는 현대인들은 물음을 원치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괜히 골머리를 썩이고 싶지 않다. 유한한 인생에 가뜩이나 복잡한 현대사회를 헤쳐 나가느라 괴롭고 힘든 상태이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하하 호호 낄낄거리면 번민을 잠시나마 잊고 싶을 따름이다.

 

자본주의와 배금주의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는 단기간에 성과 내지 수익을 기대할 수 없다면 세인들의 관심과 주목을 끌기 어렵다. 이른바 인문학의 위기라는 반복되는 비명과 상업적 대중문화의 우월적 대두도 여기에 기인한다. 대학교에서 인문학 계열은 폐과와 정원 축소가 지속되는 반면 경영학 계열은 지원자와 후원금으로 넘쳐난다. 근시안적 안목을 탈피하고 긴 호흡으로 먼 장래까지를 아우를 수 있는 마인드를 저자는 댄스 고담과 플라톤의 철인왕을 연결하여 아쉬움을 토로한다.

 

보다 좋은 삶을 향해 나아가기 위하여 저자는 현상의 유지와 생존이라는 목표를 뛰어넘길 요구한다. 전체와 개인의 조화와 균형은 묵자와 양주 이래로 지난하고도 뿌리 깊은 과제이지만 여기에서 정면으로 도전하여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진보를 기대할 수 있다.

 

한 사회가 생존을 넘어 보다 좋은상태로 발전하길 원한다면, ‘실용을 넘어 인간의 창조성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침로를 잡아야 할 것이다.” (P.359)

 

 

불행히도 여기에서 소개된 수십 개의 미술관 중 단 하나도 가본 적이 없다. 따라서 무엇보다 내게는 미국의 미술관 투어 소개기로 인식되었다. 어디선가 들어보았음직한 아니면 난생 처음 듣는 이름의 미술관들을 지면을 통해서나마 만나는 것도 제법 흥미롭다. 뉴욕에 이렇게 쟁쟁한 미술관들이 여럿 있다는 사실도 비로소 알게 되었고, 공업도시 피츠버그가 앤디 워홀의 안식처라는 사실도 금시초문이었다.

 

미술에 관한 책은 몇 권 읽었지만 여전히 까막눈에 문외한이다. 인상파까지는 그런대로 고개를 끄덕일 준비가 되어 있지만, 추상화부터 시작해서 앤디 워홀 류의 예술과 상업의 경계가 불분명한 영역에 대해서는 여전히 심적 거부감이 드는 게 사실이다. 개인적 호오(好惡)와 상관없이 예술의 지평과 차원이 나날이 확대될 것은 부인하지 않지만.

 

무엇보다도 바로 미국 시각예술계의 현재와 지향을 일람할 수 있는 즐거움을 누렸으며, 저자의 시의적절한 묵직한 철학적 사유를 들여다 볼 수 있어 지적 충족감마저 채울 수 있었다. 예술과 철학은 그러고 보면 닮은 점이 제법 있다. 무엇보다도 현상에 안주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점이다. 예술은 변화와 변혁을 도모하며, 철학은 현상이 올바른지 반문한다. 양자의 시각으로 볼 때 현재의 우리 사회는 건강하고 발전을 기약할 수 있는 상태인지 궁금하다. 저자의 비판과 탄식을 볼 때 아닌 듯도 하지만, 이런 푸념이 존재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일말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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