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꿈을 보았다 - 일본 모던 판타지 걸작선
고다 로한 외 지음, 유은경 옮김 / 향연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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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수록 작품>
1. 만개한 벚꽃 나무 숲 아래 (사카구치 안고)
2. 주문이 많은 요리점 (미야자와 겐지)
3. 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4. 쥐 고개 (모리 오가이)
5. 열흘 밤의 꿈 (나쓰메 소세키)
6. 풍류불 (고다 로한)


부제가 ‘일본 모던 판타지 걸작선’인데 굳이 판타지라고 장르를 한정할 필요 없이 일본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주요 단편 작품집이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오층탑>의 작가 고다 로한의 또 다른 작품 <풍류불(風流佛)>이 수록되어 있어서다. 단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중편이라고 해야 할 로한의 이 작품에서도 확실히 불교적 색채가 농후하다. 불상조각가 슈운이 구도 편력 중 우연히 위기에서 구해 준 오타쓰라는 아가씨와의 러브 스토리를 다루고 있다. 소재는 물론 구성에서도 불교 경전인 <법화경>의 십여시(十如是)를 소제목으로 하여 사건의 전개를 이에 맞추고 있어 독특한 인상을 준다. 로한의 문체는 의고적이어서 옛날이야기를 듣는 느낌도 있고, 작가인 화자가 중간에 의도적으로 개입하여 자신의 감회를 토로하는 대목은 일전에 읽었던 후타바테이 시메이의 <뜬구름>을 연상시킨다. 명사로 끝나는 문장이 많은 점과 아울러 확실히 근대화 이전의 문학적 특성을 많이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따금씩 표출되는 속물적 근대화에 대한 작가의 부정적 인식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느끼한 서양 먼지도 여기까지는 날아오지 않고” (P.162)
“생각이 짧은 소녀적인 감성이 도시풍의 경박한 세태에 휩쓸려 변해 버린 것인가.” (P.215)

 

슈운이 떠나버린 오타쓰를 생각하며 혼신을 기울여 조각한 그녀의 목각상은 그대로 풍류불이 되었다. 풍류불이라는 부처도 있었나? 어쨌든 풍류불을 통해 슈운과 오타쓰는 신적인 존재로 승화되었다는 결말이다. 남녀 간의 돈독한 애정과 깊은 신심의 연결이 이채롭지만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주문이 많은 요리점>은 ‘주문’의 주체에 대한 다른 해석이 가져오는 반어적 결말이 무척 흥미롭다. 여기에 고양이와 개라는 동물 간 뿌리 깊은 대립적 행태는 동과 서를 불문하고 유사함을 알게 된다. 짤막하지만 점층되는 긴장감과 압박감의 고조가 인상적이다.

 

<코(鼻)>도 역설적인 상황 인식의 묘미를 그려낸다. 코끼리처럼 커다란 코를 지닌 노승이 갈망하던 대로 코가 줄어들었음에도 행복감을 느끼지 못한다. ‘방관자의 이기주의’라고 명명된 대로 사람들은 평소에는 동정심을 보여주었던 불행한 사람이 그 상황에서 벗어나면 서운함을 느끼고 심지어는 비난을 하기까지 한다. 코가 하룻밤 사이에 원래대로 커지자 노승이 오히려 후련함을 느끼게 되는 연유를 알기에 오히려 우리는 우스우면서도 슬프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도 조만간 작품집을 읽을 계획을 갖고 있는 작가다.

 

모리 오가이의 <쥐 고개(鼠坂)>가 여기에 실려 있는 점은 반갑기도 하면서 의외였다. 그의 작품에 판타지 성향이 있었는지 의아스럽다. 러일전쟁 당시 숨어있던 젊은 여인을 발견하여 몹쓸 짓을 하고 몰래 살해한 사람이 7주기를 맞는 날에 피살자의 환상을 보고 죽는다는 내용이다. 군의관으로서의 작가 자신의 체험이 반영된 작품이다. 전쟁 중 잔학 행위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귀신 이야기 형식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다만 오가이만의 특성을 잘 드러나지 않은 편이다.

 

<만개한 벚꽃 나무 숲 아래>와 <열흘 밤의 꿈(夢十夜)>은 접근하기가 만만치 않다. 그나마 나름대로 줄거리가 짜여있는 전자가 내용 이해에 용이하다. ‘만개한 벚꽃’에 대한 오늘날의 이미지라면 단연 봄철 벚꽃 축제로 대변되듯, 사람들의 환성과 탄성을 불러일으키는 화사한 정취라고 할 것이다. 특히 달 밝은 밤 또는 가로등에 비친 밤 벚꽃의 아름다움과 바람 불면 눈 내리듯 흩날리는 꽃잎의 비애 섞인 미감 등.

 

작가는 벚꽃이 아름다움과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잔인함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꽃 중에서 팜므 파탈이라고나 할까. 만개한 벚꽃 나무 아래에서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불안감을 느끼며 정신을 빼앗기기조차 한다. 그래서 작가는 서두에 벚꽃의 절경에 대한 상찬은 거짓말이며, 옛날에는 오히려 벚꽃 밑이 무섭다고 했음을 지적한다. 사람 죽이기를 밥 먹듯 쉽사리 해치우는 산적과, 사람 머리통을 장난감 가지고 놀 듯 하는 여자. 여자의 아름다움은 산적의 혼을 빨아들일 것처럼 무섭다.

 

“눈동자도 영혼도 저절로 여자의 아름다움에 빨려 들어가 꼼짝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한편 남자는 불안했습니다. 어떤 불안인지, 왜 불안한지, 뭐가 불안한 건지 그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P.23)

 

여자가 사람 머리통을 가지고 노는 장면은 엽기와 그로테스크 그 자체이다. 새삼 작가인 사카구치 안고에 대한 궁금증이 생길 정도다. 오페라 <살로메>에서 살로메가 세례 요한의 목을 가지고 희롱하는 대목이 연상된다.

 

다시 만개한 벚나무 숲으로 돌아오면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여자가 귀신이었음을 산적은 불현 듯 깨닫는다. 산적이 죽인 여자는 꽃잎으로 산화해 버리고 산적의 몸도 사라져버린다. 여자 없이는 그는 더 이상 살아갈 의미가 없으며, 돌아갈 곳도 없는 고독 그 자체가 되었다.

 

<열흘 밤의 꿈>은 나쓰메 소세키의 제법 유명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특이성은 우선 열흘 밤의 꿈 이야기로 작품이 구성되어 있으며, 게다가 각각의 꿈 이야기가 매우 모호하며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데 해득이 여의치 않다는 점이다. 프로이트의 저작이라도 읽었던 것인지 꿈과 무의식과 환상이 뒤섞여 꿈을 꿈으로만 볼 수 없도록 하고 있다. 꿈은 비합리와 비논리가 용납되는 시공간이다. 꿈은 현실도 아니지만 순전한 환상과 가상의 영역도 아니다.

 

각 꿈은 “이런 꿈을 꾸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책의 표제도 여기에서 빌려온 게 아닐까. 각 꿈은 죽음과 사랑, 귀신, 공포, 예술의 근본, 기원, 슬픔, 유혹 등이 희미한 색채를 띠면서 일본 전래의 설화적 이미지와 교묘하게 엮여져 있다. 이 작품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해석하려면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세계에 대한 선행적 탐구가 필요하다. 지금은 이대로 낯설고 생경하며 요령부득이고 허무맹랑한 느낌마저 드는 이 상태로 그냥 놔두련다. 연말 또는 연초 쯤 되면 소세키의 작품을 시작할 수 있을 차례가 된다. 그때 다시 이 작품을 펼치게 될 기회가 생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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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만 보는 바보 진경문고 6
안소영 지음 / 보림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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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책이다. 책을 시종일관 이끌어가는 화자가 이덕무인지 저자 안소영인지 알 수 없다. 안소영에 의탁한 이덕무 본인일까? 이덕무를 가장한 안소영 자신일까? 온화한 낯빛과 나직한 말투로 조곤조곤 풀어나가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어느 샌가 그의 어조에 흠뻑 빠져들고 만다. 흐뭇한 달빛에 취한 기분 좋은 술꾼의 심정이랄지. 눌변의 미학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책만 보는 바보란 이덕무가 스스로를 일컫는 말이다. 저자는 이덕무의 <간서치전(看書痴傳)>을 읽으면서 그토록 젊은 나이에 종일 책만 보는 처지가 될 수밖에 없는 그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사실로 문살을 반듯하게 짠 다음 상상으로 만든 은은한 창호지를 그 위에 덧붙여 문을 내보았”(P.7)다고 밝힌다. 저자는 이덕무를 주 인물로 한 팩션(faction)을 쓴 셈이다.

 

이덕무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였다. 국사책에 얼핏 스쳐지나가는 인물 정도, 그리고 <청장관전서>라는 저작물 이름. 이 책을 읽으면서 그나마 친숙한 연암 박지원과 담헌 홍대용의 제자이자 후배이며, 유득공과 박제가의 선배이자 친우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의 손자가 백과사전서인 <오주연문장전산고>를 쓴 이규경이라는 사실도.

 

이 정도에 그친다면 별로 주목거리가 되지 못한다. 세상에 드러나지 못한 채 초야에 묻힌 인재들이 어디 한둘인가. 이덕무는 조선후기 사가(四家)시인의 한 명으로 중국에까지도 성명을 날린 인물이다. 사가시인은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과 이서구를 지칭한다. 그만큼 시적 재능이 탁월함을 알 수 있다.

 

이덕무는 박제가, 유득공과 더불어 서얼의 신분이었다. 흔히 말하는 반쪽 양반. 양반이 아니기에 관직에 나아갈 수 없으며, 평민이 아니기에 농사나 장사를 할 수도 없는 (엄격한 신분제 하에서 그들은 이를 깨뜨리려는 시도를 감행할 수 없다) 어중간한 지위. 그래서 이덕무는 종일토록 책만 보며 나날을 보내는 외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조선시대에 선비가 책을 읽는 목적은 자기 수양 외에 치국(治國)에도 뜻을 두는데 연유가 있다. 자신의 재능과 학식을 세상에 쓸 수 없다면 얼마나 답답할 것이며, 현실적인 차원에서 가족의 생계는 어찌 마련할 수 있겠는가.

 

천만다행으로 그의 글에서는 양반의 고루함이 배어나오지 않는다. 스스로 고상한 척 잘난 체하지 않는다. 솔직하고 담백하게 사물을 바라보고 현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뜻과 마음만 통한다면 10년이나 어린 사람과도 기꺼이 친구 되기를 마다하지 않고, 존경하는 이에게는 몇 살 차이가 나지 않아도 스승으로 예우하기를 꺼리지 않는다.

 

이 책은 이덕무 개인만을 다루지 않는다. 그의 벗들, 박제가와 유득공, 백동수와 이서구는 물론, 그의 스승 홍대용과 박지원에 대하여 새삼 알게 해준다. <북학의><발해고>의 저자, <을병연행록><열하일기>의 작가라는 딱딱한 역사적 외피 아래 감추어진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고 뜨거운 피가 흐르는 우리와 똑같이 밥 먹고 숨 쉬는 인간으로서의 그들 말이다. 특히 서얼이라는 신분의 굴레가 그들에게 얼마나 고뇌와 절망을 안겨주었는지 절감하게 된다.

 

이덕무는 책을 눈으로만 읽지 않는다. 그는 책 속에서 소리를 듣는다. 책 속에는 사람의 목소리가 있다. 그림을 보듯 책을 보기도 한다. 책에서 풍기는 독특한 내음을 반가워한다. 그의 산문집 제목을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라고 붙인 것은 결코 한때의 치기나 우연의 소산이 아니다.

 

내용 곳곳마다 자신의 불우한 처지에 대한 탄식이 깃들어 있다. 반복되는 토로가 그저 개인적 신세 한탄에 머물지 않고 시대적, 제도적 변혁 요구의 당위성으로 연결되는 것은 이덕무와 그의 벗들이 연행 사신의 수행원이 되어 북경에 가게 되어 만나게 중국 선비들과의 교류이다. 조선 내에서는 불가능했던 일이 중국에서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어쩐 연유일까?

 

나라가 다르고 말씨가 다르고 옷차림이 다르고 풍습이 다른 것을 따지기보다는, 서로의 마음속에 담긴 생각을 먼저 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정작 같은 나라 사람들과는 사귀기가 쉽지 않았다. 신분이 다르다는 이유로, 나이가 많고 적다는 이유로, 가진 것이 있고 없다는 이유로, 서로가 속한 당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미리부터 사람들 사이에 금을 그어 놓았기 때문이다.” (P.150)

 

이덕무를 포함한 소위 백탑파(白塔派)와 북학파의 당대 지식인들이 그토록 여러 저작을 통해 구현하고자 한 사회의 미래 모습은 결국 현재보다는 좀 더 나아진 사회, 불평등과 불합리가 완화되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이다. 그게 어디 그들만의 꿈과 희망으로 치부될 수 있겠는가? 우리네가 지향하는 바도 과거와 다름없이 여전하다.

 

우리의 후손은 못난 조상처럼, 소중한 삶을 탄식과 분노로 오랫동안 소모하지는 않을 것이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노라면 스스로가 빚어 낸 삶이 희미한 빛을 낼 때가 있지 않을까.” (P.245)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정의한 학자가 있다. 우리가 옛 고전을 읽는 이유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책을 통해 우리는 옛사람들로부터 그들의 시간을 나누어 받기도 하며, 그들에게 우리의 시간을 나누어 주기도 한다.

 

옛사람과 우리가, 우리와 먼 훗날 사람들이, 그렇게 서로 나누며 이어지는 시간들 속에서 함께하는 벗이 되리라.” (P.250)

 

이덕무는 물론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역사 속 인물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덕무가 벗과 스승을 바라보는 한결같이 따뜻하고 우정과 존경이 깃든 마음과 태도는 활자를 뛰어넘어 여전히 가슴 뭉클한 감동을 안겨준다. 더불어 역사를 현재에 되살린 저자에게도 고마움을 느낀다.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자신들의 목소리로 직접 듣고 싶어졌다. 홍대용의 <을병연행록> 정도만 기억에 오롯하다. <발해고><북학의>도 예전에 읽었을 테지만 그들의 글과 시작(詩作)을 시간을 두고 천천히 다시 정독해 보련다. 특히 유득공의 <이십일도 회고시>를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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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3
다야마 가타이 지음, 오경 옮김 / 소화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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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표준 판형보다 약간 작은 크기의 책자에 120여면 남짓한 이 중편소설은 일본 근대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른바 일본 자연주의의 본격적인 발흥을 선포함과 아울러 그 성격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당대에 이 소설이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첫째 요인은 작가 자신의 사적 체험과 상념을 작품 속에 그대로 드러냈다는 점이다. 더욱이 그 숨겨진 사상이 통념적 도덕 감정에 어긋나는 성적 감상을 지니고 있다. 주인공의 지위에 기대되는 외면적 역할과 처신, 반면 내면적 감정과 본능은 전혀 상반된 지향을 욕망한다. 부조리한 내외의 갈등 구조가 작품 전개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작가와 작품을 동일시할 수 있는 소위 사소설은 근대 문학이 출발하는 백여 년 전이라면 매우 예외적이며 두드러지지만 현대에는 너무나 일반적이어서 별다른 언급조차 되지 않을 정도다. 게다가 유부남 또는 유부녀의 불륜, 남녀 간의 애정 삼각관계 등은 영화와 드라마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여 어린아이들조차 익숙한 상황이다. 소재 선택이나 표현 영역의 확장이라는 문학사적 의의를 떠난다면 현대 독자에게 자칫 소구할 점을 찾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요시코와 다나카의 연애를 둘러싼 대립적 인식, 그것을 보수와 근대 간 가치관의 갈등과 충돌로 보는 또 다른 독법도 있지만, 역시 당대 소설에서 상투적으로 드러나 그다지 참신성이 부족하다.


이 소설을 주인공 도키오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의 나이 삼십대 중반으로 어느덧 결혼한 지 8년, 아내는 셋째 아이를 임신 중이다. 신혼의 단꿈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고 그의 아내는 철저히 가정적이어서 작가인 남편과 생활사 이외의 대화나 정서적 교류는 없다. 작가로서도 별다른 진전이 없어 고민 중인 이때 도키오는 문득 존재론적 회의에 빠진다. 즉 나는 무엇이며 왜 사는가?


“자식을 위해 살고 있는 아내는 사는 의미가 있겠지만, 아내를 자식에게 뺏기고, 자식을 아내에게 뺏긴 남편이 어찌 삭막하지 않을 수 있으랴.” (P.76)


“서른 대여섯 살의 남자가 가장 많이 맛보는 생활의 고통, 일에 대한 고민, 성욕으로부터 생기는 불만족 등이 무서운 힘으로 가슴을 압박했다.” (P.88)


삶의 의욕과 활기를 상실해가고 있는 중년의 남성에게 문득 다가온 갓 스물의 꽃다운 여성. 요시코는 단순히 제자가 아니라 도키오에게 생의 활력과 아름다움을 고취시키는 존재이다. 그런 요시코를 도키오가 사랑하게 됨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당사자 사이의 관계는 물론이고 도덕적으로도 그의 사랑이 실현되기는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사랑과 아쉬움과 질투심과 회한이 휘몰아쳐 그는 끝없는 번민과 고뇌에 빠진다. 


그가 자신과 가정을 지키는 유일한 길은 그녀를 떠나보내는 선택 외에 달리 없다. 그녀가 떠난 후 그의 일상은 암울한 과거로 회귀한다.

“쓸쓸한 생활, 황량한 생활이 다시 도키오의 집에 찾아왔다. 아이들을 주체 못하여 떠들썩하게 야단치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 도키오에게 불쾌감을 주었다.” (P.124)


도키오가 요시코가 머물던 방에 올라가 그녀의 이불을 꺼내는 대목이 소설의 끝장면이다.


“여자의 그리운 머릿기름 냄새와 땀 냄새가 말할 수 없이 도키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요기의 비로드 동정이 눈에 띄게 더러운 곳에 얼굴을 갖다대고, 마음껏 그리운 여자의 냄새를 맡았다.


성욕과 비애와 절망이 홀연히 도키오의 마음을 엄습했다. 도키오는 그 요를 깔고, 요기를 덮고, 차갑고 때묻은 비로드 동정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어두컴컴한 방, 집 밖에는 바람이 거칠게 불고 있었다.” (P.126~127)


혹자처럼 중년 남자의 추악한 성욕이라고 매도하지 말자. 사랑을 포기하고 어쩔 수 없이 현실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외로운 중년 남성의 처절한 몸짓이 여기에 드러나지 않는가. 이 장면에서 울컥, 짙은 동정의 상념이 배어 나옴은 나 역시 도키오처럼 가정의 안녕과 평온을 위해 개인적 욕구를 희생해야 하는 중년의 동병상련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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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선생
다야마 가타이 지음, 김욱송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다야마 가타이는 일본 근대 자연주의 문학사조를 대표하는 작가로 인정받고 있으며, <이불>이라는 작품이 특히 유명하다. 이런 관점에서 자연주의에 대한 반감을 가진 이가 작가와 다른 작품들을 섣불리 재단하면 낭패를 볼 수 있음을 이 <시골선생>은 깨닫게 한다.


자연주의 사조는 인간의 고상하고 아름다운 면뿐만 아니라 추악하고 숨기고 싶은 모습마저 여과 없이 묘사해야 진정한 인간의 전모를 제대로 구현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이해된다. 원론적으로는 옳은 주장이지만, 자칫하면 우리가 소설을 읽는 원초적 동기와 소설이 인간 문화와 정신 영역에서 차지하는 지위를 과도하게 확대 해석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이 <시골선생>을 무리해서 자연주의로 규정할 당위성은 없다. 이 작품이 통상적 의미의 자연주의 범주의 하나라면 자연주의에 속하지 않는 작품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중학교를 졸업한 청년 하야시 세이조는 어려운 가정형편 덕분에 친우들과는 달리 시골학교 교사를 직업으로 택한다. 잠재된 꿈과 야심을 갖고 있지만 환경적 장애는 그를 점점 의기소침하게 하고 도덕적으로도 방황하게 된다.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다시금 교사로서의 삶에 매진하려고 하지만 심각해진 폐병으로 끝내 숨을 거둔다.


내용 자체는 지극히 비극적이며, 암울한 분위기가 작품 전편을 휘감을 것으로 충분히 예상되는 반면, 독자는 작품 분위기가 어둡기는커녕 밝고 의외로 담담한데 놀라게 된다. 분명 작가는 세이조의 답답한 심경에 대해, 나아지지 않는 형편에 관해 반복적으로 토로하고 있지만, 그것이 독자에게는 그다지 슬프고 침울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공언된 심각하고 진지한 기술과는 달리 언뜻 작중 인물의 상황은 이렇단다...하고 남의 이야기를 전언하듯 가볍게 지나치는 듯한 작가의 암묵적 의도가 엿보인다면 완전한 오독일까. 그만큼 주인공의 심경에 작가는 의식적으로 몇 발짝 떨어져서 관조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작가가 공감과 공명하지 않는 작중 인물의 행동과 태도는 그래서 창밖을 통해 바라보는 행인만큼이나 낯설고 간접적 존재로 간주된다.


가타이는 작품의 주된 배경인 사이타마 현의 자연묘사에 더욱 매력을 느낀 듯하다. 강과 들판이 어우러진 정경, 각종 꽃과 나무들에 대한 낱낱의 언급을 통해 당대 일본 전원의 풍경이 얼마나 아름답고 매혹적인지 백여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도 눈앞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작중 주인공은 세이조가 아니라 오히려 자연이 아닐까 의문시되기도 할 정도다. 여기에 시골사람들의 소박하면서 일상적인 삶의 풍속과 자취를 가감 없이 묘사하여 당대 일본의 시골 풍속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연주의 사조의 작품들이 대개 비정하고 냉혹한 것으로 치부된다면, 이 작품은 대척점을 이루는 다른 의미에서의 자연주의 흐름에 해당한다. 감상적 자연주의 내지 낭만적 자연주의 정도로. 작가가 여기에서 드러내는 것은 거창한 삶의 드라마와 투쟁이 아니다. 세이조가 처음에 비웃었던 시골사람들의 삶, 나날을 영위하고 자신들이 알고 가진 한도 내에서 성실하게 일생을 꾸려나가는 생활. 그것을 나중에 세이조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를 세이조의 의식의 퇴행으로 해석하지 말자. 


청년이라면 가슴 속 한켠에 나름의 야망을 품고 있다. 실현가능성과 관계없이 꿈을 가지고 있는 한 그는 행복하다. 꿈을 위해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갈 수 있다면 더욱 더 행복한 반면, 외부적 요인에 의해 꿈의 실현이 억제될 때 그는 무한한 절망과 아픔을 느끼게 된다. 세이조는 친구들의 전진을 기뻐하면서 비교하여 자신의 처지를 한층 슬퍼한다.


“친구의 성공을 축하하는 편지를 쓰던 중 세이조는 책상에 엎드려 자신의 불행을 생각하며 울지 않을 수 없다.” (P.131)


“세이조의 마음은 쓸쓸했다. 자신이 처한 환경은 실제 생활에 있어서도, 연애에 있어서도, 학업에 있어서도 점점 더 소극적으로 기울어지게 만들었다.” (P.165)


세이조는 풍금을 열심히 연습하여 도쿄의 음악학교에 지원하나 한계를 절감한다. 다소간의 문필적 재능이 있지만 뚜렷이 인정받을 수준은 되지 못한다. 스케치북에 자연을 그리는 걸 좋아하고, 생의 후반기에는 화초 표본 분류에 열의를 쏟기도 한다. 그는 특출한 재능을 지닌 청년이었던가. 아마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다소간 똑똑하며 자의식을 강하게 느끼는 평범한 청년이라는 것이 냉정하지만 오히려 적확한 평가에 가깝다.


그는 오규처럼 쉽사리 현실을 인정하고 수용하지 못한다.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되 현상에 함몰되지 않으며, 공상과 지나간 꿈에 연연하여 현실을 방랑하지 않아야 한다. 실제에 단단히 다리를 세운 채 일상에서 조금씩 전진을 도모할 수 있다면 그것도 의미 있는 삶이다, 오규의 생활처럼. 세이조는 병이 심해지고 나서야 친구의 진가를 알게 된다.


“예전에 이 친구를 평범하다고 본 것은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아직 미숙했던 탓이다. 오규에 비하면 나는 세상 물정도 많이 모르고 인정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오바타나 이쿠지와 이 친구를 비교해보니, 지금 처음으로 평범함의 위대함을 알게 되었다.” (P.286~287)


우리는 시골이라는 어휘에 모호한 금빛 색채를 부여한다. 시골을 전원과 동일시하고, 속세를 벗어난 초탈의 외피를 덧씌우고 스스로 황홀해한다. “청렴하고 이상적인 생활을 하며 자연의 평온한 품에 안겨 사는 곳이라고 생각했던 시골도 역시 전쟁터이며 사리사욕에 물든 세상이라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되었다.” (P.195) 어딘들 사람들이 사는 곳이 그러하지 않겠는가. 이를 외면하고 부정한다면 그는 스스로 세상과 불화하고 소외되는 삶을 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현실을 긍정하고 소위 건전한 삶과 대조적인 삶의 방식이다. 세이조가 소학교가 위치한 동네를 마다하고 멀리 떨어진 절에서 살거나 아니면 학교 당직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방식은 스스로를 현실에서 격리시키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가 처음부터 시골마을에서 마을 주민들과 더불어 사는 길을 갔더라면 자발적 유폐와 고립의 길을 걷지 않았을 텐데.


죽음에 임박하여 새삼 자신과 현실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을 때 종전에는 나태하고 한심하게 보였던 사람들의 일상적 행동과 사고가 자체로서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답고 뜻 깊은 것인지 세이조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하뉴로 이사하여 가족이 다시 재회하게 된 날, 이웃에서는 새우튀김과 생선구이를 선물로 가져왔다. 집주인은 낚시와 나무 가꾸기를 좋아하는 재미있고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예전의 세이조라면 오뉴의 가치와 더불어 결코 알아차리지 못하였을 소소한 미덕들이다. 


작가의 <이불>이 워낙 당대에 파격적 논란을 불러온 연유로 그에 대해 과다하고 불필요한 선입견이 덧씌워지게 되었다. 이전 작품에서 그의 작품 경향이 대체로 감상적이고 서정적이었던 점과, 이 <시골선생>의 표현과 문체상 특징을 유추해 볼 때 단일한 사조로 치부해 버린다면 그의 작품세계의 여러 뛰어남을 크게 놓치게 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 20세기 초라는 시간적 배경과 근대 일본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감안할 때 작품 말미에 두드러지는 군국주의 일본에 대한 동시대인으로서의 자찬은 불가피성을 인정하더라도 씁쓸함을 안겨준다. 만주 진출을 당연시하고 애국적 색채로 포장하며, 러일전쟁의 승리를 강대국 세계의 당당한 일원으로 진입하였음을 찬미하는 사실은 작품 전체의 성격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아 오히려 기묘함을 안겨준다. 작가의 진정한 의도는 죽어가는 세이조가 드러내듯이 군국적 전체주의에 휩쓸려 들어가는 일본에 국민으로서 기여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한탄인가, 아니면 세이조의 죽음과 당대 군국주의의 비인간적이고 몰인정한 현실을 선명한 대조를 통해 뚜렷하게 부각하여 비판하고자 하는 작가의 치밀한 노림수인지 이 한 편만으로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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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새 지만지 희곡선집
모리스 마테를링크 지음, 이용복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의외의 작품에 뒤통수를 맞는 격이 있다. 잘 알지 못하던 작품을 접하고 신선한 충격을 받는 사례가 그것이며,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여 등한시하거나 짐짓 무시하던 작품을 정독하다가 자신의 오만과 무지에 탄식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마테를링크의 <파랑새>가 내게 후자의 뒤통수를 안겨주었다. 이 자리를 빌려 나의 천견(淺見)에 사과를 바친다.


<파랑새>라는 작품은 어지간한 유치원생도 알고 있다. 비록 동화로 압축되어 번안되었지만 치르치르와 미치르가 파랑새를 찾아 헤매다가 깨어보니 자신들의 새가 바로 파랑새였다는 사실의 기본 줄거리는 변함없다. 그래서일까. 행복은 가까운데 있다는 상투적이며 진부한 교훈과 식상한 줄거리 등 전형적인 아이들 동화로 여겨져 원작을 읽어볼 생각조차 품어보지 않았다.


일단 동화는 잊자. 원작은 아동극의 형식을 취했지만 전 6막 구성의 당당한 희곡이다. 치르치르와 미치르도 잊자. 이들의 원래 이름은 틸틸과 미틸이다. 책을 펴들고서 등장인물 소개에서 익숙한 두 이름이 나오지 않아 잠시 당황스러웠다. 우리네 문화에서 일본의 잔재와 영향이 얼마나 심대한지 여기서도 알 수 있다. 


1. 인간과 자연(혹은 영혼)


가장 놀랐던 점은 등장 캐릭터 간의 화합할 수 없는 대립구도다. 틸틸과 미틸, 개와 빛이 인간계의 입장이라면, 고양이와 밤, 나무들은 전형적인 반인간계 편에 서 있다. 특히나 고양이의 교묘한 처세가 눈길을 끈다. 반인간계에서는 인간들이 파랑새를 입수하는 것을 극구 저지하려고 한다. 


“여기 있는 모든 이들, 동물과 사물 그리고 원소들은 인간이 아직 알지 못하는 영혼을 지니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조금 남아 있는 독립이나마 지키는 거예요. 하지만 인간이 파랑새를 발견하게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고, 모든 것을 보게 될 거예요. 그럼 우리는 완전히 그의 손아귀에 들게 돼요.” (P.43, 고양이)


“우리는 모두 이름 없는 독재의 희생자들이 아닌가요? 독재자가 오기 전에 우리가 자유롭게 이 땅에서 살던 시절을 기억해 봐요.” (P.45, 고양이)


그들은 인간은 자신들의 적이라고 확실히 단언한다.


“그 애는 태초 이래 당신들이 인간에게 숨겨온 파랑새를, 유일하게 우리의 비밀을 알고 있는 파랑새를 찾고 있어요.” (P.89)


나무들과 고양이는 마침내 두 어린 인간을 죽이려고 한다. 두 주인공은 개의 도움으로 치열한 싸움 끝에 겨우 구사일생하게 된다.


2. 파랑새의 의미


여기서 파랑새의 의미가 동화와는 다른 뉘앙스를 갖는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파랑새는 그 자체로서 목적적 중요성을 지니기 보다는 일종의 수단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떡갈나무의 대사가 이를 입증한다.


“넌 파랑새를 찾고 있지. 말하자면 인간들이 우리를 보다 가혹하게 지배하기 위한, 사물과 행복에 대한 커다란 비밀 말이지.” (P.96~97, 떡갈나무)


“생명이 시작된 이래로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비밀도 빼앗아갈 수 있소... 그런데 우리는 인간을 잘 알기 때문에 그가 이 비밀을 소유하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 가할 운명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있소.” (P.98, 떡갈나무)


작가 자신은 파랑새의 의미에 대해서 철학서적 한 페이지보다도 번역이 어려울 것이라고 일찍이 밝혔다. 파랑새의 의미가 그렇게 상투적으로 이해되기 어려움을 암시하는 것이다. 고양이와 밤과 나무들이 극력 결사적으로 이들을 가로막은 것도 단순한 반감이 아니라 자신들의 비밀을 뺏기고 완전히 지배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파랑새는 비밀을 여는 열쇠인가?


인간들이 파랑새를 소유하게 되었을 때 어떤 현상이 생길 수 예상할 수 있는 단초가 여기에 있다. 남매는 요정의 도움으로 다이아몬드 모자를 얻게 되고 다이아몬드를 돌리면 그들이 “눈을 뜨게”(P.25) 한다. 작가의 전작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에서도 ‘보다’라는 의미가 외면상 시각적 차원을 넘어서서 내면과 본성, 미래와 운명을 읽을 수 있음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3. 참된 인식으로서의 보기


요정은 남매가 보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그들이 눈을 뜨게 되자 사물 속의 영혼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눈을 감으면 다시 종래대로 돌아간다.


“환상적이지, 반대로... 그럼 즉시 사물 속에 있는 것을 보게 된단다.” (P.25, 요정)

“우린 이제 사물들의 진실을 보고 있어.” (P.135, 빛)

“멀리 가지 않아, 얘들아. 저기, 사물들의 침묵의 세계로...” (P.187, 빛)


눈을 뜬 남매에게 나무들처럼 자연과 사물의 영혼들은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 


“아니야, 그들은 항상 그래.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알지 못하지. 왜냐하면 보지 못하니까...” (P.111, 빛)


인간은 실상 적대적인 존재에 의해 포위된 삶을 살고 있다. 단지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홀로 모든 것과 대면하고 있다는 걸 잘 알았지...” (P.111, 빛)


4. 행복을 다시 생각하다


남매는 행복의 정원에서 다양한 유형의 행복과 마주친다. 나무들의 공격에서 생사의 고비를 겪은 만큼 그들에게 행복이 주는 기쁨은 남다를 것이다. 빛은 그들에게 정원 바로 옆에 불행의 동굴이 있음을 상기시키며, 행복이 반드시 좋고 바람직한 것만은 아님을 상기시킨다.


“일반적으로 행복들은 아주 친절하지만 몇 명은 가장 커다란 불행보다 더 위험하고 더 사악하단다.” (P.124, 빛)

“두려워하고 또 행복하지 않은 행복들도 많이 있으니까.” (P.125, 빛)


행복 중에서 가장 뚱뚱한 행복은 자신들의 형제를 소개하는데, 허영심이 충족되는 행복, 목마르지 않을 때 마시는 행복, 배고프지 않을 때 먹는 행복,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행복, 상스러운 웃음 등이다. 


“저들은 위험해. 그리고 네 의지를 꺾어버릴 거야. 우리가 수행할 의무를 위해 뭔가를 희생할 줄 알아야만 해.” (P.129, 빛)


이것들이 위험한 이유는 위와 같다. 이는 제1장에서 요정이 존재들에게 화를 낸 연유와 유사하다. 바로 현실 안주!


“이런 참 바보들이군! 어리석고 겁쟁이들이야! 너희들은 파랑새를 찾으러 가는 아이들을 따라가기보다는 너희들의 보잘것없는 그릇 속에서, 마룻바닥 문 속에서, 수도꼭지 안에서 계속 사는 것을 더 좋아하지?” (P.34, 요정)


빛은 남매에게 진실하고 순결하고 참된 행복의 의미를 발견하게 한다. 


“사람들은 지상에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행복을 만나지.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하고 있어...” (P.136, 빛)


그리고 만나는 행복의 무리는 그들에게 행복이 멀리 있지 않음을 바로 일상의 주변에 널려 있음을 가리킨다.


“너의 집에 행복이 있냐고! 불쌍한 녀석! 집은 문과 창문들이 터질 정도로 행복으로 가득 차 있는데! 


건강하게 지내는 행복, 맑은 공기의 행복, 부모를 사랑하는 행복, 푸른 하늘의 행복, 숲의 행복, 태양이 빛나는 시간의 행복, 광란하는 에메랄드 빛의 봄의 행복, 석양의 행복, 별들이 뜨는 것을 보는 행복, 진주로 덮인 비의 행복, 겨울날의 불의 행복, 순진무구한 생각의 행복, 이슬 속에 맨발로 뛰어가는 행복 등등.


그리고 행복과 함께 커다란 기쁨들이 어울린다. 여러 기쁨 중에서 가장 순결한 기쁨은 모성애라는 기쁨.


행복과 기쁨의 원리는 망자의 세계에도 적용된다. 추억의 나라로 돌아가 보자.


“너희들이 생각으로 우리를 방문할 때 그게 우리의 유일한 기쁨이고 굉장한 축제가 된단다! 

우린 즐거운 일들이 달리 없단다...” (P.63, 할머니 틸과 할아버지 틸)


나중에 틸틸과 미틸이 꿈에서 깨었을 때 자신의 집이 어제와 마찬가지이지만 훨씬 아름답다고 느끼게 된 것은 그들이 행복의 진의(眞意)를 깨우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함을 느낀다.


“난 정말 행복해, 행복해, 행복해! 

나도 역시, 나도 역시!

......

이런! 이 모든 것들이 너무 예뻐. 그리고 난 정말 행복해!” (P.198, 틸틸과 미틸)


마지막으로 한 가지 상념을 더 언급하련다.


인간들이 제대로 보게 되고 참된 행복의 의의와 가치를 찾게 되는 것은 나무들을 비롯한 존재들에게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인간들은 사물들을 좀 더 존중하고 제대로 대우하지 않겠는가.


여기에는 인간에 대한 오래되고 깊은 불신이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가정과 사회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자연과 사물에 정복자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인간은 지배자이고 만물을 전횡할 수 있는 절대적 권력자이며, 만물은 단순한 대상이자 도구에 지나지 않게 간주하였다.


인간들의 본성에 커다란 변화가 생기고 개심하여 개과천선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만물이 진정한 가치와 영혼을 알아볼 리가 없겠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만물의 입장에서는 결코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함은 지극히 당연하다. 이러한 시각에서 나무들의 필사적인 공격을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홀로 모든 것과 대면하고 있다는 걸 잘 알았지...” (P.111, 빛)


빛의 말마따나 인간은 세상에 홀로 선 존재다. 밤의 한탄도 다소간 이해된다.


“몇 년 전부터 난 더 이상 인간을 이해하지 못해. 어쩌자는 거지? 모든 걸 다 알아야만 한단 말이야? 인간은 벌써 내 신비의 3분의 1을 알아차렸어.” (P.69, 빛)


인간은 과학기술의 개발로 더 이상 자연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예전에는 일출과 일몰이 인간의 활동 시간을 한계 지었는데 전등이 개발되면서 더 이상 밤은 인간에게 공포의 시간이 아니다. 개는 다른 동물에게서 인간을 지켜주었고, 빛은 인간에게 밤을 물리칠 수 있게 해주었다. 다른 사물들이 개와 빛을 인간과 한편으로 간주하는 것은 당연하다.


“빛은 인간 편에 섰어요, 그녀는 우리의 가장 위험한 적이죠.” (P.45, 고양이)


틸틸과 미틸의 파랑새를 찾기 위한 꿈속 모험은 결국 실패로 끝난다.


“추억의 파랑새는 검게 변했고, 미래의 파랑새는 온통 붉게 되었어요. 밤의 파랑새는 모두 죽었고, 숲의 파랑새는 잡을 수가 없었어요.” (P.180~181, 틸틸)


그럼에도 모험은 성공하였다. 파랑새는 구하지 못했지만 파랑새의 의미를 찾는 데는 성공하였다.


“넌 저기에서 네가 나를 볼 때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깨닫고 또 배우기 위해 이곳에 온 거야......우리가 서로 안아주는 곳이면 어디나 다 천국인 거야.” (P.147~148, 모성애)


마지막 장면의 매우 시사적이다. 그들은 파랑새를 놓쳐버렸다. 소녀는 새가 떠났다며 절망의 비명을 지르지만, 미틸은 의외로 담담하고 대범하다. 그는 관객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데, 이는 이미 깨달은 자의 어조다.


“혹시 누군가가 그 새를 발견하면 우리에게 돌려주시겠죠? 우린 나중에 행복해지기 위해 그 새가 필요하거든요.” (P.201, 미틸)



※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삶에 대한 태도는 낙관적이고 희망적이지 않은 듯하다. 인간을 둘러싼 사회와 운명의 엄혹성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인식이 여전히 이 극작품을 감싸고 있어 아동극의 외피를 무색케 한다.


첫째, 제1장에서 부잣집 아이들 집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는 장면을 엿보면서 남매가 주고받는 대사


미틸: 저 애들은 왜 금방 먹지 않지?

틸틸: 배고프지 않으니까...

미틸: (놀라서) 배고프지 않아? 왜?

틸틸: 먹고 싶을 때 먹으니까...

미틸: (믿지 못하며) 매일?

틸틸: 그렇다고 해... (P.17, 틸틸과 미틸)


둘째, 제10장 미래의 왕국에서 내년에 동생으로 태어날 아이와의 대화


틸틸: 가방에 뭘 가지고 있지? 우리에게 뭘 가져왔니?

아이: (매우 자랑스럽게) 난 세 가지 질병을 가져왔어. 성홍열, 백일해, 홍역...

틸틸: 그게 전부라면! 그럼 다음에는 뭘 할 거니?

아이: 그 다음에는! 떠날 거야...

틸틸: 오는 건 정말 고통이겠구나!

아이: 선택의 여지가 있어? (P.167, 틸틸과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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