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미 교카의 검은 고양이 일본명작총서 13
이즈미 교카 지음, 엄인경 옮김 / 문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이즈미 교카의 초기 작품을 모은 책이다. <살아있는 인형>은 1893년, <야행순사>와 <검은 고양이>는 1895년 작으로 이십대 초반의 무르익지 않은 풋풋한 교카를 접할 수 있는 기회라고 하겠다.


일단 초기작이므로 잘 짜여진 구조라든지 깊이 있는 통찰 또는 정교한 언어 표현 등에서는 아무래도 중기 이후의 작품들에 비하면 열세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작품 시기 초반의 교카는 다양한 장르 실험을 시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괴기와 환상 풍의 이야기, 일본 전통의 제재 등 교카의 트레이드마크는 아직 전형화 되지 못하였다. <살아 있는 인형>은 탐정소설이며, <야행순사>는 관념소설로 분류된다. <검은 고양이> 정도가 훗날 교카의 본령에 가깝다고 하겠다.


<살아 있는 인형>은 탐정소설적 관점에서는 다소 미흡한 점이 드러난다. 장르적 뿌리가 서구 사회에 기반을 둔만큼 일본 사회의 시각에서는 탐정의 존재와 지위가 애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목할 점은 아카기 저택이 마을 사람들에게 요괴가 사는 집, 유령집 등의 호칭으로 불린다는 데 있다. 아무리 젊더라도 교카는 교카인 것이다. 


현실과 주인공의 관념이 갈등과 충돌을 빚을 때, 관념과 의지를 극단적으로 추구할 경우 인물의 말로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누구나 특정 상황에서는 대치되는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을 겪게 된다. <살아 있는 인형>의 시즈에도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 가출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가문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와 사명감은 그녀를 아카기의 감금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결과에 이르렀다. 탐정 다이스케도 시즈에를 구할 것인가 범인을 체포할 것인가 사이에서 고민한다.


“아아, 공무와 인정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정과 공무를 둘 다 받들기는 어렵다. 만약 공무를 택한다면 인정을 버려야 하고, 인정을 따르면 공무를 버리게 된다.” (P.110)


<야행순사>의 핫타 순사가 늙은 인력거꾼과 젖먹이가 딸린 거지 여인에게 대하는 태도를 봐서 공무상 인정을 기대하기 힘든 인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공무를 택한다. 그가 맞닥뜨린 극단적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으며 자신의 육체적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는 경우에도 여전하다. 그의 사후 사람들은 그를 인의롭다고 칭송하지만, 기실 그는 순사로서의 직무상의 책임, 즉 책무에 고지식하게 얽매여 죽음을 자초한 것에 불과하다. 관념은 현실에서 추출하여 현실을 비추는 사고이지 현실을 재단하고 현실보다 우월한 존재가 아님을 사람들은 곧잘 망각하고는 한다. 이데올로기를 생(生)에 우선시할 때 생기는 병폐가 무엇인지 우리는 역사에서 충분히 찾을 수 있다.


<검은 고양이>의 어둡고 괴기스러운 분위기와 동시에 어처구니없는 결말로 이어지는 플롯은 작가가 단편 속에 서로 엇갈리는 아이디어와 복선을 여럿 삽입한 데서 연유한다. 맹인 도미노이치가 오사요에게 품은 집착에 가까운 사랑, 오사요가 보여주는 검은 고양이 구로에 대한 과도한 애정이 작품의 한 축을 이루는 갈등 구조이다. 반대편에는 화가 슈잔과 오시마와 오사요 간의 사랑의 삼각관계가 잠복해 있다. 


맹목적 사랑에 인성마저 파멸해가는 맹인과 그의 저주. 검은 고양이 구로의 표변은 저주의 결과로 도미노이치의 악령이 깃든 것인가 아니면 오사요의 변심에 따른 동물적 분노의 단순한 표출인가. 오시마가 도미노이치를 돕는 장면에서 보여주는 냉혹하며 호탕한 여장부로서의 면모는 자신과 오사요가 사실은 같은 처지임을 깨닫는 순간 허물어지면서 오히려 맹인에게 애원하는 연약한 장면과 극단적 대조를 보여 실소와 허탈을 자아내기조차 한다.


어쨌든 작중 검은 고양이는 결국 도미노이치의 원혼으로 판정되고 악마의 사자로서 최후의 전력을 다하다가 칼에 찔려 죽게 된다. 악역을 맡은 인물과 동물이 모두 사라졌으니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살아남은 공인된 커플 오사요와 슈잔은 행복할까? 작가는 살포시 의문을 드리우면서 결말을 맺는다. 


사람들 간에 갈등과 증오가 발생하고 증폭되는 과정에는 사랑과 욕망의 미비와 실패에 따른 왜곡이 개입된다. 적절한 지점에서 욕망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만족할 줄 아는 것은 개인은 물론 사회 차원에서도 안녕과 평화의 출발이다. 도미노이치의 오사요에 대한 사랑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지위와 처지를 감안하여 발생 여부를 조절하게 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맹인은 사랑을 넘어서 욕망의 실현에 집착하면서 사건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핫타 순사의 연인 오코의 큰아버지의 비뚤어진 복수도 결국 사랑의 왜곡에서 출발한다. 


교카는 어린 시절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면서 모성에 대한 그리움의 상념을 항상 품고 있었다고 한다. 이 작품집에 나오지 않지만 교카의 작품세계에는 게이샤가 매우 비중 있는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다. 이는 작가가 후에 게이샤와 결혼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세 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의 살펴보는 것도 꽤나 흥미로울 것이다. 한 가지 공통점은 이들은 연약하지만 외부의 물리적 억압과 위협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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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실 기담문학 고딕총서 7
이즈미 교카 지음, 심정명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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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수록작>
1. 고야성(高野聖)
2. 외과실
3. 눈썹 없는 혼령
4. 띠가 난 들판

 

2007년 이즈미 교카 작품집으로는 국내에서 처음 출간된 책이다. ‘기담문학 고딕총서’의 일편으로 나왔으므로 작가의 삼백여 편 중 괴기성과 환상성이 두드러진 작품을 골랐다. 그런 면에서 <외과실>은 기획의도에 썩 부합하지는 않는다.

 

<고야성(高野聖)>은 문학동네 임태균 번역본에 대한 졸평을 참조 바라며 건너뛴다.

 

<외과실>은 <야행순사>와 더불어 1895년에 발표된 교카의 사실상 문단 데뷔작이다. 매우 짤막한 작품으로서 과감한 생략과 함축적 표현 기법을 사용하여 완독 후에도 뉘앙스가 명확히 다가오지 않는다. 그의 초기작은 관념소설로 평가받는다. 주인공의 직무와 윤리 등의 관념이 사랑과 현실 등과 충돌을 일으켜 결국 주인공의 죽음 또는 파멸로 이어지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작품에서 외과의사 다카미네와 백작부인은 젊은 시절 공원에서 우연히 단 한번 스쳐지나간 적 밖에 없다. “진정한 아름다움이 사람을 움직인다는” 말과 같이 한 번의 조우만으로 그들의 내심에는 상대에 대한 강한 연모의 정이 뿌리박혔다. 자식과 남편이 있음에도 연모의 마음을 놓지 않은 백작부인,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내밀한 언사를 드러낼까봐 절체절명의 수술에서 마취를 거부한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은 나를 모르겠지!” (백작부인)
“잊지 않았습니다.” (다카미네)

 

두 사람의 세상에는 오직 둘만이 존재하였다. 그들 외에 다른 사람은 안중에 들어오지 못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한날 세상을 떠났다.

 

<띠가 난 들판>은 1911년 중기의 작품이다. 수년 전 시리즈로 나왔던 <데스티네이션>이라는 영화가 있다. 극중 주인공은 운명에 의해 죽음이 예정되었다. 제아무리 회피하고 저항하려고 발버둥 쳐 봤자 맹목적인 운명의 무자비한 힘은 그를 끝내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더위에 지쳐 새벽에 깨어난 다다키치가 이야기를 나누게 된 빈집인 뒷집의 여인이 그렇다. 만삭인 그녀는 정원 산책 중 넘어져 사산을 하고 자신도 몸이 불편하게 된다. 이때부터 꽹과리를 치는 약장수 중이 기분 나쁘고 집요하게 그녀 주위를 배회한다, 병원에 실려 갈 때까지. 병원에서는 죽음의 망령이 침대 옆 공중에서 그녀를 지켜본다. 그녀에게 죽음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면서. 망령은 잠시 그녀를 떠나는 듯하지만 종내 다시 돌아온다.

 

“너 참 끈질기구나, …… 우선 다른 데로 가겠다.”
“너, 아무래도 다시 왔어…….”

 

그 섬뜩한 커다랗고 검은 손은 다다키치 보는 앞에서 드디어 목적을 달성한다. 여인의 운명은 결국 그리될 것으로 정해졌던 것이었다.

 

<눈썹 없는 혼령>은 1924년 작으로 후기작 중에서는 비교적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서두가 <초롱불 노래>와 마찬가지로 짓펜샤 잇쿠의 <도카이도 도보 여행기>를 인용하며 시작하여 흥미롭다. 주인공 사카이가 나라이에서 묶는 동안 일본의 여관 생활과 문화의 멋과 재미를 잔잔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들려주고 있다.

 

사카이와 여관 주방장의 대화는 신비와 기이에 대한 작가 자신의 의견이나 진배없으며,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암시다.
“이 심산유곡에서 일어나는 일은 인간의 지혜로는 못 미치지요.”

 

아무도 없는 여관 별채 목욕탕에서 낯선 여자의 목욕소리가 잇달아 들린다. 방에서 눈썹을 민 낯선 여인의 혼령이 화장을 하는 장면을 비몽사몽간에 목도한다. 이후 소설은 여관 주방장의 이야기로 묘하게 진행된다. 화가의 간통 사건이 벌어지면서 도라지 연못의 눈썹 없는 혼령과, 화가를 찾아온 정부 오츠야의 이미지는 중첩된다. 화장을 마친 오츠야의 모습은 도라지 연못의 여인과 자매간으로 보일 정도로 비슷하다. 두 여인은 화장 후 “어울립니까?”하고 묻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보인다.

 

여관방에서 사카이가 마주친 것은 도라지 연못의 혼령인가 아니면 마물로 오인 받아 총에 맞은 오츠야의 원혼인가? 전자와 후자는 상이한 존재인가 아니면 동일한 현상의 발현인가? 여기서 작가는 혼령과 여인의 이미지를 교묘하게 뒤엉키게 제시하여 독자를 혼란 속으로 의도적으로 몰고 간다. 마지막에 두 사람이 목격한 오츠야와 초롱을 든 주방장 자신이 다가오는 장면과 역시 “어울립니까?”하는 섬뜩한 물음은 등장인물뿐만 아니라 독자의 등골마저 오싹 전율하게 만든다.

 

어쨌든 나름대로 교카의 판타지풍의 작품세계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시기별로 적절히 안분하여 수록작을 고심하여 선별한 투가 역력하다. 하지만 천려일실(千慮一失)! 교카 소개를 위하여 고른 배분에 주력하다 보니 <고야성>을 제외하면 그를 대표할 만한 뛰어난 작품성의 소설을 담는 데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온라인서점의 서평의 엇갈린 평점은 이를 말해 준다. 출간에 대한 찬사와 작품 선정에 대한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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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산 스님.초롱불 노래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3
이즈미 교카 지음, 임태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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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일본은 개항 후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그네들은 근대화는 곧 서구화이며, 궁극적으로는 당당한 서구 열강의 일원이 되는데 있었다. 문학예술에 있어서도 근대 문학은 서구 지향적이었음은 당연한 것으로서 리얼리즘, 곧 사실주의 나아가서 자연주의가 근대 일본문학의 주류가 되었다.

 

주류가 있으면 비주류가 있게 마련이다. <오층탑>의 고다 로한이 길을 개척하고 이즈미 교카가 전면적으로 확장시킨 일파가 여기에 해당한다. 일본 고유의 전통 문화를 존중하고 받아들이면서, 사실 못지않게 상상과 환상의 영역에 대한 중시가 이즈미 교카 문학의 전형적인 특성을 이룬다. 교카가 사실주의를 강조한 오자키 고요의 열렬한 문하라는 점이 이채롭다.

 

교카에 대한 문학적 평가는 당대보다도 후대에 점점 높아지고 영향력도 더 커지는 현상을 보인다. 각박한 현대 도시문명 속에서 사람들은 긴장의 끈을 풀고 마음과 정신이 숨 쉴 수 있는 여지를 간절히 갈망하고 있다.

 

<고야산 스님>은 1900년에 발표한 작품으로서 작품 활동 초기의 대표작이다. 일본 중부 와카야마 현의 고야산에 있는 절의 스님이 화자에게 들려준 이야기로서 단순 액자소설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 액자소설의 성격상 액자 내에서 진행되는 이야기가 핵심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에는 유독 요괴, 괴수, 도깨비 등과 같은 초자연적 존재들이 많이 나타난다. 단순히 민족성 또는 취향의 문제로 치부해버리면 간단하지만, 잠시만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일본만큼 자연환경과 기후가 인간에게 극단적으로 작용하는 곳도 드물 것이다. 기후가 온난하고 물이 풍부하며 섬이라서 수산물도 많아 살아가는데 유리하다. 반면 심한 무더위와 태풍의 피해, 빽빽한 숲과 험준한 지형, 화산과 지진 등은 삶을 위협하는 요소들이다. 인간은 본디 초자연적 위험을 모두 신적 존재로 간주하여 두려워하고 신성시한다.

 

이 소설의 배경은 기후 현에서 나가노 현으로 넘어가는 산길이다. 나가노라면 수년 전에 동계올림픽이 열렸을 정도인 심산유곡이다. 깊은 산속에서 고야산 스님이 마주치는 숲의 커다란 뱀들과 무수한 산거머리들은 산 내지 숲의 환상성을 나타낸다. 스님이 뱀을 산신령으로 간주하여 목숨을 비는 장면은 초자연적 존재의 인정과 아울러 위력을 알 수 있게 한다.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는 자연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다. 마법을 무리는 인간, 인간의 형체를 한 인간 아닌 존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두 공포감을 자아내 두려워하면서 때로는 집단적 탄압과 처형의 대상이 되기도 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숲 속의 여인이 이러하다. 그녀는 분명 인간이지만, 초자연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일찍이 병자의 아픔을 진정시키는 능력을 가졌으며 점차 자유자재로 사물을 부리고 형태를 변화시키는 영묘한 능력을 갖게 되었다. 소위 마녀가 된 것이다.

 

모든 남성에게 있어 최후이자 고난도의 유혹은 여색(女色)이다. 수행을 하는 스님의 제일 금계도 마찬가지다. 숲 속 여인은 빼어난 미모로 지나가는 남성을 홀리고 시들해지면 동물로 둔갑시켜 버린다. 유혹과 위험의 양면성의 이중적 속성은 기실 모든 여성의 천부적 자질이다. 고야산 스님도 여인의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 무한한 신심을 발휘해야 했을 것이나 하마터면 그녀에게 돌아갈 뻔하였다. 평범한 남성들이야 어찌 그 아련하면서도 달콤한 족쇄에 스스로 두 손과 두 발을 기꺼이 내밀지 않겠는가.

 

<초롱불 노래>는 1910년에 발표되었고, 내용적으로나 시기적으로 그의 후기 문학 활동의 걸작이다. 이 소설은 당대로서는 몇 가지 이채롭고 지금의 관점으로는 매우 선구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작품은 백여 년 전의 통속문학인 짓펜샤 잇쿠의 희작 <도카이도 도보 여행기>의 여정을 따라가고 있다. 남들이 근대화를 부르짖을 때 교카는 홀로 고루하고 구태의연한 것으로 치부되던 고유 유산을 소설 구조의 전면에 등장시킨 것이다. 여정만이 아니라 작중 인물의 이름이나 별칭도 빌려 쓰고 있다.

 

여기서는 일본 전통기예인 노(能)의 노래와 춤이 작품의 주요 소재로 다루어진다. 촉망받는 기다하치는 기예에 뛰어나 소잔이라 자칭하며 우쭐대던 안마사를 수치스럽게 하여 죽음에 몰아가고 결국 떠돌이 악사가 된다. 소잔의 딸 오미에는 게이샤가 되어 기다하치에게 노를 배운다. 단지 여행객인줄 알았던 두 노인은 노에 있어 당대 최고의 배우와 악기연주자이며, 그 중 일인은 기다하치의 숙부이기도 하다.

 

작품 구조적 관점에서도 되새겨볼 여지가 있다. 두 가지 이야기의 흐름이 서로 맞물려 가다가 종내는 하나로 합쳐지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떠돌이 악사 기다하치가 우동집에서 여주인과 안마사에게 털어놓는 과거사가 하나이다. 두 노인네가 여관에서 게이샤를 부르는데, 춤도 못 추고 샤미센도 연주 못하는 오미에가 (기다하치에게 배운) 노 무용과 노래를 선보인다. 각 이야기는 서로 엇갈려서 격자형식으로 맞물려 간다. 마지막에 두 노대가의 연주소리에 기다하치가 합류하여 한바탕 향연이 어우러진다. 오미에의 춤, 기다하치의 노래, 그리고 셋소의 장단. 비약하자면 헤겔의 변증법적 구조라고 할 것이다. 정과 반, 그리고 합.

 

한편의 영화를 감상하는 기분이다. 전통예술의 득도와 참된 구현이 인물들의 삶과 어우러지는 점에서 읽는 동안 영화 <서편제>가 머릿속에 언뜻 떠올랐다. 나그네의 여로와 방랑, 빼어난 재주와 오만함으로 죽음에 몰고 간 죄책감, 아버지의 죽음으로 기구한 삶을 겪게 된 딸, 아끼던 조카이자 제자를 내칠 수밖에 없었던 예인(藝人)의 엄정한 태도.

 

그러고 보니 옮긴이와 출판사의 편집 역량이 놀랍기 그지없다. 이 책에 수록한 두 편의 소설은 단순한 작품 선정이 아니라 교카 문학의 두 영역을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간략화의 위험을 무릅쓴다면 <고야산 스님>은 환상성, <초롱불 노래>는 고유성을 각기 주요 테마로 삼고 있다. 후자는 국내 초역이기도 하다.

 

섣부른 판단일지 모른다. 교카의 문학적 특질은 문체 면에서도 확실히 구별되는 점이 있다. 고다 로한에게서 간결성과 단호함을 느낄 수 있었다. 모리 오가이는 단아하면서 높은 격조와, 지적인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이즈미 교카는 예술적 문학을 쓰는 인물임을 알게 해준다. 비록 번역상의 한계는 있을지언정 표현 자체에서 매우 섬세하고 다채로우며 세심하게 선별한 어휘와 리듬 효과를 노리고 있음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과연 일본어의 연금술사로 평가받는 연유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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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일족
모리 오가이 지음, 노재명 옮김 / 북스토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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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수록작>
1. 아베일족
2. 사하시 진고로
3. 사카이 사건
4. 산쇼대부
5. 다카세부네

 

모리 오가이의 역사소설 모음집으로서 출판 컨셉이 뛰어나다. 오가이는 작품 활동 후기에 이르러 집중적으로 역사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흔히 역사소설이라고 하면 장편이나 대하소설을 연상하기 마련인데 오가이는 단편이나 중편만을 쓴다. 전업 작가가 아닌 만큼 장편을 쓸 물리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을 것이며, 특정 시대나 사회 전반을 포괄하기보다 개별 사건을 서술하기 위해서는 굳이 길게 쓸 필요도 못 느꼈을 듯하다.

 

기존에 읽은 작품들은 건너뛰고 처음 만나는 두 편 <사하시 진고로>와 <사카이 사건>만 읽는다.

 

<사하시 진고로>는 특이하게도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기를 배경으로 하며 당시 조선 왕조도 작중에 등장한다. 사하시 진고로라는 무사가 훗날 조선 통신사 일행의 교첨지로 변신한 사연이 작품의 기본 스토리다. 일본의 사무라이, 즉 무사는 칼질이나 제법 잘하는 낭인들이 아니다. 나름대로 엄격한 위계질서와 규범체계를 갖춘 계급집단이라고 해야 옳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규율을 지키면 커다란 명예가 따라오지만, 사소하더라도 규칙을 위반하며 불명예의 낙인이 찍힌다.

 

사하시 진고로는 촉망받는 청년 무사에서 고국을 떠날 수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하였다. 이유는 동료와 상관의 약속 이행 거부이다. 동료가 자신의 약속대로 아깝지만 칼을 양도했더라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색안경을 쓰지 않고 그의 충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면 사하시 진고로는 목숨을 바쳐 섬기는 훌륭한 무사가 되었을 것이다.

 

진고로가 수치-남색(男色)의 대상이 되는-를 감수하면서까지 임무를 완성한 것은 오로지 동료 살해의 죄를 씻고자 하는 일념이었다. 도쿠가와는 표면에 나타난 행위만을 중시하고 진정한 내면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단견을 드러내었고 끝끝내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한다.

 

<사카이 사건>은 일본 개항기 시절 일본군과 프랑스군의 교전 사건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메이지 천황의 사망에 잇따른 저명 인물들의 할복에 충격을 받은 오가이는 <아베일족>과 이 <사카이 사건>에서 집중적으로 할복을 다룬다. 전작에서 할복에 대한 작가의 태도는 중의적이었다. 할복 자체는 높이 평가하지 않으면서도 할복 문화의 불가피성 내지 일정 필요성은 인정하였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할복 행위 자체에 보다 집중하며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우연하게 발생한 양군의 충돌로 프랑스군이 피해를 입자 국제적 사태로 확대되는 것을 꺼린 정부는 프랑스 측의 요구를 수용한다. 교전을 벌인 일본군 중 20명을 사형에 처하는 것이다. 일본군으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군인으로서 최선을 다한 결과에 대해 포상은커녕 오히려 사형을 받게 되다니. 우리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전혀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당사자들의 강력한 반발과 정당한 명분에 정부는 그들을 무사로 인정해주고 할복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후반부는 할복 행위에 대한 사실적으로 세세한 기술을 통해 그들을 표면상 죄인이지만 당당한 영웅으로서 찬양한다.

 

할복은 지극히 일본적인 행동방식이다. 우리네 조상들은 자진(自盡)할 때 독약을 마시거나 목을 매달았다. 할복은 죽음을 정면으로 대면하고 과감히 도전하는 행위다. 할복하면서 비겁하거나 유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만큼 치욕의 대상이 되는 게 드물 것이다. 어찌 보면 가슴속에 지독한 독기를 품은 사람들만이 이런 극단적인 죽음의 양태를 선택할 수 있다. 더욱이 할복은 홀로 하지 못한다. 뒤에서 단칼에 목을 쳐줄 동료를 필요로 한다. 할복하는 본인은 물론 동료마저도 본인에 못지않은 굳센 각오와 의지가 필요하다.

 

오가이가 역사소설을 쓰게 된 내밀한 심리상태 가운데 나이 50이 넘어서 사고가 자연스럽게 보수적으로 흘러갔을 가능성을 무조건 배격하지 못할 것이다. 젊은이는 진보적이고 노인들은 보수적인 현상은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보편적이다. 오가이는 젊어서 독일 유학에서 체득한 근대화된 정신으로 당대 일본사회를 재단하였으나 이제는 일본 고유의 미덕을 찾고 드러내는데 주력한다. 물론 이것이 단순한 회고 내지 의고조의 태도는 아닐 것이다. 일본 전통의 좋은 점을 당대에 널리 주창하여 혼란스런 사회를 지탱하는 기본적 가치관으로 삼고자 하는 원대한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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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98
모리 오가이 지음, 김영식 옮김 / 문예출판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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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1. 기러기
2. 다카세부네
3. 산쇼 대부
4. 성적 인생

 

<성적 인생>을 제외한 소설들은 이미 타 작품집에서 읽었으므로 국내 초역의 <성적 인생>이 오늘의 관심사다. 이 작품이 게재된 잡지는 당시 발매금지가 되었다고 한다. 현직 육군 장성이 쓴 중편 소설이 외설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니 당시로서는 상당한 스캔들일 수밖에.

 

중년의 한 철학자가 자신의 반생을 성욕적 관점에서 회고한다. 당대 유행하던 자연주의 소설은 작중 인물의 행동을 항상 성적 관념과 결부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이 인생의 본질을 잘 파헤친 것이라는 세간의 호평을 얻었다. 굳이 프로이트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성욕의 시각에서 사람들의 삶을 분석한다면 만사는 모두 성욕의 억압과 왜곡, 발현 등으로 설명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화자는 유년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가 매우 사소할지라도 성적 관점에서 유의미한 사건을 모두 기억에서 끄집어낸다. 가나이의 회상에서 춘화, 음담, 엿보기 등은 우리네들에게도 익숙한 경험이므로 그다지 낯설지는 않다. 게이샤라는 직업군은 우리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잠깐, 수많은 단란주점은 무엇이며, 아래로는 사창가에서 위로는 소위 텐프로에 이르는 음지산업의 활황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인가? 현대에는 과거에는 없는 야사와 야동이라는 용어가 남녀노소 구분 없이 이미 대중에게 친숙한 어휘로 자리 잡았다. 이런 문화적 환경에서 아이들이 성적으로 무균질 환경에서 자랄 것으로 기대할 수 없다. 또 기대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 온실 속의 화초로 키우는 것은 한계가 있다.

 

상대적으로 개방된 성 문화를 가진 일본임을 고려하더라도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은 남색(男色)의 보편화이다. 소년 시절부터 학교 기숙사 등지에서 남색이 성행하여 순결을 지키기 위하여 단도를 필요로 할 지경이었다는 점은 당대 일본의 성 문화의 일단을 알게 해준다. 연파와 경파라는 집단의 구분이 이채롭다. 일본 당국이 발매금지시킨 사유는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유감스럽게도 남색이라는 용어는 요즘 젊은 층에 낯선 표현이지만, 영어 단어인 ‘호모’ 또는 ‘게이’는 매우 친숙하다. 일상생활에서도 스스럼없이 사용할 정도로 보편화되었다. 하기야 서구 일부에서는 동성 결혼도 이미 법적으로 인정하고 있으니 놀랄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모리 오가이가 사회적 파장을 무릅쓰면서까지 이 작품을 쓴 동기를 추정해본다. 우선 작중에도 드러났듯이 자연주의 소설에 대한 반감이다. 인간의 행동과 사건을 성욕적 안경을 쓰고 보는 것은 설사 일단의 진실을 포함하더라도 침소봉대며 과도한 극단화가 아닐 수 없다. 회고담을 훑어보면 기실 성적으로 중차대하고 극적인 사건은 거의 없다. 사랑과 연애의 감정마저도 성욕으로 무리하게 재단하는 사례가 더 많다.

 

그리고 당대 사회의 도덕적 위선과 허울에 대한 거부감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문명화된 사회일수록 외면적 도덕기준과 내면적 행태 간 격차가 심한 법이다. 겉으로는 고상한 척하지만 뒤로는 호박씨를 까는 사람들이 바로 위선자에 해당한다. 작가가 보기에 당대 일본사회는 인간의 자연스런 성적 감정을 억압하고 왜곡하면서 오히려 고상한 척 자화자찬한다. 정말로 같잖고 역겨울 수밖에 없다.

 

성적 인생을 다루었으며 내용도 모두 성욕에 관련되었지만 음란하고 외설적인 느낌은 주지 않는다. 이 글에서 작가의 어조는 지극히 담담하며 관조적이다. 표현도 매우 절제되어 있고 세부 묘사를 아끼고 있다. 그의 문체가 원래 그렇다. 품위와 격조를 항상 유지한다. 흥겹더라도 망가지지 않고 술을 마시더라도 비틀거리지 않는다. 박장대소보다는 미소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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