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라인
브루스 채트윈 지음, 김희진 옮김 / 현암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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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한 땅을 눈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선이 가로질러 달린다. 그 선의 굽이굽이마다 깃들어 있는 이야기는 노래를 통해 생명을 유지한다. 조상과 후세가 만나는 길, 부족과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되새길 수 있는 길, 그것이 호주 원주민 애버리진의 송라인이다.

 

<파타고니아>으로 일약 명성을 떨친 채트윈은 십년 만에 이번에는 남미가 아닌 호주를 선택한다. 그들의 노래의 길을 찾아서. 호주 중앙의 뜨겁게 달아오른 황야는 파타고니아와는 다른 의미에서 여전히 오지이자 변방이다. 자연의 위력이 인간 삶의 유형과 양태를 조건 짓는 곳. 정작 그곳에서 사람들을 지치고 힘들게 하는 요인은 불순한 자연환경이 아니라 타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 자신들이다.

 

노마드에 대한 채트윈의 관심은 오래전부터였다. 그의 최초로 시도했던 저작도 노마드에 관한 것이었음은 전작의 작품해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전작의 성공 이후 저자의 삶의 편력을 추적해 보면 자신 또한 전형적인 노마드임을 깨닫게 된다. 채트윈은 결국 자신의 본질적 속성에 되돌아온 것이다.

 

이 책의 후반부에 노마드에 대한 상당한 분량의 단상들이 삽입되어 있고, 이것은 작가의 송라인에 대한 추적과 서로 교차하며 작품의 중요한 전개 구조를 형성한다. 송라인 자체가 노마드를 내포하고 있다.

 

“애버리지니의 믿음에서 노래 불리지 않는 땅은 죽은 땅이었다. 따라서 노래가 잊히면 땅 자체도 죽음을 맞이할 것이었다.”(P.85)

 

“음악은 세계에 대한 자신의 길을 찾는 기억 은행이죠.” (P.167)

 

호주 원주민들은 노래를 통해 역사를 기억하고 정체성을 재발견한다. 노래의 길끼리 마주치는 곳에서는 소통과 교류가 이루어진다. 영역의 관념을 함유하고 있으나 결코 영토의 개념은 아니다. 3차원적 면이 아니라 2차원적 선이므로 상호 중첩되지 않으며 이해관계의 충돌 여지가 없다. 그들은 소위 울타리를 두르는 땅따먹기에 관심이 없다. 그들의 삶의 기원은 길의 시작과 끝, 그리고 도중의 이야기에 있다. 그들은 조상이 물려준 길을 당대와 후대에도 변함없이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문화를 자신의 시각에 따라 단선적으로 파악하는 사람들은 결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호주에 갓 도착한 유럽인들이 그러하다. 일단 자신을 우위에 놓으면 만사는 다 열등하게 보인다. 열등시 해버리면 공감과 이해가 생겨날 여지는 없게 마련이다.

 

“그들[애버리지니]과 백인의 차이는 세상을 보는 관점에 있었다. 백인은 자신들의 의심스러운 미래관에 맞춰 끊임없이 세상을 바꿔왔다. 애버리지니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데 정신적 에너지를 다 쏟았다. 그것이 대체 어떤 면에서 열등하단 말인가?” (P.190)

 

근년 들어 노마드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주목이 급증하였다. 유목민적 삶의 가치가 부활한 것은 물론 산업적, 경제적 관점에서 비롯한다. 끊임없는 경쟁과 개발 노력이 기업과 시장의 성장을 보장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중앙 오스트레일리아의 두 부족의 예(P.426)를 통해서 정주민과 이주민의 성향 차이를 알 수 있다. 정착 생활을 하는 아란다족은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로서 순수한 혈통을 내세운다. 반면 서부 사막 민족은 이동 생활을 하는데 매우 개방적이며 언제나 쾌활하게 웃는다.

 

채트윈은 인간은 기본적으로 노마드에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존재임을 많은 인용과 단상과 일화를 통해 눈앞에 제시한다.

 

파스칼, 보들레르, 성 안토니오, 페트라르카, 랭보, 다윈, 칼레발라, 키르케고르, 아나톨 프랑스, 아이타레야 브라흐마나, 석가모니, 워즈워스 등등.

 

그리스 아토스 산에서 한 헝가리인은 채트윈에게 “인간은 정착하도록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P.306)고 말하였다. 인간의 정착과 도시화는 문명을 낳았지만 개인에게는 불행의 출발이라고 볼 수 있다.

 

“이븐할둔의 철학 체계는 인간은 도시를 향해 나아갈수록 도덕적·육체적으로 타락한다는 직관에 바탕을 둔다.” (P.305)

 

가만히 있지 못함에도 가만히 있어야만 할 때 품게 되는 불안감이야말로 문명화되고 정착된 삶을 누리는 현대인을 안절부절 못하게 하는 원인이다. 우리 유전자에는 옛 선조들의 노마드 흔적이 각인되어 있는지 모른다. 이것이 실제적 삶으로 극단적으로 체현되었을 때 지칭하는 용어가 소위 ‘역마살’이다. 채트윈이야말로 액운에 씐 팔자가 아니겠는가. 남미 파타고니아, 중앙 오스트레일리아, 사하라 사막의 이쪽과 저쪽의 지역들, 인도와 동양 등. 역마살이 아니라도 우리에게는 정형화된 일상을 훌훌 털고 일어나고 싶은 욕구를 지닌다.

 

사십 대의 채트윈은 확실히 문체에서도 글의 호흡에서도 십년 전과는 다른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쫓기는 듯한 치열함을 잃은 대신 보다 넉넉히 현실을 받아들이고 때의 순역(順逆)을 기다릴 줄 안다. 전체적 흐름과 글쓰기의 방식은 전작과 유사하다. 기행문과 에세이를 넘나드는 애매한 장르 구분. 대신 여기서는 홀로가 아니라 믿음직한 동행자 아카디와 일행들이 있다.

 

“송라인이 반드시 오스트레일리아에만 있는 현상은 아닌, 보편적인 것이라 느꼈다. 송라인은 인간이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는, 그리하여 자신의 사회적 삶을 조직하는 수단이었다고 말이다. 그 이후 생겨난 다른 모든 체계는 본디 모델의 변종, 혹은 왜곡된 형태였다.” (P.438)

 

“내 눈에는 송라인이 모든 대륙과 모든 시대를 누비며 뻗어 있는 것이 보인다. 발 디디는 곳마다 인간은 노래의 발자취를 남겼“다. (P.438)

 

채트윈은 송라인의 보편성을 지적한다. 인간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존재와 영역을 표현하고자 한다. 가장 원초적인 동시에 강한 생명력이 노래라는 틀에 담겨 전해온다. 눈에 쉽사리 보이지 않기에 혹자에게는 자칫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오해가 가능하다. 다만 진정과 이해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미약하나마 노래의 길이 인적없는 황무지 한복판에서도 오롯이 떠오름을 볼 수 있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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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아노스의 진실한 이야기 아모르문디 세계문학 1
루키아노스 지음, 강대진 옮김, 김태권 그림 / 아모르문디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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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진실한 이야기 1
진실한 이야기 2
저승 가는 길, 또는 참주
카론, 또는 구경꾼들
죽은 자들의 대화
꿈, 또는 루키아노스의 생애

 

서기 2세기 로마제국 시대의 풍자작가 루키아노스의 주요 작품집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진실한 이야기>가 유명한데, 환상문학 또는 SF문학의 선구자로 일컬어진다. 옮긴이는 서문에서 독자들이 루키아노스라는 이름을 이 책에서 처음 접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다행히도 나는 이 작가의 이름과 대표작에 대한 정보를 이미 접하였다. 즐겨 참조하는 <세계문학사 작은사전>(김희보 편저)에 작가에 대하여 흥미롭게 소개되어 있어서. 요는 이러한 작품이 과연 척박한 국내 출판시장에서 번역의 빛을 볼 수 있을지에 회의적이었는데, 따라서 이 책의 출간 소식을 접하고는 정말로 깜짝 놀랐다.

 

서양 고대의 희랍어와 라틴어 원전 번역이라고 항상 근엄하고 고답적이며 격조 높은 저작들만을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당대 사람들도 오늘날의 우리들과 사는 양태는 별로 차이가 없을 것이다. 희로애락을 지니고 미신과 종교 사이에서 방황하며 행복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해 치열하게 분투하는 인간의 본질. 원전 번역이 표준적 텍스트에 집중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보다 다변화되어 이처럼 인간적인 작품들도 많이 다루어주기를 바란다.

 

<진실한 이야기>는 방랑과 환상의 모험담이다. 이는 서양문학사의 많은 작품들을 떠올리게 하는데, 희랍신화의 헤라클레스와 오뒷세우스의 방랑, 켈트 신화의 쿠훌린(?), 후대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세르반테스의 마지막 소설 <사랑의 모험>, 콜로디의 <피노키오> 등. 고대인의 사유와 상상력이 얼마나 풍성하고 자유로왔는지 루키아노스는 잘 보여준다. 희랍의 철학자와 작가들을 마음껏 인용하고 변용하는 데서 그의 지적 역량이 출중함도 알 수 있다. 여기서 그는 모험담에 치중하고 있어 날카로운 풍자성은 다소 덜한 편이다.

 

그는 포도주 섬나라, 공중에 떠있는 섬들, 달나라, 거대한 고래 뱃속 세상 등 온갖 기묘한 세계를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묘사한다. 후편에서는 얼음나라에 갇혔다가 ‘행복한 자들의 섬’이라는 선인들의 사후 세상도 방문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순전한 가공임을 서두에서 밝히고 있다. 당대의 몇몇처럼 겪지도 않은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꾸며내어 진실이라고 우기지 않는다. 작가는 독자들에게 이 이야기들을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애당초 존재할 수도 없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결코 믿어서는 안된다고 친절한 당부조차 아끼지 않는다. 이렇게 자신이 이야기의 허위성을 스스로 인정하으므로 이제 그의 발언은 진실하게 된다. 그래서 <진실한 이야기>라는 역설이 성립한다.

 

<저승 가는 길, 또는 참주>와 <카론, 또는 구경꾼들>은 짤막하면서도 풍자적 재미가 뛰어나다. 당대인들은 죽어서 사후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헤르메스의 인도로 뱃사공 카론이 모는 배를 타고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강을 건너야 한다고 믿었다. 죽음 앞에서는 생전의 제반사가 모두 덧없기 마련이다. 부귀도 영화도 명예도 지위도 삶과 죽음의 껍데기에 불과하다. 죽음은 오로지 적나라한 본연의 것만 허용한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여전히 아귀다툼에 골몰한다. 인간의 유한함과 부질없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하루살이마냥 한치 앞도 모르면서 싸우고 죽고 죽인다. 저승의 카론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며, 도대체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이승의 삶이 그토록 아름답고 행복하다면 모르겠지만, 일생을 천대받고 병들고 굶주림에 허덕이면서도 사람들조차도 저승을 앞두고 몸부림을 치며 대성통곡한다.

 

“그들이 만일 처음부터, 자신들이 필멸의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이 짧은 시간 동안 삶에 머문 후에 모든 것을 땅 위에 남기고, 마치 꿈에서처럼 떠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의식했다면, 좀 더 현명하게 삶을 살아갈 것이고 죽을 때도 덜 괴로워할 텐데 말입니다.” (P.145)

 

<꿈, 또는 루키아노스의 생애>는 자전적 요소를 지니고 있어 흥미롭다. 작가는 꿈 속 여신들의 논변을 통해 직업 선택과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표어가 여전히 주창되고 있지만 당위성에 불과하지 현실은 엄연히 귀천의 차이를 두고 있다. 예외를 인정한다면 교육의 양과 질이 곧 직업의 수준을 결정하며 이는 곧 지위와 명예, 나아가 빈부의 차원마저도 좌우하기 쉽다. 교육의 여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루키아노스가 얼른 기술의 여신을 외면하고 등돌린 것은 당연하다. 서글픈 현상이지만 당대에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것이 여전한 진실이다.

 

<죽은 자들의 대화>는 <진실한 이야기>와는 다른 의미에서 뛰어난 작품이다. 전작이 모험담인데 비해 후자는 대화편이다. 25편의 짤막한 대화편에서 저승세계의 여러 영혼들과 신들이 등장하여 다채로운 이야기를 전개한다. 핵심 주제는 마찬가지로 사후 세계의 시각에서 볼 때 생전의 부귀와 지위는 무의미하며, 소박한 삶으로 순수한 본성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루키아노스는 희랍 철학에서 에피쿠로스학파와 견유학파를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하며, 소피스트들과 같은 철학자와 수사학자에 대해서는 사기꾼이라고 부를 정도로 비판적이다. 제10편 ‘카론과 헤르메스의 대화’에서 철학자와 수사학자의 허위와 가식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진다.

 

<저승 가는 길, 또는 참주>에서는 퀴니스코스가, 여기에서는 메닙포스와 디오게네스가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 그들은 거리낌이 없다. 하루빨리 이승을 벗어나 저승을 오지 못해 안달할 지경이다. 속세에 가진 것 없고 속박된 게 없으니 그들은 자유롭다. 모든 이가 괴로워 눈물을 흘리는 와중에도 그들만이 활기차고 호탕한 웃음을 날린다. 이들은 저승의 신들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제11편 ‘크라테스와 디오게네스의 대화’ 중 한 대목은 루키아노스가 중시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크라테스: 정말 필요했던 것은, 당신은 안티스테네스에게서 물려받았고, 저는 당신에게서 물려받았으니까요. 그건 페르시아 제국보다 훨씬 더 크고 존엄한 것이었죠.
디오게네스: 뭘 하는 건가?
크라테스: 지혜, 자율성, 진리, 거침없는 발언, 그리고 자유입니다.” (P.218)

 

<에라스무스 격언집>과 마찬가지로 여기도 삽화가 들어 있다. 옮긴이와 삽화가가 전작과 동일하다. 전작의 삽화는 개인적으로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삽화가의 지향점과 나의 중시점이 어긋났다. 여기서는 삽화의 존재도 인식 못하였다. 곳곳에 있는 그림은 당대의 신화를 그린 그림들로 생각하였다. 그만큼 고전의 분위기와 성격에 완전히 부합하여 전혀 이질감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삽화는 양날의 칼과도 같다. 이 책에서는 올바른 방향으로 칼이 휘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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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이브 세계문학의 숲 30
오귀스트 빌리에 드 릴아당 지음, 고혜선 옮김 / 시공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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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기술의 발달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양가적이다. 장밋빛 전망은 과학자, 기술자 및 이로 인해 직접적 이득을 얻는 자본가의 태도이며, 기계로 인해 일자리를 빼앗긴 노동자와 농민 등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잿빛 시각이 우세하다.

 

릴아당의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 전자에 가깝다. 미래의 여성, 즉 이브를 안드레이드라는 로봇을 만들어 대체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과학기술의 압도적인 능력을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에게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는 인간을 닮고 인간을 흉내 내는 기계적 존재, 그것을 안드로이드라고 부르든 아니면 릴아당처럼 안드레이드로 명명하든 그 본질은 동일하다.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고 무한성에 도전하는. 그것은 과학기술의 완전성에 대한 굳건한 신념에 근거한다.

 

작가는 당대 독자들에게 안드레이드 로봇 제작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과학자 에디슨의 이름을 사용한다. 에디슨이 비밀리에 안드레이드 아달리를 창조(인간적 존재이므로 발명이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하였다는 식으로. 게다가 작품 중반부의 상당 분량을 에디슨이 아달리를 제작한 방법에 대한 설명에 할애한다. 전기의 마법사 에디슨답게 각종 전기적 장치로 구현한 아달리에 대해 듣다보면 확실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구나 하는 동감이 들 정도다. 오늘날이라면 IT 외에 나노와 생명공학 등의 첨단 기술을 적용하여 만들었다는 셈이다.

 

미래의 이브가 의도한 인간의 미비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영국 귀족 에왈드 경의 아름다운 애인 알리시아에 있다. 인간의 내면과 외면이 조화를 이룬다면 참으로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남녀를 불문하고. 에왈드 경은 여성에게 외적인 미모와 함께 높은 수준의 정신적 능력을 기대한다.

 

“알리시아 양의 영혼과 육체 사이에 있는 것은 제 오성을 당황하게 만들고 괴롭히는 불균형이 아니라 ‘부조화’였습니다.” (P.75)

 

기실 젊은 귀족이 절망하고 에디슨이 마지못해 동의하는 알리시아 양의 사고와 행동 양태는
당대, 아니 오늘날의 일반적인 현상과 큰 차이가 없다. 실리적이고 현세적이며 주위의 인정에 목말라하면서 지성과 도덕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것, 그것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보편적 인간유형이 아니던가.

 

“당신이 사랑하고 있으며 당신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실재하며 살아 있는 존재는, 지나가는 인간의 형상 속이 아니라 당신의 ‘욕망’ 속에서 ‘나타나는’ 존재입니다.” (P.155)

 

“당신은 바로 그 ‘그림자’만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자’를 위해서 당신은 죽으려고 합니다. 당신이 절대적으로, 실재라고 인정하는 것은 이 ‘그림자’뿐입니다!” (P.156)

 

현실의 인간은 수많은 결함과 약점을 지니게 마련이고, 여기에 실망을 금하지 못할 수도 있음을 충분히 인정한다. 에디슨은 에왈드 경을 비판하는 것은 현실의 여인이 아닌, 환상의 존재를 꿈꾸는 데 있다. 이상은 가슴 속에 품는 것이지 두 발로 설 수 있는 단단한 대지가 아니다. 릴아당은 당대 자본주의 사회 속의 부르주아의 변질된 인간성과 아울러 구 귀족계층의 비현실적이며 진부한 의식을 동시에 비판한다.

 

그렇다면 에디슨이 안드레이드 제작에 나선 동기는 무엇일까?

 

“한 인간의 혼을 변화시켜 구제해줄 수 있는 전기인간의 창조를 공식화 할 수 있다면, ‘과학’으로부터 ‘사랑’의 방정식을 끌어내 보도록 합시다. 이 방정식에서 사랑이란 제일 먼저, 인류에 느닷없이 더해진 전기인간 없이는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증명된 저주들을 초래하지 않을’ 사랑이며, 사랑의 불길을 막을 사랑입니다.” (P.275)

 

“우리의 신들도 우리의 희망도, 이미 ‘과학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게 되었는데, 사랑 역시 과학이 되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잊힌 전설, 과학에 의해 경멸당한 전설에 나오는 이브 대신에, 저는 과학적인 이브를 드리겠습니다.” (P.359)

 

가까운 친우의 뜻밖의 타락에 의한 파멸을 지켜보면서 에디슨은 육체적 결합관계를 배제하고 공허하고 변질된 영혼 대신 올바른 지적 능력이 갖추어진 인공적 존재를 생각하였다. 그것이 남녀 간의 무수한 비극적 연애사(戀愛死)를 방지해 주고 나아가 인류의 개인적, 사회적 발전에 일익을 담당할 것으로 생각하였던 듯하다.

 

안드로이드 로봇과 관련된 영화들을 떠올린다.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에서 영원한 생명은 인간을 기계인간으로 개조하는 데 있다. 영화 <에이 아이(AI)>에서 로봇은 인간을 닮는데 그치지 않고 인간이 되기를 꿈꾼다. 또 다른 영화 <아이, 로봇>에서는 독자적 사고와 감정능력을 지닌 로봇이 인간을 공격한다.

 

작가도 후반부에서 완성된 아달리에게서 설계되지 않은 미지의 지적 발달을 언급한다. 형이상학적인 신비가 개입하여 아달리의 기계적 색채를 서서히 지워나간다. 이처럼 로봇은 인간에 근접해지고자 하며 점차로 인간의 조역이 아닌 주역을 지향하고자 하는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로봇 발달의 필연적 귀결인 인간과 같은 로봇, 그래서 사람들은 안드로이드에 열광하는 한편 깊은 우려를 품는다. 그것이 인간 존재의 기본적 가치와 연결된 사안임을 본능적으로 느끼게 된다.

 

릴아당은 과학진보에 찬동하는 입장이 아니다. 그의 다른 작품집 <잔혹한 이야기>에는 당대 자본주의 확산에 따른 인간 양태를 절묘하게 희화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래의 이브>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표피적 전개에 현혹되다 보면 릴아당의 본의를 오독할 우려를 유의하여 음미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아달리가 바다 속에 수장되는 마지막 대목을 통해 명확하게 구현된다. 이로써 작가는 두 가지를 암시한다. 안드레이드 로봇은 본질적으로 신과 인류의 가치에 대한 위배라는 점, 따라서 가까운 시일 내 현실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오늘날 과학기술의 추종자들은 여전히 과학의 순수성 내지 탈 가치성을 주장할 것인가?

 

※ <잔혹한 이야기> 번역본에서 <미래의 이브>가 근간 예정이라고 하였는데 수년이 흐른 뒤 출판사가 바뀐 채 드디어 나왔다. 저간의 속사정이야 알 수 없으나 우여곡절 끝에 번역본이 나오게 된 점이 반갑다. 유력한 세계문학전집의 일환으로 출간된 점은 다수 독자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확대하였다는 점에서 보다 긍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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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사랑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8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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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어엿한 중견작가로 자리 잡은 한강. 그가 이십대 중반의 시퍼런 나이에 쓴 이 작품들에서 예상치 못한 당혹감을 맞닥뜨렸다. 연령대와 표제를 통한 어림짐작의 상투성이 일거에 무너지면서 이것이 과연 그에게 합당한가 하는 의문마저 들 정도다. 이십대 중반의 조숙성일까 섣부른 조로 내지 애늙은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데뷔작 <붉은 닻>을 포함한 수록작 전체를 아우르는 분위기는 암울함이다. 그것은 상실에서 비롯한다. 가족과 고향의 상실. 공통적으로 반복되는 불행한 가족사는 고향으로부터의 불가피한 도피로 이어지기도 한다. 가족과 고향의 불행은 곧 존재의 뿌리를 박탈당했음을 의미한다. 가족은 사회의 기본 구성단위이자 개인의 안전과 생을 위한 최종 보루이다. 역으로 가족이 분열되고 해체될 때 개인은 존재 의의와 정체성의 혼란을 피할 수 없다. 이 작품들에 나오는 인물들이 모두 그러하다. 작게는 고뇌에서 크게는 죽음까지도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여수의 사랑>
나와 자흔은 비슷하면서도 상반된 캐릭터다. 나는 불행한 가족사로부터 도주하기 위하여 고향을 탈출하였으며 과거의 흔적으로부터 절연하고자 하는 욕망이 구토와 결벽증으로 발현된다. 자흔은 고향을 상실하였기에 오히려 부재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크다. 여수라는 지리적 공통분모는 이처럼 고향에 대한 중의성으로 구별된다.

 

<질주>
여기에서 불행한 가족사는 동생의 죽음이다. 인규의 달리기는 살아있음을 입증하는 몸부림이자 고뇌로부터의 도피다. 어머니의 질병으로 드러난 숨겨진 속내(죽은 자식에 대한 뼈아픈 슬픔)을 통해 인규와 어머니의 갈등 해소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 상대적으로 희망적이다.

 

<야간 열차>
쌍둥이 동생 동주의 사고를 겪으며 겨우 버티어내는 삶, 쌍둥이 동생마저 걸머져야 하는 삶을 살아가는 동걸에게는 나의 단순한 청춘의 방화마저 부럽기 그지없다. 그에게 있어 야간 열차는 삶의 무게와 질곡을 버티어내도록 해주는 최후의 지지대이며, 기차 바퀴 소리는 탈출을 희구하는 자아의 목소리일 것이다. 내게는 떠나는 일이나 머무르는 일이 다를 것이 없었던 반면, 동걸에게는 야간 열차를 타고 떠날 수 있다는 최후의 기대가 있었다는 점에서 나와 동걸의 차이점이 드러난다.

 

“동걸은 자신의 인생 전부를 오래 전부터 배신하고 있었던 것이다......떠나리라는 것 때문에 동걸은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세계에 속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강할 수 있었다. 단 한 번의 탈출로 자신의 인생을 완성시켜 줄 야간 열차가 있으므로 그는 어떤 완성된 인생도 선망할 필요가 없었다.” (P.107)

 

<저녁빛>
재헌과 재인 형제의 가족을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재헌의 출생의 비밀과 생모의 죽음. 이후 재헌은 철저히 혼자가 된다. 그에게 삶은 동력을 상실하였다. 어두워진 집안에서 재인 또한 혼자가 될 수밖에 없게 된다. 그의 삶 또한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되었으므로. 현재의 삶은 재인에게 존재 부정이라면 재헌에게는 자아 부정의 대상이다. 다만 재인은 극복과 변화의 여지가 있는 반면 재헌은 그러하지 못하였다. “살아 있다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무엇도 ...... 남아 있지 않”(P.163)은 재인은 살아남는다. 그리고 살아갈 것이다. 끼니때가 다가오면 허기져 있고, 밥벌이를 위해 애쓰는 자신의 모습에 혐오와 자괴감을 느끼더라도. 살아남은 자의 일상성,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진달래 능선>
정환은 어김없이 고향을 탈출한다. 그에게 고향은 아련한 정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새로 이사한 집의 “어딘가 황막하고 버림받을 것 같은 분위기가 정환에게는 차라리 친근한 것이었다.”(P.183)고 작가는 적고 있지만, 기실 작품의 분위기 및 작가의 정서 또한 그러하다. 정환에게 있어 진달래 능선이 상징하는 고향은 “오로지 어서 달아나야”(P.186) 하는 대상이다. 탈출의 절실성은 곧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의 절박함이다. 집주인이 정원의 나무를 하나하나 불태우고 마침내는 진달래마저 뽑아 불태워버리는 장면은 속죄 의식에 가깝다. 반면 정환에게 그것은 고향과의 되찾을 수 없는 영원한 단절을 의미할 것이다.

 

<어둠의 사육제>
홍콩 느와르를 연상시키는 짙은 허무주의적 대사와 생경하기조차 한 인물의 굳센 의지. 여성작가임에도 의외로 이 단편과 <여수의 사랑>에서만 여성 화자가 등장한다. 게다가 통상 기대하는 여성적인 느낌과는 그다지 가깝지 않음도 이색적이다. 세상이, 운명이 나에게 어둠의 도전장을 내밀었을 때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방기(放棄)적 굴복과 광분의 발작? 그가 택한 방식은 처연한 생존이다. 살기 위해 그는 인간미를 포기할 것을 작정한다.

 

“악하게 살아남아야 한다. 내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P.229)
“정을 준다는 것도 정을 받는다는 것도 모두 어리석은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P.236)
“나는 삶과 화해하는 법을 잊은 것이었다. 삶이 나에게 등을 돌리자마자 나 역시 미련 없이 뒤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P.251)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태도는 생존에 필수적이며, 남들로부터 칭찬의 대상이 된다. 다만 외로움에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부작용을 감내할 만큼 독한 성격을 지닌 인물만 가능하다. 그렇지 못하면 움츠러들고 제 칼날에 스스로를 해하게 된다. 명환의 경우처럼.

 

<붉은 닻>
동식과 동영 형제는 아버지에게서 비롯한 상처를 공유한다. 동식은 방탕과 간경변으로, 동영은 칩거 및 밤거리 배회로 대응 방식은 각자 다르다. 동식에게 동영은 죽은 아버지를 상기시키는 존재이다. 그는 동영이 거슬리고, 부담스럽다. 그가 사라지기를 바랐고, 동영이 변해서 낮의 세계로 돌아오기를 바랐다.

 

마지막 장면에서 형제가 서로에게 품었던 진심을 토로하기 시작하였다. 결과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어쨌든 희망의 조짐은 충분히 엿보인다.

 

 

작가는 무슨 연유로 한창 나이에 이처럼 삶의 질곡과 어두운 면을 다잡고 집요하게 응시하는가? 생을 거부하고 모멸하는 미래는 결국 죽음의 지향이다. 체험의 반영인가 아니면 순전한 상상의 소산인가, 후자라면 작가는 꼭지가 덜 익은 철없는 글쟁이에 불과하다. 그것도 아니라면 깊고 진지한 사색의 산물일지도.

 

이십년이 지나 작가에게 이 글들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서늘한 쓰라림을 안겨 줄 것인가 아니면 희미한 옛 생각의 자취만 아른거릴지도. 최근의 작품들에서도 여전한 작가의 주목과 지향점을 통해 어렴풋하나마 발전적 전망에 대한 희망을 가져본다.

 

수사적 표현에 대한 의식적 천착이 엿보인다. 당시로서는 아직 신인작가이므로, 괜찮다. 보다 아름답게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의 발현이므로. 이 또한 신진의 풋풋함으로 이해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작품해설의 두 대목을 인용한다. 작가 한강의 첫 작품집을 이해하는 주제를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한강의 주인공들이 진하게 가지고 있는 삶의 피로, 희망 없음의 원인이 그런 세태적인 결손 가족의 신산함에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바로 존재의 피로감, 희망 없음의 좌절감이라는 근원적인 정서적 상황의 드러냄인 듯하다......인간의 지울 수 없는 운명적 슬픔, 삶의 비애적 서정, 세계에 대한 비극적 전망을 그의 소설 속에 새겨넣는다.” (P.316)

 

“그녀의 슬픈 아름다움은 삶의 외로움과 고단함에서 온다......그녀는 세속적 희망을 버리는 대신, 삶의 근원성으로의 외로움과 고단함을 이끌어내고, 운명과 죽음에 대한 어두운 갈망과 그것들과의 때이른 친화감을 키워낸다.”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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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고니아
브루스 채트윈 지음, 김훈 옮김 / 현암사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남아메리카 대륙,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남부 지역, 그 드넓고 황량한 황무지를 일러 파타고니아라고 칭한다. 빙하의 강력했던 힘의 자취가 역력한 지형, 남극 대륙과 인접한 극단, 그럼에도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기 전까지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유일한 해상 통로였던 마젤란 해협을 몰아치는 불순한 일기와 몰아치는 강풍.

 

문명권에서 머나먼 땅에 사람들은 막연한 두려움과 아울러 호기심을 품는다. 실제 그곳은 어떤 곳일까. 정말로 인간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금단의 지역인지, 그곳에 사람이 산다면 누가 사는지 등등. 그중의 하나가 바로 파타고니아다. 해설에 따르면 이 책은 숨겨졌던 파타고니아의 실체를 세상에 드러낸 작품이다. 때는 1970년대 중반, 지금부터 삼십년 전이라는 시간의 격차는 실제 이상으로 넓고도 길다.

 

이 책은 기행문도, 여행안내서도 아니다. 미지의 자연 풍경과 낯선 문화에 대한 경이와 감탄이 여기에는 없다. 작가는 여기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의 눈은 오로지 파타고니아에 사는 사람들과 살았던 사람들, 그리고 여기에 얽힌 자신의 추억에 쏠려있다. 니컬러스 셰익스피어도 길다란 서문에서 이를 지적한다.

 

파타고니아는 특이한 곳이다. 문명과 모국으로부터의 단절과 고립은 기후적 요인과 결합하여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불안정하게 흔들어놓는다. 그래서 “술꾼은 술을 마시고, 경건한 사람은 기도를 하고, 외로운 사람은 더 외로워지며 가끔은 그 외로움이 치명적인 형태로까지 나아가기도 한다.”(P.10)

 

파타고니아 거주민들의 무리는 의외로 다채롭다. 그들 대부분은 유럽에서 도망치거나 피난 온 사람들이 그대로 눌러앉은 경우다. 웨일스인, 보어인, 독일인, 이탈리아인 물론 프랑스인이나 영국인은 구태여 강조할 필요도 없다. 작가에 따르면 그들은 모국과 본토보다도 더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에게 이것이야말로 자신과 고향을 잇는 유일한 동아줄이 아니겠는가. 오늘날 우리가 연변의 조선족이나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의 마을에서 낯설면서도 낯익은 정서와, 촌스럽고 예스러우면서도 푸근한 감성을 상기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게다가 이야기 중간에 흥미진진한 모험담이 덧붙여진다. 기인과 범죄자와 추방자들의. 자칭 파타고니아 왕국의 왕위계승 이야기는 참으로 재미있다.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의 주인공들인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의 방랑담을 발견하게 된 것은 의외의 소득이다. 혁명가 안토니오 소토도 파타고니아 역사의 중요한 지점일 것이다.

 

채트윈은 시간의 엄밀한 흐름에 구애받지 않는다. 목적지를 사전에 정해두고 이를 준수하는 방식이 아니다. 언뜻 발길 닿는 대로 지나가다가 문득 호기심이 생겨난 마을을 둘러보기 위해 여정을 이탈하기 일쑤다. 물론 여행의 거시적 목적은 자신이 표명한대로 브론토사우루스로 착각한 대형나무늘보 밀로돈의 추억을 더듬는 것이며, 밀로돈 가죽조각을 할머니에게 선물하였던 친척 찰리 밀워드 선장의 자취를 찾아보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후반부에 밀워드 선장의 삶과 모험담이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이야기를 흥미롭게 만들기 위하여 부러 진실을 외면하거나 조작하지 않는다.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파타고니아 지역도 백인의 정복과 착취, 그리고 인디오의 수난과 억압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유럽인들에게 인디오들은 사람과 동물 중간, 때로는 동물 이하의 존재였다. 티에라델푸에고의 ‘붉은 돼지’ 알렉산더 매클레넌의 일화는 적합한 사례다.
“그는 직접 나서서 인디오들을 죽이는 걸 더 좋아했다. 그러면서도 동물들이 고통받는 광경을 보면 끔찍이 싫어했다.” (P.247)

 

지나간 과거사에 불과하다고?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채트윈이 만난 대지주 가문의 영국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인디오를 학살했다는 얘기들은 좀 지나치게 부풀려진 감이 있어요. 여기 인디오는 인디오들 중에서도 아주 열등한 자들이었어요. 아즈텍족이나 잉카족과는 달랐다는 얘깁니다. 문명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어요. 전체적으로 보아 그들은 아주 비천한 존재였죠.” (P.291)

 

채트윈의 이 책이 당대에 커다란 환영을 받았고 현재까지도 고전으로서 인정받는 연유는 명백하다. 오늘날 이를 읽는 독자도 시간의 간격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진부함과 구태의연함이 배어있지 않다. 그는 단순한 사실이 아닌 진실을 담으려고 노력하였다. 머나먼 미지에 대한 호기심 충족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극적이면서 개성이 넘치는 삶의 모습. 이 자체로 숨겨진 땅 파타고니아에 대한 관심은 증폭되었다. 그리고 세월의 경과에도 그네들의 삶의 본질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파타고니아의 자연과 환경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그의 진정한 성취는 파타고니아를 있는 그대로 서술했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파타고니아라는 풍경과 아울러 새로운 탐구 방식, 세상의 새로운 측면을 창조해냈다는 점에 있다.”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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