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스무스의 아동교육론
에라스무스 지음, 김성훈 옮김 / 한국학술정보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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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에라스무스는 교육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미신과 광신에 빠지는 것을 혐오하였으며, 항상 인문주의 정신을 회복하고 지키는 데 주력하였다. 중세적 사고의 질곡에 갇혀 있는 동시대인들에 대해 계몽 정신의 선구자인 그로서는 깨우침의 자극을 부여할 수밖에 없었으니 그것은 곧 교육의 본질이기도 하다.

 

그는 <우신예찬> 이외에 후반부에 <기독교 군주의 교육><아동교육론>을 각각 저술하였다. 이 중 후자가 비록 영어 번역본에 의한 중역이지만 국내에 출간되어 기본적 윤곽을 알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무려 5백년 전의 인물임에도 그가 이 얄팍한 책에서 쏟아내는 교육의 본질에 대한 역설은 전혀 시간의 간극을 느낄 수 없으니 참으로 대단하다.

 

에라스무스는 기본적으로 아동교육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 어릴 적에 나쁜 물이 들기 전에 서둘러 소양 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인 자식의 교육에는 매우 소홀히 함을 개탄한다. 말이나 개 등의 훈련에는 최고의 열성으로 우수한 전문가를 아낌없이 초빙함에도 오히려 자식을 방치함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어린 아들의 마음이 아직 악에 물들지 않고 산만함에서 자유로울 때, 가장 발달 가능하고 감수성이 예민할 때, 그리고 그의 정신이 모든 영향에 개방적이며 동시에 모든 것에 최고의 기억력을 발휘할 때 지체 없이 자유 교육과 첫 만남을 가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P.21)

 

그는 인간은 올바른 교육에 의하지 않고는 결코 훌륭한 인물로 자라날 수 없다고 말한다. 동물이 본능의 힘에 의존하여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꾸려나가는 것과는 다르다. 더구나 동물조차도 새끼들에게 생존에 필요한 요령을 학습시키려고 노력하니 이성적 존재라고 주장하는 인간이 본성과 도덕과 의무를 게을리 하는 것에 개탄한다.

 

이성의 능력은 오직 인간에게만 주었습니다. 그래서 인간 성장의 과업을 교육이라는 것을 통해 성취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행복의 시작으로부터 끝에 이르기까지의 그 전체의 합이 훌륭한 양육과 교육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P.30)

 

아이가 태어나면 (귀족의 경우) 유모에게 맡겨진다. 따라서 유모야말로 아이의 첫 번째 교사인 셈이다. 좀 자라나면 가정교사를 들여 교육을 맡긴다. 유모와 가정교사의 자질과 능력은 아동교육에 있어 매우 중요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깊은 성찰 없이 또는 단순한 비용 고려만을 통해 자질이 속되고 형편없으며 미신에 물들고 사악하기 조차한 사람에게 아이를 내맡기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고 에라스무스는 비판한다.

 

가정교사를 선택하는 문제에 있어서만은 당신은 진실로 아르고스의 눈을 필요로 합니다. 전장에서 두 번의 실수는 결코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서는 심지어 단 한번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P.72)

 

에라스무스는 인간의 참된 본성은 이성에 따라 삶을 사는 것이며, 이성적 존재인 인간에게 가장 해로운 것은 무지(P.52)라고 말한다. 그는 본성은 방법에 의해 계발되어야 하고, 방법은 실천을 통해 완성으로 나아가야행복한 삶을 기대할 수 있다고 본다. 방법은 곧 학습이다. 이처럼 그는 인간에게 교육의 중요성과 의의를 한껏 드높이고 있다.

 

학습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이 학교다. 불행히도 저자에 따르면 당대의 학교는 그러하지 못하다. 남을 교육시킬 수 있으려면 교육자가 피교육자보다 지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우월해야 함은 상식에 속한다. 교사가 지적으로 열악하고 정신이 저열하며, 품성이 야수적이라면 어떨까?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체험을 소개하며 학교란 곳이 얼마나 비교육적이고 반교육적인 곳인지 여실히 고발한다. 습관적 가혹행위와 구타가 난무하는 곳, 그곳이 바로 학교다.

 

그는 참다운 학교의 장면을 그린다. 온화함과 우아함이 지배하는 곳. 제아무리 지겨운 공부라도 능력 있고 뛰어난 교사의 솜씨로 재미있는 놀이처럼 아이에게 받아들여져 유용함이 즐거움과, 완전함이 쾌활함과 함께 추구(P.100)되는 곳, 그곳이 진정한 학교의 모습이다.

 

에라스무스의 교육론이 오늘날 교육학계에서 어느 정도 인식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분명히 시대적 한계도 일정 부분 내포하고 있을 것임은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이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여전히 그의 아동교육에 대한 선구적 혜안은 놀랍기 그지없다. 이는 자신의 체험과 관찰과 진지한 사색의 결과일 것이다. 실상 그 자신이야말로 끊임없는 학습을 통해 당대 최고의 지성인으로 추앙받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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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 격언집
에라스무스 지음, 김남우 옮김, 김태권 그림 / 아모르문디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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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에라스무스는 고전적 저작인 <우신예찬>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우연한 기회에 이 책을 읽어보니 의외로 뛰어난 점이 많아서 새삼 에라스무스에 관심이 생겼다. 그래서 저자의 다른 책이 나온 게 없나 살펴보다 그의 <격언집>이 나온 걸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상기 고전의 유명세에 가리워졌지만 실상 에라스무스의 필생의 역작이라고 할 만하다. 최초의 명성을 안겨다 준 것도 이 책이며,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적으로 개정판을 낼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다. 게다가 그 어마어마한 분량이라니! 처음 발행 시 800여 개, 나중에는 4,100여 개까지 늘어났다고 한다. 60개 정도의 그나마 짧은 글들을 맛보기로 모은 게 이 책이니 완역을 한다면 최소 수십 권의 두꺼운 책들이 쭉 펼쳐지는 장관을 볼 수 있게 된다.

 

각 격언의 구성은 먼저 격언 명이 제시되고 이어 숨은 뜻을 풀이한다. 다음엔 그 격언의 최초 출처와 이후 재인용된 유명한 고전의 저자와 내용이 소개된다. 가끔씩은 에라스무스 자신의 해석이나 논평이 추가되기도 한다.

 

한편 별도의 그린이에 의해 각 격언마다 라틴어 독음과 삽화가 덧붙여졌는데, 특히 삽화는 고전과 현대의 명화를 격언의 내용에 부합되게 패러디하고 있다. 자체로서 흥미롭고 격언만 나열될 때에 비해 반복되는 지루함을 없애는 데 일조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하나 반드시 이 격언집의 고전적 격조와 성격에 적합하다고 만은 할 수 없다.

 

에라스무스는 격언집에 서문을 달고 있는데, 격언의 정의와 성격 및 독자성과 유용성, 사용된 비유법 등을 다루고 있어 일종의 격언론이라고 불릴 만하다. 그는 비유적 치장으로 즐거움을 가져다주며, 담겨있는 생각으로 동시에 유익을 전하고 있는 격언이야말로 최고의 격언”(P.21)으로 평한다. 옮긴이는 서문의 전문을 한번에 소개하지 않고 중간마다 분할 배치하여 역시 편집의 묘를 꾀하고 있다.

 

수록된 격언들의 풍부함과 소개된 고전들의 다양함을 통해 독자는 에라스무스의 고전 이해의 폭과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그리스 로마 시대 및 이후 중세에 이르기까지 고전 사상가와 작가들의 수많은 저작과 문학작품들을 거리낌없이 자유자재로 인용하고 있다.

 

격언은 우리의 속담과 금언 또는 고사성어 등과 유래와 형태 및 용도 등에서 유사하다. 그래서 소개된 몇몇 격언은 우리에게도 오히려 귀에 익다. ‘유유상종’, ‘시작이 반이다’, ‘연기를 피하다 불 속에 떨어지다’, ‘모기를 코끼리로 만들다’, ‘밑 빠진 독. 게다가 에라스무스는 단순히 고전의 소개에만 그치지 않는다. 몇몇 격언들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뚜렷이 남기고 있다.

 

사도 바울은 저마다의 생각이 다름을 인정함으로써 당파 간의 논쟁을 피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오늘날 신학자들이 만약 바울의 이런 넉넉함을 조금이라도 배운다면 요즘 비일비재한 바, 하찮은 문제로 그렇게까지 싸우고 갈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그저 잊고 지내도 좋았을 것이며, 잊는다고 신앙심에 흠결이 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사람 수만큼 생각도 다르다’, P.87)

 

사람들은 왕후의 궁전에서 또 다른 종류의 원숭이들도 만날 수 있다. 만약 이들에게서 걸치고 있는 겉옷과 목걸이, 팔찌 등 장식을 걷어내면 그야말로 돈만 밝히는 형편없는 인간을 보게 된다.”(‘원숭이가 주단 관복을’, P.140)

 

격언을 선별하는 기준 설정과 과정에서, 그리고 고전 문헌에서 적절한 인용을 뽑아내는 과정에서 그리고 이의 당대 현실과의 비교에서 편집자의 주관과 해석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신예찬>의 맹아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에라스무스는 상아탑과 수도원에 갇혀 탁상공론만 일삼는 인물이 결코 아니다. 그는 시대의 모순과 아픔을 처절히 인식하고 이를 개선하고자 하는 열의를 지녔으나 시대적 한계에 가로막혀 스러져 간 참된 지식인이다.

 

이 책은 재미 외에 독자에게 두가지 유용성을 제공한다. 하나는 에라스무스에 대한 보다 심층적 이해가 가능하게 되는 점이다. 그리고 실용적 관점에서 인용된 그리스 로마 고전들을 통해 정서적 거리감을 극복하고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친근감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에라스무스를 통해 서양 고전들이 화석과 박제 상태에서 뛰쳐나와 우리와 같이 뼈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들의 글임을 새삼 발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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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브 공작부인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9
라파예트 부인 지음, 류재화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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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대함과 정중함이 앙리2세 치세 말년만큼 프랑스에 눈부시게 나타난 적은 없었다. 왕은 우아하고 친절하고 다정했다. 디안 드 푸아티에, 그러니까 발랑티누아 공작부인을 향한 왕의 열정은 이십 년 전에 시작되었지만, 그때보다 덜 열렬하지도 덜 눈부시지도 않았다.”(P.9)

 

이 작품은 이렇게 시작한다. 해서체의 단정하고 우아한 문체는 작가의 특질을 그대로 전달한다. 급작스런 감정의 변화에 빠지지 않고 침착하며 조리 있지만 차갑지 않고 차근차근한 어투.

 

남녀 간의 애정사는 자고로 여러 문학작품의 끊이지 않는 샘이 되었다. 이는 유럽의 궁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서 왕 이후 궁정풍의 사랑은 훌륭한 기사의 필수 덕목으로 자리 잡았다. 더구나 결혼이 사랑이 아니라 이해관계에 따라 맺어진 경우 배우자와의 무심한 관계는 애인을 필수적으로 요구하게 되었으며 오히려 드러내놓고 자랑할 꺼리가 되곤 하였다. 이는 부정과 불륜으로 진전될 소지가 많았기에 도덕적 문제가 존재한다.

 

이 작품이 출판된 게 17세기 후반이며, 작품의 배경은 16세기 중반의 프랑스 왕정 체제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작품 속에 드러나는 여러 공공연한 부정의 정황으로 보건대 당대는 이미 도덕적으로 많이 허물어진 시기임을 알게 된다.

 

야망과 연애, 이것이 궁정의 정신이었고 사내들이건 여자들이건 하나같이 그 일에 전념했다......권태도 몰랐고 여유도 몰랐다. 쾌락에 혹은 밀통에 바빴다.”(P.23)

 

작품의 전반부는 대체적으로 프랑스 궁정 비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권력을 잡기 위한 각 세력들의 비상한 합종연횡, 그리고 국제 정세와의 맞물림 등. 때문에 16세기 서양사, 특히 프랑스사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상당한 혼란을 겪을 정도다. 물론 라파예트 부인의 당대 독자라면 부연 설명 없이도 충분히 이해를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작가의 의도는 아마도 사랑과 야망[사업]이 이질감 없이 동거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비추는데 있을 것이다. 클레브 공작부인은 사랑을 모르는 채 결혼한다. 시장에서는 적당한 수요가 있을 때 얼른 거래를 성사시켜야 한다. 자칫하면 악성재고로 전락하게 된다. 클레브 공작은 부인을 열렬히 사랑하는데, 공작부인은 남편에 대한 존중과 호의만 가지고 있으니 비극은 여기서 배태되었다.

 

샤르트르 양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클레브 공작은 자기를 만족시킬 만한 감정을 그녀가 갖기에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그가 말하는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P.32)

 

애정 없는 결혼 생활도 현실에서는 영위에 어려운 것은 아니다. 사랑 외에 결혼 생활을 존속시킬만한 다른 요소는 충분하므로. 그런데 배우자가 아닌 인물에게 사랑의 감정이 눈떠지게 되면 매우 곤란하게 된다. 사랑은 이성으로 제어되는 게 아니다.

 

클레브 공작부인은 도덕적 정숙함이 남다르다. 그런 그녀는 사랑에 강하게 저항하지만 운명처럼 다가온 느무르 공에 대한 사랑은 가랑비에 옷 젖듯이 그녀의 마음에 깊게 스며들었다. 그녀의 부질없는 저항은 눈물겨울 정도다. 그녀는 결코 자신의 감정을 상대에게 표출하지 않았으며 비난받을 만한 행위도 저지르지 않았다.

 

클레브 공작부인은 이것이 자신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말에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았고, 그 말을 묵인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척, 그가 말한 여자가 자기라고 생각하지 않는 척해야 할 것도 같았다. 말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고, 또 절대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P.81)

 

그녀는 자신의 감정 상태를 남편에게 고백한다. 사실 이건 매우 어처구니없는 행동이다. 모르는 게 약이며, 아는 게 병이라고 했던가. 제아무리 부부 간이라도 자신의 내밀한 감정까지 털어놓는 것은 오히려 원만한 결혼생활을 저해함을 그녀는 미처 몰랐던 것이다. 다만 자신의 진정성과 정숙함을 남편이 이해하여 주기를 바랐을 뿐이다. 사랑에 이해는 없다.

 

당신의 고백은 너무나 고결해서 나로서는 당신을 전적으로 믿을 수밖에 없소......당신은 그 어떤 아내도 남편에게 보이기 힘든, 가장 위대한 정직을 보여주었고, 그래서 나를 가장 불행한 남자로 만들어버렸소.”(P.139)

 

질투는 클레브 공작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그녀는 남편의 죽음의 원인이 자신임을 알고 커다란 충격과 절망과 자책에 빠진다. 어쨌든 남편의 사망으로 그녀는 혼자가 되었으며, 법적, 도덕적 장애물도 사라졌다. 그녀에 대한 느무르 공-뭇 여성이 질시할 만한 완벽한 남성-의 구애는 한층 집요해졌다.

 

그녀는 앉아 있던 자리에 두 시간이나 머문 후, 결국 그를 보는 것은 자신의 의무와 전적으로 상반되는 일이니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집으로 돌아갔다.”(P.204)

 

이 작품은 16세기 프랑스 궁정사를 잘 보여주는 역사소설이며, 당대 상류층의 비도덕적 애정사를 비판하는 사회소설이다. 또한 클레브 공작부인의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변화를 미묘하게 그려낸 사랑소설이기도 하다. 여기서 작가는 격정의 분출 없이 절제된 어조와 행동 묘사를 통하여 공작부인과 공작, 공작부인과 느무르 공 간의 삼각관계에서 빚어지는 긴장과 갈등을 탁월하게 그려내고 있다. 매우 예민하고 위험한 소재임에도 구질거리지 않고 끈적거림 없이 담백한 뒷맛을 풍기는 것은 역시 작가의 솜씨일 것이다.

 

작품해설에서 알베르 카뮈가 이 작품의 빼어난 스타일을 칭찬하였다고 한다. 확실히 다른 작가 및 작품과는 구별되는 독특함이 한눈에 불쑥 다가오지는 않지만 은연중에 다름을 인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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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여신의 바보 예찬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지음, 차기태 옮김 / 필맥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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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만 보고는 도무지 무슨 책인지 감을 잡을 수 없다. 저자를 확인하기 이전까지는. 옮긴이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한다. 한글세대에 한글식으로 제명을. 하나 교과서가 고쳐지지 않는 한 우리는 <우신예찬> 또는 <광우예찬>에 더 익숙하다. 비록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세계사 수업에서 달달 외운다.

 

너무나 유명한 고전은 잘 안 읽게 된다. 읽지 않아도 마치 읽은 듯한 기독감(旣讀感) 때문이거나, 아니면 고전이라는 무게감에 짓눌려 지레 겁먹고 펴볼 엄두도 내지 않는다. 게다가 고전은 대체로 낯설고 딱딱하며 재미가 없는 편이 사실이다. 그래도 중압감을 무릅쓰고 고전을 펼치면 의외로 많은 수의 작품들이 그리 어렵지 않으며 오히려 호기심을 유발할 정도임을 알게 된다. 에라스무스의 이 책도 마찬가지다. 어떠냐 하면 이런 재미나고 흥미진진한 책을 이제야 보게 되다니 하며 후회가 물밀 듯 몰려올 정도다.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의 마르틴 루터, <유토피아>의 토머스 모어 등과 동시대를 살아간 인물이다.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가톨릭과 중세 봉건 영주 체제가 여전히 굳건히 위세를 떨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두면 당대의 종교 세력과 정치 세력을 풍자하는 것의 어려움과 위험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에라스무스는 바보 여신을 화자로 내세웠다. 바보 여신이니만치 그의 어조와 주장 등은 신랄해서는 안 된다. 어리숙하게 보여야 하며, 내용도 우스꽝스럽고 해학적으로 비쳐야 한다. 그 속에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날카로운 비수로 드러나지 않게 당대를 파헤쳐야 하는 어려운 작업이기도 하다.

 

전체적 구성은 바보 여신이 자신이야말로 정말로 칭송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며 자화자찬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하여 온갖 그리스 로마의 전거를 들먹이는 동시에 엄숙하고 도덕적인 체 하는 속물들의 실체를 우회적으로 까발린다. 그네들의 위선적인 생활과 언행에 매우 비판적인 반면, 평민들에 대해서는 우호적이다. 그들은 삶에 충실하며 간혹 발생하는 잘못도 어리석음과 본능에 충실한 데서 비롯한다고 본다.

 

이쯤에서 표제를 되돌아본다. 에라스무스는 표제에서 이미 반어법을 사용하였다. 중세 사회에 대한 풍자라는 표면적 이해만 가지고 볼 때, 그가 당대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바보 여신으로 의인화하여 풍자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이는 완전한 착각과 오해다. 그는 바보 여신의 입을 빌려 오히려 바보 여신의 주장에 가깝게 사는 것이 인간의 행복에 도달하는 길이라고 역설한다.

 

바보 여신은 종교적 엄숙주의, 경건주의 및 철저한 도덕주의를 배격한다. 인생이 슬프고 지루하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으며, 어리석음이 가미될수록 인간의 삶은 유쾌하고 즐거워진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의 삶에 있어 유희의 필요성, 사랑과 우정에 있어 맹목적 요소가 차지하는 비중 등 자신의 영역이 발휘하는 힘을 과시한다. 부부 관계나 처세술에 있어 때로는 환상과 아첨이 중요하다는 것도. 이것의 절정은 바로 자기 사랑일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이성과 종교와 도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본능 자체이다.

 

이렇게 전반부는 바보 여신의 자기 예찬으로 전개되는데, 후반부는 다소 지향점이 다르다. 본격적으로 풍자와 비판에 나서는 것이다. 그는 학문은 행복을 위해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본성에 맞게 사는 것이므로 불행하지 않으며, 상식은 어리석음과 통하므로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학문에는 결코 가까이 가지 않고 자연이 인도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P.104)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현인 티를 내는 위선자를 일일이 열거하면서 그 허위를 사정없이 까발린다. 문법학자, 웅변가, 책을 쓰는 사람들, 법률가, 철학자, 신학자, 수도사들. 특히 마지막 두 유형에 대해서는 인정사정없다. 예수의 사도들조차 신학자와 신학상의 문제에 관해 논의를 한다면 다른 영혼의 도움을 필요로 할 것이라며(P.181), 그리고 수도사들은 누구에게나 혐오의 대상이 된다고 하며(P.193). 이 점에서 당대에 종교의 해악이 얼마나 지대하였으며, 종교개혁 운동의 발생이 불가피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바보 여신은 왕과 제후들, 귀족들도 빠뜨리지 않는다. 하지만 곧바로 교황, 추기경, 주교 등 성직자에게로 넘어간다. 이는 세속 권력자에 대한 은연중 눈치 보기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세속권력을 교황이 움켜쥐고 있기에 성직자들의 부정과 부패가 그만큼 극심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마지막 단락에서 그는 각종 전거를 들먹이며 어리석음이야말로 모든 축복과 행복의 근원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스 로마의 고전은 말할 나위도 없고 성서도 다채롭게 인용하고 있다. 정리해서 말하기를 기독교는 어떤 형태로든 어리석음과 일종의 혈연관계를 맺고 있는 게 분명해요. 그렇지만 지혜와는 거의 관계가 없고요.”(P.263)라고 하면서 가장 큰 바보는 그리스도의 경건함에 대한 열정에 완전히 사로잡힌 사람들이라고 언급한다. 당대에 진실한 신앙인이 얼마나 적은지와 아울러 역설적으로 참된 신앙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언명이다. “경건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보상은 광기”(P.270)라는 것이다.

 

에라스무스가 살아가던 시절은 과도기이자 혼란기였다. 공고한 중세 체제는 많은 균열이 있음에도 여전히 종래의 권력 끈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치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마르틴 루터를 위시한 종교개혁 운동이 각지에서 발생하여 세속권력자들과 연합하여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종교와 이념의 갈등은 세속적 욕망의 충돌보다 훨씬 더 위력적이며 무자비한 유혈사태를 불러옴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극단이 춤추는 곳에서 중용은 자리 잡기 어렵다. 중용은 자칫 공공의 적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며 섣부른 오해의 대상이 되기에도 딱 알맞다. 그럼에도 정의와 진리를 주장하면서 극단적 충돌도 마다하지 않는 것은 그 주장의 가부와 진위 여하를 떠나서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에라스무스는 당대 사회현실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판의 메스를 날렸지만 결코 직설적이지 않다. 바보 여신의 어리석고 우스움을 전면에 내세워 해학 속에 깃든 진실을 은연중에 알게 하였던 것이다. 그런 그로서는 낡은 체제의 허위도 새로운 체제의 위선도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참된 지식인의 자세와 고뇌가 엿보인다면 억측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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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메이드 픽션
박형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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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은 단편집의 제명을 대개 가장 핵심적인 단편작품의 표제를 그대로 가져온다. 간혹 수록작품들의 배경, 작품세계 등을 공통으로 아우를 수 있는 제명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분명 박형서는 후자의 예를 따랐다.

 

소설치고 핸드메이드가 아닌 것이 있으랴? 더욱이 픽션이 아닌 소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굳이 작가는 이 제명을 선택하였다. 그 연유의 추론은 곧 작가의 의도를 밝히는 첩경일 수도 있다.

 

소설은 분명 허구를 그린다. 하지만 작가가 소설 속에 그리는 인물과 사건, 배경 등은 완전한 허구가 아니다. 현실에 기반을 둔 그럴듯한허구인 것이다. 따라서 작가는 현실 세계의 많은 요소를 관찰하고 작품에 그대로 또는 가공하여 도입한다. 그래서 독자는 소설 속 내용을 그럴듯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박형서는 아니다. 수록된 8편의 단편들은 철저하게 작가가 지어낸 이야기들이다. 간혹 나타나는 인물과 배경 등의 현실성은 오히려 이질감을 두드러지게 하여 비현실성을 배가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그에게 있어 그럴듯함은 별다른 고려 요소가 아니다. 역으로 그럴듯하지 않음을 노리고 작위적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전개해 간다. 산신령과 물신령이 서로 싸우며, 호숫가의 커다란 바위 구멍에 머리가 끼어 죽는다든가, 고양이가 스스럼없이 사람처럼 행세하며, 금도끼은도끼 실험으로 산신령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측정하는 시도 등은 얼핏 터무니없지만 독자는 그 황당함에 오히려 매료된다. 그의 상상력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피리 부는 사나이를 소재로 천년의 시간과 전 세계의 무대를 비좁게 만든다.

 

박형서의 이 작품집은 분명히 판타지 문학이다. SF나 유령이 나오는 작품만 판타지는 아니다. 현실에 기반하지만 이성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현실의 비현실적 속성을 다루는 게 오히려 수준 높은 판타지다. 언뜻 황당무계할 수도 있지만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현실에 잠복해 있는 진실을 재발견할 수 있도록 해준다.

 

<너와 마을과 지루하지 않은 꿈>은 화자의 독특한 시점이 흥미롭다. 2인칭 전지적 작가시점이라고 할까. 화자는 언제나 너와 마을을 배회하며 관찰한다. 결말은 충격적 의외성을 안겨준다. 이색적인 이야기 자체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정류장>에서는 순진한 부정(父情)에 가슴 맺힌다. 아들을 위해 버스정류장이 들어서도록 온갖 노력을 하는 아버지. 염원대로 정류장은 들어서지만 이는 오히려 그들 부자와 마을에 재앙을 가져오고 만다. 수십 년 후 화자가 우연히 수몰된 고향을 찾게 된 것은 결국 마음 한구석에 잠재된 아버지에 대한 소멸되지 않는 기억의 작용이리라. 이제 그는 낡은 정류장을 떠날 수 있게 되었으며, 아버지도 그를 떠나보낼 수 있게 되었다.

 

<나무의 죽음><열한시 방향으로 곧게 뻗은 구 미터가량의 파란 점선>은 산신령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닌다. 전자에서는 도로 개설을 두고 산의 정령과 물의 정령이 서로 다투는 과정이 현실과 교묘하게 결합되어 엉뚱하지만 별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후자는 설화를 과학적으로 재현해 본다는 황당함이 등장인물들의 진지한 학술적 태도에 압도당해 독자마저도 숨을 죽이고 재현 결과를 기다리게 만든다. 산과 물은 본시 하나임에도 인간 앞에 그들은 갈라져 버리고, 자연은 죽어간다. 그네들을 분열시키고 망쳐버린 것은 외견상 정령들 자신이지만 실상은 이를 부추기고 밀어붙인 인간들이다. 이러한 건방진 인간들에게 자연의 가공할 위력을 보여준 것이 금도끼은도끼의 산신령이다. 설화를 자체로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는 그들에게 산신령은 외경의 대상이 아니라 한낱 분석과 실험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신의 아이들>은 무엇보다 시() 자체에 대한 논의가 흥미롭다. 언어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이를 극복하고 본질을 드러내려는 가열찬 치열함이 시인의 숙명임도. 그것은 도구를 달리하지만 모든 예술에 공통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천재성이 아무에게나 주워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술은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랬다면 살리에리는 좌절하지 않았을 것이며, <달과 6펜스>의 비극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원로시인의 자괴감도.

 

<갈라파고스><자정의 픽션>도 이채롭다. 둘 다 동물이 주된 인물이라는 점, 그리고 이름이 동일하게 성범수라는 점. 작가의 지향은 인간이 아닌 동물의 시각에서 사건을 구성하고 전개하는 데 있다. <너와 마을과 지루하지 않은 꿈>도 동물-땅벌-의 시각으로 구성되지만 관찰자에 그칠 뿐 사건을 주도적으로 이끌지는 않는다. 반면 이 두 작품에서는 당당한 주인공 역할을 수행한다. 둘 다 순환구조라는 점도 흥미롭다. 인간의 허울을 벗겨버리면 인간 자체는 매우 연약하고 초라한 존재다. 그럼에도 가난한 연인이 꾸는 꿈은 평화롭고 안온하며 행복하리라.

 

수록작 중 가장 길며 웅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것이 <나는 부티의 천 년을 이렇게 쓸 것이다>인데, 천년을 훌쩍 뛰어넘고 동서양을 넘나드는 장쾌함에 압도된다. 고대 인도의 종교적 요소를 피리 부는 사나이이야기와 교묘하게 연결시키고 불사의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 일주의 대탐험을 겪고 우리나라에 오게 한다. 영원한 생명을 버리고 유한적 존재가 되기로 결심하여 평범한 늙은이가 된 부티=한분태의 엄숙하고 진지한 한마디가 패러디되는 장면을 보자.

 

박형서,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자 스토리 크리에이터이다. 어떤 순간에도 절로 웃음을 자아내는 진지한 골계미는 작가 특유의 미덕이다. 소설마저도 철학과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시기다. 거창한 작품해설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야기 본연의 힘과 재미를 끌어낼 수 있는 박형서 만의 프로젝트가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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