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맞이 언덕의 소녀 레인보우 북클럽 11
비욘스티에르네 비요른손 지음, 고우리 옮김, 어수현 그림 / 을파소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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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90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비요른손의 작품은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고 있다. 이는 북구 문학 전반에 관련된 사안으로 국내 출판계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현상이라 하겠다. 그나마 비요른손의 작품 중 간혹 소개되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이다. ‘양지바른 언덕의 소녀’ 또는 여주인공의 이름을 딴 ‘신뇌베 솔박켄’ 등의 여러 타이틀로 나왔는데 모두 단종되고 근래에는 소식이 없다가 이번에 을파소에서 아동과 청소년 문학 시리즈의 일환으로 새로 간행되었다.

 

이 작품이 작가 비요른손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가장 인기작이다. 아마도 북구의 전원을 배경으로 누구나 공감 가능한 소년과 소녀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기인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책을 읽기 전에는 아름답고 따뜻하며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같은 인상을 기대하였다.

 

북구의 자연환경이 작가의 필치와 문체에 우러나온다면 과장일까. 사건 전개상 완전히 아동을 대상으로 한 작품이 아님을 새삼 깨닫게 된다. 북구에서는 여름이 짧고 겨울이 길며 겨울의 추위는 매섭기 그지없다고 한다. 따라서 그네들에게 봄과 여름의 햇볕은 소중하기 그지없는 존재이며 심리적으로 받아들이는 영향도 자못 클 것이다. 이 소설이 딱 그러하다. 한마디로 하자면 밝음 속에 드리워진 북구의 정서! 그것은 자연 묘사와 사람들의 성격과 행동, 특히 토르비욘의 어린 시절을 지배했던 불량소년 아슬락에게서 두드러진다. 자연이 그 속에 안주하는 사람들의 삶과 문화에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지대한가. 한편 아슬락에 대해서는 작가가 더 할 말이 많은데 아낀 흔적이 역력한데, 작품의 전체적 성격상 더 깊은 관심과 비중을 쏟아 붓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이해된다.

 

기실 토르비욘과 신뇌베는 비슷한 또래로 같은 마을에서 자라나 서로에 대해 잘 아는 사이였고, 우정이 애정으로 발전한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대도시도 아닌 적은 인구가 모여 사는 고립된 소도시 또는 마을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두 집안이 한쪽으로 크게 치우치지도 않으며, 비교적 원만한 이웃관계를 유지한 점도 나쁘지 않게 작용하였다. 그럼에도 두 청춘남녀가 맺어지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토르비욘의 인격적 성숙이다.

 

새삼 서구인들의 삶과 생활을 지배하는 교회와 종교적 영향력에 대해 주목한다. 환경과 교통으로 고립된 마을에서 교회는 사람들의 내적 불안을 완화시켜 줄 뿐만 아니라 마을 주민들이 모여서 교류와 소통을 하는 열린 공간의 기능도 담당한다. 게다가 탄생과, 견진성사, 결혼 및 장례 등 인생 대소사의 중요 의식이 거행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가는 제2장에서 새삼 “노르웨이 농부의 삶이란 교회와 연관 없이는 말할 수 없다”고 표현하고 있다.

 

타이틀에서 풍기는 뉘앙스만큼 밝고 화창하지는 않지만, 소년 소녀가 꾸려나가는 소박하면서 대견한 사랑은 한번쯤 읽어 볼 가치가 있다. 더구나 주인공들과 동년배의 독자들이라면 남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나의 것으로 쉽게 동화될 수 있을지 모른다. 아동에게 있어 동화, 청소년에게 있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으로 대표되는 성장문학의 의의가 바로 이런 것이다. 그 시기를 놓치면 이해는 하되 절대적 공감을 하기 어려운. 현재의 나가 아닌 당시의 나였다면 아마도 독서중과 독서후의 감회는 분명 지금과는 많은 차이를 보였을 것이다. 시기를 놓친 점이 자못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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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렘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10
구스타프 마이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책세상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마이링크의 작품은 흥미롭지만 결코 녹록치 않다. 작가 특유의 기묘한 신비성이 작품 중에 짙게 드리워져 있어 안개 속을 헤매는 양 분명한 이해와 인식을 어렵게 휘젓는다. 그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인 이 <골렘>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을 흥미롭게 하는 요소들을 몇 가지 추려볼 수 있다. 먼저 골렘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다. 골렘은 17세기 유대 랍비가 만든 진흙생명체라는 기술이 나와 있지만 이것이 궁금증을 해소해 주지는 못한다. 골렘은 츠바크의 말대로 30년마다 부활하는 실체를 가진 존재인가 아니면 일종의 집단 증후군인가. 작품 곳곳에 골렘을 지칭하는 표현이 모호한 어법으로 등장한다. 골렘은 유대 신비주의와 프라하의 유대인 게토지역의 토양에 뿌리박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나는 그 건물들의 벽 안쪽에서 마치 허깨비처럼, 마치 피와 살이 없는 존재들처럼 살면서 사고와 행동에 있어서도 아무렇게나 조각조각을 모아놓은 듯한 모습을 보이는 그 이상한 사람들을 마음속에서 차례로 떠올린다.” (P.34)

 

“눈에 보이지 않는 범죄의 유령이 사람들이 사는 이 골목 저 골목을 밤낮으로 누비고 있어. 그 유령은 허공에 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해. 그러다가 그것은 갑자기 인간의 영혼을 급습하는 거야. 우리는 그것의 존재에 대해 무감각해. 우리가 그 존재를 알아차리는 순간 그것은 사라져버리고 모든 것은 끝나버리는 거야.” (P.47)

 

“한 세대에 한 번씩 하나의 정신적인 전염병이 번개처럼 이 게토 지역을 훑고 지나가면서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어떤 목적을 위해 사람들의 영혼을 습격한다. 그때 어떤 특별한 존재의 윤곽을 신기루처럼 나타나게 한다. 어쩌면 이곳에 수백 년 전에 살았을 그 존재가 이제 형태와 모습을 갖추고 싶어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P.59)

 

누구도 골렘을 제대로 본 사람은 없지만, 누구나 골렘을 보면 그것이 골렘임을 순간적으로 깨닫게 된다. 페르나트는 골렘이 자신을 닮았음을, 자신의 도플갱어임을 강하게 의식한다. 이렇게 골렘은 실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작품 내내 화자를 비롯한 게토 지역 사람들의 정서를 휘감고 다닌다.

 

화자인 나는 곧 페르나트라는 점에 작중에서는 한 치의 의구심도 표명되지 않는다. 페르나트는 정신이상으로 과거의 기억을 거의 상실한 상태로 게토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그러다가 결말 부분에 화자인 나가 페르나트 소유의 모자를 쓰고 깊은 꿈에 빠졌음이 드러난다.

 

마이링크는 젊은 시절 삶에 회의를 느껴 자살을 하려던 순간 신비주의 전단지를 보고는 새로운 인생을 찾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동양의 신비주의 못지않게 서양도 신비주의의 연원이 자못 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기독교의 숱한 분파적 신비주의는 새삼 말할 것도 없다. 유대교의 경우도 카발라 밀교가 은밀히 전승되고 있으며, 기독교 전래 이전 서양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던 켈트와 게르만적 유산도 분명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생명 없는 인조인간들이 거리를 배회하는 끔찍한 광경, 이것은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라 마이링크가 바라본 당대 프라하 도시의 모습이다. 이것이 오늘날 첨단 도시 속을 살아가는 현대인과 무슨 차이점이 있으랴. 마이링크와 페르나트가 느끼는 골렘은 곧 인조인간화 된 현대인들의 자화상일 수도 있겠다. 현대 문명 비판자들은 인간이 도시화되고 문명화될수록 내면의 자연성과 인간성을 상실한다고 주장한다. 페르나트가 과거를 잃어버렸듯이 우리들도 자아의 한 부분을 상실한 채 물질문명 세계를 휘청거리며 배회한다.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알지도 모르는 채.

 

마이링크는 작품에 다양한 의미와 색채를 부여하기 위하여 여러 인물과 사건을 등장시키고 있다. 이 요소들이 페르나트를 둘러싼 채 작품을 보다 흥미롭고 풍요롭게 만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론 바서트룸과 차루세크, 안겔라와 사비올리 박사는 아론 바서트룸의 아들 자살과 관련하여 은원 관계에 휘말려 있다. 아론에 대한 차루세크의 증오는 자신과 생모를 버린 생부에 대한 혈연에 기인하며, 따라서 아론의 죽음과 함께 차루세크의 죽음도 예정된 것이라 하겠다.

 

페르나트의 친구들, 즉 츠바크, 프리스란더, 프로코프는 작품의 핵심인물은 분명 아니다. 그것이 이들의 중요성을 반감시키지는 않는다. 그들은 페르나트가 자신의 정체성에 의구심을 갖도록 하는 계기가 되며, 그와 독자들에게 게토 지역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골렘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소설의 분위기와 향후 전개방향을 암시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게다가 그들과 어울리는 페르나트를 통해 게토 지역의 현실의 삶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작중에서 가장 신비로운 인물들은 아마 셰마야 힐렐과 그의 딸 미리암이다. 랍비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힐렐은 심오한 영성과 깊은 예지, 철저한 종교적 생활로 인해 게토에서 독보적인 인물이다. 그의 전지전능함에 페르나트마저 무한한 존경심을 품는다. 반면 이런 완전하고 신비로움이 그의 독창적 인물 형성에 방해가 되었다는 인상이다. 확실히 그에게는 생동하는 자유로움과 인간다움이 부족하다.

 

작품 후반부의 가장 흥미진진한 전개는 개인적으로 페르나트와 미리암의 은근한 사랑이다. 기적과 신성한 생활을 꿈꾸는 미리암과, 그녀의 기적을 도와주는 페르나트. 페르나트가 감옥에서 안타까워한 가장 큰 이유는 미리암의 소망을 무너뜨렸다는 데 있다. 감옥에서 몇 달 만에 풀려난 후 페르나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들 모녀의 행방을 수소문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소설의 결말은 골렘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다시 뒤엎는다. 건물의 화재와 출입구가 없는 방, 그리고 페르나트가 본 것. 마지막 등불의 집에서 화자가 본 페르나트와 미리암의 행복한 모습. 자웅동체의 인물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그곳.

 

골렘은 정신병적 증후도 아니고 악마적 존재도 아니다. 골렘은 자신의 분신 즉 도플갱어라고 하였다. 지금의 나는 본디의 반쪽에 불과한 게 아닐까. 나와 다른 나가 결합해야 온전한 나로 변용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상징적으로 자웅동체라고 하였으며, 페르나트와 미리암은 합일에 도달한 것이다. 이렇게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결여된 것은 바로 골렘이다. 우리는 반쪼가리 자아를 갖고 그것이 전부인 양 목을 뻣뻣이 하고 세상을 종횡한다. 무엇이 부족한지도 모르는 채. 설사 잃어버린 반쪽과 조우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오히려 극도의 유사성과 기시감에 공포를 느끼며 거리감을 느낀다. 이것이 작가가 노리는 제2의 독법이라는 상념이 스친다.

 

그러고 보면 작품말미의 가상 인터뷰에서 마이링크는 이 작품의 주제를 ‘영혼의 임신, 즉 정신적 자기 실현’(P.385)이라고 밝힌다. 이렇게 “자신과 도플갱어가 하나가 될 때 자기 실현은 이루어진다”(P.385)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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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왕의 죽음 2
토마스 말로리 지음, 이현주 옮김 / 나남출판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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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권에서는 트리스트람 경 이야기의 후반과 성배 탐색의 모험, 귀네비어 왕비와 랜슬롯 경의 사랑과 아서 왕의 죽음에 이르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트리스탄을 다룬 다른 작품들과 말로리의 이야기에는 강조하는 차이점이 확연하다. 말로리는 기사로서 트리스트람 경의 관점을 취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이조드는 필생의 연인임은 맞지만 이는 다른 기사들도 모두 연인을 갖고 있고 이를 꿈꾼다는 점에서 별다른 차이가 없다. 반면 트리스탄은 그러하지 않다. 그는 뛰어난 기사이지만 이는 부수적이다. 작품에서 강조하는 것은 연인 트리스탄이며, 이즈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숙명적 사랑이다. 따라서 트리스탄 이야기에서 빠졌던 원탁의 기사의 활약상을 말로리의 이야기에서 충분히 맛볼 수 있다.

 

트리스트람 경 못지않게 판이한 성격으로 변모하는 게 바로 마크 왕이다. 트리스탄 이야기에서 마크 왕은 고매한 인품과 덕성을 지니며, 도덕과 사랑 사이에서 고뇌하며 흔들리는 동정심을 품을 만한 인물로 나타난다. 반면 트리스트람 경 이야기에서 마크 왕은 오로지 사악한 존재다. 그의 사악함은 비단 트리스트람 경에 대한 것을 넘어서 평소 불의한 언행과 비겁한 태도에서 두드러진다. 고결한 트리스트람 경에 대비되는 절대 악의 현현으로 몰락하고 있다.

 

말로리의 이야기에서는 주인공적 등장인물 외에 못지않은 중요성과 비중을 두고 있는 기사 인물도 등장하여 독자의 심금을 매료시킨다. 라모락 경과 팔로미데스 경이 대표적이다. 팔로미데스 경은 이교도로서 트리스트람 경과 마찬가지로 이조드를 연모하므로 그와 끊임없이 갈등과 대결을 벌이는 상대역으로 나타나는데 이교도적 사악함과 기사도적 용기를 갖춘 모순된 유형의 인물이다. 라모락 경은 트리스트람 못지않게 비극적이다. 그는 랜슬롯 경, 트리스트람 경에 뒤지지 않는 탁월한 실력의 기사인데, 가웨인 경 형제들의 아버지를 싸워 죽이고 어머니와 연인 관계를 맺고 있어 가웨인 경 형제들의 원한을 사고 있다. 말로리는 라모락 경의 최후를 간접적으로만 전하고 있는데, 이는 고매한 기사의 비극적 죽음 장면을 피하려는 의도로 이해된다. 이러한 태도는 마크 왕에 의해 암살된 트리스트람 경의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귀네비어 왕비와 랜슬롯 경은 관점에 따라 여러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그들의 사랑을 순수하고 고매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의심할 여지없는 분명한 불륜인지 말이다. 순수한 정신적 사랑이었다면 침실에 불러들이고 같이 눕는 것을 스스럼없이 행하는 것을 당대의 일상적인 문화와 관습으로 볼 것인지 또 다른 의문이 뒤따른다.

 

확실한 것은 아서 왕과 랜슬롯 경에 대한 것보다 귀네비어 왕비에 대한 당대와 원탁의 기사들의 인식은 썩 훌륭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마도어 경의 왕비 기소 사건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우리의 가장 고귀한 아서 왕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는 경만큼이나 그분을 사랑하고 존경하오. 하지만 귀네비어 왕비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소. 그녀는 훌륭한 기사를 죽인 자이오.” (P.408)

랜슬롯 경의 왕비에 대한 언행과 왕비의 랜슬롯 경에 대한 언사를 비교하여 보더라도 확실히 귀네비어 왕비는 고매한 인간성을 지녔다고 보기에는 흠결이 엿보인다. 아서 왕의 부인인 왕비는 랜슬롯 경과 다른 여인의 연애와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는 광적인 질투와 투기를 드러낸다. 랜슬롯 경을 내치면서 뱉어내는 잇따른 저주의 언사(“그에게 저주가 내리기를!”(P.430))를 보면 고결한 아서 왕의 배필로 적합한 인물인지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이러한 그녀의 부적절한 사랑이 결국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을 파국으로 몰고 가게 된 단초를 제공하였다.

 

성배 탐색의 이야기는 앞서 읽은 <성배의 탐색>과 싱크로 율이 완벽히 일치한다. 말로리는 프랑스 원전을 최대한 동일하게 요약하는데 주력하였다. 성배 탐색은 아서 왕국의 몰락을 예고하는 모험이다. 사라져 버린 성배를 발견하고 온전히 찾아올 수 있다면 그의 왕국은 불멸의 영광을 누렸을 것이다. 하지만 신을 온전히 믿는 자는 거의 없고 아들은 아버지를 아끼지 않는(P.300) 당대 사회는 죄로 넘친 세상이었으므로 성배가 존재할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성배를 발견한 갤러해드 경과 퍼시발 경은 세속을 등지고 피안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작품 말미는 아서 왕과 랜슬롯 경 간의 슬픈 전쟁 이야기다. 여기서 가웨인 경 형제들이 주요한 역할을 맡는데, 이들은 훌륭한 가문이지만 진실하지 못한 심신으로 비난받으며, 모친 살해의 패역을 저지른 불의를 저지르고 있다. 그나마 가웨인 경이 사리분별이 탁월한데, 이마저 동생 가헤리스 경과 가레스 경의 뜻밖의 죽음에 맹렬한 분노에 휩싸여 버린다.

 

랜슬롯 경과 아서 왕의 분란은 잠재된 불안이 표면화된 것에 지나지 않았던 지도 모른다. 강력한 왕권 체제에서 왕보다 고결하고 용맹이 앞서며, 독자적 지지기반과 추종 세력을 가진 인물이 언제까지나 신하로 있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랜슬롯 경에 대한 가웨인 경의 미움은 상당 부분 왕실의 신권 견제에 기인한다고 이해된다. 하지만 가웨인 경은 섣불리 랜슬롯 경과 전면적 대결을 벌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래서 격노한 아서 왕을 달래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가끔 저희는 우리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일을 하지만 우연히 그것은 최악의 것이 됩니다.” (P.505)

 

분노로 이성을 상실한 가웨인 경은 배반자 모드레드 경(그는 아서 왕의 아들이었다!)과의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어 죽음에 임박하여 아서 왕에게 있어 랜슬롯 경의 존재가 필수적임을 다시 깨닫게 되었으나 운명은 사람들의 의지에 따르길 거부하였다. 랜슬롯 경과의 싸움에서 그리고 잇달은 배반자 모드레드 경과의 싸움에서 랜슬롯 경을 제외한 대부분의 원탁의 기사들은 죽음을 맞이하고 아서 왕의 강력하고 고결한 왕국도 종국을 맞이하였다. 아서 왕도 생사 여부가 분명하지 않은 채 아빌리온 계곡으로 배를 타고 떠나간다.

 

책장을 덮으면서 눈시울과 콧잔등이 시큰한 것은 위대하였던 이 전설상의 인물들에 대한 애석한 추모의 한줄기 상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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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단막극선집 - 대역/주석본
송옥 지음 / 동인(이성모)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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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품
<제2 목동극> : 작자 미상
<피라머스와 티스비> : 윌리엄 셰익스피어/프레데릭 리틀
<골짜기 그늘 아래> : 존 밀링턴 싱
<바다로 가는 사람들> : 존 밀링턴 싱

 

예이츠와 동시대 아일랜드의 요절한 극작가인 존 밀링턴 싱의 작품이 수록된 국내 유일(?)의 책이다. 아쉽게도 그의 대표작 <서쪽지방에서 온 난봉꾼[멋쟁이]>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제2 목동극>은 중세 신비극으로 웨이크필드의 수도승이 지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신앙극답게 예수 탄생의 신비를 소박하게 그려내고 있다. 여기에는 당대 목동들의 고달픈 삶이 해학과 어우러져 특유의 페이소스를 자아낸다. 흠을 잡는다면 예수 탄생 이전임에도 구세주와 기독교 성인 이름이 스스럼없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매우 지루할 것으로 예상하였는데 의외로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다. 이는 종교적 내용의 비중에 비해서 세 목동들의 고달픈 신세 한탄, 양도둑 매기와 그의 아내 질의 속임수 등 세속적 사건이 극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서 연유한다. 종교극을 표방한 한바탕 세속극이라고 하겠다. 예수 탄생의 필연성을 현실의 목동과 농민들이 고초를 겪는데서 찾는다.

 

<피라머스와 티스비>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한여름 밤의 꿈>의 극중극 장면을 한 편의 단막극으로 번안한 것이다. 솔직히 원작이 어떠한지는 읽어본 지가 오래되어 가물가물하다. 영주 앞에서 하층민들이 연극 공연을 벌이는 것인데, 그네들의 거침없는 말투와 바텀[바틈]의 거리낌 없는 좌충우돌이 인상에 남는다. 가벼운 소극(笑劇)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앞의 작품들에 비하면 존 밀링턴 싱은 극의 성격과 분위기가 확연히 대조적이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외딴 섬에서 거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극을 그리고 있다. 싱이 무대로 삼은 곳은 아일랜드 서부의 아란 군도이다. 거친 대서양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이곳은 아일랜드에서도 가장 오지이며, 환경이 척박하여 힘겹게 생존 투쟁을 벌여야 하는 열악한 땅이다. 역설적으로 가장 문명화가 덜 되어 있기에 켈트 문화의 고유성이 가장 많이 살아남은 곳이다. 싱은 이곳에서 아일랜드 고유문화의 원형을 발견하고 이를 생생하게 극에 반영시키고자 하였다.

 

두 작품의 주인공은 여인들이다. 아란 군도의 여성들은 가난과 무지의 억압으로 인해 일반적 여성다운 삶을 누리지 못한다. 그네들은 오로지 삶을 유지하기 위해 원치 않은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 게다가 언제든 배를 집어삼키는 무자비한 자연으로 인해 남편과 자식들이 목숨을 잃어도 체념한 채 살아가야 한다. 이 모든 요인들이 지독한 숙명성과 수동성을 부여하여 그네들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아란 사람들이 무조건 운명에 굴복하지는 않는다. 입센의 <인형의 집>을 연상시키는 <골짜기 그늘 아래>에서 가정제도의 억압성을 못견뎌하고 벗어나려는 여주인공 노라. 수동성을 탈피하고 능동적 여성상을 선택하려는 여주인공 이름이 입센의 작품과 동일하다는 점을 단순히 우연의 일치라고 치부하기 어렵다. 그녀의 자유로운 영혼은 켈트의 유산으로서 노라가 마이클 대신 떠돌이와 길을 떠나는 것도 이를 나타낸다고 하겠다.

 

<바다로 가는 사람들>에서 모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섬을 떠나는 배를 타려는 바틀리의 태도도 숙명에 저항하는 인간의 도전을 표상한다. “바다로 가는 건 젊은이의 삶”(P.277)이라는 캐스린의 대사는 곧 이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키워드이다. 죽을 줄 알면서도 바다로 가는 사람들, 죽을 줄 알기에 이를 만류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바다로 표방되는 자연은 위험천만하지만 삶을 위해 동반이 불가피한 존재다. 삶과 죽음이 나란히 이웃한 그곳에서 사람들은 두가지 삶의 방식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운명에 오뚝이처럼 도전할 것인가, 운명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할 것인가.

 

작가 싱이 아일랜드의 오지에서 발견한 것은 날것 그대로의 아일랜드였다. 근대 도시문명에 길들여진 나약함이 아니라 거칠고 투박하지만 그 안에 억압과 운명에 굴복하지 않는 불굴의 영혼을 지닌 아일랜드인.

 

<골짜기 그늘 아래>에서 노라는 과감히 문을 박차고 길을 떠난다. 그녀의 앞길은 평탄하지 않을 것이다. 제아무리 떠돌이가 장밋빛 미래를 주절거려도. 집을 나서는 순간 노라는 가정이 주는 안전과 보호막을 상실하고 세찬 풍파에 직면해야 한다. 헐벗고 굶주리며 길바닥에서 새우잠을 자야하는 처지에 놓일 수도 있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감수한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것처럼 주체를 상실하고 피동적인 삶은 사는 대신 그녀는 힘겹더라도 자아를 지키며 능동적인 주체가 되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바다로 가는 사람들>의 마지막 장면은 바틀리를 보내는 노모 모이라와 여인들의 호곡으로 맺는다. 모이라에게 죽음은 이미 낯선 현상이 아니다. 슬픔을 자연스레 받아들여 이를 초월하려는 달관의 심적 정서가 면면히 흐른다.
“더 무얼 바라겠어요? 영원히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우린 이걸로 만족해야지요.” (P.307)
바틀리의 누이이자 모이라의 두 딸인 캐스린과 노라는 아마도 엄마와는 다른 삶을 살 것이다. 그녀들은 아직 자연에 도전할 뜻을 가슴에 품고 있다. 그들의 미래가 엄마의 것과 같은 상황이 될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지만, 최소한 그들은 젊기에 삶을 그대로 방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네들의 남편과 자식은 앞으로도 계속 바다로 가게 될 것이다.

 

참고로 이 책은 수록 작품의 원문과 번역본을 나란히 실은 영한대역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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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왕의 죽음 1
토마스 말로리 지음, 이현주 옮김 / 나남출판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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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에 씌어진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에 관한 이야기의 집대성으로서 기사도 문학의 총 결산이라고 하겠다. 6세기 경 인물로 추정되는 아서 왕 전설은 12세기 들어 문학적 형상화의 세례를 받아서 당대 서구 대중들의 가슴에 깊이 자리 잡게 되었다. 유럽 지배민족인 게르만 족과 대결하여 쇠퇴하였던 켈트 족 영웅이 서구인들의 가장 인기 있는 설화의 주인공이 된 것은 일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서 왕 이야기는 최초에 영웅 아서 왕 개인의 무훈담으로 출발하였다. 그 후 이야기는 확대되어 원탁의 기사가 생겨났고 호수의 기사 랜슬롯 경과 귀네비어 왕비의 사랑, 트리스트람[트리스탄] 경과 이조드[이즈,이졸데]의 사랑의 죽음, 그리고 성배 탐색으로까지 파생되었다. 오늘날 서양 예술과 오락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확대 재생산 현상을 통해 그네들의 문화에서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 이야기의 의의를 유추할 수 있다.

 

워낙 방대한 작품이기에 오백 면이 넘는 빽빽한 판형의 책 두 권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웬만한 판형이라면 너끈히 서너 권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국내 최초 번역이자 완역을 위해 장시간 고생한 번역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본문 내용 중에는 이미 읽어 아는 것도 있지만 처음 접하는 내용도 상당히 많다. 아는 것도 세부적으로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작자 말로리는 대부분 프랑스어 원전에서 옮겨 수록하면서 가급적 원형을 유지하려고 애쓴 것처럼 보이지만, 부분적으로는 의도적으로 편집을 가한 곳도 있다. 대체적으로 짜임새가 탄탄한 작품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일단 작자 자신의 순전한 창작물이 아니며, 지리적으로 사방으로 흩어져 퍼진 이야기를 모으고 시간적으로도 수백 년간 파생되고 변형된 이야기를 취합하는데 의의를 두고 있다. 작자 말로리는 방대한 이야기를 모아서 전하기에 힘쓸 뿐 일관된 체계로 재탄생하는 예술적 역량을 갖추지는 못한 것처럼 보인다. 이야기는 산만하여 개별 일화가 중구난방으로 등장하며, 중첩되고 상호 모순되는 이야기가 병치되는 경우도 심심치 않다.

 

이 책의 미덕은 단점을 능가한다. 개별적으로는 상세한 내용이 가능하겠지만 종합적으로 볼 때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 이야기에서 이 책보다 풍성하고 흥미로운 작품은 없을 것이다. 원전이 되는 작품들은 기사들의 사랑, 마법 등 관심에 따라 각각 초점을 달리한다. 작자 말로리는 그렇지 않다. 그에게 지상의 미덕은 기사도의 참모습을 전하는데 있다. 아서 왕도 랜슬롯 경도 사랑의 미약을 먹은 트리스트람 경도 무엇보다 올바른 기사로서 겪는 모험과 용맹, 기사도 정신의 발휘에 더 큰 비중을 든다. 그들의 불륜적 사랑과 심적 고뇌 등은 오히려 부차적이다.

 

몇몇 잘 알려진 원탁의 기사 외에 무수한 뛰어난 기사들의 일화를 많이 알게 된 점도 수확이다. 아서 왕이 왕으로서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한 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발린 경은 물론 별도의 장을 부여할 정도인 오크니의 가레스 경, 라모락 경과 팔로미데스 경 등.

 

중세 기사들은 모험과 사랑을 끊임없이 추구하였다. 기사로서 명예를 쌓기 위하여 대대적인 마상 창시합에 참가하였으며, 노상에서 마주치는 기사들끼리도 자웅을 겨루곤 하였다. 기사들에게 창시합은 의무이자 일과인 동시에 취미라고 해석된다. 비록 시합 도중에 불운하거나 불행에 빠지게 되더라도 당당한 기사라면 이를 피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수많은 일대일 또는 일대다의 대결 장면이 등장한다. 시합이 너무 자주 발생하고 할애되는 분량도 많기에 이 부분만 없앤다면 전체 작품의 분량을 절반 가까이로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자체가 중세 기사도 문화의 실상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고 할 때 역시 힘들더라도 봐두는 게 좋을 것이다.

 

기사의 계율에는 여성 존대가 있다. 진정한 기사는 아름다운 귀족 여인을 연인으로 두어야 한다. 연인은 혼인하여 부부가 될 수도 있지만, 기혼녀와 연인이 되는 사례가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랜슬롯 경과 귀네비어 왕비가 그러하면, 트리스트람 경과 이조드 왕비의 정사(情死)가 대표적 경우이다. 뛰어난 여성에 대한 정신적 숭배 정도라면 보기에도 아름답다고 할 것이지만 애정과 육체관계가 개입되면 사랑은 불륜으로 변질된다. 여기에 지위 및 도덕적 의무와 마음에 내재한 진실한 감정 간 갈등이 비롯된다. 이 작품에서는 그 경계가 분명치 않아 종교적, 도덕적으로 문란하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초기에는 아서 왕이 이야기의 중심이 되었다. 출생의 비밀을 가진 소년 영웅이 명검 엑스칼리버를 뽑아들고 좌충우돌하며 강자로 군림하게 되는 드라마틱한 여정. 아서 왕과 함께 그들의 친인척 간인 기사들도 함께 명성을 얻게 되었다. 대표적인 이가 케이 경과 가웨인 경이다. 특히 가웨인 경은 초기 아서 왕 문학에서 기사도 정신의 상징으로 부각되어 온갖 찬사를 한 몸에 받은 이였다. 아서 왕과 이들 기사는 후대가 되면서 변두리로 밀려 나고 랜슬롯 경과 트리스트람 경이 쌍벽을 이루게 되었다. 아서 왕은 이따금 창을 잡고 말에 올라타지만 대개는 궁정에서 잔치를 벌이는 고귀한 왕으로 역동성을 상실하였다. 가웨인 경은 이류 기사로 전락하였다. 계율과 의무에서 불충할뿐더러 용맹에 있어서도 뭇 기사 중의 하나에 불과할 정도로. 여기에는 여러 연유가 있겠지만 기사들 간의 전투에 식상한 대중들이 목숨을 건 위험한 사랑 이야기에 더 빠져든 것도 있다고 본다.

 

어쨌든 작자 말로리의 원탁의 기사 이야기는 라이오네스의 트리스트람 경 이야기의 한 중반에서 제1권이 끝난다. 제2권에서는 트리스트람 경의 남은 이야기와 성배 탐색, 랜슬롯 경과 귀네비어 왕비의 사랑, 그리고 아서 왕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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