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너도밤나무 (보급판) 지만지 고전선집 19
드로스테-휠스호프 지음, 조봉애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세계 각 국의 화폐에는 자국의 최고 상징물 또는 인물을 도안에 수록하고 있다. 국내만 해도 기존의 율곡, 퇴계, 세종대왕 외에 신사임당이 들어가 있다. 다소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이들 모두가 결코 간과될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공히 동일하다.

 

독일의 20 마르크화짜리 지폐의 도안은 한 여성작가를 내세우고 있다. 이름도 우리에겐 생소한 작가인 드로스테-휠스호프. 도대체 독일에서 이 작가는 어떤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지 자못 궁금하다. 그녀의 대표작이 바로 이 <유대인의 너도밤나무>라는 노벨레다.

 

‘베스트팔렌 산간지방의 풍속화’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작품은 독일의 숲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숲이 주된 배경이라는 측면에서 아달베르트 슈티프터가 뇌리에 떠오르지만, 그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드로스테-휠스호프에게 독일 산악의 숲-브레데 숲-은 너무 짙고 빽빽하며 악마적이고 불길함이 지배하는 어둠의 영역이다. 숲에 마술적인 신령의 속성을 부여한 점에서는 근자에 읽은 푸케의 <운디네>와 오히려 가깝다.

 

이 노벨레는 사실적이면서도 상징적이다. 작가는 인물과 사건, 배경을 상세하게 기술하기를 일부러 꺼린다. 인물의 성격은 단편적 행동으로 사건 묘사는 핵심만 기술하여 빈 공간은 독자들의 상상과 추론으로 메우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대강 읽어서는 이 짤막한 작품의 표면만 훑고 지나가기 딱 좋다.

 

작가가 본문 앞에 적어놓은 훈계조의 문장 중 끝부분은 작품의 주제와 관련하여 음미할 만하다.

“밝은 공간에서 태어나 자라고,
경건한 손에 의해 양육된 행복한 자 그대는,
저울질하지 말라, 결코 네게 허락되지 않았느니!
돌을 내려 놓아라-그것이 네 머리를 칠 것이다!” (P.14)

 

작품 중간의 메르겔의 살인 혐의와 관련하여 P법원장이 보내온 편지의 “진실이 항상 진실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니다”(P.87)라는 것과, 말미의 지주인 남작의 발언 “죄 없는 자가 죄 있는 자를 대신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은 옳지 않아”(P.106)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작가는 봉건적 문화가 여전히 강력한 지배력을 발휘하는 독일 시골지역에서 정의와 불의의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한다. 불안한 사회적 지위, 의심을 살 만한 충분한 동기. 이를 갖춘 메르겔이 자신의 정당함을 당당히 주장하지 못하고 도주함은 일면 당연하다. 요즘에도 심증과 섣부른 선입견만으로 억울한 이를 매도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지 않는가.

 

메르겔은 살인범이 아닐 개연성이 크다. 이것이 그의 도덕적 무결성을 입증하지는 못한다. 그는 분명히 삼촌의 불법 도벌에 공범이며, 산림관의 살해에도 떳떳하지 못하다. 인격과 행동면에서 그는 세인들의 호감을 사지 못함을 작가는 명백히 밝히고 있다. 즉 그의 인성과 언행은 선입견을 풍기기에 충분하며 주민 및 독자의 동정을 받기에 힘들 것임을.

 

프리드리히 메르겔이 요하네스 니만트로 위장하고서 귀향한 장면은 시사적이다. 메르겔은 그의 정체성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며, 니만트라는 이름이 뜻하듯이 아무도 없는 동시에 아무도 아닌 존재로 전락하였다. 정체성을 상실한 사람의 말로는 예측 가능하다.

 

메르겔이 목매단 장소가 하필 유대인 아론이 살해당한 너도밤나무라는 점도 묘한 여운을 남긴다. 메르겔이 아론의 살인범이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진 상황에서 메르겔도 아닌 니만트가 자살한 이유가 궁금하다. 그가 인생과 운명의 시련에 너무나 지쳐 생존 의욕을 상실하였음은 명백하다. 그는 범행 현장에서 속죄를 구하고자 하였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을 매도한 세인들의 섣부른 의심에 대한 목숨을 건 마지막 항변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 이 작품은 지식을만드는지식(2009)에서 조봉애 번역으로 나온 게 시중 서점에서 유일하다. 내가 읽은 책은 배중환 번역으로 세종출판사에서 1994년에 출간된 것이다. 현재 절판된 상태이며,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아도 아무런 정보도 구할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디어드라 현대영미드라마학회 영한대역 20
W.B.예이츠 지음, 서영윤 옮김 / 동인(이성모)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예이츠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저명한 시인이다. 따라서 예이츠를 시인으로만 알고 있는데, 사실 그는 26편의 희곡을 쓴 극작가이기도 하다. 시는 예이츠의 내면 정서를 드러내는 표현 수단인 반면, 극은 그의 사회 활동의 기반을 이루는 표출 도구였다.

 

예이츠의 희곡은 시인 동시에 극이다. 극시(劇詩)은 시에 중점을 두는 명칭이고, 시극(詩劇)은 극에 우위를 부여한다. 한마디로 그의 희곡은 운문 희곡이다. 시의 정신으로 씌어진 극작품으로 무대 상연을 목적으로 하였으므로 희곡으로 분류함이 타당할 것이다. 다만 통상적인 산문체의 극과는 달리 대사에 운율이 깃들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된다.

 

예이츠의 희곡은 연극의 정통에서 다소 비껴있다. 그의 작품은 대개 단막극으로서 장막극의 주류와는 차별된다. 또한 당대의 사실적 표현과는 달리 후기로 갈수록 단순화된 형식의 상징적 표현을 주로 한다. 무대 장치도 마찬가지다. 여기에는 일본의 노극의 영향이 강하게 미쳤다고 하는데, 예이츠의 기본적 성향도 일조하였다고 본다.

 

<디어드라>는 전기에 속하며, <매의 샘에서>는 후기에 속한다. 따라서 후자가 보다 상징주의적 요소가 심화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무대, 대사, 구성 등 모든 측면에서. 독자에게는 오히려 전자가 쉽게 다가오지만, 전자에도 그만의 개성이 물씬 배어있다.

 

두 편 모두 이채로운 점은 주요 등장인물이 모두 켈트 전설에서 유래하고 있음이다. 전자는 디어드라와 코노하 왕의 이야기가, 후자는 영웅 쿠훌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 아일랜드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한 작가의 고심을 엿볼 수 있다. 한편 등장인물에 악사들이 등장하고 이들의 비중이 제법 크다는 점이다. 악사들은 켈트 문화에서 유랑시인과 유사하다고 생각되는데, 이들은 고대 그리스의 연극에서 극 전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코러스를 연상케 한다.

 

그러고 보니 옮긴이는 작품해설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예이츠의 극은 현대 사실주의극에서 배제된 연극의 기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이츠의 극이 짧은 것은 그의 극이 인과관계에 대한 설명 때문에 길어지는 사실주의극과는 달리 시간, 장소, 동기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불필요한 원형적 영역에서 움직이는 상징적인 극이기 때문이다.”

 

<디어드라>는 늙은 왕과 젊고 아름다운 왕비, 그리고 젊고 용감한 청년 간의 삼각관계를 소재로 한다. 켈트 문화는 유사한 소재의 이야기를 여럿 남기고 있다. 이 극으로 남겨진 데르드러 외에 페니안을 몰락으로 이끈 위대한 영웅 핀과 그러니아, 데르맛의 정사가 그러하며, 유명한 트리스탄과 이졸데도 비슷한 패턴이다. 약간 차이가 있지만 아서 왕의 죽음도 귀네비어 왕비의 불륜이 원인이 아니던가.

 

이는 사회적 윤리질서와 사랑의 감정 간 충돌이자 청춘 남녀 간 자연스런 감정의 발로 대 노인과 처녀 간의 부적절한 결합에 대한 반감 등이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합법적인 결혼 관계의 당사자 보다는 청춘 남녀의 죽음을 무릅쓴 연애에 더 큰 지지를 보내며 열광을 아끼지 않는다. 한편 이야기의 결말은 남녀의 사랑의 죽음으로 끝맺어져 당대 도덕률과 타협을 도모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매의 샘에서>는 “운문, 산문, 코러스에 가면과 춤 등을 혼합한 극으로 예이츠의 성숙기 극의 특징을 보인다...극에서 사용된 모든 것은 사실을 재현한다고 하는 사실주의 극의 환상에서 일탈하여 상상 속에서 창조하려는 욕구에 종속되어 있다.” (P.14)

 

그만큼 <디어드라>와 비교할 때 이 작품의 상징성의 정도는 매우 높은 편이다. 대사 자체도 범상하지 않으며, 악사들이 천을 펴고 접는 행위도 극의 제의적인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의도를 강하게 풍긴다.

 

여기서도 늙음과 젊음이 노인과 쿠훌린을 통해서 극명하게 대비된다. 오십년의 세월을 헛되이 샘가에서 보낸 노인과 영웅 쿠훌린의 목적은 동일하다. 그들은 인간에게 금기시되는 불사를 추구하려고 한다.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을.

 

켈트 문화에서 샘은 단순히 물이 솟아나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인간에게 현세의 영역을 빼앗긴 신과 요정들이 깃들어 있는 곳으로 그들의 권능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샘물이 솟아나려는 찰나에 강력한 신성의 발현으로 노인은 잠들고 쿠훌린은 넋을 잃고 이끌려 나가게 되고 만다.

 

예이츠의 극은 시적인 정서와 상징성에 치우쳐 희곡이 갖고 있는 외향성이 많이 희석되어 있다. 그의 작품은 무대화하기 용이하지 않으며, 관중의 호응을 이끌어내기도 만만치 않다. 순전히 희곡만으로 보더라도 흡인력이 떨어짐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의 극에 대한 이해는 시인 예이츠는 물론 인간 예이츠를 올바로 해석하기 위한 기본 전제라고 생각한다.

 

“희랍극, 중세극은 물론 일본 노극을 소화해서 시를 통해 제의적 형태를 구현하고자하는 탈환상적 기교와 독특한 비젼을 갖춘”(P.18) 점이 예이츠 극의 의의라고 할 것이다.

 

참고로 이 책은 원문과 번역문을 나란히 싣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음의 친구 바벨의 도서관 11
페드로 안토니오 데 알라르콘 지음, 정창.이승수 옮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해제 / 바다출판사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기획하고 해제를 붙인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다.

 

알라르콘의 대표작은 기실 같은 스페인 작곡가 마누엘 데 파야가 작곡하여 유명하게 된 <삼각모자>이다. 국내에서는 어찌 된 게 이것이 알라르콘의 작품의 첫 번역에 해당하니 기뻐해야 될지 자못 의아하다. 이 책에 수록된 것은 그의 후기 작품집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포함된 8편 중 2편에 해당한다. <죽음의 친구>는 중편, <키 큰 여자>는 단편의 분량으로 제법 편차가 존재한다.

 

두 편 공히 관통하는 제재는 바로 ‘죽음’이다. 죽음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회피가 불가능한 냉엄한 현실이며, 죽음에 대한 공포와 외경은 인간 내면의 심화와 인류 문명의 발전의 추동력이기도 하다. 모든 종교의 출발은 바로 죽음의 인식에 있지 아니한가? 사람들은 사후 세계를 어둡게 그리며 생자(生者)를 훈계하는 일면, 저승도 생각만큼 나쁜 곳은 아니라는 보다 장밋빛 감언으로 겁먹은 영혼들을 위로한다. 그래서 죽음의 연기 내지 회피라는 유혹에 인간의 태생적 취약성을 보이게 마련인 법이다.

 

<죽음의 친구>에서 힐 힐은 글자 그대로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죽음의 친구가 된다. 죽음의 힘 덕택으로 그는 잃어버렸던 신분을 되찾고 사랑하는 여인 엘레나와도 결합하게 된다. 삶이 행복하게 되는 순간 그는 죽음을 외면하고 시골 별장에 숨는다. 죽음이 자신들을 발견하지 못하길 기대하며. 인간은 원래 이런 존재다. 제아무리 눈부시게 포장하더라도 본능적으로 죽음에 대한 반감을 지닌다. 무릇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의 본능일 것이다. 죽음의 신성이 그토록 강변하였건만.

 

“나는 누구도 고통스럽게 하지 않아. 인간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고문을 가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숙적인 ‘삶’이야. 그대가 그토록 아끼는 ‘삶’이라고!” (P.35)

 

이 작품의 묘미는 막연히 상종하기 싫은 불쾌한 그 무엇으로 치부되었던 죽음의 어두운 신성(神性)의 권능을 마음껏 보여주는데 있다. 오직 절대자를 제외한 무엇도 그의 권위를 침범할 수 없으면 그는 무소불위의 능력을 발산한다. 힐과 죽음의 신성 간 어설프고 무력한 대결 장면을 보라.

 

“왜? 그걸로 나를 죽이려고? 이번에는 검은 망토 차림의 죽음의 신성이 소리쳤다. ‘삶’이 감히 ‘죽음’한테? 이거 참 묘한 기분이 드는데......그래, 우리 한번 붙어 볼까?” (P.96)

 

역설적으로 이 작품의 가장 핵심적 키워드는 죽음의 신성의 말로 나타난다. 그리고 작가가 죽음의 미학을 통해 역으로 들려주는 삶의 소중한 가치리라.

 

“사랑을 향한 사랑이라......사랑은 생명이고, 생명은 사랑이지.” (P.116)
“아! 물론 그렇지......삶이란 곧 사랑이고 사랑이 곧 삶이니까......” (P.118)

 

<키 큰 여자>는 이런 면에서 훨씬 단순하다. 죽음의 전조를 알리는 키가 큰 여자의 출현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의 발현. 그것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텔레스포로의 말처럼 태어나면서부터 언젠가는 그런 여자를 만날 거라고 예감했기에 느끼는 두려움이며, 노파의 외침으로 그 실체, 즉 악마임이 확인된다.

 

그의 다음과 같은 일련의 질문은 곧 우리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들의 절실한 의문이라고 하겠다.

 

“그 노파는 인간일까? 왜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그 노파를 만나리라고 예감했을까? 노파는 왜 나를 보자마자 내가 누군지 알아보았을까? 그 노파는 왜 나에게 큰 불행이 닥칠 ㄸ만 나타났을까? 악마라서? 죽음이라서? 삶이라서? 적그리스도라서? 그 노파는, 그 키 큰 여자는 누구지? 도대체 뭐지......?” (P.15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첫사랑 민음사 세계시인선 11
예이츠 지음 / 민음사 / 1999년 4월
평점 :
품절


켈트 신화와 관련된 일련의 책들을 읽다가 알게 된 예이츠, 그의 <켈트의 여명> 자체는 대단히 깊은 인상을 남겨주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적어도 예이츠에 대한 나의 관심을 촉발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니 예이츠의 시작들을 읽어봐야겠다는 다짐을 품게 만들었다.

 

민음사의 세계시인선 시리즈의 하나로 출간된 이 시선집에는 3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생전에 방대한 작품을 남겼던 시인이었던 만큼 선별된 시들이 얼마나 그의 시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지는 미지수다. 대체로 문학적 시기를 아우르면서 추려낸 것들로 보이는데, 출전을 명기하지 않아 자못 난감한 측면도 있다.

 

일독한 첫인상은 평범함과 모호함으로 다가왔다. 다행히 번역문과 원문을 나란히 수록하여 애매한 대목은 원문으로 이해가 가능하여 작품 해독에는 어려움이 없지만 그렇다고 이해가 가능한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황이었다.

 

할 수 없이 해설서를 펼쳐들었다. 그리고 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시인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매우 난해하지는 않지만 그의 작품세계가 녹록치 않음을 알게 되었고, 그의 삶과 시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그리고 문학의 배경을 이루는 켈트적 뿌리와 정치적 상황, 운명의 여인에 대한 일관된 사랑 등도 발견하였다.

 

예이츠의 세계는 한마디로 깊고도 넓다. 그는 서양의 고대와 현대를 포괄하는 정신사적 세례를 받은 외에 동양적 신비주의, 즉 힌두교와 선불교 등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의 시는 자연의 풍광과 서정적 감상을 읊은 데서 출발하여 개인과 사회의 재인식으로 변모하고, 궁극적으로는 ‘존재의 통일(Unity of Being)’로 요약되는 초월적 경지로 발전하였다. 해설서의 부제처럼 그의 시와 삶은 존재의 완성을 향한 치열한 구도의 경지라고 하겠다.

 

이렇게 되고 보니 문학적, 전기적 배경에 대한 인식 없이 덩그러니 놓인 한 편의 시에 대해 얼마만한 이해가 가능할지 회의를 품게 되었다. 세간에 그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이니스프리 호도(湖島)>는 오히려 초기의 감상적 편린에 불과할 따름이다. 오히려 <몰 매기의 노래>와 <길리건 신부의 노래>라는 두 편의 발라드가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그의 시는 늙음의 초라함을 슬퍼하지 않는다. 늙음은 지혜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음을 뜻한다. 오히려 빛나는 청춘의 날들이 지혜라는 기준에서는 거짓될 날일 수 있다. <지혜는 시간과 더불어 오다>와 <비잔티움 항행>, <오랜 침묵 끝에>에서처럼.

 

그렇다고 그가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등한시한 것은 아니었다. <술 노래>와 <정치>를 보면 그가 세속의 전쟁이나 정치적 발언보다 젊은 여인을 안아보았으면 하는 상념을 통해 인간에게 더욱 중요하고 살가운 것이 바로 사랑임을 웅변하고 있다.

 

초월자, 각성자의 눈에는 “깨끗함과 더러움은 한 집안”(<크레이지 제인이 주교와 이야기하다>)일 뿐이며 우열과 청탁의 구별이 없다. 이런 상대성의 진리 앞에 인간의 욕심과 단견을 쉽사리 그 천박함이 노정되고 만다.

 

그의 시에는 독특한 정신과 기품이 내재되어 있다. 시라는 장르의 속성상 번역을 통해서 원작의 묘미를 살리기가 거의 불가능함을 알고 있지만, 그나마 영시이므로 조금이나마 원문 독해가 가능한 장점이 있어서 번역문과의 대조를 통해서 대략이나마 시인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그의 시는 반복되어 낭송하더라도 지루함이 없으며 묘미가 새록새록 배어나온다. 모든 영시가 이러했다면 난 진작 영시의 팬이 되었을 터인데. 앞으로 예이츠의 세계에 들어가 보련다, 조금만 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의 요정 운디네 - 개정판 에버그린북스 9
푸케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한 편의 아름답고도 슬픈 동화다. 하지만 동화라고 해서 어린아이들이나 읽는 책이라고 속단하지는 말자. 오히려 이 동화 소설은 청소년 내지 성인들이 읽어 마땅한 작품이다.

 

그대는 <인어공주>를 기억하는가? 물속에서 행복하게 살던 인어공주는 인간이 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지만 그녀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에 배신당하고 결국은 한줄기 물거품으로 명멸하였을 뿐.

 

물의 요정 운디네도 마찬가지의 숙명을 타고났다. 그녀는 인간을 사랑하고 결혼하여 영혼을 갖게 되었지만 그것이 영원한 사랑을 보장하지는 못하였다. 사랑하던 이를 죽게 만들고 자신은 샘물로 화해 버린 슬픈 존재.

 

운디네에게 사랑 외에 무슨 잘못이 있으랴? 그녀는 요정에서 인간이 되고자 하였으나 본성에 내재된 요정의 속성과 인연을 버리지는 못하였다. 겉모습은 인간이지만 결코 진정한 인간이 되지는 못하는 존재, 그것은 한순간의 사랑으로는 눈감을 수 있지만 영원히 극복되지는 못하는 치명적 약점.

그것이 독자가 운디네의 첫사랑이자 남편이며, 동시에 배신자인 훌트브란트에게 돌을 던지지 못하는 연유가 아니겠는가? 훌트브란트의 바램은 어찌 보면 매우 소박하다. 자신의 신분과 지위에 걸맞는 여인을 아내로 삼아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그는 운디네를 사랑하지만 요정보다는 인간과의 사랑을 더욱 갈구하였다. 그의 눈앞에 기이한 요정의 자취, 즉 퀼레보른이 자주 띄지만 않았어도 둘의 행복은 더 오래 지속되었으리라. 훌트브란트가 은연중 꿈꾸던 인간과의 사랑, 그것은 인간이기에 지극히 당연한 본능적 요청이었다.

 

“이렇게 된 것은 같은 부류끼리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과 물의 정령이 괴이한 인연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면서 한편으로 운디네에 대해서 점점 불쾌한 기분을, 심지어 적의를 품기에 이르렀다.” (P.124)

 

그런 면에서 베르탈다에 대한 인간적 동정심도 잘못된 것은 아니다. 운디네가 베르탈다의 성명축일에 벌인 잃어버린 친부모와 상봉이라는 깜짝쇼에 대해 그녀가 보인 그토록 격렬한 거부반응도 일면 수긍된다. 작중 시대적 배경을 감안할 때 하루아침에 귀족계급에서 가난한 어부의 딸로 신분상의 추락을 도저히 감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훌트브란트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이미 그와 운디네가 만나기 이전부터 싹트던 것이므로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며, 훌트브란트의 개인적 미덕과 사회적 지위 및 재산 등을 고려하면 놓치기 어려우리라. 베르탈다는 전형적인 인간으로서의 젊은 여성을 상징한다.

 

문득 이런 상념이 떠오른다. 요정 운디네와 인간 운디네 중 어느 쪽이 더 행복할까? 우문(愚問)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영혼을 갖기 이전 운디네는 자연적 본능에 따라 행동하였다. 그때의 언행은 예의범절에 구속받지 않는 자유분방함이 있었고 겉치레와 가식에 물들지 않은 천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으로 빛났다.

 

“우리들은 당신네 인간보다 훨씬 행복한 처지라 할 수 있어요...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혼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그런데도 우리는 한탄을 모르고 즐겁게 살고 있지요.” (P.68~69)

 

한편 결혼 이후 운디네는 웃는 때보다 슬퍼하고 탄식하는 날이 더 많았다. 글자 그대로 인간이기에 희로애락을 겪으며 살게 되는데, 운디네는 눈물조차 즐거움이라고 강변한다. 하지만 왠지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그리고 나는 영혼이 있기 때문에 울 수가 있어요. 눈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저씨는 도저히 짐작조차 못하겠지만 말예요. 눈물 역시 즐거움의 극치입니다. 이렇게 소중한 영혼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즐거움의 극치인 거예요.” (P.138~139)

 

여하튼 물의 요정과 인간의 결합은 불행으로 귀결되었다. 이는 각종 신화와 전설의 이야기에서 누차 반복되고 있다. 신분 차이는 극복되지만 태생 차이는 뛰어넘을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한 편의 동화에 관심이 끌리는 것은 비극이 예고된 슬픈 사랑의 이야기인 동시에, 중세라는 시대적 배경과 중부 유럽의 산과 호수, 계곡이라는 지형적 배경과 정령의 등장에서 오는 신비하고 기이함이 날실과 씨실로 엮어져 기묘한 매력을 던지는 데 있으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