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알 이야기 을유세계문학전집 26
크레티앵 드 트루아 지음, 최애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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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왕 전설은 서양 문화와 문학에서 독특한 파생물을 낳았는데 그것은 바로 ‘성배’이다. 12세기에 불현 듯 문학적 소재로 등장한 성배는 이후 무수한 추종자를 양산하였으며, 대중예술과도 결합하여 아서 왕 전설과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다.

 

이 성배의 시초가 트루아의 운문 소설 <그라알 이야기>라고 한다. 아서 왕 전설을 문학의 형식으로 전환한 최초의 작가인 트루아는 이 미완성작을 통해 세계문화에 깊은 발자취를 남겼다.

 

옮긴이는 ‘그라알’이란 어휘를 굳이 번역하지 않았다. 그라알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과 탐구가 이 작품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옳은 판단이다. 그라알이 성배로 고착화된 것은 트루아의 후대 작가들의 노력 덕택이다. 성배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가 포도주를 담았던 잔이며,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를 담았던 글자 그대로 신성한 잔 내지 그릇이 되었다. 하지만 트루아는 그라알에 모호하고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을 뿐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후대 아서 왕의 기사들은 성배라는 유형적 존재를 찾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는데 반해 트루아는 그라알의 의미를 찾는 중요성을 강조한다.

 

국내 최초 번역된 이 작품은 이중적 구조를 지닌다. 전반부는 페르스발(퍼시발, 파르치팔)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이 웨일스의 촌뜨기는 우연히 마주친 기사처럼 멋있게 되기 위하여 무작정 아서 왕을 찾아 나서고 어거지로 기사로 서임받는다. 이후 페르스발의 행각은 좌충우돌이다. 돈키호테적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때로 어처구니없는 행동에서 은근한 해학과 재미를 제공한다. 그는 순수하지만 무지하므로 규범과 예법에 얽매이지 않는다. 여러 용맹한 기사를 무찔러 세상에 명성을 알리게 된 페르스발은 우연히 어부왕의 성에서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바로 그라알과 피 흘리는 창을 목도한다. 그는 궁금하지만 질문을 하지 않는다.

 

후반부는 아서 왕의 조카인 고뱅 경(가웨인, 가윈)의 독무대다. 고뱅 경은 모든 면에서 페르스발과 다르다. 누구 못지않게 용맹하지만 품위있고 기사 예법에 밝은 그는 진정한 기사의 표본이다. 공개적으로 모욕받아 결투를 위해 길을 나서는 그도 도중에 여러 경험을 하는데 환상의 성에서 아서 왕의 모친과 자신의 모친이 죽지 않은 채 살고 있음을 알게 되다. 그는 결투에 휘말리게 되어 아서 왕과 기사들을 오도록 청하며, 여기서 작품은 끝난다.

 

옛날 작품이고 운문체의 원문임에도 비록 운율은 느낄 수 없다 하더라도 매끄럽고 이야기 이해가 쉬우며 재미있어 어색함을 느낄 수 없으니 이는 전적으로 옮긴이의 역량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그라알은 무엇일까?

 

작중에서 그라알은 여러 사건과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무심히 흘러간다. 하지만 이후 페르스발의 뇌리와 그를 질타하고 잇따라 경고하는 사촌누이는 어부왕의 궁전에서 그가 겪은 체험이 결코 범상하지 않음을 일깨운다.

 

핏방울이 솟아나는 새하얀 창과 촛불이 빛을 잃을 정도로 환한 빛이 퍼지는 그라알. 이 기이한 장면을 보면서 페르스발은 궁금하지만 아무 질문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촌누이는 그가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성을 낸다. 그리고 그의 침묵이 커다란 행운을 놓친 것이며, 그는 물론 수많은 다른 사람들마저 불행에 빠뜨릴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녀는 아서 왕의 궁정에서 다시 한 번 페르스발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수년 동안 방랑을 거듭한 페르스발은 한 거룩한 은자의 집에서 비로소 어부왕의 정체와 그라알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잘못에 회개를 하고 성체를 받는다. 그의 숙부인 은자에 따르면 그가 질문을 하지 못한 것은 죄 때문에 혀가 굳어져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심스레 추론해 보면, 창과 그라알에 대한 질문은 참된 신앙의 길에 들어서기 위한 통과의례라고 볼 수 있다. 페르스발은 어릴 때부터 믿음에는 대체로 무심하였다. 기독교가 사회와 문화 전반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비종교자는 용인할 수 없는 존재이며, 최고의 악이자 불행을 가져오는 존재라고 하겠다. 그래서 그리 심한 비난과 저주가 퍼부어졌을 것이다.

 

한편 작품의 또 다른 축인 고뱅도 페르스발 못지않은 기이한 모험을 겪는다. 에스카발론 왕 앞에서 결투를 하기 위해 길을 나선 고뱅은 “눈물처럼 영롱한 핏방울이 맺히는 창”을 찾아 바치는 조건으로 위험에서 벗어난다. 이 창은 언젠가 아서왕의 왕국을 멸망시킬 것이라는 예언의 창이다.
 
또한 그는 마법의 궁전에 들어가 그 성에 씌워진 마법을 깨뜨리는데, 그 성에는 놀랍게도 아서 왕의 모친과 고뱅 자신의 모친이 여왕으로서 살고 있다. 세상에서는 이미 죽은 지 수십 년도 더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다. 게다가 여왕은 자신을 포함한 성 안 모든 사람들의 주군으로 고뱅을 인정한다. 고뱅의 주군인 아서 왕의 모친이 고뱅을 주군으로 섬긴다. 일견 모순되는 관계라고 하겠다.

 

작가는 성의 마법을 깨뜨릴 기사의 자격을 이렇게 기술한다.
“그는 현명하고 너그럽고 탐심이 없으며, 아름답고 용감하고 고귀하고 충성스러우며, 비열함도 다른 어떤 악덕도 없는 기사라야 하니까요.” (P.179)

 

이처럼 뛰어난 자질과 품성에, 신실한 믿음을 가진 기사라면 만인의 주군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속세의 주군 관계를 초월하는 성격이다.

 

작가가 페르스발과 고뱅의 두 주인공을 등장시킨 연유와, 미완성 작품이지만 대충이나마 향후 이들의 행보를 예상해 볼 수 있다. 진정한 기사는 무용만이 뛰어난 것으로는 부족하다. 진실한 믿음을 가져야 하는데, 페르스발은 이 점이 누락되었다. 반면 고뱅은 완벽한 기사상의 구현이다. 용맹과 예법, 그리고 신앙을 고루 겸비하였다.

 

작품 말미에 페르스발과 고뱅은 만나도록 예정되어 있다. 페르스발은 그라알을 찾는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여 종국에는 고뱅과 동등한 수준에 올라올 것이다. 이것이 작가가 그리고자 했던 작품의 본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또 하나의 <천로역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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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피 민음 경장편 1
김이설 지음 / 민음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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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006년 신춘문예로 등장한 신진 작가의 첫 작품집이다. 게다가 흔하디흔한 단편모음집이 아니라 당당한 장편(비록 경장편이지만!)소설이다.

 

앞서 그의 단편집을 통해 김이설 문학세계를 대강 들여다보았다. 등단 이후 그의 작품 경향은 매우 개성적이며, 그것은 선보다 악이 지배하는 현실, 빛보다 어둠이 압도하는 세계에 대한 묘사이다.

 

이 작품에서 그의 작품경향이 심화되고 확대되는 것을 뚜렷이 감지할 수 있다. 일체의 감정이입을 허용치 않는 건조한 문체로 사람살이의 치부를 남김없이 까발려 백일하에 드러낸다. 그건조함이 범상치 않은 배경과 인물의 외설적, 폭력적 행동, 대화 등에 덧씌워지기 쉬운 선정성의 함정에서 용케 작품을 구해내고 있다. 음란하되 음란성을 느낄 수 없고, 폭력적이되 덤덤하게 독자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하는 재주도 작가의 능력이다.

 

일상의 평범한 인물과 가정은 배경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항상 억압받고 빼앗기고 소외된 사람들. 그들의 삶을 가로막는 장애는 가난과 폭력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육체적 장애마저 한 요소로 추가된다. 작가는 왜 그리 삶의 아름답지 못한 측면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는 보통 사람들의 무난한 삶에는 관심이 없는 것일까? 혹시 작가의 성장배경과 연관성이 있는 게 아닐까? 별별 생각이 든다.

 

그렇다. 작가는 주인공 화숙의 입을 통해 이렇게 부르짖고 있다.

“그 고만고만한 일이 나에게는 힘들게 애쓴 후에야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는 쉬운 일이 누구에게는 치열하게 노력해도 얻지 못할 것들이었다.” (P.119)

“세상이 만만하냐? 남들처럼 사는 게 쉬운 거 같지? 너 같은 애들이 나처럼 살아 봐야 정신을 차리는데.” (P.126)

 

화숙은 천변 이쪽, 고물상 동네를 벗어나기 위하여 고등학생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돈을 벌기 위하여 아등바등, 악착같이 일하였으나 여전히 휘황찬란한 천변 저쪽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그런 그에게 보통사람의 삶, 평범한 생활이야말로 지상제일의 소망인 것이다.

 

이는 이미 여러 단편들을 통해 줄기차게 작가가 설파한 주장이기도 하다. 장편이 단순히 분량이 늘어난 단편이 아닐진대,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작가는 뒤틀린 인간관계와 가정의 심화된 묘사를 통해 정상적인 삶의 어려움과 취약성을 동시에 제기하고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관계는 이른바 비정상적이다. 화숙은 정신지체를 엄마로, 아버지는 누구인지도 모른다. 외숙모는 남편의 학대에 딸을 버리고 가출하였다. 외삼촌은 툭하면 딸, 수연을 때렸다. 화자 화숙도 분풀이를 수연에게 퍼붓는다. 세월이 지나 성인이 되어 관계는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수연은 남편 몰래, 첫사랑과 외도를 유지하며, 남자에게 매를 맞으면서도 결국 그를 떠나지 못하고 체념하며 받아들인다. 외삼촌과 진순의 동거, 혜주에 대한 진순의 애정도 왜곡된 것ㅣ며, 화숙과 버스기사 아저씨의 관계도 외면상 따뜻하고 위로를 주는 듯이 비치지만 결국은 남자의 가정을 파괴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한 관계인 것이다.

 

한편 작중 인물들의 삶에 대한 자세에서도 특이한 뭔가가 감지된다. 그것은 삶에 대한 수동성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운명 내지 숙명에 대한 체념적 수용이라고 하겠다. 정신지체인 화숙의 엄마는 말할 것도 없으며, 수연의 외삼촌과 재현에 대한 태도가 그러하다. 진순이 자발적으로 외삼촌과 동거하며 혜주를 친딸처럼 받아들이는 자세가 그러하다. 하지만 무엇도 작중에서 가장 독립적인 외삼촌과 화숙을 넘어서지 못한다. 외삼촌의 가족에 대한 경시와 일 내지 재물에 대한 중시는 결국 삶의 맹목성의 최대 피해자가 외삼촌임을 그의 비참한 최후를 통해 알려준다. 한편 화숙은 어떠한가? 화숙은 항상 현실을 뛰어넘으려고 하지만, 그녀의 실패와 장애요인은 언제나 외부에 귀인한다. 그녀는 외삼촌을 원망하고 증오하지만 그 주변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특히 수연은 그녀 삶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언제나 희생양이 되었다. 화숙이 진정한 독립을 이룬 것은 외삼촌과 수연의 죽음 이후 왜곡된 인간관계에 더 이상 얽매일 필요가 없게 된 이후에서이다.

 

화숙의 체념적 태도의 편린을 이 대목에서 엿볼 수 있다. 여기서는 사회진화론의 자취도 언뜻 풍긴다. 이기지 못한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는 인식은 무력감마저 드러낸다.
“따지면 나쁜 사람은 없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도 없고, 상처 없는 사람도 없다. 다만 이기는 사람과 지는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P.108)

 

결국 이 작품 <나쁜 피>는 작가가 데뷔 이후 꾸준히 주력해 왔던 표면의 일상적 삶의 이면에 숨은 처절함과 위태로움을 선명하게 각인시키려는 노력의 연장이라고 하겠다. 그림자가 짙어질수록 작렬하는 햇빛의 강렬함은 강조된다. 다른 작가들이 눈부신 햇빛만을 바라볼 때 작가 김이설은 오히려 그림자에 주목한다.

 

한 가지 우려는 정상을 드러내기 위한 비정상, 평온에 대비되는 격동과 불안을 강조할 때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수단 자체가 때로는 목적의 의의마저 파괴할 수도 있다. 작가는 약간은 비정상과 폭력의 관계와 이의 묘사에 경도된 듯하다.
“더 호되게 앓는 인물을 만들도록 노력하겠다.” (P.181, 작가의 말에서)

 

작가여, 너무 작중 인물을 아프게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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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들의 사랑 - 지만지고전천줄 0073
마리 드 프랑스 외 지음, 이형식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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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켈트 신화와 전설의 흔적은 중세 유럽 문학에 큰 영향을 남겼다. 아서왕과 성배에 관한 이야기 군이 하나이며, 트리스탄류의 사랑 이야기들이 그러하다. 한편 기독교의 세례로 고대의 신들은 지위가 요정으로 위축되었다. 요정은 더 이상 인간들을 압도하지 못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의 의지에 따라 신과 인간 사이에 사랑이 이루어졌다면, 중세 유럽에서 인간과 요정 사이에 이루어진 사랑 이야기는 여전히 요정의 우위에 있지만 그 격차는 크지 않으며, 사랑에 있어서는 대등하기조차 하다.

 

이 편역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그러한 요정들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랑발>, <갱가모르>, <요넥>, <기쥬메르>, <비스끌라브레>는 12세기 여류작가 마리 드 프랑스의 글이며, <멜뤼진느>는 14세기 쟝 다라스, <데지레>와 <그랠랑>은 작자미상이다. 또한 <비비안느>는 여러 단편들을 역자가 재구성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야기들에 공통되는 특징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먼저 멋진 기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 기사는 깊은 숲 속의 샘터에서 아름다운 여인과 조우한다. 그리고 그들은 사랑을 약속하고 연인이 된다. <랑발>과 <갱가모르>, <데지레>와 <그랠랑>, <멜뤼진느>가 모두 그러하다. <비비안느>도 메를랭과 비비안느의 사랑과 배신이 샘터에서 전개된다는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샘은 켈트 문화에서 요정이 깃들어 있는 장소다. 지상 세계를 인간에게 양보한 고대 신족들이 요정으로 화하여 샘과 구릉 등을 자신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간다. 따라서 샘터에 만난 여인들이 마법을 부릴 줄 아는 것은 당연하며, 인간 세상의 누구보다도 미모에 있어 우월할 수 있는 것이다. 요정은 자신의 존재가 인간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꺼린다. 그래서 연인들에게 자신들의 존재와 사랑에 대해 함구하도록 요구하며, 이를 어겼을 경우 격분을 감추지 않는다.

 

이야기에는 여러 유형의 사랑이 등장한다. 용맹하고 품위 있는 기사는 뭇 여인의 관심을 끄는데, 왕의 부인 또한 예외가 아니다. 랑발과 갱가모르는 왕비의 구애를 거부하다 참소를 받는 곤경에 처한다. 반면 마음이 맞는 인연인 경우에는 서로의 뜻을 확인한 후 곧바로 다정한 연인이 되어 스스럼없이 애정을 표현한다. 사랑 표현의 솔직성과 적극성 면에서 현대인들을 능가할 정도다. 사랑에 무심하면 “자연을 거스르는 죄악”(P.187, <기쥬메르>에서)으로 비난을 받을 정도이므로.

 

한편 수록된 이야기들의 지리적 배경을 보면 주로 브르타뉴 지역이다. 물론 프랑스 작가들의 글이니만치 당연하겠지만, 그 중에서도 브르타뉴인 것은 브리튼, 즉 켈트인들의 근거지였던데 기인한다. 그 외에도 브리튼과 스코틀랜드 등이 등장하므로 장소만 보아도 이 작품들이 켈트 문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추론하게 된다.

 

게다가 아서왕이 등장한다던가(<랑발>, <비비안느>) 그의 조카인 호엘의 이름이 언급되기도 하여(<기쥬메르>) 아서왕의 유산의 잔영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곳곳에 기독교적 세례 흔적이 엿보이는데, 요정들이 자신들도 하느님의 세계에 속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래야 이단과 야만의 지탄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찌 보면 대수롭지 않은 중세의 옛날이야기에 불과할 수도 있으나, 이 단편들을 통해서 켈트 문화를 조금이나마 접할 수 있으며, 중세인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오늘날의 것과 비교해보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스토리 자체가 흥미로워서 읽는 이의 상상력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일독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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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스탄 - 발췌 지만지 고전선집 685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 지음, 진일상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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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의 대서사시 <트리스탄>의 국내 초역이다. 12세기~13세기에 붐을 일으켰던 트리스탄과 이즈[이졸데]의 이야기 중 하나다. 미완성작인데도 2만행 가까운 대작인데, 분량 면에서는 <일리아스>나 <오뒷세이아>보다도 장대하고 <파르치팔>에 견줄 수 있을 정도다. 편집자에 따르면 원전의 약 15%를 발췌했다고 한다. 원전의 참맛을 느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므로 작품의 분위기 정도만 느끼는 정도에서 만족해야 할 듯하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앞서 읽은 죠제프 베디에의 <트리스탄과 이즈>와 거의 흡사하다. 베디에가 선대 작가들의 단편들을 종합하고 요약한 것이므로 대강을 이해하기엔 매우 좋다.

 

브르타뉴 지방의 켈트족 전설을 게르만족 작가가 독일어로 썼다. 게다가 바그너는 이를 악극으로 작곡하여 불후의 명성을 남겼으니 흥미롭다. 산문이 아닌 운문 형식으로 읽게 되니 확실히 감흥이 색다르다. 불완전한 운문이지만, 중세 미네징거들이 이 작품을 가지고 낭송하는 맛을 조금이나마 알 듯하다.

 

해설에 따르면, 고트프리트의 이 작품은 묘사의 투명함과 명확함,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서사의 마력, 구체적인 완결성과 인물들의 일관된 성격, 언어의 아름다운 멜로디, 각운으로 중세 궁정문학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실제 읽어보니 이 평에 대체로 공감하게 된다. 더욱이 작가의 개성이 화자의 의견을 통해 깊게 반영되어 있어 익히 알려진 이야기를 반복하는 차원을 뛰어넘어 독자적인 해석으로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화자는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중개자 역할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작품의 의도와 성격을 규정짓는다. 화자는 진정한 사랑을 다룬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한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은/그것이 참말로 고통스럽더라도/사랑에 자신의 마음을 줄 것이다./진정한 사랑이/그리움의 고통 속에서 점점 더 불타오른다면/그 사랑은 더 불타오를 것이다.” (P.38~39)

 

또한 화자는 때로는 매우 시니컬하다. 트리스탄이 소년기에 학업에 매진하는 장면을 소개하며 그는 이렇게 첨언한다.
“그것이 자유로부터/등을 돌린 첫 번째였다./.../그때 최상의 시간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처음으로 자유를 얻은 시기에/그 자유는 파괴되었다./학문과 그 억압은/근심의 시작이 되었다.” (P.87~88)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운명과 사랑의 희생자이기도 하다. 그들의 사랑은 순전한 호의적 감정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사랑의 묘약의 힘의 결과이다. 그들은 자신을 옥죄어오는 약물의 힘에 필사적으로 저항하였다. 금기의 사랑임을 알기에 노력하였건만 그들은 자신을 다스릴 수 없었고 그들의 사랑은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을 작가는 놓치지 않고 장문에 걸쳐 묘사(P.109~115)하고 있다. 이 대목을 읽은 이라면 그들의 사랑을 차마 더 이상 피상적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트리스탄의 전설에서 사람들은 두 연인의 사랑과 죽음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사랑에 기뻐하고 비극에 눈물 흘린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동정하고 위로해 줄 사람은 다름 아닌 마르케 왕이다. 그는 비단 사랑하는 조카와 아내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자아마저도 손실을 입었다. 지극히 관대하고 훌륭한 군주인 그가 이제는 사랑의 배신을 의심하는 평범하고 초라한 사내로 전락하였다. 그는 연인을 감시하지만, 금지는 오히려 유혹을 강화하지 않던가. 화자는 오히려 감시의 부작용과 무용성을 주창한다. 왜냐하면 누구도 나쁜 여인을 감시할 수는 없고, 좋은 여인은 감시할 필요가 없으므로.

 

흰 손의 이졸데에게 한눈을 판 트리스탄의 처지를 조금은 이해해줄 필요가 있다. 금발의 이졸데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지 확신할 수 없다. 그런데 같은 이름의 못지않게 아름답고 고귀한 신분의 여인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 그가 목석이 아닌 이상 흰 손의 이졸데를 외면하지 못함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트리스탄이 흰 손의 이졸데를 만나는 장면을 끝으로 고트프리트는 펜을 놓아버렸다. 완성되었다면 더 거대한 서사시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완성이라도 작품의 가치는 스러지지 않는다. 두 연인의 사랑은 당대 도덕관을 위배한 것이기에 사랑과 아픔을 동반하며, 사랑만큼이나 죽음도 운명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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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 김이설 소설집
김이설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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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뿌리뽑힌 사람들! 이것이 소설집을 읽어나가면서 주요 등장인물에 대해 갖는 상념들이다. 수록된 여덟 편의 단편들 어디에서도 파란 하늘과 환한 햇빛을 찾아볼 수 없다. 개기일식에 들어간 한낮의 풍경도, 태양도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극지방의 백야도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신진 작가의 첫 소설집으로서는 매우 기이하며 파격적인 제재들이다. 노숙자인 어린 미혼모, 대리모를 하는 여대생, 부모에게 버림받고 아버지같은 사람과 동거하면서도 밤마다 갓길을 방황하며 트럭운전사들에게 몸을 맡기는 여성, 죽은 남편의 형에게 스스럼없이 몸을 대주는 여인, 암에 걸려 불임이 돼버리고 엄마마저 암으로 병사하는 주부, 우유배달 손에 집착하는 인터넷 폐인, 외로운 남성의 스스럼없는 친구인 삼류극단 여배우 등이 주인공들이다.

 

이들을 꿰뚫는 단어가 한마디로 ‘불쌍함’이다. 그네들의 현실적인 처지를 가리키는 동시에 내면 상태도 지칭한다. 그네들을 보면서 새삼 삶의 무자비함과 질긴 목숨 줄이 떠오른다. 그들을 백안시하고 때로 비윤리성을 손가락질하며 외면하기는 쉬운 일이다. 누구 말대로 똥은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 하지만 똥을 피한다고 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똥을 잊어버리려고 해도 눈앞에 똥은 엄연하다. 이는 이 작품들의 인물들에도 해당한다. 작가는 무슨 의도로 썩 달갑지 않은 제재에 이리 집중하였던가? 단순한 취향이나 선정성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이는 작가가 작품을 다루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열세 살>의 십대 초반의 소녀에게 세상은 지하철역 대합실이다. 엄마와 노숙자 신세로 살아가는 소녀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히 알게 되는 것들을 몸으로 부대끼며 터득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미혼모가 되기도 하며, 엄마의 비밀도 알게 된다.
소녀에게 세상은 어떤 존재일까? 불쌍한 사람들을 속여먹는 흰얼굴같은 위선자가 넘쳐나는 곳. 출산 후 배웅을 해주면서도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말해주는 사람이 없는 곳. 소녀의 눈에는 엄마의 바구니에 동전을 넣는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아가씨도 아가를 낳으러 가는 것으로 비친다. 소녀가 할 수 있는 것 질끈 눈을 감는 것뿐.

 

<엄마들>에서 화자는 가난으로 휴학을 한 여대생이다. 젊은 여성이 목돈을 마련하기 위한 손쉬운 방법은 제한적이다. 외모가 뛰어나다면 술집에 나가서 소위 텐프로가 될 수 있겠지만. 화자는 그래서 대리모를 택하였다. 화자의 어조는 건조하다. 흔히들 출산의 설렘과 기쁨은 남성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여성 고유의 특권으로 일컬어진다. 하지만 대리모인 화자에게 임신과 출산은 사업의 영역일 뿐이다. 어서 빨리 시간이 경과하여 번거롭고 불편한 몸의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엄마처럼 버림받지 않기 위해 생계수단으로서 결혼을 유지하기 위해 대리모를 구한 여자, 생계수단으로 대리모를 자청한 화자. 세상은 언제나 부조리하다.

 

<순애보>는 조금 복잡하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 자신을 태워준 꿩장사를 아빠로 부르고 살아가며 아빠의 아이를 낳는다. 꿩농장을 하며 평온한 나날을 보내지만, 그녀는 밤마다 고속도로 갓길로 나아간다. 트럭운전사들에게 몸을 맡기며 그녀가 원하는 건 오로지 항구로 데려다 달라는 것. 나이든 아빠는 화자가 농장 일꾼인 치우와 같이 떠나길 바란다. 하지만 화자는 말더듬이 치우를 모욕적으로 거부하고 격분한 치우는 화자의 아기의 혀를 잘라버린다.
아빠도 치우도 악한 인물은 아니다. 화자는 과거에 붙잡혀 있다. 아빠가 가출하고 엄마가 새아빠가 될 남자와 함께 항구 근처로 가는 길에 자신을 버린 아픈 과거. 그 트라우마는 자신은 물론 주변에 비극을 자초하고 말았다.

 

<환상통>은 기혼 여성의 몸에 들이닥치는 양대 위험 요인을 다루고 있다. 암으로 대변되는 병마와, 출산의 부재 즉, 불임이다. 임신이 되지 않아 찾은 병원에서 받은 암 진단, 그리고 투병, 가족 관계의 파괴. 간신히 몸을 추스른 그녀에게 병마는 방향을 바꿔 친정 엄마를 덮친다. 노인에게 항암 치료는 암 자체보다 가혹하고, 노인은 쇠락한 몸으로 죽음을 맞는다. 자궁을 들어내 불임이 된 그녀는 어느 날 스스로 헤어진 남편이 병원에서 배가 소복해진 여자와 나오는 장면을 목도한다. 그녀는 아주 잠깐, 아랫배가 아리다.
독자는 남편을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 없다. 작중에서 그는 아내에게 한결같이 헌신하였으며, 이별도 마지못해 이루어졌다. 작가는 암 보다도 불임의 결과를 중시한다. 병마는 목숨을 빼앗지만, 불임은 관계를 깨뜨린다. 암을 이겨냈지만 화자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친정 엄마는 세상을 떠났으며, 남편은 가정을 떠났다. 불임은 불행의 원인이자 결과로 다가왔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랫배가 아픈 환상통을 겪는다.

 

<오늘처럼 고요히>는 수록작품 중 가장 처절하고 추잡하며 퇴폐적이며 비극적이지만 반면 실낱같은 희망이 숨어있다. 억척스러운 닭집 딸이 노래방에 나가며 웃음과 몸을 팔게 되기까지는 한순간에 불과하다. 어쩔 수 없이 내몰린 것이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이를 원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남편이 아는데도 불구하고 멈추지 못하였고, 대가는 남편과 아이, 집의 소실이었다.
화자의 말마따나 사는 건 사실 별게 아니다. 남편의 형인 병운과 함께 산다는 건 적어도 노래방이나 여관에 들락거리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 즉 목숨의 안정적 연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일상은 무미했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세끼 밥을 먹고, 방해 없는 잠을 자면 아침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을 하루가 반복되었다.” (P.140)
화자가 병운을 죽인 것은 혜경이에 대한 질투와 남자에 대한 배신감에서는 아니다. 병운이 화자와 혜경이 사이를 거리낌 없이 왔다 갔다 하는 걸 묵인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녀의 세상에 대한 불감을 일깨운 것은 자신의 트라우마와 혜경 엄마에 대한 죄책감의 결부일지 모른다. 어린 혜경이의 낙태가 각성시킨.

 

<막>에서의 가족 관계 역시 파탄난 상태다. 엄마는 일찌감치 가출하였고, 오빠는 건달에 개망나니가 되었으며, 떠돌이 아버지는 할머니를 죽였다. 화자인 나는 지방극단의 나이든 삼류배우로 전전하고 있다. 엄마를 협박해 돈을 갈취하던 오빠는 결국 엄마가 던진 펄펄 끓는 국물에 전신 화상을 입는다. 직업은 배우지만 화자의 경제적 수입은 대화를 나눌 친구를 필요로 하는 남자들의 도우미 역할에 의존한다.
“사는 게 무대 위에서처럼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내가 선택한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세월을 견뎌도 되는 것인지, 묵묵히 참아내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이 가장 무서웠다.”(P.215)
삶은 여전히 퍽퍽하다. 그래서 화자는 친구가 찾을 때, 불러줄 때 부지런히 가야 한다고 되뇌인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루>에서 민서 엄마는 평범한 중산층 가정주부다. 외견상 별 문제없이 살아가는 듯싶다. “세상에 고민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 남편 몰래 만든 마이너스 통장, 치매가 의심스러운 엄마, 분홍색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아이, 인물값 하는 남편. 그걸 다 꺼내 보일 수는 없었다.” (P.240~241)
조금은 고상하고 우아하게 살고 싶은 그녀는 못 배우고, 못살고, 못생긴 지환 엄마가 맘에 들지 않는다. 게다가 친한 척하는 게 싫다. 같이 요가원에 다니면서 어쩔 수 없이 말을 섞지만 언제나 거리를 두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지환 엄마가 자살한 후 이웃 사람들이 보인 반응에 화를 내는 것이다. 자신과 지환 엄마를 감히 한데 엮으려고 하다니! 그래서 그녀에게 지환 엄마의 죽음은 별일 아닌 것이다. 일상을 깨뜨리려는 어떠한 존재도 용납할 수 없다. 그러기에 민서 엄마의 일상은 더욱 불안하다.
“어둑한 집 안에 가만히 서 있었다. 남편이 낮게 코 고는 소리, 아이의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집 안의 따스한 공기가 더없이 안락했다. 하루가 끝났다.” (P.255)

 

수록작 중 가장 인상깊은 작품은 <손>이다. 배경과 제재가 보다 현실적이므로 감정이입이 용이하며, 나와도 무관하지 않은 인터넷 폐인의 생활이 소개되어 있어 친근감마저 든다. 유일하게 남성이 주인공 역할을 맡고 있어 이채롭지만, 제재를 생각하면 당연할 법하다. 낯익지 않은 제재를 몰입도 높은 구성을 통해 박진감 넘치게 결말로 이끌고 가는 작가의 솜씨가 노련미마저 풍긴다.
화자에게 물리적 낮과 밤은 의미가 없다. 동영상 관람, 온라인 게임, 채팅 등 흥미를 끄는 요인이 일단락되어 잠에 빠져들면 그때가 곧 밤이 된다. 이런 패턴이 반복되면 일상은 단순해지며, 육체적 활동은 최소화된다. 이런 화자의 삶의 틀에 균열을 일으킨 것은 우유배달 소리였으며, 이어 창백한 손이 일상을 뒤흔들었다. 그것은 가상세계와 현실세계를 연결하는 유일한 창구였다. 그가 손에 집착하는 것은 충분히 납득된다. 그만큼 손의 존재는 중차대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기에 그는 손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유하려고 시도한다. 폐인다운 방식으로. 또한 변태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페티쉬라고 하겠다. 방식은 불순하지만 의도는 진지하였다. 그는 손을 구원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손을 통해 환상이 실현되고 세상과 소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마지막에 그가 폐인 생활을 청산하고 손을 기다린 것은 손에 대한 정면응시였다. 하지만 그는 거부당하였다. 손에, 세상에.
“손과 대면하지 못한 것도 상관없다. 내가 억울한 건,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왜 그래야만 했는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P.188)

 

해설에서 그러했듯이, 작가는 작중 인물을 통해 인생의 어두운 면을 집중적으로 파헤치고 있다. 그것이 역설적으로 삶의 밝고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면서 잊고 지내던 삶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만든다. 너무나 익숙하여 공기와도 같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삶의 평온과 행복, 그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기반에 근거하는가. 조그마한 사건으로도 그것은 흔들리기를 되풀이하다가 양의 피드백을 일으켜 현상을 무너뜨리고 만다.

 

그래서 작중 인물은 생존에, 생활에 급급하다. 운명에 치여 허덕이는 그들에게 지상과제는 오직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다. 죽지못해 사는 삶도 살만한 가치가 없는 건 아니다. 아프고 병든 삶도 외면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차라리 생물로서의 본능에 가까운 생의 의지다. 여기에 도덕과 윤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다.

 

불쌍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뿌리뽑힌 사람들! 이것은 오만한 상념이다. 작중인물들의 운명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운수는 변화무쌍하다. 오늘의 행운이 내일은 불운으로 변전하기 일쑤다. 어느 날 내가 갑자기 그들처럼 된다면 타인이 나에 대해 동일한 상념을 토로할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
“공평하다고 생각하자. 앞일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다. 행이든 불행이든, 그건 개인의 능력으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럼 정말 공평한 것일까.” (P.44)

개기일식이 끝나면 태양은 평소보다 더욱 눈부시게 빛난다. 빛이 강할수록 음영은 더욱 짙은 법. 작가는 삶이란 이런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었을 것이라고 혼자 추론해 본다.

 

* 간단하게 몇 자 끄적여 본다는 게 그만 생각보다 장문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개별 작품들을 언급하지 않고 넘어간다는 건 작품에 대한 예의가 아닌 성 싶었다. 별다른 기대 없이 손에 든 책이 매우 쇼킹하다. 아무래도 작가에 대한 보다 바른 이해는 후속작을 읽어야 가까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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