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트린 M의 성생활
카트린 밀레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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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골적이기에 당혹스럽지만 메마른 성생활의 모습]

이런 유형의 책들을 읽는 독자의 부류는 대개 둘로 나뉘어진다. 직업적 관심을 갖는 독자와 아니면 은근한 성적 흥미를 느끼고 싶어하는 나와 같은 독자로.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난 다음의 소감을 요약하자면 오히려 섹스에 대한 불감증만을 불러일으켰다고나 할까. 저자 특유의 감정이 실려 있지 않은 건조한 성적 묘사와 기술의 일관성은 마치 ‘동물의 왕국’에서 동물들의 교미를 해설하는 나레이터를 연상시킨다. 카트린의 몸을 거쳐간 뭇남성들의 수를 헤아린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파르투즈에서 얼굴도 모르는채 다리를 벌린 경우가 허다하다. 그녀는 남성을 가리지 않는다고 한다. 키가 크거나 작던지, 날씬하거나 뚱뚱하던지 아니면 깔끔하거나 약간 변태적인 취향을 가지던지에 관계없이 자신을 원하는 남성에게는 자연스럽게 일체의 망설임없이 옷을 벗는다. 여기에 수반하여 등장하는 노골적인 섹스 묘사는 순간순간 전율을 일으킬 정도이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독자를 무감각하게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햇빛 아래 드러난 섹스는 더 이상 내밀하고 미묘한 감정을 허용하지 않는다고나 하겠다. 파르투즈, 항문성교, 펠라티오 등을 하면서 카트린은 모든 섹스에 정성을 다하며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인다.

카트린의 성생활은 일반적이지 않다. 그녀 스스로도 밝히고 있다. “내가 가진 관계는 특히 여자들에게는 그리 통상적인 것이 아니다. 다른 환경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떠할지 몰라도 내가 속한 사회 환경에서는 결코 흔하다고 볼 수 없다.” 문득 궁금해진다. 카트린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섹스에 굶주린 사람처럼 섹스에 탐닉할까. 섹스 자체가 그녀의 인생 목표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녀는 성공한 미술 평론가이며 때때로 드러나는 상세한 묘사도 직업적 관찰을 연상케 한다. 섹스에 대한 그녀의 헌신적이며 초월적인 태도가 때로는 종교적 느낌마저 준다며 웃기다고 할지 모르나, 자신의 몸을 바침으로써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처연한 비장감이 풍겨짐을 어쩔 수 없다. 그녀는 섹스를 통해 자신의 ‘공간’이 확대된다는 표현도 사용한다. 하지만 내게 카트린의 모습은 68세대의 자유분망한 삶의 가치관을 대변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기존 가치관의 붕괴를 섹스로 채우려는 삶의 모습. 열심히 갈구하지만 대리만족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그녀는 건드리려고 한다. 결코 다수의 동의와 공감을 얻지 못하는 일탈의 모습. 그것이 프랑스에서 화제를 불러 일으키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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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5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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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우세븐 2014-07-09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재밌게 읽었습니다. 프랑스란 나라, 재밌고 관심 가는 나라입니다.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아민 말루프 지음, 김미선 옮김 / 아침이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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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잡힌 역사적 시각을 되찾기 위한 흥미로운 노력에 갈채를!]

누구나 그렇듯이 학창시절에 세계사 수업에서 십자군전쟁은 매우 간단하게 기술된다. 이슬람에 점령당한 성지회복을 교황이 주창하고, 중세 봉건영주와 기사들이 호응하여 수차에 걸쳐 원정을 하였다. 1차에는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였지만, 뒤로 갈수록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났다. 위의 기술에 대해서 아무도 그 내용을 재고하지 않고 고민없이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다. 원인은 우리들이 서양중심의 세계관과 역사관에 물들어 있다는데 연유한다. 우리에게는 ‘누르 알 딘’이나 ‘살라딘’ 보다는 ‘사자왕 리차드’가 더욱 친숙하다. 그런 까닭에 서구와 아랍의 대결에서 아무런 망설임없이 서구에 지지를 보내고 아랍세계를 적대시한다. 십자군전쟁은 얼핏 임진왜란을 연상시킨다. 침략군은 초기에 쉽사리 획기적인 전과를 올리고 깊숙이 침투하였다가 종국에는 격퇴당하였다. 아랍이나 조선은 승전국이다. 하지만 그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자신의 고향이 바로 전장터였다. 이 책을 단순한 역사소설이라고 칭하기는 어렵다. 저자가 저명한 소설가이기는 하나, 이 책은 쉽게 풀이한 역사서로 분류하고 싶다. 생소한 이슬람 용어 및 역사석 사실에 대해 상세한 주석을 수십 페이지나 첨부하고 있다. 더욱이 독자의 이해를 용이하게 하고자 당시의 권역 지도도 덧붙였다.

초기에 이슬람권이 변변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무너지고 상당한 기간동안 반격도 하지 못한 데는 이슬람권 내부의 반목이 큰 역할을 한다. 자연적 수명을 맞이한 지배자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웃 세력이 주도권을 가지면 혹시나 자신이 다스리는 도시가 지배되지 않을까 우려한 에미르들은 차라리 프랑크들에게 공물을 바치면서 안전하게 항복하는 길을 따랐다. 여기에 상속을 둘러싼 왕족들간의 치열한 분쟁이 있었고 칼리프와 술탄의 헤게모니 다툼이 있었다. 너무나 새롭고 흥미진진한 사실이 역사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특히 장기 이후 성왕 누르 알 딘, 그리고 이어지는 유명한 ‘살라딘’ 등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새삼 당시 이슬람 문명이 얼마나 만개하고 있었는지는 오늘날 퇴락한 시리아와 레바논 지역의 도시들이 당시에는 풍요로운 삶을 누렸다는 점에서 깨달을 수 있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이라크 침공까지 잇달은 사태에 직면하여 많은 관련서적들이 잇달아 출판되고 있다. 이것도 그 중의 하나이지만 중동의 이슬람 강경파들이 소위 ‘지하드(성전)’을 부르짖고 현대의 프랑크에 대항하는 것이 뿌리깊은 배경을 지니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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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5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3.5.13에 쓴 글을 마이페이퍼에서 이동
 
부족지 - 몽골제국이 남긴 '최초의 세계사' 라시드 앗 딘의 집사 1
라시드 앗 딘 지음, 김호동 옮김 / 사계절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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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유목민족들의 족보를 보다]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으로 촉발된 이슬람 문명권에 관한 호기심이 <부족지>를 집어들게 되었다. <집사> 시리즈 중의 첫 번역본이다. 잘은 모르나 ‘몽골인이 쓴 최초의 세계사’ 등등 미디어의 평가가 굉장한 의의가 있는 저서임을 일깨운다. 하지만 단순한 호기심으로 펼쳐 들었다가는 낭패보기 십상이라는 점을 미리 말해둔다. <집사> 전체 가운데 일종의 도입부분에 해당한다. 구성은 기나긴 서문과 4개로 대분류한 중앙아시아 각 유목민족들의 역사적 배경 및 주요 인물 소개로 이루어져 있다.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몽골 제국사는 다음 번역본에나 등장할 것이다. 서문은 너무나 길고 지루해서 책을 덮게 만들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무척 고생했다고만 밝히겠다. 4개 대종족에서 등장하는 무수한 종족 중 한번이라도 들어본 것은 서너개에 불과할 정도로 종족과 등장인물은 낯설어서, 마치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등 판타지소설이나 컴퓨터 게임에 등장하는 용어처럼 느껴졌다. 그냥 중앙아시아 민족들의 족보를 읽는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이 종족은 누구의 후손인데 시조가 누구이고 자식 몇 명을 두었는데, 첫째는 어떻게 자손이 퍼졌고 둘째는 누구를 낳아서 어찌어찌 되었다. 그중에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람은 누가 있는데, 일화로는 이런게 있다. 대개 이런 식이다. 그래서 아, 그냥 이렀군 하고 넘어가야지, 이게 누구의 자손이였더라 하고 괜한 지적 호기심을 발휘하다간 머리에 쥐가 나기 딱 좋다. 그렇다고 이 책이 별볼일없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다만 대중적인 역사서가 아니기 때문에 진지한 자세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부족지>의 진정한 평가는 <집사>의 후속편이 발간되어 전체로서 조망이 가능해야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서적들이 더욱 많이 출간되어 사고의 이해와 폭을 넓혀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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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5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3.5.22에 쓴 글을 마이페이퍼에서 이동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 미국 인디언 멸망사
디 브라운 지음, 최준석 옮김 / 나무심는사람(이레)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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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과 거짓이 빚어낸 숨기고 싶어했던 미국 역사]

표제에 ‘운디드니’라는 용어가 있어서, 인디언의 고유명사인줄 알았다가 나중에야 ‘Wounded Knee’라는 사실을 알고 당혹을 금치 못했다. 차라리 인디어식 용어를 그대로 썼더라면 내용과 표제가 더욱 일치하지 않았을까. 각설하고, 책을 펼쳐들고 마지막 장에서 덮기까지 내내 분노와 슬픔과 어처구니없음이 복합된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탐험이 서양에서는 신세기의 전환점이 되었지만, 아메리칸 원주민들에게는 재앙의 시작이었다. 특히 메이플라워호를 타고온 일단의 피난민들이 대륙에 정착한 이후 이주민들은 서쪽으로 무한한 팽창을 거듭하였는데, 이는 곧 소위 인디언들에게는 자신의 고향에서 지속적으로 추방당함을 의미한다.

20대 후반 이상의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어릴 적에 서부영화를 숱하게 보고 자랐다. 이들 영화의 주요 소재는 평화로운 백인 이주민들을 거칠고 무지하며 야만스러운 인디언들이 공격하지만, 그들을 영웅적으로 격퇴한다는 것이었다. 즉 백인은 선하고 인디언은 악하다라는 기본 도식이 전제로 되어 있었고, 우리들은 아무런 의심없이 그리고 지극히 당연하게 사실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도식이 완전히 날조되었음을 이 책은 여실히 드러내준다. 만약 우리들이 사는 지역을, 우리의 땅을 타인들이 강제로 빼앗으려고 할 때, 아무도 가만히 양도해 주지는 않는다. 당연히 저항이 따르고, 종국적으로는 힘과 힘의 대결이 벌어진다. 하지만 그 싸움이 어린애와 어른의 싸움이라면, 활과 총 또는 화살과 대포의 싸움이라면 결과는 너무나도 뻔하다. 이렇게 인디어들은 하나둘 종족이 스러져갔다. 교묘한 사기와 위협과 무력 앞에서. 그리고 오늘날 미국은 세계 초강대국이 되어 세계를 휘두르고 있다.

사람이 어떻게 사람에 대하여 잔인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하지만 미국 백인들에게 인디언은 사람이 아니었다. ‘선곰, 사람이 되다’는 장이 있다. 제목만 보고서는 무슨 내용일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선곰’이라는 인디언이 사람인지 아닌지 재판을 거쳐 최초로 사람이라는 판결을 받았다는 어이없는 내용이었다. 이것이 지금부터 약 120년 정도의 사건이다. 그나마 이것도 예외적인 판결이었고 그후 대법원에서는 여전히 사람이라는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내용에 대해서 너무나 하고 싶은 말이 많다. 하지만 일일이 늘어놓을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이 책의 독자는 옛날에 타국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가볍게 치부해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불과 수십년전(그리고 지금도 어디에선가는 진행중이다)에도 인간이 인간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던 역사적 사실이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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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5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3.5.30에 쓴 글을 마이페이퍼에서 이동
 
미국 민중저항사 1 - 일월서각 61
하워드 진 지음, 조선혜 옮김 / 일월서각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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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진정한 미국의 역사인가!]

최근들어 숨겨진 역사에 관련된 서적을 연속해서 읽게 된다. 애초에 계획하지는 않았지만, 마치 자연스런 흐름을 좇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 책도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가 계기가 되어 접하게 되었다. 나도 포함된 30대 이상의 모든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국에 대한 환상을 가지도록 교육받았다. 그것은 비단 공교육 뿐만 아니라 신문, 방송 등 온갖 매체를 통해서이기도 하다. 그중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던 매체가 개인적으로는 초등학교 시절의 위인전기집이라고 한다. 여러 위인들의 삶과 업적을 접하면서 나도 그들을 본받아야지 하는 결의를 어린 마음에도 품고는 했다. 조지 워싱턴, 에이브러햄 링컨, J.F.케네디를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노예해방의 선언자이자 진정한 민주주의자, 그리고 정체된 미국인에게 희망과 비전을 제시하여준 젊은 지도자. 어느 한 구절을 펼쳐도 거기에는 찬란한 빛이 뿜어나왔다. 그런데 하워드 진은 그런 아름다운 기억을 단번에 날려버렸다. 대지주로서 민중에 의한 지배를 막으려고 노력했던 워싱턴,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노예해방을 선언하였지만 상징적 시행에 그쳤고 인디언에 대한 탄압은 그치지 않았던 링컨, 소위 군산복합체의 틀 내에서 미국의 이익을 위하여 쿠바와 베트남 침공에 앞장섰던 케네디.

역사란 승자와 지배자의 것이다. 미국 역사의 지배자는 대지주에서 대기업으로 이어지는 부유한 앵글로색슨계 백인이었다. 그들의 이익을 위하여 인디언은 절멸되어야 했고, 흑인은 노예로 수탈의 대상이 되어야 했으며, 가난한 이주민 백인들은 값싼 노동자가 되어 나날의 생계에 급급하게 되었다. 소수 부유층의 이익이 곧 미국의 이익이었으며, 이를 위하여 세계대전 참전과 베트남 전쟁이 일어났다. 대기업의 이익을 위하여 노동운동과 노동조합 결성이 이루어져서는 안되었다. 가만히 오늘날의 미국을 생각해 본다. 매우 높은 부의 집중화 현상, 노동조합이 무력화되고 극히 탄력적인 노동시장이 존재하는 국가. 이것이 다 역사적 뿌리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이왕에 알고 있는 미국의 역사는 진정 허상에 불과했을까,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처럼. 이것이 미국이라는 나라에만 예외적이라고 박박 우기고 싶다.

PS. 번역된 지 오래되었고 편집상태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원저의 개정본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이와같은 훌륭한 책을 하루빨리 충실하게 번역된 신간으로 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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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5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3.7.2에 쓴 글을 마이페이퍼에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