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한 제국 당대총서 14
하워드 진 지음, 이아정 옮김 / 당대 / 2001년 1월
평점 :
품절


[미국의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통렬한 비판]

미국인들의 특징 중 하나는 자신의 국가에 대한 거의 맹목적이다시피 한 자부심과 충성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독립선언서와 헌법, 그리고 투철한 민주주의 역사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누누이 드러낸다. 미국은 아마도 지구상에서 유토피아에 가장 가까운 국가라고 믿는게 아닐까.

그런 미국과 미국인들에게 통렬한 일침을 가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하워드 진과 노엄 촘스키다. 하워드는 『미국민중사』의 저자인 역사학자답게 미국제국의 감쳐진 일면, 권력자들이 숨기고 싶어하는 은밀한 부위를 낱낱이 까발린다. 솔직히 이렇게 하고도 무사할까 싶을 정도다.

그의 분석은 전방위적이다. 외교와 전쟁, 사법 및 경제제도, 언론과 정치체제, 이데올로기 등. 이 모든 것이 하나로 귀결된다. 미국을 지배하는 세력은 백인계 남성 부유층들이다. 그들이 미국을 건국하였고 오늘날까지 자신의 이해에 맞게 지배하고 있다. 그들의 방벽은 철옹성이고 민주주의는 철갑옷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소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 얼마나 주모면밀하게 초기 미국의 정치사회시스템을 설계했는지 감탄하게 된다. 그들은 헌법을 설계하면서 자유,생명,행복의 보장 대신에 자유,생명,재산을 집어넣었다. 그것은 참으로 교묘하면서 절로 감탄이 나오게 하는 조치였다. 이 단어 하나로써 기존의 경제적 불평등을 영구히 고착화시키는게 가능하였다. 그리고 재산으로서의 노예를 자연스럽게 인정하여 노예제도를 합리화시켰다.

다수의 힘을 중화시키기 위하여 고안한 제도가 대의제이고, 안정된 사회를 뒤흔들려는 불순세력을 징벌하기 위하여 사법제도가 편성되었다. 언론의 자유는 보장(?)하지만 정부의 이익에 위배되면 당연히 처벌감이다. 언론매체의 소유주가 부유한 기득권층인데, 어디 감히 체제비판이 허용되겠는가.

다시 한번 상기한다. 링컨이 선언한 것은 노예해방이었지, 인종평등은 아니었다. 법적으로 노예가 아니었을뿐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노예상태를 강요받은 결과, 여전히 다수의 흑인들은 빈민굴을 전전하고 가난과 무지를 세습하고 있다. 하물며 인디언에 대해서는 언급할 것조차 없다.

한마디로 이 책은 미국에 대한 무자비한 비판서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런 책이 자유로이 출판되고 마음껏 정부와 권력층을 비판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여유. 오히려 이것이 미국의 진정한 힘의 근원이 아닐까 싶다. 한가닥 언로를 열어놓음으로써 체제가 폭발하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만들어 놓는 섬뜩한 이데올로기...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11-15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3.7.28에 쓴 글을 마이페이퍼에서 이동
 
야생초 편지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야생초 편지 2
황대권 지음 / 도솔 / 200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낯익으면서도 낯설은 우리 이웃들, 그들의 소중함을 깨닫다]

TV와 같은 대중매체에서 특정 책을 소개하는 것은 너무나 막강한 파급효과를 지닌다. MBC의 느낌표가 그러한 사례인데, 다행하게도 나름대로는 양서들을 소개하고 있으니 다행이다. 하지만 결국은 책 선정과정에서 특정 가치관이 반영되는 것은 피할 수 없으리라.

내가 느낌표 추천도서를 집어든 경우는 이번이 세 번째다. 「아홉살 인생」과 「연탄길」에 뒤이어. 이중에서 후자는 첫 10여 장을 읽어본 후 조용히 덮고 말았다. 누구나 반항적인 심리를 가지고 있다 한다. 즉 부모와 교사가 청소년들에게 하지 말라고 하면 할수록 기어이 더욱 하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책은 따뜻하며 교훈적이며 성찰적이면서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으니 양서이므로 읽어야 한다는 압박의 측면이 강하다. 한편 한편 떼어놓고 보면 아름다운 일화이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부담감이 강해진다. 나만의 삐딱한 심리인지는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야생초 편지」는 읽기에 수월하다. 애초에 출판을 염두에 두지 않고 옥중에서의 느낌과 야생초 관찰을 편지형식에 기록한 것이다. 마치 바로 옆에서 소곤소곤, 도란도란 정겨운 대화를 엿듣는 느낌이랄까.

새삼 저자의 파란만장한 이력을 언급할 필요는 없다. 그시절 무수한 대학생들이, 지식인들은 감수할 수 밖에 없는 아픔이었다. 다만 저자가 옥중에서 익숙하지만 낯설었던 새로움을 깨닫고 그것을 세상과 공유할 수 있었다는 점은 우리 모두에게 축복이다.

나는 비록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대부분의 생활을 도시에서 지낸 탓에 나무, 풀, 꽃 등에 대하여 무지하기 짝이 없다. 사실 여기서 소개된 이름 중에서 이름을 접해본 것도 몇 개에 지나지 않을뿐더러 모양을 보고 파악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며느리밑씻개, 닭의덩굴, 땅빈대, 중대가리풀 등 명칭 자체가 우리 서민들의 해학과 자연스러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야생초라고 해서 어려울 것 없다. 그냥 잡초 내지 들풀이라고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마당 한구석에 자라는 낯모를 풀들, 개천가에 자라는 무성한 풀들. 우리에겐 친숙한 존재다. 일부러 심혈을 기울여 갖은 노력을 들여야 자라는 관상용의 여리여리한 종류와는 확연히 다른 존재.

이런 멋진 책은 두루두루 알릴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TV의 긍정적인 측면도 무시할 수는 없겠다. 나도 저자처럼 들풀을 관찰하고 맛을 보며 차를 마시고 자연과 우주에 충만한 기를 받아들이고 싶다는 소박한 바램이 잔잔히 퍼져나옴을 느낀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11-15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3.8.1에 쓴 글을 마이페이퍼에서 이동
 
우린 숲으로 간다
이유미·서민환 지음 / 현암사 / 2003년 6월
평점 :
품절


[가깝고도 먼 이웃과의 더불어 살기]

한번 일어난 일은 되풀이 발생하기 쉽다? 요즘 연속해서 숲 또는 풀 등 자연을 다룬 책들을 연속해서 읽게 된다. 얼마전만 해도 거의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었는데.

숲, 숲에 대하여 어떤 느낌이 드는가? 왠지 운치있고 정감이 넘쳐나는 포근한 고향. 하지만 내게 숲은 그저그런 존재일 따름이다. 갖가지 이름모를 나무와 풀, 거기에 손대기조차 싫은 벌레들. 그리고 눅눅하고 음침하며 적막한 분위기. 삶의 대부분을 도회지에서 보내고 있는 나는 숲에 대하여 환상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자연보호를 위하여 숲이 보존되어야 한다는 당위론에 찬성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부부 저자는 손잡고 우리의 숲이 얼마나 아름다우며 사람과 가까운 존재인지를 역설한다. 소개하고 있는 13군데 숲 중에서 그나마 들어본 기억이라도 있는 곳은 단 하나, 광릉수목원 밖에는 없다. 멀리는 제주도와 울진에서, 가까이는 남산 소나무숲에 이르기까지 전혀 모르던 또는 막연히만 알고 있던 숲의 이모저모를 아름다운 사진과 함께 접할 수 있다. 반은 기행문, 반은 안내서라고 할까.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나무를 가리키며 종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한두개 정도 밖에는 이름을 댈 자신이 없다. 후박나무, 구상나무, 잣나무, 비자나무 등 귓가에 스쳐지나간 나무 명칭은 시각적 각인과는 별개였다. 나보고 참 한심하다고 비난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항변하고 싶은 것은 나만이 그렇게 깜깜하지는 않으리라는 점이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살면서 특별히 숲과 풀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부를 제외한다면 많은 젊은이들은 숲을 잘 모른다.

숲이 좋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하지만 그것이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우선은 알아야 가까워진다. 이게 무슨 나무고 풀이고 꽃인지, 그것의 특성이 무엇이고 어떻게 자라는지를 안다면 더욱더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가까이에 접할 수 있는 장소가 구비되어야 한다. 꽤죄죄한 몰골로 거리 구석에 서있는 것 말고, 우람하고 당당하게 하늘을 치오르는 기상을 간직한 숲. 인공적으로 다듬어 피운 꽃이 아닌 강인한 생명력을 느끼게 하며 소박한 아름다움을 전하여 주는 야생초. 이런 공간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저자들이 소개한 십여군데 숲 중 일반인이 가장 다가가기 쉬운 숲은 없다. 물론 수목원이나 식물원을 가면 되지 않냐고 반박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자연적인 숲과 비교할 수는 없다.

새삼 숲에 대한 동경을 일깨웠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그리고 얼마남지 않은 우리 숲을 보존하는 과제의 중요성 외에 숲을 사람들과 친밀하게 하는 과제에 대하여도 새삼 고민을 하게 만든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11-15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3.9.2에 쓴 글을 마이페이퍼에서 이동
 
칼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 이순신과 슬픈 칼의 노래]

요즘도 학교에서 이순신 장군에 대해 신격화된 교육을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80년대초까지는 이순신 장군은 내게는 우상이자 신이였다. 단순한 구국영웅이 아니라 ‘성웅(聖雄)’이라는 칭호가 자연스레 따라붙었다. 역사상 존경하는 위인을 선정하면 도맡아놓고 일등에 뽑히곤 하였다.

이순신이 위대하게 각인될수록 대비하여 원균은 초라하고 비열한 인간의 표본으로 전락하였다. 지금은 이런 이분법에 반대하여 원균을 복권하는 책도 출판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정작 이순신은 여전히 가까이하기엔 너무 압도적인 존재였다.

작가는 이런 영웅을 인간으로 되돌려놓았다. 이 작품에서는 영웅소설이나 전쟁소설 등에서 상투적으로 써먹는 ‘영웅만들기’가 일체 배제되어 있다. 이순신은 다만 인간일 뿐이다. 그에게는 자신을 사형시키려고 한 임금에 대한 분노와 측은한 마음, 적에 대한 강렬한 적의, 그리고 병으로 쇠약해지는 육신이 있으며, 여인의 품에 안겨 안온함을 맛보는 소박한 마음조차 똑같이 있다. 영웅을 바라는 독자라면 실망을 금치 못하리라.

작품이 이순신의 전생애를 포괄하지는 않는다. 구국의 일념으로 맹렬한 적함을 쳐부수던 전쟁 초기는 회상의 단면으로만 재현될 뿐이다. 정유년때 적선을 요격하라는 명령을 무시하고 적과 내통했다는 의심을 받아 국문을 받고는 간신히 목숨을 연명하여 백의종군하는데서 소설을 시작한다. 작품의 관점은 철저히 나, 즉 이순신 장군에 있다. 내가 바라보는 전쟁의 의미, 국가와 백성의 무너지는 모습 그리고 적군의 행동에 대한 추정 등.

이것을 단순히 역사소설이라고 국한시킨다면 작가는 꽤나 섭섭해 하지 않을는지. 오히려 여기서 작가는 이순신이라는 극적 인물을 통하여 자신의 심정을 투영하고 있는 듯 싶다. 그것은 언제나 낮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내밀한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전체적인 문맥의 흐름을 쫓다보면 마치 개인의 고해성사를 듣는 듯한 기분이 들게 된다. 그러기에 각종 전투에 대한 기록과 묘사는 부수적인 요인에 지나지 않는다.

명량대첩에서 흔히 알고 있는 바다를 가로지르는 쇠사슬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오직 조류 흐름의 변화를 기가막히게 잘 이용하고 있음만을 보여준다. 역사적 사실이 그러한지 아니면 작가가 의도적으로 그 부분을 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하튼 작가는 징징 울어대는 이순신의 칼과 임금의 칼과 적들의 칼을 통하여 극한 상황에서 인간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싶은가 보다.

[인간 이순신과 슬픈 칼의 노래]

이 소설은 슬프다, 억지로 눈물을 짜내지 않는데도. 작가의 목소리는 낮은 베이스 톤으로 굴곡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이 글을 쓸때 작가의 심경을 반영하듯이. 그래서 여늬 소설을 읽을 때처럼 속도감이 나지 않는다. 책장을 탁탁 넘길 때의 쾌감이 여기에는 없다. 개인의 일기나 수상록을 읽듯이 중간에 문득문득 창밖을 바라보는 내 자신을 보곤 한다. 이순신은 죽음을 원했다. 일부러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죽음이 앞길에 드리워져 있음을 늘 의식했다. 만약에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그에 대한 평가는 어떤 모습일지 자못 궁금하다. 그를 시기하는 적대세력과 임금에 의하여 평탄한 죽음을 맞지 못하고 불명예스럽게 최후를 마쳤다면, 오늘날 그와 같은 추앙을 받지는 못할 것이다. 그의 죽음은 너무나도 극적인 동시에 강렬하였다. 그의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 전쟁은 끝을 맺었다.

작가는 난중일기와 장계, 각종 역사기록 등을 통하여 노량해전에 이르기까지의 이순신의 수군활동을 전하고 있다. 임진년 초창기 승전 이후 명량, 그리고 노량에 이르기까지는 소강상태로 별다른 전투의 기록이 없다. 따라서 그냥 무덤덤하게 넘기기 일쑤이지만, 사실은 끝없는 대치상태로 인한 긴장의 연속, 식량부족과 전염병이 야기한 수많은 죽음 등 결코 평화롭지 않은 기간이었음을 새삼 일깨워준다. 사실 전쟁기간 중에 진실로 평화로움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도 그들은 너무 고독하다. 인간 이순신은 홀로선 자이며, 작가도 마찬가지로 혼자이다. 철저한 개별성에 바탕을 둔 두 사람이 뜻을 같이하여 슬픈 칼의 노래를 부른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11-15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합본 이전 2권짜리를 읽고, 2003.4.21에 쓴 글을 마이페이퍼에서 이동
 
- 산문의 향기 001
박이문 지음 / 미다스북스 / 200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묵직한 산문의 향기에 취하다]

학창시절에 수필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배웠다. 미셀러니는 가벼운 유형이며, 에세이는 진지한 유형으로 에세이의 대표적인 작품이 몽테뉴의 수상록이라고 한다. 이렇게 볼때 박이문의 산문은 분명히 에세이에 속한다. 여기서 독자는 경묘한 붓끝과 날렵한 문체를 기대하지 말 것이다.

박이문의 글은 낯설지 않다. 이미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그의 ‘길’이라는 작품을 접하지 않았던가. 이제 ‘길’을 포함한 그의 묵직한 산문을 접하게 되니 감회가 남다르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가벼운 글쓰기에 경종을 울리려는 듯, 단어 하나하나에 문장 한 줄 마다에 성찰의 무게가 반영되어 있다.

그의 글은 철학적이다. 철학이라고 해서 괜히 골치아픈 난해한 용어와 논리를 들이미는 것이 아니다. 길, 밤, 바다, 담, 삶, 시골, 집, 얼굴, 여행, 기차, 편지, 명함 등 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소재에서 미처 우리가 깨닫지 못한 깊은 의미를 캐어 그 담백한 향기를 더불어 즐기게끔 한다. 철학은 먼데 있지 않다.

사람마다 말투가 다르듯이 그의 글투도 남과는 다르다. 우선, 차분하다. 그는 결코 흥분에 휩싸여 일필휘지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그의 차분함에 독자도 무의식중에 마음을 가라앉히게 된다. 그리고 담백하다. 그는 세상의 고뇌와 격랑을 초월한 듯싶다. 어찌보면 재미없다는 말을 듣기 딱 좋다. 하지만 깨달은 자만의 담백함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리라.

그의 산문은 아침이나 한낮에 읽어서는 제 맛이 나지 않는다. 만물이 어둠의 그림자에 뒤덮이고 숨을 죽이는 한밤에 비로소 나지막한 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그 울림은 천천히 주위를 휘감고 잔잔히 퍼져나간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11-15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3.10.5에 쓴 글을 마이페이퍼에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