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영 십팔사략 세트 - 전10권
고우영 지음 / 애니북스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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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만화는 개인적으로 열광도 무관심도 아닌 중간적 애호가의 수준이다. 만화의 재미성을 인정하지만 목적성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이었다. 물론 <열혈강호>의 희로애락에 푹 빠진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만화 조선왕조실록>을 조금 보면서 어쩌면 만화가 딱딱한 분야의 접근을 위한 부분적 보완재의 구실을 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되었다.

만화가 고우영의 이름은 낯설지 않다. 그의 작품을 본 적은 없다. 더욱이 그가 이미 고인이라는 사실마저도. 솔직히 누가 빌려주던가 아니면 이번처럼 반값 이벤트가 아니었다면 이 만화책을 볼 가능성을 사실상 제로에 가깝다.

중국 역사를 어려워하는 이도 많다. 삼국지 등을 통해서 단편적으로는 알지만 개괄적 걸개그림을 그리지 못하면 중국 역사는 단편적 사실들의 무차별적 나열에 불과하여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그런 면에서 ‘십팔사략’이라는 책의 가치가 높이 평가받는 것이며, <만화 십팔사략>도 미덕을 상실하지 않는다.

중국 상고시대부터 남송의 멸망까지 방대한 시기를 다루고 있으므로 몇 권의 책으로 속속들이 심도 깊은 역사 이해를 기대할 수는 없다. 따라서 커다란 흐름을 깨우치도록 하며 도중의 중요한 사건이나 일화 소개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일찍부터 역사에 관심이 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관련 서적들을 -물론 번역본으로- 보았다. <서경>, 사마천의 <사기> 전집, 사마광의 <자치통감> 처음 몇 권 등 역사서를 포함하여, <열국지> <초한지> <삼국지> 등 역사소설류. 특히 <삼국지>는 다른 번역본을 수차례, 고에이 컴퓨터게임 등을 섭렵하였다.

따라서 이 만화책 세트를 통해 뭔가 새로운 것을 기대하는 마음은 없었다.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심심파적 삼아 간만에 중국사를 통사적으로 훑어보자는 심정뿐. 그럼에도 남북조 시대는 역사서에서 상세히 다루지 않는 부분이므로 이 책을 통해서 그 정신없음과 잔혹성을 여실히 알게 되었다. 당대는 말할 것도 없고 과거에도 사람 목숨은 여전히 파리 목숨이며, 권력욕 앞에서 부자, 부부, 형제 간의 정리는 진부한 도덕률이다.

이 책을 누구에게 추천할 수 있을까. 일단 초등학생은 제외하자, 어쨌든 기본적 이해력과 인식수준을 사전에 요구하므로. 내용에 다소간 선정성과 폭력성이 반영되어 있으므로 망설이면서 중학생 정도 이상이면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내용의 방대함에 연유하는지 작가는 큰 줄기를 쫓아가기에 바쁘다. 역사의 주인공은 역사 그 자체이다. 그 안에 명멸을 거듭하는 수많은 영웅과 인간 군상을 역사를 드러내는 부품과 배경 역할에 불과하다. 작가의 유머와 해학은 등장인물 각각을 뚜렷이 구별되게 하는 놀라운 차별성을 보여주지만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 보고 읽는 <만화 삼국지>와는 분명히 다르다.

만화 형식을 통한 충실한 중국사 이해가 주목적이라면, 이 책은 매우 좋은 입문서다. 하지만 작가 고우영의 창의성과 체취를 짙게 느껴보고 싶은 독자라면 다소 밋밋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일장일단은 존재한다. 다만 독자의 선택일 뿐이다. 나라면 어떨까? 지하철 통근하면서 시간가는 줄 몰랐다는 정도면 충분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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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4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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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지엘라
알퐁스 드 라마르틴 / 책세상 / 199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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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순수한 사랑의 이야기는 고금과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영원한 예술의 소재다. 더구나 그것이 비극적 결말을 갖는 슬픈 사랑의 이야기라면 한층 더할 것이다. 

라마르틴은 특히 슬픈 사랑의 구현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라파엘(호반의 연인)>은 과연 사랑의 찬가이지만, <그라지엘라> 또한 이에 못지않다. 이 작품 역시 그의 젊은 날의 체험을 토대로 하고 있어 사실과 허구의 경계가 묘하게 섞여 있다. 갓 스무살 넘은 라마르틴이 이탈리아 여행을 하면서 만난 소녀와의 풋풋한 사랑의 추억이 여기에 그대로 녹아있다.

본질적으로 <그라지엘라>는 사랑의 이야기이지만, 사랑담만을 담고 있지는 않다. 전반부는 오히려 주인공의 이탈리아 편력기 인상을 주며, 나폴리에서 친구와 함께 어부의 배를 타고 뱃사공 생활을 하다가 폭풍에 난파당하는 장면은 해양문학에 가깝다. 그리고 주인공이 도시문명을 벗어나 이스키아섬과 프로치다섬을 돌아다니며 자연 그 자체의 소박한 삶을 누리는 모습에서 언뜻 자연파적 가치관마저 풍긴다.

주인공과 어부 가족, 특히 그라지엘라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사건은 생피에르의 <폴과 비르지니> 소설의 낭독이다. 이전에 열정과 혁명을 다룬 책이나 타키투스의 저작에 대해서는 시큰둥하던 가족들이 모두 바싹 다가와 귀 기울이며 탄식하는 장면은 인위적 겉치레를 벗긴 순수한 인간과 그 사랑의 아름다움과 호소력을 웅변하고 있다.

그들의 관계는 육지로 떠난 주인공이 건강이 악화되어 다시 그들을 찾으면서 결정적으로 가까워지게 되며, 이윽고 사촌 체코의 청혼으로 가출한 그라지엘라와 주인공이 대면하면서 내재된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진부한 사랑이라는 단어로로 오염되지 않은 문자 이전의 사랑 그 자체이며, 그것의 세속적 현현은 그들의 뇌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조금씩 사랑을 확인해 나가던 그들의 사랑은 부모님의 갑작스런 호출에 따라 주인공이 프랑스에 와있는 동안 그라지엘라의 죽음으로 허무한 종결을 맞이한다. 그라지엘라는 가출하던 날 프로치다섬에서 추위에 떨면 한밤을 보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점차 건강이 악화되어 폐결핵으로 죽게 되는 것이다. 주인공이 곁에 있었더라면 그녀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까?

<라파엘(호반의 연인)>에서 라파엘과 줄리의 사랑은 육욕적 측면을 극력 억제한 관념적, 종교적 사랑으로 나아갔다면,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들의 연령이 아직 10대이므로 풋풋한 내음을 드리운다. 이것이 과연 사랑인지 아니면 좋아함과 사랑의 중간단계인지 주인공 자체도 분명한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들이 같이 있을 때 즐겁고 행복하다는 게 아닐지.

작중에 낭독되어 작품 전개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 <폴과 비르지니>는 비단 내용상뿐만 아니라 작품 형성의 측면에서도 작가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십대 소년 소녀의 사랑을 그리고 있고, 장소도 프랑스를 떠나 이국적(인도양의 섬과 지중해의 섬)이며 또한 세속문명의 허울을 떨치려고 하는 점도 마찬가지인 동시에 여주인공의 죽음으로 결말을 맺는 점도 그러하다.

주인공의 편력과 두 어린 연인의 슬픈 흔적을 더듬어 보려고 구글 지도로 나폴리와 이스키아섬, 프로치다섬을 마우스로 오르내리고 스크롤하여 줌인 줌아웃을 해보며, 그들의 사랑과 그라지엘라의 넋을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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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4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10.11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호반의 연인 밀레니엄 북스 45
알퐁스 드 라마르틴 지음, 김인환 옮김 / 신원문화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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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세출의 피아니스트로 유명한 프란츠 리스트는 서양 고전음악사에서 이른바 ‘교향시’의 창시자로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그는 10여 편의 교향시를 남겼는데 그 중 제3번 <전주곡>은 동 분야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칭송받는다. 리스트는 이 작품을 라마르틴의 <명상시집> 중 한 시의 일부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했다고 한다. 요지는 인생이란 죽음을 향한 전주곡이라는 것.

작가 라마르틴은 프랑스 낭만주의를 온몸으로 부딪혀나간 시인이다. 그의 인생에서 젊은 시절 풀제 호반의 온천지에서 만난 샤를 부인과의 사랑 체험이 없었다면 그의 여러 시와 소설 작품들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정치인 라마르틴으로만 기억될 터.

이 작품 <호반의 연인>은 자신의 체험담을 짙게 풍기고 있다. 읽다 보면 이것이 소설인지 수기(手記)인지 헷갈릴 정도다. 연상의 유부녀와의 사랑. 어찌 보면 비도덕적이고 타락적인 요소가 강한 관계이다. 하지만 라파엘과 주리[줄리]의 사랑은 세속을 초월하여 범인의 이해를 초월하고 있다. 지고지순한 사랑의 극치!

이성간에 우정이 불가능하며 애정만이 가능하다면, 에로티시즘을 떠나 완전한 플라토닉한 사랑이 가능할까? 이런 의문에 작가는 라파엘과 주리의 사랑을 대답으로 제시한다. 그들의 사랑의 양태가 예사롭지는 않다.

주리는 라파엘보다 연상이며, 나이 많은 남편도 있다. 저명한 학자인 남편은 주리를 보호해주기 위해 부녀 같은 결혼생활을 유지한다. 그러나 젊은 주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녀의 사랑이 아닌 남녀의 사랑. 악화된 건강을 다스리기 위해 요양 온 온천 호반에서 주리가 만난 사람이 라파엘. 주리는 진심으로 라파엘을 사랑하며, 그들의 사랑은 남편도 이해하고 인정한다.

처음부터 둘의 사랑이 육욕을 초월한 것은 아니다. 라파엘은 응당 자연스러운 사랑을 원했으나 주리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욕정을 버리기로 한다. 이러한 종교적 정화 과정(P.95~96)는 문학작품이 아니라 마치 경건한 종교 참회록을 연상시킬 정도다. 그 결과 라파엘은 ‘관능적이고 천한 정욕’을 버리고 ‘신과 그녀가 완전히 하나’가 되는 종교적 행복감을 누린다.(P.99~100) 라파엘의 주리에 대한 사랑과 찬사는 끝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순수한 사랑에 대한 절대적 찬가이다.

한편 주리 또한 라파엘로 인해 크나큰 기쁨과 행복을 누리지만 육신은 나날이 쇠약해진다. 작품 후반부에서는 라파엘에게 건강 우려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쓰는 주리와, 개인과 집안의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지 주리 곁에 머무르려고 애쓰는 라파엘, 이 두 사람의 엇갈린 사랑의 분투가 눈물겹게 펼쳐진다.

연인은 호젓한 둘 만의 공간과 시간을 원한다. 연인 간의 대화를 들어보면 제삼자는 낯간지러울 정도로 사소한 내용이지만 이런 시간과 대화 자체는 연인들의 애정을 강화한다. 마찬가지로 라파엘과 주리가 만나서 하는 행동은 오로지 온갖 소소한 대화뿐이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이것은 매우 중차대하며 행복을 자아낸다.

지고의 사랑은 언제나 해피엔딩과 거리가 멀다. 순수는 오염되기 쉬우며 세월의 때를 타기 마련. 연인의 부부 결합은 로맨스에서 일상으로 이끈다. 따라서 가슴 아픈 이별, 특히 사별(死別)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죽음’이다.

오랜만에 사랑과 순수함이 깃든 글을 읽으니 내 마음조차 한없이 가볍고 투명해진다. 이것이 문학의 힘인가. 세상에 참 사랑이 없다고 믿는 이, 티 없이 깨끗한 사랑을 갈망하는 이라면 한번 읽어봄직한 작품이다.


* <호반의 연인>의 원제에 관한 정보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표지에도 해설에도 인터넷의 온갖 서적 정보를 다 뒤져 보아도. 최종적으로 출판사 문의(가능성은 낮지만...) 또는 번역자 연결(현직에 있지 않다...)에 앞서 혹시나 하고, 영어 번역본(불어는 모르므로...)으로 가능성이 높은 작품의 본문 내용을 검색해 보다가 마침내 원제가 <라파엘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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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4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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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렐리아 - 지만지고전천줄 77
제라르 드 네르발 지음, 이준섭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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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삼독(三讀)이다. 읽을수록 색다른 묘한 작품이다.

처음엔 우려와는 달리 이해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는 무난한 작품으로 판단하였다. 이것은 섣부른 생각임이 재독(再讀)을 하면서 깨닫게 되었으며, 삼독에 이르러서는 더욱 종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이 꿈과 몽상을 이야기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몽환의 안개 속에서 작가가 말하고 싶은 속깊은 내용이 무엇인지 점점 어려워진다.

여기서 작가는 죽음의 임박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죽음을 앞두고 영혼의 자서전을 쓰는 심경으로 네르발은 한줄 한줄 써내려간다. 꿈의 세계가 그러하듯 때로는 전후가 단절되는 곳도 빈번하지만 전체를 관통하는 맥락은 여일하다. 그것은 “광기의 가면을 쓰고 있는 숙명적 진실”(P.67)인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이렇게 토로했나 보다.

“어쨌든 인간의 상상력이 이 세상에서, 또는 저 세상에서 생각해 낸 그 어떤 것도 진실이 아닌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분명히 ‘보았던’ 것을 의심할 수가 없다.” (P.65)

“내가 이해하기로는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존재하며, 다만 부주의나 정신적 무질서가 그에 대한 분명한 관계들을 왜곡시키고 있을 뿐이며,...” (P.135)

네르발의 작품을 일람하면, 그는 진정한 방랑자임을 알게 된다. 현실에서건 아니면 몽상에서건. 그의 육신과 영혼은 정처없이 떠돌아다닌다. 삶이 죽음과 만나는 곳까지.

저승을 목전에 둔 이는 진지한 종교적 반추와 각오를 새기는 경우가 있다. <오렐리아>의 제2부는 사랑과 신앙의 고백과 실현이다. 네르발은 비기독교적 정신의 소유자이며, 여기에서 그리스 로마 문명과 동방 오리엔트의 신비주의 그리고 북유럽의 창세 신화까지 이음매없이 종횡한다. 따라서 문화적 배경이 받쳐주지 않는 경우에 그의 작품을 기저까지 쉽사리 이해하기란 만만한 게 아니다. 제2부에서 네르발은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지만 조금씩 정통 기독교와의 조화를 염두에 두고 있다. 모성회귀(母性回歸)?

모성(母性)이야말로 네르발의 원점이다. 누차 언급하지만 상실한 모성의 갈망은 그의 작품의 추동력이다. 네르발의 영원한 여인상은 모두 모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이시스 여신에게서 이를 찾고 있다.

“나는 마리아와 같고 그대의 어머니와 같으며, 그대가 온갖 모습으로 언제나 사랑한 존재와 역시 같으니라.” (P.107)

이시스 여신은 그에게 시련의 진정한 의의를 밝혀주며, 말미에 와서는 시련은 이제 끝났음을 선언한다(P.125).

그의 심경은 기쁨으로 충만하고 감미로운 기분(P.125)이 되었다. 이제 그는 죽겠다는 결심을 실행에 옮길 수 있게 되었다. 더없이 평온함을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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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4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11.24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불의 딸들
제라르 드 네르발 지음, 이준섭 엮음 / 아르테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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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네르발이 만년에 그의 주요 작품을 집대성한 후 붙인 표제다.

구성은 다음과 같다.

1. 알렉상드르 뒤마에게
2. 앙젤리끄
3. 실비, 발르와의 추억
4. 제미
5. 옥따비
6. 이시스
7. 꼬리야
8. 에밀리
9. 몽상의 시

<불의 딸들>은 1990년대에 김동규 번역판이 출간된 적이 있으나, 완역본으로는 이것이 처음이다. 비상업적인 작품의 완역에 노력을 기울인 역자에게 충심으로 감사한다.

<불의 딸들>은 <오렐리아> 이전의 그의 작품세계를 결산한다. 소설, 희곡, 서신, 시 등 다양한 형식으로 표현되는 네르발의 작품세계가 무지개처럼 찬연하게 펼쳐진다. 모성 상실, 사랑과 실패의 추억, 기독교적 가치관에 대한 거부감, 환상과 몽상에의 집착, 그리고 고향 발르와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 등 작품 속에 내밀하게 표현된 네르발의 다채로운 색채 감상과 분석을 통해서 프리즘을 통과하기 전의 네르발의 종합적이며 근원적인 면모를 그려볼 수 있으면 더욱 기쁠 것이다.

각 수록작의 내용을 간단하게 촌평한다.

<알렉상드르 뒤마에게>는 이 작품집의 머리말에 해당한다. 자신의 정신이상은 예술창작에 무관하며, 오히려 환상과 비이성의 개인적 체험이 자신의 문학에 깊이와 풍요로움을 더할 것이라고 강변한다.

이어지는 작품들의 표제가 모두 여성이름이라는 데 주목하자. 네르발에게 여성은 얼굴도 보지 못한 어머니, 한번 만남으로 영원의 여인이 된 아드리엔느, 그리고 아드리엔느의 아바타인 제니 꼴롱으로 이어진다. 그의 생과 영혼은 상실한 모성과 사랑의 복구에의 갈망으로 목마르다.

<앙젤리끄>는 비소설적 소설이다. 작가는 편집자에게 보내는 서신 형식으로 대혁명 시기의 사제 뷕끄와 백작의 삶과 행적을 추적하고 있다. 오리무중인 그의 자취는 곧이어 그의 고모할머니인 앙젤리끄 드 롱그발에게로 작가와 독자의 관심을 안내한다. 정신적으로 과도하게 순진한 백작의 딸 앙젤리끄와 그를 연모하는 푸주한의 아들 라 꼬르비니에르의 사랑과 도주, 그리고 고난과 슬픔의 결혼생활, 라 꼬르비니에르의 죽음 등 일련의 사건들이 이어진다.

작가는 뷕끄와 사제를 추적하지만 초점은 앙젤리끄에 있다. 앙젤리끄는 네르발의 여인상의 전형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그녀의 애정의 일편단심과 헌신성이 현실 여인과의 사랑에 실패한 작가의 구미를 당겼는지 모르겠다. 내게는 그보다도 오히려 작가의 추적 과정에서 독일에서 파리로, 다시 서서히 발르와 지방으로 이동하는 지리적 변화가 흥미롭다. 그의 다음 작품 <실비>에서 본격적으로 산책하는 상리스, 에르므농빌, 루소의 무덤 등의 발르와 지방의 여러 지명이 스와송, 롱그발 등과 함께 처음으로 등장한다. <앙젤리끄>는 <실비>의 전주곡이다.

<실비, 발르와의 추억>은 이미 삼독(三讀)을 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제미>는 신생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 언제나 고향 발르와(발루아)를 배회하던 네르발이 훌쩍 대륙을 건너뛴 점으로도 알 수 있듯이 오스트리아 작가의 작품을 번안하였다. 가난하지만 생활력이 투철한 아일랜드계 제미가 독일계 자끄와 결혼하여 충실한 생활을 하던 중, 인디언에 납치당한다. 갖은 고난에도 꿋꿋함을 잃지 않은 제미는 틈을 노려 5년 만에 탈출에 성공하여 꿈에 그리던 집에 돌아왔으나, 남편은 재혼을 하였고 아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 갈 곳 없는 그녀는 다시 자신을 납치하였던 인디언 부족에게 돌아가서 자신을 연모하던 추장과 결혼하여 그들을 문명화시킨다.

<옥따비>와 <이시스>는 네르발의 동방여행의 추억과 깊은 관련이 있다. 네르발이 오리엔트 여행 중 머무르던 나폴리에서 겪은 영국여인 옥따비와의 만남을 소재로 나폴리 여인과의 과거 만남을 액자소설 형태로 구성하고 있다. 여인과의 만남과 나폴리 주변의 로마 유적, 특히 이시스 신전의 이교 체험이 <옥따비>, 이시스 여신의 사상과 의례 해설이 <이시스>의 기본 뼈대다. 그리고 두 작품을 잇는 핵심 어구는 ‘이시스’이다.

<꼬리야>는 흥미로운 희극이다. 역시 나폴리를 배경으로 하지만, 여배우 꼬리야를 둘러싼 경쟁자 파비오와 마르셀리 간에 얽힌 삼각관계를 다루고 있어 앞의 작품들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이 작품은 네르발 자신의 연애 추억을 기반으로 삼고 있다. 제니 꼴롱과 꼬리야는 동격의 인물이고, 파비오는 작가 자신의 분신이다. 파비오의 꼬리야 찬미 대사(P.332)는 제니 꼴롱에 대한 네르발 자신의 예찬에 다름 아니다. 그런 면에서 자신에게 여배우만을 사랑하는 것 같다고 파비오를 평하는 꼬리야의 마지막 대사는 제니 꼴롱과 네르발의 결실로 맺지 못한 사랑을 상기해 볼 때 새삼 되새겨봄직하다.

<에밀리>는 다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에밀리가 아니라 전쟁영웅 데로슈 중위이다. 죽음을 무릅쓴 무모한 돌진으로 전사한 데로슈 중위의 행위에 대한 기구한 사연이 뒤얽힌 이야기다. 약혼녀가 자신이 전장에서 총검으로 죽인 독일군 하사관의 딸이라는 것. 곧 결혼하게 될 남자가 아버지를 죽인 철천지원수라는 사실. 이것이 드러난 마당에 사랑과 인륜의 화해할 수 없는 갈등은 데로슈 중위를 자살로 몰고 간다. 작품집에 수록하기 위해 작가가 표제를 수정하여 무리하게 수록한 것이 아닐까 의구심을 갖는다.

<몽상의 시>는 ‘엘 데스디챠도’, ‘미르또’, ‘호루스’, ‘앙떼로스’, ‘델피까’, ‘아르테미스’, ‘감람산의 그리스도’, ‘황금 시’의 8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미 <보헤미아의 작은 성들>에서 한번 읽은 적이 있어 생경하지는 않지만 낯설기는 변함없다. 표제로도 알 수 있듯이 그리스‧로마 신화, 이집트 신화를 제재로 기독교 비판, 이교 정신의 찬양, 현실 탈피, 사랑의 갈구를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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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4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11.19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