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의 시대 - 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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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는 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전작인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와 일맥상통한다. 굶주림의 원인이 식량 부족이라면 증산하면 된다. 기술적 문제인 셈이다. 하지만 전작을 통해 이미 절대적 부족이 아니며, 정치적, 경제적 사안임을 확인하였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는 망언은 굶주림의 본질은 가난임을 모르거나 일부러 외면한다.

 

우리는 흔히 의문을 제기한다. 3세계의 국가들은 왜 자국민이 기아에 허덕이도록 방치하는가? 자신들의 권력과 치부만 중시할 뿐 국민들의 목숨은 하찮게 여기는 봉건적 가치관에 매몰되어 있는가 등등. 저자는 부채의 문제를 지적한다.

 

기아는 부채가 낳은 직접적인 산물이다. 왜냐하면 가난한 나라들은 부채 때문에 농업이나 사회기반 시설, 운송과 유통 등을 위한 설비 건설에 투자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P.116)

 

부채의 일부가 권력층의 부패와 밀접함은 사실이지만 모든 걸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제아무리 썩어빠진 독재자라도 자국의 국부 증대에 무관심하지 않다. 더군다나 피압박을 헤치고 정당한 방식으로 정치권력을 획득한 지도자는 더더욱 그러하다.

 

저자는 별도의 장으로 에티오피아와 브라질의 사례를 자세히 설명한다. 지글러는 여러 혼란과 곤경에도 불구하고 자립을 향한 에티오피아의 사회와 문화의 자발성과 활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은 어떠한가? 야심한 기아 제로 사업은 사실상 실패하였다. 참고로 양국은 모두 부채에 대한 이자와 원금 상환으로 국고가 텅 비어버린 상태다. 다국적 회사들의 이익을 보장하는 브라질의 새 정책에 대해 저자는 부정적 판단을 보류한다. 중환자에게는 치료에 앞서 어쨌든 생명 유지가 우선이니까.

 

저자는 상황의 극적인 개선을 위해 제3세계 국가의 부채를 전면 탕감해주자고 제안한다. 그러면 제1세계 국가의 국민과 기업은 길거리에 나앉지나 않을까하는 우려에 대해 단언한다. 부자는 여전히 부자로 남아있을 거라고. 지글러가 이렇게 부채 문제를 역설하는 이유는 기아 해결을 위한 근원적 접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아는 핵심적 인권의 실현과 맥을 같이한다.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볼 때 이러한 주장에 반대를 할 개인이나 단체는 없을 거라고 믿는다면 순진하다. 신자유주의를 추종하는 월가와 다국적기업은 인권에 그닥 관심이 없다. 3세계 국가의 부채 탕감과 경제 발전은 항구적 경제 착취 체계를 유지하려는 이들로서는 인정할 수 없으리라. 그래서 지글러는 이들을 신흥 봉건제후라고 지칭하며 맹목적 이윤추구에 급급한 이들이 민주주의와 인권을 무시하고 파괴하는 원흉이라고 비판한다.

 

세계화 지상주의자들은 인간들을 착취하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인권을 좋아한다. (P.324)

 

장 지글러의 문장은 뜨거운 열기를 품고 있지만 단단한 대지에 굳게 기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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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와 반지 동화는 내 친구 42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 지음, 이지원 옮김, 안나 센지비 그림 / 논장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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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의 시장>으로 유명한 영국의 문호 새커리가 쓴 동화다. 새커리의 세계로 입문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개인적 심정이다.

 

요정, 착한 왕자와 공주, 못된 왕자와 공주(?), 왕위 찬탈, 마법을 부리는 물건 등 우리가 옛 동화에서 기대할 법한 온갖 요소들이 죄다 등장한다. 동화답게 해피엔딩을 갖추는 미덕도 잊지 않고, 심각 진지하거나 잔인한 장면(사자가 불한당 호기나르모 백작과 간수들을 한입에 먹어 치우는 대목을 작가는 슬그머니 외면한다)에서도 가벼움과 해학미를 동반하여 과연 크리스마스를 위한 용도임을 상기시킨다. 너무 스토리를 옹기종기 다듬어서 산만하고 어수선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장점일지 단점일지 독자에 따라 다른 반응을 보일 것이다.

 

안젤리카 공주와 벌바 왕자는 주변과 세인에 완벽함 그 자체로 비친다. 몸에 지니는 사람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강력한 장미와 반지의 위력이란. 그것을 상실했을 때 그들의 진면모는 과연 어떠한지. 외피만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차별하는 시속에 대한 풍자라고 하겠는데, 오늘날도 별로 다름이 없다. 로잘바 공주와 지글리오 왕자에겐 더는 마법의 도움이 필요 없는데 사랑의 마법은 무엇보다 강력하기 때문일 것이다.

 

옛이야기에서 주인공을 영웅으로 성장시키는 역할을 맡는 빼어난 스승이 등장하기 마련인데, 이 작품에서는 마법의 트렁크가 바보처럼 어리석은 지글리오 왕자를 교육하고 훗날 갑옷 일체도 제공한다. 전쟁 장면에서도 역시 검은 막대 요정의 마법이 힘을 발휘한다. 사람들 마음속에는 초자연적 요소에 대한 환상과 염원이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알게 한다.

 

선남선녀의 결합과 되찾은 왕국이라는 행복한 결말에 맞서 주인공은 마지막 시련을 겪는다. 섣불리 내뱉은 서약이 자신에게 족쇄로 다가와 아름다운 공주 대신 우스꽝스러우며 늙고 추악한 그러패너프 백작 부인과 결혼해야만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 이 대목에서 작가는 노련한 수완을 발휘하여 일찌감치 매설한 복선을 시원스럽게 터뜨린다. 단 한 사람 백작 부인인 젠킨스 부인만 쓰러질 뿐 모두는 환호하고 기쁨에 넘쳐 흐른다. 진정한 결말이자 즐거운 끝맻음.

 

동화에서는 주인공 왕자와 공주가 결혼하고 왕국을 다스리면 말 그대로 모두가 행복해한다. 우리는 여기에 추호도 의심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과연 사실이 그러할까? 지배층에서 내홍이 일고 귀족 간 전투가 벌어지는 치열한 왕위 다툼이 벌어졌다 한들 일반 백성들의 삶에 얼마나한 영향이 있을지 자못 의심스럽다. 역성혁명을 하든 쿠데타가 발생하든 평범한 이들과는 무관한 그들만의 다툼일 뿐이다. 작가는 이 점을 별거 아니듯이 무심히 꼬집는다.

 

하지만 서민들은 이 모든 사건들을 매우 잠잠히 받아들였는데, 왜냐하면 기억하는 한, 지금 파델라 왕 밑에서뿐 아니라 카볼피오레 왕 때도 세금은 똑같이 많이 내고 있었거든요. (P.117)

 

결국 동화는 동화일 뿐이다. 이 작품 역시 벽난로 옆의 팬터마임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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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우는 아이 티스투 길벗어린이 문학
모리스 드뤼옹 지음, 자끌린 뒤엠 그림, 나선희 옮김 / 길벗어린이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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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이의 시각에서 어른들 세상은 참 이해하기 어렵다. 질서를 어기는 사람을 우중충한 감옥에 가둬두면 더 우울하고 나빠질 텐데. 가난한 동네에 사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불치병에 걸려 병원에 누워있는 소녀와 고향을 떠나 동물원에 갇혀 있는 동물들은 어떠하고. 우리들은 오히려 그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인다.

 

꽃들은 사람들에게 큰 기쁨을 주니까, 틀림없이 소녀도 꽃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야. 자라나는 꽃이야말로 아침마다 새롭게 반복되는 수수께끼니까. (P.94)

 

티스투의 풀색 엄지손가락으로 한번 쓱 하면 모두가 밝고 즐겁게 될 텐데. 향기로운 꽃내음을 맡으면서 화를 내거나 화사한 꽃의 자태를 바라보며 기분 나빠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티스투가 학교생활에 적응 못한 연유 또한 그것의 본연의 부자연스러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수업만 하면 그의 왼쪽 눈을 무언가가 콕콕 찌르는 느낌에 눈을 뜰 수 없었으니. 이렇게 이 작품은 어른들이 설정해 놓은 인위적 가치와 세계의 부조리성을 천진한 아이의 시각에서 백일하에 드러내놓는다. 작가의 독특한 해법도 동시에 제시하면서.

 

꽃 전쟁은 티스투가 벌인 최대의 행적이자 전쟁의 모순과 인간의 양면성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사건이다. 석유가 전쟁에 필수적이기에 석유를 갖기 위해 전쟁을 벌인다는 일견 터무니없는 설명은 중동지역을 둘러싼 역사적 분쟁의 핵심을 상기시키기에 충분하다. 하나의 공장에서 만들어진 대포가 친구인 나라와 오랜 단골인 나라에 각각 보내져 상대방을 살상하기 위해 사용되는 동시에 공장은 갑절로 돈을 번다는 아이러니. 날로 팽창하는 군수산업의 규모를 확인해보면 충분하다.

 

꽃 전쟁은 티스투에 의해 촉발되었지만, 비인간적 인간을 향한 자연의 역습이라고 할 만하다. 인간은 소멸해도 자연은 여전할 것이므로.

 

정원사 무스타슈 아저씨의 죽음을 글자 그대로 하늘나라에 간 것으로 받아들이는 티스투. 그는 하늘로 향하기 위해 거대한 나무를 키워낸다. 그리고 쉼 없이 나무를 오르고는 보이지 않는 세계로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티스투는 천사였다! (P.181)

 

감동적인가? 유감스럽지만 나로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여태까지는 흥미로운 동화로서 손색이 없지만, 마지막 장의 전개는 의아스럽기 그지없다.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이 솟은 아무도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나무. 그것은 전적으로 티스투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 티스투는 자신에게 주어진 천부의 재능을 오남용한 셈이다. 자연의 본성을 거스르면서. 조랑말 짐나스틱은 그걸 깨달았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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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 - <미움받을 용기> 기시미 이치로의 아들러 심리학 입문
기시미 이치로 지음, 박재현 옮김 / 살림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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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를 흥미롭게 읽은 나로서는 그 책의 토대가 되었다는 이 책을 건너뛸 수 없었다. 원제는 '아들러 심리학 입문'으로 건조한데, 번역본은 다소 낭만적으로 윤색하였다. 대화체를 채용한 <공저와 구성이 전혀 다른데, 작가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아들러 심리학자 기시미 이치로의 진짜 모습을 접할 수 있다.

 

1부 각 장의 제목이 인상적이다. 미움받을 용기, 평범해질 용기, 행복해질 용기. 아들러 심리학은 용기의 심리학이다.

 

아들러 심리학은 책임을 묻는 엄격한 심리학이자 용기 있게 자신의 과제와 직면하기를 촉구하는 용기의 심리학인 것이다. (P.235)

 

이 책은 입문서이므로 아들러 심리학의 깊숙한 내용을 다루지는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이 고가 후미타케와의 공저에서 이미 소개되었기에 자체로서 새로운 지적 즐거움을 제공하지 않는다. 최초 독자라면 아들러에 입문하는 계기로, 공저의 독자라면 대화체보다는 정리된 서술문으로 재음미하는 기회로 삼으면 좋다. 2부는 인간 아들러를 알 수 있도록 아들러의 생애와 학문 세계에 대한 개요를 담고 있다.

 

아들러는 유독 용기를 강조한다. 환경 또는 성격(라이프스타일)에 굴복하고 안주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자신의 무능력과 실패를 곱씹으며 타자를 원망하고 자위로 일생을 점철할 뿐이다. 행복해지기 위하여 현상을 타개하려면 행동을 해야 하고 그러려면 움직일 수 있는 용기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삶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다. 자신의 삶을 타인의 판단과 인정에 내맡긴다면 진정한 자신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에게 착하고 특별한 누군가로 보이기 위해 항상 눈치 보고 전전긍긍하기를 포기할 때 우리는 비로소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 평범해질 용기이자 미움받을 용기다.

 

아들러 심리학이 개인심리학의 범주에만 머물렀다면 자기계발서와 차별성을 나타내진 못했을 것이다. 아들러는 개인과 개인, 개인과 공동체를 연결하는 자신만의 사상체계를 구축하였다. 그것이 이른바 공동체 감각이다.

 

사회의 부조리에 직면할 때 대다수의 행동 양태는 비슷하다. 나 혼자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으므로 괜한 헛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고 이내 체념하고 만다. 아들러는 다르게 말한다.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누군가 나선다면 동조자가 생길 수 있다. 끝내 혼자 밖에 없어 세상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자기 자신은 변화하게 되므로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저자는 심리학 연구자로서 나름대로 친절하고 부드럽게 아들러를 소개하려고 애쓰지만 베스트 셀러를 읽은 기대와 흥분으로 이 책을 펼친 독자 입장에서는 실망할 수 있음 또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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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림 - 범우 비평판 세계 문학 61-1
크누트 함순 지음, 김남석 옮김 / 범우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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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의 유명한 <절규>라는 그림 속 주인공. 함순의 이 작품 속 화자의 이미지가 묘하게 뭉크와 중첩된다. 눈이 퀭하고 머리칼도 빠져 듬성듬성해지며 뺨도 홀쭉하여 한마디로 앙상한 몰골. 차라리 다큐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아프리카 기아민들의 영상이 더 적나라할 것이다. 지독한 굶주림에도 여기 주인공은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는 차이점만 있을 뿐.

 

내 얼굴이 어찌되었단 말이냐? 정말 나는 죽을 상이란 말인가? 나는 손으로 뺨을 만져 보았다. 말랐다. 마른 것이 당연하였다. 나의 볼은 두 개의 접시를 바닥을 안으로 하게 세워 놓은 것 같았다......나는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말랐을 것이다. 그리고 눈은 머리통 속으로 불쑥 들어가고 있었다. 도대체 내 얼굴 꼴이 어떨까? (P.113)

 

화자는 신문 기고료로 생계를 유지하는 문필가다. 낮은 고료와 불안정한 수입으로 점차 빈곤의 악순환에 빠지는 가운데 인텔리 특유의 오만과 자존을 지키려는 몸부림은 눈물겨움을 넘어 우습기조차 하다. 주인공이 기아에 허덕이면서도 아사에 이르지 않은 것은 순전히 우연과 요행의 덕택이다. 내용만 보면 암울하고 질척거리며 답답하기 그지없을 것만 같지만 의외로 무너지지 않을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따금씩 등장하는 현실과 배치되는 자의식이 빚어내는 엇박자가 빚어내는 어처구니없지만, 다분히 자학적이며 해학적 면모에 기인한다. 초반부의 거지 노인과 동행 장면, 공원 벤치에서 만난 노인과의 거짓말 대화, 잡화점 점원의 실수로 얻게 된 뜻밖의 횡재와 전전긍긍, 하숙집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온갖 비굴함도 의연하게 감수하는 당당함 등

 

1인칭 시점으로 오롯이 진행되는 이 작품에는 별다른 극적인 사건도 인물도 등장하지 않는다. 배고픔에 허덕이는 나와 전혀 무관하게 돌아가는 사회뿐. 작가의 관심은 오로지 화자 자신과 내면으로 향해 있다. 제아무리 부인-화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정하길 한사코 거부한다. 그런 그의 외양은 외부인의 시각에서 볼 때 미쳐가는 존재일 뿐이다-하고 분투해도 극한상황에서 서서히 침몰하는 개인의 자아. 이성과 허위의 외피를 벗어던지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연약하고 비이성적인, 때로는 비겁하기조차 한 인간의 분명한 실체. 작품해설에 따르면 이 소설은 소외된 인간 내면과 심리를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문학적 형상화다.

 

윌라얄리와의 관계는 단색조 같은 작품에 잠시 이채로운 색채를 부여한다. 그녀가 그를 거부한 연유가 그의 미친듯한 모습에 있는지 또는 자신의 객관적 상황을 인정하기 거부하는 그에 대한 실망감인지 알 수 없다. 아니면 그녀가 실제로 그를 사랑했는지조차도 화자뿐만 아니라 독자인 우리도 확신할 수 없다.

 

함순은 나치 독일의 지지와 찬양으로 노년에 명성을 잃고 몰락하고 말았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임에도 한동안 금기시되고 잊혀진 작가가 되고 말았다. <굶주림> 외에 다른 작품들이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것도 근년의 일이다. 나치즘이야말로 인간 이성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고 할 때, 비이성과 광기의 작품을 쓴 작가로서 함순의 성향은 다분히 추론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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