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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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상실의 시대>라는 표제로 유명하여 독자의 선택을 고민케 한다. 원작의 내용에 충실하는 의미에서 원제를 따르는 게 당연하겠지만, 원작의 정신을 반영하는 측면에서는 다른 표제도 충분한 명분을 지닌다. 음악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원제가 비틀즈의 노래라는 사실조차 몰랐으니.

 

이 작품은 당대 국내 젊은 작가들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가 있다. 이후 국내 소설의 경향이 바뀌었다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그럴만하다. 외형상으로나마 독재정치 체제가 무너지기 전까지 우리 문화계와 사상계를 짓눌렀던 억압과 검열의 시대, 민주화라는 거시적 주제 아래서 개인의 소소한 감정을 논하는 것은 사치로서 금기시되었다. 이때 정치와 사회의 현안에는 관심 없이 오롯이 한 개인의 내적 감정에만 충실한 이 작품은 무척이나 신선하였을 테니. 게다가 파격적일 정도로 자유분방한 성적 감정과 표현의 일렁거림은 무언의 도덕규범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던 문학계에 한줄기 서광이었다. 1960년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1980년대 후반에 출간된 이 작품이 현 시점에서도 여전히 새로 우면서도 소설적 재미를 놓치지 않는 연유라고 하겠다.

 

성장소설의 구성을 갖고 있는 이 작품의 이해를 위해서는 1960년대, 특히 1968년의 의미를 살펴봐야 한다. 이미 역사적으로 ‘68혁명으로 정립된 당시의 사회변혁운동을 통해 기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지되던 이념에 기반을 둔 보수적 정치체제를 거부하고 반전, 여성해방, 히피 등 탈권위주의화가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사회변화가 갑작스레 도래한 것은 아니었다. 작중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여러 대중가수들과 함께 유독 두드러진 존재, 비틀즈가 이를 드러낸다. 대중음악계에서 1960년대는 비틀즈의 시대였다. 작가 또한 이들의 음악에 경도되었음을 독자는 쉽사리 알 수 있다.

 

와타나베와 가까운 작중 인물은 모두 사회와 불화다. 기즈키는 물론 그와 와타나베를 연결하던 나오코 역시 정신적 불안정을 끝내 극복하지 못한다. 와타나베는 기즈키, 나오코를 통해 세상의 끈을 연결하고 있다. 기숙사에서도 학교에서도 그는 타인과 어울리기를 거부한다. 나가사와와 미도리를 제외하고는. 나가사와는 솔직하다는 면에서 적어도 위선자는 아니었다. 그들은 남들의 이해를 굳이 바라지 않는다. 세상에 부유하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미도리는 작중에서 유일하게 현실에 기반한 실체적 인물이다. 그녀가 와타나베와 잘 되길 바랄 뿐이다.

 

레이코 씨와 나오코는 생과 사의 반대출구로 나아간다. 레이코 씨는 나오코의 죽음을 계기로 요양원을 떠나 세상에 나갈 용기를 낸다. 나오코와 모든 경험을 공유한 그녀가 세상에서의 첫 선택을 와타나베와 시작함은 일면 자연스럽다. 그녀는 나오코의 분신이자 대역이므로.

 

젊은 영혼의 때 이른 선택, 조숙한 성()의 남용, 비틀즈로 대변되는 당대 대중예술의 적극적 존재감. 과장되고 작위적이지만 한편 선열하고 순수하다. 와타나베는 마지막에 자문한다.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우리는 알고 있다. 와타나베가 상실의 시대를 버텨낼 것이고 세상을 꿋꿋이 살아낼 것임을. 가슴 속에 기즈키와 나오코를 품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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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트라베이스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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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에 따르면 이 작품은 독일어권에서 가장 자주 무대에 올려지는 희곡이라고 한다. 실제 연극으로 보면 이색적이고 독자적 미감을 가졌을지도 모르겠지만 글쎄, 글만으로는 두드러진 감흥을 받기 어렵다.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대충 알만하다.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비인기 악기에 해당하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를 내세워 평범한 소시민의 삶의 양태를 관객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콘트라베이스는 저음역을 담당하는 현악기로 (바이올린과 첼로와는 달리) 대중적 인기가 취약하다. 이 점은 비올라와 유사하지만 그나마 비올라는 실내악에서라도 어울릴 기회가 많다. 콘트라베이스는 주로 오케스트라에서 주선율을 돋보이게 하는 화음을 받쳐주는 보조적 역할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이 일인극의 화자는 일반인들이 콘트라베이스의 진가를 알지 못하는 점을 하소연한다. 그는 이 악기가 오케스트라에서 다른 악기보다 월등하며 중추적이므로 만약 콘트라베이스가 없다면 오케스트라 사운드는 기초부터 무너질 것이라고 강변한다. 그 주장이 일견 타당함에도 독자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화자 자체가 자신의 말에 확신을 부여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율배반적으로 자신의 악기마저 싫어한다.

 

피아노 같은 가구도 아닌데, 좁은 방에서 오며가며 발에 걸리적거리는 못생긴 덩치로 도저히 잊거나 외면하기 어려운 존재감. 처음부터 악기로서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는 사람은 없다면서 누구나 다 사연이 있음을 언급한다. 하물며 이 악기를 주연으로 하는 곡을 쓴 작곡가마저 일류급이 아니라며. 국립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고용이 보장된 자신의 신분을 위안삼지만 혼자 연모하는 성악가가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을까에 회의적이다.

 

이렇게 공연 당일 연주회장으로 출발하기 전 자신의 방. 화자는 맥주를 들이키면서 주목받지 못하는 악기의, 여러 명의 평범한 연주자 중 한 명인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관객에게 토로한다. 그가 자신의 현실에 만족하지 못함은 분명하나 그렇다고 커다란 불만이 있지도 않다. 적어도 세라라는 이름의 소프라노를 알게 되기 전까지는.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싶다. 악기와 오케스트라 내 지위로서는 접근하기 어렵다. 그는 일탈을 꿈꾼다. 공연 도중 여인의 이름을 외쳐 공연을 망쳐 놓는다면. 그녀의 사랑을 얻지는 못할망정, 최소한 그의 이름과 존재를 그녀는 잊지 못할 테니. 파면당하고 연주자로서 경력을 잃는 대가로.

 

독자도 관객도 모두 알고 있다. 물론 화자 자신도 알고 있다. 그가 결코 일탈을 저지르지 못할 것임을. 그것이 소시민의 본분이자 한계이기에. 그는 그저 자그만 자신의 방에서, 맥주를 홀짝이며, (소수의) 관객에게 신세 한탄을 늘어놓을 뿐이다. 아이가 부모에게 투정을 부리듯. 화자와, 일인극을 보러 소극장을 찾는 관객 간에 무슨 차이가 있으랴. 사회 내 별 볼일 없는 소시민으로서 관객과, 오케스트라 내 역시 별 볼일 없는 자신은 같은 처지다. 작품을 통해 화자는 관객에게서, 관객(그리고 독자)은 화자에게서 위안과 위로를 얻는다. 아마도 이것이 이 짤막한 희곡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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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나라 2
임영대 지음 / 새파란상상(파란미디어)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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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한 이순신의 앞날은 명약관화하다. 성공하면 권력을 잡고, 실패하면 역적으로 능지처참을 당할 뿐. 썩어빠진 조정을 갈아엎고 선조를 상왕으로 몰아낸 후 세자를 보위에 올린다는 이순신의 공언. 진정 권력에 욕심이 없기에 가능한 순진한 발상. 조정 측도 그를 따르는 부하장수들도 이를 믿지 못한다. 권력은 나눌 수 없다. 새 군주에게 권력을 돌려주면 이순신 일파가 위험에 빠지고, 이순신이 계속 권력을 지니고 있으면 필연코 군주와 반목할 수밖에 없다.

 

마포나루 전투에서 관군을 격파한 이순신 군은 도성에 입성하고 선조는 또다시 급거 피난길에 오른다. 임진강이 막히자 임진년과 달리 함경도로 발길을 돌리는 임금, 그리고 이를 추격하는 반군. 거사의 성공 여부는 언제 어디서 임금 일행의 신병을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 시점에서 작가는 고민을 했을 것이다. 자체로 진압할 군사력이 부족하여 왜란에는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한 정권, 내란에는 누구에게 손을 벌릴 것인가? 뜻밖에 야인, 즉 여진족을 등장시킨다.

 

왕조 초기부터 북쪽 국경지역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 온 여진족. 내부의 적을 제압하기 위해 외부의 적을 끌어들이는 무리수를 감행한 임금. 한줌의 자존심도, 민족과 국격의 일말의 자부심도, 당연하지만 백성의 고달픔에 대한 눈꼽만큼의 인식도 정권 유지를 위해서는 깡그리 외면 받는다. 그리고 이것이 반군의 세력을 오히려 강화하고 이순신의 분노를 더욱 깊게 하는 촉매 역할을 하고 만다. 작가로서는 당연한 수순이다. 이순신이 주도하는 새 세상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선조 일당은 패망해야 한다. 정도가 문제될 뿐이다.

 

작가는 불가피하지만 다소간 무리한 두 가지 선택을 한다. 먼저 야인들로 하여금 선조와 세자, 그리고 주요 종친을 살해하도록 함으로써 이순신 집권의 최대 난제를 자연스레 해결하게끔 한다. 도덕적, 윤리적 명분을 잃지 않고 내홍의 근원을 제거하며 동시에 이순신의 집권과 개혁의 정당성을 두드러지게 만든다.

 

반군 세력은 일종의 연합군이다. 수군의 이순신과 육군의 배설. 반군 측의 성공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훗날의 목표와 방법론으로 갈등의 개연성은 충분하다. 배설을 페이스메이커 역할에 불과하다. 주인공을 빛내기 위해 적절한 시점에서 무대에서 퇴장해야 하지만 명분과 수단이 훼손돼서는 안 된다. 역시 야인의 손이 적당하다. 나라와 백성의 원수인 이 여진족 군을 함흥 회전에서 격파하여 명분과 실체를 모두 확보하는 대목은 비록 작위적인 설정이지만, 어차피 이 소설 자체가 그러한 법 아니겠는가.

 

배설이, 이원익을 필두로 한 이항복, 이덕형 등의 명신이 이순신을 선택하고 지지한 이유는 분명하다. 자신의 안위와 권력에만 급급한 임금이 아니라 백성을 진정으로 아끼고 그들의 삶을 평안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믿어서다. 배설의 처절한 유언이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순신이 개창한 새 나라는 분명 이를 구현할 것이다. 이순신 생존 시는 물론 잘하면 아들과 손자때까지도 가능할 수 있다. 선조와 인조처럼 혼군(昏君)이 왕위에 있을 때 왜란과 호란이 발발하였음을 기억하라. 왕조 정치의 단점은 임금이 모두 성군일 수 없다는 데 있다. 법과 제도가 아니라 인물 개인에 의존하는 한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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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나라 1
임영대 지음 / 새파란상상(파란미디어)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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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되짚어보면 기대와는 달리 선인, 의인이 승리를 거두지 못하는 사례를 쉽게 목도한다. 굵직한 역사의 변곡점이나 결정적 순간에 선택과 우연이 달리 작용했다면 이후 역사가 어찌 전개되었을까 덧없는 상념에 사로잡힐 때도 많다. 그런 면에서 가상역사소설은 짜릿한 기대감을 안겨준다. 그것을 값싼 감상이라고 치부해버려도 좋다.

 

이 소설의 제재는 너무나도 친숙한 역사상의 위인인 이순신 장군이다. 최후의 전투에서 적탄에 맞아 순사한 구국의 영웅 이미지는 소설과 드라마 등을 통해 많이 희미해졌다. 댓가없는 충성과 애국의 결과는 권력의 견제와 질시를 초래하고, 주변의 모든 이를 살리기 위한 극단적 선택으로 귀결되는 극적 시나리오가 한층 지지를 받고 있다. 만약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살아남고 조정의 부당한 탄압에 궐기하였다면 조선의 역사는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이 소설이 가상으로 써내려가는 지향점이 바로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일 수 있다.

 

역사를 뒤집는 설정이다 보니 응당 허구가 개입할 수밖에 없지만 의외로 당대 역사의 사실에 충실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등장인물과 정세를 실제에 근접하게 구현하기 위한 작가의 수고도 만만치 않았으리라. 역사와 가상의 영역을 넘나드는 작가의 의도에 부응하여 거의 사실에 가까운 추정과 완전한 허구 사이의 짜릿한 줄타기에 몸을 맡기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금부도사와 백성들 간의 팽팽한 대결과 수하 장수들의 거사 여부에 대한 갑론을박이 작품 초반을 이끌어간다면 중반부는 거병한 이순신과 이를 저지하기 위한 전라우수군 및 충청수군과의 해전이 압도적이다. 김억추와 대비되는 충청수사 이시언의 장렬한 선택은 결국 유교적 가치관에서 전형적 사대부의 길이 아닐 수 없다.

 

이 소설에서 이순신과 함께 거병의 한 축을 담당하는 비중 있는 역할을 맡은 이가 뜻밖에도 경상우수사 배설이다. 실제 기록에 따르면 전장에서 달아났다가 후에 추포되어 사형을 당했던 그가 여기에서는 백성의 안위는 털끝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임금과 조정에 극도의 반감을 품고 무리를 모아 역모를 일으키는 강렬한 캐릭터로 부활한다. 한편 선조의 냉혹한 정치인식과 처절한 권력욕은 작중에서도 끊임없이 반복된다. 권력 앞에서는 인륜도 무의미함을 이미 조상들이 왕조 초기에 몸소 입증해보이지 않았던가. 선조는 암군(暗君)은 아니지만 지위불안에 사로잡혀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없는 임금이라고 밖에. 당대의 신하들을 보면 쟁쟁하기 이를 데 없다. 일찍 세상을 뜬 율곡은 그렇다 치고 유성룡,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등 오늘날까지도 명신(名臣)으로 일컬어지는 그들이 있음에도.

 

반군의 전격적인 한강수로 진격으로 혼란에 빠진 관군. 수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강가의 수많은 인가와 창고에 망설임 없이 불을 놓는다. 맹자가 말했다. 인의를 저버리는 군주는 일개 필부에 불과하다고. 흥미진진한 1권은 이런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지옥의 겁화처럼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는 이순신의 눈 속에서도 불꽃이 일렁였다. 모든 것을 태워버릴 것 같은 불꽃이. 그리고 그 불꽃 속에는 새 나라를 만들고 말겠다는 의지가 불타고 있었다. (P.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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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성 탈출
피에르 불 지음, 이원복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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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책을 읽었다. 맞다, 저 유명한 영화 혹성 탈출의 원작 소설이다. 두 편의 영화에 깊은 인상을 받은 나로서는 원작이니깐 한번 읽어보지 하는 가벼운 생각으로 책을 펼쳐들었다. 그리고 소설속 세계에서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었다. 책장을 덮고 나서 겨우 온전히 숨을 쉴 수 있었으나 영화보다 강렬한 결말은 뇌리에 뚜렷이 각인되고 말았다. 원작은 영화와 달리 배경이 미국이 아닌 프랑스라는 점을 제외하면 대체로 비슷하다. 다만 혹성 탈출 사연이 기록된 유리병을 발견한 두 인물은 작중 내용에 당황한 독자에게 쐐기를 박는 작가의 고약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당혹감은 유인원이 지극히 인간다운 반면 인간은 동물과 전적으로 흡사하다는데 있다. 이것이 소로르 행성에서는 명백한 법칙이다. 인간과 유인원의 현재 지위를 바꿔놓으면 모든 게 자연스럽다. 유인원은 언어를 사용하는데 인간은 말을 하지 못한다. 고릴라들의 인간 사냥은 인간들의 동물 사냥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인류의 이익을 위한 동물 실험이 유감스럽지만 불가피하게 받아들여지는 만큼 유인원의 인간 실험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이 과거 법정의 변호사와 검사에게서 유인원을 연상하고, 소로르 증권거래소의 유인원에게서 인간을 떠올리는 것은 양자가 본질에서 동일함을 가리킨다. 윌리스는 자신의 벌거숭이 차림에 당황스럽지만 다른 인간도, 유인원도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인간이 나체 상태라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개나 고양이가 자연의 모습 그대로 행동하는 것처럼 그들에게도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윌리스가 유인원 과학자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라에게 구애 행위를 하는 장면은 그래서 동물적인 동시에 인간스럽다.

 

그렇다. 만물의 영장으로 태어난 나는 노바의 주위를 둥글게 돌기 시작했다. 수백만 년에 걸쳐 가장 우월한 존재로 진화한 나는......탐욕스럽게 나를 관찰하는 이 모든 유인원들 앞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노바 주위를 동물처럼 맴돌며 구애하기 시작했다. (P.103)

 

인간 윌리스는 유인원 사회에 간신히 용납된다. 자기들과 마찬가지로 언어와 지성을 갖춘 존재를 외면하기는 어렵다. 하나의 지성적 인간 개체는 불편하고 낯설지만 어쨌든 무해하며 인간 연구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인간의 수가 점점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그들은 유인원 사회에 잠재적 위협 세력이다. 역지사지하면 당연한 결론에 이른다. 돌연변이 종을 박멸하는 것. 윌리스와 임신한 노라가 소로르를 탈출해야 하는 절박한 사연이다.

 

소로르 행성에서 인간과 유인원의 지위 역전 현상은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 안락과 게으름, 무기력에 허우적대며 두뇌를 쓰지 않는 인류의 미래. 의연하고 굳세게 진화를 거듭하는 유인원과 종의 진화를 거꾸로 한 것처럼 퇴행하는 인류의 대비.

 

이렇게 쉽게 체념하는 무기력한 인류가 이제 주인으로서의 임기를 끝내고 더 뛰어난 다른 종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P.220)

 

인간과 유인원을 현시점에 맞게 인간과 로봇으로 대체하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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